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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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상속행위로서의 비평과 한국문학의 보람

 

 

오연경 吳姸鏡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지구생활자의 시」 「자본주의 악천후와 이행의 감각」 「전진하는 시」 등이 있음.

korin2@hanmail.net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우리는 문학적 의제와 전국민의 관심사가 뜨겁게 접속하는 드문 현장을 경험했다. 2024년 10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가져온 문학계와 독서시장의 활기를 차분히 돌아보기도 전에 12월 초 도둑처럼 들이닥친 비상계엄은 어제의 독서가 오늘의 광장에서 빛을 발하는 “K문학과 K민주주의의 결합”1 노벨문학상 한강의 대표작에 대한 자상하고도 참신한 안내」, 백낙청TV 2025.3.28.]을 경험하게 했다. 내란세력이 퍼뜨린 온갖 오염된 말과 후안무치의 비논리가 정신의 호흡을 옥죄던 시기였지만, 문학작품 속 문장과 작가들의 성명은 광장의 피켓과 SNS의 파도를 타고 모종의 문학적 효능감까지 선사해주었다.

그러나 효능감보다는 위기감에 익숙한 문학계의 종사자들이 머쓱해지는 지점은, 전에 없는 한국문학의 활기가 해외의 권위나 정치상황에 의해 지펴졌다는 데 있다. 문학은 이미 와 있는 과거, 미래의 독자에 의해 현재화되기를 기다리는 과거이며, 그러한 현재화의 계기에 여러 외부요인이 개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비평에는 우연이나 바깥에 기대는 게으름이 용인되지 않는다. ‘상속행위로서의 비평’2은 끊임없이 읽고 평가하고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과거의 작품을 현재에 살아 있게 만드는 작업이다. 문학의 “상속은 읽고 생각하는 과정 자체인 터라 정신 차원의 수용”이며 “독자의 물려받음으로서의 읽기는 세상을 풍요롭게 하면서 작가와 작품의 현존을 증언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실천적 행동이기도 하다.3

상속행위로서의 비평이라는 관점에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김남주 시인 30주기를 기념하여 쓰인 두 글을 나란히 읽어보려 한다. 전자는 과거의 국가폭력을 서사화한 한강의 소설이 독자에게 스며든 경로를, 후자는 혁명과 저항의 한가운데에서 쓰인 김남주의 시가 독자에게 잘 들리지 않게 된 경로를 추적한다. 두 경로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역사의 어둠이 문학의 빛으로 이어져 독자에게 닿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한기욱 「한강 소설이 우리에게 오는 방식」

 

한기욱의 「한강 소설이 우리에게 오는 방식: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의 경우」(『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은 성별·세대별 차이나 근대/탈근대 소설의 구분법에서 벗어나 치열한 현실대응 및 참다운 새세상에 대한 탐구로 전개되어온 한국문학사의 연속성 안에서 한강 소설의 성취를 조명한다. 이 글의 미덕은 작가의 예술적 혁신과업을 위대한 창조적 정신에 기대기보다 작품이 독자의 삶의 곁으로 오는 방식에 수렴시켜 논구한다는 데 있다. 한국문학의 상속자는 일차적으로 작품을 읽고 수용하는 독자이며, 작가 역시 독자에서 출발하여 한국문학의 창조적 상속자로 거듭난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 소설이 우리에게 오는 방식’이라는 이 글의 기획은 상속으로서의 쓰기가 상속으로서의 읽기로 이어지는 장구한 문학실천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넉넉히 마련해준다.

이 글이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소설은 『소년이 온다』(창비 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이다. 두 작품을 분석할 때 저자가 공을 들이는 지점은 ‘혼/영혼’이나 ‘대리적 존재(더블)’와 같은 탈근대적 요소들이 단순히 미학적 실험으로 소모되지 않고 어떻게 “시대의 어두운 진실을 드러내려는 문학적 기획”(26면)에 복무하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 특히 『소년이 온다』를 보통의 재현주의 서사와 차별화된 “부름과 응답의 서사”(19면)로 분석한 것은 여러 면에서 주목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각 장의 다양한 서술자들이 ‘동호’를 ‘너’라는 2인칭으로 부르는 행위는 죽은 동호로 하여금 “그들 각각의 현재적 삶 속으로 ‘와서’ 더불어 존재하게”(24면) 만든다. 이로써 국가폭력의 희생자인 동호는 제3자로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뿐인 개별자 ‘너’로서 ‘나’와 관계 맺게 된다. 나아가 5·18 당시로부터 점차 현재의 시점으로 다가오도록 정교하게 배치된 시간구도가 부름의 서사를 뒷받침함으로써 “그날 그곳의 사건 면면을 독자로 하여금 ‘함께 느끼게’”(26면) 해준다.

『소년이 온다』를 부름과 응답의 서사로 본 한기욱의 독해는 작품의 가능성을 보다 풍부하게 열어준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불러 과거의 죽음을 재구성하는 구도는 그 역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죽은 동호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살고 있는 인물들을 불러 그들의 삶을 살리는 역설은, 에필로그의 ‘나’보다 광주로부터 더 먼 시간에 소설을 읽게 될 독자를 불러 응답하게 하는 식으로 반복된다. 한강 소설을 읽는 것이 때로 버겁고 힘들다는 호소는 이처럼 독자를 역사와 개인의 삶이 겹쳐지는 지점으로 소환하는 서사전략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한강 소설을 읽는 보람 역시 이 불편함을 수용한 끝에 도착한 응답의 자리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소년이 온다』와 여러 면에서 연결되어 있는 작품인 『작별하지 않는다』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두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혼/영혼’의 존재에 주목한 한기욱은 『소년이 온다』가 그것을 “리얼리즘을 심화하는 쪽으로 구사”(30면)했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비사실 혹은 초현실이라는 탈근대적 요소들을 좀더 과감하게 활용”(29면)했다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작별하지 않는다』의 과감한 발상과 익숙하지 않은 서사는 “일인칭 서술자 ‘경하’가 4·3항쟁의 깊은 트라우마에 가닿”(같은 면)게 하기 위한 전략이다. 경하와 ‘인선’이 겪은 임사체험이나 인선이 제주 집에 유령으로 출현하는 것 역시 “4·3의 트라우마를 마주 보려면 통과해야 할 의례”(32면)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러한 독해가 혹여 이 소설이 제시한 다른 차원의 세계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4·3항쟁을 다루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이해할 수 없는 꿈에서 시작하여 인선의 유령과 함께 누운 눈밭에 이르기까지 경하가 지나온 여정에는 역사적 트라우마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로만 볼 수 없는 요소들이 많다. 소설 전체에서 일인칭 서술자 경하가 다른 인물들과 직접 만나는 장면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장면은 혼자서 끝없이 걷는 과정 또는 꿈이나 유령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인물과 인물 사이의 아득한 공간과 시간을 생생한 현실감각으로 채우는 것은 경하의 몸에 닿는 눈, 바람, 나무, 새, 빛, 그림자 같은 자연의 존재와 현상들이다. “눈의 미묘한 정동이 소설의 분위기에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33면)는 해석을 좀더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다면, 각자의 삶에 내리는 눈, 즉 참담하지만 아름다운 고통과 작별하지 않음으로써 서로의 삶을 연결하는 인물들의 사랑이 보다 선명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유희석 「김남주의 시를 읽다」

 

2024년은 김남주 시인의 30주기이기도 했다. 작가의 탄생이나 죽음을 기리며 그가 남긴 작품의 현재성을 새롭게 증언하는 일은 후대에 맡겨진 각별한 상속의 책무라 할 수 있다. 유희석은 「김남주의 시를 읽다: 혁명과 시의 상속」에서 폭압의 시대에 혁명을 노래한 김남주의 시를 어떻게 상속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질문한다. 이 물음이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과거 투쟁과 시위 현장에서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김남주의 시가 오늘의 광장에서 더이상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집회장은 밤의 노천극장이었다/삼월의 끝인데도 눈보라가 쳤고/하얗게 야산을 뒤덮었다 그러나 그곳에는/추위를 이기는 뜨거운 가슴과 입김이 있었고/어둠을 밝히는 수만 개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고/한입으로 터지는 아우성과 함께/일제히 치켜든 수천 수만 개의 주먹이 있었다”(「사상의 거처」)라는 구절에서 “아우성”을 ‘K팝’으로, “주먹”을 ‘응원봉’으로 바꿔 읽기만 해도 곧바로 지금 우리의 목소리가 되는 시의 현재성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유희석은 김남주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적 식민지성의 영향이나 시에 나타난 도식성의 한계를 조심스럽게 짚으면서도 “‘더 나은 다른 세상’을 향한 염원을 담은 시를 읽고 그 뜻을 ‘상속’하는 일”(184면)의 중요성을 거듭 새긴다. 이 글에서 김남주의 시를 상속하는 비평적 실천은 두 방향으로 기획된다. 첫째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김남주의 시적 좌표를 그리는 일이다. 김남주가 감옥에서 가까이 접할 수 있었던 외국의 혁명시인들로부터 자양분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이제는 안으로도 돌려” 한국문학사에서 그의 온전한 자리를 찾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깊이 동감한다. 이를 위해 유희석은 “일제 강점기 카프의 계승과 극복이라는 맥락에서”(193면) 김남주의 시적 위상이 마련될 여지를 타진한다. 농본세계와의 친화성 및 부르주아지에 대한 적대를 유지한 김남주의 시적 태도가 일제 치하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시인들의 계급의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남주를 카프의 명맥을 잇는 자리에 놓기 위해서는 시적 태도나 사상의 유사성만으로는 부족하다. 계급의식과 문학성의 관계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김남주와 카프의 시를 연결하는 문학성이 무엇인지 밝히는 작업은 두번째 실천에서 이어진다.

두번째 기획은 시론(詩論)의 성격을 지닌 시들을 통해 “김남주 시를 ‘만인의 재산’으로 만들 수 있는 읽기”를 모색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각박한 도식성”(198면)이다. 도식성을 노동과 자본이 극렬히 대립했던 현실에서 유래한 불가피한 속성 또는 현실의 모순에 첨예하게 맞서기 위한 시적 전략으로 보는 것은 다분히 방어적인 설명이다. 도식성의 뿌리를 본격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시의 요람 시의 무덤」에 나타난 시 창작동기에 주목한 유희석은 김남주에게 시가 단순히 혁명의 도구가 아니라 노동요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김남주의 시는 싸우다보니 저절로 흘러나오는 노래, “전의(戰意)를 북돋는” “신명과 흥으로서의 노래”(201면)였으며, 그가 개척한 도식성의 대지에서 후배 시인들의 노동시가 싹틀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명과 흥으로서의 노래”가 카프 시의 문학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것이 어떤 면에서 도식성의 시적 성취를 이루어낸 것인지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고 있다.

이 미완의 설명을 이어가기 위해 이 글에 인용된 김남주의 시들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내 시는」 「시의 요람 시의 무덤」 「어느 장단에 춤을」은 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시들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세편의 시 모두 시 안에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관념적 시론을 펼치기 위해 동원된 시적 장치가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견디고 싸우며 살아 있는 존재, 바로 그 삶의 주인의 자격으로 새세상을 위한 시를 바라고 요구하는 주체들이다. 시의 사상과 형식, 시의 목소리의 완급에 대한 김남주의 고민은 시문학사의 전통이나 시의 통념이 아닌, 자신의 시를 읽을 역사적 주체의 현실인식을 좇아 결단된다. 그렇다면 김남주 시의 도식성은 “살아 숨 쉬고 살아 꿈틀거리며 빛나는/존재의 거대한 율동”(「사상의 거처」)의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김남주의 “시가 정치적 투쟁인 동시에 진정 시로서의 싸움인가도 더 치열하게 물어야 한다”(202면)면 새세상에서 열렬히 읽히기를 바라며 쓰인 김남주 시에 대한 상속의 책무는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문학을 살뜰히 살피고 상속하는 일의 보람과 관련하여 백낙청의 말을 빌려 되새겨본다. “진정한 예술작품이 하나 탄생할 때마다—아니 그런 작품을 후래 대중이 반가이 수용할 때마다—크고 작은 정신개벽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4 한국문학의 상속자로서 한 작가의 탄생과 그의 작품을 저마다 새롭게 상속하는 독자들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상속의 실천은 정신개벽을 통해 더 나은 새세상을 당겨오는 일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김남주의 시와 한강의 소설은 동시대를 넘어 미래세대로, 민족과 국가를 넘어 자본주의적 물질문명에 고통받는 세계의 독자들에게로 오고 다시 오고 새로 와서 빛이 될 것이다.

 

 

  1. 백낙청·황정아 대담 「[백낙청 공부길 167
  2. 이와 같은 개념은 유희석의 글에서 참조했다. 유희석 「‘상속행위’로서의 비평」, 『비교한국학』 제23권 1호, 2015.
  3. 유희석 「김남주의 시를 읽다」, 『오늘의문예비평』 2025년 봄호 185면.
  4. 백낙청 「문명의 대전환과 종교의 역할」,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모시는사람들 2020, 378면.

오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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