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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현승 李炫承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2002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 『대답이고 부탁인 말』 등이 있음.
tuplos@naver.com
시집가는 꿈
꿈에 아내가 말했다.
나 시집간다고 함
자기도 기막혔는지 슬며시 웃었나
뭉텅 꿈은 잘려나가고.
아내가 시집가는 꿈이라니
꿈인데 그럴 수도 있겠지
나도 청혼받는 꿈을 꾸었는데.
기혼인데 청혼받는 것도 억지지만
혼인 중에 시집가는 것도 농담 이상은 되기 어렵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마음 주는 것은 꿈에서도 여전
나는 이야기의 구멍을 메꾸느라 분주한데
헤겔의 말대로 주인은 노예 없이 주인일 수 없고
노예는 주인이 좋아할 만한 일을 하면서 주인의 마음자리에 서 있다.
주인이 자진해서 노예가 되는 사랑은
노예가 된 주인의 변증법이다.
결혼은 사랑과 전쟁의 이종교배인가.
손이 닿지 않는 등에 파스를 붙여줄 땐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기도 한데
가장 진심인 사랑꾼은 언제나 담장 밖에서 휘파람을 불고
최선의 남편은 담장 안에서 우선 아내가 되어야 할 따름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남편과 아내의 변증법처럼
남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아내와 주인의 변증법처럼
잠 깨서 찾아본 꿈풀이에서
배우자의 중혼은 재앙을 예고한다고 한다.
그러니 어서 꿈속으로 가
아내의 집 담장 너머에서 휘파람을 불어야겠다.
바닥의 맛
소라는 수줍음이 많다.
나는 이런 타입과 가깝다.
말은 그렇게 해도 속은 순해요.
이런 소개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소라가 떠오른다.
불쑥 말을 걸고는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는,
가끔은 부담스럽게 속을 다 까고 덤비는 사람들은
사실 부끄러워서 그러지.
소라의 순한 맛
순한 것들에겐 독이 있다.
적은 양이긴 하지만 복어랑 같은 독이 있다.
복어의 독은 먹이로부터 온다고 본다.
달고 쌉싸름한 소라의 맛
독이 든 순한 맛을 좋아한다.
가족들과 소라를 한솥 삶아서 먹을 땐
독이 든 귀청과 내장 쓸개는 버리고
아이들은 역시 다리살,
나는 소라의 똥을 먹는다.
소라가 소화시킨 녹조류나 플랑크톤의
녹진한 맛. 고둥이나 전복처럼
바닥을 쓰는 것들이 소화시킨
녹진한 바닥의 맛을 음미하면서.
그럴 때면 으레 나는 수사자 생각을 한다.
양 한마리를 놓고 모인 사자 가족의
서열 식사에서 수사자는
제일 먼저 양의 내장을 먹는다.
녹진한 바닥의 맛
부끄럽고 무뚝뚝하고 녹진한 맛
독을 품고 바닥을 기는 자들의
순하고 고소 쌉싸름한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