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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 승 희 金勝凞
1952년 전남 광주 출생.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태양 미사』 『왼손 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 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등이 있음.
sophiak@sogang.ac.kr
상상임신
꿈꾸는 사람은 상상의 자궁을 지닌다
시인도
화가도
예술가도
혁명가도
상상의 환자
상상임신에는 젠더가 없다
삶을 살아가고 죽음도 살아간다
죽을 때까지 상상임신이 되풀이되어도
불씨가 타오르는 것도
불안이라는 것도
갈증도 그리움이라는 것도
기침이라는 것도
다 아프고 고통받고 원통하고
드라이아이스의 절망 같은 것도
사치라는 것도
위독이라는 것도
어디론가 휘발되고
고맙다는 것
미안하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자궁의 꿈이라는 것
수태도 임신도 낙태도 유산도
상상이라는 것
먼 피안이라는 것도
감감무소식이라는 것도
꿈꾸는 사람은 상상의 자궁을 지닌다
자연임신도 위대하지만
이제 나에겐 최후의 상상임신이 남아 있을 거다
장미 가시에 찔린 죽음이여
죽음의 씨앗과 죽음의 생육과 죽음의 번식이 나날이 퍼져가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미 장미의 수의를 완료했다
나의 마지막 상상임신은
그렇게 묘비명으로 완성되고
장미밭에서 장미 위로 흰 나비가 날아오른다
피고 일기
밤새워 피고석에 서 있다
작은 부끄러움이 큰 부끄러움을 만들어 밤에 어둠이 많다
피고, 이름 말해보세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생각나는 대로 말해본다,
피고석에는 해골, 촛대, 시계, 칼과 저울을 든 디케의 여신상이 놓여 있다
남의 자동차 트렁크 안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갇혀버린 사람인데
도둑으로 몰렸다
나는 그냥 밤에 혼자 울고 싶어서
남의 자동차 트렁크 속에서 촛불을 켜고 울고 있었는데
남의 자동차 트렁크 안에서 울고 있었다는 그것 때문이다
하얀 말 검정 말 푸른 말 들이
창가에 서서 법정을 들여다보고 있다
새벽이 가까워지면서 말들은 점점 더 키가 커져
15층 아파트보다 더 크고 나무보다 더 푸르렀다
남의 자동차 트렁크 안에서 밤새워 울고 있던 자,
남의 자동차 트렁크는 촛불을 켜놓고 울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밤새워 난리 발광을 하고 울고 있습니까?
밤마다 재판을 받고 하도 피고, 피고…… 하고 부르니까
내 이름이 김피고인 것만 같다,
꽃들이 피고 지고 피고 진다,
골짜기를 넘어 들판을 지나 멀리멀리 울음소리가 길에 가득하다
나는 당신의 진흙이고
당신은 나의 토기장이입니다
진흙으로 토기장이는 무언가를 만듭니다
창세기시대의 씨앗으로
진흙 속의 씨앗을 어떻게 만들었겠습니까,
당신을 떠나고 싶어도
진흙이 자신을 어디로 내던질 수가 있습니까?
김피고, 김피고…… 새벽 법정에 이름이 울려퍼지고 있는데
해가 뜬다
모든 것이 그냥 꿈인데
얼굴이 바니타스의 시든 하얀 꽃 같다
나는
왜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면서
남의 자동차 트렁크 안에서 촛불을 켜고 하얀 끈에 묶여서 울고 있습니까?
작은 부끄러움이 큰 부끄러움을 만들어 왜 이렇게 새벽이 어둡습니까?
내가 왜 경찰서에 응급실에 또 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