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소설이 그리는 파열과 접속

 

 

민선혜 閔宣惠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돌봄의 낭만화를 벗어던지는 문학」 등이 있음.

tjsgp9542@gmail.com

 

 

 

유달리 길게 느껴졌던 지난 겨울과 봄을 지나며 탈취되었던 언어를 살펴보는 일은 왜곡된 현실을 마주하고 오염된 언어에게 제 뜻을 되돌려주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니 문학은 응시하고 질문해야 한다. 일상 속에서 심상하게 왜곡되어 있는 장면들을 바라보고 질문하는 일, 그 과정을 추적하고, 언뜻 매끄럽게 보이는 표면 아래에 가려진 이면을 상상하는 일. 그것이 현재 문학의 역할일 것이다.

성해나와 박선우의 소설은 현실의 여러 갈등을 그리며 ‘정말 그러한가’ 질문한다.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가, 정말 알지 못하는가, 이것들을 정말 확신할 수 있는가 묻는다. 두 소설은 현실의 표면과 이면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니지만, 그 감각의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삶의 매끄러움을 조망할 것인가, 혹은 단절되고 끊긴 지점을 조망할 것인가. 삶을 파헤치는 방향이 서로 다를지라도 두 작품은 청년세대의 눈에 비친 왜곡된 삶과 훼손된 장면들을 나란히 이어 펼쳐 보임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낙차를 의연히 꺼내놓는다. 그렇기에 이 두편의 소설을 읽는 일은 삶에서 마주하는 표면과 이면을 이은 울퉁불퉁한 솔기를 만져보는 일의 다름이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계가 매끄럽게 이어진 곳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환기하게 된다.

 

 

성해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

 

208_380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는 균질하게 봉합되어 있던 우리 시대의 표면을 해체시켜 그 이면을 대범하게 열어젖힌다. 전작 「OK, Boomer」와 「오즈」 등에서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갈등과 연대를 보여준 바 있는 성해나는 『혼모노』에서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세대를 조망한다. 세대 교체 혹은 갈등을 그리는 것을 넘어서 무엇이 우리 삶의 진실을 지시하고 있는지를 짚어내며, 그 이면에 존재하는 ‘진짜와 가짜’에 대한 감각을 섬세하게 묘파한다. 이는 무속신앙, 태극기부대, 남영동 대공분실 등 지극히 한국적인 장면들의 포착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어 우리로 하여금 현실과 조금 더 밀착된 자리에서 소설을 읽도록 만든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연상케 하는 고문시설의 설계과정을 그리는 소설이다. 내무부장관의 지시로 석달 안에 설계를 마쳐야 하는 ‘여재화’는 자신의 야망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만만한 제자 ‘구보승’을 건물 설계의 조수로 삼는다. 여재화에게 건축적 이상 혹은 건축적 야망이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과감함”(164면)이라면 구보승의 건축적 이상은 지극히 현실에 기반하여 “철저히 인간을 위해 이 공간을 설계”(193면)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지향은 빛과 희망에 대한 표면과 이면의 조명으로 나아간다. ‘고문실’이라는 공간에서 느낄 인간의 구체적 공포를 상상하며 설계를 이어나가는 제자의 모습을 통해 여재화는 자신이 생각했던 빛과 희망의 또다른 이면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고민 끝에 넣은 고문실 창문을 두고 구보승은 빛을 보면 희망과 열망이 생긴다며, “흔들렸던 신념이 굳건해질 수도 있”(181면)다고 반대한 것이다. 여재화는 결국 건축대장에 자신이 아닌 구보승의 이름을 적으며 자신은 “그런 걸 가르친 적 없”(193면)다고 되뇌지만 독자들은 여재화가 정말 그것을 가르친 적 없나 의문을 갖게 된다. 여재화 스스로가 기억하는 “야심으로 가득 찬 청년. 욕망의 불구덩이”(197면) 같던 자신의 모습과 어느 선배가 기억하는 “품이 넓고 욕심이 없”(196면)는 여재화의 모습은 ‘구의 건물’의 외부와 내부만큼이나 일치하지 않는 동시에 여재화가 알고 있던 구보승의 모습과 나란히 겹쳐지게 된다. 이처럼 평범해 보이는 외부의 모습과 치밀하게 설계된 내부를 가진 고문실은 매끄러운 세계를 위해, 갈등을 억지로 봉합하기 위해 강제로 사라지고 훼손되어야만 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목소리를 상상하게 만든다. 소설은 번듯한 건물 안으로 사라져야만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을 넘어 국가폭력에 공모한 이들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 스스로의 야만성과 그것을 건물 안에 묻어놓는 장면을 포착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균열에서 비롯한 표면과 이면의 낙차는 「우호적 감정」 등의 소설에서도 포착된다. 「우호적 감정」은 소서리 마을이 와해되었다가 이해타산적인 방식으로 봉합되는 과정과 스타트업에 입사한 중년 남성 ‘진’이 조직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챙기는 ‘나’의 모습을 병치시킨다. 이 과정에서 공생과 공정, 신뢰로 포장된 두 공동체의 이면이 드러나게 된다. 특히 ‘나’에 눈에 비친 진은 “외따로 떨어지거나 적응을 못하는”(207면) 모습으로 챙겨주어야 하는 대상이지만, 그를 향한 ‘나’의 안쓰러움이 무엇인지, 이것이 과연 효용이 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아, 이쪽은 과장, 저쪽은 사원, 나는 부장이라고 보면 돼”(237면)와 같은 말로 수평적 조직을 거부하는 진의 ‘부적응’을 철저히 계산적으로 활용하는 회사 대표의 모습은 수평적 관계인 척하면서 수직적 구조에 기대어 운영되는 스타트업의 이면을 드러낸다. 이로써 ‘나’가 생각한 “회사의 자율성과 공정성”(210면)은 현실을 감추기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이 폭로된다. 소설은 마을과 기업 공동체가 공정과 질서, 신뢰와 같은 말들을 오용하며 허약하게 유지되는 과정을 그려내며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호명되는 ‘호의’와 ‘믿음’과 같은 가치들의 허구성을 짚어낸다.

성해나의 소설은 때로 인물의 일부를 커다랗게 확대시켜 그의 단편적인 모습을 따라가게 하기도 한다. 가령 「스무드」는 한국에 대해서 무지한 한국계 미국인 ‘듀이’를 ‘태극기집회’라는 특수한 상황 속으로 밀어넣는다. 태극기부대에 대한 편견에 일부 기대어 전개되는 이 서사는 우리의 예상을 계속해서 배반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소설이 보여주는 태극기부대의 환대가 소통불능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듀이와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집회 참가자 ‘미스터 김’의 연대가 지시하는 바를 되묻게 만든다.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알지 못해도 괜찮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표면적 연대가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지점과 그것이 왜곡되어 표출되는 ‘이승만광장’과 같은 언어들을 짚어내는데, 이 과정 속에서 듀이가 추앙하는 ‘스무드’(smooth)한 세계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만 그 존재를 지켜나갈 수 있게 된다.

성해나의 소설은 매끄러운 세계의 표면을 파열시킴으로써 의도적으로 누락되고 감추어진 이면의 장면들을 ‘세대갈등’을 통해 포착해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세대갈등 자체라기보다 한국적 모순이 세대갈등을 통해 융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모순을 포착하는 렌즈로서 세대론적 시각이 동원되는 과정은 우리가 갈등을 인식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현실의 압력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이러한 점이 가장 잘 드러난 소설이 바로 중년의 박수무당 ‘문수’와 신애기의 갈등을 그린 「혼모노」이다. 소설은 문수와 신애기의 대립을 통해 세대의 교체와 갈등을 드러내는 동시에 ‘장수할멈’이라는 존재를 둘 사이에 개입시킴으로써 그러한 갈등과 경쟁을 주조하는 신자유주의 질서 혹은 능력주의를 상기하게 만든다. 소설은 세대갈등을 경유하여 이 세계를 분열에 이르게 하는 외부적 압력을 분명하게 지시한다.

이처럼 성해나의 소설을 읽는 일은 마치 우리의 세계를 비추던 거울이 한순간 느닷없이 깨지는 경험을 하는 것과도 같다. 파경에 비친 세계의 풍경은 매끄러운 거울로는 볼 수 없었던 삶의 틀어진 각도를 마주하게 만들고, 그 아래에 존재하는 비균질한 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소설은 보이지 않는 곳에 깊이 침잠해 있으면서 분명히 그 구조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이면의 진실들을 꺼내 보임으로써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무화시킨다.

 

 

박선우 장편소설 『어둠 뚫기』(문학동네 2025)

 

208_383

『혼모노』가 표면을 해체시키거나 까뒤집는 방식으로 표면과 이면을 잇는 세계의 솔기를 꺼내 보인다면, 박선우의 『어둠 뚫기』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엄마와 ‘나’의 마음을 촘촘히 박음질해 그 도드라진 솔기를 만져본다. 이 소설은 엄마와 아들인 ‘나’의 관계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이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세대갈등을 이야기하는 소설로도 읽어볼 수 있겠지만, 세대론만으로 포착되지 않는 보다 조밀한 차원으로 두 사람을 조명한다. 이 소설은 엄마의 ‘미싱’과 화자의 ‘글쓰기’를 나란히 겹쳐놓음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두꺼운 벽과 어둠을 아주 세밀하게, 때로는 징그러울 만큼 핍진하게 뚫고 들어가 이것을 다시금 이어지도록 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의 본령을 생각하게 만든다.

소설은 사십년 가까이 미싱사에서 일한 엄마와 소설을 쓰며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동성애자인 30대 남성인 ‘나’가 서로를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이야기로 범박하게 요약될 수 있다. 그렇기에 서른일곱살에 이른 ‘나’가 네다섯살로 기억하는 생의 최초의 시퀀스까지 되짚어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역사를 다시금 짚어보는 일은 곧 둘 사이에 누적되어온 이해와 오해의 역사를 살피는 것이 되고, 이것을 필연적으로 다시 쓰는 작업을 동반한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래서 나와 엄마 둘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엄마를 이해해보고 싶었다”(13~14면)고 말하는 이 퀴어 화자가 자신을 이해하는 일보다 엄마를 이해하는 일에 이토록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집 앞 횡단보도만 건너면 있는 마트가 아닌 삼십분 넘게 걸리는 시장에 가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혹여나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오다가 넘어질까 걱정하는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게이 아들에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곤”(25면) 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엄마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도 엄마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경증 청각장애를 진단받고 나오는 길에 지원금으로 가방을 사겠다는 엄마, 사십년 넘게 일한 미싱사에서 퇴직금을 한푼도 받지 못하고 나온 상황에서 쌍꺼풀수술을 받는 엄마,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기 싫은 것인지 할말이 없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침묵으로 일관”(131면)하는 엄마를 끝내 다 알지 못한다. ‘나’도 엄마를 이해할 수 없고, 엄마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무수한 종류의 벽이 가로놓여 있다”(24면)는 사실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고, 늘 그러한 상태로 살아왔으며, 살게 될 것이었다. 앞으로도 쭉”(43면)과 같은 자기부정으로 이어진다.

박선우의 소설에서 특기할 점은 엄마의 청각장애와 ‘나’의 퀴어함이 교차되고 있다는 것이다. 엄마가 소리를 잘 듣지 못해 “적당히 넘겨짚기 어려운 상황이나 낯선 이들 틈에서 홀로 당황해하고 전전긍긍했을 순간들”(54면)과 ‘나’가 호모소셜 안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미끄러지던 순간들은 나란히 겹쳐진다. 그러나 ‘나’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화상자국 같은, 언제나 우툴두툴하게 남아 있는 흉터 같은 비가역적 손상”(93~94면)으로 여겼던 것과 달리 엄마는 자신의 장애를 흉터나 손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신체적 훼손 앞에서도 지원금으로 가방을 사겠다는 엄마의 모습에 “순간 오만 정이 다 떨어졌으나” 불행을 마주하는 방법에는 이렇게 “훌훌 털어버”(56면)리는 법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은 곧 화자가 자신의 불행을 마주하는 또다른 가능성을 열어낸다.

이러한 자기 긍정과 부정의 연속 안에서 엄마의 인식이 그 자신의 인식과 한몸처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이 소설 속 화자의 독특한 지점이다. ‘나’가 이토록 엄마의 이해와 수용을 희구하면서도 80년 광주를 담은 영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고 마음의 벽을 쌓으며 엄마를 지극히 탈역사적인 ‘개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 역시 특징적인 면이다. 자기 부정과 긍정, 자신을 둘러싼 엄마라는 세계의 표면과 이면을 짚어내는 과정에서 화자는 사회역사적 존재가 아닌 그저 지극히 한 ‘개인’에게 무한히 이해받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나’의 이해에 대한 희구는 작가가 밝힌 바와 같이 ‘나’가 “엄마에게 영원히 ‘애새끼’로 남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249면)끼기 때문일까. 어째서 ‘나’는 이토록 행복하지 않은 사람처럼 읽히는 것일까.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기보다 ‘애쓰는’ 사람에 더 가깝다. 이 애쓰는 과정은 외로움과 고통을 동반한다.

엄마에 대한 기억을 늘어놓는 일과 엄마의 말들을 되뇌어보는 일은 엄마의 삶과 ‘나’의 삶을 이어보고자 애쓰는 과정이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이면으로 침잠하는 행위이다. 이면에서 바라보게 되는 표면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엄마가 아버지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그것이 엄마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식”(161면)일지도 모른다는 것, 어릴 때 엄마의 손을 잡고 행복했던 순간마저도 “엄마가 달아나고 싶어한다는 것을”(184면) 알아채고 있었다는 것, 엄마는 “그런데도 살았다”(171면)는 것, 이러한 것들이 울퉁불퉁한 솔기를 미처 감추지도 못한 채 이어지고 있다. 마치 엄마의 손가락에 남은 회백색의 상흔처럼.

남자를 좋아한다는 화자의 고백이 엄마에게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을 때, ‘나’는 “원래의 형태에서 살짝 휘어져버렸”(62면)지만 “그런 나로 인해 엄마 역시 조금은 휠 수밖에 없었”(62~63면)다. 마찬가지로 “뼈마디가 미세하게 뒤틀린 것처럼 보이는 집게손가락, 나무껍질처럼 바싹 메마른 손바닥 피부, 군데군데 옹이처럼 박인 굳은살”(170면)이 있는 엄마의 손을 바라보는 일은, 엄마의 피와 살점과 영혼이 흩뿌려져 하나로 미싱된 무수한 천들을 상상하는 일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휘어지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불이해를 경유해 생생하게 남겨지는 상호 휘어짐, 이것은 “분석하거나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는 있어도 결코 해소할 수는 없는” “원망”(74면)에서 나아가 엄마라는 불가해한 세계의 표면을 슬픔과 함께 “끌어안은 채 살아가”(209면)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화자의 글쓰기는 자신의 퀴어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동시에 조각난 자신의 마음을, 엄마와 자신을 이어 붙여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치 엄마가 무수한 천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미싱작업 속에서 온몸이 꿰뚫리는 듯한 고통을 때때로 느낀 것처럼 화자 역시 글 속에서 온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낄 테지만 그 과정을 거쳐 파열된 부분들은 서로를 향한 휘어짐으로써 맞물릴 수 있다.

그러니 표면 아래의 이면으로 침잠하여 그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솔기를 바라보는 일은 어떤 이해의 완성에 도달하는 일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일에 더 가깝다. 두꺼운 벽과 짙은 어두움을 풀어내서 누더기인 벽과 어둠으로 다시 봉제하는 과정에는, 너무 두껍고 어두워 보여서 만져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들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퀴어한 주체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프고 늙은 엄마의 모습, 그것을 온몸으로 껴안는 아들의 이야기는 타인의 훼손을 ‘치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훼손과 연결해보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서로의 고통을 뚫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두 사람을 성장하게 만든다. 소설은 모자의 성장에 동반하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은 채,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벽과 어둠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은 채, 촘촘하게 뚫린 바늘구멍 사이로 스며드는 미세한 빛을 조망한다. 아주 촘촘하고 따갑게 어둠을 뚫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