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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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 내 삶을 돌본 것 ②

 

정원에서 정원으로

 

 

안희연 安姬燕

시인.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당근밭 걷기』 등이 있음.

elliott1979@hanmail.net

 

 

 

1

 

최근 외할머니에게 예기치 못한 사고가 있었다. 시골집 계단을 오르다 넘어져 오른팔에 금이 간 것이다. 엄마는 깁스한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 하필 오른팔을 다쳐 씻는 것도 드시는 것도 여의치 않으니 당분간 딸네 집에서 지내시기로 한 것이다. 그날부터 예순을 훌쩍 넘긴 엄마가 아흔을 훌쩍 넘긴 할머니를 돌보는 생활이 시작됐다. 변화에 적응하는 일은 두 사람 모두에게 쉽지 않은 과정인 듯했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처음 겪는 아파트 생활이 갑갑하셨을 테고, 십대 후반 고향집을 떠난 뒤 할머니와 함께 생활한 적 없는 엄마로서도 이런저런 변화가 생경했을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방문을 미루다 겨우 반나절 짬이 났다. 두 사람의 동거를 직접 마주하니 전화상으로 짐작했던 것 이상의 고충이 읽혔다. 생활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을 섬처럼 만드는 면이 있었다. 나는 외식을 제안하며 일부러 부산을 떨었다. 엄마는 곧장 할머니의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할머니의 머리를 감겨드리거나 신발을 신기기 위해 앉았다 일어설 때면 엄마 입에서도 ‘아구구구’ 소리가 절로 나왔고, 5분 이상 걷기 힘들어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휠체어를 밀거나 곁에서 부축해야 했다. 식당에 앉아 음식이 나온 뒤에도 할머니의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 어느정도 식사를 도와드린 뒤에야 겨우 당신 입에도 밥이 들어갈 짬이 났다. 나는 ‘엄마의 엄마’를 챙기느라 바쁜 엄마 쪽으로 반찬 그릇을 밀었다. 그렇게라도 내 안의 부채감을 덜고 싶었던 것 같다. 나에게서 엄마로, 엄마에게서 엄마의 엄마로 이어지는 이 무한한 회전이 얄궂고도 애틋했다. 접시가 돌아가는 방향이 곧 생로병사의 방향이겠구나 싶어 두려운 마음도 일었다. 막연히 먼 훗날의 일이라고 미뤄두었던 미래가 코앞에 도착해 있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엔 정원이 근사한 까페에 갔다. 할머니는 외출이 길어지는 상황을 반색하셨다. 며칠간 찾아오는 사람 없이 집에만 머문 게 갑갑하셨던 모양이다. “할머니, 달달한 걸로 시킬까요?” 나의 예상을 깨고 할머니는 ‘검은 커피’를 선택하셨다. 씁쓸하니 맛이 좋다는 거였다. “마을회관에는 이런 거 없어. 나와야 먹지. 밥 먹고 커피 한잔 마시면 속이 싹 내려가.” 고작 반나절이었지만 할머니에 관해 알게 된 정보가 많다. 할머니는 시력이 좋으시다. 할머니는 기억력이 좋으시다. “너는 코가 야무져.” 할머니는 관상도 잘 보신다. 할머니는 분홍을 좋아한다. 할머니는 이미자를 닮았다. 평일 오후의 한담을 나누던 사이사이, 삼대가 한 테이블에 앉아 통유리창 너머를 건너다보던 시간은 내게도 뜻깊은 얼룩을 남겼다. 무언가를 돌본다는 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구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일이로구나 생각하며 한두시간을 더 흘려보냈다.

초봄이라지만 아직 쌀쌀한 날씨였다. 나는 속으로 요즘 3월은 봄이 아니라 겨울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 여긴 원래 정원이 근사한 곳인데 오늘은 멋이 없네. 꽃 피거나 단풍 들 때 보면 정말 근사한데.” 좋은 계절은 따로 있다는 판단이 은연중에 개입했을 것이다. “지금도 이뻐. 다 이뻐.” 할머니의 그 말은 내게 존재의 우위 없음을 가르쳤다. 그때 우리가 바라본 정원은 같은 정원이었을까. 나는 우리가 같은 정원을 내려다보며 각기 다른 정원을 떠올렸으리라 생각한다.

 

 

2

 

할머니의 시골집에도 작은 정원이 있다. 정원보다는 마당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그곳에는 여러 식물들이 자생한다. 자생이라는 표현도 아주 적절하지는 않은 게, 할머니의 손을 타지 않은 식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 후 언니와 함께 손주사위들을 인사시키려 시골집을 찾았을 때에도 할머니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달래를 캐고 계셨다. 차 시동을 끄기도 전에 엄마는 차에서 내려 할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아이고 엄마. 맨손으로 고생스럽게.” 동행한 엄마는 그때도 ‘엄마의 엄마’를 채근하며 그만하라 말렸다. “이거 얼마 안 돼. 누구 코에 붙여. 한 주먹이야.” 조금이라던 달래는 그날 봉지별로 나뉘어 집집마다 배분되었다. 할머니의 마당은 달래를 길러내고, 달래는 딸과 손녀들에게 나뉘어 향긋한 된장찌개가 되고 달래장이 되었다. 밥때가 아니었음에도 밥상을 받고 돌아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숟가락 두셋이 하나의 동치미 그릇을 공유해야 하는 밥상. 그것이 할머니의 방식이었다. 할머니의 마당은 기르고 나누는 일을 한다.

엄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결국 그 기질이 엄마에게도 대물림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할머니 마당만큼은 못 되어도 엄마의 발코니에도 수십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할머니의 답답한 아파트 생활을 그나마 위로한 건 발코니 가득 들어찬 식물의 생명력이 아니었을까. “집에 갈 때 나도 저 화분 하나 사가지고 갈까? 꽃이 이쁘잖아.” 엄마의 발코니에서 폭발적으로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군자란을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었다. 그날도 나는 화분 하나를 챙겨갔었다. 겨울을 통과하며 비실비실해진 금전수를 어떻게든 살려볼 요량으로. 병약해진 식물을 회복시키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엄마다. 엄마의 발코니는 치유하는 일을 한다. 놀라운 건, 치료법이 생각보다 간단하다는 사실이다. “때 되면 물 주고, 창문 열어 바람 쐬어주고. 그게 다야.” 이론적으로는 간단해 보여도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겪게 되는 삶의 신비는 바로 그 지점에 있으리라.

나에게는 어떤 정원이 있을까. 할머니의 마당이나 엄마의 발코니처럼 성장과 회복에 관여하는 장소가 내게는 무엇일까. 현재 나의 거주공간에는 실물로서의 마당이나 발코니가 없다. 그 대신 나에게는 쓰는 순간 나타나는 시의 정원이 있다. 시는 나의 정원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다른 이름이다.1

 

 

3

 

언젠가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정원에 관한 책을 읽던 중에 “나는 정원에서 컸잖아”2라는 구절을 마주하고 전율이 일었던 기억이 난다. 디킨슨은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인 매사추세츠의 애머스트에 위치한 ‘홈스테드’에서 보냈다. 대인기피 성향이 있던 디킨슨은 반려견 카를로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정원에서 구한 식물들을 압화하여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하거나 시를 쓰며 지냈다고 한다. 이런 면면을 생각하며 ‘나는 정원에서 컸잖아’라는 말을 다시 들여다보면 다채로운 감정이 읽힌다. 그 말 속에는 불안감이나 고독감도 깃들어 있지만 동시에 심리적 안정감과 묘한 자부심도 담겨 있다. 이때의 정원은 한 사람의 세계이자 우주, 은신처와 같다.

나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다. 구체적인 지명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전곡에서 컸다. 은유적인 표현으로 바꿔보자면 나는 외곽에서 컸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가족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으로 이사했다. 갑작스레 아빠가 돌아가시고 홀로 두 딸을 건사하기 막막했던 엄마는 친정 가까운 곳에 정착하기를 원했다. 근처에 마음 붙일 사람이라도 있어야 삶이 굴러갈 수 있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전곡은 도시 외곽에 자리해 있으나 그렇다고 시골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곳이었다. 전곡에는 1995년도에 처음 아파트가 들어왔다. 서울에 나가려면 한시간에 한대꼴로 다니는 기차를 타야 했다. 주변에 군부대가 많아 국군의날이 가까워오면 학교에서 배부한 편지지에 ‘국군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글을 써야 했다. 차를 타고 한시간쯤 가면 외할머니댁이었다. 연천은 휴전선과 매우 가까워 이따금 대남방송을 듣기도 했다. 외가에 가면, 외숙모의 진두지휘 아래 메뚜기를 잡아 튀겨 먹거나 한겨울 꽁꽁 언 아미리 저수지에 스케이트를 타러 갔던 장면 또한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 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놀라며 내 나이를 묻는다. 80년대 중반생이 겪기엔 흔치 않은 장면들일 수도 있겠다.

나를 키운 땅이 그러한 고유성과 특수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건 시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중에서도 김종삼(金宗三)의 시를 읽을 때, 살아온 환경도 경험치의 폭과 넓이도 다른 그의 시세계가 왜 그렇게 내 이야기처럼 절절하게 다가오는지를 숙고해보게 됐다. 내가 직접 경험한 사건은 아닐지라도 시인의 상처와 염원이 녹아 있는 땅 가까이 거주했던 체험은 한편의 시를 폭넓게 이해하는 데 있어 충분조건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시는 삶을 재료로 쓰이며, 경험은 장소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도. 더불어 이런 생각들도 하게 됐다. 내가 시를 읽는 것 같아도 사실은 시가 나를 읽고 있다는 생각. 시가 나를 알아보고, 내 앞에 한‘영아(嬰兒)’를 삼킨 ‘수심(水深)을 알 수 없는 강’(김종삼 「민간인」)을 데려다놓고, 슬퍼할 자격을 선물해준다는 생각. 그러니 에밀리 디킨슨이 자신의 친구에게 “나는 정원에서 컸잖아”라고 말한 것처럼 “나는 외곽에서 컸잖아”라고 말할 때, 내 정원의 범위는 외곽을 이루는 두 세계, 즉 이쪽과 저쪽, 안과 밖, 삶과 죽음 모두를 포괄하는 너른 땅이 된다는 생각.

당신은 어디에서 자란 사람인가. 그 경험이 당신에게 어떤 고유성과 특수성을 부여하는가. 혼탁한 세상을 떠나 어딘가로 숨고 싶을 때, 마음이 불지옥처럼 펄펄 끓을 때, 당신의 영혼은 어디로 향하는가. 당신은 얼마나 자주 그곳으로 가는가. 나는 그곳이 당신 정원의 좌표라고 생각한다. 혹 정원을 소유하는 일에도 조건이 필요하다 여기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정원을 가질 수 있고 이미 가지고 있다. 정원의 의미는 규모와는 무관하게 성립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땅이 수만평이든 화분 하나 겨우 놓일 만큼의 창턱이든, 구체적인 지명을 갖든 그렇지 않든 정원의 뜻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원의 존재 여부는 우리가 얼마나 성실하게 그 정원을 가꾸는지에 달려 있다.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물을 주고 살뜰히 살피는 육체적·심리적 노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곳은 그저 빈 땅일 뿐, 어떤 변화도 생성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 「당근밭 걷기」를 쓸 때가 떠오른다. 시를 쓰는 동안 나는, 쓰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무형의 밭을 일구었었다. 시의 화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밭이 있고, 그곳에서 당근들이 자라날 거라는 사실을 불시에 언도받는다. 갑작스레 주어진 현실이 시의 화자에게 단박에 소화되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주어진 당근밭—삶을 최선을 다해 일구고, 수확의 기쁨을 타인들과 공유하고, 그 시간의 결과로 도착한—“두더지”와 시선을 교환하며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아나간다. 나는 그 시에 두번의 “있다”를 적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 현실을 실감하기 위해서였고(“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모두 나의 땅이라 했다. 이렇게 큰 땅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있다.”), 두번째는 나의 나됨을 선언하기 위해서였다(“이제 내가 마주하는 것은/두더지의 눈//나는 있다//달빛 아래 펼쳐지는/당근밭”). 두번의 있음을 경유하며 내가 도착한 곳은 이곳이다. 모든 관계는 상호적이다. 내가 볼 때 나를 보는 것이 있다. 시선의 교환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서로로 말미암아 “있다.”

 

 

4

 

시집 『당근밭 걷기』(문학동네 2024)를 펴내고 독자분들을 만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공통적으로 던진 질문이 있다. ‘나는 한없이 무른 사람이라 당근의 단단함을 선망한다. 더불어 걷기란 내게 이동이 아니라 이행으로 이해되는 행위다. 그러므로 나는 당근밭을 걷는다. 당신은 어떤 밭에서 어떻게 존재하는 중인가?’ 그러면 독자들은 고심 끝에 ‘깻잎밭에서 노래하기’ ‘양배추밭에서 물구나무서기’ ‘귤밭에 드러눕기’ 같은, 각자의 정원이 품고 있는 이미지를 공유해주었다. 결괏값에 따라 재미로 엉터리 점괘를 말해보기도 했다. “양배추라니! 영혼이 알차고 단단하신 분이네요.” “깻잎은 항시 낱장으로 존재하잖아요. 당신의 고독은 얇고 켜켜이 쌓이는군요. 특히 여름을 힘겨워하시네요. 더운 날 상온에 오래 놔둔 깻잎을 떠올려보세요. 축 늘어져서 힘을 못 쓰잖아요.” 우리는 와하하 웃는다.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 해석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만큼은 실감하는 것이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던 자기 영혼의 가시성과 구체성을.

또 하나의 일화가 떠오른다. 시집 제목을 ‘당근밭 걷기’로 삼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엄마가 건넨 첫 마디는 “너 당근 잎사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 있어?”였다.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 독자가 물어올 경우를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유심히 살피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시의 현실’과 ‘현실의 시’가 발맞추어 걸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을 터. 그 말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던 건 지금껏 당근밭과 당근 잎사귀 사진은 많이 보았어도 실물로서의 당근밭은 걸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시를 쓰기 위해 내가 한 일이라곤 책상에 앉아 수만평의 당근밭을 상상한 게 전부였으니까.

시의 육체성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또 배운다. 종이 위에 ‘당근밭 걷기’라는 글자를 쓰는 일과 실제 당근밭을 걷는 일은 다른 경로를 가진다. 내가 꿈꾸는 정원은 그 두 경로의 결절(結節)에 해당하는 곳이다. ‘시의 현실’과 ‘현실의 시’가 하나로 만나는 곳.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상적 바람일 뿐, 내가 꿈꾸는 정원은 거저 얻어지지 않으며 정원이 낙원이기만 하지 않다는 사실도 기억하려 한다. 정원과 관련된 또다른 책 『정원의 기쁨과 슬픔』(올리비아 랭 지음, 허진 옮김, 어크로스 2025)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정원을 가꾸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정원을 가꾸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갇혀버린 현재의 순간에 순응하는 방법”(24면)이었기에 자기안위적으로 접근하기 쉬워진다. 개인의 필요에 의해 사들인 식물을 끝까지 돌보지 못할 때 식물들은 어떤 최후를 맞는가. 정원을 갖고자 하는 마음 안에, 정원을 돌보는 방식에 대한 숙고가 결여된다면 그때의 정원은 은폐되고 고립된 땅으로 변모하고 말 것이다.

 

 

5

 

나의 정원으로 초대하고 싶은 두 사람, 엄마와 할머니 이야기를 좀더 덧붙여야겠다. 할머니가 와 계신 동안 엄마는 마음 편히 외출할 수 없었고, 국이 없으면 밥을 잘 못 넘기시는 할머니를 배려해 자주 시장을 봐야 했다. 할머니께 안방 침대를 내어드리고 맞은편 작은방에 요를 깔고 자느라 허리 통증이 심해지기도 했다. 부모이기에 완벽한 타인일 수 없고, 예상치 못한 변수였기에 장악할 수 없는 시간의 복판에서 엄마는 삶의 톱니가 틀어지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네 엄마가 나한테 방을 뺏겼지. 저도 불편하겠지.” 지나가는 할머니의 말속에도 난처와 곤궁이 묻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시소를 타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건강한 관계는 한쪽으로만 기울어지지 않고, 나를 낮춰 상대를 들어올리는 동작의 무수한 반복이라는 점도.

두달 뒤, 깁스를 푼 할머니는 연천 시골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몇주 뒤 나는 돌봄의 회로가 뒤바뀌는 경험을 했다. “그때 희연이 이사 간다고 하지 않았니? 이사 간 집에 이쁜 화분 하나 사라고 해.” 메시지와 함께 엄마를 통해 용돈을 보내주신 것이다. 이사를 앞두고 냉동실 정리를 하던 중엔 할머니가 직접 띄운 청국장도 발견했다. 마당의 달래를 캔 그날, 집집마다 나누어준 봉지 안에 함께 담겨 있던 것이다.

무엇이 내 삶을 돌보는지 물으려면 내가 무엇을 돌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돌보는 것이 곧 나를 돌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시를 쓸 때 시도 나를 쓴다. 내가 없으면 삶도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못한다. 그날 식당에서 내가 엄마 쪽으로 반찬 그릇을 밀었을 때 엄마가 불판 위의 고기 한점을 내 쪽으로 옮겨놓았듯이. 엄마가 할머니의 앞섶에 묻은 냉면 육수를 닦을 때 할머니 또한 엄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딸의 이마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듯이. 그날 나를 배웅하며 엄마는 말했다. “엄마가 언제 이렇게 할머니와 둘이 살아보겠니.” 할머니는 엄마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주었고, 먼 훗날 그 시간은 값을 치를 수 없게 귀해질 것이다.

모든 존재는 돌봄의 회로를 형성하는 인자들이다. 돌봄의 그물코는 사방으로 뻗어간다. 그러니 무엇이 내 삶을 돌보는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함께한 시간이 나를 돌본다고. 삼대가 한 테이블에 앉아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던 그 시간을 떠올리면 마음에 꽃물이 든다. 그곳에선 할머니의 마당과 엄마의 발코니와 내 시의 정원이 하나로 포개어지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상상이 또 언젠가의 나를 돌볼 것이다.

 

 

  1. 이때의 정원은 집 안의 뜰이나 꽃밭을 일컫는 좁은 의미의 정원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이하에서 강조해 표기하려고 한다.
  2. 마타 맥다월 『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정원』, 박혜란 옮김, 시금치 2021, 25면.

안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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