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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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연 劉帥沇

1994년 강원 춘천 출생.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등이 있음.

gabegiveme@gmail.com

 

 

 

실천하는 힘

 

 

씨앗이 작다고

작은 일을 하지 않는다

 

아보카도를 힘주어

씨까지 자른다

 

그 사람

내가 아는 가장 요령 없는

힘 좋은 장사

 

껍질을 벗기는 것보다

자르는 게 나을 때가 있다

 

힘내지 말고 힘을 주어 풀어야지

음료 뚜껑은 꼭

내 손을 떠나야 열리는 것처럼

 

딱 한치 앞만 보고 살고 싶은데

한치까지 낸 안간힘이

거기 가서 풀린다

 

죽 쒀 개 주기보다

네 죽을 식혀주는 사람이고 싶었다

 

벌레가 숨는 구석처럼

요령껏 적당히 숨는

 

내 사랑이 남들의 사각지대가 된다

 

도망친 건 아니니까

숨어 우리의 씨앗을 마주 안으면

콩알만 한 심장은

두근거린다

 

작은 것보다

작은 걸 찾아내는 게 어렵더라도

큰 것보다 덜 눈에 띄는

 

사랑을 본다는 게

 

들킨 벌레처럼

소름 돋을 필요까지

있을까

 

콩을 보고 놀란 가슴은 팥 봐도 놀랄 텐데

보이지 않으려 못 본 척 지쳐갔다

 

힘 좋을 때

반토막이라도 나눠 가지려 했는데

 

시작이 반이라

시작마저 반으로 자르니

 

작아질수록 커질 일만 남았다

 

숨긴 만큼 깊어지는 변명이

관계를 쉽게 요약할 때

 

점차 요령이 생긴 거짓에

두근거릴 작은 일이 필요해

까짓거 손을 꽉 잡았다

 

 

 

사라지는 밈

 

 

꿈도 작더라 그러니 몸에 안 맞더라 빌려 잘 쓰던 거라도 때맞춰 뱉어내야 했으니까 대출을 받으러 가면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친절하게 거절해주잖아 나도 그런 친절한 거만함을 가지면 좋겠다고 내가 가져오란 것을 다 가져오게 하고 싶더라 가져온 것들을 고르고 뒤적거리고 이것까지는 필요없다며 돌려주고 싶더라 궁금하지도 않은 가족들의 이름을 모두 뽑아오라거나 부끄러움을 참고 회사에 직접 얘기해 지금까지 받은 모든 월급명세표에 회사 직인을 찍어오게 하고 싶더라 그리고 보관하고 싶더라 전산에 서류에 남겨두고 찾고자 할 때 찾았으면 좋겠더라 알고 싶은 게 몰라도 되는 것들처럼 살고 싶은 이유가 죽고 싶은 이유와 닮아가더라 찾아내 살아가게 하더라 살아 있는 게 죽음보다 흔해진다고 살아 있는 게 안 두려워지진 않겠지만 가끔 우리가 두려움이 없도록 바닥에 내려놓고 싶더라 절대 깨지지 않을 것일수록 박살날 때 더 날카롭고 더 가볍고 더 찾기 어려운 상처를 내듯 어딘지 모를 통증을 더듬거리는 게 내 몸 아닌 몸을 겹치는 것보다 슬프더라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내내 잊는다는 건 지우는 일이 아니라 멀어지는 일이란 것쯤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는데 마음의 골목을 세워 잃어버리는 일이라는 걸 불현듯 불 켜지듯 마음에도 저녁이 오고 있더라 그렇게 잊은 기억을 오랜만에 만나면 이제 진짜 알아버리더라 사람은 잊을 수 없구나 그냥 마음에 살고 내쫓는 게 아니라 그 집은 원래 그 사람 거구나 내가 그리움의 손님이었구나 가로등이 팍 켜질 때 기분이 좋고 우리 저녁을 반겨주는 거 같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연락이 닿고 싶더라 그러면 다른 사람으로 잊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어도 딴생각하는 척 떠올리는 저녁이더라 그러면 너한테 올 답장은 다 비수가 될 텐데 어쩔 수 없듯 이어가고 싶더라 그렇게 한없이 작아지는 나는 같은 크기의 사랑은 할 수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