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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25년체제와 새로운 한반도

 

동맹의 사슬을 넘어 동아시아 평화만들기

 

 

정욱식 鄭旭湜

평화네트워크 대표, 한겨레평화연구소장. 저서 『달라진 김정은, 돌아온 트럼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 『핵과 인간』 등이 있음.

wooksik@gmail.com

 

 

들어가며

 

전쟁과 평화의 문제와 관련해 필자가 최근 조금은 안심하는 부분이 있고, 반대로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가 있다. 일단 남북갈등이나 북미갈등이 그 자체적으로 폭발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아졌다. 1990년대 이른바 ‘북핵문제’가 불거진 이후 가장 큰 두려움은 미국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대북 선제공격에 나서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 1이 보복에 나서면서 한반도가 전화(戰火)에 휩싸이는 데 있었다.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있다’는 미국의 입장은 이를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이래로 미국 내에서 대북 선제공격론은 자취를 감췄다. 그후로는, 특히 윤석열정부 시기에는 남북의 국지충돌과 확전 가능성이 근심거리였다. 그러나 윤석열정부의 조기 퇴진과 이재명정부의 출범으로 남북간 직접적인 무력충돌 가능성은 낮아졌다. 무엇보다 윤정권이 계엄선포의 구실을 찾기 위해 조선의 무력도발을 유도하려고 했던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에 ‘빛의 혁명’으로 윤석열을 파면한 한국 시민은 ‘한반도 피스메이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그러면 현재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무엇일까? 대만해협에서 충돌이 발생해 이 전화가 ‘동맹의 바람’을 타고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로 번질 수 있다는 위험이다. 가능성이 높지 않다 해도 두려움의 본질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커지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전쟁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군비증강에 매달릴수록 민생·경제 위기와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역량과 협력은 위축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미국 워싱턴과 중국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필자가 2005년 5월에 펜타곤(미 국방부 청사)을 방문해 고위 관료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핵심적인 주제는 당시 한미동맹의 뜨거운 쟁점이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었다. 그 무렵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주한미군을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해 한반도 ‘밖’, 특히 대만 유사시에 투입할 수 있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나는 “미국이 주한미군을 대만 유사시에 투입하면 한국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물었고 펜타곤의 고위 관료는 한국도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럼 동맹인 한국의 동의 없이 주한미군을 투입한다는 것이냐. 말이 되느냐” 하고 따져 물었다. “한국이 동의해주면 좋지만, 근본적으로 미국 군사력을 어떻게 운영하느냐는 미국의 주권사항”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두려움이 엄습해온 순간이었다.

그 이후 중국 인사들과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다. 그를 통해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의 개입이 한중전쟁의 도화선이 되리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인사들은 “주한미군이 개입하면 미군기지에 보복을 가하게 될 것”이라 했고, 나는 “미군기지가 한국 영토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한국군의 대응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국이 대만문제 거론을 ‘내정 간섭’으로 여겨 대화 중에 얼굴을 붉히는 일도 더러 있었지만, 양안분쟁이 한국인에게도 ‘바다 건너 불’이 아니라는 점을 전달하면서 중국 전문가들과 희미하게나마 공감대를 만들 수 있었다.

양안문제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흐름은 이후 더욱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한미·미일 동맹뿐 아니라 한미일 차원에서도 중국에 대한 견제와 봉쇄의 수위를 높여온 가운데 중국도 강경대응을 선택하면서 대만해협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반의 긴장은 심화되어왔다. 이 와중에 양안관계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양안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입장을 전적으로 두둔해온 조선의 선택 역시 대만 유사시 중대 변수가 될 터이다. 지난해 군사동맹을 복원하고 포괄적 협력을 선언한 조선·러시아 관계 역시 변수인 것은 마찬가지다. 이러한 변수들이 악순환을 형성하면 ‘동맹의 체인’에 엮여 몽유병자처럼 전쟁으로 빨려들어간 1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상황이 동아시아에서도 벌어질지 모른다.

미중간의 전략경쟁이 첨예해지고 있는 와중에 대만해협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은 이재명정부에게도 큰 딜레마이자 고심거리가 될 것이다. 정부가 표방하는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와 상당한 긴장관계에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 문제에 있어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극히 제한적인 듯 보이지만, 사태 발생시에는 우리의 운명이 더욱 급격히 타자화될 수 있으므로 우리의 해법을 찾아가야 한다. 한반도문제와 대만문제가 고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정부와 민간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기라는 뜻이다. 윤석열 파면과 새 정부 출범 이후 더욱 절실해지고 있는 ‘좋은 나라 만들기’의 성패도 상당 부분 여기에 달려 있다.

 

 

2027년 동아시아 전쟁론의 허와 실

 

‘중국이 2027년에 대만을 침공할까?’ 최근 국제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질문이다. 물론 중국의 시 진핑(習近平) 주석이 이를 지시했다거나 중국 인민해방군이 이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내가 만나본 중국 전문가들도 2027년 침공설은 미국과 대만의 프로파간다라는 입장이 강하다. 그런데도 진짜로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전략적 의도를 가지고 이를 유포하고 있는지 2027년 중국의 대만 침공설은 더 강력해지고 있다.

양안관계를 살펴보자. 작년 5월 20일 취임 일성으로 “중화민국(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서로 예속되지 않는다”며 “현상을 유지하겠다”고 말했던 라이 칭더(賴清德) 총통은 ‘현상 유지’보다는 사실상의 독립을 향한 ‘반중국’ 노선에 가속 페달을 밟아왔다. 대만은 3월에 중국을 ‘역외 적대세력(境外敵對勢力)’으로 규정하고 연례 군사훈련의 목표로 “2027년 중국 침공에 대비”한다고 명시했다. 라이 칭더는 6월 하순에 “대만은 국민·영토·정부·주권을 가진 명백한 국가”라며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대만을 자신의 일부로 간주해온 중국은 이러한 일련의 행보에 대해 라이 칭더 정권이 분리독립을 추구하고 있다며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대만포위 훈련의 빈도와 강도를 높이는 한편, 대만산 농수산물 관세면제 조치를 중단하는 등 경제적 압박도 강화하고 있다.

양안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 내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크다. 기실 2027년 중국의 대만 침공설의 진원은 미국이었다. 2021년 3월 9일 미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필립 데이비슨(Philip Davidson) 인도·태평양사령관이 “중국이 6년 이내에 대만에 대해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 것이다. 그리고 올해 5월 말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대화) 연설에서 피트 헤그쎄쓰(Pete Hegseth) 국방장관은 “시 진핑 주석이 중국군에 2027년까지 대만 침공 준비를 마치라는 명령을 내렸다”며, “중국군은 실제로 리허설을 하고 있고, 중국이 야기하는 위협은 현실적이고 임박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진폭도 큰데, 그는 지난 3월 대만의 반도체기업 TSMC가 1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한 자리에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재앙적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말해 중국을 자극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중순에는 중국과의 관세협상 결과를 설명하면서 “통일과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해 대만을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 대만문제를 카드화함으로써 통상문제에 있어 중국과 대만으로부터 최대의 양보와 이익을 끌어내려는 속셈이 보이는 대목이다. 또 그는 전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 여러차례 중국의 대만 침공시 대만 방어의지를 밝힌 것과는 달리, 전략적 모호성을 선호해왔다.

그렇다면 ‘2027년 전쟁설’의 허와 실은 무엇일까? 우선 가능성은 낮더라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의견이다. 많은 이들은 미국과 중국이 다량의 핵무기를 보유한 상황에서 전면전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국제정치에서의 ‘안전과 불안의 패러독스’(security and insecurity paradox)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말은 ‘핵 대 핵’의 대결상태에서 핵전쟁으로 비화될 큰 전쟁은 억제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바로 그 핵의 위력 때문에 작은 전쟁은 벌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해 2019년 11월 중순 동아시아 순방에 나섰던 마크 밀리(Mark Milley) 당시 미 합참의장의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우리는 70년 동안 강대국 사이의 평화를 유지해왔다. 전쟁은 있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제한전이었다. 강대국 사이의 전쟁은 없었다”고 말했다. 2 이 발언에는 전쟁과 평화를 대하는 미국의 시각이 잘 반영되어 있다. 미국의 마지노선은 미국 본토가 핵공격을 당할 수 있는 강대국과의 전쟁을 예방하는 것이지만,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지 않는 제한전은 고려 대상일 수 있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의 셈법은 러시아-우끄라이나전쟁 과정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대만해협의 핵심적인 행위자들인 미국·중국·대만 모두 2027년이 정치적으로 매우 예민한 시기라는 점도 우려를 키운다. 2027년은 미국 중간선거 이듬해이자 대선을 일년 앞둔 시점이다. 중간선거 결과 및 대선 전망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가 어떤 무리수를 둘지 예측하기 어렵다.

동시에 2027년은 시 진핑 주석의 4연임 여부가 결정되는 해이다. 대만과의 통일이 ‘역사적 임무’라고 말해온 시 진핑 입장에서 대만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대만도 2028년 1월 총통 선거가 예정되어 있어 2027년 10월부터는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종합해보면 라이 칭더는 ‘반중국·독립추구’를 앞세워 재선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대만의 미래에 대한 중국의 불안감을 키워 중국이 대만에 대한 압박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개연성으로 연결된다. 라이 칭더가 재선에 성공할 경우 당 헌장에 ‘주권 독립한 대만공화국’ 수립을 명시한 민주진보당(민진당)이 네번 연속 집권하는 셈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처럼 양안관계의 대삼각관계에 해당하는 미국·중국·대만 모두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진입하고 있는 가운데 이것이 어떠한 화학작용을 일으킬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대만해협은 물론 그 인근에도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회색지대’(gray zone)가 많고 이를 둘러싼 갈등이 커지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전쟁과 평화의 경계에 있는 회색지대는 언제든 화약고로 돌변할 수 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한국과 조선의 오랜 갈등과 수차례의 무력충돌을 떠올려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적 두려움의 확산과 동맹의 체인

 

미국 정계의 주류가 된 미국의 대중국 매파(강경파)들은 중국이 대만을 장악하면 아시아 주둔 미군을 쫓아내고 아시아 전반을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할 것이라며 ‘공포 마케팅’에 여념이 없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과 군사력 현대화, 그리고 대만문제에 대한 강경한 태도는 이러한 ‘중국위협론’의 밑거름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두려움은 개별적으로, 혹은 진영화된 형태로 소비되고 있다. 미국의 ‘중국위협론’ 설파의 바탕에는 이대로 가다가는 중국에 패권적 지위를 넘겨줄 수 있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은 미국이 근거없는 중국위협론을 앞세워 대만의 분리독립을 부추기고 중국의 부상을 억누르기 위해 대만 카드를 활용한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대만은 중국의 침공 가능성과 미국의 대만 방어 포기 가능성이라는 ‘이중적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한편 일본은 ‘대만 유사사태가 곧 일본 유사사태’라는 두려움을 안고 본격적인 재무장 및 미일동맹 강화에 나서고 있다. 한국은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 투입에 동의하면 원하지 않는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두려움과 함께 이를 거부하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도 안고 있다. 양안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입장을 전적으로 두둔해온 조선의 속내는 알기 어렵지만, 중국의 유일한 동맹이라는 위치와 자칫 전쟁의 불씨가 한반도로까지 번질 가능성 사이에서 좌고우면한다.

이렇듯 개별적이고 진영화된 두려움은 배타성을 띠고 있다. 일방적 두려움은 상대를 위협자로 인식해 적대적 언사와 군사태세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두려움 역시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어느 일방의 공포가 상대에 대한 적대감으로 표출되면 그 상대 역시 적대감으로 응수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일방적 두려움을 잘 관리해야 한다. 어떤 사유로든 양안문제에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하면 미국의 동맹인 한국·일본·호주·필리핀이, 중국의 동맹인 조선과 조선의 동맹인 러시아가 개입·연루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불안감을 해결하려는 방안이 ‘억제’에 맞춰져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응책의 핵심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자체적으로도 역대급 군비증강을 추진하는 한편, 대만의 국방비를 대폭 늘려 방어역량을 보강하고 한국·일본·호주·필리핀 등 동맹국들과의 군사적 결속도 강화하려고 한다. 이에 맞서 중국은 대만의 분리독립 시도는 “재앙”이 될 것이라며, “강철 만리장성 앞에서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라는 위협적인 언사를 동원한다.

그런데 억제에 의존하는 방식은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중 억제력 강화를 위해 대만에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최대 10퍼센트까지, 한국·일본·호주 등에는 GDP 대비 최대 5퍼센트까지 방위비를 인상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이 동맹국들에게 전쟁 발발시 어떻게 할 것인지 대놓고 묻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미국 자신의 셈법과 미국이 동맹에게 요구하는 것 사이의 ‘불일치’를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이 동맹에게 막대한 군비증강을 요구하고 있는 데에는 대중 억제 강화뿐 아니라 일종의 장삿속도 깔려 있다. 동맹이 방위비를 올릴수록 무기 수출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럼프 행정부는 억제에 실패할 경우 어떻게 하겠다는 명확한 입장표명을 꺼린다. 유사시 미국의 대만 방어 여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정작 동맹에겐 구체적인 군사적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의 전형에 해당한다. 동맹의 군비증강을 통해 미국의 군사적 부담은 줄이고 무기 수출은 늘리며, 대만문제를 앞세워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달성하고, 유사시 미국이 치르게 될 인적·물적 피해를 가급적 동맹에 전가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렇게 나올수록 동맹국의 딜레마도 커질 수밖에 없다. 방위비를 인상할수록 민생경제에 사용할 재원은 줄어들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이 가중되는 가운데 대만 유사시 연루될 위험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딜레마

 

대만문제를 앞세운 트럼프 행정부의 동아시아 전략 재편 움직임은 이재명정부가 마주하게 될 가장 큰 딜레마이다. 주한미군을 포함한 한미동맹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주춧돌 가운데 하나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기 양안문제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의 직간접적인 역할을 강하게 요구하는 분위기이다. 더구나 한미 일각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에게 ‘친중국’ 혐의를 씌워 정부의 운신 폭을 제한하려고 한다. 정부가 내세운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가 미국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가로막힐 염려가 있는 셈이다.

한미동맹과 관련해서 미국에서는 방위비 분담금 및 한국의 자체 방위비 대폭 인상,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역할 변경(전략적 유연성) 추진 등 다양한 요구와 주장이 나오고 있다. 단, 여기서도 초점은 대만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 억제력 강화에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일부에서는 주한미군을 감축해 괌 등지로 이전하는 것이 대중 억제에 더 낫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제이비어 브런슨(Xavier Brunson) 주한미군 사령관은 한국을 “일본과 중국 본토 사이에 떠 있는 섬 혹은 고정된 항공모함”이라고 부르면서, 대중 견제에 있어서도 거리상으로 중국과 가장 가까운 주한미군의 전력을 유지·강화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미군이 “전방에 배치되어 있음으로써 사실상 적의 접근거부·지역거부(A2/AD) 영역 안에서, 그리고 그들의 심리적 공간 안에서 작전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3 또 미국 국방부 고위 당국자는 5월 29일에 “중국에 대한 억제력이 우리의 우선순위”라며 “한국정부와 동맹을 현대화하고, 지역 내 안보환경의 현실을 반영해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태세를 조정(calibrate)하기 위해 한국정부와 협력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4

우리로서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수용하면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릴 우려가 커지고 윤석열정부 때 악화된 한중관계 회복에도 큰 걸림돌이 되고 만다. 반대로 전략적 유연성을 거부해 미국이 실제 미군 감축을 추진하면, ‘안보 공백론’과 더불어 그 책임을 이재명정부에 돌리려는 수구기득권 세력이 정쟁의 수단으로 삼을 것이다. 게다가 국방비를 대폭 증액하면 남북간 군비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조러 군사협력 강화의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창작과비평』이 화두로 제시한 ‘2025년체제 만들기’ 5에도 중대 변수가 된다. 대담에서는 냉전수구세력의 분단체제 재공고화 기획이 ‘촛불혁명’과 ‘빛의 혁명’으로 좌절되었고, 국제질서가 신냉전구도로 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하지만 필자는 러시아-우끄라이나전쟁이 장기화되고 있는 유럽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에서도 지정학적 차원에서 냉전 후반기보다 더 우려스러운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중러관계는 1950년대 이후 가장 유착되고 있고 조선은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된 상황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 또 세계질서 속 패권적 지위가 사라지는 ‘궐위(闕位)’에 대한 조바심을 느낀 미국은 동맹·우방을 갈취하는 한편, ‘중국위협론’을 앞세워 동맹의 힘을 규합하려고 한다. 대담에서 강조한 ‘한반도평화 만들기’는 한반도문제 해결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대만해협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파고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것이 ‘2025년체제’의 성공에도 중요하다.

 

 

동아시아 평화만들기를 위한 우리의 역할

 

대만문제와 직결된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을 둘러싸고 국내의 주장은 다양하게 펼쳐진다.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의 투입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연루의 위험을 최소화해야 한다, 한국은 양안관계의 제3자이니 관여해서는 안 된다,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에 대한 댓가로 주둔비를 받아야 한다, 미국이 미군 감축을 원하면 이에 동의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니 미국을 도와야 한다 등등.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대체로 대만사태를 ‘바다 건너 불’로 인식하는 태도를 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바다 건너 불로만 있을 리 없다.

따라서 우리는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자 중견국으로서의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대만해협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 어떤 방식이 더 나은지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미국발 의제에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진지하고 치열하게 토론할 필요가 있다. 대만문제를 둘러싼 ‘적대적이고 불안한 현상 유지’를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현상 유지’로 바꾸자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 핵심은 대만해협 긴장고조를 초래하고 있는 극심한 군비경쟁을 완화하고 군비통제와 신뢰구축을 통해 군사적·전략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데 있다.

무엇보다 그 출발점은 ‘2025년체제 만들기’ 논의를 대외관계로도 확장해나가는 것일 테다. ‘빛의 혁명’으로 만들어진 이재명정부가 민주적 역량을 발판으로 삼아 우리 국익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동아시아 평화만들기’에 앞장설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우리 한국인이 ‘동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발전시키면서 시민 외교에 적극 나서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대만 유사시 동아시아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역으로 동아시아인들이 소통과 연대를 도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우선 정부든 민간이든 미국정부 및 전문가들과 논쟁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적용 범위가 대표적인 의제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영역을 인도·태평양으로 확대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국내 일각에서도 “각 당사국은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는 해석을 들어 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약 제3조의 정확한 내용은 “태평양 지역에 있는 각 당사국의 영토에 대한 무력공격”(an armed attack in the Pacific area on either of the Parties in territories)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미국의 요구는 상호방위조약 위반에 해당한다. 대만해협은 물론이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모두 미국의 영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두 얼굴’에서 희망적 가능성을 현실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는 ‘피스메이커’가 되기를 원하기도 하고, ‘힘에 의한 평화’를 구현하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초기에는 전자에 초점이 맞춰지는 듯했다. 러시아-우끄라이나전쟁과 중동전쟁을 끝내고 세계 3대 핵보유국이자 군비지출국인 미국·중국·러시아가 함께 핵무기를 줄이고 군사비도 삭감하자는 뜻을 피력했다. 하지만 이게 곧장 실현되지 않자 ‘힘에 의한 평화’로 방향을 틀었다. 이에 대응하려면 이재명정부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트럼프의 종전·핵군축·군비축소 의제를 다시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트럼프와의 소통을 통해 이러한 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할 뜻을 밝히고, 한중·한러 대화를 통해서는 미국과 군비통제 협상에 착수하라고 설득해야 한다. 미국의 여러 동맹도 미국의 과도한 군사비 증액 요구와 대만 유사시 군사적 역할 요구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만큼 ‘우려를 같이하는 나라들’과의 연대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이라는 주제로 곧 10월 31일〜11월 1일 경주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및 이에 앞서 열리는 고위급 회의는 우리의 외교적 역량을 펼칠 좋은 기회이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동아시아 긴장완화와 군비통제의 필요성을 부각시킬 만한 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양안관계와 동맹문제가 지닌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할 때, 민간 차원에서 국제적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시민연대 속에서 중국과 대만의 민간 대화 중재와 촉진, 양안문제를 포함한 동아시아 긴장완화와 군축 방안 논의, 동아시아 평화증진이 민생문제와 기후위기 대처에 기여하는 측면 등을 두루 논의할 수 있는 소통구조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6

물론 이러한 접근이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러시아는 내년부터 군사비를 줄이겠다는 입장을, 중국도 미국과 군비통제 협상에 열려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만약 중국과 러시아 등이 핵군축·군비축소 협상에 동의하면 트럼프로서는 ‘힘에 의한 평화’를 앞세운 ‘최대의 압박’이 효과를 거뒀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사 이들 나라를 중심으로 한 협상이 지체되더라도 이러한 논의과정을 통해 우리로서는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미중러를 비롯한 국제사회에 군비통제 협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미국의 과도하고 일방적인 요구에 대처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가야 한다. 동아시아 평화만들기를 위한 우리의 역할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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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에서는 북한의 공식명칭에 준하여 북한이 아닌 ‘조선’으로 표기하고자 한다.
  2. “Chairman Travels to Indo-Pacific; Affirms Region’s Strategic Importance,” 미 국방부 2019.11.11. (www.defense.gov/News/News-Stories/Article/Article/2013116)
  3. 제이비어 브런슨, 2025년 5월 15일 미국육군협회 연설. (www.ausa.org/news/brunson-land-forces-vital-achieving-lasting-security)
  4. 「“美당국자, ‘주한미군 감축 배제안해’ 언급” 」, 연합뉴스 2025.5.30.
  5. 백낙청·이남주 특별대담 「2025년체제, 어떻게 만들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6. 이와 관련해 필자가 속한 평화네트워크와 한겨레평화연구소는 중국·대만·일본 등의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동아시아 평화포럼’(가칭)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