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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다연 鄭多娟
1993년 서울 출생. 201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등이 있음.
simjung0409@naver.com
세입자
우편함에 우편이 꽂히기 시작하면 계절이 바뀌었다는 뜻이죠 네해째 이 집에 살면서 알게 됐습니다 섣불리 계약하는 게 아니었어요 파리한 듯 보이지만 어쩐지 고상한 취향을 가진 것 같던 그 작자가 살던 집을
고민 없이 살고 싶던 게 문제였을까요? 매 계절, 그를 수신인으로 문예지와 신간이 도착합니다 연락 두절된 그의 창작욕은 멈춘 지 오래지만 동료들은 다르더군요 적당히를 모르고 알 수 없는 말을 쓰고 또 쓰고
그냥 다 버려주세요 단 한번의 답신에서 그가 말했죠 그 작자는 매번 다시 시작되는 이 우편함의 계절로부터 도망친 게 분명해요 제게 이걸 남겨두고 홀가분할까요 종이봉투를 찢어 책을 펼칩니다
산책이 시작된 거죠 상처 내지 않고 눈물을 투과하는 빛의 원리, 손등에 닿는 무지개, 어둠 속 눈부심, 천사의 것인지 악마의 것인지 구분할 필요가 없는 날갯짓, 날갯짓이 불러일으키는 한낮의 심상…… 걷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로 빠져드는 거죠 안으로만 고이고 다가서면 제 얼굴이 얼비치는, 내면의 웅덩이가 제게도 있으니까요
귀퉁이에 문장을 적어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멈추지 않고 입을 오므렸다가 열 듯, 비로소 태양이 떴다고 써서 한 인간의 어둠이 저물어가요 먼 광장에서는 열정으로 비틀린 연주가 시작되죠 흙장난에 몰두한 아이가 된 것 같다고 써도 될까요? 밤은 깊어지면서 짧아지고
자세는 한없이 구부정해지고 엎드려 자는 날이 늘어갑니다 이번엔 정말 제시간에 도착해야 하는데, 더는 늦으면 안 되는데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졸음이 와요 내년에는 이사 갈 거예요 우편함의 계절을 잊을 거예요 그런데 이 많은 책더미는 어떻게 옮겨야……
세계의 첫 독자
당신이 글을 쓰는 동안 잠에 듭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밤 당신이 흩뿌린 단어들을 읽죠
손목의 맥박을 짚듯 주의를 기울입니다
흐르는 것이 느껴져요
그 순간 나는 이 세계에서 당신의 첫 독자가 됩니다 완성하기 위해 지워야 했던 수많은 문장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 됩니다
내가 세계의 첫 독자가 되어 책장을 넘기는 동안
당신은 잠꼬대하죠
몇겹으로 둘러싸인 꿈의 내막을 헤매고
온몸을 비틀며 자세를 바꾸죠
연약하고 무방비하게
자유로이 흘러가도록
종이를 뒤집어요
당신의 꿈이 당신에게 속한 채로
흐르도록
자리에서 떠나요
⁑
나와 당신이 사랑하는 개와 단둘이 골목을 걷습니다 걸음은 가볍고 노인이 앞뜰에 심어둔 라일락나무는 만개했습니다 당신이 여백으로 남겨둔, 행간 속 숨은 공간이죠 부지런한 상인들이 목청을 높여 과일을 팔고 개를 알아본 이웃이 인사를 건네네요 어느덧 강입니다 일상이 잔잔히 모습을 드러내며 빛나고 저는 잠시 평온해요 잠수하는 오리와 당신과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개, 풍경과 함께 흩뿌려진 문장이 겹치며 이곳을 새롭게 읽게 합니다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돌아갈까요 이제 당신이 깨어날 시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