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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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해방 80년으로 본 오늘의 한반도

 

 

김도민 金道珉

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저서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비동맹 외교』, 공저서 『새로 쓴 한국사특강』 『냉전과 탈식민의 세계사』 등이 있음.

 

문미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공저서 『달콤 살벌한 한·중 관계사』 등이 있음.

 

허은 許殷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저서 『냉전과 새마을』 『미국의 헤게모니와 한국 민족주의』, 공저서 『6월 민주항쟁』 『냉전분단시대 한반도의 역사 읽기』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평화를 향한 통일의 여정』 등이 있음.

 

홍석률 洪錫律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 저서 『민주주의 잔혹사』 『분단의 히스테리』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공저서 『한국 현대사 연구의 쟁점』 『4월혁명의 주체들』 『백년의 변혁』 『6월 민주항쟁』 등이 있음.

 

 

홍석률(사회) 안녕하세요. 『창작과비평』 여름호 좌담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사회를 맡은 홍석률입니다. 역사학자로서 주로 박정희정권기의 남북관계, 한미관계, 한반도 냉전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올해 2025년은 해방 80주년이고, 우리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했던 을사조약이 강요된 지 120주년인 해입니다. 우리가 해방을 맞은 1945년은 전세계적으로도 탈식민의 물결이 일고, 동시에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들어서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과학기술 발전, 물질적 진보, 민주주의의 확산이 있었는가 하면, 냉전으로 인해 비서구 지역에서는 열전, 내전, 각종 분쟁이 이어져 대규모 유혈사태와 민간인 학살이 반복되었습니다.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었지만 지구의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의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지구환경의 급속한 파괴가 있었습니다. 21세기의 4분의 1을 지나는 지금 시점에서, 이와 같은 세계사적 변동도 고려하면서 오늘 대화에서는 해방 80년의 역사와 새로운 나라만들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려 합니다.

 

왼쪽부터 김도민 홍석률 문미라 허은 © 이영균

왼쪽부터 김도민 홍석률 문미라 허은 © 이영균

 

허은 안녕하세요, 허은입니다. 동아시아 냉전의 연쇄 속에서 한국 현대사, 특히 분단국가체제의 등장을 규명하는 연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1980~90년대 한국사회가 어떻게 탈냉전의 과정을 밟아갔는가, 그리고 남북은 탈냉전을 위한 고민을 어떻게 나누고 경험을 쌓아갔는가 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김도민 반갑습니다. 저는 한반도 냉전사와 남북관계사를 주로 연구하는 김도민입니다. 올해는 해방 80주년이자 한일협정 체결과 베트남 파병(1965) 60년이고, 탈식민 평화와 중립·비동맹운동의 중요한 이정표였던 1955년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 70주년이기도 합니다. 많은 역사적 사건이 기억되고 기념되는 해인데, 한편으로 한국은 작년 비상계엄 선포부터 탄핵까지 또 한번의 큰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현실에서 여러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자리일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문미라 안녕하세요, 문미라입니다. 저는 한국전쟁기에 북한의 후방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중심으로 박사논문을 썼고, 북한의 체제유지 동력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개념인 북한의 혁명전통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의미있는 좌담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방과 식민 극복의 과정

홍석률 먼저 해방 직후의 역사를 복기해보려 합니다. 한국의 식민지 경험을 돌아보면 아시아·아프리카의 여타 식민지하고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서구 열강이 아닌 인접국가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었고, 피지배기간도 40년 남짓으로 상대적으로 짧았죠. 대한제국이 국제법적으로 인정받는 하나의 국가였다는 점에서 부족(部族) 상태에서 식민지화된 나라들과는 물론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특징들이 해방 직후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려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시는지요?

 

허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게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지리적 특징이 식민통치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경제적 차원에서 수탈이 집중되거나 군사적·정치적 지배를 유지하기 어려울 때 지배력이 약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렇지 않았죠. 침략과정에서 일본은 한반도를 문명과 안보가 맞물린 시각으로 바라봤는데, 여기서 두가지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문명적 측면인데요. 개항 이래 조선에서는 동도서기(東道西器)나 동학사상 등 여러 근대화 경로들이 모색되었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의병세력을 몰살하는 남조선대토벌작전까지 벌어지면서 일본이 문명개화와 근대화의 길을 열어줄 단 하나의 선택지처럼 강요되었죠. 이후 우리 내부에서도 그런 시각이 재생산되면서 식민 극복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최근 일본 역사학자 코마쯔 히로시(小松裕)가 이를 ‘폭력적인 근대’ ‘반생명적인 근대’라고 부르는데(『「いのち」と帝国日本』, 小学館 2009) 동의하는 바입니다. 두번째로 생각해볼 측면은 안보입니다. 한반도 식민화를 주도한 것은 야마가따 아리또모(山縣有朋) 등 일본의 군벌세력으로 한반도를 아시아 안보전략의 거점으로 삼았죠. 냉전 이래 한미일 관계가 강조되고 한국을 미일 안보의 하위 파트너로 두는 구도가 이미 식민화과정에서 배태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우리가 일본의 직접적인 지배에서는 벗어났지만, 중러의 대륙세력과 미일 해양세력이 충돌하고 이들이 한반도를 세력확장의 거점이나 완충지대로 보는 구도는 냉전시대와 탈냉전시대를 거치며 재정렬되고 지속되었고, 분단국가 남과 북이 아직도 털어내지 못한 문제입니다.

 

김도민 저도 전쟁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1894년 청일전쟁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 종전까지의 기간을 ‘50년 전쟁’이라고도 표현하는데요. 일본이 아시아 제국으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전쟁체제(war system)에 지속적으로 연루되었고,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야 했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었을 뿐 아니라 이후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에 파병을 했고 지금도 무기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수출이라고 하지만 사실 전쟁에 무기를 보내고 있는 거죠. 한반도는 정전상태이고, 여전히 전쟁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현실에 저항하고 평화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지금도 중요한 문제 같습니다. 1910년 안중근(安重根)이 쓴 「동양평화론」을 보면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다만 문학에만 힘쓰고 제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인 동양 민족과 달리 무력을 일삼는 유럽의 제국주의에 대한 거센 비판이 드러나 있어요. 이 고민들은 해방 80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문미라 일본의 식민지배가 유럽 제국주의와 특히 달랐던 점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지배국에 권력을 집중했다는 겁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강제되는 시스템을 정착한 것인데, 이런 강압적인 지배 때문에 독립운동이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활발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죠. 그런 탓에 독립운동 세력이 국내 민중과 얼마간 단절되었다는 점이 해방 이후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령 토지개혁이나 친일세력 청산 같은, 민중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의제를 상해임시정부 세력이 주도하지 못했거든요. 임시정부 세력은 북쪽의 사회주의와도 거리가 멀고 남쪽의 우익·반공 흐름에도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남북한 모두에서 소외됩니다. 독립운동의 주요무대가 해외였던 것, 그럼으로써 식민지배 이래 해방 이후까지도 민중의 설 자리가 없었다는 점은 중요하게 돌아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해방정국, 이 땅의 사람들이 꿈꾸었던 나라

홍석률 말씀하셨듯 일본은 서구의 침략을 상쇄하려고 끊임없이 고도성장을 꾀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립된 총동원체제가 해방 직후만이 아니라 이후 남북한의 발전과정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국가 모두에서 전쟁동원체제와 군사주의가 압도했는데, 빠른 성장을 위한 국가동원은 가능했지만 평화와 인권과 민주주의 측면에서는 큰 문제가 야기됐죠. 1945년 해방은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점령과 함께 왔습니다. 분할점령 상태에서 식민성 극복을 추구하면서 정치적 충돌과 폭력이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졌지요. 이 과정을 어떻게 복기하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김도민 1945년 10월 선구회(先驅會)라는 단체에서 ‘내각의 적임자 조사’라는 여론조사를 진행했는데, 어떤 정부 지도자가 적합하냐는 질문에 여론은 대통령은 이승만(李承晩), 군무부장은 김일성(金日成), 외무부장은 김구(金九), 노동부장은 박헌영(朴憲永)이라고 응답했어요(『선구』 1945년 12월호;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개정증보3판 웅진지식하우스 2020). 이제 막 해방을 맞이한 사람들로서는 얼마 뒤에 신탁통치 파동이 생긴다거나 전쟁과 분단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겁니다. 당시 사람들은 친일파인지 아닌지를 기준점으로 두되 실용주의적으로 적재적소의 인물을 쓰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승만 좀 마음에 안 들어도 대통령 할 만하지,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선 김일성은 당연히 군무부장 해야지 했던 거죠. 그런 상상력과 의지가 1945년 12월 모스끄바 삼상회의 이후 신탁통치 파동을 겪으면서 깨져나간 것이 안타깝습니다. 냉전이라는 원심력이 사람들의 힘을 양극단으로 끌고 가버렸어요.

 

문미라 선구회에서 ‘가장 역량이 뛰어나고 양심적인 정치가’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1위가 33%의 응답을 받은 여운형(呂運亨)이었어요. 이승만(21%)이나 김구(18%)보다 더 앞섰습니다(같은 책).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를 꼽으라는 질문에도 여운형이 1위를 차지했고요. 해방 직후에 여운형의 위상, 다시 말해 중도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위치가 분명했고 그 역할도 기대됐던 거죠. 일반 대중들은 해방이 되었는데도 왜 정치세력들이 단결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좌우대립이 격화되는 상황을 불안하게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시기부터 좌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활동한 여운형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세력들은 미소 점령군이 주둔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서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하고 민족 자주성을 확보할 유일한 길이 좌우합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극우·극좌의 정치테러를 반대하고 유연한 개혁을 강조했죠. 모든 게 불확실하던 시기에 자주독립, 민족통합, 비폭력이라는 이상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탁통치 파동으로 인해 중도도 자리를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냉전이라는 외부적인 원심력 외에도, 좌우합작이 깨져나갈 때 그것을 봉합할 수 있는 우리의 내적 역량이 많이 부족했던 것 아닌가 합니다. 신탁통치 국면에서 국제정세와 조건을 차분히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자세가 부족했고, 좌우익은 협력보다는 불신과 경쟁으로 치달았죠. 해방정국 내내 정치테러와 폭력이 일상화된 것도 협상의 기반인 신뢰와 타협을 크게 훼손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허은 미소 분할점령기인 이른바 해방정국 시기를 매끄럽게 정리하고 평가하기란 만만치 않습니다. 다만 전쟁까지 이어지는 격화요인이 우리 내적인 문제에서만 기인하는가 할 때,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아니라고 답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독립운동 세력들이 해외 각지에 흩어져 활동했고 이념적으로도 공산주의, 자유주의, 특히 미국식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파시즘적 성격 등 여러 노선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자 고(故) 강만길 선생이 밝혔듯이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대응이라거나 누구를 지도자로 뽑아야 하고, 공업·농업 분야에서 어떠한 경제개혁을 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상당한 의견 일치가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를 건설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뜻이 모여 있었다고 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해방정국이나 민족해방 세력의 국가건설을 논할 때도 좌익/우익의 갈등이라거나 보수/진보라는 용어는 매우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무엇이 가장 큰 원인이냐 할 때 첫째는 우리 의도와 다르게 분할점령이 됐고, 그 과정에서 미군정이 통치의 편의성을 위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복권시켜줬다는 겁니다. 갈등의 촉매제로 작용한 또 한가지는 모스끄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대한 오보사건이었어요. 모스끄바 삼상회의에서 미국이 주장한 신탁통치안을 정반대로 소련이 주장하고 미국이 반대했다고 왜곡보도하면서 찬탁/반탁 논쟁을 이념문제로 환치시켜버렸습니다. 그 갈등 속에서 분노가 쌓였고, 단독선거·단독정부는 해방정국에서 쌓인 분노를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방안이었습니다. 1948년 4월 108명에 달하는 지식인들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여 남북협상 지지성명을 발표한 것은 분단정부가 수립되면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치닫는 것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규식(金奎植)과 김구도 분단정부 수립만큼은 목숨 걸고 막고자 했던 거고요.

 

홍석률

홍석률

홍석률 해방 직후에는 좌우가 협력하는 분위기가 확실히 있었지만, 분할점령과 냉전이라는 조건 속에서 점차 미소 양국의 힘을 활용해 상대 정치집단을 극단적·폭력적으로 배제하는 행태가 나타났습니다. 카라벨(Z. Karabell)은 냉전시기 초강대국의 개입은 제3세계의 유력한 동맹자를 찾지 못하면 지속적인 효과를 보기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이들도 초강대국 ‘개입의 건축가들’(architects of intervention)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우리 독립운동 세력들은 주로 해외에서 활동했기에 현지 강대국의 지원을 얻는 문제가 중요했고, 그 개입을 활용하는 데 능했지요. 일부 극단적인 집단이 능동적인 냉전의 전사, 또는 초강대국 개입의 건축가로서 역할을 한 측면도 간과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대중은 이승만부터 김일성까지 폭넓은 지도자 모두가 참여하는 정부를 바란 것인데, 현실정치에서는 쉽지 않았어요.

 

‘중간파’의 노력이 성공했더라면

홍석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추구한 중간파 정치세력의 역할을 좀더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해방 직후부터 한반도문제에 미소의 협력을 촉구하고 좌우 정치세력의 타협과 협상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1946년 7월부터 미군정도 후원하여 좌우합작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또 1948년 4월 분단이 임박한 상태에서 남북협상도 시도되었습니다. 중간파 정치세력의 활동이 갖는 의미와 한계를 짚어보면 좋겠습니다.

 

허은

허은

허은 우선 당시 좌우합작이 타당하면서도 의미있는 시도였다는 점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단지 대의명분만을 좇은 일은 아니었다는 거죠. ‘좌우합작 7원칙’을 통해 나라만들기를 위한 원칙들을 분명히 모아낸 것도 중요합니다.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테러 행동은 멈추자는 정치적인 원칙부터 토지개혁 같은 경제적인 원칙이 포함되었고, 무엇보다 이러한 나라만들기의 출발점으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만들고 실시하자는 원칙도 제시되었습니다. 국제적인 규정력을 고려해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 속개를 요청하는 원칙도 포함되어 있고요. 이러한 노선을 되돌아보면서, 동일선상에 놓지는 않더라도 창비 담론 중 하나인 ‘변혁적 중도’를 참조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변혁이라 하면 식민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문제였는데, 중도파라 할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중심이 되어 남북을 통합하는 정식 정부를 만들려 했던 것이죠. 물론 좌우합작위원회에 이승만 및 한민당(한국민주당)과 공산당이 협조하지 않은 것은 한계라 할 수 있고, 당시 좌우합작이 아니라 온건우파와 온건좌파의 만남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극단의 이념과 실현 불가능한 원칙을 제외시켜가면서 중도라는 큰 틀에서 현실적인 길을 찾으려 했고, 조정과 타협을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려 했다는 점은 뜻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구의 한독당(한국독립당)도 7원칙에 대해 공식적인 지지를 보인 것이고요.

 

김도민

김도민

김도민 좌우합작은 신탁통치 파동 이후 찬탁/반탁 세력이 양극단으로 갈려 있던 와중에 어떻게든 힘을 모아서 분단정부 수립을 막으려 했던 중요한 역사입니다. 그 활동이 미군정의 지원 중단과 여운형의 암살로 힘을 잃어버린 것이 무척 안타깝고요. 그런데 한편으로 이미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활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좌우합작 시도가 너무 늦었던 것은 아닌가요? 남한에서는 의미있는 활동이었지만, 북에서는 그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문미라

문미라

문미라 북한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진 게 1946년 2월이고 3월에 이미 토지개혁도 실시했기 때문에, 좌우합작이 남한에서와 같은 위상일 수는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다만 소련군이 처음 북한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조만식을 굉장히 중요한 파트너로 생각했다고 해요. 워낙에 평안남도 지역에서 조만식(曺晩植)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항일운동 세력이 강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때까지는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의 연합정치(민공연립정치) 가능성이 존재했던 거죠. 조만식 계열과 소련군 및 북한 공산주의 세력 간에 크고 작은 갈등은 있었지만, 조만식 자신도 소련군과 협조하는 노선을 명시적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신탁통치 문제가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죠. 모스끄바 삼상회의 결정에 반발한 조만식은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고, 조만식을 중심으로 창당됐던 조선민주당은 이후 조선공산당에 협조적인 인물들로 개편됩니다. 『정로』(『로동신문』 전신)에는 조만식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지원병’ 참가를 선동한 친일파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어요. 신탁통치 파동이 남한에서는 좌우합작의 길을 열었다면, 북한에서는 좌우합작 가능성을 완전히 막아버린 겁니다.

 

홍석률 아쉬운 점은 남북협상이 왜 이렇게 늦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1948년 남한의 5·10 총선거 2주일 전에야 남북협상이 마무리되었으니, 그 결의를 실천하기 어려워졌어요. 카이로선언도 있었다보니 해방 직후 한국인들이 독립국가 건설을 너무 낙관하고, 분할점령의 위험성을 제대로 자각하거나 대처하지 못한 면이 있지 않았나 합니다. 한반도 독립국가를 만드는 과정을 논의하고 합의한 모스끄바 삼상회의에도 우리 정치인은 물론이고 기자 한명도 가지 않았지요. 일제강점기에는 빠리강화회의, 워싱턴회의 같은 국제회의가 열리면 독립운동가들이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가보았는데 말이지요.

 

허은 국가건설에 대한 국제적인 힘과 발언권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었는지는 현실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입니다. 일본 패망 직전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한데 모여서 연합대회를 열고 정식 정부수립의 로드맵을 선포했다면, 우리가 일본의 항복에 개입했거나 하다못해 광복군이 조선 내 일본군 무장해제에 관여할 수 있었다면, 국제적인 발언권이 어느 정도 생겼을까 싶은데 모두 가정일 뿐이고 아쉬운 부분입니다. 또 중앙정치 수준에서는 신탁통치 왜곡보도를 정정하고 미소공위 개최에 따른 대응방안을 협의하는 상황이 전개됐던 반면 지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역에서는 모스끄바 삼상회의 결정안의 수용 여부를 놓고 시작된 갈등이 서로 죽고 죽이는 차원으로 치달아요. 미군정은 자신의 행정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에 참여했던 지역 내 지도자들을 배제해갔는데, 그러다 1947년 제주의 3·1절 기념식에서 미군정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는 사건까지 터집니다. 어린아이를 포함한 6명이 사망했는데도 미군정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한 제주도민을 대거 검거하고, 여기에 3·1절 발포사건의 원인을 아무 근거도 없이 ‘북조선 세력’의 개입에 있다고 왜곡합니다. 연구자들은 관과 민, 좌와 우 구분없이 터져나온 제주민의 분노를 이념의 잣대로 부정의하게 처리한 것이 대량학살이 자행된 4·3사건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허호준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선인 2014 참조).

한편으로는 모스끄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한반도 단일의 자치정부 수립’이 적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소공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소공위 회의가 결렬되고 한반도문제가 유엔에 이관됐을 때도 김구는 유엔 감시하 총선을 통해 단일정부를 만들 여지가 있다고 봤던 것 같아요.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 단독선거가 결의된 다음에야 김구가 북한과의 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었죠. 김구가 1948년 5·10선거와 정부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정치인으로서 현실감각이 부족했던 것이라 평가한 바 있어요. 하지만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일제 패망 직전 좌우합작의 임시정부를 만들어내고 남북협상까지 벌인 이들에게 단독선거·단독정부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겁니다. 분단정부 수립 이후 김구가 통일촉진운동을 벌이는 한편 정치참여도 고려하자 가장 큰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분단의 일익을 담당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었고, 이는 알다시피 1949년 김구 암살로 이어집니다. 좌우합작을 주도한 김규식 여운형, 남북협상에 참여한 김구 김규식은 분단극복과 통일을 무력이 아닌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민족운동가이자 정치가로서 앞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 경제의 분화

홍석률 분단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전쟁은 미소 양군이 철수한 상태에서 시작되었으나 미국과 중국이 개입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습니다. 동아시아와 지구 전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대폭발이었지요.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후 한반도는 전쟁의 공식적인 종결 없이 분단과 냉전이 지속하면서 분단체제가 자리를 잡았고, 이는 남북한 모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분단과 냉전이 남북한의 발전경로에 어떠한 규정력을 미쳤는지, 그 규정력이 남북 양쪽에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국제정치학자 아키라 이리에(Akira Iriye)는 분단과 전쟁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비교할 때 남북한 모두 상대적으로 상당히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1990년대부터는 남북한의 격차가 아주 현저하게 벌어지게 되죠.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김도민 우선 냉전과 분단이 남북한의 발전에 의도치 않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한국전쟁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발발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후 복구과정에도 냉전적 경쟁이 작용했어요. 남한을 향한 미국의 대규모 원조가 이루어졌고, 중국과 소련도 북한에 상당한 원조를 보냅니다. 게다가 남북한 사이에도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보다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뤄야 한다는 속도경쟁이 붙습니다. 1950~60년대에 북한이 더 빠르게 경제발전을 이루다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역전되는데, 이후 북한은 군사력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과 남한의 경제가 발전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을 동시에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60년대 말 북한은 서방에 돈을 빌려 경제를 발전시키려 노력하고 70년대 초 냉전 데땅뜨(긴장 완화) 시기에는 미국과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점차로 남한과 같은 개방전략을 쓰기 어려워진 게 아닐까 합니다. 한편 남한은 70년대 중화학공업과 수출중심 발전전략으로 경제성장을 이루려 하다가 후반의 심각한 불황으로 이어져 유신정권의 붕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후 1980년대 초반 3저호황(저금리·저달러·저유가)을 거치면서 남한이 급격히 성장하고 남북의 격차는 크게 벌어지게 됩니다. 남한이 87년 민주화를 맞이하면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경제성장 동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도 고려해볼 수 있고요.

 

문미라 남북한의 큰 차이는 냉전의 규정력이 남한에서는 미국으로 단일화되어 있었다면,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다극화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컨대 중소분쟁의 과정에서 북한이 어떤 선택을, 왜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소분쟁은 공산주의 세계 내부의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냉전구도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죠.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중국과 소련의 갈등은 1960년에 들어서서 표면화하는데, 초기에 북한은 중국과 소련 그 어느 쪽에도 편승하지 않기로 합니다. 양국 모두 북한의 지지가 필요한 것을 이용해 1961년 두 나라와 각각 동맹조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고요.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과 이로 인한 안보위기는 북한으로 하여금 외부의 동요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낳았습니다. ‘자력갱생’으로 표현되는 경제적 자립과 자체적인 안보 구축의 필요성이 커진 것이죠.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라는 주체사상의 정식 선언이 중소분쟁의 한복판인 1965년에 이루어진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이후 이것이 탈냉전기 북한의 대응방식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이데올로기가 되고요. 1990년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교역의 축을 상실한데다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북한경제가 최대의 위기를 맞지만, 북한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원인은 자주성의 상실이라며 자립경제 노선을 재확인했습니다. 주체가 체제의 생존논리가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어요.

 

홍석률 탈냉전기에 앞서 돌아보면 냉전체제 자체도 이미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소련이 미국과 같은 국력을 갖추지 못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는 그야말로 미국 패권의 세계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남북한이 각 진영 내에서 주목은 받았지만, 얻을 수 있는 원조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어요. 국토 면적은 북한이 남한보다 조금 넓다지만 인구에서 큰 차이도 나지요.

 

허은 현재 남북한의 인구는 2배, 경제력 수준은 60배(GDP 기준)라는 격차를 보입니다(2024년 기준). 지금의 이 차이가 단지 북한의 정책적 오판 때문이냐 하면, 살펴봐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90년대 탈냉전의 과정은 북중·북러 관계가 재편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북한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 만들어졌어요.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려는 결정적 순간마다 커다란 자연재해와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기근이 연이어 닥친 탓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외적 조건들을 배제한 채로 지금의 격차만 강조하면 탈역사화된 논의가 되면서 ‘북한은 왜 붕괴하지 않지?’라는 얘기만 하게 되겠죠. 또 남북한 모두 경제적으로 국방력에 큰 비중을 할애해야 한다는 압박이 지속됐는데, 남한에서도 특히 90년대 이전까지는 이것이 경제 및 사회 정책을 크게 규정하고 압박하는 요인이었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정부는 ‘국방경제 확립’ ‘총력안보’를 명분으로 민중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기본권마저 보장하지 않았잖아요. 북한 역시 국방경제의 병진을 추구해야 한다는 부담이 상당히 컸을 겁니다. 남한에 경제적으로 뒤처지기 시작하며 그 부담은 더욱 커졌을 테고, 이는 탈냉전의 흐름에서 경제구조 개편이나 정책판단에 제약요소로 작용했을 테고요. 분단과 냉전의 규정력이 전쟁과 안보라는 변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겁니다.

 

문미라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남한은 경제교류, 문화교류, 평창올림픽을 통한 평화 무드 조성을 이야기했지만 북한은 체제보장과 경제제재 해제를 중요한 조건으로 요구했습니다. 한반도에 평화 무드가 조성되다가도 작은 위협이 곧바로 군사적인 긴장으로 치닫는 데는 남북의 체제는 물론 국력의 차이 때문도 큽니다. 이런 비대칭성에 대한 이해와 조율 없이 남북관계가 진전되기는 어려워요. 북한의 대응에 대해 단순한 도발로 볼 것이 아니라, 양측 국력의 심각한 불균형 속에서 자신의 안보와 체제 유지를 도모하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도민 사실 1950년대만 해도 북한이 우리더러 대화하고 교류하자고 적극적으로 제안해왔습니다. 북한의 경제가 우리보다 부강했던 시기, 비대칭성이 다르게 작용했던 시기가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지 않으려 합니다. 사회주의·전체주의 국가인 북한은 경제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우리의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우리의 ‘승리’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듯 여기기도 합니다. 앞으로 남북대화의 모멘텀을 찾기 위해서 우리 내부에서도 되돌아봐야 할 부분이에요.

 

홍석률 말씀처럼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발전에서 앞섰던 시기가 있는데, 이런 일은 동서독 사이에서는 일어난 적이 없어요. 현재 북한은 고립되고 매우 가난한 나라이지만, 그 잠재력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도 북한은 교육 등의 사회자본 측면에서 다른 가난한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면이 있고, 국제적 고립이 타파된다면 지리적으로도 번영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핵무기, 장거리미사일 개발 등 군사적 측면에 지극히 편중되긴 했지만 과학기술 수준도 상당하고요. 그런데 남북한의 성취와 한계를 다른 나라들과 비교한다면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특히 남한이 이룬 경제적 성과와 국제적 지위 향상이 다른 제3세계 국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제3세계 나라들의 민족해방운동과 연대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냉전시기에도 이런 흐름이 계속되어오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사그라졌습니다.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진원지를 자처했던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서고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 질서에 편입된 것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대만과 대한민국도 불균등한 세계체제 속에 편입돼 지위 향상을 추구했습니다. 이 시도가 성공한 것이 제3세계의 연대와 독자적 행보를 와해시키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요?

 

김도민 중립·비동맹은 주로 탈식민 신생국들이 냉전의 어느 한편에 서기를 거부하며 탈냉전, 평화, 호혜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공동의 광장’을 만들려는 국제적 운동이었습니다. 1955년 반둥(인도네시아)에서 최초의 아시아·아프리카회의가 열렸으나, 1960년대에는 제3세계 국가간 헤게모니 싸움이 존재했고 베트남전쟁도 제3세계의 세력화에 걸림돌이 되었죠. 그러다 1970년 잠비아에서 제3차 비동맹회의가 개최됐고 마침 데땅뜨로 국제정치에서 새로운 세력균형에 따른 힘의 공백이 발생한 시기여서, 70년대에는 제3세계가 상당히 결집되고 국제적 영향력도 강했습니다. 1975년에는 남북한 둘 다 비동맹회의에 가입을 신청했으나 북한만 성공했고 남한은 실패하죠. 당시에 한국에서도 창비 등이 나서서 제3세계문학을 많이 소개했고, 지식인사회에서 제3세계 경제나 종속이론에 관한 논의가 풍성했습니다. 한국은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루면서 지구적 냉전에서 우등생이 되어갔지만, 지식사회와 문화계 안에서는 제3세계 국가들과 함께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연대감이 상당히 컸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 문제의식이 잊혀지고 있어요.

 

허은 말씀대로 제3세계가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건 분단국가 대한민국이 대내외적으로 어떤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가와 관련있을 겁니다. 베트남전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어요.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당시에 사찰단으로 베트남을 방문한 어느 교수는 베트남인들은 근면하지 못하니 우리의 과잉인구를 베트남으로 옮겨가 농사를 짓자는 식의 말까지 해요. 일본 제국주의의 문명개화론과 같은 발상이죠.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을 민족해방의 주체가 아닌 ‘1세계-2세계-3세계’의 위계적인 구도로 보고, 우리가 공략할 수 있는 미개한 국가 수준으로 재범주화해서 사고하는 것을 드러낸 단적인 예가 베트남전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식민지배적 발상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지금도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고요. 불식되지 않은 문명적·인종주의적 편견이나 역사적 망각이 혹여 최근의 K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결합해 한국을 비교우위에 두려는 시각을 낳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하는데, 한국사회가 민주주의적으로 더 성숙하려면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문미라 우리 스스로 잘 돌아보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 안에도 이미 인종주의가 착종되어 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남한의 경제발전은 다른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한테 희망이자 절망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이 식민지배를 극복하고 선진국이 된 건 맞지만, 남한 모델처럼 되려면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점을 증명해 보인 셈이기도 하니까요. 결과적으로 남한의 발전모델은 제3세계 국가들의 자율적 연대나 반제국주의적 상상력을 약화시켰고, 글로벌 자본주의체제 내의 성과라는 측면에서 남한의 경제적 성공이 오히려 제3세계 사이의 연대를 가로막았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홍석률 식민지 경험을 가진 대만이나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취가 세계사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는 계속 돌아봐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이러한 성취는 보편화되기는 어려운 매우 예외적인 것이거든요. 한국은 식민주의의 피해자이면서 편승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의 얼굴도 있습니다. 최근의 인종차별과 혐오, 이민자 문제를 생각할 때도 의미있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분단체제극복의 길, 어떻게 찾을 것인가

홍석률 해방 80년을 맞이하여 불확실한 현실에서 미래를 가늠해보려고 합니다. 12·3 내란사태가 시민들의 주체적인 움직임과 정치권의 응답 덕분에 무사히 진압되었는데요. 한편으로는 탄핵에 반대하는 극우세력의 모습이 두드러지며 소위 보수와 진보를 친미와 친중으로 갈라치는 레토릭이 확산된 것은 마치 구한말 상황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내부의 정치적 논의와 남북한 관계의 양상이 해방 직후에서 얼마만큼 나아갔는지, 21세기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의 지향은 어디에 있을지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김도민 저는 먼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라는 표현의 의의를 짚고 싶습니다. 이 표현을 백낙청 선생의 저서(『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에서 읽고 적실하다고 생각했어요. 유엔을 비롯한 국제회의에서 제출되는 결의안 ‘코리안 레졸루션’(Korean Resolution)을 남한에서는 ‘한국 결의안’으로 번역하고 북한에서는 ‘조선 결의안’으로 번역합니다. 코리아라는 단어를 두고 남북은 끊임없이 자신의 체제에 맞춰, 분단의 적대성을 탐지하는 용어로 써왔죠. 그래서 ‘한반도’라는 표현이 남북이 함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할 때 매우 중요한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라’라는 표현도 국민국가(nation)처럼 닫힌 개념이기보다 연대의 감각을 지닌 것 같습니다. 남북관계, 한반도 차원의 변혁을 꿈꾸는 데 있어 의미가 큰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문미라 오늘날 남북관계는 80년 전과는 물론 다릅니다. 형식적으로 훨씬 제도화되었고 대화 채널과 협력 경험도 존재하니까요. 그러나 그 근본적인 구조와 긴장의 역학은 분단 직후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예나 지금이나 외부요인에 대한 자주성과 독립성 확보가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한은 남한보다 미국을 주요 협상대상으로 삼고 있고, 남한은 미국이나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속에서 독자적 정책 실현에 제약을 받고 있어요. 이러한 분단구조를 어떻게 깨뜨려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허은 무엇보다 21세기에 맞는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의 내용을 찾아야겠죠. 20세기 일제 식민지배부터 1980년대까지 추구된 근대화 발전전략까지 한계에 대한 성찰도 필요합니다. 국가주도 경제·안보 제일주의 속에서 민중의 희생은 대규모 산업·환경 재해로 나타났고, 민주화과정에서도 수많은 희생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재고 없이 남북관계가 풀릴 수는 없습니다.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를 위해서는 여러 실천 방향들이 있겠지만, 역사학이 할 일은 특히 우리 역사의 끊임없는 실천 속에서 쌓인 사유를 찾고 지혜를 공유하는 일입니다. 돌아보면 항일운동도 나라만들기의 가능성을 치열하게 마련하는 과정이었어요. 동학도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맹종하지 않고 그 너머를 보려고 했던 거고, 4월혁명(1960)과 6월항쟁(1987)도 분단의 너머를 보았습니다. 사상적으로도 문익환(文益煥)과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같은 분들이 동학혁명의 유산을 강조하며 한반도문제를 사유했습니다. 문익환 선생이 평양 방문 이후에 우리 통일의 방식에 있어 북쪽의 고려연방제를 무시할 수 없으나 국가중심적인 연방제 방안을 넘어서야 한다고 비판하며 최종적으로는 도(道) 단위 자치를 기반으로 한 연방제로 가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도 주목할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도민 저는 중립화도 하나의 참조할 만한 사유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의 위기의식을 느낀 유길준(兪吉濬)이 「중립화론」(1885)을 썼습니다. 다만 중립론의 핵심은 의외로 친중론이었어요. 그 자신이 유교적 지식인이었던데다 당시 청나라가 힘이 더 강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가 청나라의 힘을 빌려서 중립을 이룰 수 있다고 봤죠.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청나라가 쇠락한 뒤, 그가 갑오개혁 실무관료로서 오히려 일본을 끌어들여서 여러 개혁조치를 단행했다는 겁니다. 그러고도 친일파로 전향하지는 않았고요. 또 한번 중립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이 분단 이후 1960년대 제기된 중립화통일론에서입니다. 국제적 보장을 통해 한반도 중립을 만들어내자는 시도로, 무조건 미국이나 소련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실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죠. 지금의 중립화라 하면 단순히 대외관계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분단의 규정력을 완화시키고 대외관계에서 독립성을 확보하며 남한 혹은 한반도의 개혁을 더 원만하게 추진할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허은 중립화론을 열강에 의존하고 그들의 이해에 좌우되는 것으로 바라보면 비현실적인 논의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한민국의 달라진 위상을 고려하면서 역사적 상상력을 갖추고 한반도 통일구상을 주변 국가들과 공유하고 주도해야 한다고 봅니다. 남과 북은 주변 열강의 이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변국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그들을 위협하는 강소국의 등장이 아니며 동북아시아, 나아가 지구적 상생과 번영으로 연결된다는 공감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즉 새로운 생명존중과 평화공동체 형성에 기반한 나라관을 공유해야 합니다. 이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하면 한반도를 동북아의 지정학적 완충지대로 여기며 분단 대립을 활용하려는 주변국의 안보적 이해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더불어 꼭 짚고 싶은 것은 중립화론을 열강과의 협상이나 남북 정부간의 협상을 통해 이루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남측 시민, 북측 인민의 참여와 지지가 없는 중립화 방안은 공론에 그치게 될 겁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밑으로부터의 힘, 시민참여가 강화되어왔잖습니까.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한 새로운 중립화론을 마련하여 남북 대화, 또 남북 각각의 세계와의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시민들이 전면에 나서 힘을 실어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시민참여라는 측면에 주목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문미라 시민참여가 중요하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분단체제에 조금씩 균열을 내야 하는데, 그 균열은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개입과 이에 기반한 남북관계의 진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봅니다. 2016~17년의 촛불항쟁이 2018년의 한반도평화 무드를 만들었던 것처럼요.

 

허은 하나 덧붙이면 막힌 교류 재개의 물꼬는 분단 이후 한반도 남북에 걸쳐 있는 강원도·경기도에서부터 틀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미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에 ‘분단도(分斷道)’를 중심으로 여러 자치단체가 의미있는 실험을 했고요. 이 시기 남북 교류·협력이 남긴 자산을 복기하며 위로부터와 밑으로부터의 교류·협력을 재개한다면 새로운 한반도 공동체 형성을 구체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김도민 여담인데 제가 20대 중반에 출판사 창비의 편집부에서 몇년간 근무했습니다. 당시 2008년은 개성공단이 가동되고 있던 때여서, 놀랍게도 회사 야유회를 개성으로 갔어요. 제 또래의 북한 청년이 안내를 했는데, 점심 술자리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얼굴이 불콰해진 그가 “우리말을 쓰는 사람을 만나서 너무 좋다. 우리, 통일을 해서 같이 만날 수 있으면 너무 행복하겠다” 말하는 겁니다. 제가 역사를 전공했다지만 그때까지는 통일문제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경험이 저한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죽기 전에 금강산 가보고 싶다, 개마고원에 한번만 가보고 싶다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의 공간이 이런 작은 경험들에서부터 열린다면 좋겠습니다. 세대가 많이 바뀐 만큼 만남의 장에 반응하는 모습도 다를 테고, 통일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도 또다시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봐요.

 

문미라 결국 21세기 한반도 나라만들기의 주역은 지금의 이삼십대가 될 겁니다. 그런 만큼 이들 세대와 남북문제를 더 활발히 이야기하고 토론해야 해요. 어느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북한이 왜 싫은지 한마디씩 해보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한 학생이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자기 주식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자산을 깎아먹는 존재로서의 북한이라는, 상상도 못했던 발언이 나오더라고요. 통일 이야기를 꺼내면 청년들은 북한과 우리의 경제력 차이가 얼마나 큰데 왜 통일을 해야 하냐, 싫다는 반응부터 나옵니다. 그래도 분단체제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이야기하면 듣더라고요. 한해간 지출하는 국방비가 고용·청년 지원 예산보다 훨씬 많다, 평화가 정착되면 병역의무도 달라지고 군대 안 가도 된다 등으로 예를 들어 얘기하면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지금 젊은 세대와 더 많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아래로부터의 변혁, K민주주의의 가능성

홍석률 나라만들기라고 하면 이른바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 그러니까 서구 근대국가를 모델로 해서 그것을 답습하고 쫓아가는 차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성과 분단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문제도 남아 있지만, 탈근대의 과업도 함께 해결해야겠지요. 이와 관련해 3·1운동부터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최근의 촛불항쟁까지를 ‘백년의 변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백낙청 외 『백년의 변혁』, 백영서 엮음, 창비 2019 참조). 이런 변혁의 움직임이 가지는 의의와 동력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한편으로 변혁의 노력이 백년이나 이어져왔다는 것에서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변혁은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허은 ‘변혁의 동력이 지속적으로 작동한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중요할 텐데, 저는 ‘공동체’를 키워드로 삼고 있습니다. 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정치인·사상가·운동가에게 물으면 바로 이념과 노선이 작동합니다. 그러나 민중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속한 가족부터 마을, 넓게는 지역사회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지가 기준점이 됩니다. 자신의 공동체가 정의롭지 못하게 기능하거나 잘못 재편될 때마다 그걸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나 식민지배기에는 그런 움직임이 탄압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분단과 한국전쟁에 이르는 폭력이 지역사회의 자주적·민주적 공동체 수립을 와해시켜버렸습니다. 정전 이후 사회가 재건되는 과정에서도 이촌향도와 새마을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공동체의 이해보다 국가가 생각하는 근대화 달성목표가 강요되었기 때문에 공동체의 해체가 반복됐습니다. 그럼에도 밑에서부터는 그런 해체를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민족문제나 민주화문제와 맞물릴 때 항쟁으로 분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도민 공동체로서 발화할 수 있는 공론의 장, 그러니까 ‘광장’이라는 장소성도 변혁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백년의 변혁』에서 임형택 선생이 한말의 민회, 만민공동회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던 움직임들이 3·1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하는데(「3·1운동, 한국 근현대에서 다시 묻다」), 거슬러 올라가도 비슷한 공간이 보입니다. 조선 성리학의 기본 중 하나는 바람직한 하늘의 뜻 천리(天理)를 찾아내는 대화와 공론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고, 조선후기 정조시대에는 민들이 임금에게 징을 치거나 상소를 올리는 경험을 합니다(김인걸 『조선후기 공론정치의 새로운 전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해방 이후 1945년 말까지 지방 인민위원회가 남쪽에만 145개, 북쪽에도 70여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정병준 『몽양여운형 평전』, 한울 1995) 정치적 공백을 메우는 지방자치 시스템을 형성했던 거죠. 한국전쟁 이후 독재로 들어서며 광장이 닫히는 것 같았지만 놀랍게도 4월혁명 광장이 다시 열리고, 한국전쟁의 중립국행 포로를 주인공으로 한 최인훈 소설 『광장』이 히트를 쳤죠. 그 흐름이 87년 6월항쟁 그리고 이후에도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는 계속해서 공론의 장, 공동의 광장을 만들어내는 아래로부터의 힘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동의 광장은 이후 촛불항쟁과 최근의 응원봉 시위로 이어지는 K민주주의의 원동력이 되었고요. 강만길 선생이 ‘역사는 직선으로만 가는 게 아니고 지그재그로 가지만 길게 보면 기어이 가야 할 방향으로 진전하고 있다’는 한결같은 믿음을 전했는데,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변화라는 강박관념이나 목적론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어 보여요. 우리에게 광장이 끊임없이 존재했고, 그것이 많은 변화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큰 흐름에서 살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문미라 3·1운동은 남북이 함께 경험했던 역사인데 이후의 과정이 남북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허은 선생님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작은 공동체들이 국가의 성장목표에 포섭되는 가운데 해체되었다고 말하셨는데, 북한도 마찬가지였어요. 1950~60년대 경제성장을 하면서 북한주민들이 합의해온 지역공동체적인 규칙들이 깨져나가고 지역공동체가 와해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공동체가 위협받을 때 남한에서는 풀뿌리 저항의 형태가 나타났던 것과 달리 북한에서는 그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선 농업협동화 과정에서 공동경작과 공동 사회문화 활동에 적합하도록 생활단위 자체가 국가에 의해 개조된 점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역공동체의 고유한 규칙이 제도화된 집단주의로 흡수되면서 공동의 광장을 만들어내는 아래로부터의 힘이 구조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역사서술과 교육도 국가, 사실상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일원화되고 고도화됐습니다. 저항의 전통을 국가(수령) 담론에 전면 통합했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저항의 역사는 설 자리를 잃게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허은 그 또한 분단체제의 영향이 컸습니다. 북에서 인민반을 세워서 지역단위를 말단까지 세분화해 서로 감시하게 했듯 박정희정권은 새마을운동에서 주민통제를 위한 반상회를 강화했죠. 남북 모두 냉전에 부합하는 분단체제를 만들기 위해, 공동체란 이런 것이며 이래야 한다고 위로부터 강제했습니다. 이때 북쪽은 집단적인 공동체성이 훨씬 더 잘 작동했고, 남쪽은 민주적인 작동이 있었다는 게 달랐던 거죠.

 

홍석률 남북한 모두 전쟁 위험 속에서 강력한 군사주의와 이와 연동된 성과지상주의, 치열한 경쟁, 군대식 사고방식과 성차별의 문제를 갖고 있어요. 이 문제를 같이 극복해갈 필요가 있고, 동시에 남북한이 서로 다른 사회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분리와 통합의 문제를 풀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문익환 선생이 더 많은 분리가 있는 통합, 도 단위의 더 많은 자치가 있는 통합을 구상했듯이요. 자꾸 ‘아닌 밤중에 계엄령’ 하면서 상대방을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고요. 최근 전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가 도전받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민주주의의 할 일과 가능성에 대해서도 짚어보면 좋겠습니다. 계엄사태에 대응하고 회복해가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가 전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김도민 K민주주의는 식민지시기와 관련된 미결 문제들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폭발되며 힘을 얻어온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윤석열정부에서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금을 일본 전범기업 대신 국내 기업이 출연한 기금으로 배상한다는 제3자 변제안이 있었고, 박근혜정부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생존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은 양국 정부의 합의와 당사자들에 대한 강제가 있었어요. 그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도 정권의 몰락을 이끌어낸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달리 보면 식민지 극복의 과제가 해방 80주년이 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시민들이 원하는 K민주주의에는 그 해결도 포함된다는 것이죠. 향후 새 정부가 수립되면 강제동원과 일본군‘위안부’ 문제, 나아가 우리가 베트남전쟁 중에 자행한 폭력에 대한 반성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합니다. 올해가 한일협정 60주년인데, 한일협정도 사실 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목표하에 희생자들의 목소리는 반영하지 않고 야합으로 돈을 받아버린, 해결되지 않은 문제잖아요. 해방 80주년에 마침 새 정부가 들어서고 시민들의 힘도 모이고 있기 때문에, K민주주의의 중요한 아젠다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허은 일제 식민지배 유산의 극복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까닭 중 하나는 분단체제 속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끊임없이 식민역사를 왜곡하고 현실의 역사를 이념의 논리로 바라보게 조장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변혁적 중도’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법으로 제안되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좌익/우익의 갈등이라거나 보수/진보라는 용어는—특히 최근의 수구보수세력을 보건대—조심스럽게 써야 합니다. 일제 말기에 중경(重慶, 충칭)에서 좌우익 통일전선의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건국강령에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토지 매매금지’ 등을 담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해방정국 정치세력의 지형을 단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기준 삼아 좌익과 우익으로 구분하기는 곤란합니다. 이념이 진보적이라 해도 분할점령 극복의 해결에 힘을 보태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진보적·변혁적이라 평가할 수 없을 테고요. 그런데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을 통해 마련된 우리식 국가건설 비전이 분단과 전쟁 그리고 냉전을 거치며 뒤틀려버렸고 이념과 정치세력 구분도 왜곡됐어요. 탈냉전 속에서도 분단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서 이것이 여전히 한반도 평화·통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민주헌정질서 붕괴를 시도한 12·3 내란세력 역시 시대착오적인 이념을 강조하며 양극적 진영대립과 남북의 대립을 조장하고 강화하려 했죠.

 

문미라 계엄의 명분에 북한 공산세력 위협과 종북세력 척결이라는 사고와 언어가 동원되었다는 점에서 12·3 내란사태는 분단체제가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동시에 시민의 역량과 민주주의 내부 회복력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전세계에 다시 한번 보여준 사건이기도 합니다. 분단이 단지 남북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남한 내부 정치질서를 흔드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음을 새삼 증명했을 뿐 아니라, 시민의 힘이 분단체제에 맞서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도 입증한 것입니다.

 

허은 많은 분이 언급하셨지만, 12월 3일 시민들이 국회 앞으로 달려갔고 군인들이 맹목적으로 명령을 추종하지 않았다는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부터 독립운동, 분단과 4·3항쟁 그리고 4월혁명 이래 1980년대까지 이어진 냉전·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민족·민주 운동과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습니다. 역사의 자산이 쌓이고 면면히 흘러서 우리를 받쳐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리고 남태령대첩도 역사에 남을 일입니다. 농민들이 전봉준투쟁단을 처음 조직한 게 박근혜 퇴진운동 때인데, 당시 동학농민운동의 폐정개혁안에 빗대어 새나라 건설을 위한 폐정개혁안 12개조를 발표했어요. 그 내용을 살펴보면 국정농단 세력을 처벌하고 새누리당을 해체할 것, 재벌·언론·법조계의 부역자를 처벌할 것,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과 존엄을 보장할 것, 국민감시기구를 폐지할 것, 사드배치를 중단하고 한일군사협정을 폐기하여 외세와 결탁을 끊을 것, 세월호참사와 백남기 농민 등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할 것, 정치적 박해를 끝내고 양심수를 석방할 것, 개성공단을 원상복구하고 민족공조와 평화통일로 나아갈 것 등인데, 용어만 달라졌지 해방정국에서 우리가 새로운 나라만들기를 위해 외쳤던 과제들과 비슷합니다. 그 점이 안타깝지만, 동시에 농민으로 대변되는 민중이 다시 한번 광장에 나서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죠. 그리고 박근혜정부 때는 투쟁단 대표 한명만 겨우 국회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시민과 국회의원이 힘을 합쳐서 남태령을 열었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채워나갔고,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보여줬어요. 저는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가는 시위 현장을 겪은 세대인데, 응원봉들의 빛의 혁명을 보고는 세상이 달라졌구나, 감사하고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운 세대가 역사의 흐름을 이어받아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는 힘, 그 역동성은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북이 그런 자산을 공유하는 미래를 만들어간다면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변화가 되지 않을까 소망해봅니다.

 

김도민 우리 사회에서 잊혀지고 있는 ‘해방’이라는 말도 다시금 확산됐으면 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직후에는 해방과 광복, 독립 등이 두루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8·15 ‘광복’이라는 표현이 해방을 압도하고 있어요. 그런데 백낙청 선생의 책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초판 시인사 1979, 개정합본판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제목처럼 한국현대사는 분단, 전쟁, 냉전 그리고 국가폭력과 맞서 싸운 ‘인간해방’의 과정이었습니다. 죽어간 이들에 대한 애도와 기억의 공간이 바로 광장이었고, 우리는 그 광장에서 폭력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을 외쳤습니다. 이번에 내란사태와 탄핵과정을 겪으면서 광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기 때문에, 반대로 ‘국가주의’를 앞세우며 반대파를 처단하려는 세력들에 의해 잠식될 수 있다는 위기감도 들었는데요. 앞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한국현대사에서 발생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배우고 이해하는 지난한 과정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한강의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미라 저들의 서부지법 폭동사태는 있었지만, 반복되는 위기 속에서도 유혈사태나 무력충돌 없이 민주적 질서를 회복해낸 과정은 극우주의의 전세계적인 확산이라는 상황에서 그 자체로 매우 주목할 만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내란사태를 교훈 삼아 남북간 평화체제의 구축이 한국 민주주의의 안정도 가져온다는 사실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해가야 할 시점입니다. 안보의 과잉정당화, 종북몰이, 진영논리에 갇힌 남북관계 인식이 가진 위험성 역시 계속해서 강조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남북관계를 평화적 공동체 구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또 한번의 결정적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까 합니다.

 

홍석률 식민지배의 역사가 남긴 문제들이 여전히 한국사회에 남아 있고 균열도 존재하지만, 말씀을 들으며 그래도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성취해왔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최근 12·3 내란사태에서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군인과 시민 모두 자제력을 보여줬고, 남태령대첩처럼 밑으로부터의 연대감을 구축하는 흐름도 분명합니다. 역사학자로서 계속해서 역사논쟁을 하면서 우리의 인식과 나아갈 방향을 점검해볼 책임을 느낍니다. 우리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의 실마리를 잘 풀어나가면, 민주주의가 도전받고 있는 이 세계에도 크든 작든 도움을 줄 수 있겠죠. 오늘 여러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2025.4.21.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