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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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천의무봉의 웃음

 

 

유병록 庾炳鹿

시인.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산문집 『안간힘』 『그립소』 등이 있음.

qudfhrdb@naver.com

 

 

웃을 일 좀처럼 없다. 어제도 오늘도 비극적인 일이 있었는데, 내일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세상살이가 그러한데 그것을 담아낸 문학작품에서 무수한 비극과 만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다. 아무래도 기쁘고 즐거워서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보다는, 아프고 슬퍼서 눈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럼에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고 시나 소설 속에서 살가운 웃음과 만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포기하기 어려운 욕망이다. 인생 도처에 비극이 그득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웃음과의 만남을 바라는 마음은 날로 더 커지는 듯하다. 한번쯤 시원하게 웃고 싶다. 그 웃음으로 잠시나마 고되고 비극적인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다.

 

*

 

그래서였나보다. 그래서 김해자 시인을 만나기 전 새 시집 『니들의 시간』(창비 2023)에 실린 시들을 읽으면서 자꾸만 웃음에 눈길이 갔나보다.

 

고놈 참 야물기도 하지,

도리깨 밑에서 튀어 올라오는 알콩 같은 말

좋아 그럭하면 좋아,

익어가는 청국장 속 짚풀처럼 진득한 말

 

아아 해봐,

아 벌린 입에 살짝 벌어진 연시 넣어주는 단내 나는 말

잔불에 묻어둔 군고구마 향기가 나는

고마워라 참 맛있네,

 

고들빼기와 민들레 씀바귀도 어루만지는

잘 자랐네 이쁘네,

구부려 앉아야 얼굴이 보이는 코딱지풀 같은 말

흰 부추꽃이나 무논 잠시 비껴가는 백로 그림자 같은

—「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부분

 

이전에 출간된 다섯권의 시집을 다시 읽었다. 시인의 초기 시집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웃음이 비로소 네번째 시집 『해자네 점집』(걷는사람 2018)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더니, 『해피랜드』(아시아 2020)를 지나 이번 시집에서는 얼굴을 더 자주 내비치고 있었다. 「이름 없는 조직」에는 과거를 이야기하다가 소년처럼 웃는 “점잖으신 양반”이 등장하고, 「시간 여행: 소파 타도」에는 신산스러운 자신의 삶을 늘어놓으며 웃는 이가 나온다. 그를 보며 웃음이 자신을 들어올린다고, “웃음소리만이 삶”이라고 고백하는 목소리가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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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에 주목해줘서 고마워요. 다들 제가 살아온 경로, 혹은 시적 지향을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비극적인 측면만 얘기하시던데……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있잖아요. 당연히 웃음도 저의 한 부분이겠죠. 사실 제가 원래 잘 웃는 편이에요, 실없이.(웃음)

 

그렇다. 만나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김해자 시인은 잘 웃는다. 돌이켜보니 우리가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도 시인은 환하게 웃었다.

1998년 등단한 시인은 인천과 서울에서 살다가 2008년에 전주로 거처를 옮겼다. 나는 2010년에 등단해서 서울에 살고 있었으니 시인을 만날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그저 시집을 통해서, 그리고 시인과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을 뿐이었다. 시인과 처음 이야기를 나눈 건 2017년이었다. 한국작가회의에서는 연말마다 젊은 작가들이 모여 선배 작가들 중 뛰어난 문학적 성과와 더불어 아름다운 생애를 일구어가는 이에게 시상을 하는데, 이름하여 ‘아름다운 작가상’이다. 그해 수상자로 김해자 시인이 선정되었고, 전화로 수상 소식을 전하면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시인은 상금도 없이 상패 하나가 전부인 상을 받으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번 건넸다. 인사 사이로 따뜻하고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시인은 잘 웃는 사람이었다.

최근 시집으로 올수록 웃음의 빈도가 늘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시인이 오랫동안 웃음을 참아온 건 아닐까. 오래전부터 웃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한참 동안 웃음을 찾아다녔던 건 아닐까. 이제야 웃음이 드러나게 된 까닭은 무엇인지, 그 웃음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궁금했다.

 

*

 

혼자서도 웃을 수 있다. 그렇지만 삼삼오오 모여서 웃어야 비로소 웃음이 완성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해자 시인은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웃는다.

시인의 산문 「넓을 광(廣), 큰 덕(德)에 산다」(『창작과비평』 2022년 가을호)에 잘 소개된 것처럼, 시인은 지금 충남 천안의 광덕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 천안역에서 버스로 40여분 걸리는 데서, 시인의 표현대로 “신화와 전설과 삶의 경계”에 서 있는 맹대열씨 우정인씨 임영자씨 유석문씨 김영자씨 이정희씨 양승분씨 이종관씨 등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광덕으로 이사한 후 이웃과 함께 어울리는 일이 제법 있다보니 그 이야기가 자연스레 시에 등장을 했단다. 이 집 저 집 놀러 가기도 하고, 누가 놀러 오기도 하는데, 밥을 먹으면서 들은 사람들의 사연을 시로 옮기기도 한다. 그들과 함께 웃으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시에 담기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시의 독자로 초대하고자 하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10년째 여기 살면서 자연물과 동네 어른들과 사람들의 말이 시에 등장하게 된 것 같아요. 그전엔 ‘이웃’이라는 실감 혹은 화두가 딱히 없었는데, 어느날부터 시에 고유명사가 등장하더군요. 그리고 농사를 지으니까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시에 동사가 제법 추가되었어요. 내가 날마다 보는 새라든가 달이라든가 부추, 파, 깻잎 같은 작물들도 등장해요. 그것들이 사람들 이야기와 정서에 묻어 들어와 저절로 엮이는 것 같아요. 참, 입말도 제법 구사하게 되었네요. 시에 현장감과 생동감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감자랑 고구마, 옥수수, 콩, 깨, 낫이나 호미와도 친하게 지냅니다. 먹다 남은 작은 감자에 싹이 나서 심었을 뿐인데 여지없이 감자꽃이 피는 걸 보고 처음엔 좀 놀랐습니다. 작년 봄에는 남들보다 한달 가까이 늦었는데 시험 삼아 심어봤더니 얼마나 놀라운지. 궁금해서 손을 흙 속에 넣고 살살 돌려봤더니 글쎄 내 주먹만 한 감자가 나오대요. 좀더 놔두면 더 클 것 같은데 몇 뿌리나 더듬고 말았어요. 호미도 안 쓰고요. 너무 신나서요. 참느라 혼났어요. 감자가 얼마나 이쁘고 포근포근 맛있는지……

 

초기 시에서는 사투리와 입말이 주로 비극성과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면, 최근의 시에서는 그에 더해서 삶의 건강성과 해학성을 보여주기까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여행: 옷장 안에서 야근을」에는 “삐쩍 말라갖고 맨날 기름칠에 땀범벅에 새까마케 눈만 보여 차돌멩이라고” 불리는 “유춘열이라는 사램”의 집에 가서 “잠바때기도 아이고 베개도 아이고, 헤드랜턴 이마빡에 딱 달고설랑 옷장 안에서 전동 타자기를 두드”리던 1987년 6월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냥 상」에서는 “평생 시도 안 읽고 지가 무슨 시 쓰는지도 모르는 냥반들”이 “돈 많이 주면 부담스러워 안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삼백만 주자고, 일체 서류도 받지 말고 아무 이름도 달지 말고 그냥 주자 했다”면서 시인에게 상을 건넨다. 이웃들의 마음을 건네받은 시인은 코가 빨개지고 웃음이 터진다.

 

저는 시가 그리 고상하고 고답적인 특별한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원시부족들이 생활 속에서 주고받던 말에서 비롯되었다 여겨져요. 춤과 노래로 말했다는 원시인의 언어라고도 자주 생각해요. 태아일 적 배 속에서 들은 말이나 어린아이의 옹알이 같은 말이 시랄까. 시는 살아 있는 야생의 말을 찾는 과정 비슷한 거 같아요. 박소란 시인의 어법을 차용하자면 시는 ‘심장에 가까운 말’이죠. 귀가 심장에 붙어서 팔딱거리는 소리를 듣는 말. 그런 점에서 실제 현장에서 민중이 하는 말을 가까이서 듣고 그대로 전하는 게 그 현장을 형상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더군요. 내 감정이나 해석보다 시의 화자, 즉 주인공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낫다 싶을 때가 있죠. 느끼고 판단하는 자는 텍스트 뒤에 숨은 채 그들이 전면에서 말하게 하는 방식이 입말이겠고요.

 

시인의 이웃은 이웃해서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논밭에서 만나는 농작물도, 낫이나 호미도 이웃이다. 그네들 모두가 시에 등장하는데, 아마도 시인이 그 시를 읽어주면 가만히 음미하면서 듣기도 할 것 같다. 논밭에서 함께 웃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들이 이웃의 전부는 아니다. 시인은 젊은 세대들과 만나는 일도 적지 않단다.

 

몇년 사이 30, 40대 친구들과 만나게 되는 경우가 꽤 많아졌네요. 재밌어요. 육체연령은 차이 나지만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글을 읽다보면 후배가 아니에요. 정신연령으로 보자면 친구 이상이죠. 그 친구들의 이야기에서는 수많은 정보와 노래가 축적된 CD나 MP3 같은 게 연상돼요. 나이테만 보면 청년나무인데, 나이테를 자세히 살펴보면 엄청난 양과 질의 잔무늬가 촘촘히 기록되어 있죠. 함부로 남을 재단하지 않고 삶의 이면을 날카롭게 압축해서 보여주는 언어세계를 마주하며 놀라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절로 귀 기울이게 되더군요. 내가 이해 못하는 대목 혹은 언어가 있어도 두세번 음미하면서 그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도 하게 됐어요. 젊은 나무들이 나를 꼰대가 되지 않게 잡아당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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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을 때, 시인은 한동안 궁리한 끝에 기초수급자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했을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과 어울려서 울고 웃으면서 같이 놀았는데, 그게 그래도 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그 자랑스러운 장면은 시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느 땐가 그 여자 기초수급자를 위한 소양 교육이라는 것을 갔다, 시무룩 진짜 수급자처럼 앉아들 있는 통에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매 하나 찍어서 실실 타로 점을 봐주기 시작했다는데, 그렁그렁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고야 말았고 눈물이 강물이 되어 한번 휘몰아 간 뒤에, 지퍼 속에 갇힌 입들이 지퍼를 열고 나와 저도요 저도요 하는 통에 수업을 몽땅 타로 점 봐주는 일로 공치고 말았다는데

쫓겨나고 이혼하고 망하고 언제 바닥치고 손목 긋고 꽁꽁 짜매논 이야기가 술술 쏟아졌다는데, 그라도 지가 글쓰기 선생으로 왔는데요, 오늘 풀어놓으신 야그를요, 고대로 써가 오시믄 사주도 봐드린다카이, 그다음 주 소설 같은 인생 읽어내느라 날밤 새웠다는데

—「해자네 점집」 부분(『해자네 점집』)

 

시인은 그들과 함께 웃고 울었다. 생각해보면 웃음과 울음은 서로 잘 어울린다. 웃음의 반대말은 울음이 아니고, 울음의 반대말은 웃음이 아니다. 웃음과 울음은 나란한 단짝이고, 그들의 반대말은 냉소이거나 무표정일 것이다.

 

아픈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심각함, 비참함, 두려움에 먹히지 않으려고요. 그래서 웃나봐요. 생존형 웃음, 살기 위한 약으로서의 웃음이라고 생각해요. 좌절감과 혐오에 먹혀서 화석처럼 굳어진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웃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살았는데, 아무래도 전염된 것 같아요. 아픈 자리를 웃음이 채웠고, 그것이 나에게 전해졌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쪽 눈에서 눈물이 나고 한쪽 눈에서는 웃음이 터지고. 아픔과 웃음이 공존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요.

 

한쪽 눈에서 눈물이 나고 한쪽 눈에서는 웃음이 터진다니. 그렇게 살아왔다니. 아픔과 웃음이 공존해서 감사하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그러나 시인의 차분하고 단단한 목소리를 듣노라면, 그것은 참이지 않을 리가 없다.

시인은 태를 묻은 신안을 지나서, 학창 시절을 보낸 목포를 지나서, 인천과 서울과 다시 전주를 지나 광덕에 살면서 비로소 웃음과 울음과 이웃하게 된다. 『무화과는 없다』(초판 실천문학사 2001)를 지나서, 『축제』(애지 2007)를 지나서, 『집에 가자』(초판 삶창 2015)를 지나서, 『해자네 점집』을 지나서, 『해피랜드』를 지나서 마침내 이제 『니들의 시간』에 이른 것이다. 웃음과 울음의 공존을 통해서 비로소 세상살이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세계의 전모가 드디어 드러났다고나 할까.

 

*

 

김해자 시인의 시에서 웃음이 흔하게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최근으로 올수록 시인의 시에서 웃음을 찾는 일이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다. 웃을 일이 더 많아졌다고 할 수도 있고, 더 많이 웃으려는 노력으로 보이기도 했다. 여러 비극적인 이야기 사이에서 웃음을 담아낸 시편들은 마치 귀하게 찾아낸 희망처럼 읽히기도 했다. 시세계 전반을 짚어보자면, 비극이 가득함에도 희망을 향해 나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울화통 치밀 때가 많죠. 그래도 역시 희망을 갖게 하는 건 사람이에요. 사람이 제일 커요. 저보다 억울하고 힘들고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생각하면 절망도 사치다 싶고요. 희망은 우리가 찾아가면 만나게 되는 희망봉 같은 건 아닌가봐요. 희망이란 이를 악물고 발굴해내려 노력하는 일종의 투쟁 비슷한 거랄까. 저보다 힘든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버텨내며 뭔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차마 절망할 수가 없어요. 뭐라도 해야지. 그럴 때 힘이 나서, 글을 쓰는 것도 같아요.

 

역시 희망을 갖게 하는 건 사람이라는 말. 아름답게 느껴지는 저 문장을 차분히 풀어헤쳐본다면 어쩌면 이런 속뜻이 차곡차곡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 절망을 선사하는 것도 사람이라고, 시인 역시 사람에게 상처받았다고, 그 상처 때문에 절망했다고, 이러한 과정을 무수히 겪어왔다고.

 

다시 삶으로 복귀하겠다는 농담이란 신음의 뒷면

고통을 잠시 웃겨서라도 살아야겠다는,

그 한방울의 젖은 웃음 위에

나는 돛단배를 띄웠다

말라붙은 바다 위에서 돛이 펄럭거리고

희디흰 한필의 옥양목에서 한없이 풀려 나오는 노래

 

몇조각 남은 갑판에 올라서서 나는 가까스로 노래 부른다

오늘 노래는 액체로 흐르고 아직 부를 노래가 남아

농담처럼 살아남은 나는 신의 음식

신음을 들이켠다 웃으며

—「농담」 부분

 

시인은 산문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아비요 2013)에서 만사를 본인의 탓으로 돌리는 지병이 있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꼭 본인 탓인 것만 같은 병 같지 않은 병이 있다고, 본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본인의 오류인 것만 같다고 쓴 적이 있다. 어쩌면 주변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공감이 그 연유이지 않나 싶었다. 그러한 생각이 시의 근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공감과 관심이 제 시의 뿌리로 여겨진다면 감사한 일이죠. 제가 타인의 일을 온전히 제 일로 받아들이거나 포개지는 못해도, 적어도 삼중 사중 겹쳐지는 교집합 정도는 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니까요. 하지만 ‘만사를 내 탓으로 돌리는 병’은 제가 어린 시절부터 받은 세뇌교육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억울하기도 해요. 비극이 주조를 이루는 인생을 살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참상을 겪은 자들에겐 ‘내 탓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반대의 거울이 되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저는 누구한테 웬만하면 조언 같은 거 안 해요. 위로하려 애쓰지도 않고요. 그냥 들어요. 누군가 아프면 아플수록 저절로 손을 모으고 거기로 기울어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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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고작 몇번 만나봤을 뿐이지만 나는 다르게 말해주고 싶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시인의 덕분일지도 모른다고, 주변 사람들이 환하게 웃는다면 그건 분명히 시인의 덕분일 것이라고,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운이 뿜어져 나온 덕분이라고.

시집과 산문집에서 얼핏 드러나는 모습으로 짐작하자면, 어린 시절의 시인은 믿음직스러운 모범생이면서도 고집이 여간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과연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물었다. 혹시 웃음을 찾아나서는 힘, 희망을 찾아나서는 힘,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는 힘의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믿음직스럽지 않은 모범생이었어요. 공부 머리는 있는데 하는 짓은 좀 이상한 아이. 제가 친한 애들은 학교에서 정학 혹은 근신 받는 노는 애들이고. 제 문학의 시작은 그 친구들 반성문 써주는 일이었어요. 숱하게 친구들 얘기 듣느라 공부할 시간도 많이 뺏겼고요. 재밌는 소설에 빠지면 수업시간에도 무릎에 놓고 몰래 보다가 들켜서 교무실에서 책 들고 서 있는 학생. 성경 끼고 영화 보다 걸려서 가사실 그릇 설거지하고 수업 종료 벨이 울리면 냄비 뚜껑 두드리며 휴식! 하며 웃음으로 저항하는 학생.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선생님이 아예 시인이라고 불렀나봐요.

나중에 시집을 낸 후에 연락이 와서 친구들을 만났는데, 한 친구가 저더러 고등학교 때 엄청 재수 없었다고 하는 거예요. 어느날 제가 스프링 노트를 들고 화장실 앞에서 시를 읽었대요. 45도 각도로 몸을 틀어 다리를 흔들고 중얼거리며 제 흉내를 내는 거예요. 저는 전혀 기억에 없어요. 친구들 말을 들어보니, 하여튼 제가 웃겼대요. 아주 가관이었대요.(웃음)

 

학교 선생님에게 시인이라 불리고, 화장실 앞에서 다리를 흔들면서 시를 읽는 시인의 학창 시절이 눈앞에 그려졌다. 시인은 즐겁게 학창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역시나 환하게 웃어 보였다.

 

*

 

『니들의 시간』에 담긴 시들을 찬찬히 읽노라면 공간은 옆으로 넓어진다. 일상을 넘어, 국경을 넘어, 전지구적으로 뻗어나간다. 시간은 앞뒤로 길어진다. 오래전의 과거부터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로까지 확장된다. 「니들의 시간」에 담긴 이야기에 따르면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니’라 부른다” 하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다 하니, 김해자 시인은 무궁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무수한 ‘니’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셈이다.

 

니라 부르면 니가 나처럼 느껴질까요

내가 니를 어떻게 했는데, 없이

니를 부르면 니가 나와 섞일까요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없이

나의 반대말들로만 이루어진 니들

니는 대체 왜 그래, 없이

—「니들의 시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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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에 담긴 무궁한 시공간 속에서 ‘니’들은 자주 아프고 괴롭고 슬프다. ‘니’들이 웃는 모습은 애써 찾아야 발견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귀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웃음이 시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은데도 꼭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었다. 시인은 인터뷰를 마친 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 나눌 때 자랑스러운 일이 별로 없다고 했는데요. 한가지는 더 있네요. 시 쓴 거요. 시라도 안 썼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때가 있어요. 시만 안 쓰면 제 인생이 널널할 텐데…… 머리도 잘 안 돌아가면서 무슨 시를 쓴다고 이리 끙끙대나 할 때도 가끔 있지만요. 김수영 시인은 ‘시는 나의 닻’이라 했는데, 제게 시는 바늘 같은 겁니다. 보고 들은 여러 조각의 천들이 제 안에 흩어지고 포개지고 널부러져 있는데 시쓰기가 그것을 통합시키는 과정이 된달까. 한조각 한조각 천들을 꿰매어 퀼트를 만드는 것처럼. 그래서 저한테 시는 귀가 심장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게 하는 시금석입니다. 제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소리, 제게 들리는 누군가의 비명 혹은 울음 같은 것들을 방치했으면 아마 이명 때문에 오래전 죽었을 거 같아요. 저 자신부터 어루만져준 시에 항상 감사하게 되네요.

 

시인의 마음속에 담긴 무수한 울음이 한조각 한조각 이어져 웃음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천의무봉의 웃음이라 불러도 좋겠다.(2024.1.17. 창비서교빌딩)

유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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