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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경식 『루카치 소설론 연구』, 아카넷 2024

루카치와 ‘리얼리즘의 승리’

 

 

임홍배 林洪培

서울대 독문학과 명예교수 limhb059@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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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소설론 연구』는 평생 루카치(G. Lukács) 연구에 정진해온 저자 김경식의 공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역작이다. 흔히 루카치 소설론은 초기의 대표작 『소설의 이론』(1916), 그리고 맑스주의로 선회한 이후의 리얼리즘론으로 대별된다. 루카치도 한때 『소설의 이론』이 1차대전으로 터져나온 서구문명의 종말에 대한 위기의식의 산물이되 현실적 돌파구를 찾지 못한 ‘낭만적 반자본주의’의 소산이라고 자평한 바 있지만, 만년에 자신의 사상적 발전과정이 유기적이었다고 회고한 것을 상기하면 이 책과 그후의 소설론은 유기적 발전과 질적 도약의 측면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루카치 리얼리즘론의 핵심에 해당하는 총체성 개념이 그러하다. 『소설의 이론』에서 총체성은 헤겔 미학의 선례에 따라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소외에서 해방된 유토피아적 소망상을 투사한 관념적 이상주의의 산물이라 할 수 있고, 훗날 루카치가 맑스주의 관점으로 구상하는 리얼리즘론에서 총체성은 자본주의체제의 운동에 대한 엄밀한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김경식의 연구는 이처럼 초기부터 후기까지 루카치의 소설론이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일관된 문제의식의 결실임을 설득력 있게 밝혀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통해 루카치의 소설론뿐 아니라 “그의 사유 전체에 대한 상이 어느 정도 형성될 수 있으리라”(8면)는 저자의 기대가 충족되고 남는다. 특히 후기 소설론의 출발점으로 중요하게 다룬 ‘리얼리즘의 승리’ 부분은 루카치 리얼리즘론의 형성과정과 이론적 얼개를 잘 보여주는 범례로서 리얼리즘에 대한 이해를 촉진한다.

잘 알려진 대로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엥겔스는, 발자끄가 왕당파의 지지자였지만 그의 소설은 귀족층의 필연적 몰락과 혁명적 공화주의자들의 숭고한 투쟁을 편견없이 묘사했다고 보았다. 루카치는 리얼리즘의 승리를 현실의 풍부함과 역동성에 대한 정직한 관찰을 통해 작가 자신의 공고한 신념조차 극복하는 ‘창조적 정직성’의 뜻으로 일반화했는데, 발자끄의 세계관에 대해서도 왕당파를 지지하는 피상적 태도보다 더 깊은 심층에서 “프랑스에서 왕정복고기에 시작되었던 대대적인 자본주의의 융성 속에서 인간의 온전성을 지키는 것”(366면)이라 설명했다. 이것은 엥겔스의 논의와도 통하는바 현실의 실상을 직시하려는 올곧은 작가적 양심이, 작가 자신의 주관적 신념까지도 극복하면서 현실의 역동적 총체성을 파악하는 혁명적 변증법의 사유를 열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리얼리즘의 승리를 ‘세계관’과 ‘창작방법’의 그릇된 대립으로 오도하는 것을 해소하는 동시에 리얼리즘을 단지 창작방법의 문제로 축소하는 단견을 불식하게 해준다.

루카치는 리얼리즘의 승리를 구가한 발자끄 이후의 서구소설을 자본주의 현실에 비판적이지만 극복의 전망을 확보하지 못한 비판적 리얼리즘, 부르주아계급의 이념적 퇴락의 산물인 모더니즘으로 대별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문학사에서 상반된 양식으로 이해하는 자연주의와 모더니즘이 “죽은 객관성과 텅 빈 주관성의 허위적 대립”(310면)으로 표리관계에 있다고 본다. 루카치의 이러한 입론은 역사상 최초로 부르주아계급과 노동계급이 격돌한 1848년의 역사성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인데, 백낙청은 루카치의 문학사 인식이 유럽중심적이고 1848년의 역사적 의의를 과대평가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백낙청 「‘다른 어떤 율동적 형식’과 리얼리즘」,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창비 2020).

1848년 빠리 노동자들의 투쟁을 비롯해 유럽을 뒤흔든 일련의 투쟁들은 루카치의 논의에서 노동계급의 성장이라는 측면보다는 주로 부르주아계급의 보수화와 이념적 퇴락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리얼리즘의 쇠퇴로 연결되는 맥락에서 자리매김된다. 김경식이 비중있게 다루는 루카치의 「소설」(1934)이라는 글에서 이런 구도는 명확히 드러난다. 루카치에게 1848년은 “향후 서구문학의 주도적 경향이 되는 이른바 모더니즘 경향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이며 20세기 전반기 프루스트, 조이스에 이르면 장편소설의 내용과 형식은 “완전히 해체되”고 만다(458면). 반면 1848년 ‘이전’ 시기는 부르주아계급의 진보적 상승기에 상응하여 발자끄로 대표되는 리얼리즘의 절정으로 설정된다. 이처럼 1848년 전후의 상승곡선과 하강곡선이 선명히 대비됨으로써 김경식이 설명하듯 루카치가 “19세기 전반기 중서부 유럽의 장편소설에서 장편소설 구성의 기본 원리를 파악하고 이를 척도로”(459면) 삼는 협소함과 불균형이 생긴다. 물론 이것은 「소설」에서 두드러진 문제점이며, 루카치의 리얼리즘 비평과 소설론은 훨씬 폭넓고 풍부하다. 예컨대 똘스또이와 도스또옙스끼 등 러시아문학에 관한 일련의 비평은 ‘19세기 전반기 중서부 유럽 장편소설의 원리’를 러시아문학에 적용한 것이라기보다, 상이한 역사적 상황에서 소설 장르의 잠재적 가능성이 새롭게 구현된 위대한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성찰이며,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론과 소설론 자체의 이론적 확장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모더니즘에 대한 루카치의 평가 역시 논란이 되는 쟁점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루카치의 모더니즘 비판을 ‘퇴폐적인 예술작품의 즉결처분’이라고 했지만, 김경식은 루카치가 “‘좋은’ 모더니즘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저항을 일방적으로 부인한 것이 아니라 그 저항의 한계를 지적했다”(338면)고 균형을 바로잡는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 루카치의 카프카론인데, 카프카를 “알레고리 예술의 원형”(547면)으로 읽는 관점에서 “히틀러 시대의 암울한 무(無)”(554면)를 가리키는 역사성을 획득했다고 평가하는 관점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루카치가 여전히 카프카 문학을 바깥에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루카치의 해석에서 자본주의를 파악하는 카프카 나름의 총체성은 포착되지 않으며 여전히 알레고리적 독법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카프카론에서 보이는 완강한 관성은 그의 리얼리즘론에 쇄신의 계기가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어쩌면 발자끄를 서구 리얼리즘의 최고봉으로 설정할 때 이미 그런 한계가 주어진 것은 아닐까. 물론 김경식이 설명하듯이 루카치는 「예술과 객관적 진리」(1934)에서 누구도 셰익스피어나 발자끄처럼 쓸 수 없고 그렇게 써서도 안 된다며 중요한 것은 그들의 창작방법의 비밀을 간파하는 것으로, 그 비밀은 “다름 아닌 객관성, 즉 시대를 그 본질적 특징들의 역동적인 연관관계 속에서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반영하는 것”(461면)이라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1930년대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에서 ‘예술적 진리’의 객관성은 반영론에 의지함으로써 그 내용상 과학적 진리와 구별되지 않는 문제를 노정했다. 이를 두고 백낙청은 「작품·실천·진리」(1986, 『민족문학의 새 단계』, 개정판 창비 2022)에서 “루카치는 예술과 과학이 그 방법에 있어 대조적이나 크게 보아 동일한 목표를 지녔다고 보며”(368면) 그에게 예술적 진리는 과학에서의 정확성과 애당초 차원을 달리하는 개념은 아니었다고 갈파했다. 백낙청이 로런스론에서 루카치 리얼리즘론의 기본범주인 특수성이 “창조적인 개체 내지 특수자로서밖에는 있을 수 없는 삶에 대한 깨달음(겸 그러한 삶의 실천)에 값하는 사유”(「‘다른 어떤 율동적 형식’과 리얼리즘」 299면)가 되어야 한다고 요청한 것은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을 반영론의 한계로부터 구제하는 소중한 통찰이다. 김경식은 루카치의 중기 리얼리즘론보다 더욱 확장된 후기 미학의 핵심범주인 특수성의 해명을 차후 연구과제로 언급하는데, 이를 통해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 논의에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루카치는 만년에 자서전을 위한 메모에서 “‘리얼리즘의 승리’에서 바로 역사의 진리가 발현”(296면)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것을 김경식은 주관성을 지양하는 원리인 리얼리즘의 승리가 궁극적으로는 역사를 일구는 창조적 실천과 연결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김경식의 저서에서 우리는 루카치의 소설론과 사상, 아니 그의 삶 전체가 그러한 창조적 실천에 헌신한 분투였음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