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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재학 鄭載學
1974년 서울 출생. 1996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모음들이 쏟아진다』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 등이 있음.
gsh6007@hanmail.net
전생몽
검은 방 검은 바닥에 누워 있다
내 가슴 위에 떠 있는 그물
사방에서 학들이 날아오기 시작한다
다섯마리
검은 그물에 잡힌다
학들이 수박처럼 동그랗게 묶여져 움직이지 못한다
풀어주고 싶은데 내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것보다
학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 더 끔찍했다
꿈속의 꿈
꿈에서 깨어나도 계속 꿈이었다
여러 생처럼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와 두 아이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어 있었다
나는 광인이 되어 호랑이를 잡으려고 날뛰었다
호랑이를 찾지 못하자 호랑이를 굶기려고
먹이가 될 동물들을 많이 죽였다
몇년 후
지옥 불에 떨어지는 악몽을 자주 꾸었다
이제 죽이는 거 말고
살리는 걸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물에 동물 가죽들, 칼과 덫을 넣어 땅속에 묻는다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징검다리를 건너다
개울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다음 생에서 나는
다른 별의 바람이 되어
물줄기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버드나무의 잎을 가끔 흔들 것이다
이름들
천변을 걷는다. 폭우에 샛강이 넘쳐흐른다. 징검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흙탕물이 넘쳐흐르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니 배가 고프다. 얼큰한 게 먹고 싶은데 자주 갔던 식당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을 잃어버린 식당은 이름을 잊어도 존재한다. 그 식당의 음식 이미지, 맛의 이미지만 떠올랐다. 음식과 맛이 그 식당일 뿐. 내가 정재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다른 이름이어도 상관없었을까. 나는 어떤 맛인가.
내가 어렸을 때 그 식당 주변에는 동산말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역말에 사는 나는 가끔 그 마을 사는 친구 집에서 놀거나 샛강에서 개구리 올챙이 송사리를 잡기도 했다. 온통 초록 속에서 집으로 오다 가끔은 길을 잃어 다른 마을로 가기도 했다. 동산마을이 있던 곳은 지금은 낯선 건물들만 가득하다. 동산마을은 사라졌지만 동산로, 동산마을 공영주차장, 동산마을 경로당 이름은 남아 있다. 이름만 남아 있다. ‘동산말’이라는 말이 신(神) 없는 종교처럼 느껴졌다. 어린 내가 동산말을 지나간다. 책가방을 열어보니 책은 없고 이름표만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