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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인간적인 것을 향한 (부)적절한 인카운터

김기태 소설 속 ‘두 사람’들

 

 

권영빈 權寧斌

문학평론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초빙교수. 주요 평론으로 「죽음보다 명백한 것, 비평보다 확실한 것: 최진영이 쓴 비규범적 조의의 방식, 『구의 증명』」 「냉소하는 도시와 이야기의 패치워크」 등이 있음.

outthem@naver.com

 

 

1. 인간이라는 규모와 만남의 정치

 

오늘날 인간이라는 생태적·담론적 구성물을 재고하게 하는 관점으로 인류세를 빼놓을 수 없다. 대기권과 생물권의 구성, 유기체의 거주환경과 생태계 전반이 획기적으로 달라진 현시대를 기술하고 이를 촉발한 요인으로 인류를 지목하는 인류세는 지구 생명체의 심각한 실존적 위기로 말미암아 종(種)으로서의 인간문명에 대한 비판과 전환을 전방위적으로 요청하는 문제틀로 자리 잡고 있다.

인류세를 둘러싼 논쟁은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규모(scale)를 다시 생각하는 일과 관련된다. 인류세라는 말은 행성 차원의 행위자로 급격히 부상한 인간의 규모를 표시할 따름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 정치적·윤리적 주체로서 자신에 무심한 지구시스템과 얽혀 어떻게 스스로의 규모를 (재)조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핵심으로 들어서 있다. 그러한 조정은 인간이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폐기하거나 변용함으로써 인간이라는 규모와 그 행성적 힘을 직접적으로 축소하는 것이기도 하고, 인간이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현하고 소망해야 할 것들을 재론함으로써 인간성, 인간적인 것의 규모를 재정립하는 일이기도 하다. 실재이면서도 인식론적인 공간의 메타포이자 존재의 현상학적 범주인 규모는 언제나 다른 규모, 다른 존재와의 연결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는바, 그토록 크고도 작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규모를 재구축하고 다른 규모들과의 관계를 재편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것은 인간에 관한 앎과 서사를 재구성하는 데 부합하는 일일 것이다. 가령 단 ‘두 사람’이 빚어내는 인간이라는 규모와 인간의 대안적 초상에 관한 구상은 어떨까.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2024)은 발표하는 소설마다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가의 첫 소설집답게 큰 주목을 받았다. 소설이 포착하는 세태와 그것을 그리는 방식이 차별화된 감각적 재미를 창출한다는 점, 그 속에서도 통렬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이 김기태 소설이 회자되는 요인일 것이다. 고도로 원자화된 삶, 각종 관계 속 부침이나 이데올로기적 억압으로 인해 침잠해 있는 존재들의 담담한 말들을 포착하고 조심스레 건져올리는 최근 소설들의 경향과 다르게, 그의 소설은 그러한 소외감을 다루면서도 세계의 구성원리가 단방향적인 침식의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활달하게 펼쳐낸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소설은 「세상 모든 바다」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상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그리고 「일렉트릭 픽션」(『릿터』 2024년 6-7월호)이다. 앞선 두 소설이 작가의 본격적인 활동을 알리며 그의 주제적·형식적 관심사를 두루 엿볼 수 있게 한다면, 근작은 그러한 작가적 표명이 하나의 사례로 집약되어 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소설에서 ‘두 사람’의 만남과 관계는 인류세가 문제 삼는 인간이라는 규모를 성찰하게 한다. (비)의도적으로 고립된 개별 존재들이 교차·중첩되면서 만들어지는 관계가 다른 삶을 구성하게 하는 토대로 모델링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예기치 않은 두 사람의 ‘마주침’(encounter)은 이른바 취약성을 동력으로 하는 관계적 주체의 의미나 중요성에 관한 논의로 직진하지 않는다. 소설이 그들의 관계를 미래에 관해 무엇도 약속하거나 전망하지 않는 일시적 열림인 채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이해가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만남은 그들이 다다를 수 있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관계의 지평을 좀더 멀리, 넓게 조망할 수 있게 한다.1 어쩔 수 없이, 또는 우발적으로, 때로는 자족적인 시도로 조성되는 두 사람의 만남이 부적절한 정동을 내포하거나 단지 잠정적 알맞음(적절함)의 상태를 표시할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이라는 규모를 재구성하는 정치적 행위일 수 있음을 김기태의 소설은 보여준다.

 

 

2. 두 사람 몫으로 다시 보는 세계: 「세상 모든 바다」

 

「세상 모든 바다」는 ‘K’라는 접두어가 불필요할 만큼 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아이돌 걸그룹 ‘세상 모든 바다’(이하 세모바)의 콘서트에 간 두 사람, 하쿠와 백영록의 이야기이다.2 소설에서 생생하게 재현되는 아이돌과 팬덤의 존재방식, 글로벌 스케일에서 작동하는 문화정치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우리’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속에 담긴 여러 힘들의 길항으로 소설의 화두를 결집시킨다.3 그러나 「세상 모든 바다」는 그런 내용에 앞서 타인이 당한 비극에 대한 연루의 감각, 죄의식 같은 다소 익숙한 주제를 다루는 소설이기도 하다. 중심인물 하쿠가 당면한 설명책임과 그 실패를 형상화하는 방식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인간이라는 규모에 관한 탐색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탐색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로 소설이 활용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문법에 주목할 수 있다. 글로벌 문화시장에서 인정받는 케이팝의 중심에 있을 뿐 아니라 반전(反戰)이나 차별금지법 제정, 기후위기 같은 지구적 화제들을 거느리는 세모바는 소설 속 표현대로 아름답고, 유능하며, 옳음으로써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자기를 대입함직한 정체성의 표상이 된다. 반면 재일교포 신분을 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한 하쿠의 외국인 또는 ‘외부인’이라는 기표는 그가 자기에 관한 설명을 계속 유보하게 만든다. 예컨대 한국어과에 진학하거나 한국 유학을 위한 면접에서 그의 까다로운 정체성은 서로 다른 문화를 잇는 “가교”(20면. 이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로 의미화되지만, 백영록과의 만남에서는 그저 “외국인”(13면)이 되는 근거로 쓰인다. 대학원 환영회에서 하쿠는 케이팝의 영향력을 입증하는 K 바깥의 외국인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떳떳하지 않은 행동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선배의 푸념을 듣고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고,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는 걸 감추고 싶”(21면)어한다. 이 소설이 글로벌 아이돌의 행보에 자기 정체성과 욕망을 투사하는 많은 이 중에서도 하쿠의 입장에 착목한 이유는 그러한 외부인 ‘다움’은 어떤 부적절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설명할 책임을 요구받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한편 소설에서 오리엔탈리즘은 하쿠가 자기 또는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을 규정하는 방식일 뿐 아니라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세모바의 존재양태를 지배하는 질서이기도 하다. 정체성이 집단 고유의 속성을 부정하거나 은폐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는 점과 그것이 식민화된 문화의 재현은 물론 식민자/피식민자 모두의 주체적 입장이 형성되는 데 중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 미국의 비평가 사이드(E. Said)의 요체인바, 하쿠는 케이팝 걸그룹을 좋아하면서도 소위 “열렬한 ‘덕후’”(13면)처럼 보이는 것과 엄격한 거리를 두면서 백영록의 외형만으로 그를 “오타쿠”(14면)로 규정하는가 하면, 트위터를 모르는 백영록이 과연 “그룹을 지지하는 온전한 방식”(17면)을 취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이러한 타자화는 스스로 아름답고 유능한 세모바와는 언뜻 무관해 보이는 기제지만, 사실 세모바 또한 아이돌 산업이 추구하는 어린-아시안-여성이라는 차별적 정체성을 근간으로 한다. 이들의 정의로운 운동들도 타 지역이나 역사에 대한 단편적 이해에 따른 이슈몰이일 수 있다는 점이 하쿠의 해진 탐방 대목에서 드러난다(원전도시 해진은 백영록의 고향이자 세모바의 팬들이 탈원전 캠페인을 벌인 곳으로, 원전이 지역 타자화와 식민주의의 상징이라는 점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결국 세모바로 만들어지는 통합된 자아와 정체성은 세모바가 대리하는 타자화에 의탁해 있다는 점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이어져 있다”는 하쿠의 “실감”(12면)도 환상과 다름없다.

그런데 하쿠는 백영록을 만나고 그의 죽음을 경험하며 더이상 외부인이라는 위치를 고수할 수 없게 된다. 케이팝 걸그룹 또는 세모바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말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당사자성을, 소설은 그가 백영록에게 소문을 전한 행위의 확실성으로 구성한다. 자신이 ‘하쿠’라는 것마저 “부분적으로는 거짓”(9면)이고 그날 잠실 콘서트장에 밀집된 십삼만의 인원에 자기가 집계되어 있다는 것도 “완전한 사실은 아닐”(25면) 수 있지만, 그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백영록을 만나 그에게 게릴라 콘서트에 관한 정보를 전한 것만은 “어떻게 보아도 사실”(9면), “틀림없는 사실”(31면)이다. 그러한 확실성은 하쿠로 하여금 백영록을 해석해야만 하는 위치로 내몬다. 조각나고 해체되어 소셜 미디어 속을 떠도는 사망자 백영록이 아닌, 소설에서 여러번 반복되는 “당신은 ‘세상 모든 바다’의 팬입니까”(9면) (또는 좋아합니까)라는 물음을 둘러싼 백영록의 고유성을 알고 있는 자로, 하쿠의 정체성이 돌연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영록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하쿠의 노력을 통해 오히려 뚜렷해지는 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 부적절한 방식으로 성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망설임 없는 진심을 보여주는 백영록과, 케이팝 걸그룹에 자아를 부분적으로 의탁하면서도 좋아하는 행위에서 감지되는 위계(또는 위기)의 문제를 자신의 외부인 지향으로 숨기는 하쿠 사이에는 바다같이 넓은 거리가 있다. 이로 인해 둘 사이에서 돌이킬 수 없는 거래가 발생한다. 백영록은 하쿠를 일본에서 잠실까지 온 사람으로 인식하여 굿즈 숍에서 하나 남은 세계지도 플래그를 양보하고, 하쿠는 세모바를 향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 백영록에게 그가 알지 못할 것이 분명한 트위터 속 소문을 건넨다. 이 여파가 백영록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은 하쿠가 그가 가진 세계지도에 세계가 그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해진행을 통해) 알아차리게 하면서, ‘좋아한다’는 마음의 댓가가 죽음일 수 있다는 점 또한 하쿠에게 인식시킨다.

하지만 여기서 소설은 타인과의 만남이란 리스크를 짊어진 연루를 지향해야 한다는 당위, 또는 그 당위를 실현하기 위한 주체의 행위성을 묻기보다 ‘두 사람’이 낳은 탐문의 자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하쿠의 실패를 의미화한다.

바다를 통하지 않고 만났음에도 서로를 “파 파 플레이스”(14면)에서 온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이격은 마치 아프리카 기아문제나 아랍권의 내전과 같은 난해한 문제를 굿즈 숍에서 판매하는 세계지도 플래그에 욱여넣듯 기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글로벌 아이돌이 구가하는 정치적·윤리적 행위를 안온한 위치에서 자신의 것인 양 누리며 ‘세계’를 유영하던 하쿠는 백영록과의 만남과 그의 죽음을 계기로 갑자기 구석자리로 포획된다. 그러나 내몰려 다다른 지점이 마냥 궁벽한 곳은 아니다. 그곳은 글로벌-로컬-개별 존재의 관계를 다시 보게 하는, 불편하면서도 희망적인 시야를 생성해주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해진 해안가의 산포하는 파도 앞에서 하쿠가 취하는 뒷걸음질은 지하아이돌에 열광하는 ‘오타쿠’들의 “근시의 사랑”(37면)을 그리워하는 그의 상념과 상통하지만, 백영록과의 ‘재회’라는 해진행의 본 목적이 어느정도 달성됐다는 점 또한 말해준다. 궁지로 보이지만 바다와 면해 있는 곳에서, 그러한 바다를 두려워하며 간격을 벌리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비로소 실질적 거리감이 갖춰졌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바다가 연결되어 있다는 당연한 이치와 그것이 실체적 진실이 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죽음’은 너무나 큰 리스크이지만, 두 사람의 만남이 만든 탐문의 자리는 인간이라는 최소한의 규모가 만들어지는 방식과, 그것을 이루었을 때 그 안에 자연스레 밀려들어오는 ‘세상 모든 바다’의 존재를 역설한다.

 

 

3. ‘두 사람’이라는 결속의 패러다임: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의 또다른 소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첨예한 자본주의 속을 살아가는 두 사람을 조명한다. 주인공 권진주와 김니콜라이는 각자의 계급적·지역적 한계 내에서 그 외부를 향하는 욕망을 반성적으로 잠재우고 형편대로 삶을 꾸려나간다. 개인의 삶을 틀 지우는 구조의 문제를 인식하기도 하지만 이들에게 중차대한 과업은 일상을 가성비 높게 설계하는 일이다.

소설에서 집중적으로 묘사되는 ‘밈’은 이들이 이러한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정 순간을 빠르게 해석하고 맥락화한 뒤 휘발시켜버리는 밈은 단순하고 일시적이며 ‘복붙’만 해도 되는 완제품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범용성과 기동력은 밈이 원본과의 관계에서 자유롭다는 것과 관련된다. 밈의 원본성은 사용되는 과정에서 서서히 깎이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것을 풍미(flavor)로 취급하거나 본래의 맥락을 소거 또는 과장해야만 밈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해석의 기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밈은 수행성이나 행위자성과 같은 긍정적 개념과 어울리는 듯하다. 그러나 소설에서 밈은 그 자체로 전복적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두 인물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특정한 피드백루프를 만들어주는 고효율의 물자로 우선 동원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가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134면)라는 의문과 회한에 빠질 때 느닷없이 김정은과 추노꾼 장혁, 아마존 짤이 대답의 자리를 메운다. 살기 위한 끝없는 분투에 괴로울 때는 “네가 선택했잖아”(120면)라는 시대의 정언명령이 나타나 인물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밈은 생활세계에서 일종의 자극-반응체제로 패턴화되어 있다. 삶의 모순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그것이 드러날 법한 자리는 순간적이고 단순한, 댓가(책임)는 없지만 해석의 기능은 있는 밈으로 채워진다. 그들의 동창인 ‘앙맨’은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린 후 그가 가진 경박한 별명과 다르게 두문불출하게 되지만 그러한 모순은 다뤄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밈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귀속된 인간의 적응기제를 보여주는 것에서 다른 방식의 쓰임으로 옮아가는 것은 ‘두 사람’이라는 역사를 (다시) 쓰는 도구로 그것이 활용되면서부터이다.4

소설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밈은 비선형적이고 유희적이며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일시적 교감이기에 만남의 ‘역사’를 쓰기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특성 덕에 ‘두 사람’이라는 새로운 규모가 싹튼다. 평범하지만 초라한, 당장의 생활은 있지만 미래는 불확실한 이들의 삶을 찰나라도 빛내주는 밈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 각자의 삶을 ‘두 사람’의 것으로 다시 새기는 기술로 절묘하게 전유된다. ‘인터내셔널가(歌)’라는 밈은 시스템을 둘러싼 포획/저항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넘어서 적응 속에서 적응을 내파하는 방식으로 두 사람의 만남을 새롭게 역사화하고 이들의 삶이 밈들의 절합 이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노래는 “기립하시오 당신도!”(135면)라고 외치는 양갈래 머리 소녀의 이미지로 온라인에서 소비되고, 두 사람도 알고리즘을 통해 그것을 접하고 향유한다. 만사가 귀찮아 누워 있는 상대에게 말 그대로 ‘기립’을 재촉하기 위해 이미지를 전송하거나, 일터에서의 불합리를 보면서 “이거는 기립이네, 기립해야겠네”(138면)와 같은 뼈있는 농담으로 응용하거나, 함께 살기로 한 두 사람이 가재도구를 정리하면서 이 노래를 ‘노동요’로 틀어놓는 것 사이에는 언뜻 유의미한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밈은 단 한문장만 되풀이하며 제자리걸음 하는 태엽인형에 빗대어지지만, “어쨌든 태엽을 감아주는 사람들은 계속 있”(137면)다는 인식은 그것이 패턴 속의 차이, 차이를 가진 패턴으로 존재할 여지를 남긴다. 이들이 규정하는 “친한 사이”(142면)라는 말이 그것이다.

‘친한 사이’라는 결속은 ‘인터내셔널가’가 내포하는 집단적 믿음의 구조를 모방하면서도 그러한 집단성을 계급적·지역적 한계와 자본주의 질서하에서 억압을 겪는 개인들이 ‘두 사람’의 형태로 취할 수 있도록 재조정한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들의 존재방식,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과거 사회주의 국제조직의 축소판이 아니라 매순간 서로를 소외된 두 사람의 형식으로 발견하게 하는 일종의 패러다임이 된다. 이러한 규정(력)은 마치 밈과 같아서 두 사람의 역사에 틈입하거나, 둘만의 관계를 넘어 주변인들을 향한 애정으로 퍼져나가는 기동성을 보인다.5 예컨대 졸업앨범 단체사진의 양 끝에 서 있던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에게 “둘이 친하게 지내”(114면)라는 교사의 말은 무성의하고 무의미한 것이었지만, ‘친한 사이’라는 ‘두 사람’만의 자의적이고 자율적인 규정은 그 말을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예언”(143면)으로 만든다.

“중국인 혹은 중국인이 아닌 누군가”(141면)가 만들었을 식탁과 그가 먹는 국수에 대한 상상, ‘피자나라 치킨공주’라는 황당한 ‘인터내셔널’이 접속하고 공존하는 가운데 이제 해방의 꿈은 밈이라는 리듬으로 돌아다닌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이라는 규모는 그 외롭고 한정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패배주의적인 색채를 띠거나 기존의 고립감을 강화하지 않는다. ‘인터내셔널가’와 양갈래 머리 소녀가 ‘일어나시오!’라고 말할 때, 그럼으로써 그것이 오랜 시간 상징해온 메시지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외칠 때 세계 속에서 오직 둘만 일어나 단결하는 모습은 ‘두 사람’이라는 ‘친한 사이’가 매번 탄생되는 역사적 장면으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한 연결이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버림”(143면)과 같은 두 사람만의 언어로 재차 번역될 때 ‘두 사람’은 어느새 두 사람의 형식을 면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두 사람’이라는 결속을 인간이 구체적 삶 속에서 새롭게 성취해야 할 질서로 내놓으면서, 그것을 고정된 약속이나 지향점으로서가 아닌 반복운동하는 무언가로 제안하고 있다.

 

 

4. 유폐된 곳에서 만나는 기술: 「일렉트릭 픽션」 그리고 「갱도에서」

 

「세상 모든 바다」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두 사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초상은 로컬-내셔널-글로벌이라는 현시대의 다중스케일적 공간구조와 질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다시) 만나 다른 삶을 구성할 수 있을지 타진하게 하는 가늠쇠이다. 이들 소설에서 ‘두 사람’이라는 의미작용의 범위가 둘만의 협소한 관계만이 아닌 바다처럼 가없는 바깥을 향해 있다는 점이 그러한 가능성을 말해준다. 쉽게 약속하거나 전망하지 않기에 오히려 열어젖힘의 정동으로 더 먼 곳을 바라보게 하는 ‘두 사람’이라는 규모와 존재방식을 김기태 문학성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이해해도 가히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근작 「일렉트릭 픽션」에도 이러한 관심이 뚜렷하다.

고만고만한 계층의 1인가구나 영세한 가족이 모여 있을 법한 빌라에 거주 중인 주인공 ‘그’는 문안/문밖으로 철저히 구분된 생활을 견지하면서 “진짜 삶이라 부를 만한 것은 문 안에 있”다고 자신한다.(『릿터』 2024년 6-7월호, 116면. 이하 인용은 괄호에 면수만 표기) 그러나 우연히 흥미를 갖게 된 일렉트릭 기타 덕에 그는 돌봄의 성격이 있는 취미 공동체를 찾아 나가거나 벽 너머의 사람들을 향해 자기 존재를 알리게 된다. (비)자발적으로 유폐되어 고립에 족하며 살던 그가 서서히 달라지는 모습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하는 소설로서 그것을 즐겁게 읽히게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전기’라는 소재와 은유는 인간의 연결과 유대를 마치 인프라처럼 간주하도록 만들기에 효과적이다. 그 점을 가장 쉽게 전해주는 것은 단연 일렉트릭 기타이다. 악기는 혼자서도 소리를 내지만 언제나 합주나 협연 같은 다른 규모의 소리를 꿈꾼다는 점에서 그가 애플리케이션의 AI 교사 ‘조니’가 아닌 현실 속 ‘재니스’를 만나게 되는 것도 서사적으로 시간문제이다. 셔플 리듬을 직접 가르쳐주려는 재니스가 손을 덥석 잡자 “전기가 통한 듯 솜털이 오스스”(126면) 돋은 그는 이제 그러한 감전이 부재하는 ‘비밀스러운’ 연주와 결별한다. 일렉트릭 기타를 둘러싼 이야기 배면에서 찾을 수 있는 전기의 의미는 또 있다. 8년째 같은 직장에 근무하면서도 그는 단 한 사람의 동료도 없다. 각종 잡일을 도맡는, 계약직이라는 그의 불안정한 위치는 인간 삶의 필수 에너지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와 닮은 구석이 있다. ‘지원’이나 ‘보조’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그의 노동은 돌봄노동처럼 필수불가결하지만 쉽게 잊히거나 공적 인정체계에서 소외되곤 한다. 단체사진 촬영날, 몇벌 되지 않는 정장을 고심해 골라 입고 출근한 그가 사진 속에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어떤 느낌”(119면) 탓에 홀로 사무실에 남는 장면은 「일렉트릭 픽션」이라는 소설의 제목에 값하게 가슴을 찌릿하게 한다.

소설에서 ‘전기’로 표현되는 연결의 의미는 또다른 중심인물인 ‘나’로부터도 연유한다. 소설은 ‘그’가 자발적으로 구분한 문안의 생활과 문밖의 질서가 일렉트릭 기타로 인해 바뀌어나가는 과정을 전지적 시점으로 보여주면서, 그렇게 낱낱이 조명된 그가 소설의 결말에서 ‘나’라는 일인칭 화자에 의해 주목된 인물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의 변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소감은 부름과 대답의 모양새를 띠기에 두 사람은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만남을 이룬다.

요컨대 만남은 하쿠와 백영록의 재회처럼 실물과의 진실한 접촉을 전제하거나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의 관계처럼 상호규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고백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서로를 발견해주는 방식으로도 꾸려진다. “익명이 되려고 서로 최선을 다하는”(128면) 폐쇄된 연립주택에서 기타를 연주한다는 그의 자못 당당한 고백이 만들어낸 작은 틈은 ‘나’가 웅얼거리듯 연습해온 핀란드어 인사말을 비로소 누군가 들을 수 있는 안부의 말로 만든다. 인간을 존립하게 하는 전기적 네트워크의 시작점으로 ‘여기 있음’을 알리는 것은 ‘두 사람’과 그 너머로 향하는 규모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충분하다.

한편 김기태의 소설세계가 추구하는 만남의 기술과 인간성에 대한 희구는 소설 속 ‘두 사람’들에게서만 엿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의미는 ‘문학’의 이름으로 마주해야 할 것에 관한 그의 또다른 글에서도 분명히 전해진다.

세월호 10주년을 기념한 산문 「갱도에서」(『문학동네』 2024년 봄호)는 폭발의 전조인 무색무취의 가스를 가장 먼저 탐지하는 갱도의 작은 새 카나리아를 문학에 비유한다. 각종 참사가 매일같이 벌어지고 유가족 공동체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현실에서, 문학은 때로 ‘차마 말할 수 없음’을 이유로 문제를 방기하거나 문학(화)의 권력을 의식해 지향점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의 (불)가능한 정체화에 앞서는, 문학의 최소한의/최대한의 존재 의의는 갱도의 카나리아가 그렇듯 위험을 알리는 데 있고 그것은 동시에 ‘동료’를 부르기 위해 내는 소리이기도 하다.

 

가스 냄새가 진동하는 갱도 안에서 문학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지금 나는 그 예민하고 연약한 새뿐만 아니라 믿음직한 동료 광부도 필요하다고 느낀다. 가끔 객기로 변질되더라도 얼마간의 낙관과 용기를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상황을 침착하게 점검하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할, 곡괭이로 바위에 흠집이라도 내서 그것이 영원불멸은 아니며 언젠가 쪼개지리라는 희망을 주는 동료 광부 말이다. (…)

지난한 탐구와 논의와 곡괭이질 끝에 발견한 모든 사실이 명백한 멸망을 지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동료라면, 그때조차 어떻게 최소한의 존엄을 품고 평등하게 망할지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게 각자 죽는 것보다는 낫다. (15면)

 

갱도는 서로 접촉하고 땀 흘리며 목숨을 건 밭은 호흡을 나누는 곳이다. 그처럼 폐쇄된 공간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그 안에 담긴 절실함으로 서로를 크게 북돋울 수 있다. 김기태의 소설은 때로 인물들이 지닌 자기충족적인 태도와 그것을 마치 문화비평의 대상으로 삼아 속사하듯 펼쳐내는 글쓰기를 보여줌으로써 소설이 간직하는 여러 의미를 ‘가능성’이나 ‘실험’에 국한된 서사 모델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카나리아의 경보가 목적하는 바가 당장의 탈출만이 아닌 ‘동료 광부’를 부르는 일이라면,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존엄하고 평등한 연대를 이루고자 함이라면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실험해보는 것만으로도 온전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가 첫번째 소설집을 발표한 작가라는 점도 새삼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갱도 내부가 인류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 자체일지라도 그저 비관적이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김기태는 어둡고 좁은 곳일수록 더욱 요긴해지는 부름-응답이라는 인카운터의 기술로 보여준다. 그러한 만남이 단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일지라도 말이다.

 

* 이 글은 2024년 9월 세교젊은비평가모임이 주관한 공개 심포지엄 ‘인류세 시대, 전환의 상상력’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당시 참석자들과 지정토론자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의견이 글 작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감사를 담아 언급한다.

 

 

  1. 즉 이 글에서 인카운터(encounter)는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 알 수 없는 대상과의 접촉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일한 인과성이나 논리를 따르지 않는 만남에 담긴 정치적 효과에 방점을 두기 위한 것으로 쓰인다. 인카운터는 서로를 침윤하면서 새로운 감각체계를 발굴해나가는 만남의 의미로 정동 이론에서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2. 그러나 사실은 하쿠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스치듯 만난 후 백영록이 이내 사망한다는 사실, 또 그것이 하쿠에게 미치는 영향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세상 모든 바다」는 후술할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다르게 두 사람의 만남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수록작 대부분이 삼인칭인 데 비해 이 소설에서는 일인칭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러한 내용과 관련된다. 그러나 ‘나’의 정체성이 두 사람의 만남에 기반해 변화해간다는 점에서 일인칭은 그저 단독적인 성격만 갖고 있지는 않다.
  3. 남상욱 「‘K’가 만들어가는 ‘보편’의 향방」,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류수연 「글로벌, K-컬처와 김기태의 소설이 말하는 것들」, 『문장웹진』 2024년 9월호.
  4. ‘두 사람’들의 역사로 시작하는 소설의 도입부가 그 점을 암시하고 있다. 김건형은 이 대목이 밈의 화법에 가깝게 구성되어 있다고 적절하게 지적한다. 맑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두 사람’들의 역사를 계보화하는 원리가 역사적 인과에 대한 분석에 의거하지 않고 ‘두 사람’ 자체를 기호화하여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의 유사성을 찾아내는 즐거움의 문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김건형 「김기태의 즐거운 시민들」,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5. 그래서 ‘친한 사이’는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친밀감을 뜻한다기보다 비인칭적이고 비언어적인 형태로 세상에 넘실거리는 역량으로 인식된다. 문학평론가 백지은은 이러한 ‘친한 사이’의 의미를 그것이 행위하는 주체가 아닌 “이 세계의 한구석에 자리 잡은 객체”로 묘사된다는 점을 통해 설명한다. 소설이 제3자의 화자를 설정해 두 사람의 역사를 동등하게 병렬시켜 묘사한다는 점, 그럼으로써 재현의 가시성이 화자의 위치가 아닌 “말해진 것들의 동등(평평/평등)한 평면”으로부터 발생된다는 것이다.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3)」, 『문장웹진』 2023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