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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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權善熙

1960년 경북 영일 출생. 1982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존재의 놀이』 『한라산』『악의 평범성』 등이 있음.

cheche2003@daum.net

 

 

계급론

악마는 꼬리부터 잡아먹는다

 

 

이슬 맺힌 벼가 자라는 새벽 논둑길을 산책하다가

‘17,000년 전 인류 최초의 벼’가 청주 소로리에서

발견됐다는 옛날 신문기사가 불쑥 떠올랐다.

구석기시대 끝 무렵인데, 얼마 전에는 또 영국에서

17,000년 전의 ‘안 썩은 달걀’이 발견됐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이 농사지으며 물에 밥 말아 먹을 때

그들은 양계장을 차려 바비큐치킨을 먹은 모양이다.

허긴 120,000년 전 독일의 네안데르탈인들은

사골곰탕까지 우려먹었다는데, 과연 파도 썰어 넣었을까.

 

어릴 때 밥상 앞에서 할머니는 귀가 따갑도록

‘밥 남기지 마라. 밥 남기면 천벌을 받는다’고 강조했고

그래도 남기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몰래 먹어치웠다.

늘상 배곯던 시절이니 있을 때 많이 먹어둘 일이었다.

그런데 밥을 남기는 게 그토록 천벌을 받는 죄였을까.

밥이 남으면 쌀이 남고 쌀이 남으면 곳간이 차고

곳간이 차면 땅이 넓어지고 땅이 넓어지면 머슴이 생기고

그러다 흉년이라도 들면 마을은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져

부자는 또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군불까지 때고……

 

그렇게 빈부격차로 계급이 생기니 밥 남기지 말라는 뜻일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쌀 한톨이라는 것도

실은 생명의 무게가 아니라 계급의 무게 탓이 아닐까.

악마가 머리가 아니라 꼬리부터 잡아먹는다는 것도

실은 위기 때마다 꼬리가 계급의 방향을 틀어버린 탓이 아닐까.

혹여 남아도는 쌀이 계급의 기원이라면 이 땅이 곧

탐욕과 분열의 발상지이자 모든 악의 축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짐승들이 출몰했을 이 구석기시대의 논둑길을 걷는다.

돌도끼가 맹수를 찍고 독화살이 사슴을 향해 날아간다.

우리는 밥심으로 살아왔고 밥심으로 무너지고 있다.

벼는 익을수록 낫처럼 변해간다.

꼬리를 자른 악마가 성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수치와 모욕

 

 

늦은 밤,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황제 2악장 아다지오만 여러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비교하며 듣고 있는데 갑자기 지인들이 전화를 해 소리쳤다.

“방금 비상계엄 터졌는데, 넌 요주의 국보 극좌 빨갱이 시인이니 빨리 피해!”

전시상황도 아니고 너무 황당해 오랜만에 TV를 켜자 정말 비상계엄 속보가 시뻘겋게 나왔다. 이젠 공영방송조차 가짜뉴스를 한다고 혀를 차다가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갑자기 모욕감과 분노가 치솟았다.

‘니가 뭔데 내 영혼이 감전되는 유일한 순간을 짓밟느냐.’

허름한 클래식까페 DJ로 연명했던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유일한 사치인 이 지고지순한 고전음악 감상 시간이 졸지에 조폭두목한테 침해당하고 유린됐다는 게 그렇게 치욕적일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옛날같이 진짜 도망쳐야 하나…… 이젠 갈 데도 없는데……’

어제 즉각 여의도로 튕겨나가지 않고 잠깐이라도 이렇게 고민하며 망설인 나 자신이 훨씬 더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