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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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림 金踰琳

1991년 서울 출생. 201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양방향』 『세 개 이상의 모형』 『별세계』 등이 있음.

flowingchara@naver.com

 

 

 

그 당나귀

 

 

그 당나귀는 말이 없는 당나귀였다. 당나귀가 말이 없는 건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이 없는 건 특징이 될 수 없다고 당신은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당나귀는 ‘말이 없는’을 자신의 특성으로 지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말이 없는—은 마치 옷을 만드는 옷감이 그 자체의 존재감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으려는 안간힘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①옷감이 유독 잘 느껴지는 (①촉감으로나 촉감이 아닌 다른 ②감각으로나 ③인상으로나 그 ④무엇으로나) 옷은 안간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인가? 안간힘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느낌으로 남아 있어야 그것—자신(自身)—이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안다. 그 사실을 (당신도 나도 옷감도 심지어는 옷도, 옷과 옷감에 대한 논의와는 관련이 없는 당나귀와 당나귀의 주인도) 알고 있다는 듯 그리고 그 알고 있음을 배반하려는 의지를 발휘하려는 듯 옷감은 옷에 있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려 들지 않는다. 부정성에 있어서 적극성을 발휘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잊을 수 없는 단 한벌의 옷(감)이 스쳐지나간다.

 

당신이라는 옷

 

처럼 말이다. 당나귀는 내내 헐벗은 채였다. 그의 등에 손을 얹는 화자가 있고, 몸을 얹는 화자가 있고, 나란히 걷는 화자가 있었지만, 당나귀는 내내 혼자였고, 혼자인 것이 그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이다. 당신이 그런 것처럼. 당신이 입고 있는 그 옷이 당신을 완전히 혼자이게 만드는 것처럼. (그래서 그토록 끈질기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건 아닌가?) 나는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그 당나귀를 만난 곳을 묘사할 방법을 찾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곳은 그곳을

 

통과해 이곳으로 온다. 그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주 추상적으로만 존재하지만, 그 나머지의 추상성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그곳이 아주 선명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당나귀’가 나라는 인간을 너무나도 깊숙이 건드린 나머지 그 단어가 아닌 나머지 단어가 볼품없을 정도로 평범한 작용밖에 하지 못하더라도, 그 ‘당나귀’를 중심으로 나머지가 천천히 그곳의 인상과 풍경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곳은 그러나 (②옷이 비어 있는 채로 존재하듯이 그 사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③옷이 옷이기 위한 전제조건이듯이 ④채워진 옷은 옷이 아니니) 여전히 비어 있다. 비어 있음이 가장자리부터 뚜렷해지기 시작한 것뿐이니 걱정할 것은 없다.

 

이동의 방식

 

은 그러나 그 파란 차와는 달랐다. 그 파란 차는 늘 주인공과 함께이지만, 그 당나귀는 늘 주인공과 함께이면서도 함께가 아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페이지를 넘기는 찰나마다 다른 곳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부재한) 당나귀. 그 당나귀는 그 당나귀지만, 당나귀에 당나귀를 조금씩 버리고 돌아오는 듯 가볍고 희미해 보인다. 당나귀의 온순함은 바로 이 사실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옷이 아니면, 그 옷을 이용해서 당나귀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옷(사람이 입는 옷이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얇은 것이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으로 당나귀를 먼저 감싼 다음, 당나귀를 진정시킨 다음에야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은 마침 갈색 양장으로, 원제는 Platero y yo이다. yo는 ‘나’를 뜻하고, y는 ‘와’ ‘과’와 같은 접속조사이며, Platero는 그 당나귀의 이름이다. 그 당나귀는 책 밖에서도 Platero다. 알다시피 Platero는 자신의 이름을 벗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었으며, 그것이 사라질까봐 (그것을 앞에 펼쳐두고도) 뒤돌아보았다. 그것이 작가가 다루고자 한 “몰락한 스페인의 고질적인 문제”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기에. 주제, 혹은 주제 주위로 형성되는 20세기 초반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당신이 Platero의 뒷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파란 차

 

 

그 파란 차(車)는 전혀 뚜렷한 윤곽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나에게 강렬한 ①인상과 ②흔적을 남겼다. 차는 하라 료의 소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의 첫 페이지에 등장한다. 그 이후에도. 주인공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천사들의 탐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의 경로는 선명하고, 그것이 경로를 따라가는 움직임도 선명한데, 그것의 차체는 그것의 차체를 제외한 나머지가 선명한 바로 그만큼이나 선명하지 않아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것의 역할은 ③자기(自己)를 제외한 나머지를 활성화시키는 것일까?

 

너는 그 파란 차가 등장하는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하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읽지 않았는데 그것이 돌아다니는 모양을 그것이 돌아다니는 걸 보는 즐거움을 알 수 있다는 말일까. 그것이 ①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멈추는 것, ②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달리는 것, 그러다 ③들키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들키는 것,까지 전부 정확히 일어나야만 하는 문장 위치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너는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너의 얼굴이 말하는 그 파란 차를 본다,고 말한다.

 

갑자기?

갑자기.

 

나는 내가 여태까지 지나쳐 온 모든 차를 떠올렸다, 지나쳐 간 모든 차도. 그러나 그들은 너무 많아서 하나이지 않다. 하나가 아니다. 그중 하나의 차가 멈춰 선다면, 나는 손을 뻗어 붙잡고 볼 것이다. 차가운 겉면을 지나 안으로 적당히 파인 홈을 잡고 당기겠지. 딸깍, 하고 열리겠지. 그것은 ④너의 손을 잡는 것처럼,이다. 비록 ④가 결말이나 결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붙잡는 방법에 있어서 그것 이외의 다른 방법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