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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소란한 고요와 고요한 소란

 

 

김태선 金兌宣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불가능과 공동체」 「밀레니얼 세대 작가의 삶」 등이 있음.

kimloup@naver.com

 

 

 

시인 김수영은 산문 「삼동(三冬) 유감」(1968,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18)에서 “주전자의 조용한 물 끓는 소리”가 “『대통령 각하』와 「25시」의 거수 같은 현대의 제악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를 일컬어 김수영은 “조용히 끓고 있다”거나 “갓난아기의 숨소리보다도 약한 이 노랫소리”라고도 표현했지만, 이는 또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소란이 씨앗 싹틔우려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와 같은 힘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판본으로 재현된 ‘대통령 각하’를 거꾸러뜨리는 모습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광장에서 여럿이 모여 다양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한마음으로 움직인 모습은,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소란과 한곳으로 모이는 고요가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소란과 고요, 서로 극단을 향해 치닫는 소리의 운동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 둘의 만남은 얼핏 어긋남으로 표상된다.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자 질베르 씨몽동(Gilbert Simondon)이 개체의 발생이 긴장되고 과포화된 에너지 체계로서의 준안정적 평형에서 일어남을 밝힌 것처럼, 지극한 고요함 가운데에는 어떤 끓어오름이 있다. 마찬가지로 들끓는 소란 역시 그 바탕에는 고요함이 자리한다.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자리해 있기에 둘이 빚어내는 겹침과 차이의 운동에 의해 시적 리듬이 일어나게 된다. 이번 계절에는 어긋남에서 우리 존재의 겹침을 살피는 가운데, 하나는 소란 속에서 고요에 이르려는 노래를, 다른 하나는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제 안에 들끓음을 품은 노래를 살피고자 한다.

 

 

고선경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열림원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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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에서는 ‘여름 오후의 슬러시’와 같은 시원한 느낌을 만날 수 있었지만 두번째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에 이르러 고선경 시의 언어는 뜨겁게 끓어오르는 듯하다. 끓어오르는 말들이기에, 여러 방향으로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서로 부딪히며 힘있게 터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집 첫 자리에 놓인 시 「신년 운세」에서, 노래하는 이는 “남을 돕는 팔자”라는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려는 듯 “잘 봐/내가 얼마나 쉽게 슬퍼하는 사람인지/얼마나 화를 잘 내는지”라며 제 안의 들끓음을 쏟아낸다. “슬플수록 사나운 표정을 짓게 되는 내가 있고/사나운 표정을 해명하고 싶어 하는 내가 있다”고 함으로써 하나로 수렴할 수 없는 넘침을 표현하기도 한다.

한가지 길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에, 시의 목소리는 때로 우리에게 어긋남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고선경의 시에서는 어긋남 혹은 불일치의 조건이 반드시 부정적인 정서나 상황으로 이어지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같은 시 「신년 운세」에서 “월급도 못 주는 회사를 관뒀을 때 가스가 끊겼을 때 이십육 인치 캐리어 질질 끌고 남의 집 전전했을 때”와 같은 불행을 전하면서도 또한 “내가 태어난 게 대길인 줄이나 알아”라며 삶을 긍정하는 자세를 취한다. 이렇게 삶을 긍정하는 힘은, 처음엔 부정하고자 했던 “남을 돕는 팔자”를 자신의 것으로 다시 전유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그러니까 이 시 꼭 사서 간직해/알았지?”라며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시를 행운의 부적으로 건네는 유쾌함에까지 이른다.

“우유 거품 아래에는 커피가 아닌/다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도 같다”(「카푸치노 감정」)고 했던 것처럼, ‘나’의 노래에는 또한 그 말을 건네받을 타자들이 함께한다. ‘너’ 또는 남영, 지민, 소은, 영은 등 여러 이름을 호명하면서, 이들과 함께 말을 나누기에 들끓게 되는 것이다. “너무 오래된 상상은 기억과 잘 구분이 안 돼”(「알루미늄 빗방울」)라는 고백처럼 이들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누군가인 동시에 ‘나’가 만들어낸 상상과 구분되지 않는 존재자들로 상상과 기억과 믿음을 넘나드는 생동력을 시에 부여한다. 그중에는 「믿을 수 없이 가까운 믿음」에서 상상으로 만들어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낸 ‘소은’이라는 인물도 있다. 소은은 ‘나’가 되고 싶은 모습을 투영한 인물이지만, 그러한 바람과 어긋나는 요소들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경품에 당첨되는 행운을 지닌 동시에 그 상품이 불량인 불행을 떠안는가 하면 “천재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다가 사후에 유명해진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나’ 역시 그러한 역설을 존재론적인 조건으로 지닌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남영」에서는, 남영과의 대화 가운데 “나는 진정한 서울 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외지인//이 도시 속 나의 정체성”을 노래하는 대목이 있다. 이러한 인식은 「늪이라는 말보다는 높이라는 말이 좋아」에서 “서울에 살지만 서울을/경험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고개를 저을 것이다”라고 했던 외지인의 감정과 연결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늪이라는 말”을 “높이라는 말” 전환하는 힘찬 태도에서 엿볼 수 있듯, 고선경의 시는 가난이나 소외 등 현실적 조건에 짓눌리기보다는 오히려 그같은 이질성을 ‘너’라는 타자와 함께하는 힘으로 전유한다.

고선경의 시는 불일치의 상태 또는 감정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것과는 다른 움직임을 펼치도록 하는 힘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시집의 마지막에 자리한 시 「팬레터—12월 31일」은 언제나 함께하리라 생각했던 ‘너’에게 쓰는 팬레터이다.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죽었다”라는 시의 첫 행에서 짐작되듯 ‘너’를 향한 편지는 어긋남을 존재의 조건으로 떠안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일 터이다. 그런데 시는 이러한 어긋남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웃겨 사실 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할지도 모르는데”라며 죽음에 대한 통념과는 다른 새로운 감각을 전한다. 어긋남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의 엇갈림을 이르는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만나서 겹치는 자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렇게 고선경의 시는 분리된 것이라 여겼던 삶과 죽음이 그 차이를 유지하며 어울리는 열린 장을 이루어낸다.

엇갈린 곳에서 어긋남을 노래하기에, 이 시에서 ‘나’는 ‘너’와의 추억들과 함께 “미래의 축하할 일들 모아 모아서 너의 긴 꿈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싶”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시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걸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기대하자 더 많은 걸”이라고 선언한다. 주어진 조건에 머무르지 않고 펼쳐낼 일들을 미리 그려봄으로써 ‘너’와 ‘나’ 사이의 소진되지 않는 힘을 표현한다. “여기 남아 내가 할 일”로 “시 열심히 쓰기, 사랑 열심히 하기” 등의 목록을 작성하며 그에 “네가 꿈 이루는 거 똑똑히 지켜보기”를 포함한다. ‘너’의 꿈은 또한 시인으로서 ‘나’가 이루어야 하는 꿈이기도 하다. 고선경에게 시는 함께 서로의 차이를 나누며 현실을 새로운 것으로 열어가는 일이다. 그렇기에 고선경 시의 목소리들은 소란스럽게 빛을 내며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그 끓음 가운데 ‘나’와 ‘너’가 만나 서로 어긋나며 또 겹치기도 하며 서로의 존재를 나눌 것이다. 충분히 끓어넘치고 나면 고선경의 시는 “침착하게 식어 가기/최선을 다해 가라앉기”(「카푸치노 감정」)를 배우며 우리를 또다른 곳으로 초대할 것이다.

 

 

박준 『마중도 배웅도 없이』(창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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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에서 발견하게 되는 어긋남의 자리들을 박준의 세번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에 수록된 시편들에서도 만날 수 있다. 물론 지나간 것들의 자취를 살피며 그러한 것들이 지금 여기에 일으키는 영향에 관해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의 시간을 미래로 잘 전하고자 하는 박준 시 언어의 고유한 태도는 이번 시집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다만 전작으로부터 이어져오는 흐름에서 달라진 점 하나를 고른다면, 시간과 시간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어긋남에 보다 오래 눈길이 머무른다는 것이다. 한곳 한곳 오래 머무는 시선을 전하는 것이기에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사뭇 고요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여러 곳에서 밀려드는 힘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이루어져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맹렬하게 끓는다. 하나와 다른 하나가 어긋나거나 엇갈리는 지점을 짚어가며 그곳에서 조우하게 되는 차이와 겹침의 움직임을 노래로 옮긴다. 그 대표적 사례를 시집의 첫 자리에 놓인 시 「지각」에서 만날 수 있다.

「지각」의 노래하는 이는 첫 연에서 ‘나’의 슬픔과 미안과 잘못이 자리한 장소를 밝힌다. 그런데 시간을 달리하는 두번째 연에선 각각의 것들이 첫 연에 있던 곳과는 다른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를테면 첫 연에서 “나의 슬픔은 나무 밑에 있고”라고 하였던 것이, 두번째 연에선 “나는 비탈에서 슬퍼한다”고 하며 그 장소를 옮겨 간 것이다. ‘있음’이라는 정적인 상태에서 ‘하다’와 같이 운동하는 것이 되었기에 둘은 장소를 달리하며 어긋남을 만들어낸 것일까. 그런데 이는 단지 정지와 운동 사이의 엇갈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각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따르기에 발생하는 어긋남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마지막 연에서 “이르게 찾아오는 것은/한결같이 늦은 일이 된다”라고 노래하게 되는 것일 터이다.

모든 만남은 항상 이르거나 늦다. 어긋남과 엇갈림은 「마름」에서 “이제 이곳 해안에도/여름 물이 마르고/가을 찬물이 들어옵니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지나가는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이 잠시 겹쳐 흐르는 어떤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른 방향성을 띤 운동이자 시차(視差/時差)를 달리하는 움직임들이 한자리에서 만나며 어긋남이나 엇갈림으로 나타난다. 「마름」에서는 그렇게 말라가고 새로 들어오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물을 바라보며 “한번 옮겨 간 마음”을 “다시 거두어들이기/어렵다는 사실을 새로 배우”는 일에 대해 노래한다.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더라도 그 자리에는 떠나간 시간이 모두 거두어가지 않은 것들이 남아서 서로 엇갈리며 또 겹치게 된다.

시간의 엇갈림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우리 만남 역시 서로 어긋난 가운데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살면서 나를 아껴준/몇몇 이들도 한번쯤/이곳을 다녀간 모양입니다”(같은 시) 그렇게 노래하며 박준 시의 목소리는 먼저 떠나간 시간이 있던 자리에 남겨진 자취를 눈으로 짚는다. 유한한 영역만 볼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무언가가 떠나고 난 장소는 빈곳으로 표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는 지나간 것들이 남긴 것들을 바라본다. 「능곡빌라 3」에서 지훈이 수학여행을 떠나 “지호는 어젯밤/태어나 처음으로/혼자 잠을” 자야 했음에도 홀로 있지 않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까닭도 제 곁에 남아 있는 무언가와 함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남아 있는 것을 일컬어 마음이라 해도 좋겠다. 박준의 시가 시간의 엇갈림 또는 어긋남이 이루어지는 곳에 오래 눈길을 두는 까닭은, 그곳에 ‘나’와 ‘너’가 겹치며 서로를 생각게 하는 마음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아침 약」에서 노래하듯 그곳에서는 또한 “멀리서 온 것과/더 멀리 떠나야 할 것이/한데 뒤섞”이고 있다. 「손금」에서는 ‘손금’으로 나타난 어긋남의 자리를 가리켜 “이곳에서는 흰 것이 검은 것을 만나. 그러고는 순서도 없이 외연을 잃어버려”라고 말하며 “마중도 배웅도 없이 들이닥치는 것들”을 만나게 된다. “어떤 순서가 있다고 믿”는 일이 우리 삶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무언가 떠나고 난 뒤의 자리는 더이상 결여나 상실로만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벽」에서 시의 목소리는 “벽을 오래 보는 것은/이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전한다. “여기서부터 저쪽까지 보면 무늬이지만/반대에서 시작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벽’은 이제 ‘나’에게 나아갈 길 혹은 바깥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존재로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지 않을 거라 말하는 대신/벽에 난 금을 눈으로 따라 그어”봄으로써, 우리를 가로막는 것으로 보였던 일방향적인 시간의 운행에 틈을 내고 그 흐름을 어긋나게 한다. “여름 내내 자주 입으며/걸어두었던 윗옷들은/장에 넣어두지 않”으려 하는 일 역시, 지나간 시간을 우리로부터 떠나 사라진 것과는 다르게 대하려는 태도이다. 미래 역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멀리 오는 가을과/더 멀리 오는 겨울”이 된다. 지금 여기로 다가오는, 엇갈리며 겹치며 열린 시간이 된다. 그 때문일까. 『마중도 배웅도 없이』의 마지막에 자리한 시 「팔월」은 누군가의 부재를 전하는 것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너는 팔월에도 없는 사람이다” 이 말은 또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노래를 듣게 될 당신을 부르며 자리를 연다. 우리는 그곳에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자신을 포개며 서로의 존재를 나누는 소통에 이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