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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분투하는 마음과 서사의 신비
김나영 金娜詠
문학평론가. 평론집 『말과 말 아닌 것들』 등이 있음.
kfbs4@naver.com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25)의 첫 문장(「아주 환한 날들」 9면)이다. 생각해보면 저 문장은 이 책에 묶인 백수린의 소설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요청 같기도 하다. 가령 혹시 당신은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처럼 먹고사는 일의 분주함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은 물론 피붙이의 마음 또한 방치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닌지, 그로 인해 뒤늦게야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과 자식의 마음을 마주하게 되는 건 아닌지를 묻는다. 소설 「흰 눈과 개」의 화자처럼 자신과 닮은 가족이 마음을 몰라주어 억울하고 복잡한 심경으로 힘들어하다가도 우연히 세상에 숨겨진 경이로운 풍경을 함께 마주하며 과거의 상처를 품고 미래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지를 묻는다. 이러한 질문들은 분명 부모세대를 향해 쓰이지만 교감에 참여하는 자식세대를 향하는 물음으로도 보인다.
물론 백수린의 소설이 가족을 둘러싼 갈등과 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의 소설은 마음의 바깥에서 마음의 형성에 간섭하는 어떤 현실의 압력을 넌지시 심어놓는다. 왜 어떤 마음들은 차가운 현실 앞에 감상적이라는 말로 폄하되는지, 어째서 종(種)과 국적 같은 경계를 넘어선 관계에서 마음을 더 쉽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는지. 결국 백수린의 소설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가 거주하는 세계의 역사와 개인의 삶의 기록을 더불어 볼 수 있게 된다. 그밖에 또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작가의 얼굴을 마주보러 가며 나의 마음은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분주했다.
감정의 서사학
2011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니 백수린은 올해로 15년차 소설가다. 최근 출간한 『봄밤의 모든 것』은 네번째 소설집이고, 산문집과 역서를 빼더라도 중·장편을 포함해 일곱번째 책이니 그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권의 책을 발표한 셈이다. 이렇게 꾸준히 계속 쓸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가 궁금했다. 먼저 『봄밤의 모든 것』을 낸 소감을 물어보았다.
2023년에 낸 첫 장편소설(『눈부신 안부』 문학동네)을 쓰고 나서 제가 십여년 동안 다룬 주제와 관심들을 한데 응축해 모아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작은 문 하나가 닫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봄밤의 모든 것』에 실린 단편소설들을 쓴 시기가 장편을 쓴 시기와 일정 부분 겹쳐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소설집을 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렇게 한단락을 잘 갈무리하고, 다른 문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말하는 소설의 주제와 관심사는 내밀한 갈등을 둘러싼 것들이었다. 언어와 소통의 문제, 상처와 회복의 문제, 식민과 피식민의 문제, 세대갈등과 젠더갈등 등. 그렇다면 단편을 쓰면서 가져왔던 생각이란 무엇일까. 아쉽게도 현장에서 더 묻지 못했던 질문의 답을 다른 인터뷰1를 통해서 살필 수 있었다.
단편을 통해 하려 했던 것들이 감정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 미세한 감정들. 일상의 언어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감정의 기척을 포착하려 하는 시도가 단편 작업의 주된 것들이었습니다.
감정의 기척들, 감정이 일어나고 주저앉는 순간들에 대한 관찰은 백수린의 확실한 장기이다. 이 장기는 이번 소설집에도 빛을 발한다. 가령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서먹한 딸과 통화를 하고 나서는 늘 몸 쓰는 일을 찾는 장면을 들 수 있다. 그녀가 오이를 잔뜩 사서 오이지를 담그거나 베란다 화분들을 한번에 분갈이하는 일은 이른바 ‘K모녀’라는 관계 속의 복잡한 심사를 잘 드러낸다. 「빛이 다가올 때」의 바닷가 풍경도 잊을 수 없다. 인물들 사이의 마음의 일렁임을 해질녘 육지와 바다 사이를 오가는 파도의 움직임으로 그려낸 장면은 감정과 풍경을 연결하는 모범답안 같았다. 이렇듯 인물에게 발생한 감정을 행위나 장면으로 전환하여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대목들이 이번 소설집 곳곳에 섬세하게 자리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섬세한 감정의 탁월한 묘사로만 평가할 사안이 아니다. 다양한 서사의 밑바탕에는 공통적으로 어떤 억울함이나 후회의 정서가 깔려 있는 듯하다. 이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이해받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에서는 내 삶이 어딘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감각이기도 하다. 억울하고 답답한 사람이 자신의 감정이 흘러나오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에는 삶의 방식이나 과거를 정정하고 수선하며 미래를 현재의 자리로 끌어오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백수린 소설의 감정들은 삶에 대한 애정을 재확인하게 하는 촉매들이며 삶을 수선하며 지속하는 힘의 잔향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 낯선 길 위에서 서로를 돌보는 자리
백수린 소설이 자주 다루는 이국적인 공간은 “민족·국가·언어적 정체성에 급진적인 파괴성을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종래의 한국적·민족국가적 프레임에 갇혀 있지도 않으면서 이방인이 된다는 것의 문제, 특히 외국어의 문제”2에 대한 관심으로 설명된 바 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빛이 다가올 때」와 「봄밤의 우리」에서, 우리는 또 한번 외국의 거리와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두 소설을 쓰면서 외국이나 외국인이라는 부분에 크게 방점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경험상 외국인과 내가 서로 낯선 존재처럼 느끼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거든요. 오히려 한국사람들과 서로를 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경험할 때도 있고요. 두 소설에 외국과 외국인이 등장해야 했던 이유는 각각 달랐는데, 어쨌든 제게는 두편 모두 결국엔 타인을 이해해보려 애씀으로써 자기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독자가 지레짐작하는 이국적 공간에 대한 환상을 벗겨내는 답이었다.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 배경이 발휘하는 특수한 효과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백수린 소설의 타자들은 국경이나 종과 같은 경계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찾아온다. 「빛이 다가올 때」나 「봄밤의 우리」가 보여주듯 뉴욕과 빠리 같은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에서 인물간의 관계 맺음이 국적과 무관하다는 설정은 일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무수한 타인 중 특히 경계 너머의 누군가와 친밀해지는 화자의 서사가 흥미롭다.
「봄밤의 우리」에서의 ‘유타’와 ‘나’ 또한 그렇다. 프랑스에서 만난 한국인 ‘나’와 일본인 유타는 그들에게 부과된 정체성의 문화적 관습을 벗어나 있어서인지 함께 경험하고 깊게 교감하는 순간을 드물지 않게 맞이한다. 유럽을 방문한 동아시아인이라는 범주도 이들의 친밀함에 기여했겠지만 아마도 그들 사이의 친밀함은 서로를 돌보는 과정이 빚었을 것이다. 낯선 타지의 삶을 꾸리기 위해 이방인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돕게 된다. 한끼 식사를 나누는 힘조차 이들의 삶에서는 더없이 각별하다. 긴장과 갖가지 우연성이 증대하고 더불어 취약함과 상호의존성까지 높아진 상황은 일상적인 일들도 특별하게 가동시키며 두 사람 사이 경험의 밀도를 상당히 높이게 된다. 둘 사이에 공유된 언어가 적은 만큼 이들을 대화에 더 깊이 참여하며 말을 맞추어가는 작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흰 눈과 개」에서 언급되는, 반려견을 입양하기 위해 필요한 “애정과 훈련”(127면)이라는 말이 여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다. 애정을 가지고 서로에게 다가서려는 훈련 말이다.
그렇게 도시를 걷다 보면 그녀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불멸이 된 죽은 이들이 떠올랐다. 막이 내리면 사라져버리는 일회적인 것이라 연극을 좋아한다던 유타와 달리 그녀는 미래에도 영원히 남는 것이기 때문에 연극이 좋았고, 같은 이유에서 길을 걷다 골목이나 다리의 이름으로 남아 영속하는 빛나는 이름들을 마주치면 마음이 일렁였다. 그런 밤들엔 이따금씩 눈이 내리기도 했다. 기온이 충분히 낮지 않아 닿는 순간 덧없이 녹아버리던 눈송이들. 하지만 전쟁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구시가지에 눈송이가 흩날리는 풍경은 그녀의 눈에 그저 아름다웠고,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기꺼이 눈을 맞았다. “너무 아름답지?” 그녀가 돌아보면 평소보다 얼굴이 환해 보이는 유타가 말없이 웃었다.(「봄밤의 우리」 82면)
애정과 훈련을 쌓아가는 과정은 예상치 못한 삶의 깊이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는 걸까. 백수린의 이번 소설집에는 몇몇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펼쳐지는데 그 장면들은 대개 혼자가 아닌 순간에 찾아온다. 인물들이 내적 독백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들은 무엇인가를 방어하려는 듯 촘촘한 일상의 시간표 위에 자리하거나 고통어린 사건들을 반추하고 있다. 반면에 잘 통하지 않는 대화라 할지라도 대화를 거듭하며 자신의 삶에 찾아온 낯선 존재와 일정한 시간을 보내고 그 존재에게 내 삶의 한자리를 내어주는 순간, 세상은 마치 감춰놓았던 것만 같은 풍경을 드러내 보인다. 때로는 떠맡겨진 앵무새와 함께(「아주 환한 날들」), 외국인 친구와 함께(「봄밤의 우리」), 말이 잘 통하지 않던 아버지와 함께(「흰 눈과 개」) 대화를 나누려 애쓴 시간들이 마침내 타인을 이해하는 차원으로 그들을 슬그머니 옮겨놓는 것이다.
「빛이 다가올 때」에 그려진 뉴욕에서 만난 사촌언니의 생생한 삶의 경험들도 더불어 볼 만하다. 한 문화가 부여한 특권적 자리(교수)와 관습적 책임(장녀)에서 놓여나자 언니의 삶은 비로소 어떤 해방을 맞이한 듯 보이기도 하는데 소설은 이처럼 자신의 이력을 내려놓을 때 상실했던 삶의 감각이 회복될지 모르며 불안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의 찾아온다는 것을 일러주기도 한다. 외국이란 나를 이상한 평등의 자리에 옮겨놓는 무대와도 같다고 말할 수도 있을까. 「빛이 다가올 때」에서 언니가 스무살이나 어린데다 아직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상대에게 이끌림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연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물론 외국은 인종차별 등 예상 가능한 불평등이 작동하는 장소라는 사실 또한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전 소설집 『여름의 빌라』(문학동네 2020)에서 동양인 여성에게 캣콜링을 하는 남성들에 대해서나(「시간의 궤적」) “인종차별이 나쁜 것임을 아직 충분히 학습하지 못한 아이들의 무구한 장난이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흑설탕 캔디」 180면)를 상기하는 장면을 분명히 새겨두기도 했다. 그런데 외국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작가는 다른 강조점을 언급한다.
제가 더 그려 보이고 싶었던 건 인물들의 나이의 간극이에요. 「봄밤의 우리」에서 유타가 외국인이라는 것보다는 나이가 많고 특이한 남자라는 점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와 ‘나’의 나이차를 일부러 강조해서 썼어요. 「빛이 다가올 때」에서 개리는 ‘나’와 언니의 일상에 공평하게 등장하지만 ‘나’와 달리 언니에게 큰 영향을 주죠. 인물간의 나이차를 통해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타자나 약자로 보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차별적인 시선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며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하던 시기였다. 갈 수 있는 데가 줄어들고 만날 수 있는 인원이 적어지면서 좁아진 생활 반경으로 인해 답답함을 느낄 때 한 지인이 그 곤란함은 노인이 평소에 느끼는 몸의 감각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해주었는데, 그 말의 둔중한 충격이 오래 남았다. 한국사회 대부분 주류문화의 신체 감각은 젊은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언어화된다. 백수린의 소설은 최근으로 올수록 그러한 낙차와 공백을 언어화하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확실히 눈에 띈다.
몸과 마음의 시차
이모할머니는 또 무슨 소리를 냈던가? 모과나무집에 살기 시작한 이후 다혜를 놀라게 한 것은 이모할머니에게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온갖 소리였다.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앉았다 일어날 때 내는 신음 소리. 이모할머니는 잡초를 뽑거나 다림질을 하면서 혼잣말을 했고, 걸어 다니면서 트림을 하고 방귀를 뀌었으며 자다 깨서 화장실에 갈 때는 문을 꼭 닫지 않은 채 볼일을 봤다.(「눈이 내리네」 180~81면)
「눈이 내리네」에서 대학에 막 입학한 ‘나’는 이모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전에는 몰랐던 어떤 소리들을 듣는다. 할머니의 늙고 둔감해진 육체가 무심결에 내는 그 사소한 소리들을 통해 ‘나’는 늙음의 속성을 유심히 생각해보게도 된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그러니까 둘의 동거가 막 시작됐을 무렵에 화자는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 품위를 잃고, 수치를 망각하는 것. 타인의 눈에 스스로 어떻게 비칠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노년의 삶에 주어진 실로 놀라운 특권 같다”(181면)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생각은 점차 정정된다.
흔히 신체가 노화하면 내적으로도 약화되거나 상실하는 것들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암에 걸린 몸에 전신마취를 하는 게 극도로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당장 하루라도 안 아프고 살고 싶어서 어깨 수술을 결심하거나 이제 막 한글을 배우며 기뻐하는 이모할머니와 “더 이상 예전처럼 인생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믿지 않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최후의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초조해하고 있”(204면)던 이십대 화자는 젊음과 늙음의 전형을 기준으로 삼아 보면 명백히 뒤바뀐 듯하다. 몸이 낡아가더라도 정신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는 게 인간이며, 어린 시절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노년이 되어서라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머리로는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몸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그려 보이는 그의 소설 덕분에 새삼 앎 또한 ‘몸의 일’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되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내 몸이 최근 몇년 사이에 정말 달라졌구나, 이제는 정말 젊음을 비껴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해요. 특히 육체적으로요. 앞으로도 마음은 계속 이 상태일 텐데 몸은 노쇠해지겠구나 싶으면서 저절로 노인의 삶이 궁금해졌어요. 노인의 마음에도 지금 나와 같은 게 들어 있을 텐데, 하지만 몸은 나보다 더 마음 같지 않을 텐데, 그런 노년이라는 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저절로 일었어요. 한동안 소설을 쓰면서 노년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요.
몸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그의 이야기는 동시에 마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백수린의 소설에서 중년이란 몸의 생기와 다소 뒤늦은 마음의 성숙이 어느정도 일치하는 데서 오는 시야의 확장이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장이 아닐까. 「빛이 다가올 때」에서 “마흔이 넘은 언니가 스무 살이 갓 넘은 남자를 사랑”하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그것에 “사회 통념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일”(66면)이라는 해석을 붙였던 화자가 그 시절의 언니 나이가 되어 “이제 나는 안다”(70면)고 하게 되듯이 말이다. 이 소설의 사십대 화자가 젊은 시절 자신의 성급한 판단들을 철회하면서 중요하게 덧붙이는 말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같은 면) 타인의 방식대로 세상을 느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를 나와 타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식의 사고로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백수린의 인물들은 각자의 느낌과 감정에 가로막힌 채 오해의 상황을 겪지만, 늦더라도 이를 알아채고 스스로 조정하려 애쓰며 저 단절을 넘어서는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백수린은 우리가 이만큼 다르다는 사실을 서사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삼는 작가이다.
더불어 백수린의 소설에서 그려진 사십대는 경제적 주체로서나 돌봄의 주체로서 삶의 문제에 어느정도 적응한 상황이라는 점 또한 중요하다. 이번 소설집에서 특히 다수의 여성 인물들은 지난 이십대 시절을 회상하거나 그때로부터 달라진 삶의 조건들을 중요하게 언급하는데, 그들이 상실했다고 여기는 것은 몸의 생기만이 아니다. 사회의 일원이 될 꿈을 품고 자신의 가능성의 크기에 매달렸던 그들은 결혼과 출산과 양육이라는 여성의 생애주기를 통과하며 더이상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호우」). 이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며 마음이 늙는 상태에 도달한 듯도 하다. 하지만 앞서 나이든 몸의 서사가 소멸되지 않는 생기를 보여주었듯 마음 또한 그럴 것이라고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가족서사의 확장과 문학의 힘
이번 소설집에서는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흰 눈과 개」 「아주 환한 날들」은 평생 일한 직장에서 은퇴하고 자식들은 독립한 시기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딸과의 깊은 오해를 풀지 못한 채 소원한 관계를 오래 지속하고 있다.
두 소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리는 여러모로 겹쳐 보인다.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몫까지 대신하려는 듯 자영업자로서 억척스럽게 가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해왔고, 「흰 눈과 개」의 화자 역시 가족의 주된 생계 부양자로서 직장에서의 고통을 감내해왔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피붙이와의 정서적 유대를 지속하는 데 실패한 인물들이다.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근대적 핵가족 내에서 가장의 역할을 담당한 아버지의 자리까지 감당하는 데서 두 작품 모두 부녀관계 서사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기도 하다.
모녀관계의 갈등을 다룬 여성작가의 소설들이 하나의 영역을 이루며 ‘K모녀서사’라는 명칭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에 비하자면 부녀관계의 갈등과 친밀성을 특별히 다루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문학 내에서 이런 현상은 가부장적 질서의 퇴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생계 부양의 역할을 포함해 더이상 가족 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아버지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서 이러한 면모는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제 이전 작품들 중에 세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은 대부분이 딸이나 손녀의 입장에서 윗세대를 보는 이야기였어요. 그런 이야기를 여러편 쓰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른 입장, 윗세대의 관점에서도 이야기를 해보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또 이제껏 모녀의 갈등을 주로 다뤘다보니 다른 젠더의 가족구성원이 겪는 갈등도 들여다보고 싶어져 「흰 눈과 개」를 쓰게 됐어요. 부모세대는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나이대이고 심지어 저는 아이를 기른 경험도 없기 때문에 많은 부분 짐작으로 써야 했고, 그래서 조심스러운 마음이 컸어요. 몰라도 일단은 써보자 하는 마음이 나와는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하는 것 같아요.
담백한 답변이었지만 문학의 본질과 관련한 깊은 의미를 품고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가 아니면 말하기가 극히 조심스러워진 근간의 상황은 문학이 오랫동안 해온 적극적 상상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면모가 없지 않다. 당사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든 상황에 대해서든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말은 반 정도만 정확할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착각과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존재들이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때론 망상과 한끗 차이일지 모른다. 「흰 눈과 개」와 「아주 환한 날들」의 화자가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합리화를 공고히 하면 할수록 딸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듯이 보이는 이유도 그렇다.
사적 영역과 공적 세계 역시 본래 뚜렷한 구분선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 경계를 넘어서서 상상하고 사유하고 형상화하는 일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면, 문학은 다른 이의 삶을 적극적으로 상상함으로써 공적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 우리를 더 연결된 존재로 만들 수 있다. 문학은 사실에 기반을 두되 사실 이상의 것을 허구적으로 형상화할 힘을 갖기에, 문학에서는 더 많은 갈등과 더 많은 타자들에 대한 상상이 값진 일이 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그 인물의 목소리와 시선을 성급히 재단하지 않는 일도 필요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흰 눈과 개」와 「아주 환한 날들」에서 딸의 자리의 목소리가 거의 들려오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소설들에서 딸의 자리는 듣는 자리가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열심히 들어줄 때 우리는 무언가를 더 꺼내어 이야기해 보이는 존재라는 점을 작가는 중요하게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경유하는 진실
백수린 소설에서 문학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장치 중 하나는 거짓말이기도 하다. 좀더 과감하게 말해보면 그의 소설은 사실만으로 소통이 가능한가, 사실만으로 쓰인 서사가 가치있는가를 질문한다. 첫 장편 『눈부신 안부』에는 타국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2030 여성노동자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자리한다. 하지만 한 인터뷰3에서 자신과 또래인 주인공이 앞선 세대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였으면 하는 바람과 참사의 유가족이 그 딱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던 마음이 합쳐져서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을 보고 나는 후자의 마음이 궁금했다. 1995년 대구에서 일어난 가스폭발사고를 상기하게 하는 사건으로 ‘해미’는 언니를 잃는다. 이 사고 이후 해미의 가족은 더이상 이전의 삶의 방식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의 중심서사는 유학을 결심한 엄마를 따라 큰이모가 살고 있는 독일로 이주한 이후 해미가 만난 파독 간호사 ‘이모들’의 이야기를 따라서 전개되지만, 한편으로 주목할 점은 참사 이후 가족의 해체와 구성원들의 심리적 어려움이다. 유가족이나 피해자 가족이라는 호명은 이들의 삶에 무겁게 덧씌워지는데 소설은 그렇게 위축된 마음이 위선과 위악을 낳는 방식을 또한 신중히 그려 보인다.
그 시절 나는 엄마에게 무척 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당시 내가 한 거짓말은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것들이었으니까.(『눈부신 안부』 33면)
해미는 사고 이후 엄마에게 상시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상처 입은 부모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 매일의 안부를 전하는 것이다. 백수린 소설에서의 거짓말은 기대와 욕망을 품은 말이고 현재의 문제를 가상적으로나마 해결하는 말이다. 해나가 거짓말로 쓴 편지가 죽음을 앞둔 ‘선자 이모’를 더 살게 하는 것, 그 편지가 마침내 이모의 첫사랑에게 전해지는 것, 이후 세간의 시선과 오래 떨어져 지낸 시간으로도 훼손되지 않았던 그들의 사랑이 또한 대체되지 않는 사랑(가족)을 잃은 제삼자에게 전달되는 것. 이들 장면은 눈부시지 않을 수가 없다.
저에게 ‘거짓말’의 반대말은 ‘사실인 말’이고, 진실은 그 사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거짓말에 늘 관심이 많았어요. 거짓말을 경유해서 가닿게 되는 진실이라든지, 거짓말에 의해서 유지되는 관계들 같은 것에요. 저는 거짓말이 소통에 있어 중요한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제 소설에서는 사실적, 객관적 그런 말들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들을 옹호하는 언어가 거짓말인 셈인 듯해요.
연결하는 눈과 연대하는 삶
마지막으로 연작 작업에 대해서 물었다. 「호우」 「눈이 내리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에는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학교 유적 답사 동아리에서 만난 이들은 사랑과 질투, 우월감과 패배감을 나눠가지며 한 시절을 치열하게 함께 보냈지만, 이후 먹고사는 일의 분주함으로 연락조차 하지 못하고 지낸다. 누군가는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 다른 누군가는 미혼인 채 늙고 병든 부모를 부양하며 제각기 너무나 다른 삶의 자리에 놓인 이들은 우연한 기회로 같이 여행을 가게 된다. 오래 다른 삶을 살아가던 여성들을 한데 불러모아본 이유가 궁금했다.
세 소설이 애초에 연작으로 기획된 작품은 아니었고 소설집을 묶으면서 연작으로 만들 생각에 인물들에게 이름을 새로 붙이고 조금씩 수정을 했어요. 「눈이 내리네」를 쓰는 내내 「호우」에서 다 못한 이야기가 있어서 이어서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느낌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를 쓸 때까지 계속됐어요. 작품집을 묶으려고 세 소설을 다시 읽다보니, 이들을 연작으로 만들면 내가 원래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가 좀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보통 저는 단편을 쓸 때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최대한 깊이 들어가서 집중적으로 보고, 그것을 하나의 장면을 통해 집약적으로 이야기하려는 편이에요. 한 장면을 세밀하게 세공하는 게 저에게는 단편을 쓸 때 중요한 작업이었거든요. 「호우」와 「눈이 내리네」를 쓸 때는 그보다 인물의 삶을 긴 호흡으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긴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답변을 듣고 보니 세번째 소설집(『여름의 빌라』)을 출간한 즈음의 인터뷰4에서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질문자는 백수린 소설에서 회고적 구성을 한 작품들이 눈에 띈다는 지적과 함께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현재의 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현재는 유지되지 않는, 서로 처지가 달라지며 사그라든 관계가 잔상처럼 남는다고 말했다. 이에 백수린 작가는 과거를 복기하고 재해석하는 게 타인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라고 생각하며 소설을 썼다고, 우리는 타인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밖에 없지만 또한 우리에게는 “실패한 서사를 복기하는 능력”이 있다고 답했다. 실패하고 복기하면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는 일이 우리의 현실을 좀더 나은 쪽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믿음이 오랫동안 소설쓰기의 동력이었다는 말일 테다.
전체가 하얗게 비어 있는 화폭 한가운데 요나는 아주 작은 글씨로 단어 하나를 써놓았는데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과연 그것을 ‘솔리테르solitaire, 고독’라고 읽어야 할지 ‘솔리데르solidaire, 연대’라고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작가는 오래전 한 단편에 까뮈의 위와 같은 문장을 인용해두었다(「꽃 피는 밤이 오면」, 『폴링 인 폴』 235면). 이번 소설집에 실린 「봄밤의 우리」에서도 까뮈의 작품이 언급된다. 그러고 보면 까뮈의 소설에서 종종 이상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던 빛과 백수린 소설의 빛이 닮아 있는 듯도 하다. 까뮈 문학의 키워드라고 할 만한 인간 삶의 부조리를 백수린 식으로 해석하면 고독과 연대에의 감각을 동시에 간직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이방인의 감각을 갖고 있기 일쑤이고, 개별적 몸의 고유한 감각과 느낌 속에 깊이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그 감각을 작가는 밝음과 어둠의 속성이 절반씩 깃들어 있는 시간인 ‘봄밤’이라고 쓴다. 소설은 바로 그 희미한 빛에 기대어 ‘모든 것’을 말해보는 고투로 시작되고, 고투 속에서 기나긴 대화의 시간과 서로의 삶의 자리를 공유하는 마음이 발동한다. 그 마음이 가닿은 장소가 궁금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소설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삶의 진실 같은 게 있는지, 다소 거창하기도 하고 농담 같기도 한 질문을 건넸다.

제가 소설에 빛이라고 쓴 것, 그 빛을 진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금 영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신비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모르잖아요. 이번 소설집에 질문하는 형식의 문장이 많이 나와요. 가령 “그것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65면) 같은. 왜 살고 왜 죽는지, 심지어 왜 사랑에 빠지는지 모르는 채로 우리는 살아가잖아요. 삶에서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도 대개는 웃으며 살고 있고. 세상은 알 수 없는 것투성인데, 그 알 수 없는 무엇이 삶의 진실이고 달리 말해 신비인 것 같아요. 사실은 이 소설집에 묶인 소설을 쓰는 내내 도대체 그게 뭘까 정말 궁금했어요. 왜 우리는 이렇게 슬프고 이렇게 허무하고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운데도 계속 살아갈까요. 그걸 알고 싶어서 썼는데 끝내 알지 못한 채로 소설을 마무리하게 됐지만, 그럼에도 삶을 지속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름다움과 신비이고 곧 진실인 것 같아요. 또 진실은 알 수 없는 와중에 알 것만 같은 어떤 찰나에 존재하겠지요. 진실은 순간적이고 미끄러지는 거고요. 그러니 영원히 포착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해서는 감각으로만 말할 수 있을지도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거짓말의 도움을 받아가면서요.
대화 중에 ‘사람, 사람들 참 모르겠다’는 엉뚱한 화제로 이야기가 길을 잃은 적이 있는데 그때 작가는 신에 대해 말했다. 신이 인간에게 뭔가를 줬다면 아마도 분투하는 마음일 것 같다고. 뭔가를 이해하려고, 사랑하려고, 계속 살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분투가 언제나 미스터리였다고 말이다. 짐짓 무거운 이야기 끝에 우리는 서로 어색한 기운을 누르려는 듯 크게 웃어 보였지만 사실 그 순간, 내 마음에도 동조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크게 일렁였다. 분투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한 인간을 그 자신이게 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힘이 아닐까 싶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나의 마음을 숨김으로써 그 자리를 비추던 이야기의 빛에 더 몰입하고 싶었다. 그 순간에 빛이 아주 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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