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대화 | K담론을 모색한다 ④

 

한국사상이란 무엇인가

창비 한국사상선 출간에 부쳐

 

 

백민정 白敏禎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저서 『정약용의 철학』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공저서 『다산 경세학 연구』 『혜강 최한기 연구』 등이 있음.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저서 『한국문학사의 시각』 『실사구시의 한국학』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문명의식과 실학』 『한문서사의 영토』 『21세기에 실학을 읽는다』, 역서 『이조시대 서사시』 『반계수록』, 편서 『세종·정조』 등이 있음.

 

허석 許錫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공저서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편서 『박중빈·송규』 등이 있음.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공저서 『개벽의 사상사』 『포스트휴머니즘의 쟁점들』, 역서 『단일한 근대성』 『아메리카의 망명자』,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황정아 『창작과비평』 창간 60주년인 2026년을 앞두고 기획된 ‘창비 한국사상선’의 1차분 10종이 지난 7월에 출간됐습니다. 이후 2차분 10종(2025년 출간 예정)과 3차분 10종(2026년 출간 예정)까지 총 30종이 발행될 예정인데요. 오늘 대화는 이 사상선 발간을 계기로 한국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마련됐습니다. 얼마 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K문화에 이어서 K문학이 세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이런 성취와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K사상을 이야기하기에도 아주 적절한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상선 작업에 함께하는 분들을 모셨는데, 먼저 본인 소개와 사상선 작업에서 맡은 역할에 대해 간단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임형택 임형택입니다. 한국문학, 특히 한문학을 중심으로 공부해온 사람이지만, 우리 역사와 사상에도 관심을 두고 있고 실학을 중시하는 편입니다. 『창작과비평』 창간 당시에 대한 실감을 가진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는 저뿐인가보네요. 당시 학부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저에게 『창작과비평』 창간호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4·19로 한껏 고조되었다가 5·16군부쿠데타로 짓밟힌 기운을 되살리는 각성제로서의 효과가 있었던 듯합니다. 그 이후 60년 가까이 흐르기까지 독자로서, 편집위원으로서 관여한 처지에서 이 사상선 작업에 참여하게 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백민정 가톨릭대학교 철학과에서 동아시아사상, 한국사상을 강의하며 연구하는 백민정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주로 다산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는데요. 최근에는 19세기 이후 한국근현대 사상의 흐름과 변화에 관심을 두고 공부 중입니다. 창비 한국사상선에서는 2026년 출간될 『정약용』 편을 맡아 준비 중인데요. 이번 작업을 통해 다산학 전후 조선의 유교 전통과 다음 세기 새로운 사상의 모험에 다리를 놓아보고 싶어요.

 

허석 반갑습니다. 저는 원불교 교무이고, 원광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허석입니다. 20세기 한국에서 시작된 원불교 사상을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사상 전반에 대한 공부를 겸하게 되었어요. 한국사상선 1차분 20권 『박중빈·송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의 편저자로 참여한 경험과 그간 한국사상을 공부하며 느낀 바를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정아 오늘 사회를 맡은 저는 영문학자로 출발해서 한국문학 평론활동을 하면서 비평이론과 사상에 대해서도 계속 공부하고 글을 써왔습니다. 2026년 사상선 3차분으로 출간될 『임화·김수영·신동엽』 편을 맡아 현재 열심히 준비 중에 있습니다만 아직 갈 길이 먼 상황입니다.

 

왜 지금 한국사상인가

황정아 창비가 한국사상을 들고 나온 것이 좀 난데없지 않은가 의아하게 느낄 독자들도 계실 듯합니다. 사상선을 기획한 배경과 취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먼저 임형택 선생님께 그간 창비가 한국사상과 관련해서 해왔던 작업을 지켜보고 참여해오신 입장에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임형택 아시다시피 『창작과비평』은 문학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세계사의 진로 가운데서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통찰할 수 있도록 지면을 구성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상사를 포함해 한국학 전반이 다뤄졌고 성과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대표적인 사례로 『창작과비평』 발행 초기 ‘실학의 고전’ 시리즈가 기억나네요. 1967년 여름호부터 1970년 봄호까지 9회에 걸쳐 연재됐는데, 4·19 이후 신세대 소장학 필진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실학연구사에서도 의의가 있던 기획이었습니다. 유수원, 우하영 같은 학자가 이때 새로 소개되었고, 북쪽 학계에서 주목받던 최한기가 남한의 독자들에게 처음 알려지게 됐어요. 앞에 해설이 실리고 뒤에 주요 저작 원전이 번역되어 나오는 체제였는데 이번 사상선도 같은 형식입니다. 말하자면 ‘창비 한국사상선’은 창비가 한국사상사에 지속적으로 보여온 관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창비가 60주년 기획을 하필 한국사상으로 잡은 데는 또다른 까닭이 있습니다. ‘간행의 말’에도 밝혔는데,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현실을 문명적 대전환이 요망되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이 사상사적 거대 과제를 근본적·역사적으로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창비 한국사상선’이 기획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백민정 말씀하신 것처럼 『창작과비평』은 민족문학 담론으로 시작했지만 한국사상의 발신처로도 큰 역할을 해왔거든요. 1960년대 민주화운동과 민족주의 논의가 성행할 때 실학담론을 우리 사회에 널리 소개했고, 1990년대 이후로는 동아시아 담론을 선도하는 중요한 역할도 했죠. 문명적 대전환이 요구되는 시대라는 표현처럼 2020년대 지금 이 복잡하고 위태로운 정치사회적 현실 자체가 우리가 추구할 대안적 가치나 미래의 사상이 무엇인지 답을 요청하는 것 같아요. 실사구시적 문맥에서 한국사상이란 무엇인가를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하는 시대인 거죠. K문학이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엄청난 쾌거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에 견줄 수 있는 K사상이란 과연 무엇인지 궁금증이 듭니다. 창비 한국사상선 기획의 시대적 문제의식은 이런 과제에 답하는 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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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석 창비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 발신해온 담론과 기획들, 예컨대 변혁적 중도주의라든가 분단체제론, 근대 이중과제론 등은 현실을 냉철하고 적실하게 파악하고 새로운 삶의 비전을 제시하려는 노력이었다고 보여요. 특히 외국에서 따온 이론이 아니라 한반도 현실에서 문제를 포착하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마련한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이론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한국사상선은 창비가 진행해온 이러한 사상작업의 뿌리를 찾는 시도라고도 볼 수 있겠고요. 제가 사상선 작업을 하면서 화두로 삼았던 것은, 원불교를 포함한 한국사상이 오늘의 지구적 위기와 한반도에 얽힌 갈등을 극복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였어요. 이 화두는 사상선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문명의 비전을 새롭게 설계할 상상력이 필요하고 그걸 실천할 구체적인 길도 모색해야 하잖아요. 이 시리즈가 그 지침서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정아 저는 주로 서구담론을 비판적으로 독해하고 논평해오던 입장인데요. 20세기 후반 이래 계속되어온 흐름이라 보는데 서구의 변혁담론이 상당히 위축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자본주의가 주어진 현실의 전부라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득세하면서 전환을 도모할 동력을 잃어온 거지요. 파국이나 종말에 대한 불안감을 가속하거나, 아니면 망할 때 망하더라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하자는 윤리적 호소나 결단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다보니 서구이론을 파고든다고 무슨 돌파구가 나올까 하는 회의가 점점 더 들어요. 그런데 우리 내부의 진보적인 담론들도, 비판이야말로 ‘진보적’이라는 통념에 매여 비판하는 것만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저항과 대항이 아니라 이행을 실제로 뒷받침해주는 사상이 필요합니다. 제 안의 이런 느낌이 사상을 향한 열망이 아닐까 싶은데 그 열망을 좀더 본격적으로 붙잡고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상선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실천성과 경세의식에서 찾는

한국사상의 독창성

황정아 백민정 선생님께서 K문화, K문학에 이어서 이제 K사상의 정체성을 물을 때가 됐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한국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한국사상을 말하는 순간 아마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될 질문이지 싶어요. 한국에 고유한 사상이 있기는 하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고 한국사상이 있다면 그 핵심이나 특징을 질문하기도 하겠고요. 어쩌면 가장 나중에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앞질러 받는 셈인데 그럴 때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백민정 2001년 프랑스 철학자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연설을 했습니다(Carine Defoort and Zhaoguang Ge, “Editors’ Introduction: The Legitimacy of Chinese Philosophy,” Contemporary Chinese Thought, vol. 37, 2005). 그런데 그 강연의 요지가 중국에는 철학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철학이 뭐기에 중국에, 동아시아에 철학이 없다고 하는가부터 시작해 유교 같은 중국의 전통사상을 철학이라고 부르는 게 타당한가 아닌가 하는 비판까지 논란이 꽤 많았는데요. 서양철학의 모델은 수학이나 논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고 명제를 검증하고 반증하는 정합성과 논리성에 기초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철학의 개념과 범주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동아시아나 중국에 철학이 없다고 말하는 건 우리 입장에서는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문제예요. 철학이 더 좁은 표현이지만 한국사상이라고 했을 때도 여전히 문제가 남습니다. 한국에 사상이 있다고 하면 중국의 사상과 어떻게 다른지 물어볼 수 있죠. 예를 들어 우리가 유학(유교), 도교, 불교 중에서 어떤 한가지 사상을 말하거나 또는 유불도(儒佛道)의 회통을 말하면, 중국의 신유학자나 불교연구자 입장에서는 그것을 한국 고유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한국사상의 정체성을 논의할 때 서양철학·사상과의 구별, 중국사상과의 관계 문제가 제기되고, 한국사상이 지닌 고유성이 뭐고 그 실체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딸려나옵니다.

 

임형택

임형택

임형택 저는 중국이나 동양의 사상전통을 두고 서구적인 의미의 철학 개념에 얽매일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다보면 서구중심주의에 말려들게 될 테니까요. 우리가 이번 기획을 ‘한국철학’이 아니라 ‘한국사상’이라고 한 데는 철학 개념에 굳이 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거든요. 한국사상이 무엇이냐를 굳이 규정하려고 덤벼들 건 없지만 한번쯤은 언급해두는 편이 좋겠네요.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국가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온 역사가 오래돼서 자연스럽게 모종의 사유와 사상이 생겼고,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문자를 이용해 문학을 창조하고 사상도 표현해왔잖아요. 한국사상선에서는 이걸 폭넓게 한국사상이라는 범주로 파악해 그중 특히 뚜렷한 존재를 사상가로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황정아 한국사상이라고 칭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린 생각들, 사유들의 정수라고 보면 되지 않겠냐는 말씀이시군요. 서구사상이나 중국사상과의 차별성 문제에 덧붙여서 말씀해주실 게 있을까요?

 

백민정 한국사상의 특징을 얘기할 때 유불도 회통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한국사상선 3권 『김시습·서경덕: 조선사상의 새 지평』 편에서 편저자 박희병 선생은 김시습(金時習)이 유불도를 회통했다고 표현하는 건 부적절하다며 ‘경계인’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노장사상을 비판했고, 유교와 불교를 회통하기보다는 그 사이에서 심층적인 비판의식을 발전시켰다는 거죠. 한국에도 유불도 사상이 있었고 19세기 말 이후 서양학문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여러 사유를 회통했다기보다는 어떤 사유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계속 사상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역동적 흐름 속에 놓여 있었다고 봐요. 마치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처럼요. 그런 상황에서 지식인들이 구현해낸 결과물이 유불도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형성되었던 거죠. 제가 최근에 연구한 전병훈(全秉薰)이라는 인물은 조선후기 유교 관료이면서 도교의 내단 수련을 했고 서양학문을 공부했는데요, 이 사람이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민(民)을 편안히 살게 하려는 유교적 안민론이었거든요. 서양철학과 비교하면 한국의 지식인들은 전통적으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윤리적·도덕적으로 변화된 성품을 통해서 세상의 절박한 문제에 답변하고 변혁할 힘을 주는 것이야말로 사상이나 학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구세(救世)의식, 경세(經世)적 문제의식이 한국사상의 중요한 특징이고, 그 성과를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 사상의 차별점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황정아 결과적으로 유불도 회통처럼 보이는 성과가 나왔더라도 그 자체보다 이 회통을 만들어낸 문제의식, 실천성이라는 데 더 주목하고 그걸 규명해야 하는 거네요.

 

허석

허석

허석 출간된 한국사상선 10종을 쭉 읽어보니 이 땅의 사상이 역사적 변곡점마다 문명에 대한 새롭고 근본적인 통찰을 보여주었고 실천까지 이어지게 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조선 건국에도, 동학에도 우리의 독창성이 보여요. 20세기 종교사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새로운 문명에 대응한다는 전환기의 문제의식이 공통적으로 들어 있어요. 이 문제의식으로 철저하게 싸워내서 그 싸움의 결과로 새로운 문명의 대안을 제시하고 ‘개벽’이라는 사상의 흐름으로 이은 것이 동학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 개벽사상의 핵심이 ‘후천개벽’인데, ‘후천’이나 ‘개벽’ 자체는 중국에도 오래전부터 있던 개념이에요. 그런데 20세기에서야 후천개벽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대에 이르러 서구문명의 식민지성이나 폭력성에 맞서고,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대종사 대에 자본주의와 전면 대결한 결과거든요. 종교사에서 이런 실천적이고도 대안문명적인 사상이 나왔다는 것이 우리 한국사상의 정체성과 이어지는 특징이 아닐까 합니다.

 

임형택 우리가 한국사상을 해석할 때 어떤 시각과 방법론을 견지해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한국사상이 중국과 다르다는 차별성, 우리만의 독자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중국학자들에게서도 너희 나라에 무슨 차별성이 있느냐, 독자성이 무어 있느냐는 지적을 허다히 받고요. 그런데 저는 한국만의 고유한 것을 찾는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봅니다. 생각해보세요. 역사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이 한자·유교 문화권을 형성해 근대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이 오랜 기간 여기 속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더구나 지리적으로 중심부에 딱 붙어 있었어요. 따라서 생활양식이나 사회제도 전반에 걸쳐서뿐 아니라 사유형식도 유사했던 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한자·유교 문화권을 바라볼 때 상동성 가운데 상이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한 환경과 현실이 다르므로 표출된 결과 또한 달랐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이 서로 같지 않고 중국 내에서도 여러모로 다르고요.

 

백민정

백민정

백민정 상동점도 있고 상이점도 있다는 대원칙에는 아마 다들 공감하실 거예요. 임형택 선생님께서 조선 유학자들이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처럼 마음 개념이나 감정의 성격을 두고 100여년 이상 다퉈왔다는 점이 동시대 명나라와 대비해서 상당히 큰 차이라고 보셨잖아요(임형택 「퇴계학의 계승 양상과 실학」, 『국학연구』 23호, 2013). 한국사상선 5권 『이황: 조선 유학의 분수령』의 편저자 이봉규 선생도 비슷한 문제제기를 했어요.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기 승상제가 폐지되면서 황제와 환관 중심의 전제주의가 발달했고, 영락제(永樂帝)가 황위를 찬탈한 후에 저항하던 지식인 방효유(方孝孺)의 구족을 멸했던 것처럼 수많은 지식인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죠. 지식인들의 자율성, 주체성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후 스(胡適) 같은 현대 연구자는 ‘방효유 이후 중국에는 독서종자(讀書種子)가 끊겼다’고까지 얘기했는데, 명청대 이후 군주의 폭정에 저항한 지식인 사례가 거의 없었던 데서 나온 말이에요. 이에 비해 조선은 문인 지식인인 사대부들이 정치의 주인이었고 주체적 자의식이 강했거든요. 사단칠정 논쟁도 조선 사대부들의 사상적 자율성, 도덕적 주체성을 정립하는 중요한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음이 도덕적 주체가 되려면 강상윤리(綱常倫理)에 억압되는 게 아니라 자유로워야 하잖아요. 그리고 이런 도덕적 자율성과 주체성이 정치적 자유나 주체성에 선행되어야 하고요.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정치적인 권위와 힘을 얻기 위해서도 도덕성 문제를 새로 정립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경우도 인간이 자율적이고 도덕적인 주체로 정립되려면 스스로 선택해서 행위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는데요. 조선 사대부 유자로서 주체성에 대한 지적 고민이 깊었다고 봐요.

 

황정아

황정아

황정아 임형택 선생님께서 독자성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타당한 지적을 해주셨지만 기왕 차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김에 독자적인 ‘성취’, 또는 성취의 ‘독자성’이라는 면도 짚어보면 어떨까요? 사실 고유성이라는 것이 고유하게 나쁜 것이나 고유하게 평범한 것이 아니라 고유하게 이룩한 좋은 것하고 이어질 수밖에 없겠는데요, 한국사상의 핵심이 되는 뛰어난 성취에 고유성이 있어야 한국사상을 더 힘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가령 실학을 독자적인 사상적 성취로 강조한 흐름도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임형택 실학도 한국의 독자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렇게 보려는 태도에도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실학은 17세기 이래 동아시아 전환기, 한중일 세 나라에 공통적으로 성립하고 발전했던 학술사상의 경향입니다. 그런데 삼국에 공존했던 실학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역시 상동성과 함께 상이성이 있었어요. 백민정 선생이 말씀하신 후 스의 ‘방효유 이후 독서종자가 없어졌다’는 발언과 유사하게, 중국의 근대 사상가 량 치차오(梁啓超)는 “청대의 학문은 ‘실(實)’이라는 한 글자로 일어났는데 ‘실’을 관철하지 못해서 쇠퇴하게 되었다”(『청대학술개론』)고 지적합니다. 정복국가였던 청이 한족 관료층을 무섭게 통제해 사상을 강력히 탄압했던 탓입니다. 그래서 중국실학의 초창기 학자들은 비판적 개혁정신으로 신학풍을 창출했지만 이를 계승한 후대 학자들은 형식적인 고증학에 빠져들고 말았지요. 요는 국정제도, 즉 경세학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고, 량 치차오의 말은 이에 대한 반성입니다. 반면 한국실학은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으로부터 성호(星湖) 이익(李瀷),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져서 경세학이 실학의 중심위치에 놓입니다. 일본은 실학이라 해도 원체 성격이 다르지만 더구나 경세학은 지식인들의 사회적 위상 때문에 생각할 수조차 없었지요. 경세학 중심으로 실학이 발전한 것이 한국실학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백민정 저도 경세론이 굉장히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에 경세론이 부재한 상황에서 다산이 『경세유표』나 『목민심서』 같은 정합적이고 체계적인 경세론을 낸 것만으로도 상당한 학문적·정치적 공적이고요. 중국의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도 살펴볼 수 있어요. 다산이 청대 고증학자들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에 대한 비판적 논설을 많이 남겼고, 고증학자로서나 실학자로서나 자기만의 해석도 있습니다. 가령 『상서』에 ‘홍범구주(洪範九疇)’라는 아홉가지 정치방략이 나오는데, 다산은 이걸 하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유서 깊은 정치강령이라고 봤어요. 그리고 이 강령을 기자조선이 평양에 도읍할 때 평양성을 축성한 아홉가지 원리로 연결하는가 하면 정전제의 모델로 독특하게 해석하죠. 『주례』의 육향제(六鄕制)도 자기 관점으로 풀이해서 조선의 수도와 지방행정의 원리로 재구성하고요. 다산이 가져오는 텍스트 자체는 중국 고대의 것이니까 다산이 말하는 국가질서나 정치방략에는 유교 문명국가의 정치사상의 보편성이 있어요. 동시에 그 사상을 구현하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치적 문제의식이 반영되기 때문에 고유성도 있는 거죠. 이렇게 다산 사상에는 보편성과 고유성 두 맥락이 함께 존재하고 우리는 한국사상의 특징으로서 그런 점을 주목해서 발굴할 필요가 있습니다.

 

황정아 실학으로 분류되는 우리 사상의 성취가 경세론적 성격이 강한 데서 나온다는 말씀은 앞서 허석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근대전환기 종교사상이 보여준 독창성과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허석 한국사상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민이고, 지금까지도 이어오는 핵심이에요. 조선은 강한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사상적으로는 지식인이나 왕의 위민(爲民)정신, 민본 중심의 정치철학, 정치시스템, 사회시스템을 만들려고 했어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건 실질적으로 민중의 저력을 크게 향상시켰고, 이황(李滉) 같은 지식인들이 심학(心學)이나 리발(理發) 같은 상세한 논의를 하면서 진실로 의도했던 바는 그런 이념을 이념으로만 두지 않고 실천을 통해서 민중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동학을 비롯한 한국 개벽종교에 와서는 민중성이 강하게 작용하는데, 조선의 수직적인 민본이 수평적인 민본으로 한단계 도약했다고 보고요. 다만 수평적인 민본주의라고 할 때도 민중 한명 한명의 됨됨이, 즉 마음공부가 바탕이 되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또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 점에서 원불교가 후천개벽과 불법(佛法)의 만남을 통해 강력한 민중성을 기반으로 하되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공부길을 제시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황정아 경세라는 사상적 실천성의 출발점이자 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민을 향한 태도였다는 말씀이군요. 사상에서 ‘마음’이라는 차원을 생각해야 할 이유도 언급하신 셈인데 마음공부에 대해서도 간단히 덧붙여주시죠.

 

허석 마음공부를 삼학(三學), 즉 세가지 수행법이라고 하는데요. 전통불교에서의 계(戒)·정(定)·혜(慧) 삼학은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맑혀서 지혜의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고, 주로 출가한 이들이 전문적으로 하는 공부이죠. 그런데 원불교에서는 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의 삼학을 말하고요, 그 내용도 다릅니다. 수양은 마음을 맑히는 일심 공부라 할 수 있고, 사리연구부터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지혜뿐 아니라 그 일 그 일에서 알음알이 얻는 공부를 병진하게 해요. 그리고 작업취사를 수행의 결실로 여기는데, 이 취사공부는 매사 정의를 실행하고 불의를 제거하는 실천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원불교의 삼학은 실생활 속에서 하는 공부예요. 재가와 출가의 구분이나 심지어 원불교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고 하면 좋은 공부법인 거죠. 한마디로 마음공부의 민주화를 추구한 셈인데요. 이렇게 한국사상이 늘 민중의 저력을 중시하고 그걸 키우는 데 기여하려 했던 점이야말로 우리 사상의 중요한 특징이에요. 이러한 성격이 3·1운동이나 오늘날 촛불혁명까지 이어졌고, 이게 바로 한국사상이 역사에 기여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정아 한국사상의 고유성과 관련해서 이야기해주신 실천성, 경세, 민본 같은 키워드들을 들으니 창비가 강조해온 ‘나라다운 나라만들기’라는 표현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이때의 ‘나라만들기’가 서구식 근대국가 건설,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과는 다른 프레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이게 무슨 나라냐’고 개탄할 때의 나라, 제대로 된 나라가 뭐냐고 할 때의 그 나라에 닿아 있는 문제의식인 거죠. 국가나 민족이라는 범주에 걸쳐 있지만 ‘나라다운’이나 ‘제대로 된’이라는 차원, 다시 말해 보편이나 진리의 추구를 함축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라만들기 자체가 사상적 추구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추구가 한국사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굳이 의식하지 않고도 사실상 그런 추구에 참여하는 것이고요. 지금까지 살펴본 K사상의 정체성이나 고유한 성취에 대한 물음은 개별 사상가를 깊이있게 들여다보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더 자연스럽게 답해지거나 해소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창비 한국사상선 구성의 특징과 의미

황정아 창비 한국사상선이 1권 『정도전: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이익주 편저), 2권 『세종·정조: 유교 문명국의 두 군주』(임형택 편저)로 유교적인 나라만들기의 사상가들로 시작되는 점은 이 사상선이 한국사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드러냅니다. 또다른 특징으로는 종교사상, 특히 개벽사상이 중심에 배치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는데요. 앞서 근대전환기 한국에서 종교사상이 굉장히 독특한 방식으로 개화됐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개화한 종교사상이 오늘날 전통적인 유교보다 더 많은 오해를 사면서 좀처럼 사상자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허석 물론 모든 것이 다 합리화될 수는 없지만 역사적 맥락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종교적인 타락이 있었다고 하면 그 타락이나 왜곡이 식민지시대에 일어났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공정한 판단이 가능하겠습니다. 그 이후 남북이 분단되고 미국 중심의 나라가 만들어지면서 한국 종교계가 보수화된 측면 역시 함께 살펴봐야 하고요. 사실 소태산 대종사 당시에도 신흥종교들이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어요. 그래서 어느 제자가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선생에 대해 대종사께 질문을 해요. 증산 선생이 광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데 그분도 개벽의 흐름 속에 들어가냐고요. 그러니까 대종사께서 그분은 ‘신인(神人)’이고 그분을 인정할 만한 사람이 인정하면 된다고 말씀하거든요. 그 당시 증산의 후계라든지 개벽사상의 일부가 일으킨 사회현상이 있다면 증산이 처했던, 조직을 만들 수 없었던 시대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겁니다. 동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동학이 조직을 만들어서 활동했지만 그 조직은 동학혁명과 3·1운동을 지나면서 처참하게 무너졌거든요.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사상의 흐름을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 맥락과 시대상황을 밝혀주는 한국사상선 작업이 굉장히 의미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다만 근대전환기 한국종교 중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친일에 가담하지도 않으면서, 민중과 민족의 현실에 공헌한 단체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온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임형택 종교가 정치적으로 탄압받거나 사회적으로 왜곡되는 현상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를 유발합니다. 강증산의 경우 그의 사후에 여러 교파가 나왔고 그중 사교(邪敎)의 성격을 띠었던 것도 없지 않았다고 봐요. 하지만 증산교의 한 교파 차천자교(車天子敎)처럼 일제 식민지권력에 의해 위험시되어 사교집단으로 몰리고 물리적으로 제거된 경우도 있었던 듯합니다. 서양의 학술과 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처음 종교로 운동하기 시작한 건 정조 때입니다. 천주교가 이단이라고 박해받았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그런데 당쟁의 대결과정에서 적대자를 공격하는 무기로 이것을 이용합니다. 주류세력인 노론은 ‘사악한 천주교에 선비들이 열에 여덟아홉은 감염되었다’며 문제를 침소봉대하여 분위기를 조성하고 반대편을 마구 공격합니다. ‘벽위(闢衛)’의 논리지요. 이 벽위의 수구적 이데올로기로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제압했지만 서양의 학술까지 사악한 것으로 취급하여 결국 국가 자체가 폐쇄적으로 변하고 맙니다. 지금 성황을 이루는 기독교를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종교 역시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타락할 수밖에 없고,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데 종교가 부채질하는 면도 다분히 있습니다. 눈앞에서 늘 경험하는 일이므로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황정아 기독교 역시 역사적으로 여러 심각한 현실문제들과 얽혀 있었지만 서양의 이론가와 사상가들이 얼마나 기독교를 열렬히 재해석하고 거기서 뭔가를 찾아내고자 노력했는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종교사상을 비롯해 한국사상을 재해석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점을 더 반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백민정 저도 재해석 노력을 강조하고 싶어요. 식민지시기 신흥종교가 왜곡된 문제는 편저자 박맹수 선생이 사상선 16권 『최제우·최시형·강일순: 개벽 세상을 꿈꾸다』 해제에 자세히 쓰기도 했는데요. 1930년대 총독부가 증산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하고 조사했을 때 그 계열이 이미 10여개로 분열됐고, 1980년대 한국 신종교 실태조사 보고서에서는 43개 교파가 조사되었다고 해요. 증산교 계열에서 강증산을 상제 혹은 천사(天師)라고 부르고 제자들은 그의 종교적 권위를 더 과장해서 신비화하고 확대해석한 것 같고, 그래서 시민들에게 사이비종교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요. 그런데 책에도 나오지만 증산은 어렸을 때부터 동학농민전쟁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겪었어요. 증산이 가장 중시했던 게 ‘해원공사(解寃公事)’, 즉 민중의 원망과 뼈아픈 고통을 해소하는 거였잖아요. 청춘과부들의 개가를 허용하는 공사를 후천개벽 오만년 첫 공사라고 중시했고요. 원불교도 마찬가지지만 여성들의 권익, 남녀동권의식을 강조한 건 굉장히 중요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상제의 힘을 빌렸다, 내가 곧 상제다라고 한 발언들을 하나하나 꼬투리 잡아 비판하기보다는 당시 역사의 맥락에서 민중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여성과 약자들의 질곡을 풀어주려 한 노력을 새롭게 평가하고 재해석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했던 연구자와 지식인들의 책임 방기가 오히려 지금 같은 왜곡된 인식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 게 아닌가 싶고요.

 

황정아 여러 선생님들 말씀대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의미를 발굴하는 노력이 중요하고, 현재 남아 있는 이미지나 흔적으로 과거의 사상을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 사상이 없다는 인식으로 빠지거나, 한국사상을 탐구하고 이해할 기회나 의지가 황폐화되지 않도록 우리가 좀더 적극적으로 한국사상의 면모를 살펴서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창비 한국사상선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종교인과 마찬가지로 그간 사상가로 좀처럼 분류되지 않던 여성과 문인, 정치인들을 포함한 점을 들고 싶어요. 선집이라는 형식은 어쩔 수 없이 ‘정전 만들기’라는 면이 부각될 우려가 있는데 창비 한국사상선은 이렇게 사상이나 사상가에 대한 통념을 바꾸고자 했다는 점에서 ‘정전 파괴’ 정신도 함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인 편을 담당한 입장에서 한 말씀 덧붙이자면, 근대 이전의 문학이 어떤 것이었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때는 문인이 곧 사상가이고 사상가가 문인이기도 하다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어요. 근대 이후 이런 생각이 흐려지기는 했어도 오늘날까지 뛰어난 문학은 언제나 그 자체로 독자적인 사상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K문학과 K사상은 늘 서로 공명해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창비 한국사상선 각권의

독서경험과 의의

황정아 이번 사상선의 각권을 집필하고 읽어보신 경험을 두루 얘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1권 『정도전』 편부터 재미있었어요. 보통은 세력관계가 먼저 바뀌고, 그래서 왕조가 바뀌고, 그제야 이데올로기를 마련하고 왕조 변화의 정당성을 찾잖아요. 여기에 비해 조선이라는 나라는 강한 이념과 사상이 먼저 존재했고 그게 추동이 돼서 나라가 만들어졌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 아니었나 합니다. 세부적인 사항까지 얼마나 치밀하게 구상하고 있었는지도 인상 깊었고요.

 

임형택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는 중국 대륙의 원명 교체와 맞물려 있지요. 동시대에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일어났던 세계사적 대전환과도 연동됩니다. 한국사의 ‘여선(麗鮮) 교체’는 지식인 엘리뜨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유례가 드문 일로 평가할 수 있어요. 세계사적 전기를 잘 포착해서 한국사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거지요. 그 성공을 이끈 지식인들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고려가 원제국과 적극 교류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원제국은 다민족국가로서 유례없이 다양한 문화가 꽃피었습니다. 원나라에 유학 가고 거기서 활동했던 고려 지식인들은 새로운 세계와 호흡하는 한편 동쪽나라 사람으로서 자기를 돌아보게도 돼요. 그렇게 각성한 끝에 문명의식, 동인의식으로 표출하게 된 것입니다. 원제국의 학술과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돌아온 지식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색(李穡)이고, 이색의 후속 세대로서 대표적인 인물이 다름 아닌 정도전(鄭道傳)입니다. 정도전이 ‘나라만들기’의 주역이 된 경위는 대략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백민정 정도전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세계시민적 정치의식이 있었다고 느낍니다. 사실 역성혁명이나 부정의한 군주를 방벌하는 이야기는 『맹자』 이래 수천년 동안 유명했지만 그걸 지식인들이 무력이 아닌 사상의 힘으로 현실화한 사례는 아주 드물거든요. 그 점에서는 3권 『김시습·서경덕』 편도 함께 이야기해볼 수 있겠네요. 방랑시인 정도로만 알려졌던 김시습이 『맹자』를 굉장히 중시했고, 『맹자』 독해를 통해서 안민론과 애민론, 즉 인민이 곧 군주와 나라의 주인이라는 강력한 민본주의적인 이념을 이야기했던 걸 알게 됐습니다.

 

임형택 제가 담당한 2권 『세종·정조』 편을 들어보자면, 왕조국가에서 임금은 더없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조선을 해석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조선은 문명의식과 동인의식으로 실현된 국가입니다. 우선 문명의식은 유교국가로 구체화됩니다. 동시대의 명도 유교국이었지만 조선과는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황제의 권력이 워낙 막대해서 유교제국에 가까웠죠. 반면 조선은 유교국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문학을 애호하고 유교를 신봉하는 사대부들이 관료층을 형성하고 그 위에 왕이 위치하는 구조였어요. 이런 면에서 조선은 사대부가 관리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동인의식은 어디에 반영되었느냐 하면 첫째로 한글을 들겠습니다. 세종이 중심 역할을 해서 창제한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 말이지요.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글자라는 그 뜻에서부터 유교적인 애민정신이 관철되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여기에도 유교적 문명의식이 담겨 있네요. 조선의 왕정체제가 고도로 모범적으로 작동되었던 시기가 바로 세종의 치세입니다. 이후 왕조의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면서 사대부 관료층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외척들이 득세하여 왕정체제가 거의 무너지는 단계로 진행되기에 이르는데, 이런 사태를 수습하고 개혁해 유교적 문명국으로서 사대부 정치를 복원하고자 한 것이 정조였고요. 그래서 2권의 부제를 ‘유교문명국의 두 군주’라고 한 다음 세종은 ‘유교적 문명국의 건설’로, 정조는 ‘실학군주의 개혁정치’로 각각 해석했습니다.

 

황정아 서문에 국왕으로서만이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적어두셨잖아요. 저는 이번에 정조가 쓴 글을 원전으로 읽으면서 드라마며 소설이며 문화 텍스트에서 정조가 왜 그렇게 자주 다뤄지는지 이해하게 됐어요. 국왕이 사상가로서 자신의 통치행위에 정당성을 마련하려고 첨예하게 고민하는 것이 역력히 드러나더라고요.

 

허석 저는 4권 『함허기화·청허휴정·경허성우: 불교사상의 계승자들』(김용태 편저)을 읽으면서 조선불교의 전기·중기·후기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함허기화(涵虛己和), 청허휴정(淸虛休靜), 경허성우(鏡虛惺牛)가 각 시기의 대표적인 승려거든요. 지금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종교인데, 그런 불교가 강력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하잖아요. 한국불교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그 고승들이 철저한 유교국가에서 간화선(看話禪)을 비롯한 선(禪) 사상과 문화를 정착시키면서 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한 점을 살펴볼 수 있었어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두고 견해가 다양합니다만, 주로는 회통적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하죠. 김용태 선생은 불교가 삼국시대에 전해진 이래 사유와 가치, 종교와 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전통의 주축을 이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철저히 탄압받으면서도 그 명맥은 끊기지 않았다고 봤어요. 청허휴정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일으켜 현실문제에 적극 참여한 역사도 있고요. 한편으로는 조선 유학자들의 비판에 맞서 함허기화를 비롯한 조선 초 불교인들이 변론작업을 펼치는데, 이때 불교사상이 유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옹호적인 입장을 취하기보다 유교에서 배울 점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활용했다면 불교사상이 지금보다 더 풍부하고 현실참여적 성격도 한층 강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황정아 김시습과 서경덕(徐敬德)에 비하면 조선 유교사상의 주류 중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퇴계(退溪) 이황이 5권 『이황』에 배치되었는데 중국 유교사상과 비교하려면 그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백민정 퇴계 때만 해도 이미 중국에서 조선으로 수많은 텍스트가 유통되었어요. 명대의 텍스트들에 대한 퇴계의 독서와 이해 수준이 제가 알고 있던 것보다도 굉장히 깊었더라고요. 명대 심학자들은 선한 마음의 본체인 양지(良知)가 발현되고 여기에 따라 일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걸 중시했어요. 퇴계도 똑같이 심학과 『심경』을 중시하기는 했지만 공부방식이 달랐는데, 우리 마음에 리(理)가 갖춰져 있다는 말은 원론적으로 인정하지만 평상시 정제엄숙(整齊嚴肅)이나 경(敬) 공부 같은 수련으로 자기의 사특한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했어요. 명대 심학이 발산형 공부라면 퇴계의 심학은 수렴형의 공부인 것이죠. 퇴계가 흔히 주자학자라고 알려졌지만 사실 주자(朱子) 본인보다는 그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고요함의 공부, 정좌나 함양 공부를 중시했거든요. 퇴계가 활동하던 당시 조선에서 명대 심학자와 가까웠던 건 『김시습·서경덕』 편에 나오는 화담(花潭) 서경덕인데요. 사실 퇴계는 화담 학파들을 통해서 중국 책을 많이 빌려봤는데 화담이 무사(無事)·무욕(無欲)한 마음, 초탈한 마음에 집착하고 세속의 정치를 간과한다고 비판했어요. 이렇게 보면 퇴계의 심학만 해도 혼자 구도 행각을 벌여서 나온 게 아니라 동시대 동아시아에서 다양한 텍스트가 유통되고 여러 지적 교류가 있는 가운데 활발하게 성찰하면서 구현된 사유인 거예요. 이 입체적인 교류를 이해하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임형택 퇴계가 동시대 중국 학문사상의 텍스트에 접했고 이를 깊이 이해했다는 건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명대에 영향력이 지대했던 양명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어요. 퇴계는 왜 양명학을 부정했을까요? 정주학에 경도되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던 종래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퇴계의 입장에 대한 분석이 없기 때문이에요. 퇴계는 명대의 학자들과 이론투쟁, 사상투쟁을 열심히 벌이는데 양명학은 당시 조선의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던 거예요. 류성룡(柳成龍) 역시 양명의 저서를 일찍이 접하여 중요하게 보면서도 양명학설의 핵심적 문제를 들어 비판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며 주자학 일변도로 나아가 교조적으로 양명학을 완전히 이단시하기에 이른 것은 사상적 질곡이라고 보아야 옳겠지요.

 

황정아 임형택 선생님은 『세종·정조』 편에 이어 류성룡을 포함한 『재상』(2025년 출간 예정) 편도 작업하고 계시지요? 요즘의 분류로 보면 사상가-정치가를 이어 맡으셨네요.

 

임형택 8권 『재상』은 선조 때의 류성룡과 이항복(李恒福), 인조·효종 때의 김육(金堉), 정조 때의 채제공(蔡濟恭) 이렇게 정승들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유교국가에서 정승은 지금 대통령제의 총리에 해당하는 중요한 존재예요. 중국에서는 명청대에 이르러 황제의 전제권력이 막강해지면서 승상제가 폐지됐지만 조선에서는 삼정승이 임금을 보필해 국정을 총괄하는 총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류성룡, 이항복은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와 인민을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김육, 채제공은 중요한 개혁을 끌어내 인민에게 이로움을 전한 공적이 있어요. 이처럼 역사상 업적이 뚜렷한데다 저서도 다수 남겨 사상가의 반열에 올리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오늘날 총리들 중 여기에 비견할 인물이 과연 있을까요? 유교문명국의 특징적인 일면이라고 봅니다.

 

황정아 저는 17권 『김옥균·유길준·주시경: 조선의 근대를 개척하다』(최원식 편저)도 문학텍스트를 읽듯이 재미있게 봤는데요. 김옥균(金玉均)과 유길준(兪吉濬)은 특별히 사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본 이름들인데 대개는 실패한 개화파였다, 일본까지 등에 업으려고 했다는 식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사상가의 반열에 들어갈 만한가, 뭔가 해보려다가 별로 장렬하지도 못하게 실패한 거 아닌가 하는 식의 생각을 많이들 하거든요. 그런데 확실히 이들이 쓴 글을 직접 읽으니까 그때의 고민이 더 공감되고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당시 조정이나 국내 여러 세력, 외세와 맺는 관계가 어땠는지도 구체적으로 다가오고요. 편저자가 김옥균의 마지막 상소문을 꼭 읽으라고 썼는데, 그 마지막 상소문을 읽으면 찡한 느낌마저 듭니다. 시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사상을 접할 때도 연구나 설명으로 우회하는 것보다 사상가들의 육성을 직접 듣는 게 역시 가장 좋은 방법 같아요. 일반 독자들뿐 아니라 저 같은 학문적 배경이 있는 사람에게도 우리 사상가들의 육성을 듣는 경험이란 드물 수밖에 없어요. 한자 번역도 그렇고 자료에 접근하는 데 여러 장벽이 있고요. 그런 면에서 저는 이번 사상선이 현대 글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사상가들의 언어를 직접 전달하고 육성이 주는 정동을 느끼게 해주는 게 무엇보다 큰 장점이라 생각해요.

 

허석 19권 『안창호: 민족혁명의 이정표』(강경석 편저)가 그야말로 육성이거든요. 거의 음성파일로 도산 선생의 말씀을 듣는 것 같고 제스처까지도 느껴지는 듯해요. “나간다, 나간다 하면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 나간 것”(114면) 아니냐며 구호만 외치고 진짜 독립을 준비하지 않는 행태를 꾸짖는 말씀도 그렇고요. 우리가 이 시대에 다시 경청해야 할 말씀들이 가득합니다. 편저자의 서문에서 도산 선생을 안일한 준비론자나 혁명을 괄호 친 실력양성론자라고 보는 등 우리가 갖고 있던 왜곡된 편견을 깨주었다는 점도 인상 깊었고요. 16권 『최제우·최시형·강일순』 편저자도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에 대한 재발견을 강조했고, 읽으면서 제가 동학에 대해 막연히 품고 있던 상들이 깨진 것 같아요. 수운 선생의 활동은 짧았는데, 그게 어떻게 동학농민혁명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잖아요. 우리가 수운 선생과 전봉준(全琫準)에 주로 초점을 맞추느라 해월 선생은 상대적으로 주목하지 않았는데, 동학에서 해월이 수운 못지않은 역할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해월선생문집』같이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사료를 비롯해 편저자가 평생 발굴한 자료를 집대성한 덕에 그 사상과 행적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됐어요.

 

임형택 그렇게 새로 자료를 발굴하거나 기존의 통설과 다른 관점을 제공한 게 이번 한국사상선의 괄목할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3권 『김시습·서경덕』 편에서는 김시습의 『임천가화』가 새로 발굴되어 초역한 자료고, 17권의 『김옥균·유길준·주시경』 편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어서 유익했어요. 16권 『최제우·최시형·강일순』 편에서 최시형의 재발견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에서 동학은 외피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바꾸게 됐습니다. 19권 『안창호』 편에서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를 단순히 준비론자로 보던 것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죠. 저 자신도 시각교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해월의 글을 보니까 알려져 있듯 결코 문자지식이 없는 분이 아닌데, 제자들에게 건실한 태도를 강조한 내용이 주목되었습니다. 이런 사상이 도산 안창호와 원불교의 소태산에게도 나타나는데요. 허선생, 이 점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허석 19권 『안창호』 편은 소태산 대종사와도 관련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더 관심을 갖고 읽었습니다. 도산이 1935년경 전라북도 익산에 있던 불법연구회를 직접 방문했어요. 지금 원불교의 전신이죠. 당시 민중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가 지방을 순회하다가 우연찮게 대종사의 이야기를 듣고 예정에 없던 방문을 한 셈인데, 대종사와 도산 선생의 만남에 대한 기록이 20권 『박중빈·송규』 편에 짧게 들어 있어요. 도산은 대종사의 공동체를 보고 굉장히 놀라거든요. “방편이 능란하시어, 안으로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은 많으시면서도, 직접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시니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하옵니다”(305면)라고 했다죠. 아마 도산이 구상했던 이상적인 공동체를 구현하며 조선 민중의 삶을 지키는 데 공헌한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에 대한 공감을 나누고 헤어지는데 그후로 일본이 불법연구회 내에 경무소를 설치하고 순사 두명을 파견해 상시 감찰을 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황정아 도산이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신 셈이지만 두분의 만남 자체가 단순한 에피소드를 넘어 의미있는 사상적 사건이었던 것 같아요.

 

허석 대종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20권 『박중빈·송규』 편을 이어 말해볼게요. 대종사가 직접 집필한 『정전』, 그분의 말씀들을 후대 제자들이 기록한 『대종경』, 그리고 대종사의 수제자인 정산(鼎山) 송규(宋奎) 종사가 남긴 말씀들을 모은 『정산종사법어』의 일부를 수록했습니다. 사상선 작업을 하면서 저도 두분을 새롭게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대종사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는데, 당시를 돈의 병에 걸린 시대로 진단합니다. 자본주의가 문명의 큰 위기를 가져올 것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물질개벽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이 필요하다고 보았죠. 그리고 정신개벽을 이끌 조직을 만드는데, 전무출신제도나 남녀권리동일 원칙을 두어 남녀, 재가·출가의 차별을 철폐하면서도 천도교나 기성종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조직원리를 창안해요. 대종사는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정산 종사는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해 해방을 맞은 1945년 10월 건국의 방도를 담은 『건국론』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정치와 종교가 두 몸이되 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르게 이끌어가야 한다는 정교동심(政敎同心)론을 주장하는데, 이는 근대 이전의 제정일치나 근대 이후의 정교분리라는 양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교의 사회적 역할과 정치와의 관계를 밝힌 셈입니다. 제가 사상선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주석작업이었어요. 두분의 저작이 한글로 된 경전이어서 원문을 실었고 그대로 읽을 수 있는데도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의 근대적인 사유로 좁게 해석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정신’ ‘물질’ ‘도덕’ ‘종교’ 같은 개념들인데,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대로 받아들이면 대종사의 본의와 맞지 않는 면이 생깁니다. 그런 부분에 저 나름대로 대종사의 본의를 살려 주석을 다는 작업을 하는 데 주안점을 뒀어요.

 

황정아 지금 콕 집어주신 정신, 물질, 도덕, 종교, 이 네가지를 제대로 사유하는 건 원불교를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전환을 구상하는 데도 핵심이지 싶습니다. 정신과 물질은 고전적인 주제지만 인류세나 기후위기 같은 문제와 이어지면서 새삼 첨예한 이론적 관심사가 되고 있기도 하고요. 동학과 원불교가 세상을 바꾸려는 변혁운동이면서도 일상 차원까지 내려와 세세한 지침을 마련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종교운동이었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보통 세상을 바꾼다는 논의를 접하면 막연하기만 하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잖아요. 왜 그럴까 질문해보면 자기 삶의 구체적인 지침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나한테 구체적인 지침이 아니라는 건 남한테도 구체적인 지침이 아니라는 뜻인데, 사람들이 안 바뀌면 세상이 변하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더 막막해지고요. 그런 점에서도 세상 얘기이면서 동시에 내 삶, 내 마음이나 욕구나 정서를 움직이는 내밀한 이야기로 다가오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민정 개인 삶의 지침서도 되고, 모둠살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새로운 삶터와 공존양식을 만들려고 했던 게 신종교들의 공통된 지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1923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당시 유행하던 온갖 비결서들, 신비한 예언서들을 한데 묶어 『정감록』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을 허가한 적이 있어요. 총독부는 『정감록』에 수록된 예언서들이 유사종교의 온상이라고 보고 이 책의 신비성을 해체하기 위해 일부러 출판을 허용한 거죠. 하지만 사람들은 구전으로 떠도는 진짜 『정감록』이 따로 있다고 믿었어요. 여기 수록된 비결서들에서 일본이 곧 망하고 조선이 독립해서 새 세상이 열린다고 예언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불온한 서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요. 『정감록』에서 말하는 계룡산 천도설도 진인(眞人)이 출현해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일본을 무너뜨린 다음 신국가를 창조한다고 예언하죠. 연구자들은 『정감록』 이야기가 계룡산처럼 산간오지를 떠돌던 농민, 하층민, 식민지시대의 수탈민들이 모여 새로운 삶터를 마련하는 데 주축 신앙이자 이념이 됐다고 봅니다. 저는 다른 신종교들도 종교라는 말을 외피로 하되 실은 공존의 원리를 모색했다고 봐요. 조선의 도학자들은 위계적이고 근엄한 국가의례에 기초해 수직적 공동체를 만들었고 예학으로 그걸 뒷받침했지만 19세기 말에는 동학 같은 민중적인 운동, 친서민적인 배움과 지식이 유행했어요. 전에는 도통(道統)을 말할 때 위계 통(統) 자를 썼다면 이때는 통할 통(通) 자를 써서 도통(道通)이라고 구별하더라고요. 이 도통(道通)의 세계에는 공존의 원리, 함께 사는 삶터를 마련하고자 하는 고민이 공통적으로 있었고, 원불교는 그걸 원만하게 구현하는 데 성공한 사례고요. 20세기 초 신흥종교들 그리고 유사종교로 의문시된 『정감록』 같은 예언서나 비결서조차도 이런 지향을 공유했다고 생각해요.

 

황정아 사상의 현재성이라는 면에서 18권 『박은식·신규식: 시대의 아픔과 역사의 구원』(노관범 편저) 편도 주목할 만합니다. 프랑스혁명 전후 시기를 감정사(感情史) 차원에서 서술한 책을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요, 식민지 경험은 또 얼마나 처절하고도 다채로운 감정들의 역사였을까 싶습니다. 편저자도 언급하듯이 두 사상가의 ‘통사(痛史)’와 ‘통언(痛言)’을 통해 감정의 사상사라는 차원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왼쪽부터 백민정 허석 임형택 황정아 © 이영균

 왼쪽부터 백민정 허석 임형택 황정아 © 이영균

 

사상의 탈식민화와

K사상이 나아갈 길

황정아 지금까지 한국사상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데 어떤 어려움과 보람이 있는지 크게 짚어본 셈인데요. K문학에 비하면 K사상은 아직 과제가 많고 갈 길이 먼 듯합니다. 앞으로 한국사상의 탐구가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나아가야 할까요?

 

허석 저도 대학에서 근무를 하지만 소위 지식인들이 각성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우리 것, 우리 사상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뿐 아니라 마음을 열고 재발견하는 노력을 각별하게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또 사상선 10종을 책장에 쭉 넣어놓고 보니까, 사상가들 한분 한분이 이룬 업적이 하나의 큰 맥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국사상이 나아가야 할 길도 마찬가지인데, 일부 사상가 몇명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한명 한명이 사상을 공부하고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깨어 있는 정신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각자의 하루를 어떻게 살지 꿈꾸면서 또 함께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연대하기도 하는 거죠. 제 표현으로 하자면 개벽세상을 만들 꿈을 함께 꾸는 겁니다. 사상선을 보면서 과거의 어떤 영웅들의 사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그분들의 삶의 모습이나 생각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시킬지, 그걸 통해 지금 이 현실에서 어떤 나라, 어떤 세상을 만들어나갈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백민정 한국사상을 공부하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정치주체라는 주인의식을 갖는 게 개벽세상의 중요한 가치라는 점에 절대적으로 공감해요. 제가 동학에 관심을 두고 개벽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반발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어요. 개벽이나 동학, 그 이후의 천도교 같은 것에 학술성이 있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고요. 우리 스스로도 일제강점기 신종교의 부흥을 보며 유사종교 아니냐고 의심할 때가 있죠. 민본주의나 위민주의는 민주주의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일부 지식인들은 제도적으로 구현된 민주주의를 민본주의 같은 이념이 따라올 수 없고, 자유주의든 민주주의든 다 서구에서 온 거라면서 전통사상에 냉소적인 시각을 보이는데요. 민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상보적으로 함께 가야 한다고 해도 이 역시 무시당할 때가 있죠. 학자든 일반 시민이든 전통사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넘어서면 좋겠고, 이번 창비 한국사상선이 그런 돌파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황정아 사상에서의 탈식민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얘기하면 서구담론에 경도됐던 데서 벗어나 우리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자는 뜻이지만, 식민지 경험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겪는 과정에서 한국사상이 지니게 된 잠재력에 주목하자는 취지에서요. 이 잠재력은 식민지였기에 근대의 한계를 한층 날카롭게 의식하고 서구적 보편을 더욱 강도 높게 비판할 수 있다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쩌면 상황이 나쁘면 나쁠수록 한차원 높은 보편적 비전을 더욱 강력하게 지향해왔던 게 한국사상의 특징이고 전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서 말한 나라만들기의 경우도 나라가 위태롭거나 심지어 나라를 빼앗긴 와중에도 단순한 ‘네이션 빌딩’이 아니라 세상 만들기이자 마음 만들기를 넘나드는 아젠다로 추구하지 않았습니까? 세상 만들기와 나라만들기, 마음 만들기가 다 중첩되어 서로를 향한 통로가 되는, 그 정도로 활짝 열린 차원을 구상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차원을 개벽이라 부를 수 있겠고요. 이런 저력에 유의하면서 우리 사상을 더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재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임형택 창비 한국사상선 기획의 맨 마지막권이 『김대중』(2026년 출간 예정)이잖아요. 그를 오늘의 정치인이자 사상가의 반열에 놓고서 중요하게 평가하려는 구도입니다. 지난 2000년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평화사상가로서 객관적이고 세계적인 평가가 이루어졌지요.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물들을 다 사상가로 볼 수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김대중의 경우 실천적 사상가로서 당당하다고 봅니다. 이에 덧붙여 고려해야 하는 점은, 그가 이룬 민주주의적 성취는 이 땅의 민중이 추구했던 민주주의의 성취이고, 통일운동 성과는 민중이 희구했던 열망의 성과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이 받은 노벨평화상은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진화된 ‘집단지성’의 한 상징이라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촛불운동은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평화적인 혁명의 형태예요. 식민지 억압으로부터 이어진 분단체제의 온갖 질곡이 작동하는 상황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집단적으로 분투하며 진화해온 덕분이겠지요. 우리는 아주 값진 민주주의를 성취했지만 또 무슨 역전이 일어나고 고난이 닥칠지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한반도는 지구적 난제가 응고된 지점이니까요.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하느냐 하는 민족사적 과제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K사상의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는 것도 같습니다.

 

황정아 실천적 사상가로서 김대중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현실정치인이라는 제약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그의 사상이 도달한 지평을 잘 헤아려야 할 것 같습니다. 김대중의 성취와 함께한 한국 민주주의의 성취도 그 사상적 차원을 탐구해야겠고요. 이런 생각을 하면 한국사상이 오늘날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한국사상의 고유한 역량과 과제에 관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말씀 나누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2024.10.26.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