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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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아 柳賢兒

시집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 『슬픔은 손톱만큼의 조각』 등이 있음.

decs45@hanmail.net

 

 

 

그러나 없습니다

 

 

바람이 살짝 부는 아침이네. 새벽의 허기는 당분을 부르네. 호두파이를 허겁지겁 먹었네. 허기가 가시지 않은 나날이 계속되네. 누군가는 몸에서 고드름이 자라나는 시절이겠네. 바람 곳곳에 칼등이 숨어 있기에 날카로운 것이네.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리네.

 

기다리는 목소리가 있다

목소리의 이름을 기다린다

불필요하게 용감한 사람들은 대부분 겁쟁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입 없는 사람이 입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다

입 여는 시간은 늘어나고 말하는 시간은 줄어든다

 

성명서에 서명하는 사람들은 목소리가 있나

불탄 목소리를 이어 붙이는 사람들은 이름이 있나

 

3월에 내린 눈을 맞으며 걷는 4월의 다리는 지워지고 허기는 또 찾아온다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어떤 목소리들은

오후가 지나면서부터는 순순히 누그러진다

 

여기저기 버려진 목소리들을 채집하는 이름

덕분에

봄이 하루 더 가까이 오고 있지만

우린

각자의 방식으로 엉망진창이 되길 기다린다

 

 

 

그늘 옮기기

 

 

아버지는 그늘이었으므로

새벽에서 오후까지 그늘의 이동 동선을 따라 몸도 이동했다

그것은 살아 있음의 흔적이 되는 순간

 

아버지는 그늘이었으므로

살아 있는 몸이 죽을 몸을 위해 묻힐 곳을 찾는다

땅에서 잠들고 싶은 마음을 욕심이라 부르면서

그늘을 이제 분리하고 옮기려 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늘이었으므로

그늘 안까지 들어가본 적 없다

더 크게 원을 그려 햇볕이 그늘질 때까지 그늘이 되어 기다렸다

약간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그늘이 사라지기 전에 그늘을 햇빛 쪽으로 옮기려는 사람

때문에

끊임없이 아프고 불행했다

우린

 

아버지는 완전한 그늘이 되어 잠들 땅을 나와 함께 찾는다

아버지의 몸은 사라지고 있지만 그것이 그늘이라고 얘기했지만

아버지는 그늘을 찾아 움직인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거대해서 입 밖으로 내미는 것이 두렵다

슬픔이라는 단어는 너무 소소해서 입 밖으로 술술 나온다

그것이 그늘 곁에 있는 이유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