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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문소이 文韶異

2024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rent09@naver.com

 

 

 

창고 정리

 

 

intro

 

은봄아.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종이에 은봄아라고 쓴 다음에는 무슨 말을 이어 써야 할지 막막했다. 은봄이 나를 자연스럽게 잊길 바라면서 동시에 잊지 않길 바라는 욕심이 부딪혀, 좀처럼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언니, 이제 가야 해.”

오연이 테이블 위에 꺼내뒀던 선글라스, 가죽장갑, 귀에 꽂는 무전기, 손목시계, 가짜 총 등을 타포린백에 차곡차곡 집어넣으며 말했다. 오연이 쟁반에 컵과 휴지를 담아 정리대로 향했을 때에야 나는 서둘러 손을 놀려 쪽지를 마무리했다.

 

 

1

 

당신은 자카르타를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온 적 있는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자카르타뿐일까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 작년에 셉템버가 데뷔 8년 만에 코로나로 미뤄졌던 첫 월드투어를 시작했을 때 나는 자카르타 외에 쿠알라룸푸르, 수라바야, 마닐라, 홍콩, 싱가포르까지 모두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이번 가오슝도 마찬가지. 여행의 큰 줄기는 셉템버의 두번째 월드투어 ‘Fall in love’를 보는 것이므로 식사나 쇼핑, 관광 같은 잔가지들은 그때그때 상황 봐서 내키는 대로 처리한다.

“배추언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오연은 공항에서 바로 공연장으로 달려오면서 버블티 두잔을 잊지 않고 사 온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짧은 머리를 핑크색으로 탈색한 오연은 키가 커서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강렬한 햇빛 아래 선 오연의 피어싱 여덟개와 반소매티 밑으로 드러난 천칭자리 타투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공연장에서 좀 떨어진 바위에 자리를 잡고 있던 오연은 옆으로 비켜 앉으며 내가 앉을 틈을 만들어주었다.

오연은 온라인 플랫폼 ‘버징’(buzzing)에서 셉템버의 메인댄서이자 리드보컬 연후의 팬 계정인 ‘오늘의 연후’를 1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다. 오연의 본명은 정다윤이지만, 사람들이 나를 닉네임인 배추로 부르듯 이 판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들 다윤을 오연이라고 부른다. 오연은 콘서트 때마다 자신이 찍은 연후 사진으로 슬로건 플래카드를 만들고 버징에서 미리 예약을 받는다. 결제한 사람들은 콘서트 당일 공연장 근처에 있는 오연을 찾아와 자신의 슬로건을 받아 가면 된다.

넓은 광장에는 들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콘서트 한정상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브이로그를 찍고, 만들어 온 스티커나 포토카드를 나눠주느라 다들 분주했다. 예약 손님을 기다리며 틈틈이 버징을 체크하는 오연 옆에서 나도 버징에 접속했다.

“헐, 미친.”

내가 만든 은봄이 팬 계정이 방금 9만명을 돌파했다. 같이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장난스럽게 킥킥대는 오연의 팔로워 수도 이미 13만을 넘었다. 나는 오연처럼 사진을 찍고 정성스럽게 보정해서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멤버들을 동물 캐릭터로 그린 만화만 가끔 올리기 때문에 이 계정을 처음 만들 때만 해도 이렇게 커질 줄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셉템버의 앨범은 발매 일주일 만에 백만장이 나가지만, 데뷔 초창기 몇년간은 전체 판매량이 오천장에서 만장을 넘기 어려웠다. 이건 자랑이지만 그 시기에 내 만화와 캐릭터는 셉템버보다 더 유명했다. 처음 열린 팬 싸인회에서 소속사 직원이 나를 따로 불러내 내 만화가 바이럴 홍보에 큰 도움이 됐다면서 고맙다고 했고, 은봄은 나를 보고 “어머, 배추님이에요?”라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 영상은 또다른 팬의 카메라에 담겨 ‘팬을 알아보고 우는 은봄’으로 버징에서 크게 회자되었으며, 내 계정에도 첫번째 고정글로 박제되어 있다.

가오슝의 더위를 느끼며 애정과 찬탄의 온라인 세계에서 냉소와 혐오의 세계로 넘어왔다. 팬 계정을 로그아웃하고 다른 계정으로 로그인했다는 뜻이다. ‘직장 동료 딥페이크 퍼뜨린 30대 잡았더니 휴대폰에 아동 성착취물 1만개.’ 한여름에 음식물쓰레기통을 열었을 때 훅 끼치는 냄새가 떠오르는 기사가 링크된 게시물이 보였다. 음식물쓰레기는 죄가 없지만 넌 아니야. 나는 지옥에나 가라, 성범죄 형량 늘려라, 야동이 세상을 망친다, 이런 댓글들만 찾아 추천 버튼을 눌렀다.

공연장 주변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라 습기가 온몸을 누르듯 답답했고 문득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사월인데 왜 이렇게 덥지?”

“지구 멸망하려나보지.”

오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미니 손선풍기를 내 얼굴 쪽에 대주었다. Are you O Yeon? 미소가 귀여운 현지인 팬이 발랄하게 우리 쪽으로 뛰어와 물었다. ‘네임드’를 만나 기쁘다고 말한 그는 빨간색 반, 노란색 반으로 염색한 머리에 꽉 끼는 크롭티와 레이스 달린 핫팬츠를 입고 굽이 높은 부츠를 신고 있었다. 얇은 추리닝에 운동화 차림인 나와 달리 굉장한 각오를 하고 온 복장이었다.

“Thank you, Don’t hold your slogan up too high, okay?” 슬로건을 건네는 오연 옆에서 나도 따라 웃으며 아까부터 드는 찝찝함이 무엇인지 헤아려보려 했다. 티켓? 여권? 응원봉? 은봄 인형? 물? 쿨링스카프? 다 아닌데. 뭔가 필요한 걸 사려고 다이소에 갔지만 사려던 게 뭐였는지 까먹은 사람처럼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공연장에서 402호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서야 알았다.

 

“아니, 왜 나만 잡아? 개열받네.”

공연장에 입장하는데 멀리서 한국말이 귀에 꽂혔다. 그애는 다른 사람들은 카메라를 몰래 갖고 들어갔는데 한국인인 자기만 콕 집어서 가방을 뒤졌다고 억울해하고 있었다. 카메라라니. 오연도 콘서트에는 갤럭시 울트라 휴대폰만 들고 가는데. 오래전 셉템버 음악방송 사전녹화가 있던 어느날, 소속사 직원이 카메라를 숨기고 입장하는 거 아니냐면서 오연의 옷 속에 손을 넣어 몸을 뒤진 적이 있었다. 그때 오연은 영상학을 전공하던 앳된 학생이었는데 항의도 제대로 못해서 내가 대신 따져 사과를 받아냈다. 야만의 시대였지. 눈이 마주친 오연도 나와 같은 기억이 스쳤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카메라는 나중에 공연 끝나고 찾아가라고, 중간에 잡히면 쫓겨나는데 그거보단 낫지 않냐며 구미초코볼을 건네며 우는 팬을 달랬다. 누구든 우리 셉템버 콘서트에 온 거니까 기분 좋게 즐기다 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나와 자리가 다른 오연과 출입문 앞에서 헤어지고 무대 기준 왼쪽 스탠딩석에 섰다. 커다란 스크린에 나오는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휴대폰을 꺼냈을 때 창고 이웃인 402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잠가드려요?

손가락 한마디만큼 열려 있는 내 창고의 문 사진도 함께 와 있었다. 아, 이거였구나. 지난 토요일에 학원 수업을 마치자마자 창고에 들렀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문단속을 잊었나보다. 창고를 쓴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네네, 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내가 출시한 ‘금봉 시리즈’의 토끼가 꾸벅 인사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커피쿠폰을 보냈다. 그때 주위에서 귀를 찢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셉템버 멤버들이 웅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우린 서로 사랑할 수 없어. 기어코, 우린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

언제 들어도 벅차오르는 미니앨범 9집 타이틀곡의 브릿지가 셉템버의 공연 서막을 올렸다. 콘서트의 모든 레퍼토리를 다 외우고 있었지만,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베이스의 울림은 여전히 짜릿했다. 셉템버의 리더이자 메인보컬, 음색이 청량하고 아름다우며 단언컨대 국내 여자아이돌 중 가장 노래를 잘하는 은봄이 우렁차게 외쳤다. 셉토피아! 알. 유. 레디?

 

낯선 해외의 공연장에서 멤버들이 눈에 익은 팬들에게 계속 인사를 하며 의지하는 게 보였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셉토피아 고인물들은 적절한 타이밍에 박수치고 환호하고 멤버 이름을 부르며 공연을 리드했다. 화려한 컨페티가 공연장에 흩날렸을 때, 무대 위 은봄과 눈이 마주쳤다. 은봄은 나를 알아보자마자 바로 토끼그림이 새겨져 있는 인이어를 손으로 톡톡 치며 웃었다. 그 인이어는 8년 전에 내가 은봄에게 선물한 고급 주문제작 인이어이다. 미나리축제에서 셉템버가 5천원짜리 이어폰을 끼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해서 그날 바로 주문했던. 싱긋 윙크하며 웃는 은봄을 향해 나도 격렬하게 소리를 지르며 보답했다.

402호의 답장을 확인한 것은 앵콜과 재앵콜과 또 한번의 앵콜이 끝나고 땀에 젖어 호텔방에 돌아왔을 때였다. 씻고 나니 자정에 가까웠는데 오연은 일을 해야 한다며 테이블에 노트북을 켜고 앉았고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봤다. ‘학원비가 어떻게 되ㅈㅗ?’ 대뜸 학원비만 묻는 오타 문자가 와 있었다. 교습비는 학원 문 앞에도 붙어 있고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도 게시되어 있는데. 몰려오는 피로를 참고 친절하게 주 1회 기준 한달에 12만원이라는 내용이 내일 아침에 도착하게끔 예약문자를 설정했다. 쌓여 있는 연락을 처리하다가 402호가 내 창고 문을 잠근 뒤 찍은 사진을 보내면서 커피쿠폰은 거절한 것을 발견했다. 아무런 이모티콘도 부연설명도 없이. 이 삭막한 인간.

 

 

2

 

은봄과 연후는 10대 시절 내내 대형 기획사의 데뷔조였다. 이제 곧 나온다고 그룹 소개영상까지 찍었는데 갑자기 이미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빠졌다. 돌고 돌아 중소 기획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유행어 하나 있는 코미디언 출신 사장이 만든 회사에서 셉템버로 데뷔했다. 그해에 데뷔한 아이돌만 백여 그룹이 넘었고, 그중 케이블을 포함해 방송에 한번이라도 얼굴을 비칠 수 있었던 팀은 열 팀이 채 되지 않았다. 셉템버도 TV나 라디오 출연은 못하고 사장 인맥에 기대 지방축제만 열심히 돌았다. 내가 셉템버를 처음 본 것도 다슬기축제에서였다. 연후가 연습생일 때부터 ‘오늘의 연후’ 계정을 굴리고 있었다는 오연과 처음 말을 튼 것은 장단콩축제에서였다. 셉템버는 데뷔한 지 2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아리랑TV에 30초가량 출연했다. 나는 지금도 첫 1위를 한 날과 함께 그 날짜를 기억한다.

“저희가 요즘 많이 바빠져서 옛날보다 보기 어렵다고 하시는데요. 저희가 안 보여도 여러분을 위해서 뒤에서 하는 게 정말정말 많거든요. 그러니까 믿고 기다려주세요.”

훗날 은봄이 월드투어 중간에 호텔에서 라이브 방송을 하며 이런 말을 했을 때는 격세지감이란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수업이 끝난 7월의 토요일, 학원 청소를 마치고 창고로 향했다. 이번 월드투어에 처음으로 캐나다, 미국, 멕시코가 추가되었지만, 자영업자 처지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셉템버가 처음 하는 미국 투어인데 내가 가질 못하다니. 일을 안 하면 모든 공연을 다 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일을 안 하면 티켓과 항공권을 살 수 없겠지. 나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인도네시아 레코드사에서 팬 싸인회 용도로 한정판매한 셉템버 앨범을 샀고, 그 박스들은 내 차 트렁크에 고이 모셔놓았다.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40분쯤 달리면 나타나는 한적한 농경지 근처에 창고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버징 계정에서 은봄을 검색하며 잠을 몰아내는 게 내 일과의 시작인 것처럼 차에 타면 당연히 셉템버의 옛 앨범 「오렌지 카세트」를 듣는다. 셉템버가 데뷔한 지 3년 9개월 만에 첫 1위를 하게 해준 영광의 앨범이자 명반이다. 그런데 왜 요새는 이런 앨범을 만들지 못하는 걸까.

시멘트공장 같은 회색의 창고는 주변의 높은 산이 웅장한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짙은 녹색으로 물든 산은 봄에 왔을 때와는 또다른 풍경이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자연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셉템버 노래가사를 흥얼거리며 자갈이 깔린 넓은 주차장에 들어섰다. 구석진 곳에 402호의 차가 보였다. 장기 대여자인 우리는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쳐가는 동안에도 꿋꿋하게 401호와 402호로 남아 있다. 주차할 자리는 많았지만 나는 일부러 그의 네모나고 반듯한 랭글러 옆에 동글동글한 내 풍뎅이차를 세웠다. 그는 마침 차 뒷문을 열어놓고 트렁크 쪽에 서 있었다. 연휴가 길면 국내외에서 트레킹을 한다는 402호는 나로선 『코스모스』 책 같은 사람이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안녕하세요.”

그는 트렁크에 놓인 고양이사료 포대자루를 정리하고 있었다.

“밥 주고 왔나봐요.”

내가 아는 체를 하자 그는 네,라고 짧게 대답했다. 주말마다 이곳에 오는 그는 산책로 근처에 가끔 출몰하는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준다. 내가 주차장 입구에서 공용 카트를 끌고 오자, 402호가 내 차 트렁크에 있는 박스들을 카트로 옮기는 걸 도와주었다. 그의 어깨 부근에 내 이마가 닿을 뻔했다. 남의 도움은 사양하지 않으므로 나 대신 카트를 미는 그에게 기꺼이 내 짐을 맡겼다.

지난번에 커피쿠폰은 왜 거절했냐고 묻자 그는 이마를 긁적이며 별일 아니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최근에 한 트레킹은 어디인지, 날씨는 좋았는지, 시간은 얼마나 걸렸는지, 그곳에서도 결정체를 갖고 왔는지, 엘리베이터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지는 내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하던 402호는 ‘결정체’라는 말에 잠깐 걸음을 멈추더니 휴대폰을 꺼내 돌멩이와 비슷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내가 402호의 연락처를 알게 된 건 4년 전, 한 케이블 방송 서바이벌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그 서바이벌 쇼 시즌 2에 셉템버가 출연했다. 누구나 셉템버를 한번, 정말 제대로 한번만 본다면 그 진가를 알 수 있을 텐데. 셉템버는 대형 기획사 소속도 아니고, 부모님이 연예인인 것도 아니다보니 언론에서 주목받을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관심 없는 사람에게 강아지나 아기 사진을 보내며 감상을 강요하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하물며 아이돌을 영업한다? 나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재평가될지 알면서도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버징에서 계속 홍보만화를 그려서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친구들, 이모와 사촌동생, 전 직장 동료들, 대학 동기와 선후배들, 필라테스 선생님, 동생과 동생의 여자친구에게까지 디저트 쿠폰을 뿌려가며 문자투표를 부탁했다. 다만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학원생의 부모들에게 호소하는 것까지는 참았다. 그러니 창고에서 오다가다 마주치는 사이였던 402호도 당연히 소중한 투표 인력이었다. 402호는 그때 군소리 없이, 투표한 화면까지 꼬박꼬박 캡처해서 보내준 사람 중 한명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대화의 물꼬를 튼 뒤 그의 창고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캠핑용품이 있을 줄 알았던 그의 창고에는 돌멩이와 비슷한 식물 결정체라는 것이 가득했다. 그는 올해로 열두살이 된 고양이 카이저와 함께 사는데, 카이저가 결정체를 발로 툭툭 차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먹으려고까지 하다보니 창고를 쓰게 되었다고 했다.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랄 때 생존을 위한 경쟁이 벌어지는데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생각보다 꽤 치열합니다. 그렇게 영역다툼이 거센 숲에 가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가지들이 얽힐 것처럼 가까이 뻗어 있으면서도, 잎사귀들은 엉켜 있지 않아요. 서로 침범하지 않는 거죠. 그리고 근처를 둘러보면 이런 결정체 같은 게 있습니다. 아, 그냥 제 개인적인 관찰입니다.” 정말 쓸데없는 걸 정성껏 모은다, 나도 나지만 너도 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열심히 경청했다.

 

내 창고 401호는 이제 수납대 사이에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틈밖에 없을 정도로 셉템버 관련 물건들로 가득하다. 셉템버가 늘 다른 가수들의 배경처럼 소모되며 무대에 올랐던 시기, 너희들의 음악을 듣고 나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언젠가 빛을 보게 될 거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앨범을 여러장씩 사 모은 게 시작이었다. 나중에는 좋은 기록 세워주고 싶어서, 팬 싸인회 당첨 확률을 높이려고, 이 정도는 사재기도 아니지 않냐고 스스로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샀다.

하지만 이번 미니앨범 12집이 나왔을 때 나는 전과 달리 여러번 갈등했다. 퍼스트클래스에 앉는 셉템버, 회사 건물을 세운 셉템버, 무대와 음악을 지배하는 셉템버…… 어느덧 내 취향과 멀어진 가사와 멜로디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이제 앨범 박스를 둘 곳이 없어서 공간을 창조해야 했다. 창고를 정리하다보면 추억 여행에 빠지기 쉽다. 결국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나도 모르게 재작년에 은봄이 단독으로 실린 『코스모폴리탄』 사진에 감탄하며 인터뷰를 읽었다.

오래된 팬들, 자주 본 팬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안 보이면 궁금하죠. 내가 뭘 잘못했나. 이제 다른 팀 좋아하는 걸까. 혹시 큰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하고요. 셉토피아만 저를 보고 싶고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여러번 읽었던 인터뷰 내용을 다시 보고 있는데 와장창, 꼭대기에 있던 박스가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가 났다.

“깜짝이야.”

안에 있던 내용물이 다 쏟아져 투명한 씨디 케이스가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일어서서 입만 벌린 채 어떻게 치워야 할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몇분 동안 멍하게 창고 바닥만 바라봤다.

 

 

3

 

9월 첫째주 금요일 저녁 6시에 셉템버의 미니앨범 13집 「마법의 가을」이 공개되었다. 팬들은 금요일 6시에 음원을 발매했다는 것은 회사에서 이제 빌보드 차트를 욕심낸다는 의미라고 들썩였다. 빌보드 차트는 미국 시각 금요일부터 차주 목요일까지 집계하니까. 운동을 생략하고 집에 온 나는 기계적으로 세팅을 시작했다. 협탁에는 구형 휴대폰 다섯개, 그 옆 화장대에는 노트북 세대, 그 옆 서랍장 위에는 패드 네개. 모두 충전기에 연결했다. 하나씩 전원을 켜고 음원 사이트 여섯곳에 접속해 로그인했다. 그리고 차트를 관리하는 팬 계정지기가 알려준 순서대로 곡을 넣어서 음악이 끊기지 않고 흘러나오게 했다. 순위 반영을 위해 대략 11시간마다 음원 사이트에 새로 접속해 뮤직비디오를 클릭하는 것도 잊지 않으려고 알람 설정을 했다. 차트에서는 지난주에 음원을 낸 트로트 가수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세팅을 끝낸 나는 그제야 노역을 마친 노동자처럼 침대에 털썩 누웠다.

애써 외면해온 진실을 이제는 마주해야 했다. 이번 앨범도 그렇지만 지난 앨범부터 셉템버의 스타일이 전체적으로 달라졌다. 노래, 춤, 의상,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앨범 디자인까지 모든 것이. 그 와중에 조잡한 믹싱과 앨범의 전체적인 미감은 내 화를 돋웠다. 대체 이게 뭐지?

“아, 너무 별로다.”

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내고 흠칫 놀랐다. 아홉명이었던 멤버가 2집 이후 여덟명이 되고, 재계약 시즌 때 드라마 주연을 맡았던 멤버가 탈퇴해서 일곱명이 되었을 때 느꼈던 상실감보다 지금의 실망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오프에서 자주 만나 자연스럽게 친분이 쌓여 케이팝 페스티벌이 열린 아부다비와 빠리 여행도 같이 갔던 팬들이 모인 채팅방에서는 이미 미쳤다, 찢었다, 개쩐다라며 찬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몇몇 팬들은 내가 출시했던 이모티콘들을 사용해 폭죽을 터트리거나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는 모습으로 채팅방을 가득 채웠다.

—옷 계속 이렇게 입히는 건 아니겠지? 이러면 애들이 밥을 못 먹잖아.

누군가 옷인지 천조각을 이어 붙인 건지 모르겠는 의상 스타일을 지적했다. 몸이 보이는 옷, 특히 배를 노출한 옷을 입으면 무대 올라가기 전에 멤버들이 뭘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 밥을 안 먹는데 춤을 어떻게 힘있게 추냔 말이다. 마르지 않으면 활동에 열정이 없는 것처럼 치부하는 시선 때문에 과일칩처럼 바싹 말라버린 애들이 안타까웠다.

셉템버 멤버들이 팬들과 소통하는 채널에서도 오랜만에 연이어 알람이 왔다. 일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한 멤버는 이번에도 오지 않았지만 자주 소통하는 은봄이나 연후는 “꺄아악 뮤비 봤어요?” “곧 무대에서 봐요”라고 차례로 글을 남겼다.

—지금 엠넷에 그분들 나옵니다.

402호였다. 이렇게 셉템버의 멤버 중 누군가 어디에 나오면 나한테 연락하는 사람들이 있다.

—감사합니다. 좋은 무대로 보답하겠습니다.

내가 만든 ‘마이크를 든 고양이’ 이모티콘 중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골라 답장을 보냈다. 이제 프로모션 영상도 봐야 하고, 해외 유튜버의 셉템버 뮤비 리액션 영상의 조회수도 올려줘야 하고, 소속사에서 올려주는 녹음 비하인드 영상까지 봐야 하니 아직 할 일은 많았지만 결국 내가 좋아하는 옛날 콘텐츠를 다시 봤다.

귀신의 집을 통과하는 핼러윈 특집. 책이라면 진작 누레지고 귀퉁이가 닳았을 영상이다. 멤버 각자가 암산문제도 풀면서 시간 내에 귀신의 집을 통과해야 하는 미션이다. 유독 겁이 많은 막내가 입구에서 발걸음도 떼지 못한 채 30분을 서 있느라 실패해 상품은 물거품이 됐다. 막내가 눈물을 글썽이자 미션에 성공한 다른 멤버들은 한목소리로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미안해하지 마”라고 도닥도닥 어깨를 두드리고 안아줬다. 그리고 막내의 손을 잡고 다 같이 귀신의 집을 통과해줬다. 나는 그들이 서로 얼싸안아 한아름의 꽃다발이 되는 순간을 다시 봤다.

—배추언니, 사녹 신청할 거지?

단체 채팅방에서 내가 말이 없자 오연에게서 따로 연락이 왔다. 사전녹화라…… 지난 앨범 때 갔던 사전녹화는 아침 6시 10분에 시작한다고 해서 새벽 3시부터 설쳤다. 친목회에서 발리 여행을 가는데 공항까지 데려다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하고 간 터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정작 녹화는 방송국 사정으로 8시에 시작했고 본인도 자정부터 준비하고 기다렸을 은봄이 “너무너무 미안해요”라고 애꿎은 사과를 했다.

조금 망설이다가 오연에게 요새 학원 일이 바빠서 힘들다고 한 뒤 팬 계정을 로그아웃하고 다른 계정으로 접속했다. 낮에는 어느 회사에서 인턴 직원이 안전장치 없이 일하다가 땅으로 추락했다. 기사를 보다보니 아득한 낭떠러지로 끝없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 ‘20180915 셉템버 along for the ride’를 검색했다.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했던 콘서트.

“무대가 커져서 정말정말 좋아요. 고마워요 셉토피아.”

지금보다 촌스럽고 애리애리한 은봄이 뿌엥 눈물을 터트리는 바람에 멤버들도 따라 울었던 이 영상에는 소속사의 공식영상에선 들을 수 없는 팬들이 훌쩍이며 우는 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좋다. 은봄아, 너네 나중에 잠실이랑 고척에서도 공연해. 믿기지 않지?

영상이 끝나고 방 안이 조용해지자 나는 충동적으로 402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러 산에서 어렵게 모은 결정체를 앞발로 후려치며 카리스마를 뽐내는 큰머리 고양이가 보고 싶었다.

—카이저는 잘 있나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는 자각은 전송 버튼을 누른 뒤에야 들었다. 그는 내 메시지에 아무런 텍스트 없이 침대에서 위엄있게 자는 갈색 얼룩무늬 고양이 사진을 보내주었다.

 

 

4

 

셉템버는 미니앨범 13집 활동을 시작했지만, 정신없는 스케줄 덕분에 아직도 지난 앨범 영상통화 팬 싸인회가 남아 있었다. 내가 인도네시아 레코드사에서 앨범을 구매해 응모했던 바로 그 싸인회였다. 일요일 오후, 마지막 영상통화 팬 싸인회를 위해 창고로 갔다. 언젠가 은봄이 가을 단풍을 좋아하는데 바빠서 제대로 감상한 겨를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창고를 둘러싼 산이 떠올랐고, 전부터 이곳의 단풍을 보여주자는 내 나름의 포부가 있었다.

“어? 배추언니! 안녕하세요.”

까맸던 화면이 밝아지고, 모니터 너머 은봄이 사인하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시간 재는 소리와 함께 1분의 영상통화 팬 싸인회가 시작되었다.

“거기 어디예요? 언니 지금 밖이야?”

은봄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 사랑스러운 모습은 다슬기축제에서 처음 만난 스물둘의 은봄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나는 보도국에서 세상의 온갖 불행과 불합리함을 그래픽 이미지로 만드는 일에 지쳐 있었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만 하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러지. 나라에 대형 참사가 났고, 몇가지 보도지침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럼에도 나는 보도용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다. 좋아했던 그룹은 앨범이 안 팔린다고 해체됐다. 그 무렵 혼자 강원도 철원에 여행을 갔다가 특산물축제의 오프닝 무대에서 셉템버를 만났다. 어수선한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트로트를 열창하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지금 하고 싶은 일 있으면 질러보시라고 당돌하게 말했던 셉템버의 리더 은봄.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조회수가 225회밖에 안 되니까 한번씩 봐달라고 구독과 좋아요는 안 하셔도 된다고 웃던 은봄. 초라한 곳을 밝게 바꾸는 나의 봄 은봄이. 너를 둘러싼 구설수와 상관없이 나한테 너는 언제까지나 그때 그 은봄이야.

“은봄아. 작년에 단풍놀이하고 싶었는데 바빠서 못했다고 했잖아.”

은봄은 내가 그랬나? 하는 표정이었지만 곧바로 프로답게 맞아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내가 산에 왔거든? 우리 일분 동안 서로 말하지 말자. 너는 그냥 화면 보면서 쉬어.”

영상통화 내내 쉴 새 없이 이어졌을 팬들의 요구와 질의응답, 유행하는 밈 따라 하기, 웃기지 않는 드립의 향연에서 나와 함께하는 단 일분이라도 그저 조용히 쉬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조금 위로 올려 가을 숲과 가을 하늘이 동시에 보이게 조정했다. 산은 붉은색,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다. 셉템버의 공식 색상은 ‘레드&옐로우’니까 가을 산은 우리의 색과도 같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시간 다 됐습니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 지났다고 느낄 때쯤에서야 소속사 직원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고마워. 또 봐요.”

목소리만 들리고 화면이 넘어가면서 내 화면에는 은봄의 옆자리에 앉아 있을 다른 멤버의 얼굴이 등장했다. 막내는 하품하다 나를 보고 황급히 입을 가렸다. 생기가 없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와 언니, 근데 서른일곱이에요? 완전 어려 보인다.”

만으로 서른다섯이거든? 막내가 인사도 없이 대뜸 나이를 언급해서 당황했다.

“여기 언니 이름이랑 나이랑 핸드폰 번호랑, 우리 앨범 몇장 샀는지 써 있어요. 뭐 난 원래 언니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헤에엑! 이렇게나 많이 샀어? 언니 진짜 돈 많구나.”

종이를 들고 있던 막내의 손은 스태프에 의해 제지당했다. 가끔 이 아이는 데뷔했던 열일곱살에 멈춰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 나이에는 사회활동을 하지 않는 게 좋은 걸지도 몰라. 아무리 어른 같아도 어른은 아니니까. 자기 딴에는 기분 좋으라고 칭찬한 것 같아서 그게 더 서글펐다. 결국 내년에 10주년 기대된다는 뻔한 소리만 하다가 우리의 색으로 물든 숲을 보여주기도 전에 어영부영 시간이 끝나버렸다.

전화를 끊고 잠시 나는 얼떨떨하게 숲에 서 있다가 산책로 입구까지 내려왔다. 고양이들 밥을 주는 장소 근처에는 사람들이 버린 천하장사 소시지 포장봉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쓰레기를 주워올릴 때 그 주변 바위와 나무에 수북이 쌓인 스티로폼 도시락용기들, 일회용 커피컵들과 나무젓가락들이 보였다. 담배꽁초까지도. 아, 최근에 402호가 창고에 안 왔구나. 402호가 다녀갔다면 쓰레기를 정리했을 테니까. 그는 주말에 가끔 회의가 있으면 창고에 들르지 못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숲은 아까보다 어두워졌다. 찬바람을 맞으며 창고 주차장에 오니 매캐한 비료 냄새가 났다. 밤하늘을 올려봤다. 인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많은 별이 떠 있었다. 깜박깜박. 눈을 감았다 뜨면 별의 일부분이 사라졌다.

차에 타서 네비게이션 앱을 켜기 전에 습관적으로 버징에 접속해 가장 많이 리버징된 게시물을 클릭했다. 그것은 방금 있었던 영통 팬싸에서 한 태국 팬이 셉템버 멤버들에게 스위스 융프라우요흐 전망대의 풍경을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5

 

“옛날에는 350석을 우리가 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기쁘고 감사했는데 이제는 한꺼번에 1만 5천명을 수용하는 곳에서 콘서트를 해도 티케팅이 치열해요.”

한번은 자랑과 푸념을 섞어 402호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그는 “느티나무 같은 그룹이군요”라고 응답했다. 느티나무는 천천히 자라지만 튼튼하게 자란다고. 제삼자가 무심코 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날 밤, 느티나무 밑에서 멤버들이 손을 붙잡고 나무를 감싼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느티나무 같은 우리’라고 써서 내 버징 계정 상단에 오래도록 고정했다.

 

강남에서 셉템버의 대면 팬 싸인회가 있는 날, 커피빈에서 오연과 만났다. 오연은 갑자기 너무 벅차서 허공에 대고 “셉템버 너무 좋아” “은봄이 너무 귀여워!”라고 외치고 싶을 때, 이 감정을 공유해야 진정이 될 것 같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오연이 가져온 팬 싸인회 아이템들을 구경하면서도 나는 과연 은봄에게 ‘마지막’을 알리는 게 옳은지 고민했다. 내가 뭐라고. 은봄이 여태 만났고 앞으로 만날 팬들에 비하면 나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일 텐데. 내가 뭔데 기운 빠지는 소리를 해서 초를 친단 말인가. 번뇌에 시달리다가 오연이 시간이 다 됐다고 이제 가야 한다며 테이블 위 짐을 챙길 때 쪽지를 마저 썼다.

“언니, 그래도 배추 계정은 닫지 마. 알았지?”

은봄에게 쪽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자 오연은 보지 않아도 쪽지 내용을 안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아트홀 건물 근처에서 오연과 헤어졌다. 싸인회장에 들어가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어서 이제는 모르는 얼굴이 대부분이었다. 진행요원이 차례차례 옆으로 넘어가라고 해도 한 멤버 앞에만 오래 머물며 시간을 초과하거나 뜬금없는 애교를 시키고 좋아하는 멤버 이름을 부르며 계속 자기를 보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없기를. 이 싸인회가 셉템버에게 그저 피곤한 일의 연장이 아니라 기운을 북돋는 일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발길을 돌렸다.

 

오연과 헤어지고 혼자 테헤란로 근처까지 방황하듯 걸었다. 실연이라도 한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길 한쪽에 우뚝 서 있는 402호와 마주쳤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 정장 차림의 사람들과 둥글게 서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402호를 당황하게 하려고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인사했다. 순간 402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다시 한번 손까지 흔들면서 인사했다. 그러나 402호는 이번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아무 표정 없이 마치 만나기로 한 사람을 봤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응했다.

“잠시만 기다려요.”

뭐지, 이 심심한 반응은. 402호는 같이 있던 사람들과의 자리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내게 대형 까페가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주문한 커피 두잔을 들고 온 402호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편한 복장으로 창고 앞에서 볼 때와 다르게 피로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주말에 넥타이가 웬 말이에요? 산에 있을 줄 알았는데.”

“새벽부터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요. 시차 때문에 아침 일찍 해야 해서.”

402호는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은빛 줄이 여러개 있어서 천장 조명에 비추면 빛이 반사되는 명함이었다. 책임연구원 이규호.

나도 명함을 지갑에서 꺼내 전달했다.

“도토리미술학원 원장 배주희.”

그가 내 명함을 사전 보듯이 한글자씩 천천히 읽는 바람에 ‘희’를 말할 때는 언뜻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주희씨는 왜 여기 있어요?”

다른 사람이 혼자 여기서 뭐 하고 있었냐고 물었다면 박람회를 보러왔다고 둘러댔겠지만 402호 이규호씨에겐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솔직하게 셉템버 때문에 왔다고 말했다.

“그럼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대답하려는 순간 오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글자뿐인데도 흥분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 메시지를 보고 시간이 멈춘 듯 내 몸도 굳어버렸다.

—은봄이가 답장 남겼어!!! 대박이지?

 

영상의 시작화면은 팬 싸인회장의 은봄이었다. 이거 재생할 수 있을까. 손이 떨렸다. 은봄과 테이블을 사이로 마주 앉은 오연이 자기 자리에 설치한 카메라를 가리키자 은봄이 큰 입모양으로 또박또박 전했다.

배추언니, 너무너무 고마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싸인회 때마다 부탁하던 시그니처 하트 포즈까지 한 은봄이 마저 말했다.

“행복해야 해. 많이많이 사랑해.”

은봄이 유기견을 입양했다는 소식에 강아지 쿠키를 선물로 줬더니 자기 건 줄 알고 대뜸 뜯어서 먹은 일, 팬 싸인회에서 내 귀에 대고 ‘나 귀엽게 그려줘서 고마워’라고 속삭였던 일, 팬미팅 이벤트로 퀴즈가 나올 때마다 내 쪽을 보며 정답이 뭐냐고 물어봤던 일, 뉴욕 타임스퀘어 광고판에 다른 팬들과 같이 생일축하 광고를 해줬을 때 고맙다고 회사 몰래 디엠을 보내준 일, 싸인회가 끝나고 정리할 때 내 신청곡을 받아서 끝까지 열창해준 일, 회사에서 더 좋은 인이어를 받았지만 아직도 내가 선물한 인이어를 번갈아 쓰는 것까지 한꺼번에 떠올라 눈물이 났다. 내가 울기 시작하자 건너편의 이규호씨가 손수건을 건넸다.

“이런 거, 갖고 다니는, 사람, 처음 봤어요.”

계속 훌쩍이면서도 괜히 민망해서 그렇게 말했다. 조금 진정이 되고나니 우리를 힐끔대는 주변 사람의 시선이 의식되었다. 사연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하자 이규호씨는 괜찮다면서 진짜 손수건 가지고 다니는 사람 처음 봤냐고 평소처럼 심상한 말투로 답했다.

“내가 몹쓸 짓을 한 기분이에요.”

여태까지는 대부분 걔네들이 먼저 잘못했거든요? 나는 구구절절 내 덕질이 끝났던 과정에 대해 늘어놨다. 한때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그들. 그들이 탁한 눈빛으로 춤을 대충 춘다든지, 콘서트에서 AR만 깐다든지, 멤버끼리 사이가 안 좋은 티를 내거나 팬들에게 잔뜩 받은 선물을 과시하듯 SNS에 올린다든지, 출연료 신기록을 세웠다고 기사를 내거나 인터뷰할 때마다 건물주가 되고 싶다는 타령을 하면 내 마음도 조금씩 식곤 했다고. 그럼에도 그들의 사소한 행동에 다시 좋아져서, 실망하고 좋아하고 실망하고 좋아하고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그들에게서 음주운전, 폭행, 마약과 같이 미처 상상하지 못한 폭탄이 터졌다고.

“셉템버는 잘못이 없고, 저도 아직 좋아하긴 하는데, 문제는 예전만큼 심장이 뛰진 않아요.”

“그게 자연스러운 거죠. 생겼다가 유지되고 소멸하는 것.”

이규호씨는 테이블 위에 구석에 있던 미니선인장 화분을 가운데로 옮기며 말했다.

“강제 탈덕은 자주 당했는데 완덕은 처음이라 너무 낯서네요.”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열정을 쏟던 일이 이토록 잠잠해질 수 있다니.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롤라팔루자와 글래스턴베리까지 따라가고 싶었는데.

“셉템버 좋아하면서 마음 졸인 적은 많았지만,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왜 난 적당히 좋아하는 게 안 될까? ……하지만 셉템버와 거리를 뒀다면 내 인생도 재미없었겠지.

“원래 비난과 혐오가 더 쉬운 법이에요.”

내가 빤히 바라보자 이규호씨는 조금 머쓱해하면서 조롱만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대신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상처받을 일도 없다고 덧붙였다.

“전 셉템버가 계속 잘됐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제는.”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까페의 커다란 통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블라인드로도 가리지 못한 가을의 오후 햇빛 한줄기가 대각선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아, 광합성?”

이규호씨가 이제야 온전히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녹색 식물은 빛 에너지가 있어야 이산화탄소와 수분으로 유기물을 합성하잖아요. 식물 대부분은 살아가려면 광합성은 필수라고 할 수 있죠.”

나는 잠자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모금을 넘겼다.

“이분들이 주희씨의 빛 에너지인 거네요? 주희씨가 이 식물이라면.”

이규호씨는 내 휴대폰 잠금화면 속 은봄과 테이블 위 선인장을 차례로 가리켰다.

“식물이 살아가는 데 빛 에너지인 태양은 아주 중요하지만, 늘 태양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빛만 있으면 위험하죠. 비도 와야 하고 바람도 불어야 하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요?”

“그 상태 그대로 있어 보는 거죠. 비도 맞고 바람도 느끼게.”

“……감동적이네요.”

“어떤 부분이요? 식물은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는 부분?”

“이규호씨가 지금 저를 위로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요.”

그는 입을 잠깐 다물지 못했다. 드디어 당황한 것 같았다.

 

은봄아.

앞으로 내가 안 보여도 난 어디선가 너를 늘 응원하고 있을 거야.

너는 내게 공기 같은 존재니까.

은봄이 이번 활동도 파이팅! 사랑해♡

—너의 영원한 팬, 배추언니가

 

 

outro

 

온 세상이 번쩍거렸다. 백화점의 로비에는 웹툰에서 아이돌그룹으로 나오는 캐릭터들과 관련된 대형 팝업스토어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정판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지나 백화점 바깥으로 나갔다. 실체가 없는 만화 주인공이나 버추얼 연예인을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열광할 때는 그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겠지.

약속시간이 됐나 보려다 잠깐 버징에 접속했다. 화제 검색어에 셉템버가 있었다. 요즘 해외에서 제일 잘나가는 보이그룹 모 멤버가 셉템버 곡을 리메이크해서 올렸는데 그 영상이 하루 만에 1억뷰를 달성했다고 난리였다. 영상 아래로는 셉템버보다 잘 어울린다는 영어 댓글이 이어졌다. 예전 같으면 ‘객관적으로 셉템버가 더 잘 불렀다’라는 댓글을 각기 다른 아이디로 접속해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로 2절 3절 4절까지 달았을 텐데 딱히 화가 나진 않았다. 대신 조용히 비추천 버튼을 눌렀다.

셉템버가 화제 검색어에 오른 것은 고작 그런 일 때문이 아니었다. 기사를 보고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세상 사람들 이거 좀 보세요. 셉템버가 10주년을 맞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기관에 의미있는 액수를 기부한 것이다. 오랜만에 배추 계정에 로그인해 기사 링크를 스크랩했다.

백화점 앞 광장에 이르게 설치된 대형 트리는 밤이 되자 작은 빛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그 근처에 줄을 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옆에 오늘 약속한 사람이 같이 저녁을 먹으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안녕.

 

* 소설에서 쓰인 노래가사는 박소란 시 「원룸」(『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의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없겠다/기어코/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