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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혜진 金惠珍
1983년 대구 출생.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어비』 『너라는 생활』 『축복을 비는 마음』, 장편소설 『중앙역』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경청』 등이 있음.
우리와 우리 아닌 것
그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전에, 아버지의 생활 전반(일주일에 세번, 식사와 살림을 챙기고 정기적인 병원 방문과 행정 업무에 동행하는)을 두루 챙기는 60대 중반의 요양보호사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여사님, 잘 계시죠? 건강은 괜찮으시고요?
그는 늘 깍듯하게 존칭을 썼고, 여자의 안부부터 물었다. 많다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자신에겐 부담이 되는 돈을 매달 내고 있는데도 그랬다. 자신이 지나치게 굽실거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때면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어떤 식으로든 여자를 서운하게 한다면 그 보복의 대상은 아버지가 될 거라고. 그건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라고.
경계심을 다 풀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열살은 더 많은, 이젠 애를 써도 다 감추어지지 않는 노화의 흔적이 역력한 그 여자가 80세 중반의 아버지에겐 얼마간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은 거였다. 작정한다면 여자가 아버지의 나약한 마음을, 흐릿한 정신을 파고드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였다. 맞다. 그건 그가 최근 들어 아버지를 자주 만나러 가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차로 세시간 넘게 걸리는 소읍에 살았다.
그곳은 그가 나고 자란 곳이었으나 친숙함을 느끼긴 어려웠다. 십년 전 어머니가 죽고 나서는 더 그랬다. 아버지가 죽고 나면 자신의 몫이 될 선산과 땅을 모두 팔고 발길을 딱 끊어버릴 거라고 그는 진작부터 결심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희래 안 오게 해라.
어느 토요일 오후, 아버지가 말했다. 그가 너무 오래되어 이제 방의 일부처럼 보이는 갈색 문갑 앞에서 물파스를 찾고 있을 때였다.
뭐라고요?
희래, 희래 말이다. 안 오게 해.
그것이 장희래, 아버지와 평생 친형제처럼 지내온 이웃 희래삼촌을 가리킨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삼촌이 왜요? 싸웠어요?
그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는데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뭘 자꾸 가져간다. 그놈이 왔다 가면 뭐가 하나씩 없어져. 훔쳐가는 거야. 내가 안 볼 때.
도대체 언제 샀는지 모를 물파스는 스펀지가 딱딱하게 굳어 약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약봉지 귀퉁이에 물파스라고 적은 뒤 종이를 찢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곤 무심하게 다른 서랍을 여닫으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요. 삼촌이 뭐가 아쉬워서.
물파스 같은, 버려야 할 것이 더 남았는지 찾아볼 요량이었지만 모를 일이었다.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서랍 속에서 아버지의 재정상황을, 유산의 규모를 파악할 만한 뭔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유산에 관해서라면 누나와 자신이 공평하게 물려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에겐 있었다. 그러나 공평하다는 것이 똑같이 나눠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조금 더 가질 자격이, 사정이, 명분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어쨌든 누나는 출가외인인데다 늘 자신보다 형편이 좋았으니까. 자기만큼 부모를 살뜰하게 챙기지 않았으니까. 훗날 누나가 따져 묻는다면 한달에 두어번씩 성실하게 이어졌던 이 고향 방문을 어떤 지극함이라고 강변할 수 있을 거였다. 유산에 관해서라면 그는 그만큼 절박했다.
아니야. 희래 그놈은 평생 그랬다. 다 뺏어갔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돌변했다. 삼년 전, 경도인지장애를 진단 받은 아버지는 그 병을 가벼운 감기쯤으로 여겼다. 한번 발병하면 돌이킬 수 없고, 단지 속도를 늦추는 게 치료의 전부인 그 병의 심각성을 도통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뭐, 뺏어갈 게 있기나 해요, 이 집에?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멍한 아버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 병이 아버지를 어디까지 끌고 갔는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여기 있는 것 같기도, 저쪽으로 한걸음을 내디딘 것 같기도 했는데 아주 심각해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한순간, 아버지의 눈빛에 초점이 살아났고 그와 분명히 눈을 맞추었다.
희래 안 오게 하란 말이다.
알았어요. 삼촌한테 오지 말라고 할게요.
그는 그렇게 답했고,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그 대화를 까맣게 잊었다. 그리고 요양보호사에게 간단하게 메모를 남긴 뒤, 차를 몰고 마을을 빠져나올 때 희래삼촌을 봤다. 마을 초입, 소로가 2차선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서였다. 멀리 둔덕에 선 누군가가 뒷짐을 진 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묘하게 익숙하고, 또 묘하게 낯선 그 사람이 희래삼촌임을 그는 한참 만에 알아보았다. 늘 왜소하다는 인상을 주던 삼촌은 몸집이 아주 커 보였다. 삼촌을 에워싼 짙은 노을 탓인지도 몰랐다.
삼촌, 삼촌!
그가 큰 소리로 부르고, 몇차례 경적을 울려도 비스듬하게 선 뒷모습은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그가 방향지시등을 켜고 도로로 접어들 때에 사이드미러 속에서 이쪽으로 몸을 돌리는 삼촌의 모습이 보였다. 삼촌은 멀어지는 자신의 차를 주시하는 것 같았고, 손을 흔들며 알은체를 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정확하진 않았다. 어쨌든 도로로 접어든 뒤엔 사이드미러 속에서 삼촌의 모습이 빠르게 지워진 탓이었다.
그날 밤, 잠들기 전 아내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전하며 그는 삼촌을 생각했다.
아버님은 좀 어떠셔? 잘 계시지?
여느 때처럼 10시가 넘어 퇴근한 아내가 거의 잠에 곤두박질치는 듯한 목소리로 물으면,
그렇지 뭐. 다음달엔 애들 데리고 같이 한번 다녀오자.
가망 없는 바람을 타진하는 식이었는데 잠깐씩 삼촌에 관한 기억이 끼어들었다. 해마다 명절이면 크고 탐스러운 과일 상자를 한아름 안고 방문하던 삼촌, 폭우가 쏟아질 때면 아버지의 고물 트럭으로 자신과 누나를 읍내 고등학교까지 태워다주던 삼촌, 어머니가 차린 소박한 밥상 앞에서 늘 감격하던 삼촌. 자신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에게 감나무도 호두나무도 아닌 대추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말했던 삼촌(감나무는 관리가 쉬운 편이지만 너무 흔하고 가지치기를 자주 해줘야 한다는 점을, 호두나무는 수명이 길고 튼튼하게 자란다는 장점이 있으나 병충해에 약하다는 점을 삼촌이 염려했다고 아버지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맥락 없이 이어지던 그의 기억은 고향집 마당 한구석에 자리한 대추나무에 오래 머물렀다가 엉뚱한 질문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삼촌이 언제 독립했더라?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돌아누운 아내를 보았다. 사각거리는 이불 소리가 났고, 뒤척이는 기색이 이어지다 낮게 코고는 소리가 커졌다. 그 순간, 약간의 야속함이, 서운함이 불쑥 올라왔다.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느라 여러모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아내에게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은 적절치 않았으나 시아버지에게 무심해서 거의 외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런 태도가 두 딸에게까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무슨 말이든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 그는 내뱉고 나면 틀림없이 후회할 게 뻔한 말들을 끌어안으며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몰린 데에는 자신의 무능함과 아둔함 탓도 없지 않았으니까. 그는 다음 방문 때엔 그 질문, 그러니까 긴 세월 아버지 밑에서 일했던 삼촌이 언제 독립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고 정말 그렇게 했다.
몇주 뒤, 토요일에 그가 고향집을 찾았을 때였다. 그는 툇마루에 걸터앉은 아버지에게 시원한 믹스커피 한잔을 건네주며 물었다.
삼촌 안 왔죠?
아버지는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래서 희래삼촌, 하고 두어번 더 소리쳐야 했다.
안 왔다.
비가 오려는지 날이 흐렸다. 그는 아버지 곁에 앉았고 다시 물었다.
요새 뭐 한대요, 삼촌은? 왜, 나 어릴 땐 아버지 밑에서 일했잖아. 엄마가 그런 일꾼 없다고 매번 칭찬하고 그랬잖아요. 근데 언제 독립했어요?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던데?
허공의 한 지점을 주시하던 아버지의 눈길이 그가 마당 한쪽에 주차해놓은 자동차 바퀴에 가닿았다. 은빛 휠은 빛이 바래고 때가 타서 거의 잿빛으로 보였고, 흙먼지가 달라붙은 타이어도 볼품없었다. 그것이 번듯하게 탁 트인 도로가 아닌 늘 험하고 거친 길을 달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벌써 오래됐다. 너 중학교, 아니다. 여래 일 나가고부터인가.
여래는 희래삼촌의 여동생이었다. 어린 시절, 그가 이모 이모 하면서 따르던 사람. 늘 희래삼촌의 곁에 그림자처럼 머물던 사람. 어느 여름밤, 함께 저녁식사를 마친 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던 그 오누이의 모습이 기억 속에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 순박하고 검소한 사람들, 다정하고 유순한 사람들. 그 두 사람에게라면 경계할 것도, 숨길 것도 없었다. 그럴 정도로 그들은 한없이 선량해 보였다. 겨우 중학생이던 그의 눈에도.
그래요? 여래이모가 일을 했어요? 학교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던 게 아니라?
아니지. 그전에 몇년 일을 했지. 말 마라. 아주 악바리였어.
에이, 악바리 느낌은 아니지. 그렇게 순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모가 무슨 일을 했는데요?
저기, 거 어디더라.
그 순간 그것이 끼어든 것 같았다. 아버지가 가벼운 감기 정도로 하찮게 여기는 것, 아버지의 기억과 추억을 야금야금 뜯어먹으며 머릿속을 뿌옇게 만드는 무엇. 아버지는 건넛마을 곡물창고를 언급했고, 읍내에서 가장 컸던 방앗간과 밀막걸리 도가를 이리저리 오가다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여래이모가 그런 곳에서 일했구나, 했다. 세상물정 모른다고 여겼던 여래이모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말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럼 결혼하면서 일을 관둔 거네. 왜, 신랑이 일하는 걸 싫어했대요? 결혼하고 다른 동네로 가버렸잖아, 이모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기억을 뒤지는 아버지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는 질문을 바꾸었다.
그런 시시한 일은 일찌감치 손놨지. 결혼하고는 돈 되는 일을 했다. 수완이 좋았어, 그애가. 돈을 벌 줄 아는 애였다.
누가요? 여래이모가요?
그래, 여래. 걔가 다시 여기로 돌아왔지, 시집가고 몇해 뒤에. 저 뒷마을에 집을 하나 사서. 그때 갓난쟁이가 하나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그가 전혀 몰랐던 것이었다. 여래이모는 양수기 서너대를 대여하고 이런저런 농기구를 수리하며 살던 남자와 결혼했고, 가내업 수준에 불과하던 그 사업의 규모를 크게 키웠다고 했다. 양수기에서 시작해 탈곡기, 분무기, 제초기까지. 나중엔 서너명의 직원까지 두어야 할 정도로 바빠졌다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지하게 듣고 있진 않았다. 아버지의 기억은 어딘가 금이 가고 부서진 게 틀림없었으니까. 얼마간 왜곡되고 과장되어 있을 게 뻔했으니까. 아니, 사실이라고 해도 그와는 무관했고, 그의 삶과 일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흘끔거리며 자신이 벼르던 이야기, 그러니까 매번 준비해왔다가 제대로 한번 꺼내보지도 못하고 도로 가져가곤 하는 어떤 말을 매만지고 있었다.
아버지.
그리고 마침내 그 얘기, 자신의 몫으로 돌아올 유산을 앞당겨 달라고 간청하려던 순간, 아버지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애 아니었음 희래 그놈이 내 땅을 탐내는 일도 없었어.
탐낸다는 말이, 호통치는 듯한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자신을 꾸짖는 것 같아서 그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는지 마당에 작고 동그란 자국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땅은 무슨 땅. 탐내고 말고 할 땅이나 있긴 해요.
그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맥 빠진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멀리 뭔가 번쩍거리는가 싶더니 빗줄기가 굵어졌다. 아버지는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말들을 늘어놓다가 구부정한 몸을 일으켰고, 마당 여기저기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처마 밑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럴 때, 아버지는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누나와 자신의 효심을 저울질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매순간 냉정하게 유산의 몫을 배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한 건 그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그 땅 이야기를 다시 한 건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다.
어느 토요일 오전, 그는 가족들과 함께 고향집으로 갔다. 아내와 두 딸에게 거의 몇주간 사정하다시피 해서 이뤄진 방문이었다. 그즈음엔 누나네 식구들이 아버지를 자주 찾아오는 듯했으므로 마음이 불안했다.
할아버지 오랜만에 만나지? 보면 인사 잘하고, 안부도 물어보고. 알았지?
그는 운전을 하는 내내 서로를 거의 원수처럼 여기는 두살 터울의 딸들에게 그렇게 당부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작은딸은 그나마 대답을 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큰딸은 골이 난 얼굴로 내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에 타자마자 좌석을 젖히고 잠든 아내는 말이 없었다.
자신과 아내, 두 딸까지.
그는 아들이 일군 다복한 가정을 보며 아버지가 얼마간 뿌듯함과 흐뭇함을 느끼길 바랐다. 그건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더 가치있는 것이니까. 지금 자신이 아버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차 안의 어수선하고 냉랭한 공기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싣고 가는 게 무엇인지, 거기서 아버지가 무엇을 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읍내 작은 터미널 근처,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세운 건 그 때문이었다. 홀로 정육점에 들러 돼지고기 두근을 사서 돌아왔을 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그가 발을 굴러 신발을 털고 막 운전석에 오르려 할 때였다.
어? 장우 아니냐?
처음엔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어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검은 차 옆에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희래삼촌이었다.
아, 삼촌. 안녕하세요. 여기서 보네요.
그러게. 이야, 이게 몇년 만이야, 반갑네. 아버지 뵈러 온 거야?
그렇게 묻는 삼촌은 다른 사람 같았다. 거의 반백이 되어버린 머리칼과 주름진 눈가, 약간은 생뚱맞다 싶은 동그란 안경까지. 아니, 낯설음을 느낀 건 세월의 흔적 탓만은 아니었다. 뭐랄까, 순박함과 검소함 같은 그가 삼촌을 떠올릴 때 자연스레 따라오던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대신 삼촌은 다른 것을 갖게 된 듯했다. 자신감, 관대함, 느긋함. 그는 그것을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예, 오랜만에 애들 데리고 아버지 뵈러……
아무렴, 시간 내서 오는 것만큼 큰 효도가 없지. 아버지 잘 계시지? 한번 가야지 하면서도 이사하고 난 뒤에는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아, 이사하셨어요?
형님이 이야기 안 하던? 벌써 몇달 됐다. 여래가, 여래 기억나지? 걔가 저쪽 신도시에 집을 얻었거든. 나도 집사람이랑 근처로 이사했고.
아, 집을요? 어디, 저쪽 신도시요?
그는 고층 건물이 빼곡하게 자리한 신도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삼촌의 옷차림을 훑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흙길 한번 밟지 않은 듯한 갈색 구두가, 복숭아빛이 감도는 티셔츠가, 묵직해 보이는 손목시계가 자꾸만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대화를 길게 나누진 못했다. 작은딸이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를 재촉한 때문이었다.
딸래미들?
삼촌은 그렇게 물으며 차창으로 다가갔고 지갑을 꺼내 아이들에게 오만원권 지폐 한장씩을 건네주었다. 그러곤 그에게 연락처를 알려주며 언제 식구들과 함께 놀러오라고 일렀다.
아빠, 그 사람 누구야? 아빠 진짜 삼촌은 아니지? 할아버지 동생 없잖아. 그 할아버지 부자야? 부자처럼 보이던데?
그가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맬 때 작은딸이 물었다.
작은할아버지야. 다음에 뵈면 작은할아버지, 하고 인사드려.
그는 건성으로 대답을 이어가면서 도대체 무엇이 자신의 기분을 이토록 가라앉게 만드는지 고심했지만 답을 찾을 순 없었다. 그리고 고향집이 보일 즈음에서야 언젠가 아버지가 말했던 땅, 희래삼촌이 탐냈다는 그 땅을 떠올렸다. 땅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그저 아버지에게 희래삼촌을 보았다고 짧게 언급한 게 다였다.
그와 아버지, 아내와 두 딸까지 다섯 사람이 점심식사를 위해 툇마루에 둘러앉은 건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두 딸은 귀가 어두워 거의 소리치다시피 말하는 아버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려 들었고, 아내는 고기를 굽는 그의 곁에서 소주를 홀짝거리다 취해버렸다. 결국 참다못한 그가 화를 냈고 그와 아내 사이에, 아내와 큰딸 사이에, 큰딸과 작은딸 사이에 몇차례 고성이 오갔다.
됐다. 이제 가봐라. 다 데리고 그만 가.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망했다고 생각했다. 질린 듯한 아버지의 표정은 누나와 자신 사이의 저울질을 얼마간 끝낸 듯 보였고, 그 결과는 자신의 예상과 기대를 비껴날 게 틀림없었다. 그는 몇년째 이어지고 있는, 얼마나 더 지속될지 모르는 이 눈치게임을 더 할 자신도, 여유도 없었다.
그가 이 게임에서 승리할 확률은 희박했다. 그도 모르지 않았다. 그 자신조차도 이길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삶이 그에게 가르쳐준 건 탈락하는 것, 낙오하는 것, 패배하는 것, 낙담하는 것이 다였으니까. 아버지가 질책하던 나약함, 겁약함, 자기연민을 극복한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한번쯤 이기는 경험이 필요했다. 자신의 삶에도 어떤 행운이, 긍정이, 너그러움이 깃들어 있다는 확신이 절실했다.
그는 지금 당장 돈이 필요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자리를 뜬 뒤, 그는 컵에 남은 미지근한 콜라를 비우고 소주를 부었다. 한잔을 마시고 또 한잔을 마시고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한잔을 더 마신 뒤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솔직하게 말씀드릴게. 저 요즘 형편이 말이 아니에요. 애들 밑에 한창 돈 들어갈 때이기도 하고, 대출이자도 많이 오른데다 불경기잖아요.
불판 귀퉁이에 고기 찌꺼기가 탄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멀리서 아이들이 티격태격하는 말소리가 들리다가 말다가 했다. 그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이제 곧 전세 만기라 이사도 해야 하는데 여유가 없어요. 아버지가 좀 도와주면…… 아, 물론 누나는 이런 이야기 안 하겠지. 안 해도 되니까. 근데 나는 누나랑 출발점이 다르잖아.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공부면 공부, 취업이면 취업, 결혼이면 결혼. 누나는 옛날부터 자기 걸 잘 챙겼잖아요.
그는 자신을 어리숙하고 불쌍하게 포장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럼에도 다른 이야기, 그러니까 오래전 아버지가 차려주었던 오토바이 대리점을 말아먹고, 어머니가 몰래 넘겨준 적금을 털어먹고, 결혼 때 부모가 누나 몰래 장만해준 신혼집을 헐값에 팔아버린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도 다 살아보려고 애쓴 일들이었다. 아내가 두가지 일(낮엔 공사현장의 신호수로 일했고, 밤에는 의약품을 배달했다)을 병행하는 동안 투자니 수익이니 하는 말에 홀려 이런저런 모임을 기웃거리고 있다는 말도 삼갔다.
아버지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한참 만에 아버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때 넘겨주면 안 됐어. 갖고 있어야 했다.
그의 몸이 아버지 쪽으로 기울어졌다.
뭘요? 뭘 갖고 있다는 거예요?
멍청했지. 그놈한테 넘기는 게 아니었어. 갖고 있었으면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었다. 다 뺏어갔어, 그놈이. 전부 다.
그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그는 바닥의 한 지점을 노려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주시했다.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무시하는지, 일부러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아버지가 말했다.
그 땅 말이다. 희래 그놈이 가져간 내 땅!
아버지는 그들, 희래삼촌과 여래이모가 어느날 문득 마을에 나타났다고 했고, 순진하고 착한 척 굴며 사람들의 동정심을 샀다고 했고, 작당하여 남의 걸 하나둘씩 빼앗았다고 했고, 진짜 순진하고 착한 자신을 배신했다고 했다. 모의, 속셈, 꿍꿍이 같은 단어를 내뱉는 아버지의 얼굴이 잠깐씩 일그러졌다.
그가 듣기엔 모두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아, 아버지. 제발, 아버지.
그는 은박지 조각을 만지작거리는 아버지의 두 손을 감싸 잡았다. 손끝이 안으로 휘고, 마디마다 관절이 불거진 거친 손. 피부라기보단 시멘트 표면에 가까운 그 감촉이 그 안의 뭔가를 깨운 것 같았다. 목덜미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고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는 바닥의 휴지뭉치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돼지기름 냄새가 올라왔고 눈이 따끔거렸다.
누가 알았냐, 거기 도로가 날 줄. 그 땅이 그리 비싸질 줄 누가 알았어. 희래, 그놈은 알았을 거다. 알고말고. 알고도 모른 체했겠지. 뻔뻔한 놈. 근본 없는 놈. 괘씸한 놈.
아버지는 계속 딴소리를 했다. 그와 눈 한번 맞추지 않았다.
아버지, 제 말 좀 들어봐요. 이상한 말 그만하고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요. 아버지, 나도 좀 편하게 살고 싶다고. 그럴 자격 있잖아. 나보다 못한 놈들도 잘만 사는데. 나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요. 아버지, 내 말 듣고 있어요? 제발, 아버지.
두 사람의 말은 접점 없이 이어졌다. 그것은 자석의 척력처럼 서로의 말을 밀어내고 배척하면서 고조되었다. 결국 그가 물러섰다. 체념하고 단념하고 포기하는 건 사는 동안 그가 가장 많이 해온 일 중 하나였고 그래서 차라리 익숙했다.
도대체 무슨 땅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뭔 땅이 있다고. 알았어요. 됐어요. 그만해요. 그만두자고요.
그 말을 할 때, 그는 다시금 실패했다고 느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의 마음을 여는 것조차 못하는 한심하고 무능한 인간. 그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안 팔고 있었으면 장우 너한테 줬을 거다. 주고말고. 다 네 거였다. 그랬으면 좋았을 거야.
한참 만에 아버지가 그의 무릎에 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애틋하고 다정한 그 목소리가 다시금 감정을 건드렸다. 그는 매운 파 냄새와 돼지기름 냄새가 나는 휴지뭉치로 눈가를 닦으며 훌쩍이다 결국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에는 실재하지도 않고, 실재할 리도 없는 그 땅을 상속받은 것 같았고, 그걸로 충분한 것 같았다. 그는 취해 있었다.
요즘 울 일이 많은가봐. 울고 나니 어때, 후련해? 아주 홀가분해 보이네.
다음 날 새벽, 고향집을 나설 때 아내가 말했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두 딸이 안전벨트를 맨 걸 확인하자마자 시동을 걸었고 곧장 마을 뒤쪽으로 차를 몰았다.
술 덜 깼어? 저쪽으로 나가야 하잖아. 내 말 듣고 있어?
아내가 몇차례 물었지만 그는 무시했다. 아버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저 가볍게 확인할 생각이었지만 기분이 착잡했다. 이십여분을 달려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도로 한쪽에 차를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땅이 있었다네, 아버지가.
무슨 땅?
아내가 물었고 그가 답했다.
아버지가 나한테 물려주려고 했던 땅. 내 땅.
그는 차에서 내려 파란색 공사 가림막 가까이 다가갔다. 고속화도로 부지라고 적힌 조감도에는 시원하게 쭉 뻗은 4차선 도로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것이 될 수 있었고 자신에게 얼마간의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었던, 가림막 너머의 땅을 상상했다. 그랬다면, 그럴 수 있었다면. 훗날 가족들과 함께 쭉 뻗은 새 도로를 질주할 때에 느끼게 될 만족감과 흐뭇함도 그의 몫이 되었을 거였다. 희래삼촌의 것이 아니라. 그는 가림막을 따라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울지는 않았다. 그 순간, 그를 사로잡은 감정은 눈물과는 거리가 먼 어떤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듬해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마른기침이 심해졌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폐렴 증상이 악화하면서 숨을 거둔 거였다. 그도 누나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저 고통이 길지 않았다는, 수면 중에 심장이 멈췄다는 담당의사의 말을 위안 삼았다.
아버지의 장례는 읍내 딱 하나뿐인 장례식장에서 삼일장으로 치렀다. 그는 상주 완장을 두르고 빈소를 지켰다. 슬프진 않았다. 얼마간 예상한 일이었고, 언젠간 닥쳐올 시간이었으므로. 조문객이 오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고, 누나 내외와 함께 친지들의 안부를 챙겼다. 그러나 잠깐씩 진공 같은 고요가 찾아들면 영정사진 속 아버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오래전 아버지와 나눴던 어떤 이야기들이 무질서하게 떠올랐다.
희래삼촌은 둘째날 오후에 왔다.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빈소로 들어섰을 때, 그는 삼촌을 한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여래는 외국에 있어서 못 왔다.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하더구나. 마음이 많이 힘들지? 형님은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다. 분명 그럴 거야. 기운 내라.
분향을 끝내고 삼촌이 그와 누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을 뿐 누나처럼 자연스럽게 안부를 나누진 못했다. 어떤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듯 누나가 몇차례 그를 힐끗거렸지만 그는 건조하고 냉랭한 응대를 고집했다.
몇 사람이 더 다녀간 뒤 다시 빈소가 한산해졌다. 그가 접객실로 나왔을 때, 삼촌은 아직 거기 있었다. 아버지 연배의 마을 어른들 사이에서 삼촌의 모습은 도드라지는 데가 있었다. 그리고 삼촌 곁에 앉은 작은딸애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방울토마토를 만지작거리며 무슨 대답을 이어나가는 듯 보였다.
그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작은딸을 불렀다. 아이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한번 더 불렀고, 나중엔 모두가 돌아볼 정도로 목소리가 커졌다.
아빠, 왜?
딸애가 다가왔다.
엄마 어디 갔어?
몰라.
엄마 찾아봐. 엄마 옆에 있어.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엄마가 여기 있으랬어. 나 아까부터 계속 저기 있었다고. 작은할아버지 옆에.
작은할아버지는 누가 작은할아버지야. 말 안 들을래? 아빠가 엄마 찾으라고 하잖아!
그가 언성을 높였고, 멀리 삼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삼촌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약간은 찌푸린 듯한, 웃음을 머금은 듯한 얼굴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는 듯 보였다. 아니, 그건 그의 착각인지도 몰랐다. 그는 투덜거리는 아이를 데리고 빈소로 들어와버렸다.
그날 밤, 조문객들이 모두 돌아가고 누나와 단 둘이 남게 되었을 때 그가 말했다.
누나도 알지? 아버지가 삼촌한테 땅 판 거.
누나는 벽에 등을 기댄 자세로 느릿느릿 대꾸했다.
알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일 했던 말이 그거잖아.
처음엔 뭔 소린가 했지. 근데 진짜더라. 땅이 있었다는 것도, 거기 도로가 나는 것도. 안 팔고 갖고 계셨으면 좋았을 거야.
아버지가 그러셔? 갖고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모르지. 삼촌이 팔라고 꼬드겼을지도. 다 뺏어갔다고 그러시더라. 희래삼촌이 평생 다 가져갔다고. 그게 한이래.
그렇게 대꾸하면서 그는 아버지의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누나가 그의 말을 바로잡았다. 아버지가 땅을 판 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도로 부지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그때 그 땅을 팔지 않고는 생활이 도저히 불가능했다고. 땅을 판 걸 후회할 게 아니라 땅을 사준 삼촌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삼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아버지의 그런 말은 아버지의 도리와 염치까지 죄다 잡아먹은 그 고약한 병 탓이라고.
그는 모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누나는 아버지와 진솔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을 테니까. 처음부터 그 땅이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버지가 땅을 팔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자신의 몫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어차피 누나는 이해하지 못할 거였다.
아버지는 낡은 시골집과 집 근처 텃밭 크기의 토지, 장례비용을 치를 정도의 예금을 유산으로 남겼다. 누나는 모든 걸 그에게 양보했다. 그럴 정도로 여유가 있는 거였다. 아니, 유산의 규모가 누나에겐 굳이 욕심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미미한 탓인지도 몰랐다.
그는 읍내 부동산 몇곳에 집과 토지를 모두 내놓았지만 팔진 않았다. 사겠다는 사람은 드물었고, 이따금 연락이 와도 어처구니없는 가격을 제안하기 일쑤였다. 대충 시세에 맞게 처분하자고 아내가 말할 때마다 그는 지금으로선 예상할 수 없는 어떤 행운과 기회를 떠올렸다. 언제나 한발 늦게 찾아오는, 외면하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지 모르는 무엇. 그는 아버지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게 되기까진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건 그의 삶이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아버지가 살아 있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큰 변화 없이 흘러갈 거란 의미이기도 했다.
몇년 뒤, 대학에 진학한 딸이 대학 근처에 방을 얻었다. 그즈음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겐 매번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더디게 찾아오는 어떤 기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는 그 자취방 이사에 동행했다. 봄이었지만 쌀쌀한 날씨였다. 그는 아내를 대신해 딸애의 간소한 살림살이를 살피고 몇가지 당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딸애의 동기라는 여자아이가 와서 이사를 거들었다. 그는 그 아이의 이름을 들었지만 금세 잊었다. 두 아이는 화장실 선반에 휴지를 채워 넣으면서 무슨 말인가를 소곤거렸고, 좁디좁은 베란다에서 세탁기 버튼을 이리저리 눌러보며 킥킥거렸다. 그가 싱크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배수구를 확인하는 동안엔 침대에 나란히 앉아 스마트폰을 보느라 계속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딸의 친구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했고, 어딘가 묘하게 이질적인 생김새에 거리감을 느낀 탓이었다. 짐 정리를 대충 마무리하고 집을 나설 때, 그는 그 친구에게 오늘 와줘서 고맙다고, 앞으로 딸애와 잘 지내길 바란다고 형식적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그애를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 그 안에 담긴 어떤 언짢음과 꺼림칙함을 의식하며 서둘러 돌아섰다.
딸애가 건물 입구까지 그를 따라 나왔다. 그는 이미 여러번 당부했던 사항들을 한번 더 말한 뒤 지갑에서 지폐 몇장을 꺼내 건넸다. 마음에 걸리는 듯 딸애의 자취방을 몇번 올려다보았지만 그 친구에 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차를 몰고 좁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대학가여서 거의 자취촌이나 다름없는 그곳은 젊은이들로 붐볐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들 탓에, 도무지 비켜줄 생각이 없는 자전거와 오토바이 탓에 그는 계속 속도를 늦추었고 아예 멈춰서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체구가 작고 피부색이 다른, 누가 봐도 이곳 출신이 아닌 행인들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면면이 눈에 들어왔고, 열린 창으로 해독할 수 없는 낯선 말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외국어로 적힌 울긋불긋한 간판들, 코를 자극하는 강렬한 냄새들, 어쩐지 어수선하고 수상쩍은 분위기까지.
결국 그는 도로 한쪽에 차를 세우고 딸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딸애는 성가시다는 투로 그를 대했다.
그 친구 말이다. 언제 만난 거야? 학교에서 만난 거니?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질문하면,
뭐라고? 아빠, 나 밥 먹으러 가는 길이야. 친구랑 같이 있다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식이었다. 그는 친구가 없는 곳으로 잠시 자리를 옮기라고 권했고, 그 친구에 관해 선을 넘지 않을 만한 질문을 이어가다가 결국 언성을 높였다. 딸애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무슨 말인가를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멀리 도로가 꺾이는 지점에서부터 짙은 노을이 번져오는 게 보였다. 그는 갑자기 침범한 그 빛에 적응하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러곤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문자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주어와 목적어가 분명하지 않은 문장들, 이유와 까닭이 생략된 표현들, 어딘가 모호하고 애매한 의미들. 뭔가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는 그의 손가락이 갈팡질팡했다. 결국 그가 보낸 건 짧은 두 문장이 전부였다. 조심해라, 걱정된다. 무엇을 조심해야 하고 무엇이 걱정되는지 밝히진 못했다. 그 순간엔 그 모든 걸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들은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간추릴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는지도 몰랐다.
그 메시지에 오타가 난 것은 나중에 알았다. 도심해라, 석정된다. 그날, 오랜 고심 끝에 그가 보낸 건 뜻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단어의 조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