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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세라 핀스커 『언젠가 모든 것은 바다로 떨어진다』, 창비 2025

SF서사가 연주하는 예술을 위한 변주곡

 

 

설연지 薛然旨

영문학자, 강원대 글로벌인재학부 영어전공 교수 yjsol@k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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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핀스커(Sarah Pinsker)의 소설집 『언젠가 모든 것은 바다로 떨어진다』(Sooner or Later Everything Falls into the Sea, 2019, 정서현 옮김)의 표지는 바다와 하늘과 우주를 담는다. 수록작 「일각고래」의 고래 모양 자동차가 내달리는 고속도로 같기도 계단 같기도 한 바다 위로, 회색빛 고래들과 바이올린이 솜털 같은 구름이 뜬 하늘을 유영한다. 파란 하늘 한가운데, 반쯤 열려 있거나 닫혀가는 문을 지나쳐 가는 듯한 두 고래와 달리 바이올린은 자칫하면 문 너머 남색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갈 듯하다. 바이올린은 미지의 세계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인가.

핀스커는 필립 K. 딕상을 포함해 SF문학에서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작가지만, 한국에 번역되기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핀스커의 첫 번역서를 소개하며 음악에 주목한 것은 평자의 독서 실감의 결과인 동시에 그의 작품세계가 읽히고 발전해온 방향을 따른다. 록밴드 멤버 ‘루스’가 주인공인 수록작 「열린 길의 성모」와 루스의 못다 한 이야기를 담은 첫 장편소설 『새로운 날을 위한 노래』(A Song for a New Day, 2019)는 핀스커에게 두번의 네뷸러상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핀스커는, 옮긴이가 소개하듯 “열세살 때 첫 밴드를 시작”한 펑크 뮤지션이다(509~510면).

그런데 음악가로서의 자아가 물씬 묻어나는 단편들이 상상하는 ‘다른 세계’에서 음악과 음악가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표제작 「언젠가 모든 것은 바다로 떨어진다」는 해변으로 떠밀려 온 ‘개비’를 ‘베이’가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기후변화가 전지구적 재앙이 되자 자본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 중 몇몇은 방주를 지어 당분간 세상과 격리를 꾀한다. 그 배에 머문 기간을 생각해본 적 없다는 개비의 말에 “너무 부자라 신경 쓸 필요가 없었겠지”(72면)라고 베이가 냉소적으로 답하자, 개비는 자신은 단지 연예인이라고 항변한다. 개비는 베이가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록스타’지만 부를 독점한 사람들의 눈에는 “쇼를 위해 고용된 총잡이일 뿐이”(99면)다. 개비는 그 사실을 자각하고 ‘안전한’ 배에서 탈주하지만, 소설이 보여주지 않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배의 세계로 복귀한다.

일시적 회피처가 아닌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우주로 향한 사람들 틈에서도 음악과 음악가는 도전받는다. 「바람은 방랑하리」에서 지구를 떠난 모험가들의 후손은 여전히 우주선 안에 있다. 연주모임 ‘올드타임’의 바이올리니스트인 50대의 고등학교 역사교사 ‘클레이’는 지구의 어두운 역사를 배울 시간에 실용적인 것을 배워야 한다는 10학년 소년 ‘넬슨’의 반항에 당혹해한다. 그 일에서 클레이는 자신의 딸 ‘나탈리’의 십대 시절을 떠올린다. 실험적인 음악을 추구하던 나탈리는 자신의 음악을 녹음해 기록으로 남기길 거부했다. 하지만 넬슨이 역사나 고전문학과는 잘 안 맞아도 농사는 즐기는 “좋은 아이”(254면)이듯, 태어나보니 우주선 안이었던 세대는 예술마저도 지구의 옛 데이터베이스에 의존하는 이전 세대와 달리 “새로운 걸 하고 싶”(266면)을 뿐이다. 클레이는 나탈리의 의견에 동의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데, 자신이 반대하는 건 “새로운 작품”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의 “단절”(280면)이라고 고백한다.

‘클레이의 음악’이 도전받을지라도 음악 그 자체가 폄하되지는 않는다면, 음악이 생계수단인 록밴드의 투어를 따라가는 「열린 길의 성모」에서 음악가의 주체성과 창조성은 한계에 몰린다. 루스의 밴드는 기름 살 돈을 아끼려 중국식당의 폐식용유를 사용하며, 애지중지하는 밴을 도둑맞고 그토록 혐오하는 홀로그램 공연 계약을 검토하는 지경에 이른다. 당장은 차를 빌려 다음 공연 장소로 이동하겠지만, 굴복의 순간이 서사의 밖으로 유예되었을 뿐, 머지않은 미래에 이들이 홀로그램 쇼 계약을 체결해도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 중편 「그리고 (N-1)명이 있었다」에 이르면 음악가는 숫제 잔혹한 죽음을 맞는다. 다중세계의 ‘세라’들이 모인 세라콘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죽은 세라는 디제이이자 약물중독자로, 범인은 세라콘의 주최자인 양자학자 세라다. 지진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이 세라는 그들이 살아 있는 세계에서 자발적으로 관계를 단절한 디제이 세라의 삶을 빼앗기로 마음먹는다. 디제이 세라가 “음악 외에는 인생의 모든 것을 태워버렸”(497면)다는 양자학자 세라의 비난은 역설적으로 디제이 세라의 음악적 진정성을 증언하지만, 이 진지한 음악인은 양자학자의 과학적 판결에 의해 삶을 박탈당한다.

악기와 선율과 노래가, 그리고 어쩌면 관객조차 오래된 기억이자 꿈으로 낡아가는 이 책에서 음악인의 지위는 명백한 추락의 궤도를 그린다. 이 추락은, 기술에 잡아먹히기를 거부하는 소설 속 예술가들이 파괴적이며 착취적인 자본주의에 그들의 창조성을 내어주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세상의 기대에 저항한 결과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스치는 기시감의 정체는 놀라우면서도 희망적이다. 핀스커의 몇몇 단편에서 최근 평자가 본 중소극장 창작뮤지컬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설집 전반에 흐르는 퀴어서사도 중소극장 창작뮤지컬의 관객에게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 공연들은 (핀스커의 소설 속 음악인 몇몇이 몸서리치며 꺼리는) 녹화본을 거의 남기지 않는 것이 정체성의 핵심이다. 생성형 AI가 득세하는 세상에 살아 있는 배우의 연기를 현장에서 보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적어도 한국에는 늘고 있다. 한국의 SF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올해 토니어워드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사실은, 한국만큼이나 미국의 디지털 네이티브들도 SF서사에 열광하며 동시에 그것을 디지털 미디어가 아닌 비좁은 공연장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보는 것을 ‘힙하게’ 여기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결말을 알면서 같은 공연을 몇번씩 보는 관객들처럼, 이 소설집이 예술과 창조성이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라는 뻔한 결말을 낼지라도 그 뻔한 결말의 변주를 계속 듣고 싶어진다. “노래를 몇번 연주하든 그건 매번 다른 노래”(238면)고, 나 역시 “노래를 계속 변형”하여 “점점 더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296면) 중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