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시│제25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방성인 方聖寅

2000년 경기 이천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qkdtjddls0125@naver.com

 

 

 

풀의 유령

 

 

풀이 자란다 풀을 뚫으며 들판을 뚫으며 사방으로 끝을 모른다는 듯이 풀이 자란다 자라나는 풀 사이로 벌들이 튀어나온다 풀 냄새를 몸에 묻힌 벌들이 양봉틀로 들어가 양봉틀이 진동한다 진동하는 양봉틀 옆에는 다른 양봉틀 그리고 또다른 양봉틀

 

이런 화면이 재생되는 스크린 앞에 자동차 하나 다른 자동차 하나 자동차의 도열 자동차 안에서 사람들은 말하고 움직인다 몇대의 자동차는 조금씩 흔들린다

 

눈이 내린다

 

풀들이 자라길 멈추고

풀의 영상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동차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자동차의 흔들림이 잠잠해진다 웅웅거리는 영상의 음성이 그치자 소리 없이 쌓인 눈이 자동차의 길을 막는다

 

이런 자동차극장은 없다고

자동차극장은 겨울엔 문을 닫는다고

 

말하는 사람 옆으로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앉아 있다 그 앞으로는 그들의 대화를 바라보는 사람이 앉아 있다 직사각형 테이블의 자리를 채우며 앉아 그들은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를 담는다 입김이 그들 사이를 맴돌고 그들은 떨면서 자동차극장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커튼 친 아파트 한칸에서

 

눈이 내린다

창문 밖으로 아파트의 불 꺼진 칸과 불 켜진 칸 앞으로 아파트 하나 앞으로 아파트와 다른 아파트 사이로 아파트로 이어지는 대로변 위로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그리고 지금

 

풀의 유령들이 자리를 옮긴다

 

 

 

노들섬

 

 

지하철 속 사람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자 지하철이 같은 방향으로 휘청인다 지하철은 지하를 빠져나와 넓은 강 위를 달리고 강가의 잔디밭에 앉은 사람들 그들의 고개가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돌아간다 그 임의의 선을 따라 지하철이 나아간다 잔디밭에는 사람들이 동시에 걸어다닌 궤적을 따라 만들어진 길이 이곳저곳 파여 있다 화살표 하나 없는 길 위에서 사람들은 충돌하지도 않고 걸어다닌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이곳은 명소다 명소 속에서도 사람들이 더 많이 뭉치는 곳에는 햇빛이 내리고 얇은 그늘이 덧씌워진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묻는다 이곳에 온 이유가 뭐냐고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대답한다

답답하고

심심해서

사람들이 눈을 깜빡이고 얕은 바람이 불고 윤슬이 반짝인다 하나둘 사람들이 눈을 감고 정지한다 노들섬의 지면에 몸을 밀착시킨다 아무도 그들을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 남은 사람들은 다시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몇대의 지하철이 지나가고 노들섬도 정지한 이들을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 노들섬은 인공섬 산 사람보다 오래된 인공섬 가만히 사람들을 붙들고 몸집을 불린다

 

 

 

꽃의 대기

 

 

주택을 가득 뒤덮은 덩굴의

꽃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담벼락이 무너지고 세워지고

주택 앞 꽃집의 유리창에도 꽃이 피고 지고

 

유리창 너머로 주택을 바라보며 앉아 있던 꽃집 주인 A가 죽고 그 자리에 꽃집 주인 B가 앉고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꽃집 주인의 눈동자 위로 꽃이 피고 지고

 

꽃이 가리는

주택은 빈 주택이다 혹은

그곳에 들어가본 사람은 없다 혹은 들어가본 사람은 모두 돌아오지 못한다

 

꽃이 드러내는 돌아오지 않는 꽃

돌아오지 않는 꽃집 주인 A 꽃집 주인 B 꽃집 주인 C

 

꽃집 주인의 빈 의자 위에서 꽃 무더기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어오르는

꽃의 대기 속에서

흐트러지는 꽃 충돌하는 꽃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환희

꽃의 멜랑꼴리 꽃의 비애 꽃의 회한

 

피고 지는 꽃 옆으로 피고 지는 꽃

 

보이지 않는다

꽃의 대기가

보이지 않는 꽃의 대기가 진동한다 무엇도 밟지 않고서

거리를 이미 가득 메우고서

 

피고 지고 있다

 

 

 

sedative

 

 

하얀 캡슐 알약 한알 미동 없이 다른 하얀 캡슐 알약들 위에 쌓여 있다

 

환자 A는 불안하다 A는 불안해서 다리를 떨고 다리를 떨어서 버스 좌석이 흔들린다

 

하얀 캡슐 알약이 쌓여 있는 하얀 캡슐 알약들은 하얀 플라스틱 원형 통 안에 들어 있다 가만히

 

환자 A는 버스 좌석이 흔들려서 불안하다 불안할수록 다리의 떨림은 심해지고 버스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버스가 뿜는 열기 A는 본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하얀 플라스틱 원형 통은 하얀 보자기 위에 놓여 있다 하얀 보자기가 놓인 수평의 테이블 테이블을 떠받치는 수직의 기둥 기둥을 떠받치는 수평의 바닥 바닥들은 건물 안에 들어 있다

 

이것은 A의 건축술

어제 이미 몸속에 건축해둔

 

버스가 정지한다

 

건물 주위를 맴도는 버스의 일정한 노선 일정한 노선을 떠받치는 수평의 도로 어제의 A가 건물 안에서 버스를 본다 버스에서 승객들이 내리는 장면을 본다

 

A는 떠밀려 내려간다 버스의 문을 뚫어낸다 아지랑이를 뚫어낸다 가만히 서서 열기가 그를 삼키는 것을 내버려두면서 건물이 건물의 복도가 그를 삼키는 것을 내버려두면서

 

온통 하얀 방

어제의 A는 A의 곁에 없고 플라스틱 원형 통이 A의 곁에 놓여 있다 A는 원형 통도 뚫어낸다 캡슐 알약들 사이를 뚫어낸다 떨어지는 알약

그 뒤로 A 뒤로

A가 뚫어낸 구멍 뒤로

 

A의 주변을 도는 버스가 정지한 사람들 사이를 맴돈다 정지한 사람들의 그림자를 경유하며 노선이 유지되고 있다 버스에서 알약들이 쏟아져 내린다 거리의 맨홀들로 떨어지며 맨홀을 메운다

하얀 캡슐 알약 위로 하얀 캡슐 알약이 쌓이고 그 위로 맨홀이 쌓이고 노선이 건물이 도시가

쌓인다

 

하얀 캡슐 알약

미동 없이

 

 

 

안과 밖과 앞과 뒤

 

 

병원의 벽 병원의 벽에 달린 환풍기가 돌아간다 바깥의 공기를 벽 뒤로 밀어넣는다 돌아가는 환풍기가 밀어넣은 바깥의 공기 아래로 병원 침대 여섯 병원복 차림으로 누워 숨 쉬는 사람 여섯 하늘빛 병원복 하늘빛 이불 여섯 닫힌 창문으로 투과되는 햇빛 아래 여섯

 

창문으로 작게 지나가는 비행기

보다 더 작은 비행기 엔진 돌아간다 그보다 더 작은 비행기의 창문 창문에 비치는 더 작은 도시 그보다 큰 사람이 좌석에 앉아 창문으로 도시를 내려다본다

구름에 가려지는 도시

 

병실의 흰색 가림막 하나 쳐지고

사람 하나 지워진다 병실엔 다섯 그리고

 

투명한 비행기 작게 하나 창문에서 떨어져 병실 안을 비행한다 흰색 가림막 뒤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투명한 비행기 하늘빛 이불 하늘빛 병원복 속을 헤집는 투명한 비행기

 

구름은 비행기를 밀어내고 비행기는 구름을 몰고 다닌다

 

투명한 비행기의 투명한 궤적을 따라 투명한 구름이 병실을 서서히 채워나간다 누워 숨 쉬는 사람 다섯 환풍기 하나 희박해지는 바깥 공기 흰색 가림막 하나 다시 쳐진다 그리고 또다른 투명한 비행기 병실 안을 비행한다 그리고 또

 

아무도 없는 병실에는 흰색 가림막 여섯 그리고

투명한 비행기의 투명한 편대

 

돌아가는 환풍기가 멈춘다

조도가 변하지 않는 창문의 투과 창문의 작은 비행기가 멈춘다 작은 비행기 속에서 좌석 위로 떨어지는 더 작은 산소마스크 병실의 투명한 비행기들이 아래로 가라앉는다 수많은 창문의 앞과 뒤에서 도시가 투명한 흰 천을 덮어쓰고 숨을 내쉰다 흰 천이 한순간 솟았다

내려앉는다 흰 천이

꺼진다

 

 

 

방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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