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민주시민들이 간절히 소망해온 한편의 시
▶ 생명의 태동을 알리는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하는 지금 대한민국이 새롭게 일어나야 할 때이다. 대한민국은 윤석열정부를 지나오며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렸다. 지난호 특집의 한홍구 「한국의 보수는 왜 민주주의와 접속하지 못하는가」는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 알아야 할 근본적인 문제들을 짚어준다. 탄핵된 두명의 대통령은 흔히 ‘보수’라고 말하는 곳에서 나온 인물들이다. 물론 이들은 ‘보수’의 정신과 가치를 실현하지도 못했는데 그 근원적 이유를 한홍구의 글 속 백여년 역사를 따라 읽으며 톺아볼 수 있었다. 김소라의 「연대로 확장된 광장과 민주주의」 역시 인상깊게 읽었다. 특히 2030 여성들이 뛰어난 활약을 했다는 점, “촛불 대신 응원봉을 들었고, 선결제한 음식과 음료, 방한용품과 의료용품, 난방버스와 키즈버스 등”을 마련하며 “새로운 집회 풍경”(33면)을 만든 광장의 주체들이라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봄호에서 가장 먼저 읽은 시는 고재종 「걷는 사람」이다. 시를 읽으며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날이 떠올랐다. 탄핵소추안 가결이 예정되었던 12월 14일에 나는 아내와 함께 국회로 향했다. 국회의사당에 도착하기까지 8킬로미터 정도 걸어야 했다. 그 길 위에 함께 섰던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간절히 소원했을지를 떠올려본다. 그렇듯 염원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걷는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의 ‘특권’임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기억에 남는 시는 손택수 「무등산 봄까치풀」 「리듬의 역사」다. 윤석열이 파면되던 날에는 시인처럼 나도 “아, 참 좋다”고 하신(「무등산 봄까치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영구집권을 노렸던 내란수괴 윤석열의 무도한 꿈을 시민들의 힘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응원봉이 반짝이고” “트랙터들이 남태령을 넘어오고” “노숙과 하청노동자와” “국적 성별이 묘연한 당신들”(「리듬의 역사」)이 함께한 축제 같은 힘에 의해서 말이다. 창비주간논평 「2025년 4월 4일,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2025.4.8.)에서 문학평론가 양경언은 윤석열이 파면된 날을 “승리의 순간” “역사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탄핵선고 인용문이 지금까지 귓가에 생생하다. “탄핵사건이므로 선고시각을 확인하겠습니다. 지금 시각은 오전 11시 22분입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이 주문은 대한민국 민주시민들이 간절히 소망해온 한편의 시가 아니었을까. 앞으로도 우리가 새 시대의 시를 써나가기를 소망한다.
이재철 santaclausly@daum.net
‘변혁적 중도’에 대한 실감이 확장되기를
▶ 팔순이 넘은 아버지와 함께 『창작과비평』을 읽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버지에게 ‘읽히고’ 있다. 『월간 조선』 애독자이자 얼마 전부턴 지인들의 영향을 받아 수구 선동적인 유튜브 영상을 보는 아버지가 더는 우리 삼남매와 멀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난호는 12월 3일 밤에 국회로 가지 못한 부채감을 안고 특별하게 읽었다. 대화(「돌아온 트럼프, 다자주의로 돌파하자」)에서 윤석열정부가 계속됐다면 상황이 더 나빴을 거라는 내용에 공감했다. 트럼프 시대에 대한 대응으로 다자주의 외에 더 뚜렷하고 통쾌한 방법은 없는지 내용상 아쉬움도 남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이왕 이렇게 불확실하다면, 역시 방법은 다음 대선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현명히 선택하고 그를 국민의 도구로 삼아 대응해나가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평소 뉴미디어에서 자주 접했던 이들이 대화 참여자로 나온 것이 반가웠는데, 앞으로도 대중친화적인 인사들이 자주 출연해주면 좋겠다.
최근 진보정당의 모습에 실망하고 회의적인 나를 두고 친구들은 나이 들어가며 보수화되는 거라고 핀잔을 주는데, 지난호 특집 글들을 읽으며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는 점에 동감하고 그 필요성을 실감할 수 있어 좋았다. 다만 변혁적 중도에서 변혁은 한반도의 변혁을 뜻하는데, 분단체제가 우리 사회 여러 문제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대중적 차원에서 좀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설득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남주 「김대중사상과 K민주주의」는 이 내란사태에서 김대중이라는 큰 사람을 변혁적 중도의 관점에서 보게 해줘서 도움이 됐다. 현장란에 실린 국가인권위원회 문제도 그렇고 차기 정부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문재인정부처럼 저들이 싸놓은 ‘똥’만 치우다 끝날까봐 걱정도 되지만, 더 큰 걸음을 가리라는 믿음이 더 굳건하다. 다음호를 받을 때가 바로 대통령선거 무렵일 텐데, 기쁨과 기대 속에서 여름호를 기다리려 한다.
김찬기 jackie278@hanmail.net
문학에서 얻는 ‘다시 살아갈 힘’
▶ 지난호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작품은 정호승 시 「마음을 먹었다」이다. “밥을 먹을 때마다 실은 마음을 먹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매 끼니 삼키는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의 온기와 정성 그리고 함께했던 시간들이다. 밥상 위에는 손으로 다듬고 정성으로 끓이고 기다림으로 익힌 마음이 놓인다. 그러니 집밥을 먹는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 한조각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 정호승의 시를 읽다보면 마치 익숙한 밥상 앞에 앉아 따뜻한 한끼를 대접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삶에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소박한 일상 속에서 반짝이는 의미를 찾아내는 그의 언어는 따뜻한 국물 한모금처럼 내 속을 은근하게 데워준다. 시인의 언어는 거창하지 않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작은 순간들을 붙잡아 조용히 이야기한다. “당신이 보고 싶어 배가 고프면 냉장고에 넣어둔 마음을 꺼내 먹는다”는 한 문장만으로 그리움이 어떻게 허기가 되고 기억이 어떻게 한끼의 위로가 될 수 있는지 담담하게 보여준다. 억지스러운 미화나 과장된 감정 없이 평범한 순간 속에서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랑과 그리움의 온도를 찾아내는 시인이다. 시를 읽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문득 누군가가 보고 싶을 때,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듯 마음을 꺼내어 먹어본다. 사랑을 씹고 추억을 삼키며. “마음을 먹으면 배가 고프지 않다”.
윤가은 bichkkalz@gmail.com
우리의 사상적 기원을 만나는 반가움
▶ 지난호 ‘책머리에’(백민정 「빛의 서사로 써나갈 새로운 질서」)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전에는 다양한 사회현상을 서구 철학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유용하고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최근 우리가 겪은 민주주의의 ‘대사건’들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이상한 감각이 생기고 있던 차였다. 예컨대 ‘남태령대첩’의 의미를 말할 때 전봉준과 동학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우리 안에서 벌어진 일을 스스로 이해하고 널리 말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우리의 철학으로 민주주의적 사건과 사회를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나, 종종 이런 생각에 잠기며 우리 안의 사상적 기원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마침 머리글에서 우리 고유의 ‘전등서사’에 빗대어 ‘빛의 혁명’을 이야기한 점이 반가웠다.
특집에서는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와 김소라의 「연대로 확장된 광장과 민주주의」 사이에 얼마간 아쉬운 공백이 있다고 느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며, 변혁적 중도의 주체를 말할 때 정치인이나 정당을 호명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기면서도 광장의 여성이나 퀴어, 장애인을 주체로 세우는 데에는 인색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됐다. 그 아쉬움을 채워준 것은 황정은 소설 「문제없는, 하루」였다. 누구보다도 분명하고 절실하게 광장의 주체로 움직이고 있지만, 끝내 제도권 안에선 주체로 호명되지 못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의 어두움이나 서글픔 같은 것들이 충분히 묘사되고 있어 공감하며 읽었고, 분출되는 감정에서 도리어 이들의 힘을 느꼈다. 이 소설이 해내고 있는 바를 확장해 2030 여성을 변혁적 중도의 주체로 호명하면 어떨까. 변혁적 중도를 더 널리 알리고 설득하는 데에도 좋지 않을까. 한편 이남주의 「김대중사상과 K민주주의」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생생한 글이 다수 인용되어 있었는데, 그 시대의 진보적인 생각들에 놀라워하며 읽었다. 그밖에 송희지 시인의 「농장」 두편도 재미있었다. 스타일리시하면서도 서정을 놓치지 않는 매력이 놀라움을 주었다.
김버드 chancho.ro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