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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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미 陳秀美

1970년 경남 진해 출생. 1997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밤의 분명한 사실들』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등이 있음.

shistory@hanmail.net

 

 

 

봄의 트릴로지

 

 

최초의 기억은 음악과 관련이 있다.1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음표들

누구나 허공에 발을 적신 기억이 있지.

아른아른 사라질까 말까.

저 봄볕

저 보리밭 사잇길로

 

용산

남태령

광화문을 지나

 

봄의 라디오는

지지 지지직 노래가 되지 못한

여분의 소리를 담아

햇살과 함께 건네곤 했다.

 

저 겨울의 함성이 노래가 될 때까지

나무는 결심한다.

목 기다란 동물처럼 우두커니

할 테다. 공기의 터진 실밥들 모두

모른 척할 테다.

 

지지 지지지직

불꽃으로 타오르는 음악

검댕이 묻은 얼굴들이

드럼통 위로

노래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솟아올랐다.

 

최초의 기억은 물과 관련이 있다.

 

당신은

내가 처음 만난 물

엑소시스트 소녀처럼 천장에 붙은 내가

구토를 하네. 누군가 주문을 외고

몸을 찢고 달아나는 것을 느꼈네.

좌르륵 쏟아졌네.

 

원죄?

그런 건 없어.

 

언수도녹임

그런 간판에 꽂혀서

하루 종일 얼음조각을 지나는 물소리에 귀를 주었다.

 

수도꼭지를 돌렸더니

얼어붙은 귀가 쏟아졌어.

푸르딩딩

네가 두고 온 눈코입이 세면대에 가득했어.

한낮의 햇살이 통과 못하는

사월의 바다 속

 

너의 이름을 부른다.

물처럼 투명해지는 입술들

 

최초의 기억은 돌과 관련이 있다.

 

최초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치읓이 닳고 닳아

모음만 너덜거릴 때까지

 

무엇이든

세번 이상 반복하면 있어 보인다.

 

요정 이야기처럼

뒤꿈치는 바닥을 세번 차고

소원은 단 세가지

호리병의 정령이 외친다.

수수께끼도 세개

악몽의 삼종 세트를 펼친다.

 

저 먼 섬

사월의 도로를 달릴 때

붉은 꽃을 매단 나무들이

심장이 여럿인 동물 같다가

피 묻은 주먹을 매단 팔다리 같다가

붉은 물이 든 돌멩이가 무거워

떨구고 마는 푸른 치맛자락 같다가

 

돌연

하얗고 노란 꽃이 만발한 도로가 펼쳐진다.

모든 것이 도로 아미타불

세상만사

도로 아미타불

 

그러므로

 

도로를 달리자.

신나게 질주하자. 신이

펼친 망각의 손바닥 위를

 

사춘기 뺨에 주먹을 날리던 아빠

새들이 철길 위로 날아올랐네.

돌멩이의 기억을 버리고 띄엄띄엄 말씀하시네.

소년들이 철로를 두드리며 걸어가네.

유순한 미소를 흘리시네.

 

용산

남태령

광화문을 지나

 

태양이 주먹을 풀 때

사라진 빛의 돌팔매는 어디에 가닿았는가.

 

직업이 무엇입니까?

무직입니다.

 

세계의 소속을 묻는

봄의 법정을 지나,

돌멩이가 아지랑이를 꿈꾸는

밤을 지나,

 

노래가 점화된 가슴을 지워버리는

손가락 세개

 

 

 

휴학생

 

 

죽은 네가 나타나 미치겠다. 네 손가락이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는 걸까.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근데 우리 별로 안 친했잖아. 따로 만난 적도 없잖아. 근데 네 생각이 왜 자꾸 나는 걸까. 너의 마지막 시선이 향한 곳을 궁금해하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했던 내 목소리가 바보 같아서, 바보 같아서, 네가 떠나간 날 대문의 바람 소리가 너였을 거라 오랫동안 생각했어. 그때 벌떡 일어나 대문 밖으로 나갔었잖아. 빈 골목을 바라봤잖아. 검은 고양이만 밤의 담벼락을 타고 뛰어갔는데. 교무실에 서 있던 게 진짜 너였는지 궁금하고. 휴학계에 뭐라 적었는지 궁금하고. 졸업하고 이사를 열번도 넘게 했어. 이제 우리 집은 아파트야. 바람 불면 양쪽 베란다 창문이 덜컹거려. 그때마다 중얼거려. 철민이가 왔구나. 철민이가 왔구나. 솔직히 말할게. 살아 있을 때는 네가 궁금하지 않았어. 죽은 새들이 머리에 둥지 짓는 꿈을 꾸어도 그건 너와 무관했어. 그전에 그건 온전히 내 것이었는데. 시간의 서랍들이 한꺼번에 열렸을 때 네가 죽음의 드롭스를 떨어뜨렸나봐. 그걸 빨 때마다 혀가 아리고 잇몸이 진흙처럼 녹아내려. 죽음이란 강철 사탕을 빨다 빨다 지치는 걸까. 몸을 포기할 정도로 힘이 센 걸까. 아무리 빨아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란 어떤 걸까.

 

 

  1. 데니스 루헤인 『전쟁 전 한 잔』(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2009)의 첫 구절의 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