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최원식 『잃어버린 배뱅이굿』, 솔출판사 2025
배뱅이의 초기 채록본과 실종된 연구자를 향한 헌사
김인숙 金仁淑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한국음악학 sjheart@aks.ac.kr
춘향가와 심청가가 남도소리라면 배뱅이굿은 서도소리다. 시집 못 가고 죽은 ‘배뱅이’ 이야기를 서도식 창법으로 엮어 부른 판소리가 배뱅이굿이다. 남도 판소리가 전라도 말을 써야 하듯 배뱅이굿은 평안도나 황해도 말로 구사해야 제맛이다. 1930년대 서도 명창들이 취입한 배뱅이굿을 들어보면 구개음화가 되지 않아 ‘ㄷ’ 발음이 선명한 서도식 창법이 독특한 흥취를 불러일으킨다. 익살스럽게 주워섬기는 재담 역시 빠질 수 없는 재미요소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배뱅이굿은 이런 본고장의 소리에 비하면 전승지역이 바뀌어 문화적 변이를 일으킨 방계의 소리였다고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배뱅이굿’이라는 제목은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저자의 표현대로 ‘이은관(李殷官, 1917~2014) 명창 이후 급속히 소외된 배뱅이굿의 관심을 환기하고 남북문화교류의 한 단서를 바라는’(10면) 뜻이 하나일 것이다. 배뱅이굿의 연구가 부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현장연구를 가로막고 있는 분단이라고 보면 이북 소리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연구에 힘을 보탤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아가 저자의 절실한 속뜻은 과거 이북 사람들이 직접 듣고 즐긴 배뱅이굿의 채록본을 직접 소개하려는 의도라고 본다. 학계에는 이미 알렸으나 독자 대중은 잘 모르는 배뱅이굿의 선본(善本)을 선보임으로써 다채롭고 생생한 배뱅이굿의 면모를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저자는 일일이 주해를 가하고 해설을 곁들여서 배뱅이굿의 옛 채록본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여전히 먼 고향의 소리인 배뱅이굿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점에서 분단 80년 만에 나온 『잃어버린 배뱅이굿』은 의미가 크다.
예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배뱅이굿을 다룬 이 책은 배뱅이굿을 채록한 세가지 버전과 이를 위한 주석과 해설이 중심 내용이다. 우리가 아는 자료 대부분이 남한에 정착한 형태의 배뱅이굿이었다면 여기 실린 자료는 분단 이전의 배뱅이굿을 상상케 한다.
김태준(金台俊, 1905~49) 유인만(柳寅晩, 생몰년 미상) 최상수(崔常壽, 1918~95). 이들은 일제강점기 민속학에 애정을 쏟았던 국학자들이다. 김태준은 1931년 이희승 등과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여 문학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으나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최상수는 1955년 한국민속학회를 창립하는 등 민속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우는 선구적 역할을 했다. 유인만의 행적은 묘연하다. 유인만이 배뱅이굿을 채록하게 된 배경에 “은사 이희승 선생의 권유”(21면)가 있었다지만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책에 수록된 유인만 채록본은 저자 자신이 처음 학계에 소개한 자료(『공동체문화』 1집, 1983)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특별하며, 일찍이 황해도 현지의 채록본으로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었다. 그동안 저자 나름으로 유인만의 흔적을 찾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책의 말미에 담겼다. 유인만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연시조 「화로(火爐)」와 역시 유인만이 채록하고 해설을 붙인 전래동요 「고사리·삽주」가 그것이다. 이 책은 배뱅이굿의 세가지 채록본과 해설을 곁들인 내용이지만 그것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유인만 한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 ‘잃어버린 배뱅이굿’은 ‘실종된 연구자 유인만’을 찾는 심인 광고로 읽힌다.
전래하는 배뱅이굿을 뜯어보면 세가지 화소(話素)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배뱅이는 무속신화의 ‘당금애기’를 닮았다. 중을 만나 사랑을 나누다 좌절하여 요절하는 주인공이 배뱅이다. 후반부에서 죽은 배뱅이의 원한을 풀어주는 가짜 무당굿 또한 중요한 화소로서 이는 『어우야담』의 동윤설화(洞允說話)와 관련이 있다. 가짜 무당이 기지와 속임수로 굿을 하여 재물을 갈취하는 이 굿의 패러디는 배뱅이굿의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진 이은관의 배뱅이굿에는 없는 것이 또한 ‘무당사또’ 화소인데, 무당으로 고을 사또가 된 이가 무당임이 탄로나 아전들에게 망신당하고 쫓겨나는 이야기다. 무당사또 화소는 특히 김태준과 유인만의 채록본에서 확인할 수 있어 『잃어버린 배뱅이굿』이 더욱 눈길을 끈다.
책의 내용을 따라가본다. 김태준 채록본은 1934년 『한글』 2권에 김태준이 자신의 고향인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김흥섭의 구술을 희곡 형태로 각색하여 발표한 것이다. ‘평안도 민속극’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연극으로 꾸민 점이 아쉽지만 배뱅이굿의 주요한 뼈대는 확인된다. 이 자료는 무당사또와 가짜 무당굿이 중심으로, 배뱅이 어머니가 무당사또의 문복(問卜)을 통하여 배뱅이의 기밀굿(망자가 무당의 입을 빌려 넋두리하고 한을 푸는 굿)을 벌인다는 줄거리다.
유인만 채록본은 1947년 『향토』 잡지에 발표한 자료다. 채록자의 고향이기도 한 황해도 평산의 관북사라는 절에서 어느 재인(才人)이 공연한 배뱅이굿을 보고 기록했다고 한다. 유인만 채록본은 무엇보다 무당사또 이야기가 충실하게 담긴 점에서 독보적이다. 김태준 채록본의 무당사또는 ‘조판서’의 아들로 근본이 양반이라지만, 유인만 채록본의 무당사또는 본디 무당이었으나 과거에 급제하여 경상감사가 된 문제적 인물이다. 아전들의 업신여김으로 쫓겨나는 무당사또가 배뱅이의 아버지라는 설정은 이 자료에만 나타난다. 유인만 채록본은 굿놀이적 성격이 여실한 점에서 여타 자료와 구별된다. 유사음어를 나열하거나 동음과 동의어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등 전통적 재담이 풍부하게 담겨 있고, 「고사선염불」 「회심곡」 「산염불」과 판수의 「안택경」 「산염불」 등 다양한 소리가 채록되어 있는 점에서도 종요롭다.
최상수 채록본은 김성민의 소리를 1956~57년 『민속학보』에 수록한 것이다. 최상수는 1941년 무렵 평양을 방문하여 김성민의 배뱅이굿을 채록한 적이 있다고 하므로(117면) 이 자료는 일제강점기의 소리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즉 세가지 채록본은 모두 분단 이전 북쪽의 배뱅이굿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상수 채록본은 배뱅이 이야기와 가짜 무당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는데 이는 남한에 연행되어온 대표적 형태인 이은관 선생의 배뱅이굿과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자료 소개 외에도 저자는 자신의 선행논문(「배뱅이굿 연구」, 『한매최정여박사송수기념논총』 계명대출판부 1983; 『한국근대소설사론』 창작과비평사 1986)을 수정하여 해설로 실었다. 배뱅이 아버지는 중세적 질서와 타협하며 신분상승을 이뤄낸 인물로, 배뱅이는 자신의 본마음에 충실하게 자유연애를 실행하다 중세적 질곡에 부딪쳐 비극적 파국을 맞는 인물로 평가한다. 이는 모두 유인만 채록본에서 발견되는 근대적 서사이자 저자가 배뱅이굿의 선진성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단서다. 서도판소리로서의 개성과 작품 속 제의적 속성까지 고려할 때 배뱅이굿은 전통 연희사는 물론 소설사, 특히 근대문학으로의 이행을 살피는 불가결한 텍스트다. 논의의 와중에 저자는 채록시기가 빠른 김태준 채록본에서 유인만 채록본에 이르는 흐름을 따라, 배뱅이굿이 평안도에서 황해도로 전파되면서 변모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한다(64면). 이에 대해 배뱅이굿과 같은 소리는 연행(演行) 장소나 조건, 현장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소리꾼의 역량에 따라서도 내용의 들고남이 쉽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즉, 여기 실린 채록본들은 하나같이 귀하지만 자체적인 한계 역시 인식해야 한다. 그 본질은 오직 다양한 연행 현장을 통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평안도와 황해도의 배뱅이굿이 1930년대 이미 공존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1910년대까지 활동했던 김관준(金寬俊)으로부터 비롯된 배뱅이굿이 한 세대가 채 되지 않아 지역제가 갈리고 유파와 계통이 형성되기는 어려웠으리라 보여 저자도 바라듯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쟁점”(같은 면)이 아닌가 한다.
1930년대 배뱅이굿은 서울의 음반회사에서 왕성하게 취입되고 발매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최순경 김종조 김주호와 같은 서도 명창들이 이때 배뱅이굿을 거듭 취입했다. 당시 음반이나 기타 신문자료에 보이는 배뱅이굿은 명확하게 계통을 세우기에는 빈곳이 많다. 배뱅이굿에 보이는 화소의 다양한 결합은 “겨울날 사랑방에서 돌림치기로 민중의 오락으로 성행”(18면)하여 만들어낸 만화경과 같은 흔적은 아닐까? 이를 풀어줄 자료가 많지 않으니 오직 지속적인 연구에 기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