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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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千良姬

1942년 부산 출생.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새벽에 생각하다』 『지독히 다행한』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등이 있음.

 

 

 

말의 힘으로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말

 

얽힘에서 풀려

새로움으로 나아간다는 말

 

매화가 필 무렵이면

휘파람새가 찾아든다는 말

 

지는 해는 붉음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려 있다는 말

 

나뭇잎이 나를

잎사귀라 생각할 때까지라는 말

 

좋은 책에서는

야생의 향기가 난다는 말

 

여운이

수평선처럼 길게 번져간다는 말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이란 말

 

자신의 껍질을 깨부수는 힘은

자신에게만 있다는 말

 

우리들 앞에 벽이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보라고 있다는 말

 

우리들 앞에 길이 있는 것은

앞으로 걸어가다가도

가끔씩 뒤를 돌아보라고 있다는 말

 

내가 달려온 길에

후회가 없도록 살피기 위해서란 말

 

고난이 기회를 준다는 말

 

고독의 정적을 통해

말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말

 

말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소통력이란 말

 

그 말의 힘으로

우리는 다시 삶을 시작한다

 

 

 

시인이 좋아하는 시인 2

 

 

멀리 가서 멀리 오는 눈을 맞는다는

시인을 나는 좋아한다

 

밟으면 무를 한입 크게 물은 듯

맵고 시원한 소리가 난다는 구절보다

나는 돌아가 악동처럼 둘둘 말아

사람을 세워놓고 나를 세워놓고라는

구절이 좋아서다

 

내 마음의 노동은 연못을 파는 것이라는

시인을 나는 좋아한다

 

조그만 눈길들 물방울처럼 모여

하늘의 구름 하늘의 못인 별 몸에 들인다는 구절보다

나는 연못을 파고 나는 그 연못을 풍금과도 같이 연주한다는

구절이 좋아서다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는

시인을 나는 좋아한다

 

거친 그리움을 이제는 자연사시킬 수 있겠다는 구절보다

노을 만평 사다가 친구들과

옛 애인 창가에 놀러가고 싶다는

구절이 좋아서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한다는

시인을 나는 좋아한다

 

언어의 벌집에서 붕붕대는 침묵의 말벌들이라는 구절보다

시여,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다는

구절이 좋아서다

 

기슭이라는 말에는 물기나 소리 같은 게 맺혀 있다는

시인을 나는 좋아한다

 

물결에 몸이 무작정 젖어든다는 구절보다

발을 멈추고 구름에게라도 물었어야 했다는

구절이 좋아서다

 

사랑보다 증오가 조금 더 아프다는

시인을 나는 좋아한다

 

씨앗으로 폭격을 하면 풍년이 될 수 있다는 구절보다

총을 내려놓으면 아이를 안을 수 있다는

구절이 좋아서다

 

늙음도 가치라고 말한

시인을 나는 좋아한다

 

죽음이 정화라는 구절보다

살아서 긴 그림자를 부린다는

구절이 좋아서다

 

모두 다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시인을 나는 좋아한다

 

해가 진다는 건 내일이 온다는 것이라는 구절보다

결핍은 새로운 채찍이라는

구절이 좋아서다

 

종이를 찢는 것이 시인의 의무라는 것을 아는

시인을 나는 좋아한다

 

마음을 끓여야겠다는 마음이 있다는 구절보다

마음의 맷집은 슬픔을 견딜 수 있다는

구절이 좋아서다

 

그 구절구절은 시의 한걸음 한걸음이다

 

저녁노을이 고요를 알게 하듯이

시인의 고독을 알게 해주는 구절들

그러니 제발, 들녘에 엎드려 울게

날 좀 내버려두면 안 될까요

 

삶을 겹눈으로 보는

시인이 좋아하는 시인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