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새 시대의 이야기를 쓰기 위하여
국민주권정부가 출범한 지 어느덧 두달여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비상계엄 내란 이후 온 국민이 애쓰고 분투한 시간이 쌓여 정권교체를 이룬 순간 느꼈던 뿌듯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각자의 한표에 나라와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이 깃들어 있음을 절감하면서, 이전에 당연하듯 여겨온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도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제야말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작업이 본격적인 출발점에 선 듯하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효능감을 느긋하게 음미할 여유도 없이 당장 해결해야 할 나라 안팎의 과제가 밀려들고 있다. 격변하는 국제환경에 대한 대응은 물론이고 지난 정부에서 가로막혔던 각종 개혁의 쟁점에 대한 논의, 관련된 법안 처리에도 절차와 조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법질서를 노골적으로 유린하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발버둥친 내란 당사자들의 처벌을 포함해서 사회 깊이 뿌리박힌 기득권 카르텔의 청산과 개혁이 시급하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지만 후안무치한 적폐세력의 민낯을 거듭 마주하는 과정은 끈질긴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 안의 낡은 찌꺼기를 끄집어내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하므로 방심이나 나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평화적 민주주의의 여정을 통해 시대에 걸맞은 정부를 세우고 민의를 새롭게 다져온 경험이 있는 우리 국민들은 이번에도 광장과 일상의 연대가 함께하는 밀도 높은 정치적 실천을 체감했다. 시민들의 정치적 역량 강화와 변화된 감수성은 최근 출간된 도서들에서도 눈에 띈다.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와 20대 대선을 경험했던 청년들이 내란사태를 거치며 공동의 기반을 새롭게 다지는 과정이 주목된다. 계엄 당시 국회 앞으로 곧장 달려간 일이나 눈과 추위를 견딘 ‘키세스 시위대’, 남태령에서의 예기치 않은 만남 등을 통해 젠더・노동・지역 등 다양한 영역에서 민주적 감수성이 도약하는 경험들이 새겨져 있다. “연대를 구축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청년 세대를 아우르는 공통 담론이 부재한다는 점”(최나현 외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267면)이라는 문제의식도 눈길을 끈다. 그러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고 공감하며 다진 연대가 있기에 “불신과 환멸과 걱정과 불안으로 말라 죽을 것 같던 마음”과 “세상을 향한 감(感)”(황정은 『작은 일기』, 166면)이 단숨에 달라지는 기쁨의 경험 역시 가능하다. 황정은이 인용하듯 “혼자서는 어떤 이야기도 그리 멀리까지 이끌어갈 수 없다.”(배리 로페즈 『호라이즌』, 같은 책 167면에서 재인용) 특정한 세대나 분파의 경험을 넘어서는 폭넓은 공유와 연대의 터전이 있어야 오래된 적폐와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
고난의 과정을 거쳐 성숙한 민주주의는 그 눈높이에 맞는 새로운 시야와 담론을 필요로 한다. 광장의 열기와 거리의 함성이 실질적인 제도로 관철되기를 촉구하는 요구 역시 열렬한데, 이 또한 담론의 쇄신과 도약이 있어야 할 일이다. 좋은 뜻과 의지를 담은 이야기라도 지난 시대를 되풀이하는 진부한 선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내기도, 기존의 법과 제도에 실질적 변화를 만들기도 어렵다.
갈라진 마음을 모으고 변화의 방향을 노정하기 위해서는 상투적인 정답주의를 넘어서는 대범하고 참신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 시대에 걸맞은 눈높이로 설계되는 변혁담론의 방향성과 역사성이다. 그런 점에서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백낙청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는 말만큼 적실하게 당도한 선언도 없다. 변혁적 중도의 길은 그동안의 급진 담론들이 한반도 분단체제라는 제약을 건너뛰고 관념적 사유로 매몰되거나 현실감각을 도외시한 문제들을 날카롭게 짚으며, 세계 자본주의체제가 심화시킨 불평등과 경쟁구도의 삶을 넘어서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체제전환의 사유와 담론을 만들어간다. 사회의 부문운동들이 제안하는 노동・젠더・교육・기후 의제들 역시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방향성 아래 중도세력의 광범위한 연합을 도모함으로써 그 실천성을 높일 수 있다. 이렇듯 “분단체제의 성격과 그 일환으로서의 한국사회에 대한 다수 대중의 각성을 수반하는 국민통합 작업”(같은 책 63면)은 창조적 담론의 연마와 사람들 각자의 삶에서 이루는 마음공부를 통해 가능한 실천과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쌓아온 민주주의의 역사는 개별 국가의 안녕을 넘어서 세계평화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차비를 갖추었다. 이제 민주시민의 역량이 축적된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문맥적으로 파악하고 아우르는 이야기를 한층 심화된 차원에서 제대로 써볼 때이다. 이렇듯 이어지고 도약하는 미래적 이야기의 열린 힘에 대해서 한강은 창작자의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한강 『빛과 실』, 12면) 여러 위기 그리고 그에 대한 극복의 열망 속에서 시대적 감수성은 변화해왔고, 빛의 서사를 매개로 새롭게 열린 2025년체제는 시민들의 간곡한 마음과 의지를 기반으로 나은 미래를 내다보게 되었다. 이제 더 멀리 가볼 수 있는 길이 우리 앞에 열렸다.
이번 특집은 ‘2025년체제와 새로운 한반도’라는 주제로 남북관계의 진전된 미래와 동아시아 평화, 지역균형발전의 가능성 등 남한-한반도-동아시아 및 세계를 아우르는 현안을 검토하고 모색하는 글들을 실었다. 분단체제의 극복을 목표로 하는 한반도평화의 모색이 세계평화의 과제와도 긴밀히 연관됨을 타진하는 글들이다.
정현곤은 남북간 충돌을 유도한 내란세력에 대한 진압으로 한반도평화 위기가 큰 고비를 넘긴 상황에서, 북한의 두 국가론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살핀다. 북의 변화가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글로서,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는 시대인식을 바탕으로 한반도평화와 민주개혁이라는 과제가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북간 새로운 관계 형식부터 군사문제 해결 및 경제협력에 대한 실질적 방향전환까지 도모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쟁점을 담고 있다.
정욱식은 최근 양안문제를 둘러싼 미국 정부의 동아시아 전략 재편 움직임이 한반도평화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음을 환기한다. 동아시아 전쟁위기론의 허와 실을 꼼꼼하게 짚으면서 2025년체제를 만들어가는 우리 정부와 민간의 역할, 국제연대의 방안을 타진한다. 함명준은 한반도의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변화로 지역균형발전과 남북협력을 논한다. 평화경제특구 및 북극항로의 거점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고성군 사례를 주목하여 분단과 평화, 공존의 서사를 실현하는 실천적인 공간을 열자는 제안이 긴요하다.
대화는 이욱연의 사회로 변지원 차태근 최필수가 참여해 ‘변화하는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토론을 나눈다. 미중대립의 긴장상황에서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혐중정서의 정치적・국제적 함의부터 한중이 공유하는 동아시아 발전국가모델의 한계, ‘중국식 현대화’의 과정과 의미, 우리가 참조할 대안문명의 가능성까지 두루 살핀다. 한중의 체계적 협력 구축의 필요성과 미래세대를 향한 논의까지 더해져 풍부한 토론의 장을 열어놓는다.
논단에서는 한반도와 세계의 현실을 연결하는 다채로운 쟁점을 담은 네편의 글을 소개한다. ‘K담론을 모색한다’는 일곱번째 연재를 맞아 독립운동가이자 삼균주의의 창시자인 조소앙의 사상을 조명한다. 백영서는 소앙의 삼균주의가 한반도 고유의 사상을 기반으로 근대 민주주의와 나라만들기의 과제를 창조적으로 소화한 것이라 보며, 변혁적 중도의 사상적 계보에서 이를 면밀하게 논한다. 소앙 사상이 품은 변혁성, 그리고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적 문제의식이 동아시아의 중요한 문명자산과 연결되는 지점을 부각한 글로서 주목된다.
김현우는 기후운동 및 체제전환 차원에서 근대 이중과제론과 변혁적 중도론이 제기하는 현재적 쟁점을 비평적으로 점검하면서 다양한 탈성장 논의들을 살핀다. 기후붕괴의 현실을 다각도로 성찰하고 대안을 내는 서사적 접근이 여러 경로의 담론으로 구축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백지운은 반둥회의 70주년을 맞아, 반둥의 담론과 사유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돌아본다. 비동맹・자주독립・평화공존의 원칙을 천명했던 역사 속의 반둥 선언이 오늘날 각 지역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세계체제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위해 필요한 시각을 환기한다. 박재우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가 지니는 의의를 동아시아 문화사의 맥락에서 풍부하게 조명한다. 전통적인 문화예술의 덕목을 변화하는 현실의 삶과 연결하는 이 저술작업의 실천적인 의미를 살피는 가운데 분단시대 문화가 수행해야 할 역할을 환기한 점도 중요하다.
현장은 최근 발생한 이란-이스라엘 12일전쟁의 전개와 배경,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다각적이고 치밀하게 분석한 애덤 샤츠의 글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필자는 가자전쟁의 참상 이후에도 반성없이 중동전쟁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서구 정책자들의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우익 전체주의와 종족민족주의가 부상하고 기본적인 법질서가 파괴되어가는 세계적 상황과 이스라엘의 패권적 선택이 중동과 세계에 불러일으키는 위기를 생생하게 환기하는 글이다.
창작란에서는 신인시인상을 수상한 방성인을 포함하여 12명의 시인이 이 계절의 반가운 신작을 소개한다. 이번호 백수린의 장편연재를 시작하니, 삶의 장소와 기억에 깃든 역사적 체험을 곡진하고 섬세하게 형상화한 새 소설에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 공선옥 김멜라 조해진의 신작 단편과 신인소설상 김소라의 작품도 독자들을 반긴다.
작가조명에서는 시인 박승민이 시집 『뒤로 걷는 길』을 출간한 황규관과 만나 깊이있는 대화를 나눈다. 지역 공동체의 핍진한 삶과 기억을 바탕으로 문명사상을 탐구하고 상상력을 진전시켜온 황규관 시의 개성과 미덕을 사려깊게 조명한 글이다. 산문은 ‘내 삶을 돌본 것’ 연속기획을 이어간다. 작가 고수리가 제주에서 보낸 성장의 시간에 대해 애틋한 이야기를 전한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하는 이불의 기억, 숨비소리와 자장가의 추억을 통해 어린 생명을 돌보고 키운 이들의 사랑과 노고를 돌아본다.
문학평론에서 한영인은 본지 지난호 특집의 쟁점을 이어 최근 문학에 나타난 리얼리즘의 사유와 정동적 전환의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논한다. 헨리 제임스와 성해나 소설을 현재적으로 연결하여 문학예술이 추구하는 리얼리즘의 경지를 가늠하고 세밀하게 분석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박동억은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에서 드러난 감정의 정치성을 살피면서 오늘의 시가 추구하는 인간됨의 의미를 분석한다. 남현지 유선혜 윤초롬의 작품을 통해 인간을 참답게 사유하려는 시적 노력을 읽어내는 시선이 깊고 여울지다. 신인평론상을 수상한 이미진은 김기태 소설에 담긴 리얼리즘의 함의를 평가하면서 미시적 삶을 연결하는 힘으로서의 유토피아적 충동이 작품에 구현되는 과정을 세심하게 분석하는 의의를 보여준다.
문학초점에서는 정우영 류수연이 각각 이 계절의 주목할 시와 소설을 선정해 독자에게 알찬 리뷰를 전한다. 촌평에서는 여러 분야의 주목할 신간을 충실하고 흥미롭게 평한 글들을 소개한다.
제43회 신동엽문학상은 한여진(시) 성해나(소설) 전기화(평론)가 수상하였다. 각별한 축하를 보내며, 2025년 창비신인문학상 수상자들에게도 축하와 격려를 전한다. 만해문학상 최종심 대상작에 대한 평과 더불어 겨울호에 이어질 수상작 발표에도 관심을 부탁드린다.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계절의 끝에 가을호를 엮는다. 책에 담긴 정성스러운 글과 작품을 보면서 새로운 사유와 감수성에 대한 요구가 한껏 차오르고 있는 현실의 변화를 실감한다. 여러 사람들의 뜻과 마음이 너른 영역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와 경험이 앞으로도 절실하다. 갈라진 사회를 통합하고 제대로 된 방향을 고민하는 길 위에서 본지 역시 창조적인 사유와 실천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정성과 지혜를 모으기로 다짐한다.
백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