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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 시 속에서라도

 

 

박상수 朴相守

시인, 문학평론가. 2000년 『동서문학』에서 시, 2004년 『현대문학』에서 평론으로 등단. 시집 『후르츠 캔디 버스』 『숙녀의 기분』, 평론집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등이 있음.

susangpark@hanmail.net

 

 

 

작년 한해를 정리하는 좌담에서 한 시인이 최근 젊은 시인들의 작품 경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충돌과 마찰, 전복 없이 소소하면서 산뜻한 젊은 시들을 좀 읽었는데 젊은 시라면 뭔가 뒤흔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의아했거든요. 번아웃의 일상에서 그런 건 너무 버거운가라는 생각도 했어요.”1 이러한 감상은 다른 시인의 말에서도 표현을 바꾸어 반복된다. “최근 10년 이내에 등장한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춰버린 듯한 ‘못된 화자’의 면모 (…) 왜 이렇게 ‘착한 화자’밖에 없지,라는 불만은 시에서 선하고 옳은 소리만 되풀이되는 양상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못된 화자를 장착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세대의 좁은 소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2 최근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주로 ‘착한 화자’가 두드러지는 현상을 진단한 이 말 속에서도 아쉬움은 묻어난다. 가장 날카롭고 강렬한 문제의식을 장착한 채 전위로서 치열한 전복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젊은 시인들이 오히려 충돌이나 마찰이 없는 소소하고 산뜻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현상에 대한 안타까움 내지 의아함일 텐데 물론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3

나 역시 큰 틀에서 앞선 두 시인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이러한 현상을 이해해보기 위해 글을 쓴 적도 있다. 그때의 초점은 ‘착한 화자’가 아니라 ‘왜소하고 흐릿한 화자’였다. 어떻게 해도 종말을 바꿀 수 없고 자본주의 바깥의 또다른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에서 예민한 젊은 시인들이 품게 되는 공통감각 중 하나가 ‘현실감이 사라지고 자신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감각’일 것이다. 즉 ‘나’는 존재감이 없고 그것은 내 곁의 타인도 마찬가지이며,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이,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감정마저 자기 것이 아니라 남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져서 ‘이미지와 감정에 깊이가 사라지는 어떤 이상한 감각’이 출현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실감(實感)의 무화(無化)’와 ‘자아의 비현실감’이다. 인상적인 것은 어떤 시인들의 작품들은 ‘자아의 비현실감’ 상태를 지나서 ‘자아의 가상화(假像化)’나 ‘자아의 메타화’로 연결되는 경향이 보인다는 점이다. 조해주와 양안다가 자아의 비현실감 쪽이라면 문보영, 변혜지가 자아의 가상화와 메타화를 보여주는 시인들일 것이다. 현실에서 자아의 성장을 위해 무언가를 시도해볼 구체적인 경험의 기회나 가능성이 상당 부분 막혀 있으니 현실감 없이 약화된 자아를 가지고 실감이 흐릿해진 (그럼에도 리셋과 리플레이가 가능한) 가상공간에서 경험치를 축적하며 유희적으로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4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 리는 없다. 또한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는 앞서 언급한 ‘착한 화자’의 보편화를 해명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고려해볼 다양한 맥락들이 더 존재할 것이다. 예를 들어 포스트휴먼의 세계관이 폭넓게 공유되면서 세계 해석의 주체가 더이상 인간일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인식이 인간을 넘어 비인간, 사물들 각자의 존재 의미를 최대한 보장해줘야 한다는 감각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또한 심화되어가는 기후위기의 압력 속에 지구 생태계에 최대한 덜 나쁜 영향을 끼치려는 적극적인 윤리감각이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로 작동하면서 이것이 타인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사려 깊은 거리감을 만들었다는 가설도 가능할 것이다. 아주 현실적으로는 ‘문단 내 성폭력 사태’ 이후 주로 거칠고 예측불가능하며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가차없고 공격적이며 때로 뻔뻔하고 냉혹한 언어 혹은 정동들이 텍스트의 차원을 넘어 현실로 흘러넘쳐 실제 여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자각이 강렬하게 작동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못된 화자’가 일정 정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저‘유해한’ 기질들은 전면적으로 탄핵되고 그런 문학은 차라리 읽지 않겠다는 결심이 마치 ‘공기’처럼 시대의 보편적 윤리감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이 공통감각은 독자들이 적극 관여하여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고 작가들이 실천적으로 수행한 작업물을 통해 재생산되기도 하였으며, 신인상이나 문학상 심사 등의 관문에서 게이트키핑의 결과로 강화되었을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생각해볼 맥락들은 더 많은데, 이 글에서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바로 최근 ‘착한 화자’가 보편화된 데에는 ‘시 속에서라도 예측 가능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싶다’는 욕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시대 우리의 ‘윤리’가 아니라 ‘욕망’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할까.

 

 

민구 『세모 네모 청설모』(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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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등단한 민구의 세번째 시집 『세모 네모 청설모』를 읽다보면 그의 언어가 복잡하지 않고 유머러스하다는 것을 먼저 발견하게 된다. 최근 젊은 시의 산문화 경향에서도 한참 비켜 있으며 행과 연은 정갈하고 그래서 산뜻하게 보인다. 민구의 화자는 작고 볼품없는 ‘나’가 안쓰럽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수용하며 담담히 삶을 이어가고, 이리저리 자신을 쪼개어 가지고 놀기를 선택한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자의식의 과잉이 없다. 자의식이 과잉될 만한 순간에 그는 오히려 청설모처럼 쓰윽 미끄러져 다른 나뭇가지로 살짝 건너간다. 쓸쓸하고 담담한데 자주 웃기고, 웃음 뒤의 페이소스는 진하다. 예를 들어 「우리 사이」와 같은 시를 보자. “우리 사이에/거리가 있었으면 좋겠어//너와 멀어진다면/조금 섭섭하겠지만//(…)//나는 너의 꿈보다 작고/평범한 길을 가길 원해//(…)//이제 거리에 아무도 없겠지/그때 다시 만난다면//두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골목이/우리에게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커다란 개가 사는 집 앞을 지날 때/네가 내 뒤로 숨었으면 좋겠다”. 실패한 연애담을 복기하듯 읽히는 이 작품에서 화자는 “우리 사이에/거리가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말로 궁금증을 자아내며 처음을 연다. 연인 사이 같은데 멀어지기를 바라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하며 따라가다보면 몇연 뒤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난다. “나는 너의 꿈보다 작고/평범한 길을 가길 원해”. 이 문장을 근거로 상상해보자면 아마도 상대방은 화자가 욕심도 없고 꿈도 크지 않으며 너무 평범한 삶을 살아가려는 데 실망한 것으로 보인다. 즉 민구의 시적 화자는 엄청나게 대단한 꿈이나 욕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이어나가려는 사람이다. 이 관계에서 화자가 꿈꾸는 것은 “커다란 개가 사는 집 앞을 지날 때/네가 내 뒤로 숨었으면 좋겠다”는 정도이지만 이 바람조차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잠깐 웃지만 또 쓸쓸해진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소위 애인의 걱정을 덜고 든든한 생계부양자가 되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여기서 오는 페이소스가 민구의 시에 깔려 있다. 누군가의 믿음이나 기대를 자신이 충족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

이것이 ‘불투명한 미래 감각’ 혹은 ‘종말의 미래 감각’과 연동되어 있음은 이제 별로 새로운 지적도 아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이 과정에서 민구의 화자가 격렬한 멜랑콜리로 빠져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실감에서 오는 격렬한 멜랑콜리의 감정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상실감 그 자체에 현혹될 경우, 시적 파토스를 가장 강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주요한 정서적 에너지원이 된다. 그러나 민구는 다르다. 민구의 화자가 “당신을 기다리는 나//오늘도 흐리멍”(「멍」)이라고 말하며 어떤 기대나 열망도 없이 멍하게 앉아 있을 때 이 장면은 일차적으로 웃기면서도 슬프게 다가오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고 왜소한 나를 있는 그대로 견디며 자아의 비대화 같은 것과는 거리를 둔 채 삶을 살아가는 담담하고 효과적인 태도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시인은 뭔가 꽉 조이는 방식이 아니라 풀어놓는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고 시 속에서나마 부담을 덜고 평안하게 존재하기를 선택했다고 할까. 민구는 진정한 애정 없이 자신을 착취하는 타자들이나 번잡한 현실 속에서 혼자 있기를 선택하며, 최대한 담담하고 안정적이면서도 조금 웃긴 사람으로 존재한다. 「혼자」 같은 시에서도 화자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다가 “의자 위에 몸을 두고/다리만 빠져나와서/집으로 걸”어간다. 다리가 집에 돌아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발 닦고, 청소하고, 책상 정리한 뒤 빨래를 너는 일 정도이다. 상상 속에서도 집안일을 하다니. 더욱 인상적인 부분은 “라디오에서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이웃에 해가 되지 않도록/가볍게 춤을 추”는 장면이다. 상상 속에서 춤을 춘다면 그릇 몇개 정도는 깨도 좋고 시끄럽다는 이웃의 민원도 들어볼 만하지 않은가? 거참 되게 신경 쓰이게 하네! 외치면서 바깥을 뛰어다닐 수도 있다. 그런데 화자는 상상임에도 “이웃에 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나에게는 이런 태도가 오히려 자신이 그렇게 존중받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모습처럼 읽힌다. 즉 타인 혹은 이 세계가 함부로 나를 침범하거나 방해하지 않고 예절 바르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까. 내가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으니 우선 나라도 타인과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지켜봐주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이 무해한 화자, 즉 착한 화자의 형상으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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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르보 패르트의 미니멀한 피아노곡을 들으며 함박눈이 차곡차곡 내리는 저녁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황유원 시집을 읽는다. 어쩌면 이렇게 깨끗하고 투명할까. 눈은 백지이기도 하고 순수한 흰색 그 자체이기도 하다. 흰색은 빛으로 변하기도 하고 한없는 침묵으로 바뀌기도 한다. 바로 그때 작은 종이 울리는 듯한 반향이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소리를 따라 이미지를 단속적으로 샘플링하며 눈을 감고 더 멀리 간다. 이물질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겨울의 시린 하늘과 얼어 있는 연못. 어떤 소리와 이미지는 황홀하게 깨끗해서 아무런 설명 없이도 우리를 성스러움에 도달하고 고결한 평화에 다다르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황유원 시집을 통과하면 세속의 번잡함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정갈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2013년에 등단한 황유원의 네번째 시집 『하얀 사슴 연못』은 ‘사운드 몽상가’로 불릴 법한 이 시인의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는 마치 신의 음성을 받아 적는 수도자처럼 가청 주파수 이하의 작은 소리에 집중하고, “필기 소리가 쏟아내는 영 데시벨의/눈사태 속에서/고요한 한장의 시를/받아 적고 있”(「눈사태 연주」)다. 황유원의 화자는 세속의 생활감과 현실감을 적절하게 정화하여 이를 가공된 소리 이미지로 전환한다. 그가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Waterstone’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소란스러운 관객과 거리를 둔 채로 몽상 속에서 어느 “강의 끝자락”에 앉아 “환한 물속을 바라”보고 있을 때(「워터스톤」), 그의 시 안에서 우리는 현실의 잡다한 소음과 거리를 두고 부드럽게 보호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건 사실 그가 그려내는 소리와 이미지들이 편안함과 충족감을 느끼는 쪽으로 산뜻하게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서 황유원의 화자가 가장 격렬해지는 매우 드문 순간은 이런 때이다. “음악이 다 잦아들기도 전에 짝짝짝 박수를 치고/자리에서 일어나 우당탕 밖으로 걸어나가다니/(…)/대체 다들 뭘/어쩌자는 건가”(「평화 여백」). 즉 고요한 침묵의 감응을 깨뜨리는 세속의 소란스러움을 경멸하는 것이다. 화자는 이들과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만의 여백을 찾아 걸어간다. 걸으면서, 비로소 평화를 느낀다. 여기에 「에어플레인 모드」를 겹쳐 읽어볼까. “착각하는 게 좋다/착각은 나의 자유/아마도 내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일 테고/내 멋대로 생각하는 게/생각하지 않아도 생각이 피어오르는 게 좋다/이제 그만 일어나야지/하고 애써 생각하지 않는 게 좋고/더는 가만히 누워 있지 못할 때까지/가만히 누워 있어보는 게 좋다”. 시적 화자는 주말 오후 마루에 누워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비행기가 남겨놓은 굉음이 사라지는 쪽까지 귀를 열고 따라가며 상상을 펼쳐놓는다. 착각이라도 좋다, 아름다움에 도달하고 싶다, 착각을 통해서라도 그곳에 도달하고 싶다,라고 그는 말하는 것 같다. 그가 꾸려나가는 몽상의 사운드 월드에서는 몽상을 방해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자극들—예를 들어 비행기를 모는 기장의 스트레스나 더러운 트레이를 치우는 승무원의 고단함—은 떠올랐다가도 금세 지워진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계몽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이번 시집의 전략이 존재의 소음을 ‘최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화’하는 쪽에 맞춰져 있고, 이를 형상화해내는 “개념적 작업”(‘시인의 말’)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나를 즐겁게 하려고 시를 쓴다. 누가 어디서 내 시를 읽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데, 아마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단 내가 즐거워야 한다. 시를 쓰는 동안만이라도 즐거워야 한다.”5 이 문장은 독립된 한명의 시인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고 다른 맥락으로도 더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나는 여기서 우리 시대 시인들의 욕망을 읽는다.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 시 속에서라도.’ ‘즐겁고 행복하고 싶다, 시 속에서라도.’ 안전과 평화는 못된 화자가 아니라 착한 화자에 어울린다. 비록 현실은 숨 막히고 거칠며 소란스럽고 파괴적이어도 적어도 시 속에서만큼은 다른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결국 민구와 황유원의 작업은 ‘분노’처럼 격렬한 감정을 자극하여 타인의 이목을 끄는 일이 돈이 되는‘주목경제’6 속에서 오히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감정과 감각의 디톡스’를 제안하며 새로운 매력을 만들어내기에 의미가 있다.

 

 

  1. 김경후·권민경·이철주 특별좌담 「다시, 소란스러울 것 없이 다시」, 『현대시』 2023년 12월호, 122면. 김경후 시인의 발언.
  2. 김언·안지영·양순모·오형엽 방담 「지금-여기의 한국 현대시」, 『현대시』 2023년 10월호, 124면. 김언 시인의 발언.
  3. 이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반론은 추후를 기약하기로 한다.
  4. 졸고 「실감의 무화, 버추얼화된 자아와 메타화: 조해주, 양안다, 문보영 시의 감각과 자아 보존 욕망에 대하여」, 『2021년 제22회 젊은평론가 수상작품집』, 역락 2021 참조. 그러나 젊은 시인들의 작품 경향은 이 정도로 축약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종말의 미래’ ‘실감의 무화’를 돌파하는 제각각의 다채로운 응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 역시 추후를 기약하기로 한다.
  5. 황유원 「사운드 시론 스케치」, 『현대시』 2023년 2월호, 287면.
  6. 백승주 『미끄러지는 말들』, 타인의사유 2022, 91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