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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은미 崔銀美
1978년 강원 인제 출생. 200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目連正傳)』 『눈으로 만든 사람』, 중편소설 『어제는 봄』,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 『마주』 등이 있다.
alfmrlal@naver.com
김춘영
김춘영의 집은 화운령에서도 좀더 걸어올라간 곳에 있었다. 운탄고도 5길이 시작되는 화운령 초입에 주차를 하고 등산화를 꺼내 신으면 연못터 즈음에서 산길이 시작됐다. 산을 오르다 서서 돌아보면 능선 사이로 길게 이어진 임도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엔 ‘제무시’트럭이 석탄을 나르던 길이었고 지금은 백패킹과 트레킹 명소가 된 길이었다. 사람들은 그 길을 운탄고도라 불렀다. 네개 군을 가로지르는 170여 킬로미터의 길이었다. 김춘영은 그 운탄로 일부 구간이 지나는 산 중턱에 살았다.
김춘영을 만나러 갈 때 내 배낭은 늘 가득 찼다. 황도 통조림으로 배낭의 반 정도를 채운 뒤 그의 단골 빵집이라고 전해 들은 군청 옆 빵집에서 소금빵을 샀다. 때에 따라 믹스커피나 땅콩버터, 아몬드 같은 것들을 추가해 담았다. 김춘영은 다른 생필품에 해당되는 것을 사 가면 받지 않았다. 산간에 혼자 사는 고령자에게 필요할 만한 것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 챙길 법한 보온용품이나 편의용품도 사양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주전부리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들만 받았다. 김춘영한테 나는 방문객이었다.
김춘영과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와 면담일지를 작성하다보면 김춘영이 나를 방문객 자리에 위치시키는 건 당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방문객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김춘영과 나의 육성이 담긴 녹취록을 풀다보면 내가 김춘영한테 어떻게 방문객일 수만 있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거기서 생각을 더 진전시키지는 않았다. 김춘영과 나는 일년 전 구술자와 면담자로 처음 만났고 여전히 구술자와 면담자라는 구도 안에 있었다. ‘라포’ 형성을 위해 사적으로 더 다가간다고 해서 그 구도가 벗겨지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특별한 순간들이 없지 않았다. 그의 집에 앉아 김춘영의 말을 듣던 날들 중 몇몇 순간에, 그의 생애 기억 속 한 지점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듯한 깊은 접속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이 대화가 분명한 목적과 테마의 틀 속에서 진행되는 대화라는 걸 김춘영도 알고 나도 알았다.
면담 사전준비를 위해 처음 김춘영의 집을 방문했던 때도 봄이었다. 같은 연구팀 홍이 면담보조자로 동행했다. 화운령 곳곳엔 봄철 야생화가 한창이었지만 산길을 오르는 내 머릿속은 김춘영에 대한 생각으로 분주했다. 한달에 두번 조카가 들러 우편물과 생필품을 전해주고 간다는 것, 두달에 한번 약을 타러 읍내 병원에 갈 땐 오래전 함께 지냈던 이웃 동생이 동행한다는 것. 군청 옆 단골 빵집 얘기도 그때 들은 얘기였다. 김춘영과 면담한 적이 있는 백에게서였다. “애써보세요. 귀한 분입니다.” 백은 어쩐지 자조적인 투로 그런 말을 했다. 마지막까지 면담을 잘 끌어가라는 말도 했다.
김춘영의 집은 김춘영의 거주지인 동시에 구술 채록작업이 진행될 나의 현장이기도 했다. 연구사업과 연구팀에 대한 소개가 끝난 뒤 홍이 김춘영에게 스몰토크를 시도하는 동안 나는 집 구조를 빠르게 살폈다. 화장실과 주방의 위치가 구술 흐름이 끊기지 않을 만한 동선 안에 있는지, 유선전화와 티브이를 사용하고 있는지, 주 면담이 진행될 거실의 채광 상태, 필요할 때 빛을 차단해줄 커튼이나 블라인드의 여부.
김춘영의 집은 거실 통창이 크게 나 있는 단층 목조주택이었다. 창 앞에 서면 제일 먼저 화운령 골짜기가 보였고 그 뒤로 운탄고도가 지나는 산자락들이 파도처럼 겹겹이 펼쳐졌다. 실내 쪽 창턱에 줄지어 세워놓은 황도 통조림통에선 여러 종류의 다육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벽에 걸린 농협 달력과 달마도, 광업소 문구가 새겨진 오래된 괘종시계, 탁자 한켠의 대형 주전자와 온풍기, 애초 용도와 달리 수납박스처럼 쓰이고 있는 김치통.
김춘영의 집은 손때가 묻은 생활용품들이 엄격히 정돈되지도, 그렇다고 허름하지도 않은 상태로 김춘영 일인의 질서 안에서 더도 덜도 않는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몇몇 공간에는 김춘영의 소일거리일까 싶은 소품들도 놓여 있었다. 때마침 홍은 거실 통창 한쪽에 달린 지등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색 바랜 한지로 만든 등이었다. 봄산을 담은 통창 풍경과 집의 오래된 목재 느낌을 은은하게 아우르며 걸려 있었다.
지등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홍은 조금 들떠 보였다. “등이 집이랑 정말 잘 어울려요, 어르신” “어르신이 직접 풀 먹여 바르신 거예요?” 홍은 한지에 새겨진 꽃잎 문양을 유심히 보았고 “화운령이 야생화 군락지로도 꽤 알려져 있잖아요” 말했다. 홍은 그 무렵 박사논문을 위해 전국의 지명 전설을 수집하고 있었다. “봄만 되면 나그네랑 나무꾼들이 꽃들을 한아름 꺾어 갔다고 해서 화운령을 꽃꺼끼재라고도 한다면서요.” “화운령 꽃이 새겨진 화운령의 등이 여기 있네요.” 얼굴이 상기된 채 이런저런 말을 하는 홍을 김춘영은 한참 쳐다보기만 했다. 홍의 말이 끝나자 김춘영이 말했다.
“그거, 내 조카가 이케아에서 사다준 겁니다.”
후에 홍은 말했다. 그 말 이후로 김춘영한테 말을 걸 수 없었다고. 눈을 마주치고 싶어도 마주칠 수 없었다고. 김춘영과의 면담을 보조하기로 했던 홍은 현장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김춘영 생애사 작업은 한 계절에 한두차례씩 일년간, 오직 김춘영과 나, 일대일 면담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회차를 앞두고 있었다.
김춘영과 첫회차 면담을 마쳤을 때 나는 백이 ‘귀한 분’이라고 한 게 무슨 뜻이었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김춘영은 기본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면담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특정한 일들에 대해 말할 때, 김춘영은 사실의 나열이나 정보 제공에 그치지 않고 그 일을 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맥락 속에서 이야기했다. 면담자가 유도하지 않아도 그랬다. 오랫동안 자신의 경험을 곱씹어온 사람 같았고 그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전달하기 위해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고 무엇을 나중으로 돌려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사건을 겪고 같은 상황에 있었다고 해서 모두가 그처럼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김춘영은 ‘귀한 자원을 가진 분’이었다.
김춘영의 자원을 내가 알아보았다는 걸 김춘영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면담 중간중간,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연구자인 나를 만족시키고 있는지 반응을 살피곤 했는데 그건 자신의 말이 제값을 하고 있는지 불안해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어떤 수위로 어떤 이야기를 더 내보일지 타진하는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 타진의 기미가 느껴지면 나 또한 내가 가진 자원이 당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어필했다. 시골 노인이라도 이름을 알 수 있는 대학의 박사학위, 사명감 있는 연구기관에서 일관되게 쌓아온 경력. 구술자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지는 이른바 ‘배운 여자’라는 자원이었다.
나는 이전 면담이 김춘영한테 아쉬움으로 남았을 거라고 느꼈다. 김춘영이 백과 했던 면담은 오년 전 한 재단에서 발간한 탄광사회사 구술자료총서에 실려 있었다. 거기서 김춘영은 화운갱 주변의 생활상을 건조한 관찰자 톤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표현력과 표현욕이 있는 구술자와의 면담이라기엔 질문도 답도 전형적인 틀 안에서 맴돌았다. 어떤 요인 때문이든 보통은 구술자와 면담자 간의 상호작용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오는 결과물이었다.
나는 백과 다를 것이라는 것, 당신과 나의 작업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 나는 김춘영이 무엇보다도 그것을 믿어주길 바랐다. 실제로 김춘영과 내가 지난 한해 동안 해온 작업은 나쁘지 않았다. 충분한 시간과 텀을 두고 면담에 집중하며 피드백을 주고받았고 섣불리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상대에 대한 호의와 호감을 놓지 않았다. 서로가 가진 자원을 필요한 만큼 끌어내고 내보이며 신뢰를 쌓아왔다.
‘지역과 여성의 기억’ 아카이브 연구팀은 그간 광부의 가족으로만 소환되던 탄광촌 여성을 주체로 세울 것이다. 이것은 탄광사회사도 주민운동사도 노동생활사만도 아닌, 각 여성의 이름 석자를 전면에 내세운 생애사 작업이었다. 내가 완성할 텍스트의 주인공은 김춘영이었다.
화운령에 4월에도 눈이 내리는 건 흔한 일이라고 했다. 5월에 눈이 와도 별스럽지 않은 곳이라고 김춘영은 황도 통조림을 받아들며 말했다. 산길을 올라오며 진달래와 산벚꽃을 본 게 불과 몇십분 전이었다. 통창 밖으로 갑자기 눈이 쏟아지는 걸 보면서 나는 김춘영의 집이 해발 천 미터에 있다는 걸 실감했다.
김춘영은 다행히 여느 면담 날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컨디션에 따라 구술 기복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회차라 나는 평소보다 더 김춘영을 살폈다. 구술자료 이용에 관해 동의서를 받는 절차가 남아 있었고 인명과 지명의 공개 여부도 상의해야 했다. 이야기를 잘 쌓아왔더라도 마지막 절차에서 방어적 태도를 보이는 구술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간의 면담 흐름으로 볼 때 김춘영이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았지만 최종 면담이라는 것이 주는 긴장과 무게가 없을 수 없었다.
김춘영이 차를 끓이는 동안 나는 마지막 의식을 치르듯 거실 좌탁 위에 면담장비를 세팅했다. 창밖으로 눈이 쏟아지는 것을 빼면 다 그 자리 그대로였다. 통창엔 변함없이 그 등이, 이케아 등이 걸려 있었다. 김춘영의 집에서 김춘영과 마주앉아 있는 동안 나는 이케아 등이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잊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 등을 의식했다. 연구자로서 내가 지켜야 하는 점에 대해 상기하고 또 상기했다. 김춘영이 다가와 “잘하면 발이 묶이겠네, 묶이겠어요”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내려앉았을 만큼.
지나가는 봄눈이라기엔 눈이 너무 많이 오고 있었다. 한겨울 면담 때도 이렇게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폭설을 본 적은 없었다. 눈은 점점 더 굵어졌고 얼마 안 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통창 밖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못 가지, 이러면 못 내려가지.” 밖을 한참 내다보던 김춘영이 결단을 내리듯 말했고 그 말은 곧 사실이 되었다.
돌아가는 길이 위험하다는 결론이 났을 때, 그러니까 내가 김춘영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생겼을 때, 나는 예상에 없던 이 일이 어쩌면 면담 때마다 내가 바라왔던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는 두세시간, 길게는 반나절, 면담을 마치고 김춘영의 집에서 내려올 때마다 가시지 않는 아쉬움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없지 않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김춘영의 집에서 하루를 묵는다는 건 단순히 면담시간이 추가되는 것과는 밀도 자체가 다를 것이다. 함께 밥을 먹어야 할 것이고 통창 밖으로 낮이 아닌 다른 시간대가 지나가는 걸 보게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내겐 늘 숙제 같기도 했고 가장 얻고 싶은 무엇이기도 했던 그 라포라는 것을 더 얻게 될 수도 있었다. 이부자리를 펴주는 김춘영. 장롱 안에 있던 오래된 물건을 꺼내 보여주는 김춘영. 좌탁과 녹음기를 사이에 둔 상태에선 나올 수 없었던 얘기를 사소한 계기로 풀어놓게 되는 김춘영.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 누구도 듣지 못한 이야기.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한 기대로 한순간 벅차올랐고, 흥분을 누르며 연구팀에 상황을 전했다. “그러면 시간이 생긴 김에……” 연구팀 동료 안이 말했다. “날씨가 돕는 김에……” “우리가 좀더 기다릴 테니까 박선생.”
나는 뒤뜰에 있는 김춘영과 통창으로 쏟아져내리는 눈을 번갈아 보며 안의 말을 들었다. 안은 김춘영에게서 ‘그 사건’에 대한 발언을 좀더 유도해달라고 했다. 이번 연구 프로젝트의 구술자는 김춘영을 포함해 다섯명이었다. 그들은 군내외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사십오년 전 4월 화운령에서 있었던 사건을 함께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지역과 여성의 기억을 테마로 이 지역의 여성구술자를 섭외하면서, 연구팀은 구술자들이 삼사십대였던 당시 지역을 통째로 뒤흔들었고 이후 오랫동안 지역공동체에 영향을 끼친 그 사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팀은, 특히 안을 중심으로 한 몇몇 연구자들은 이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이, 아직 진상이 온전히 규명되지 않은 그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번 프로젝트가 그 사건에서 ‘여성 경험의 특수성’을 수집하고 재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광부들이 계엄사령부로부터 물고문을 받을 때 광부의 아내들은 성고문을 받았다는 증언 같은 것들이 구술자들 입에서 더 나와주기를. 연구팀이 그 폭력을 해석하고 사료화할 수 있기를.
구술 흐름이 그 사건을 향해 가지 않는 건 다섯 면담 중 김춘영과 나의 작업뿐이었다. 안은 내게 말하곤 했다. 박선생, 우리가 쓰는 건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라이프 히스토리야. 하지만 나는 구술자들의 고유한 생애를 사건으로 환원하려는 안의 방식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김춘영의 구술이 사건의 증언으로 수렴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이 작업의 주체는 사건이 아니었다. 김춘영이었다. 나는 오직 김춘영의 말을 들을 것이다. 김춘영이 말하는 김춘영의 기억을 들음으로써 김춘영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한 개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해갈 것이다. 다른 연구자가 아니라 나여서 가능한, 오직 나와 김춘영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김춘영과 나의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포착 가능한 어떤 진실에 접근해갈 것이다.
4월의 폭설이 내리지 않았다면, 그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는 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안과 그동안 해온 언쟁을 반복하며 내 속마음을 쏟아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 안의 말을 들었다. 애써보겠다고 말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면담자들은 일찌감치 면담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이었다. 시간이 소요되는 것에 대해 팀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결과물로 그들을 설득하지 못하리란 법이 없었다. 날씨가 도와주고 있으니까. 긴긴밤이 남아 있으니까.
안과 통화를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화운령 골짜기에 있는 것이 김춘영과 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날씨 때문에 이동에 변수가 생긴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오월의 눈이 별스럽지 않은 것처럼 지나가던 등산객이 들르는 것도 종종 있는 일이라고 김춘영은 말했다. 추우면 너무 추워서, 더우면 더워서, 폭우나 폭설이 쏟아질 땐 더 걸을 수가 없어서 사람들은 김춘영의 집 문을 두드린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웃도어 위로 눈을 잔뜩 인 사람 둘이 쓰러지듯 들어왔을 때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현관에 선 채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김춘영이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나서야 눈이 너무 온다고, 와도 너무 온다고 “세상에, 세상에” 숨을 토하듯 말했다.
그들은 운탄고도 4길에서 5길로 넘어오던 중에 폭설을 만났다고 했다. “한 고개만 더 넘으면 되는데, 저쪽에 리조트 있잖아요, 거기서 묵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눈이……” 김춘영이 온풍기 온도를 높이고 수건을 건네주자 그들은 계속 감사하다고 말했다. “할머니 아니었으면 저희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감사해서 어째요, 할머니.”
내 구술자를 할머니라고 칭하고 있는 그들은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였고 부부라고 했다. “근 십년 만에 둘이서만 온 여행입니다.” 그들은 운탄고도 트레킹과 백운산 등산을 마친 뒤 리조트에 며칠 머물면서 카지노와 골프장을 경유해 돌아갈 거라고 했다.
나는 거실 한쪽에 착잡하게 선 채 내 현장에 갑자기 나타난 부부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 직후부터 거실은 실시간으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현관께에서부터 그들이 이동한 자리를 따라 등산스틱과 나뭇가지와 눈이 녹아 생긴 물기가 선을 그으며 펼쳐졌다. 몸이 녹으며 진정이 되자 남자는 당이 떨어져 손이 떨린다며 배낭에서 먹을 것들을 꺼냈다. 연양갱, 초코송이, 핫브레이크. 보고 있던 김춘영이 황도 통조림 몇개를 좌탁으로 가져가 건넸다. “손 떨릴 땐 이게 직효요”라면서.
그곳은, 여행객 부부가 황도즙을 흘리고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 먹고 있는 그 좌탁은, 폭설이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김춘영과 나의 마지막 면담이 진행되고 있을 곳이었다. 지난 일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누구의 방해도 없이, 내밀하고 고요하게, 선을 잘 지키면서.
창턱의 다육이들을 들여다보던 여자가 주방으로 다가갔다.
“할머니한테 이렇게 신세를 졌는데, 간식값이라도 하고 가야죠.”
여자는 대야에 담겨 있던 콩나물을 다듬기 시작했다. 김춘영도 주방 이곳저곳을 오가며 무슨 일인가를 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여성들이 주방에서 움직일 때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배웠으므로 나는 엉거주춤 주방 쪽으로 이동했다.
“저도 뭐 도울 거 없을까요?”
내가 묻자 콩나물을 다듬던 여자가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뭘 물어요, 찾아서 해야지.”
눈은 잦아들 기미 없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얼핏 봐도 이들이 들어올 때보다 두어뼘은 더 쌓인 것 같았다. 이 부부가 내 현장에서 금방 떠나지 않을 것 같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찾아왔다. 저 여자에겐 내가 자기 아들 여자친구 급으로 보이는지도 몰랐다. 나는 긴장할 필요를 느꼈다. 그간의 경험으로, 현장의 나이 많은 여성들을 어머님이나 할머님으로 대하는 건 자연스러운 하대와 평가에 나를 재물로 내주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면담 상황에선 현장의 통제권을 잃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었다. 나는 최소한의 권위를 잡고 있을 필요를 느꼈고, 큰 소리로 김춘영을 불렀다.
“선생님, 김춘영 선생님!”
예상대로 부부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관심을 보이며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다. 짧은 설명으로도 그들은 김춘영과 내가 어떤 관계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빠르게 이해했다. 그들은 운탄고도를 따라 펼쳐지는 폐광촌 스토리텔링을 차근차근 흡수하며 화운령까지 걸어온 것 같았다. 문화재 안내판을 끝까지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는 타입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운탄고도를 걸으며 해발 961미터에서는 961갱 입구를, 해발 1178미터에서는 1178갱 입구를 지났을 것이다. 갱 입구에서 손을 흔드는 광부 동상을 보았을 것이고 삭도와 동발과 갱내수 정화시설을 보았을 것이다. 한때 이 골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초등학교터와 사택터를 지났을 것이다. 탄가루를 씻어내고 헹궈내던 목욕탕터와 공동우물터도 지났을 것이다.
“여기서 오십년을 넘게 사셨으면 그야말로 탄광촌 산 증인이시네요.”
구술사 작업 얘기를 하면서 여행객 부부와 김춘영과 나는 통창을 옆에 두고 좌탁으로 모여 앉았다.
“그럼 할머니 살아오신 얘기가 책으로도 나오는 건가요?”
여행객 남자가 나와 김춘영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지역자료총서의 하나로 나올 거라고 말하며 김춘영을 보았다. 자신의 이야기가 공적 자료가 된다는 걸 새삼 상기한 듯 김춘영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면담 때는 없던 일이었다. 나는 다시 김춘영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넘어오다 보니 요 아래에 도롱이 연못터라고 있더라고요.”
여행객 여자가 말했다.
“네, 아직은 얼어 있어서 그냥 공터처럼 보이는데 날이 더워지면 물이 녹아서 요새도 연못이 돼요.”
내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저는 그 연못터 얘기가 그렇게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화운령은 인근 어느 골짜기보다도 많은 갱이 있던 곳이었다. 지역에서 최초로 탄광이 개광된 곳도 화운령이었고 최대 규모의 민영 탄광 광업소가 있던 곳도 화운령였다. 지하에 숱한 갱도가 생기던 어느날 지반 침하가 일어나면서 갱도가 내려앉았다. 땅이 꺼진 자리로 연못이 생겨났고 일급수에만 산다는 도롱뇽이 살기 시작했다. 화운령 사람들은 도롱뇽이 사고의 위험을 미리 알려주는 존재라고 믿었다.
“막장 사고가 얼마나 많았으면 광부 가족들이 도롱뇽을 보면서 기도를 했을까요.”
그때까지도 눈은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매 면담 김춘영은 좌탁에 앉기 전, 통창 앞에 나를 나란히 세우고 서서 자신의 구술에 나오는 장소들을 가늠해주곤 했다. 저기 저쪽 능선이 1084갱. 그 뒤쪽이 989갱. 그 옆 비탈이 화운갱 동부사택 자리. 저쪽 산 너머가 안경다리.
김춘영이 통창 밖을 보며 말했다.
“많이들 죽었지요.”
잠시 뒤 김춘영이 이어 말했다.
“그래도 다 사람 사는 곳이었어요.”
좌탁에는 찻잔 네개가 있었다.
“갱마다 광부 가족들이 사는 사택촌이 있었다면서요.”
여자가 물었다.
“어르신도 사택촌 살면서 아이 학교 보내고 하신 거예요? 우물터 팻말에 적힌 거 보니까 탄가루 때문에 남편 작업복 빠는 것도 그렇게 힘들었다던데.”
여자의 말에 김춘영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사택촌, 나는 아니에요.”
그 말과 함께 김춘영은 몸을 일으키려던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기우뚱해 나는 부축하듯 김춘영을 잡았다. 선생님 괜찮으시냐고, 아마도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김춘영이 다소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이고, 그만 좀, 선생님 소리 좀 그만해요.”
첫 만남 때부터 줄곧 나는 김춘영한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고 김춘영은 한번도 그 호칭에 특별한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좋다고 하지도 않았지만 민망해하거나 어색해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김춘영이 좋았다. 이 부부가 이 집에 나타나기 전까지 유지하던, 정제된 표정으로 면담자를 대하던 그 위엄이 좋았다.
분위기를 살피던 남자가 이 연구작업에 좀더 맞는 화제라고 생각했는지 여성 광부 얘기를 꺼냈다.
“저는 탄광에 여성 광부도 많았다는 걸 얼마 전에 무슨 다큐멘터리를 보고 알았어요. 방진마스크에 작업복 딱 입으시고, 장화에 하이바 두르고, 손이 얼마나들 빠르신지, 막장에서 석탄 더미 올려 보내면 여성 광부들이 석탄이랑 잡석을 다 가려냈다고 하더라고요. 용어가 뭐 있었는데.”
“선탄부요.”
“맞아요, 선탄부. 여성 광부 얘기도 더 많이 알려지고 그러면 좋겠네요.”
그러고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여행객 부부는 자신들을 폭설로부터 대피시켜준 이 고마운 할머니가 매일 마음을 졸이며 남편을 갱도로 출근시키던 광부의 아내였는지, 탄가루 속에서 선탄을 하던 여성 광부였는지 알고 싶은 것 같았다.
눈은 계속 내렸고 먼 산에서 무언가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서 무언가 사박사박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더 많이 알려지고 그러면 좋겠네요. 남자의 그 말을 끝으로 김춘영도 나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을 법도 한데, 아무 말 하지 않는 잠깐의 시간이 있었고, 그때 김춘영이 나를 보았다. 나를 보는 김춘영을 본 그때에 나는 내가 김춘영의 집에서 내려가고 나서도 그 짧은 시간의 여파 속에 있게 되리란 걸 알았다. 알았지만, 몇초 동안 내가 부지불식간에 내보이고 만 것을 당장 수습할 길이 없었다.
김춘영이 주방으로 걸어가 주전자에 물을 채웠다.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리고는 허리를 굽혀 불을 켰다. 누구보다 오래 이 화운령 골짜기에 살면서 탄광촌의 흥망성쇠를 몸소 겪었지만 김춘영은 광부의 아내도, 여성 광부도 아니었다. 사십오년 전 화운령을 중심으로 일어난 광부들의 노동쟁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단에 구금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그 사건의 당사자로 얘기되는 광부와 광부의 가족 어디에도 김춘영은 속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강아지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던 탄광촌의 호황기에, 화운령에서 가장 많은 돈을 긁어모은 건 김춘영이었다고 했다. 다섯 구술자 중 한 구술자의 말이었다. 아직 편집 전인 날것의 녹취록에서, 구술자는 여전히 골이 깊게 남아 있는 듯 김춘영이라는 사람으로 인해 환기되는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내가 여직 이러고 살고 있는데, 젊어서는 탄가루 뒤집어쓰고 늙어서는 카지노 화장실 청소하면서, 내가 여직도 죽지를 못하는데.” “산꼭대기에 고상하게 집 지어놓고.” “그 여자가 ○ ○ ○○○○……”
김춘영의 일터는 화운갱 동부사택 B지구 골목 끝에 있었다. 입퇴갱 길목에서 좀 돌아가야 있는 곳이었지만 화운갱 광부들은 퇴갱길에 늘 김춘영을 찾아가 술을 마셨다. 가는 길목에 집이 있어도 김춘영한테 먼저 들렀다. 탄광은 3교대로 돌아갔기 때문에 사택촌 술집들은 스물네시간 열려 있었다. 화운령 골짜기로 해가 지기 시작하면 갑방 광부들이 술을 마시러 왔다. 자정이 지나면 을방 광부들이 근무를 끝내고 왔다. 아침 해가 뜨고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시작할 때쯤부터는 병방 광부들이 술을 마셨다. “징글징글하게들 먹었지.” 김춘영은 말했다. “꼭 내일 죽을 사람들처럼 먹었어요.” 그 말은 비유가 아니었다. 정말로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사는 곳이 화운령 골짜기였다.
“막장 일이 어떤 일인지를 아니까.” 또다른 구술자는 말했다. “남편이 작부집을 가든 매밋집을 가든 대폿집을 가든 말을 삼갔지.” “마누라가 아침 설거지 하다 그릇만 떨어뜨려도 광부들은 재수가 없다고 갱에 안 들어갔으니까.” 화운령엔 죽음을 부르지 않기 위한 금기와 언제 죽을지 모를 이들에게 허용된 충동이 함께 흘러다녔다. 모든 일들이 한 산비탈 안에 다닥다닥 붙은 채로 일어났다.
광부들은 소속 광업소 신분증격인 인감증을 걸어놓고 술을 마셨다. 그러면 다음달 월급은 그 술값이 공제된 채로 나왔다. 화운갱 광부의 아내들은 남편 월급봉투를 김춘영과 나눠가진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이들이 나를 어지간히도 싫어했지요.” 김춘영은 말했다. “과부가 되고 나면 좀 덜 싫어했고.” “내가 술만 판 건 아니었어요.”
여행객 부부는 창턱 쪽으로 나란히 다가앉아 통창 밖으로 쌓이는 눈을 보고 있었다. 주방 쪽에선 김춘영이 올려놓은 주전자에서 물이 데워지고 있었다. 해서 좋을 건 없는 이야기. 언제까지 한 공간에 같이 있어야 할지 모를 이 부부 앞에선 굳이 하지 않아도 좋을 이야기. 대화가 끊겼던 그 잠깐의 시간에 내 머릿속에서 일어났을지 모를 판단을 의식하며 나는 좌탁가에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연구팀은 때때로 핵심적인 일화들이 말해지는 순간을 만났다. “탄가루보다 더 시커먼 게 내 속”이라고 말을 토해내는 구술자의 이야기 속에서, 이것이 바로 탄광촌 여성들의 리얼리티라고 여겨지는 조각들을 만났다. 하지만 구술자들이 마지막에 말을 번복하거나 삭제를 요청하는 부분은 대개 그 핵심적인 조각들이었다. 면담이 모두 끝나고 구술을 텍스트화하는 작업이 시작될 때, 연구자가 청자에서 화자로 전환될 때, 그때가 구술자도 면담자도 시험에 드는 때였다. 통창가의 부부와 주방을 오가는 김춘영 사이에 꼼짝없이 앉은 채로 나는 심호흡을 했다. 지난 일년간 충실한 청자로만 머물 수 있었던 김춘영의 집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사이에 화자라는 시험대로 건너가 있었다.
주방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뒤뜰로 나갔는지 김춘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방으로 걸어가 주전자의 불을 껐다. 늦은 오후로 넘어가면서 눈의 흰빛이 조금씩 명도를 달리하고 있었다. 정물 같던 통창 밖으로 무언가 거뭇한 것이 지나간 듯싶었다. 잘못 봤나 했는데 여행객 여자가 악,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 앉았다. 여자가 물었다. “봤어요? 뭐였어요?”
여행객 부부와 내가 통창 쪽으로 모여 섰을 때 부부가 눈을 이고 들어온 현관으로 김춘영이 들어왔다. 김춘영의 뒤로 사람 둘이 따라 들어왔다. 눈 속에 오래 있었는지 한기가 함께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대민지원 나왔대요.” 김춘영이 말했다.
“그럼 저희 이제 내려갈 수 있는 건가요?” 여자가 물었다.
하지만 군인들은 거기에 뭐라 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방한 워머를 두른 채 군모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런 채로 숨만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집 어귀 어딘가에서 그 상태로 마주쳤다면 나는 분명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김춘영이 이들을 어디서 어떻게 마주쳤는지, 어떤 마음을 누르고 현관까지 안내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제설작업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자와 워머를 벗고 난 뒤 군인 중 한명이 말했다. 그들은 도롱이 연못터 즈음에서 다른 부대원들과 갈라졌다고 했다. 김춘영 집으로 올라오는 산길의 눈을 치우다가 도리어 눈에 떠밀려 온 듯했다.
김춘영은 어딘가에서 온풍기를 하나 더 꺼내왔다. 집주인으로서 할 만한 일들을 김춘영은 표정 변화 없이 침착하게 하고 있었다. 군인들한테 눈을 치우러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닦을 것과 마실 것을 건넸다. 황도 통조림을 가져와 “국물까지 다 먹어야 정신이 든다”고 권했다. 김춘영은 그 모든 걸 군인들과 전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앉은자리에서 황도 건더기와 국물을 모두 먹었다.
“세상에, 양말이 다 젖었어요.”
여행객 여자가 양말을 벗어서 말리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안경을 쓴 군인은 감사하다고 말했고 키가 큰 군인은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고서 둘은 온풍기 하나를 끼고 돌아앉아 양말을 벗었다. 그들이 양말을 벗자마자 엄청난 쉰내가 거실을 뒤덮었다. 거기 있던 누구도 그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모두의 코가 쉰내에 적응을 해버려 아무도 숨을 참지 않아도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날 내로는 김춘영의 집에서 내려가지 못할 거라는 걸 각자 받아들였다.
김춘영이 거실 티브이를 켜고는 주방 쪽으로 나를 불렀다. 통창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실시간 적설량과 함께 눈 때문에 무너진 시설들과 제설작업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
“이거 박선생님한테 들려 보내려고 넉넉히 재워뒀던 건데.”
김춘영이 냉장고에서 붉은 덩어리가 담긴 통을 꺼냈다.
“선생님, 이거 설마.”
“맞아요.”
김춘영이 꺼낸 것은 양념된 돼지고기였다. 김춘영의 구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던 음식이 돼지두루치기였다. 김춘영 가게의 술안주 메뉴는 삼겹살 부위로 만든 두루치기 딱 하나였다고 했다. 막걸리에 돼지두루치기. 탄광 일을 끝내고 먹기엔 그만한 게 없었다고 김춘영은 자주 말했다. 요리솜씨가 좋으셨나봐요, 물으면 김춘영은 요리솜씨가 아니라 수완이 좋았다고 말했다.
마지막 면담일이라고 김춘영은 자신이 숱한 세월 매일같이 반복해서 만들던 그 음식을 준비해둔 것 같았다. 먹여 보내는 게 아니라 싸서 보내려고 했다는 게 왠지 김춘영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설 덕에 여기서 먹고 가게 생겼네요, 선생님.”
좌탁에 돼지두루치기 실물이 올려졌다. 어두워지는 통창가에 앉아 사람들은 콧등에 땀이 돋아나도록 김춘영의 삼겹살두루치기를 먹었다.
같이 드시자고 사람들이 권해도 김춘영은 함께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돼지는 안 먹어요.” 한마디 하고 말 뿐이었지만 아까부터 김춘영은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계속 집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지못해 좌탁가로 와서 앉아도 손을 가만히 두지 않고 탁자 어딘가를 습관처럼 문질러 닦았다. 식사를 마치고 먹은 자리를 다 닦은 뒤에도 그랬다.
“저기 저쪽 7사단.”
여행객 남자가 말했다.
“나도 거기 수색대대 병장 만기전역했습니다.”
남자의 말에 군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삼십년도 더 됐네.”
남자는 군생활 얘기를 잠깐 이어갔다. 주임 원사가 동네 이장이랑 친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대민지원을 나갔다는 이야기. 어느 집 축사를 고쳐주고 열무국수를 얻어먹었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는 이야기.
남자가 군인들을 보며 말했다.
“나중엔 다 추억이에요.”
창밖은 급속도로 깜깜해지고 있었다.
김춘영이 등 스위치를 모두 올리자 통창으로 거실 풍경이 고스란히 되비쳤다.
“아무래도 멧돼지였던 것 같습니다.”
제설 얘기를 하던 중에 안경을 쓴 군인이 말했다. 그들은 도롱이 연못터에서 무언가를 보았다고 했다. 눈이 오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 살아 있는 것이 움직인 것 같았다고 했다.
“멧돼지보단 노루나 고라니 쪽 같기도 했습니다.”
이번엔 키가 큰 군인이 말했다.
얘기를 듣던 여행객 남자가 한숨을 쉬듯 웃더니 군인들을 향해 말했다.
“이 장병들 큰일나겠네.”
“……”
“정체가 뭔지 확인을 안 했단 말입니까?”
그때까지도 나는 김춘영이 나와 같은 전기장판 위에 앉아서 숨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맷자락이나 휴지조각으로 좌탁을 문지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여행객 여자는 피곤한지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온풍기가 회전하면서 되쏘는 빛이 통창에서 이쪽으로 계속 건너오고 있었다.
“군인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남자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말해보세요. 군인한테 첫번째가 뭡니까?”
남자가 재차 묻자 군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피아식별을 못하면 군인은 끝인 겁니다.”
“……”
“군인한텐 첫째도 둘째도 이거예요. 피. 아. 식별.”
김춘영이 내 팔을 잡은 건 그때였을 것이다. 통창에 비친 김춘영의 모습을 보게 된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자가 던진 피아식별의 그물에 순간적으로 갇힌 채 통창에 반사된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김춘영을 급히 부축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 좀 펴드릴까요?”
내가 묻자 김춘영은 잠깐만 그냥 앉아 있겠다고 말했다. 당장 눕지 않으면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데도 김춘영은 가까스로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김춘영이 괜찮지 않다는 걸 내가 안 건 언제부터였을까. 군인들이 나타나면서부터였을까. 여행객 부부가 나타나면서부터였을까. 지난 면담부터였을까. 지지난 면담부터였을까.
티브이 채널을 돌리는지 문밖에서 왁자한 소리가 났다 다시 잦아들었다.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창밖에 쌓인 눈 때문에 방엔 희미한 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방 한쪽으로 내 배낭이 보였다. 여행객 부부가 오면서 치워둔 녹음기도 보였다. 내가 지고 올라온 노트북에는 두개의 파일이 있었다.
김춘영생애사1.hwp
김춘영생애사2.hwp
그 안에는 화운령에 정착하기 전의 김춘영도 있었고 화운령에 오고 난 후의 김춘영도 있었다. 봉화 눌산리에서 누군가의 둘째딸로 살던 김춘영이 있었고 못 배웠지만 말에 조리가 있던 김춘영이 있었다. 후레아치마를 입고 읍내로 놀러나가던 날의 김춘영도 있었다. 깡통테이블의 녹을 긁어내며 가게 문을 열던 김춘영이 있었고 연못에서 도롱뇽이 보이면 여느 화운령 사람들처럼 기도를 하던 김춘영이 있었다. 그 안엔 운탄고도 어디에도 재현되어 있지 않은 김춘영의 장소가 있었다.
예비 질문 목록도 있었다. 사건에 접근해가기 위해 연구팀이 공통으로 나눠가진 질문들과 현장 상황에 따라 해도 좋고 못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질문들이 있었다.
사택 부녀회분들과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단골 광부가 사고를 당한 적이 많았습니까?
화운령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사건 당일 아침엔 가게에 계셨습니까?
화운령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광부들은 어용노조지부장이 달아나자 그 부인을 끌고 나와 전봇대에 묶었습니다. 상하의를 벗기고 린치했습니다. 이에 대해 함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광업소 앞마당에서 연행되실 때 상황을 좀더 말씀해주십시오.
대질심문 때 사적인 감정으로 이웃의 이름을 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고문 중에 어떤 질문을 받으셨습니까?
경찰서에서 돌아온 뒤 마을 사람들 시선은 어땠습니까?
이 사건이 지역공동체에 남긴 상흔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화운령사건을 어떻게 기억해주실 바라십니까?
다시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티브이 소리가 아니라 문밖의 사람들 소리였다. 입술을 깨물듯 내 팔을 잡은 김춘영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일년 동안 알아온 열살의 김춘영과 서른네살의 김춘영과 쉰아홉의 김춘영을 품은 채로, 어느 때보다도 가깝고 어둑하게, 지금의 김춘영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문밖에서 무언가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김춘영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다 새어버릴 것처럼 눈앞에서 김춘영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물들어갔다. 머리카락이 새어가는 그 속도로 김춘영한테서 소변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긴 시간처럼도 느껴졌고 일순간의 일처럼도 느껴졌다. 소변이 흘러오는 동안 나는 어둑한 방안에서 김춘영과 비스듬히 마주앉아 있었다. 괜찮으시냐고 묻지 않았다. 그가 생의 어느 지점에 있는 기억의 습격을 받았는지 되짚지 않았다. 김춘영한테서 흘러나온 소변이 김춘영의 무릎을 지나 내 무릎에 와서 고일 때까지, 나는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김춘영 3차 구술
면담일자 : 2024년 9월 2일 13:00~17:20
면담장소 : 김춘영 자택
면담자 : 박정윤
13:00~14:10 면담 진행
14:10 유리 긁히는 소리 때문에 잠시 면담 중지됨. 긁는 소리 계속됨. 김춘영 밖으로 나갔다 들어옴. 삵이라고 함.
14:25~16:05 면담 진행
16:05 전화벨 소리. 면담 잠시 중지. 김춘영 통화. 선탄 언니, 병문안 시간 약속.
16:15~
선생님, 통화하신 선탄 언니분이 혹시 압축기실 그분이세요?
맞아요. 압축기실 목욕날 맨날 1등으로 가는 그이.
정말로 거기서 다들 목욕을 하신 거예요? 그림이 안 그려져요.
압축기가 그게, 막장으로 공기를 넣어주는 기계예요. 거기 냉각수에서 더운물이 막 쏟아져 나오는 날이 있어요. 선탄 언니들 맨날 새까매져서 퇴근해도 씻을 때가 마땅치 않으니까. 물 나오는 날 날 잡고 몰려가서들 씻고 그랬지. 망은 내가 봤고요.
선생님은 같이 안 씻으셨어요?
나는 안 까맸으니까.(웃음)
압축기실이 보일러실 같은 델까요? 거기에 고무다라이 같은 거 갖다 놓고 여러명이 씻으신 거예요? 말씀을 들어도 통 안 그려지네요.
아이고, 뭐 하러 그려요. 그냥 목욕하는 걸.
(면담자 웃음)
그이들은 나 없으면 아쉬웠지요. 압축기실 담당자랑 말도 잘 맞춰야지, 날 더워지면 목욕 날짜 한번이라도 더 잡아달라고 구슬려야지, 내가 말발도 좋고 하니까, 그이들이 떨어질 만하면 나한테 멘소래담을 사다줬어요.
뇌물 같은 거였네요?
나는 멘소래담 하나면 그냥 넘어갔어요.
워낙 손이 성할 날이 없으셨기도 했고요.
아이고, 힘들게 올라왔는데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만 해서 어떡해요. 시간 다 가네.
쓸데없는 얘기 아니에요.
아무튼지, 쓸데없는 건 다 빼줘요.
면담을 마칠 때마다 김춘영은 인사말처럼 그 말을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하듯이 쓸데없는 건 다 빼줘요,라고 말했다. 특정 부분이나 특정 발언을 지목해 빼달라고 요청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만 말함으로써 김춘영은 쓸데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권한을 나한테로 실었다.
내 현장에선 아직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 여행객 부부와 군인들은 거실 전기장판 한 귀퉁이씩을 차지한 채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방에는 김춘영이 잠들어 있었다. 날이 밝지 않은 어두운 새벽인데도 화운령을 가득 덮은 눈이 통창을 푸르스름하게 채워오고 있었다. 나는 거실 가운데에 서서 그곳에서 내가 겪은 일년과 하룻밤을 생각했다. 거기 있는 사물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손과 잔과 말과 말로 되어 나오지 못하는 것들이 오가던 좌탁을 눈에 담았다. 신발장 옆에 세워 놓은 등산스틱과 제설삽도 눈에 담았다. 마르라고 엎어놓은 군화도 눈에 담았다. 다시 노트북을 짊어졌고, 그렇게 내 현장에서 걸어 내려왔다.
도롱이 연못터를 지나다 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눈이 그친 연못은 말할 수 없이 고요하고 평평했다. 하얗게 펼쳐진 풍경 끝에서 쨍한 주황색 점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갱도에서 올려보낸 뾰루지처럼 작게 솟아 있었다. 다가가면서 보니 봉분처럼 보였다. 웅크리고 있는 짐승의 등 같기도 했다. 하지만 더 가까이 걸어가자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작은 백패킹용 텐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 등을 켜놓고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그 안에 있는 사람한테 내 말이 들릴지 알 수 없어 가슴이 뛰었다. 몇걸음을 더 걸어갔다. 거기 있을 수도 있는 사람을 그려보면서. 이제부터는 내가 말하게 될 김춘영의 생애를 들을 수 있는 사람. 이 작업의 최종 청자. 텐트 바로 앞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좀더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