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 K- 담론을 모색한다 ⑥
박현채의 삶과 사상
이일영 李日榮
경제학자, 한신대 교수. 저서 『뉴노멀 시대의 한반도경제』 『혁신가 경제학』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경제』, 공저 『탄핵 이후, 새로운 공화국을 위하여』 『한반도 평화번영론의 새구상』 등이 있음.
ilee@hs.ac.kr
1. 카오스 시대의 박현채 사상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벌인 관세전쟁은 세계 차원에서 무역·생산·금융 체제는 물론 정치·군사 체제를 뒤흔들었다. 한국은 이제 해방 80년을 맞이하지만, 나라의 방향은 혼란 속에 있다. 한국경제는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1960년대 중반 이후 대외지향적 발전모델을 추구하고 자유주의 세계체제의 시장에 초대되어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과 중국의 격렬한 경쟁 속에서 그간의 세계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세계체제의 변화를 돌아보면, 미국과 독일은 19세기 영국 헤게모니에 대항하면서 국민경제를 형성했다. 중국은 신해혁명(1911), 사회주의혁명(1949), 개혁·개방(1978) 등을 거치면서 국민경제 형성의 역사를 써왔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은 2010년대부터 자립적 국민경제를 (재)구축하기 위한 경쟁을 본격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한국은 세계체제 카오스 속에서 나라만들기와 경제만들기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재점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1 한국에서 대안적 경제사상을 논할 때,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부딪히게 되는 것이 박현채(朴玄埰, 1934~95)의 경제학이다. 박현채는 박정희정권의 경제모델에 대항하여 민족경제론을 제기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1960~80년대 진보사상의 주요한 발원지였으며, 지금까지도 보수·진보 양면에서 협공을 받는 문제적 인물이다.
최근에도 일부 언론에서는 주기적으로 진보좌파사상의 본산으로 박현채를 공격하곤 한다. 지금은 뉴라이트운동의 원로가 된 안병직(1936~ )도 1980년대 초까지는 민족경제론과 동반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198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 근대화와 박정희 경제발전 모델을 긍정하기 시작하며 박현채를 비판해왔다. 보수 일각에서는 박현채와의 대결을 통해 빈약한 우파사상 전통을 보완하려 하고 있다.
진보측에서 박현채 경제학은 1970~80년대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서구와는 다른 발전경로를 겪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진 사회성격 논쟁에서, 봉건파 논의는 자본주의 발전 중의 봉건적 잔재를 문제시하며 민주주의혁명을 강조했고, 자본파 논의는 자본주의 확립과 사회주의혁명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2 박현채는 식민지형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이를 두고 한국 자본주의의 진전과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주목하는 쪽에서는 그를 낙후된 봉건파적 경향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박현채 사상은 박정희모델과 대립하면서 형성되었으나, 1990년대 이후 젊은 세대들에게는 민족경제론이 낡은 경제론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최근 최병천은 지난 60년간 진보의 세가지 경제노선을 민족경제론, 사회주의 경제학, 사민주의 경제학으로 정리하면서 이들 노선이 실패와 한계를 보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3 새로운 진보 노선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민족경제론의 박현채 경제학이 현실에서 실패했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박현채 경제학을 보다 적극적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역사적 시야를 열자는 주장도 있다. 연광석은 박현채의 의미를 학문적 이론체계보다는 운동적 사상 실천의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는 박현채가 1985년 『창작과비평』 57호(「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Ⅰ)」)를 통해 촉발한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이 현실운동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역사 복원의 계기를 만들었으나, 운동권에서는 비생산적인 사상·이론 투쟁으로 귀결되었고 학계에서는 박현채를 ‘탈역사화’한 정치경제학적 논의로 끌고 갔다고 본다.4
박현채를 정치경제학 이론의 틀에 가두지 말고 역사적 사상 실천의 연속선상에서 보자는 연광석의 주장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다. 연광석은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박현채와 1950~60년대 민족경제론의 박현채가 사상적으로 연결된다고 보며, 그의 사상을 우리 역사 속 정치 전통으로서의 ‘역사적 공산주의’로 재조명한다. 연광석이 박현채 사상의 연속성을 적절하게 포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박현채 사상의 연속성이 실제로 ‘역사적 공산주의’ 전통의 연속성이라 할 수 있는가?
삶과 사상의 통합이자 사상 실천의 측면에서 보면, 박현채로부터 변명할 필요 없는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전통적인 이념의 연속성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박현채에게는 경제학 ‘이론’보다도 ‘정치’와 ‘역사’가 중요했다. 이론은 순수할 수 있으나, 현실은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다. 박현채의 삶은 한반도의 복잡한 현실 속에 놓여 있었다. 박현채의 사상은 현실의 모순과 이율배반을 기꺼이, 정면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사상 실천의 원형적 동기
(1) 입산과 하산 경험
연광석의 논의로 좀더 들어가보자. 연광석이 박현채 사상의 연속성을 논의한 데에는 「육필회고록」(『박현채 전집 1』, 고 박현채 10주기 추모집·전집 발간위원회 엮음, 해밀 2006)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연광석은 박현채의 회고록 초고를 참고하면서 이년간의 빨치산 경험이 박현채의 사회적 실천의 원형적 동기를 형성했다고 논한다. 박현채는 광주서중 입학 때부터 남한 내의 좌우대립에 휘말렸고 1950년 9월 입산해 1952년 하산했다. 회고록은 그의 전생애가 아닌 이 빨치산 시절의 일년 정도를 담고 있다.5
1980년대 후반 전두환정권이 종식되면서 박현채의 활동 폭이 넓어진 이후 그가 쓴 미완의 회고록을 보고 그를 순수한 사회주의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박현채의 사상적·이론적 동지라 할 수 있었던 정윤형(1937~99)은, 박현채 사상을 사회주의만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경제학자로서 박현채의 전성기는 1차 인민혁명당사건(이하 인혁당사건)에서 풀려난 1960년대 말부터 『민족경제론』(한길사 1978)을 출판한 1970년대 말까지였다.6
「육필회고록」에 입산의 정황이 자세히 나온다. 그는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스스로를 “그 시기의 나는 극좌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39면)고 표현한다. 1950년 봄에 학련(전국학련구국대) 본부에 잡혀가 구타를 당한 적이 있다. 그는 그때 학련 감찰부장과 토론 끝에 결의형제를 맺었고 학련의 보호를 받았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그에게 입산의 결단을 요구했다. 전쟁 발발에 따라 피신하고 인민군 점령 이후 학교에 복귀해 학교운영위 활동을 하다가, 9·28 서울 수복 후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입산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1950년 입산 이후 소년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활동했고, 1951년 8월에는 전투 중에 복부 관통상을 당하기도 했다. 탈락하는 지식인 출신 빨치산이 아니라, 자기 위치를 지키는 투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박현채의 10대 시절은 폭력과 전쟁에 휘말린 삶이었고, 빨치산 경험은 혹독한 것이었다. 박현채는 회고록에 빨치산 시절 겨울의 고단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한번은 무등산 뒤 도로가를 이동하다가 우리는 길가 소나무 밑 황무지에서 숙영을 했다. (…) 눈이 올 때이므로 밤에 자다 일어나 보니 모두가 눈에 잠겨 있고 서 있는 것은 나무 밑에 서 있는 보초뿐이었다. (…) 이 고통을 못 이기고 몇사람이 투항을 했으나 그 고통은 지금의 나도 이해할 만하다.”(64면)
당시 빨치산 지도부는 휴전 교섭소식을 접하면서 여자들과 젊은이들은 하산하게 하고 나머지는 죽음으로써 투쟁을 끝낸다는 결정을 했다고 한다. 박현채를 아끼던 빨치산 대장 이태식은 함께 활동하던 중에도 늘 “너는 머리가 좋으니 산에서 내려가라, 내려가서 민중을 위한 경제학을 하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박현채는 1952년 8월 하산해 화순경찰서에 체포되었는데, 부모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한편 그에게 하산을 권한 이태식은 머슴 출신으로 한국전쟁 전에 입산해 1954년 무등산에서 사망했다. 그의 잘린 목이 화순경찰서에 한동안 전시되었다고 한다. 그런 시절이었다.7
박현채는 격렬하고 참혹한 시절을 지내고 하산한 이후, 다시 차가운 현실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 그는 이전의 자신을 숨기고 1954년 장성농고를 거쳐 전주고등학교에 편입했다. 고교 졸업 후 또래들보다 2년 늦게 195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했고 1961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천운으로, 그리고 주변의 각별한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오랜 재야생활 동안 군림에 값하는 호방한 풍모를 보였다. 그러나 지리산에 오를 때에는 눈물을 머금고 목이 메고 결국은 통곡하듯 울기도 했다. 말년에 회고록을 쓰는 동안에도, 병상에서 의식이 소멸되어 가는 중에도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8
(2) 인혁당사건
박현채를 ‘재야’ 경제학자로 살게 한 결정적 계기는 1차 인혁당사건이었다. 1964년 8월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 국가사변을 기획했다’고 발표하며 청년 인사와 학생들을 검거·기소했다. 이 사건을 두고 박현채를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한 인물로 규정하는 시각이 있다. 뉴라이트를 대표하는 안병직의 증언이 여기 해당하며, 소설 『태백산맥』(1983~89, 전10권, 개정판 해냄 2020)에서 박현채를 모델로 삼아 사회주의자 인물을 형상화한 조정래 역시 박현채를 ‘순수한’ 사회주의자로 언급한 바 있어 여러 곳에 인용되고 있다. 앞서 소개한 연광석 또한 박현채를 역사적 공산주의의 연속선상에서 평가했다.
그러나 인혁당이라는 조직의 구성 및 존재 여부, 이념과 지향과 관련해서는 여러 갈래의 주장이 존재한다. 검찰 공소장에서는 박현채가 북한의 정치노선을 따르는 인혁당을 조직했다고 했고, 1964년 9월 서울지검은 박현채를 ‘북한괴뢰의 정치노선에 따라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인민혁명당에 자진 가입, 동당 중앙상무위원회 조직위원에 있던 자’로 기소했다. 1965년 1월의 1심 판결에서는 박현채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1965년 5월의 2심 판결에서는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선고 이유는 장차 결성할 정당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써클조직에 가입했다는 것, 그의 집에서 관련자(도예종)에게 1박의 편의를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김병태는 박현채와 함께 한국농업문제연구회에 근무한 농업경제학자이다. 인혁당사건에 대한 그의 증언에 따르면, 구체적인 이름을 붙일 것도 없는 민주사회주의 지향의 연구써클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는 박정희정권의 중앙정보부가 그해 6월의 6·3항쟁(한일협정 반대투쟁)을 무마하기 위해 인혁당사건을 날조했다고 주장했다.9
반면 안병직은 뉴라이트 입장에서 인혁당에 대해 증언했다. 안병직은 자신이 당시 대학 선후배관계로 박현채를 만나 맑스, 레닌, 마오 쩌둥, 한용운, 신채호의 사상을 배워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4·19 이후 시작된 최초의 좌익운동이 인혁당이라고 하면서도, 인혁당과 북한의 구체적 관계는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인혁당의 조직 목적은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것이었고, 써클운동은 대부분 자생적이었다고 한다.10 그럼에도 안병직은 인혁당이 발각되고 강령도 나왔다고 말하는데, 이는 당시 법원의 판단과는 배치된다. 항소심 판결의 주요 내용은 과거 혁신계 노선의 통일방안과 민주사회주의 원칙을 표방하는 단체의 구성을 ‘예비’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인혁당 당명의 결정, 창당, 강령·규약에 대한 진술 등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혁당사건은 한국전쟁 이래의 반공주의적 탄압의 연속선상에 있다. 1956년 평화통일을 내세우면서 진보당을 결성한 조봉암은 1959년 처형되었다. 4·19 이후 혁신세력들은 다시 정당활동을 개시했으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특수 반국가행위자로 몰려서 5명 사형, 3명 무기징역, 125명 유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특히 민족자주적 통일정책을 내세웠던 사회당 계열 인사들은 더욱 가혹한 탄압을 받았고, 이들 중 다수가 인혁당사건 관련자에 포함되었다.11
박현채는 인혁당사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인혁당사건은 그의 사상 실천의 내용과 방식을 규정한 측면이 강하다. 사건 이후 박현채의 이론적 실천은 사상투쟁이나 이론논쟁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분석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박현채 경제학은 특유의 민족경제론으로 논의될 수 있으며, 그는 줄곧 현실주의적 관점을 견지했다. 운동노선에 있어서도 많은 희생을 치르고 좌절한 5·18 광주항쟁을 모델로 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12 한국의 엄혹한 정치상황에서 급진적 조직은 탄압에 노출되므로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3. 재야의 경제학
(1) 초기 재야활동: 한국농업문제연구회
박현채는 현실의 제약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재야에서 활동했다. 195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걸쳐 있는 박현채의 활동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재야라는 한국적 사상 실천의 공간이 드러난다. 재야는 외국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한국만의 독특한 개념으로 각종 사상의 집합과 혼합이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제도권 바깥,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변혁지향적인 운동, 정치적·경제적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도덕성 등을 특징으로 두고 있다.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으로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 어쩔 수 없이 형성된 측면도 있지만, 권력 획득에 연연하기보다 국가권력 자체를 민주주의체제로 전환하려는 능동적인 성격도 있다.13
박현채는 ‘독보적으로’ 재야의 경제학을 개척했다. 그는 1959년 공채 시험을 통해 ‘한국농업문제연구회’에 들어간다. 당시 연구회는 지방에 10개 분회를 두고 민간 차원의 협업농장 경영을 실험했다. 박현채는 공채 과정에서 면접위원들과의 대립으로 낙방 위기를 맞았지만, 주석균(1903~81) 회장이 면접위원들을 설득하여 연구회에 받아들이도록 했다고 한다.
한국농업문제연구회 활동은 박현채의 정책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0대 중후반의 박현채는 주석균 회장의 주장, 이력, 인적 네트워크를 접하게 되었다. 주석균은 일제강점기에 평북 위원군수와 선천군수를, 해방 후에는 농림부 차관(1948~50)을 지냈는데, 자신의 관료 경험을 바탕으로 농촌 민주화를 농촌 부흥의 선결과제로 보고 이를 위해 농민들을 협동조합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조 도입 초기에는 원조를 수용하되 자립정신에 기초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1950년대 중반 이후 원조가 한국농업에 미치는 부작용이 심각하다고 보고 외곡 도입을 비판하는 자립경제론 입장으로 이행하기도 했다. 주석균은 관료생활을 거치면서 민주·자유·자립이라는 세가지 축으로 농업정책론을 정리했고, 한국농업문제연구회 활동을 본격화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강화한다. 「나의 주장(主張)」(『사상계』 1955년 11월호)이라는 글에서 부제를 ‘민주주의와 자유경제와 자립경제의 기반을 조성하라’로 제시한 바도 있다.14
박현채로서는 이 시기에 농업문제만 아니라 자립경제의 산업구조와 민족자본의 현실적 역할에 대해서도 숙고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가령 주창균(1921~2012)과의 인연도 있었으리라 본다. 한국농업문제연구회 운영에는 주석균의 동생인 철강기업가 주창균의 재정적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1호 철강 엔지니어’였으며 6·25 이후 철강기업을 창업하여 강판 국산화를 이루고 일관제철소로까지 발전시켰던 것이다.
(2) 비판적·대안적 민족경제론의 형성
박정희정권에 대한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으로 폭발했다. 여기에 종교계의 중도노선과 민주화운동이 합류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사상 지형은 반공 보수주의 일변도였으나, 종교계와 진보적 민족주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세력이 혼합되면서 재야 민주화운동이 활성화되었다. 당시 재야의 사상 지형을 보면 『사상계』 그룹은 우익 민족주의 계열이라 할 수 있고, 보수기독교와 다른 축을 형성한 한신대·한국기독교장로회 계열 정도가 좌우 사이의 중도 성향이었다.15 박현채는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에 진보적 민족주의 대안을 결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박정희정권 출범 초기부터 5·16은 군사쿠데타라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으며16 박정희정권에 근본적 비판을 가하는 재야 민주화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박현채는 1950년대의 자립경제론을 1960~70년대의 재야 민주화운동의 경제 대안으로 발전시켰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경제는 사실상 폐허상태였고, 1950년대는 경제정책 부재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원조경제에서 자립경제로의 전환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공감대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박정희정권도 출범 초기에는 자립경제를 공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1차 5개년계획을 수정하는 시점이 박정희정권이 자립경제론으로부터 이탈하는 전환의 포인트였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박정희정권의 경제모델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대안의 논리를 구축했다. 박정희정권은 단기 효과를 거두기 위해 최종재 조립·가공 중심의 생산과 수출에 자원을 집중했다. 민족경제론은 이러한 외연적 성장의 문제를 비판했다. 요소·부품을 국산화해서 산업의 유기적 관련성을 높이고 대외의존성을 줄이자는 것이 민족경제론자의 관점이었다.17
박현채 스스로 중요한 초기 저술로 꼽은 글이 「계층조화의 조건: 식민지적 경제구조의 청산과 자주적 민족경제의 확립이 전제되어야 한다」(『정경연구』 1969년 11월호)이다. 이 글의 제목 및 서두에 박정희모델 비판과 그에 대한 대안모델로서의 민족경제론의 기본 골격이 제시된다. 박현채는 박정희정권의 경제성장이 계층·산업·지역간 불균형·부조화 구조를 낳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불균형·부조화의 구조가 서구화된 고도의 생활양식과 생존을 위한 동물적 생활양식의 이중구조로 나타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해방 이후 특히 1962년을 기점으로 하는 두 차례의 경제개발계획을 거치는 동안 우리 경제는 국부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시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부의 성장은 그의 사회적 귀속에 있어서 사회계층간 산업간 및 지역간에 심한 불균형을 결과함으로써 (…) 우리의 경우는 경제성장이 낮은 단계에서 사회 제구성체간의 불균형이 극화되어 한쪽에서는 서구화된 고도의 생활양식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생존을 위한 동물적 생활양식이 공존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은 국부의 사회 제구성체간의 불균등 분포는 국민경제의 종속적인 식민지 이식형적 전개의 단초에서 주어진 2중구조적 현상이 그후의 국민경제의 제과정에서 조정, 청산되지 못하고 사회적 생산력 발전의 충분한 기초 없이 생산력 발전의 낮은 단계에서 이른바 저차적 독점으로 이행함으로써 경제성장에 따라 이들 불균형을 경직적으로 더욱 확대시켰다는 데서 그 원인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박현채 전집 6』 748면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위에서 보듯이 박현채는 불균형구조의 원인을 첫째, 국민경제의 원시적 축적이 식민지 이식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둘째, 국민경제의 전개과정이 낮은 생산력 수준에서의 저차적 독점으로 이행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식민지적 경제구조가 조정·청산되지 못한 채 사회적 생산력의 기초가 충분히 확립하지 못하고 발전단계가 낮은 상태에서 외부 이식에 의해 사적 독점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주적 민족경제는 외부 이식형 사적 독점의 구조를 사회적 생산력으로 조정하는 균형적·조화적 대안이라 할 수 있다.
4. 민족경제, 그리고 변혁성과 혼합성
이제 서두에서 제기한 문제로 다시 돌아가보자. 박현채 사상은 사회주의 경제학 사상인가? 그의 사상의 출발점에 순수한 사회주의자로서의 계기가 있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실천 전반을 사회주의 경제학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민족경제론의 사상을 말하자면, 필자는 자본주의적 요소와 비자본주의적 요소의 변혁적 혼합을 지향하는 사상이라고 본다.
박현채는 「발전론 비판: 새로운 발전이론의 모색」(『제3세계』 제1집, 1985; 『박현채 전집 3』)이라는 글을 통해 발전이론의 실천적 유형을 자본주의형, 인민민주주의형(사회주의형), 비자본주의적 발전형의 세가지로 분류했다. 현실의 발전유형은 자본주의형이지만, 박현채는 그 체제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고 민족의 자주·자립의 방향과 크게 괴리된다고 비판했다. 인간과 민족이 없는 경제발전 이론은 민중의 소외, 사회적 윤리의 부재, 공동체의 긍정성 붕괴, 생태계 파괴 등의 현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형 발전모델에 대한 비판에 이어 박현채는 새로운 발전모델의 기본요소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①경제발전의 과정은 단순한 경제적 과정이 아니고, 사회적 변혁의 과정이어야 한다. ②경제발전은 민족의 자립과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을 밑받침하는 것이어야 한다. ③토착적인 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④경제이론에서 인간의 복권이 이루어져야 한다. ⑤경제발전은 인간의 창의·창발성 위에 서야 한다. ⑥생활환경 및 생태계의 파괴는 최소한으로 억제되어야 한다. ⑦국민경제는 경제계획에 입각해 운용한다. ⑧시장경제의 원리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국민경제에 계획성을 부여한다. ⑨계획은 민중적 참여 위에서 작성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필자는 박현채의 새로운 발전론 모색에서 경제체제 모델과 관련해 두가지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전체 과정에서의 변혁성이다. 박현채가 강조하는 변혁의 지향은 사회적 생산력을 해방하고 직접적 생산자에게 보다 많은 경제잉여를 귀속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시장경제, 공유적 경제, 국가자본주의 요소의 제도적 혼합이다. 시장경제 원리에 의존하면서도 협동조합과 국영기업을 통해 국민경제의 경제계획을 운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박현채는 대안적 발전모델의 제도 요소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원칙적인 것을 발전에서 구체화시키기 위한 접근방법을 살펴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주어질 것이다. ⑦국민경제의 운용방법은 경제계획에서 구해진다. 그것은 시장경제의 원리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물량적 규제까지를 포함한 계획적인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혼합적인 것으로 되어야 한다. ⑧시장경제의 원리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국민경제에 계획성을 부여하고, 제시한 제원칙의 관철을 위해 공유적인 성격을 띤 경제영역의 확대가 협동조합적 소유(이것은 공동체적 유제가 있는 곳에서는 이의 근대적인 공동소유에로의 전화를 위한 것으로 된다)에 의해 시도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보완하는 것으로서 국가자본주의적 영역의 확대가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 협동조합과 국가자본주의(국영기업)는 계획 집행의 중요 수단으로 된다. ⑨계획은 민중적 참여 위에서 작성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계획이 몇몇 계획 입안자들의 소산이 아니라, 작성에서부터 집행에 이르는 제과정이 민주주의적 집회와 절차에 의해 작성되고 집행됨으로써 대중 참여의 소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박현채 전집 3』 1,090면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박현채는 특정한 단일 이론—맑스주의, 신고전학파, 케인즈주의—에 고정되지 않았다. 그는 자본주의 개혁과 변혁적 전환을 동시에 고려했으며, 변혁적 지향성 속에서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제도 요소를 혼합한 모델을 모색했다.18
박현채와 오랜 시절 함께 대화한 학문적 동료들의 견해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현채와 함께 1988년 한국사회연구소을 설립하고 소장을 맡은 정윤형에 따르면, 박현채의 경제사상은 자본주의체제를 전제로 하는 개혁과 자본주의체제 자체의 근본적 개혁 요소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와 차이를 보이며,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개혁과 변혁을 함께 모색하는 혼합적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19
그의 실천활동에도 주목해야 한다. 박현채가 한국사회연구소 이사를 맡은 것은 인혁당사건 이후 공개적인 조직활동으로는 처음이었다. 한국사회연구소는 1992년 한겨레사회연구소와 통합해 한국사회과학연구소가 되었다. 이때 예춘호 김중배 박현채가 공동이사장을 맡았다. 예춘호(1927~2020)는 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냈다가 삼선개헌에 반대해 재야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1987년에는 양김 분열을 비판한 바 있다. 필자는 예춘호와 박현채의 만남을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본다. 그것은 민주적 공화주의와 사회적 공화주의의 흐름이 합류한 재야 사상 실천의 혼합적·공화적 모멘트였다.20
5. ‘변혁적 현실주의’의 접근법
박현채 경제학에 제기되는 또다른 문제를 돌아보자.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비현실적이고 실패했는가? 박현채의 발전모델은 1950~60년대의 후진국 내지 제3세계 조건에서 총체적인 정치경제체제의 상향운동을 모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현채의 민족경제 모델은 정치경제 주권 확보, 민중지향성, 성장지상주의 비판, 대중민주주의 등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필자는 박현채 사상의 핵심을, 한반도 특유의 현실에서 변혁의 길을 추구한 ‘변혁적 현실주의’라고 생각한다.21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의 변혁적 혼합경제 모델을 현실에 반영하기 위해 제도권 현실정치인과도 적극 결합했다. 정치인 김상현(1935~2018)은 1970년 월간지 『다리』를 창간했는데, 박현채는 1971년 2월부터 1972년 12월 폐간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22 박현채는 당시 대선후보로 부각된 김대중을 민족경제론의 사고에 근접한 정치인으로 평가하고 지원했다.
박현채를 중심으로 정윤형 김경광 임동규 등은 1971년 출판된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범우사)라는 선거홍보용 책자를 제작하기도 했다.23 이 책자는 김대중의 초기 경제담론을 형성했는데, 당시의 ‘대중경제론’은 이후 조금씩 변화하다가 1992년부터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김대중은 1982년부터의 미국 망명 이후 대중경제론의 전환을 모색했고, 1992년 대선 패배 후 영국 유학을 거치면서 시장주의 노선을 강화했다. 1992년경 이 시기에 박현채와 김대중의 동반적 관계는 끊어졌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모델과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1960~70년대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분기하여 대립했고, 박현채는 현실에서 민족경제론을 구현하기 위해 1970~80년대에 김대중의 대중경제론과 제휴했다. 그래서 1992년 이전의 김대중 대중경제론과 박현채 민족경제론 사이에는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김대중 역시 박정희 방식의 고도성장이 대중생활의 고도향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는 전체주의적 통제를 가하는 사회주의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계급구조의 양극화를 낳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수정하고, 그러한 수정 이전의 단계에서도 그 내용을 미리 실현하려는 모델이다. 대중경제론과 민족경제론이 제시하는 것은 모두 혼합경제 모델이다. 김대중은 발전단계가 다른 한국은 서구 선진국의 수정자본주의와는 상이한 자본주의 경로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식민지 종속형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민족경제를 제시한 박현채의 문제의식과 유사하다.24
그러나 앞서 말했듯 1990년대 박현채와 김대중은 분리되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경제의 구조 변화가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한국은 1986년부터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 호황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면서 투자율과 성장률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 시점에서 세계체제는 글로벌화와 과학기술혁명의 진전,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등 격변을 맞았다. 김대중은 이러한 흐름에 적응하면서 초기의 대중경제론에서 좀더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진전했다. 박현채는 이 시기에 병상에 쓰러졌다.
한국이 세계체제에 진입하면서 불균형·부조화의 성장체제를 형성하던 1960~80년대에, 박현채는 자본주의체제와 분단체제의 모순을 민족경제론이라는 틀로 힘겹게 담아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글로벌화와 신자유주의의 파도 속에서 그의 경제학은 고립과 암중모색의 시간을 지내야 했다.25
6. 박현채 사상의 현재성
그런데 이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혼란에 빠진 또다른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민족경제적 이익 추구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여러 층위와 부문에서 분단·분열이 극심해졌다. 자유주의 경제학이나 대외의존 및 성장지상의 발전모델은 막다른 길에 부딪쳤다. 파국으로 향해가는 기후위기는 우리의 일상을 뒤흔든다. 이제 박현채의 생각을 현재적·미래적 관점에서 다시 급박하게 돌아볼 때가 되었다. 그는 경제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민족간 관계와 함께 경제와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민족경제론적 시각은 그(인간간의 사회적 관계를 중요시하지 않는 근대경제학적 논의—인용자)와는 반대로 인간간·민족간의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면서 구조적으로 이것을 파악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민족의 자주·자립과 민족적 생활양식의 유지라는 민족주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자립적 경제라는 것이다.
—「자립경제론과 민족경제론」
(『민족경제의 기초이론』; 『박현채 전집 1』 622면에서 재인용)
낭비의 제도화와 시장결락부분의 퇴적, 공해와 같은 외부 비경제부분의 퇴적 등은 성장에 대한 회의를 경제제도적인 것으로부터 소재적인 것으로 이행시켜 이를 상호관련지우는 중요한 계기로 된다.
—「반성장론」(『씨알의소리』 1977년 6월호 34면)
박현채는 한국경제의 양적 성장에 대해 충분히 예측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것을 실패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국의 경제성장이 계층·산업·지역·생태의 심각한 불균형을 동반했다는 점, 이 불균형이 사회 전체의 위기와 연결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박현채는 고도의 서구적 생활양식과 동물적 생활양식의 극단적 이중구조를 변혁하려는 민족적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민족적 생활양식은 복고적 성격을 지닌 개념으로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생활양식은 생산양식부터 일상생활까지 포괄하는 확장된 체제 개념이 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민족적 생활양식 개념은 제3세계의 인간과 자연을 수탈하는 제국적 생활양식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추구하는 문제의식을 담아낸다.26
한국경제의 양적 성장만을 높이 보면서 식민지 이식형적 특수성, 상대적 자급자족 체계로서의 자립경제 등과 같은 박현채 논의에 대해 실패했다는 주장이 많았다. 물론 지금의 세계체제는 구 식민지 질서와는 어느정도 차별성이 있고, 절대적 자급자족을 논할 수도 없다. 그러나 최근 현실에서는 자립경제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해석이 필요하다. 자립경제 지향은 강대국간 무한경쟁 속에서 국가간 갈등의 위험을 관리하고, 생태적 평화를 추구하는 글로벌·생태 공화주의의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27
박현채 사상에는 오래된 것도 있고 새로운 것도 있다. 오래된 것에서 오늘날 가치있는 것을 찾아내고 미래에 부합하는 새로움을 찾는 일은, 지금 여기의 우리가 공부해야 할 몫이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시대적 제약 속에서 당시 사회과학 이론 수준의 한계 속에서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그의 사상이 축자무오류(逐字無誤謬)일 수 없고, 당장의 현실적 성공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세월에 침식되지 않는 그의 삶과 사상의 고갱이가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우렁우렁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그때그때 혼신의 힘으로 쓰고 혼신의 힘으로 살았으므로 나의 글에 대해 변명하지는 않겠다. (…) 견해차는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견해차가 오늘을 사는 민중의 생활상의 요구를 장기적으로 부정하는 것일 때, 그것은 정당한 것으로 될 수 없다.”(『민족경제론』 머리말)
―
- ‘세계체제 카오스’ 개념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졸고 「세계체제 카오스와 한반도경제」,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49~52면 참조.↩
- 1920~30년대의 자본주의 성격 논쟁은 일본에서는 강좌파(봉건파)와 노농파(자본파) 사이에, 중국에서는 중국농촌파(봉건파)와 중국경제파(자본파)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이러한 논쟁이 식민지 조선에도 영향을 끼쳤다. 아시아 전반과 중국에서의 논쟁 흐름에 대해서는 함종호 「중국 사회성격논쟁」, 『현대사상』 제20호, 2018 참조.↩
- 최병천 「‘진보의 경제성장’은 어떻게 가능한가」, 경향신문 2024.10.24.↩
- 연광석 『사상의 분단: 아시아를 방법으로 박현채를 다시 읽다』, 나름북스 2018.↩
- 1993년 여름 건강에 이상이 생긴 박현채는 회고록을 쓰면서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고 하며, 1995년 8월 세상을 떠났다.↩
- 정윤형 「민족경제론의 역사적 전개」, 정윤형 외 『민족경제론과 한국경제』, 창작과비평사 1995.↩
- 「정태인 인터뷰」, 『박현채 전집 7』 385~86면; 이미숙 「병상에 누운 민족경제론」, 정윤형 외 『민족경제론과 한국경제』, 박현채선생회갑기념논문집간행위원회 엮음, 창작과비평사 1995, 452면.↩
- 「조정래 인터뷰」, 같은 책 377면; 「김희숙 인터뷰」, 같은 책 429~33면.↩
- 「김병태 인터뷰」, 같은 책 409~414면.↩
- 안병직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김세중 외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 시대정신 2011, 153~59면.↩
- 오유석 「4월 혁명 이후 혁신 세력의 역동」, 『동향과 전망』 2024년 가을·겨울호 156면.↩
- 박현채는 광주항쟁이 계급적 성격을 띤 것은 아니며 무장투쟁에 의미를 둘 수도 없고 꼬뮌적 성격을 지닌 것도 아니라고 평가했다. 광주항쟁은 광주사람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선택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는 것이다. 박현채 외 토론문 「광주 5월민중항쟁의 학술적 재조명」, 『사상문예운동』 1991년 여름호 참조.↩
- 이기호 「‘재야(在野)’의 정치와 예춘호의 정치」, 『동향과 전망』 2022년 여름호 75~79면.↩
- 류일환 「1950~60년대 주석균의 농업정책론과 농정 관계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107호, 2024, 335면.↩
- 김건우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느티나무책방 2017, 270~75면.↩
- 김정남·한인섭 『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 민주화운동 40년 김정남의 진실 역정』, 창비 2020, 27면.↩
- 「전철환 인터뷰」, 『박현채 전집 7』 465~88면; 「조석곤 인터뷰」, 같은 책 452~53면.↩
- 민족경제론에 내재한 변혁성과 혼합성은 단계적이거나 병행적인 것이 아니라 모순적 현실 속에서 ‘통일된’ 이중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근대 적응·극복의 이중과제 논의에서의 사고방식과 통하는 점이 많다. 백낙청이 말하는 이중과제는 두가지 과제의 병행이 아니라 이중적인 단일 기획이며, 근대에 적응하면서 횡단을 이룩한다는 발상이다. 백낙청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31~32면 참조.↩
- 정윤형, 앞의 글 28~29면.↩
- 졸고 「『동향과 전망』의 과거·현재·미래」, 『마르크스주의 연구』 2025년 봄호 16~17면.↩
- ‘변혁적 현실주의’라는 용어는 『창작과비평』을 중심으로 논의된 ‘변혁적 중도’ 담론에서 아이디어를 구했다. 분단체제 변혁을 향한 근본주의와 중도의 현실주의를 결합한다는 점에서 박현채와 백낙청의 사상적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백낙청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변혁을 위한 실천에서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백낙청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23~24면 참조.↩
- 박현채는 이 시기에 『창작과비평』의 주요 필자로 합류하여 재야 지식활동을 전개했다. 1972년부터 『창작과비평』에 글을 싣기 시작하면서 단행본 저술과 기획에 참여했고 1985년에는 ‘사회구성체 논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 이병천 「민족경제론과 대중경제론」, 『사회경제평론』 제29권 1호, 2007, 228면.↩
- 이남주 「김대중사상과 K민주주의」,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75~78면.↩
- 이 시기는 또한 분단체제론이 본격화하는 때이기도 하다. 민족경제론에서는 다음의 서술에서 보는 것처럼 1990년대 이후의 분단체제론과 중요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남북에 있어서 체제를 달리하는 정치권력의 수립으로 되었고 분단된 남북의 분단된 남북의 서로 다른 체제 안에서 반대세력에 대한 가차 없는 억압으로 된다.” 『민족경제론의 기초이론』, 돌베개 1989, 181면.↩
- ‘제국적 생활양식’에 대한 논의는 북반구의 제국적 생활양식의 확장과 북반구 피지배계급(특히 중간계급)의 포섭, 그 결과로서의 남반구 인구에 대한 착취와 자연파괴를 다룬다. 울리히 브란트·마르쿠스 비센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 이신철 옮김, 에코리브르 2020 참조.↩
- 민족경제론과 ‘새 공화주의’, 글로벌 공화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졸고 「한반도 체제 카오스와 ‘새 공화주의’ 국가비전」, 이일영 외 『탄핵 이후, 새로운 공화국을 위하여』, 박영률출판사 2025; 이일영·정준호 「글로벌 공화주의의 지정(경) 전략」, 『동향과 전망』 2025년 봄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