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백영서·황정아 엮음 『문명전환의 한국사상』, 창비 2025
개벽사상 확충의 길
나종석 羅鍾奭
연세대 한국학협동과정 교수 platona@yonsei.ac.kr
오늘날 ‘한국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K팝, K컬처, K문학 그리고 K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은 대중적 차원을 넘어 학술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한국사상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한국 고유의 사상 전통에서 세계적 보편성과 실천적 현재성을 띨 사유를 발굴하려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기후 및 생태 위기를 둘러싸고 인류세 논의가 세계적 화두로 떠오르는 상황이 보여주듯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적 사유 패러다임에 대한 모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직면한 비상한 위기를 타개하는 데 있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한국사상과 새로운 대화를 통해 그런 대안적인 사상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상황은 우연으로 취급될 수 없다. 한국 근현대사상의 출발점이자 한반도의 고유한 사상적 자원의 하나인 개벽사상이 논쟁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것도 새삼스럽진 않다. 최제우의 동학에서 본격적으로 출현한 ‘다시개벽’, 즉 개벽사상의 흐름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의 보편적 잠재성을 살펴보는 지적 모색에서 작고한 김지하는 물론이고, 백낙청이나 도올 김용옥의 연구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출판사 창비의 노력도 제법 알찬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다루는 책 『문명전환의 한국사상: 개벽의 사상사 2』는 한반도 특유의 사상적 자원인 개벽사상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인류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발본적인 문명대전환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작업에서 여러모로 모범을 보여준다. 우선, 이 책은 여러 글을 그저 모아놓은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문명전환, 한국사상, 개벽이라는 세개의 키워드를 근간으로”(4면)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할 문명대전환의 사유의 실마리로 개벽사상에 주목한다. 그런 이유의 하나는 개벽사상이야말로 유교나 불교의 전통 내에서 유통된 사상도 아니고 서구 근대와 조우한 이래 우리에게 유입된 서구의 다양한 사조와 “중대한 차별성”을 지니는 것으로 “한반도에서 발원하거나 터를 내려 유통된 사상”(5면)이라 평가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이러한 일관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성공적으로 관철하고 있기에, 기획력과 짜임새가 꽤 돋보인다. 한국 근현대사상사를 새롭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10편의 글 각각이 나름대로 완결된 글로 독자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도 물론이다.
나아가 개벽사상에 주목해야 할 중요한 까닭을 백영서의 글(「동아시아의 수양론으로 개벽사상 다시 읽기」)을 통해 살펴보자. 그는 수양론의 의미를 사회변혁과 연결해 새롭게 사유하면서 “개벽적 수양”을 방법으로 삼아 문명대전환의 전망을 하려 한다. 수양이라는 용어를 접할 때 개인의 내적인 영적 훈련인 마음공부나 유가적인 “수기치인(修己治人, 스스로 수양하여 세상을 다스린다)”(276면)을 떠올릴 수 있지만, 백영서는 그 전통을 재구성하는 작업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개벽사상을 매개로 한 수양론의 중요성을 되새긴다. “개인수양과 사회변혁의 동시수행을 감당하며 개벽의 경지에 다가가려는 삶의 자세”로 규정되는 개벽적 수양론은 결국 “개인의 자기수양을 수반한 정치행위 또는 세상을 바꾸는 ‘사회적 영성 함양’”을 결정적인 관건으로 삼는다(277면). 따라서 그는 “대안 문명의 핵심인 ‘더 나은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종교적 차원의 고도의 각성’과 함께하는 사회변혁의 길을 제언한다(303면). 사회변혁과 함께하는 ‘사회적 영성’이나 ‘구도적 마음공부’(정신개벽)에 대한 성찰은 21세기 새로운 비판적 사유의 문법을 구체화하는 데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아울러 문학의 문외한으로 염상섭이나 신동엽을 다룬 글을 총평할 역량은 없지만, 황정아의 글(「인류세 시대의 신동엽과 개벽사상」)에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는 “우리들의 가슴 깊은 자리”에 흐르는 “맑은 강물”을 “돌 속의 하늘”로 묘사하는 신동엽의 시(「조국」) 구절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해 황정아는 “가장 척박한 대지의 형상인 ‘돌’과 영원하고도 무궁한 것의 형상인 ‘하늘’이 접속”(196면)하고 있다는 점만이 아니라, 대지와 하늘의 접속, 즉 평자의 용어로 한다면 하늘과 땅의 대립을 넘어선 합일과 화해의 경지가 바로 “인간다움의 수행”(197면)이라는 분투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임을 강조한다. 또한 신동엽에게 ‘돌 속의 하늘’이 곧 “조국”(198면)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황정아는 그에게 나라를 새롭게 하려는 실천이란 하늘과 대지의 접속이라는 차원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역설한다. 이러한 신동엽의 세계이해는 해월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다)의 사상을 “나락 한알 속의 우주”, 즉 밥알 하나에도 온 우주의 생명이 함께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장일순의 사유(김용휘 「개벽사상과 한국의 생명운동」, 212~13면)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의 문제의식에 깊게 공명하면서도 아쉬움을 갖게 된 까닭은 아마도 평자의 학문적 방향과 무관하지 않을 터다. 서양철학 전공자로 느지막이 시작해 지난 15여년간 21세기 인류가 요청하는 새로운 유토피아 사상의 길을 모색할 방법으로 동아시아 및 한국 유교사상과의 대화를 통한 전통의 재탄생을 생각해온 평자라서 그럴까, 유교 전통과 개벽사상 사이의 상생적인 대화의 가능성이 잘 반영되어 있지 않은 점이 눈에 밟힌다. 그러니까 개벽사상의 역사가 동학에서 시작하는 것을 십분 긍정한다고 해도 개벽사상의 여러 갈래가 어떻게 유교 전통에 거리를 두면서 사상적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유교적 대응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부재한 점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좀 부연해보자. 평자가 보기에, 이 책에서는 조선의 성리학이나 동아시아 유학사상과의 ‘비판적 대결’의 맥락에서 개벽사상의 의미를 설명하는 서사가 두드러진다. 책에서 다루어지는 최한기나 전병훈 등은 유학자라고 평가받아도 무방할 터이고, 이들이 개벽사상과 맥을 같이하는 학자라고 한다면 우리 근현대사상사에서 유교 전통은 그저 지나가버린 과거에 유폐된 사상이 아니라, 유교적 전통의 개벽적 혁신과 변형의 움직임을 통해 면면하게 흘러오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도 최한기의 기학을 다루거나(이행훈 「개벽의 인간학과 사회변혁론) 전병훈의 정신철학을 다룬 글(백민정 「개벽의 정신으로 본 전병훈 『정신철학통편』」)에서 이에 대한 강조는 거의 부재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머문다. 이들의 사상이 유학 전통을 ‘넘어’ 개벽사상에 조응하는 측면을 밝히는 방식으로—이런 작업이 나름 소중한 지적 성과임을 부정하지 않는다—구성되고 있다는 점 역시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최제우의 다시개벽사상을 후천개벽시대의 새로운 유학, 그러니까 개벽유학으로 재정의할 가능성은 진정 전무한 것일까? 효(孝)기독론을 주장함으로써 유교적 기독교의 흐름을 개척한 독창적 사상가로 평가받는 다석 유영모의 기독교 신학에서 개벽신학의 가능성을 독해하는 이정배의 글(「개벽신학의 세 토대로서 공(空), 공(公), 공(共)」)은 새로운 사상적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에서 장일순과 김지하 등에 이르는 생명사상은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마음)을 어진 마음〔仁〕의 본체로 보면서 인간이 만물과 한몸임을 자각하는 것을 수양을 통해 도달할 최고의 경지로 보는 유가사상과 공명하는 바가 크다. 특히 유가사상의 만물일체의 인(仁)은 인간다움의 온전한 성취를 만물과 세계의 고통을 구제하려는 종교적이라고 해도 좋을 무한한 책임의식과 함께 고민한다는 점에서도 개벽사상과 중요한 대화 상대일 것이다. 기독교를 매개로 해 개벽신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과 같이, 개벽유학의 가능성을 시야에 넣고 그런 길을 개척한 유학사상의 혁신적 모습에 관해서도 관심을 키워나가는 것은 앞으로 채워져야 할 공백으로 다가온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과의 활발한 대화와 연대가 있다면, 개벽사상의 세계성과 현재성을 드러내려는 문제의식 역시 전통과의 단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으리라 본다. 이를 통해 비서구사회의 역사와 전통 전체를 야만으로 타자화하는 서구중심주의의 인식론적 폭력을 극복하고, 발본적인 문명전환을 주도할 대안적 사유로 향해가는 길을 더 내실있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상사에서 개벽사상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대동·개벽 유학사상의 흐름을 밝히는 작업은 한반도 개벽사상의 전체적 면모를 풍성하게 하는 데에서만이 아니라, 그 세계적 보편성과 현재성을 밝히는 작업에도 분명 이바지하는 바가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