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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민주주의적 감정과 새로운 문학
‘니’와 인간의 공동체
황규관 黃圭官
시인. 시집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비평서 『리얼리스트 김수영』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등이 있음.
grleaf@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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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광장에서 들었다. 친위쿠데타를 획책한 대통령의 파면을 ‘함께’ 느끼고 싶어서 부러 광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윤석열이 일으킨 쿠데타는 대한민국 사회에 꽤 긴 감정의 침전상태를 초래할 정도로 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를 가져다주었으며 그것이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다. 쿠데타 주도세력을 통해 그동안 은폐된 채 현존해 있던 충격적인 우리 사회의 일면이 드러난 사태는, ‘윤석열의 시간’이 ‘박근혜의 시간’과도 또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깊게 각인시켰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동의 그림자가 넓고 깊었다는 사실 앞에서 적잖은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비구름처럼 몰려오기도 했다. 예컨대 현실로 존재하는 윤석열 지지세력 혹은 극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물으면서 적대시를 경계하고 ‘대화’나 ‘공존’을 주장한 글들1과 그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갈피없이 치솟아오른 실례가 된다. 이것이 ‘박근혜 때’와 다른 지점이다. ‘박근혜 때’는 나름대로 한뜻을 모아 사태를 종결시킬 수 있었지만, ‘윤석열 때’는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중국인’이나 ‘이재명’이라는 적대적 타자를 만들어 나타나는 착시 같지만, 아마도 이번 현상의 뿌리는 깊은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현상이라는 이파리는 쉬 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쿠데타와 동시에 떠오른 현상에 대한 상당한 지적 분석과 그 역사적 계보와 관념의 토대를 찾아나서는 정신적 노고를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껏 우리 현실에 대한 심층적인 공부와 실천들이 부족했기에 이런 사태와 현상이 터졌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우리의 자세와 수련에 따라 천우신조의 ‘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특히 시는 인간의 감정을 일차적인 출발지이자 도착지로 하는 장르인바 ‘사회적 감정’의 출렁임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의 감정이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전제가 어느새 성립된다. 그런데 여기서 감정이란 무엇일까? 스피노자(B. Spinoza)는 『에티카』(1677)에서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한 다음 “정서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은 신체 자체나 신체의 어떤 부분이 가지는 활동력이나 존재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했다.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이나 정서에 대한 신체(몸)의 우선성이다. 즉, 감정이란 것은 신체에 의존적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칸트를 읽으며 ‘직관’과 ‘사유’를 인식의 요소로 파악하면서 사유는 직관에 의존한다고 말한다.3 직관의 능력은 마음이 가지는데 사유가 마음의 작용으로서의 감정에 의존적이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은 스피노자처럼 그 중간에 신체가 개념적으로 자리잡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에게 있어 감정, 즉 마음의 작용을 우선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공동체라는 것이 몸과 몸의 연결이라는 차원을 갖는다면, 마음 차원에서도 그 연결을 유추하는 일에 논리적 하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클리셰나 혹은 지적 나태로 읽힐 수 있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게 논파당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윤석열‘들’이 기도한 쿠데타로 인해 깊은 감정의 공동체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물론 ‘감정의 공동체’라는 말은 모두가 갖는 감정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공동체’는 무차별적인 동일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차별적인 동일성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강압이 일으킨 환영일 뿐이며, 민주적인 공동체를 상상할 때는 도리어 비추는 빛에 따라 반사되는 빛이 다른, 즉 내적 구조와 밀도가 다른 구슬들이 한데 모여 통일된 색조를 띠는 것 같은 이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연합적인 조화를 건강한 민주주의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당연히 이 조화는 부단히 해체되려는 힘과 서로 곁이 되려는 힘이 공존하는 관계양식을 말한다. 여기서 ‘구슬’이 환기하는 것에는 감정이 제외될 수도, 제외될 리도 없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에서 집단의 감정을 재구성하는 시의 역량과 책무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물론 시의 역량과 책무가 어떻게 발현되고 또 발현되어야 하는지는 구체적인 현실이라는 냉정한 조건을 통해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설령 현실적 조건이 시의 역량과 책무를 축소시키거나 은폐한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시 자체의 위의와 본질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현실적 조건의 변화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할수록 시가 공동체의 감정에 대해 져야 할 십자가는 무거워진다고 봐야 옳다. 하지만 작품의 현실성은 어디까지나 시인 개인의 감정에서 시작되어 개인인 독자의 감정을 변화시킨다는 평범한 진리를 놓쳐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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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여섯번째 시집 『니들의 시간』(창비 2023)은 사람의 삶에서 사람 아닌 존재의 삶까지, 구체적인 생활의 세목에서 역사적 상황과 우주적 영역까지 포함하고 있다. 김해자의 시에 독자의 감정이 움직이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시인의 감정의 동요가 고스란히 작품에 전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의 동요라는 것이 좋은 시에서는 항용 그렇듯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동요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도리어 김해자의 시에는 집단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데, 여기서 집단적인 감정이란 추상적이고 평균화된 전체의 감정이 아니라 시인의 감정 자체가 집단적인 관계를 통해 형성된 감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김해자의 시는 어쩔 수 없이 복수인 그 감정‘들’을 담고 있는 그릇이 된다. 다음의 시를 보자.
물은 안 되겄고, 눈 감고 뛰어내리믄 괜찮을 거 같어 저짝에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죽을 맛이더라고. 이제 죽으나 저제 죽으나 죽을라고 올라가는디, 허리가 아파 죽겄어. 나는 모르겄지만 흉한 꼴 볼 사람들 떠올리니께 도저히 못 뛰어내리겄데.
별이 저리 많아도 달 하나 못 구하나
별이 아무리 여럿이 박힜어도 달 하나만 못혀
하이고야, 저 하늘 좀 봐 목화송이마냥 훤혀
물에 처박힜다 꽃이 되었구마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 어디까정 갈지 모르겄지만 살다보믄 무슨 수가 있겄지. 그냥 살기로 혔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으니께 살아야지. 나 죽네 나 죽네 하믄서도 세상은 돌아가잖여.
야아 달이 살아났네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
—「월식」 부분
인용 부분(4~7연)은 작품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여기서 시의 화자는 “자식 놓쳐불고 죽을라고” 했던 여인이다. 작품은 전체가 화자의 입말로 구성되어 있는데 1, 3, 5, 7연은 제목인 ‘월식’에 걸맞게 달이 사라졌다 다시 부활하는 과정을 화자가 혼잣말처럼 내뱉고 있지만 청자가 숨어 있는 구조를 취하는 서정시의 형식이다. 반면 그 사이의 2, 4, 6연은 행의 구분 없이 화자에게 실제 있었던 사건을 진술하는 이야기시의 형식이다. 이렇게 이야기의 특성을 활용하여 서정시의 깊이를 확보하고 그 외연을 넓히는 방식은 김해자 시인이 자주 활용하는 형식구조다. 이는 아마도 이야기와 노래 둘 다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이 시는 자발적으로 죽음 가까이 다가갔다가 서서히 삶의 영역 쪽으로 옮겨오는 화자의 마음에 대한 것이다. 자식을 앞세운 여인이 처음에는 자살의 장소로 강을 택했다가 “맴만 젖”고 만다. 물이 “허리까지 차니께 몸이 붕 뜨”고 말아서 죽으러 갔다가 도리어 삶의 부력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죽어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역설적이게도 몸의 고통을 통해서 삶을 느끼게 된다. 결정적으로 남에게 자신이 죽어서 보일 “흉한 꼴”을 포기함으로써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며 죽음으로 난 쪽문을 닫아버린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몸의 역할이다. 2연에서는 물에 들어간 몸이 수면 위로 붕 뜨고, 4연에서는 아픈 허리를 붙잡고 옥상 꼭대기로 올라가는 게 “죽을 맛”이다. 몸이 고단해진 것이다. 그 몸의 실감을 통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다는 구체적 진실을 깨달으면서 삶의 방향 쪽으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른바 ‘객관적인 눈’은 화자의 증언에서 과장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화자의 증언을 작품으로 빚어내면서 녹아 들어간 시인의 진실한 마음이—설령 화자의 증언이 과장일지라도 그것마저 넘어선—삶의 의지를 부활시키고 있다.
1, 3, 5, 7연은 달의 사라짐(죽음)에서 다시 나타남(부활)까지 노래의 형식으로 독자의 감정에 물결침으로써 더욱더 화자의 증언이 진실임을 밀어올린다. 특히나 마지막 7연의 “야아 달이 살아났네/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는 개인의 경험을 훌쩍 넘어서는 자연의 본질, 즉 은폐와 생성(poiesis)의 반복이라는 진리의 영역에 해당된다. 이 진리의 영역이 가능했던 것은 화자의 변화하는 마음과 몸의 작용을 시인이 세밀하게, 하지만 과잉되지 않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화자의 마음 변화, 즉 죽음에 기울었던 비탄에서 삶을 향한 자기보존(혹은 극복)의 감정으로 전환하는 운동은 일면 화자 개인의 것인 듯하지만, 이 시의 이면에 흐르는 것은 개인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운동하는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민중의 마음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김해자가 파악한 민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관념적인 자의식을 벗어나 자신의 몸이 다른 몸과 연결돼 있다는 실감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하게 된 긍정의 감정이다. 달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월식현상을 어떤 부활로 노래하는 짝수 연은 홀수 연에서 도드라지는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 고대 그리스 비극양식에 비유하자면 디티람보스(dithyrambos)의 역할을 한다. 디티람보스는 본래 고대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축제기간 중 마지막 행사로 벌이는 비극 경연대회에서 각 부족 대표로 참가하는 민중 합창단을 뜻하지만, 니체(F. Nietzsche)는 디티람보스가 비극 전체에서 “자연의 가장 숭고한 표현, 즉 자연의 디오니소스적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즉 디티람보스는 “함께 고통을 겪는 자로서 동시에 현자이며, 세상의 심장으로부터 널리 진리를 전하는 자다.”4
기억해야 할 것은 단수의 목소리라 하더라도 그 목소리에 복수의 감정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개별자라 하더라도 감정은 복수의 갈래가 뒤엉켜 있다는 게 진실에 가까운데, 이는 앞에서 말했듯 개인의 감정은 집단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에 의해 입증되기도 하지만 감정이 의존하는 몸 자체가 이해(利害)를 떠난 여러 생명의 복합체라는 과학적 사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민중의 아픔과 설움을 “대신 울어주러”(「버버리 곡꾼」, 『집에 가자』, 삶창 2023) 온 경우에서 보듯, 김해자의 시는 시인 자신의 감정과 민중의 감정이 동시적으로 울리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그의 시세계에서 예외적인 게 아니라 일반적인 경향이다. 한 몸에서 한 감정의 노래만 흘러나오는 전통적인 서정시나 혹은 단수의 감정인데 복수의 목소리인 것처럼 ‘기획’하는 이른바 현대시의 ‘다성성’은 몸과 마음의 관계망이 존재론적으로 앞선다는 차원에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다.
「월식」이 시적 화자의 삶을 통해 민중의 삶에 대한 긍정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면 「니들의 시간」은 한참 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차원을 확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 자신의 몸이 귀속돼 있는 시간과 공간과 차원에 그것을 초월하는 상상력이 들어오면서 시의 선형적 구조는 흐트러지고 만다. 즉 작품에 다른 기(氣)가 내유(內有)함으로써 「월식」보다 복잡한 구조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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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도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삵이 마을을 어슬렁거린다는 소문
밤 창문을 닫으려다 흠칫 놀랐어요
누군가 여태껏 훔쳐보기라도 한 듯
뻣뻣한 털들이 돋아난 유리창은 거대한 눈,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찔릴 것 같았지요
수상쩍은 날들이 이어졌어요
이상스러운 생물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죠
봄이 오긴 온 건가요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면 안전해지긴 할까요
이끼 낀 계단이 노려보았어요
맘만 먹으면 어디서든 넘어뜨릴 수 있다는 듯
모서리가 너무 많아요
2
비늘구름 속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녔어요 인형 속에 인형, 탄두 속에 탄두, 아이 손에서 터지는 탄두 속 작은 집속탄, 밀밭은 보고 있었죠 무너진 담벼락과 흩어진 살점들, 폭격에 쓰러진 나무가 가리키고 있었죠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 떨어진 토치카-U 로켓에 쓰인 흰 글씨, ‘어린이를 위해서’
겨우내 참았던 씨앗이 버럭 솟구친 것처럼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울화
남몰래 사그라진 화장장의 연기는 지구를 몇바퀴나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요
살아도 죽어도 제로가 되는 수치
한낮에도 귀신이 출몰한다는군요 소금을 바가지로 뿌려대다
영구 엄니는 옥수수밭에 서 있는 발 없는 귀신들에게 넙죽 절했다죠
한잔 받으시오, 고수레
술 가득 부어, 고수레
삭삭 빌었다죠 손가락 넣고 휘휘 저어
석잔 대접하고야 놓여났다죠
발 붙들고 놓지 않는 산 그림자
(…)
5
니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산산이
공들여 ✕자를 붙였어도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창에 비치던 너와 나의 얼굴
우린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앞으로 올 니들을
니들의 시간을
—「니들의 시간」 부분
먼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이 부른다는 “니”에 당연히 주목해야 한다. 우데게족에게 ‘니’는 형체가 있든 없든 모든 존재자들을 부르는 명칭이면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절된 시간을 초월해 “깃든 모든 영혼”이다. 그러니까 ‘니’는 시간과 공간, 유형과 무형을 떠나서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지금 자신도 그런 ‘니’에 둘러싸여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니들의 세계’는 이미 깨어졌다. 1절에서 그런 징후를 드러내다가 2, 3, 4절에서 시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니’가 사라진 세계 또는 ‘니’의 의미가 타락한 현실에 대해 마치 “고수레”하듯 읊조린다. 그런데 ‘고수레’의 의미와도 연관되는 것이지만, 마치 혼자만의 넋들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전체 작품의 복판격인 2절과 3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고수레’ 장면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2절 1연의 (우끄라이나)전쟁 상황과 2연의 원망과 미움에 가득 찬 현실은 이어져 있는 인과관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시인은 어디까지나 조각보를 기우는 듯한 방식을 쓰고 있기에 전쟁과 미움의 연관관계는 읽는 독자마다 다르게 경험되기도 한다. 그뒤 이어지는 3절 2연에서도 역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찬 현실이 지금 시인의 마음을 치고 있음이 충분히 느껴진다.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든가 “니는 대체 왜 그래”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숱하게 뱉어내고 또 듣는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런 원망의 언어 “없이” “니라 부르면 니가 나처럼 느껴질까요”라고 묻지만, 이미 현실에서는 “연해주에 사는 우데게족”의 “니”는 다 파괴되었다. 물론 우데게족의 ‘니’와 한국어 ‘니’의 실제 의미는 다르지만 소리를 빌려와 동일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가 가진 특권의 문제이며 시인은 그것을 근사하게 해냈다.
그런데 “니가 나와 섞”이지 못하는 현실과 ‘니’를 향한 원망과 미움은 막연한 심리적 뒤틀림이 아니라 우리의 근대가 차곡차곡 쌓아온 업(karma)에 다름 아니다. 4절 2연의 “니가 깎여 나가는 동안 허리가 묶인 물고기들처럼/아무리 헤엄쳐 가도 헤어지지 못하는 사이(우리는 우리가 아니야)”에서 그 일면을 제시하면서 시인은 그 업에 무릎 꿇고 비는 대속(代贖)행위를 한다. 누구에게? “한낮에도” 출몰하는 귀신—다름 아닌 ‘니’들—에게. 우리는 지금 귀신마저 원망에 차 “안전 안내 문자”처럼 출몰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게 귀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귀신의 목소리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이 대신 빌고 있는 것이다.
근대가 자신의 업을 고쳐보겠다고 더 쌓고야 만 업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시인 자신의 “고수레”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절인 5절에서 다시 무너지듯 내뱉는 탄식은 그런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우린 어쩌다 앞으로 올 존재들과 그들의 시간을 다 먹어치워버렸나. 그렇다면 ‘고수레의 마음’은 죽었다 살아나는 달(「월식」) 같은 자기치유와 닮은 마음 아닐까. 귀신에게 비는 마음이 일종의 ‘향아설위(向我設位, 제사 지낼 때 조상의 신위를 벽이 아니라 ‘나’로 향하게 함)’라면 결국 자기 마음에 비는 행위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월식」과 「니들의 시간」은 그려내는 시공간의 폭이나 그 형식은 다른 작품이지만,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민중의 자기치유를 통한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기통치만이 결국 ‘니’(타자)에 대한 성찰과 ‘니’(귀신)에 대한 기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시적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죽임과 좌절, 원망과 혐오로 얼룩진 우리의 세계가 나아가야 할 근원을 가리키지 않는가?
동학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隹濟愚)가 경신년(1860) 4월 종교체험을 할 때 들은 첫 말은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吾心卽汝心)”였다. 최제우는 가뜩이나 세상이 어지럽고 민심이 좋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서양 제국주의가 괴이한 언어(기독교)를 앞장세워 무력까지도 불사하며 밀어닥치고 있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려는 바람과 기도가 깊고도 깊었던 것일까. 급기야 신다전한(身多戰寒), 즉 몸이 심하게 떨리고 춥더니 새로운 기운이 느껴지면서 순간적인 깨달음인 확연대오(廓然大悟)가 찾아왔다. 이때 들려온 말이 “내 마음이 너의 마음이다”였고, 이어서 “사람들이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알지 못한다(知天地而無知鬼神)”는 말이 들려왔다. 여기서 ‘귀신’은 도올 김용옥의 번역으로는 “천지의 또 다른 영묘한 이름”이라 했거니와 최제우가 몸으로 접한 새로운 기운(接靈之氣, 신령과 맞닿아 합일하는 기운)을 일컬을 것이다.5 그런데 최제우의 ‘귀신’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의 “니”와 의미상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김해자의 시는 ‘니’로서의 ‘귀신’이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산산이 부서지면 “안전 안내 문자”같은 악귀(惡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사유에서 기(氣)는 뭉쳤다 흩어졌다 하면서 영원회귀하는 실체로서, 그 기의 운동에 괴변이 생기면 기에 감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과 마음도 헝클어지고 만다. “인간 안에 있는 것은 신령이요 인간 밖에는 기의 운동”(「동학론」, 『동경대전』)이라는 말은, 기(氣)와 영(靈)은 내재적으로 같은 것이며 그래서 함께 운동하고 함께 변화하는데 그중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영은 신령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최제우는 인간을 일러 최령자(最靈者, 가장 신령한 존재)라고 했던가. 따라서 우주 전체 혹은 우리가 사는 지구나 지역의 기에 문제가 생기면 그 안의 모든 생명·사물에 깃든 영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인간 안에 모셔져 있는 ‘신령’도 위태로워진다. 최제우가 ‘시천주(侍天主)’를 강조한 것은 이런 상태일수록 우리 안의 신령을 배신 혹은 불신하지 말고 마음을 닦고 기를 바로 하라는(修心正氣) 바람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언어의 타락과 타자를 혐오하는 영혼이 절정에 달해 있는 오늘날에 비춰 볼 때, 기의 운동 변화에 심대한 차질이 생겼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일단 기후변화로 나타나고 있으며 당연히 기후변화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생태계를 교란·파괴한 탓이라는 것에 이제 다른 토를 달 수가 없게 됐다. 생태계의 교란·파괴라는 것은 결국 “니들의 시간을” 먹어치워버린 것과 같은 의미다. 다른 사물과 타자 또한 기의 형체이고 그 안에도 우리가 모르는 영, 즉 ‘니’가 깃들어 있는데 그것들을, 아니 “앞으로 올 니들”까지 먹어치웠으니 그 ‘니’가 다른 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게 바로 ‘악귀’이고 그 악귀의 파토스는 원한과 혐오이며, 그 파토스의 로고스 형태가 언어의 타락인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존재의 목자’이고 시인이 ‘언어의 파수꾼’이라면, 김해자의 「니들의 시간」은 목자의 역할과 파수꾼의 임무에 응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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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민주주의’는 너무도 지당한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맥락은 점점 더럽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재자도 자본가도 관료들도 그리고 파시스트도 민주주의라는 ‘말’을 차마 버리지 못한다. 어찌 보면 현대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증명 방식 같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는 주인된 민중이 스스로 정치의 방식을 계발해 나아가면서 그 방식에 따라 스스로 정치를 하는 체제를 말한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체제가 과연 ‘주인된 민중’을 어떻게 괴롭혀왔는지에 대해서는 묻기를 주저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저는 자연과 신성(神聖)의 파괴와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자연과 신성이 곧 민중의 삶의 거처이며 존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신성을 파괴하면서 자연과 사물을 지배받아야 할 대상으로 격하시킨 근대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물은 상품생산을 위한 원료창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적 경제관념을 제공했으며, 이 비도덕적 경제관념이 수탈과 식민, 착취와 파괴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논리로 이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역사는 과거지사일 뿐이고 식민지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집단무의식이 혹 형성되었던 것일까. 그래서 웬만한 신생독립국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그 반대쪽의 암흑은 모르쇠해왔는지도 모른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감정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의 상태, 즉 여타의 활동력과 존재력에 따른 것이라면, 다른 신체로서의 사물, 그리고 그것들의 연합이자 존재 근거인 자연상태가 변질되면서 우리의 신체와 감정에도 비례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여러 병증(病症)을 통해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이런 상황이 우리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뒤틀린 감정을 만들었을지 모르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주인된 민중의 자기통치’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락한 교의와 정치이념에 맹종하는 노예의 감정을 퍼뜨렸을 것이다.
시가 감정의 변화 속에서 시작돼 다른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해서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계몽에 몰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 감정을 절대시하는 감정의 독재를 낳을 수도 있다. 먼저 우리 시대의 감정‘들’의 결을 섬세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의 연원을 제대로 사유하는 일의 동시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현대의 철학적 경향에는 대체적으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또다른 기계로 보려는 관점이 강한데 이 또한 역사적인 관점의 결여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 대한 사유 자체가 ‘근대인’에 한정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역사의 국면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우리가 품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왔으며 시대적 국면과 어떻게 조응해왔는지 종합적인 인식이 이루어진 바탕 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직관도 풍성해질 것이다. 이는 사유와 인식이 직관에 의존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뒤집는 게 아니다. 인식의 새로움은 다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은 다시 자유로운 사유의 촉발로 되먹임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과 정신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몸과 마음과 정신이라는 구분법은 인간이 가진 언어의 한계에 따른 것이며, 어쩌면 한계 자체가 인간 존재의 본질에 해당될지 모른다.
다만 민주주의에 대한 랑씨에르(J. Rancière)의 말마따나 시가 꿈꾸는 민주주의가 “행태들을 갱신하는” 일이나 “주체의 새로운 출현”6 등에 머문다면 어딘가 미진해 보인다. 주체의 ‘분할’이나 감성의 ‘분배’ 같은 것에 치중하는, 인간 ‘주체’로 꽉 찬 민주주의는 기계적 평등과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권리의 횡행을 가능케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인간 ‘주체’의 범람으로 ‘니들’의 세계인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다)의 공동체, 인간만이 아닌 모든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몸과 마음의 공동체가 깨진 상태다.
근대적 주체, 곧 ‘나’는 서구의 근대 정신사에서 신과 ‘능산적 자연’(스피노자)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은 관념의 토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로서의 ‘나’의 강조가 인간을 위하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주체 개념을 다른 존재자에게까지 확장하는 현대의 철학적 경향은 사실 인간 아닌 존재를 의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인간중심주의의 변종에 가깝다. 인간 존재의 고귀함이 점점 납작해져가는 상황은 인간이 ‘니들’을 먹어치운 상황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시가, ‘니’의 회복을 어떻게,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당연히 그 감당을 회피하기 위함도 아니고 회피를 위한 알리바이로 작용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는 주어진 현실을 통과하며 넘어서기 위한 ‘신다전한(身多戰寒)’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신다전한이란 결국 자기 시대의 토양, 공기, 귀신, 욕망, 꿈과 한몸이 되면서 맞는 고통일 것이다. 시에 가르침의 임무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보다 먼저 시가 ‘니’와 한몸이 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 몸에서 나온 작품이 현실의 집단감정에 동요를 일으키면서 다른 세계에 대한 감정이 생성되는 창조적 순간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순간의 다중공유가 가능해진다면, 이때를 새로운 시운(時運)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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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박권일 「윤석열의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한겨레 2025.3.24; 정희진 「내전과 공존」, 경향신문 2025.3.18.↩
- B.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202~203면.↩
- 마르틴 하이데거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1, 127면.↩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74면. 니체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부정하지만 역설적으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중우화(衆愚化)되면서 비극이 몰락하는 계기가 됨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를 비극을 몰락시킨 구체적인 인물로 지목하며 ‘그리스의 명랑성’(“어려운 것을 책임지지 않고 원대한 꿈을 추구하지 않으며, 지나간 것이나 미래에 올 것을 현재 있는 것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는 노예들의 명랑성”, 92면)에 대한 부박함을 비판한다. 이때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그 건강성을 잃은 시기이기도 했다. 신화와 음악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비극이 합리적 이성이 지배적이었던 아테네 민주정 시기에 번성했던 것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비합리의 세계(운명, moira)에 대한 의식이 아테네 시민들의 시민적 덕성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가 확보해준 문화가 토양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 기대 말하자면, 예술이 종교(철학)와 정치를 이어주는 동시에 그 둘을 통합하는 교각이 되어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을 (오늘날의 경우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그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이 다시 예술이 샘물이 되는 역동적인 관계를 말이다.↩
- 이상 원문과 번역은 도올 김용옥 『동경대전 2』, 통나무 2021, 118~19면 참조.↩
-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13, 110~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