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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민하 李旻河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미기후』 등이 있음.
poemian25@hanmail.net
제너레이션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맴돌아도 문이 보이지 않아서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도 너만의 비밀을 주머니에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린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우리를 내려놓자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커다란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자연의 것
옷을 입은 고양이 같다고나 할까요. 나다운 건 무언가. 혼자서는 알 수 없고 거리에선 고장이 납니다만.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희비극 속에서,
사람도 많았고 음식도 많았는데요.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말했어요. 난 비건이야. 비구니야? 하마터면 그럴 뻔했어요. 그녀가 웃는 게 좋으니까요. 딱히 고기를 먹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만. 신경이 쓰일까봐 선수 친 건데요. 그런 게 배려는 아닐 텐데요. 사실 난 서른 전에는 풀만 먹던 사람인데요. 입과 마음이 한몸이라 굶기도 잘하는데요. 싫은 건 끼니도 기도도 키스도 입에 대지도 않는데도요.
카멜레온의 보호색은 자체 변색이 아니다. 환경에 따라 우리의 눈을 속이는 거다. 홍색소포라는 피부 반사판을 통해 특정한 색만 반사시켜 보여주는 것. 생존과 의사소통을 위하여! 360도로 눈알을 굴리면서
명절날엔 담배를 참아요. 오빠들은 담배를 끊었대요.
위하여! 서른살에 시작했던 건 육식이 아니라 회식이었습니다만.
맞아요, A형입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인프제고요. 게다가 시를 씁니다. 부끄럼이 많아요. 혀도 길어요. 혀 밑에 숨어요. 막말을 하고 나면 땅을 쳐요.
물 흐르듯이 쓴다는 건 무언가. 기승전결. 자연스럽게 꾸미려고 자꾸 손을 대요.
그날은 반가운 친구도 만났는데요. 20세기 시인 말이죠. 20세기 20세기 그러길래 나는 21세기 시인이라고 선을 그었어요. 6개월만 반올림하면 맞거든? 하마터면 그럴 뻔했어요. 웃기지도 않을 텐데요. 딱하지도 않을 텐데요. 20세기에 죽은 나는 아무도 모르는데도요.
사마귀가 사마귀 등에 올라탄다. 사마귀는 살고 싶지만 하고 싶다. 주저하는 수컷의 머리를 지켜보던 암컷이 먹어치운다. 머리가 사라진 사마귀는 몸만 남아 더 열심히 한다. 더 많은 탄생이 있을 것이다.
머리를 떼어놓고
혼자서 핥는 뒤통수처럼
나는 21세기에 살아남아서 고기도 먹고 거짓말도 해요. 디저트로 20세기도 씹어요. 이십세기는 일본산 배의 품종 이름. 엷은 초록색이며 9월 중순에 익는다.
지구의 밤도 익어가고
멀리서 반짝이는 화성도 익어가고
호모사피엔스의 고독도 무르익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난다.
회색 피부의 로봇들이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귓속말을 한다. 없애버릴까? 무심한 아메카의 농담을 엿들으며
나는 늙은 나무처럼 누워
팔다리에 붙어 있는 고양이들을 나뭇잎처럼 어루만집니다.
물 흐르듯이 산다는 건 무언가. 생로병사. 자연스럽게 사라지려고 아침엔 요가를 해요.
고양이들을 먼저 보내려고 죽음을 미룹니다. 내 품에서 죽어라. 내가 낳았다는 듯이.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 나의 멸종을 지켜봅니다. 참으로 깁니다.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꿈을 깨듯
알을 깨듯
사람의 껍데기를 터널처럼 통과하면 자연으로 돌아갈까요. 자연은 갖지 못한 내 딸의 이름. 언젠가 태어난다면 자연이라 부르고 싶었어요. 그날의 미래는 영원히 미래일까. 오늘은 자연을 낙태했다는 기분이 듭니다. 자연이 그리운 밤이에요.
눈꺼풀을 이불처럼 덮으면
내 앞에서 문장이 사라집니다. 문장에서 내가 사라지는 걸까요.
인생에서도 내가 사라지고 나면
몰입했던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배우처럼
현장을 떠도는 귀신이 될까요. 그러다 현장범처럼 덜미를 잡히고
유품정리사가 말합니다. 좋은 데 가서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마지막 이사를 도와드릴게요. (일제히 묵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