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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백수린 白秀麟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폴링 인 폴』 『참담한 빛』 『여름의 빌라』『봄밤의 모든 것』, 짧은소설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중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 등이 있음.
장편연재 1
온통 부드러운 흰빛
1.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지만 나는 고양이 뒤를 쫓다가 이상한 나라에 간 적이 있다. 그 일은 대략 삼십여년 전, 내가 미국으로 이주한 첫해에 일어났다. 여름이었고, 키가 아주 큰 워싱턴야자수들의 잎끝이 노랗게 변할 정도 몹시 뜨거운 날이었다. 그때 나는 미국 나이로 아홉살이었고, 토끼를 따라가다가 이상한 나라에 이르게 되는 여자아이에 대해서는 책을 읽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양이를 뒤쫓는 것도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 줄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보랏빛 꽃이 무성한 자카란다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던 고양이가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을 때, 나는 그뒤를 따라 뛰었다. 입 주위가 동그랗게 하얗고 몸통의 털은 노란 아주 작고 예쁜 고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작 몇걸음을 달렸을 뿐인데 나는 느닷없이 이상한 나라에 도착해 있었다.
*
잊고 살았던 그 시절의 기억이 최근 들어 문득문득 떠오르는 건 외딴집에 살기 시작한 이래 내가 보고 겪는 일들 때문일 것이다. 풍경(風磬)을 흔들어 두터운 정적을 깨뜨리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어떤 변화들은 저 아래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을 기어이 흔들어 소리를 일으키고 지나간다.
나는 봄의 초입부터 C읍에 있는 오래된 집에서 살고 있다. 인적이 드문 동네에 위치한 집인데, 부엌에 난 창을 통해서는 들판 위로 해가 뜨는 것이 보인다. 들판은 한낮이 되면 일상의 풍경으로 되돌아갔지만 해 뜰 녘에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처음 이 집에 살기 시작할 즈음 나는 수면 패턴이 불규칙했으므로 들판 위로 새벽의 빛이 깃드는 걸 보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 풍경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낄 때마다 사람의 마음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들판이, 저 멀리의 산등성이가 빛을 입고 서서히 윤곽을 되찾아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인생의 행로 위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고 실제로도 어느정도 길을 잃은 상태였지만, 그 풍경을 보고 있는 동안만큼은, 갑자기 낡고 외딴 집에서 살고 있는 내 처지도 최악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것은 지난겨울이었다.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 나는 소위 프리미엄 영어학원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오년째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던 중이었다. 내가 수업하는 교실엔 원형 테이블 두개가 있었다. 한쪽 벽에 아이들이 쓴 에세이와 Merry Christmas라고 적힌 갈런드가 붙어 있는 그 강의실에서 여덟명의 아이들이 털 달린 패딩을 의자에 걸어둔 채 나를 향해 앉아 있었다. 한 학생이 교실에서는 한국어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어겨 주의를 주고 난 참이었고, 나는 화이트보드 위에 마카로 ‘If I could—I would—’라고 쓴 뒤 아이들을 둘러봤다.
“Who can complete this sentence?”
그날따라 수업을 하는 내내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댔다.
“Jenny teacher! If I could fly, I would go to the moon.”
늘 맨 앞쪽에 앉아 적극적으로 손을 드는 남자아이가 대답했다.
“Good. Anyone else?”
다음 예문을 설명하려 입술을 열었는데, 갑자기 목구멍에 무엇인가가 들어앉은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아이들이 의자를 끄는 소리, 펜을 떨어뜨리는 소리 같은 것들이 크게 들렸다. 시끄러운 형광등 불빛, 뒷말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 If I could speak, I would say I’m not okay. 머릿속으로 완성된 문장은 말이 되지 못했다. 혀끝에서 맴돌다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전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어들이 생각이 안 나는 일이 잦아졌다거나, 기억력이 나빠졌다거나. 문장을 이해하거나 쓰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수업을 하려고만 하면 호흡이 가빠지고, 말을 할 수 없는 증상이 갈수록 잦아졌으므로 학원을 계속 다닐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수업 때만 그러더니, 그런 일이 몇차례 반복되고 난 이후에는 누구와든 말하려는 상황만 되면 목구멍이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MRI와 CT, 성대 내시경까지 모든 검사를 끝낸 뒤 의사는 몸에 이상은 없다고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 아마도 심리적인 이유 때문 같다고. 쉬어야 한다고.
“일상 대화까지 점점 어려워지는 건 학원에서처럼 될까봐 미리 긴장을 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러면 애초에 증상이 시작될 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의사가 나를 보며 덧붙였다.
“최근에 힘든 일이 있었나요?”
힘든 일이라. 지난 몇년간 엄마의 장례식과 이혼을 차례로 겪으며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시기에도 말을 못하진 않았는데. 어쩌면 그 일 때문인가. 몇개월 전 전해 들은 그 일이 잠시 떠올랐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은퇴할 나이에 가까울 것 같은 여자 의사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이건 몸이 멈추라고 보내는 신호이니 한동안은 조용한 곳에서 충분히 쉬어주세요.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요.”
조용한 곳? 서울에 조용한 곳이 어디 있어?
히터 탓인지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창을 타고 들어온 겨울의 창백한 햇살이 병원 복도에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병원을 빠져나오자 대로변의 경적 소리와 오토바이가 달리며 만드는 굉음이 귀를 아프게 했다.
그 순간, 갑작스럽게 C읍의 집이 떠올랐다.
집이 나를 끌어당긴 걸까. 마치 인력처럼.
*
이따금 호준이 연락을 해오거나 세금고지서를 받을 때면 한번씩 생각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삶 속에서 나는 엄마가 유산으로 남겨주고 간 이 집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살았다.
*
엄마가 내게 집의 존재에 대해 말한 것은 췌장암 진단을 받기 몇달 전이었다. 맛있다는 연포탕 식당을 알게 되어 일부러 엄마를 모시고 간 날이었다. 그날 엄마는 반찬으로 나온 조개젓이 맛있다는 내 말에 시중에서 파는 젓갈은 중국산 고춧가루를 써서 자기는 일절 먹지 않는다고 대꾸하며 기분을 상하게 하더니 느닷없이 안진시의 C읍에 있는 집을 샀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돈이 없다고 늘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나는 적잖게 놀랐다. 게다가 C읍이 엄마가 태어나 자란 곳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조부모를 비롯한 외갓집 식구들이 대부분 안진의 시가지나 인근의 신도시로 일찌감치 떠난 터라 나는 물론 엄마도 C읍에 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날 엄마는 고향에 갔다가 그 집이 매물로 나와 있는 것을 우연히 보고 전재산을 털어 샀다고 말했다.
엄마는 그 집에서 일년도 채 살지 못했다.
충동적으로 샀다는 엄마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건 안진시에서 공인중개업을 하는 호준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호준과 재회했을 때, 나는 그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체구가 나보다 작고 하얬던, 기억 속 남자아이가 아니라 나보다 키가 두뼘이나 크고 얼굴이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으니까. 호준은 엄마의 고향 친구 아들로, 어린 시절 안진에 있는 외갓집에서 여름을 보낼 때마다 같이 놀던 동갑내기 아이였다. 엄마가 생전에 그 집을 사고 싶어 십년 가까이 한해도 거르지 않고 호준에게 연락했다는 사실을 나는 그렇게,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삼십여년 만에 재회한 친구를 통해 알았다. 그제야 C읍의 그 집이 매물로 나왔음을 엄마가 우연히 알게 될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것을, 게다가 충동적으로 집을 살 만큼 엄마에게 여윳돈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그때 나는 어째서 엄마의 말에 조금 더 관심을 보이지 못했을까? 그 집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호준이 내게 물었을 때, 바로 팔겠다고 하지 못한 것은 그런 자책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팔더라도, 자기 소유의 집을 가져본 적 없던 엄마가 생전에 그토록 사고 싶어했다는 집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을 무렵, 엄마와 안진에 갔다가 C읍의 집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는 명절이나 방학 때 조부모를 보기 위해 안진에 가도 C읍까지 갈 일이 없었다. 그 여름, 내가 아주 오랜만에 안진을 찾은 것은 먼 친척 중 누군가가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누구였지? 이제 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엄마는 그 결혼식에 나를 꼭 데려가고 싶어했는데, 남편이 없는 빈자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거나, 그때까지는 내가 그래도 엄마의 내세울 거리가 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시내에서 하는 결혼식이 끝나고, 친척들에게 시달린 터라 서둘러 집에 가고 싶었는데, 엄마는 바로 역으로 가는 대신 C읍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그날 엄마가 찾아간 곳이 어린 시절 엄마가 살았다던 이 작고 외딴 집이었다. 누군가가 살고 있어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밖에서만 바라봐야 했던 집. 이 집 앞에서 엄마는 내게 무슨 말을 했었나? 그건 잊었지만, 집 앞에 놓여 있던 두어개의 항아리들이나 등받이가 없던 작은 진분홍색 플라스틱 의자, 빨갛고 노랗던 카랑코에 화분 같은 것들과 내가 그런 것들을 심드렁하게 일별하는 사이 집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싶어 커튼이 드리워진 창 안을 기웃대던 엄마의 뒷모습은 기억이 난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우리가 C읍에 갔던 당시 엄마는 아직 젊었다. 지금의 나보다 몇살밖에 더 많지 않았으니까. 지금 내가 아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엄마에게 조금은 더 다정한 말들을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엄마와 함께 있는 내내 날이 덥다고, 발이 아프다고, 친척들과 있을 때 엄마가 주책맞게 했던 말들 때문에 창피했다고, 냉랭하게 굴었을 뿐이다.
엄마가 내게 유산으로 남긴 작은 이층집은 아주 외딴곳에 있고, 아주 낡았다. 멀리 듬성듬성 다른 집의 존재가 보이긴 하지만 집은 기본적으로 논밭에 둘러싸여 있고, 뒤로는 산자락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위층엔 두개의 방, 아래층엔 주방 겸 거실과 욕실이 있다. 지붕이 없는 대신 평평한 옥상이 있고, 마당이라고 할 만한 공간은 딱히 없다. 엄마의 형제자매는 여섯이나 되는데 이 좁은 집에서 어떻게 살았다는 걸까.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봐도 도통 머릿속에 그려볼 수가 없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조용한 곳에 가서 몇주만 쉬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그날 밤 호준에게 C읍의 집이 바로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집을 무작정 방치해둘 수는 없어서 호준에게 소정의 비용을 내고 집이 나갈 때까지만 이따금씩 들여다봐달라고 부탁을 해둔 터였다. 호준의 답을 기다리며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다른 서류들과 함께 둔 집 열쇠를 찾았다. 엄마가 C읍으로 이사를 한 뒤 내려가보겠다고 해놓고 일상에 치여 가보지 못하고 있던 어느날, 엄마가 갑자기 서울에 왔다고 내게 연락을 했다. 그날 엄마는 내게 집 열쇠와 집문서, 보험증서와 인감 따위를 건네주더니 “웬만한 건 다 내다버렸지만 가구 같은 건 정리를 못했어. 번거롭게 됐구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히 있던 내게 “췌장암 말기라 얼마 안 남았대”라고 말하던 엄마. 손바닥에 닿는 열쇠의 차가운 금속성을 느끼며 나는 그날의 엄마 얼굴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고작 삼년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세세한 표정은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간단한 짐을 챙겨 C읍으로 내려와 이 집을 다시 보았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폐허라는 단어였다. 호준이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준 곳을 폐허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았지만 첫인상이 그랬다. 아니면 상처투성이의 사람. 살갗이 함부로 벗겨진 것처럼 페인트가 떨어져나가 있는 외벽, 생채기투성인 철대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집을 둘러싼 헐벗은 나무들이,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적요가 내게 그런 느낌을 받게 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집의 인상이 바뀌었다. 장례식이 끝나고도 차일피일 미루며 정리하지 못한 엄마의 가구들과 세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넓고 커다란 창 덕분에 집 안이 뜻밖에도 놀랄 만큼 환했던 것이다. 오래전, 신혼집을 계약하러 갔을 때 중개사는 내게 자기 것이 될 집은 보는 순간 말을 걸어온다며 말을 거는 집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이후 여러 집들을 전전하며 이사를 다녔지만, 단 한번도 집이 말을 걸어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집의 창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줄곧 그 중개사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고, 이제야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의 오피스텔을 아예 정리하고 C읍으로 오는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평생 이사를 하며 살아와 이사에는 이골이 나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늘 도시에서만 살았고, 친척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이젠 아는 이 하나 없고—차로 삼십분 떨어진 거리에 호준이 살고 있었지만 열살 이후로 오랫동안 만난 적이 없으니 그와 나는 거의 모르는 사이나 마찬가지였다—근처에 제대로 된 편의점이나 까페 하나조차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은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내겐 시골생활에 필요하다는 차도 없었다.
나는 그저 잠시만 머물 생각이었다. 몇주만, 길면 몇달만.
잠시만 웅크리고 있자. 나는 생각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잠시 동면하는 짐승처럼 그렇게.
수도와 전기는 연결되어 있지만 가스는 잠겨 있는 상태라 3월인데도 낡은 집은 서늘했다. 도시가스공사에 연락을 해 계량기를 켜달라고 요청하고, 첫날 밤에는 엄마의 장롱 속에서 먼지 냄새가 나는 이불을 꺼내 덮고 잠을 청했다. 낮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홀로 누워 있으니 무시무시한 고독이 나를 찾아왔다. 누가 서울을 떠나라고 등을 떠민 것도 아니고 제 발로 내려와놓고는,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버림받은 아이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외로웠다.
이튿날부터는 비염 때문에 고생을 했다. 오래 비워둔 집에선 닦아도 닦아도 먼지 냄새가 났다. 처음엔 만사가 귀찮아 요를 깔고 누울 정도의 공간만 닦고 지내볼 요량이었는데, 비염 탓에 하는 수 없이 나는 방바닥 전체로, 주방 겸 거실의 바닥으로 청소 영역을 넓혀나갔다. 한동안은 매일같이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했다. 욕실에 세정제를 뿌려 물때를 닦았고, 창틀의 먼지를 털어냈다. 이불 홑청과 커튼을 걷어내어 빨아 햇볕에 말렸다. 그렇게 삼주가량 지나자 더이상 재채기가 나오지 않았다.
이 집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비염보다 더 오래 나를 괴롭힌 것은 불면이었다. 이곳은 낮에도 조용했지만 밤엔 적막이 한층 더 두꺼워졌다. 잠을 청하려고 불을 끄고 누우면 그 적막 사이로 아주 미세한 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이따금 개 짖는 소리,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삐걱거리는 소리 같은 것들. 한번은 삐걱거리는 소리가 잦아지더니 창문이 열린 곳도 없는데 갑작스러운 한기가 느껴졌다. 엄마야? 창문이 잘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다시 들며 나는 조그맣게 엄마를 불러보았다. 물론, 엄마일 리는 없었다.
서울에서 나는 규칙적으로 사는 편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났고 오전엔 커피를 내려 마시며 영어공부를 하거나 교안을 만들었다. 오후엔 학원에 출근해 학부모들에게 공지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다니는 몰입형 영어학원에서 한국인 교사의 역할이란 문법을 가르치는 것과 학부모와 원어민 교사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한달에 두번씩 상담을 하기 위해 학부모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레벨테스트에서 상위 10퍼센트에 들어야 상급반으로 올라갈 수 있다거나 아이의 단어테스트 점수가 최근 삼주간 떨어지고 있으니 관심을 가져달라는 식의 이야기를 전했다.
서울에서와 비교하면 이곳에서의 삶은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눈을 떠서 배고프면 아무거나 집어 먹었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끼니를 건너뛰었다. 잘 마른 빨래를 개어 옷장에 수납하는 대신 건조대에 그냥 걸어둔 채 마른 순서로 집어 입었고 속옷이나 양말이 다 떨어지면 그제서야 빨래를 했다. 서울에 살 때는 필요한 것이 많았다. 휴지나 세제를 언제나 떨어지지 않게 쟁여두어야 안심이 되었고, 오븐이 있어도 에어프라이어가, 솥밥을 하기 위한 스타우브 냄비가 꼭 필요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선 주걱을 못 찾으면 숟가락으로 밥을 펐고 맥주를 머그컵에 따라 마셔도 아무렇지 않았다. 마치 예민하게 각성되어 있던 감각신경들의 전원이 일제히 꺼지기라도 한 것처럼. 대체로 나는 모든 일에 무감했지만 가끔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터져나올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그냥 오래오래 울었고, 그치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가 한참을 걸었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집이 낡은 탓에 집 안보다 바깥이 더 따뜻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
C읍에서 생활하며 모르는 것이 있을 때마다 호준에게 이따금씩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제외하면, 4월의 중순까지 나는 송아 외에는 거의 아무와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대학 시절 친구이자 해외문학 편집자로 일하는 송아에게 학원강사를 그만두고 C읍에 와 있다고 전하니 송아는 내게 번역거리를 구해다주겠다고 말했다. 말을 하기가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는 않았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송아가 물었다. 글쎄. 나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가끔 생필품을 사러 버스를 타고 마트에 갔지만 말을 해야 할 필요는 거의 없었다. 집이 외딴곳에 있어 사람을 마주칠 일도 많지 않았다.
호준이 만나자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왔을 때, 나는 그런 식으로 한달 반 남짓한 은둔생활을 하며 혼자 지내던 중이었다.
—아직 C읍이니? 밥 한번 먹자.
호준과 대화를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고민하느라 반나절 동안 회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그날 저녁 나는 그러자고 답을 보냈다. 호준의 연락을 무시하기에는 신세를 진 게 너무 많았다.
4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우리는 시내의 칼국숫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호준이 외지에서 친구가 오면 늘 데려가는 곳이라며 정한 장소였는데 메뉴는 낙지와 바지락이 들어간 해물칼국수와 굴전골 두가지였다.
호준은 어릴 때보다 살집이 생겼고 무엇보다 넉살이 좋아진 듯했다. “오랜만에 왔으니 이인분 같은 일인분씩 주세요” 같은 말을 하는 것에서부터 그런 티가 났다.
“이제 시골생활에 좀 적응이 됐냐?”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따르며 호준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안 좋아 휴직했다더니 조금 괜찮아졌어?”
나는 숟가락을 들던 손을 잠깐 멈췄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대답이 완성돼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그 짧은 말을 꺼내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응…… 그럭저럭.”
겨우 나온 목소리는 말끝이 조금 떨렸다. 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
한달 가까이 식사를 불규칙하게 한 터라 위가 놀랄까봐 국물을 위주로 천천히 떠먹었다. 맛집이라더니 사람이 많았는데, 말을 하지 않으면 혀의 미뢰마저 둔해지기라도 하는지 맛을 잘 느낄 수가 없었다. 칼국수를 먹는 내내 호준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일화들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내 입장에서는 삼십여년 만에 만난 친구와 딱히 이야기할 것이 많지 않게 느껴졌는데, 호준은 내가 그와 마찬가지로 이혼을 했다는 사실에 친밀감을 느끼는 듯했다. 아니면 그냥 우리가 옛이야기 하기 좋은 나이대에 진입한 것일지도.
군대에 갔을 때를 제외하면 줄곧 안진에서 살고 있다는 호준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미국에 가게 되면서 더이상 안진에 오지 않아 아쉬웠다거나, 자신의 친구 중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건 내가 유일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또 했는데, 나로선 엄마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실패의 증거가 된 지 오래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네가 한국에 언제 돌아왔지?”
“중1…… 때.”
“왜 돌아왔어? 이민 간 거 아니었어?”
호준은 사실 아무것도 몰랐다. 엄마의 남자 형제들 앞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평생 엄마에게 성적표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나 미국에서 엄마 아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한국으로 돌아오면 나을 줄 알고 역이민을 결정했는데 몇년 후 IMF가 터지면서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하게 되었을 때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같은 것들도. 나 역시 그런 것들을 말하려고 시도하진 않았다.
식사를 마친 다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호준이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냥 타. 차로 가면 이십분인데, 버스 타고 가면 한시간은 걸리잖아.”
나는 시간이 많았으므로 한시간이 걸려도 상관없었지만 호준이 꼭 바래다주고 싶어하는 눈치라 그냥 차에 탔다. 낮은 건물들과 상가 간판들이 사라지자 다시 풍경이 한산해졌다. 저 멀리서는 트랙터가 느리게 움직이며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봄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비닐하우스들. 도로 양옆에서 연둣빛 잎을 조금씩 키우고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들. 아주 작은 흰 꽃송이들이 자잘하게 매달려 있는 이팝나무들. 길가에서는 키 큰 민들레들이 차랑차랑 흔들렸고, 나는 수조 속처럼 말없는 풍경이 뒤편으로 흘러가는 것을 가만히 내다봤다.
“예전보다 말수가 정말 적어졌구나.”
집에 도착할 무렵 호준이 담담히 말했다.
“좀…… 그렇지?”
말이 부딪힌다. 부서진다. 아무것도 가닿지 않는다.
호준이 잠깐 나를 힐끗 보았다가 다시 앞을 향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호준은 여자 혼자 외진 곳에서 지내는 게 걱정된다고 했다. “여긴 갈수록 외국인이 너무 많아.” 그가 말했다.
C읍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은 봄이 깊어지면서부터였다. 내가 처음 C읍에 발을 디뎠던 3월 초순에는 봄과 겨울이 매일같이 엎치락뒤치락했고 그 시기 거리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점차 사방이 연둣빛으로 가득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밭일을 하거나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쓰고 피부색이나 눈매가 나와 다른 남성과 여성들이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비닐하우스와 들판에서 허리를 숙이고 일했다.
처음 안진 시내에 갔을 때 놀랐던 것은 간판들 때문이었다. 편의점, 약국, 농협 따위의 익숙한 간판들 사이로 느닷없이 이국의 문자가 적힌 부동산이나 휴대폰대리점 간판이 눈에 띄었다. 서울에서 멀어지면 외국인 비율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나는 엄마의 고향이 그렇게 변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달라진 걸까? 꽤 오래전부터 이런 모습이었을 테지만, 내겐 이 모든 풍경이 너무 생경했다.
레몬그라스나 칼랑갈 따위의 이국 식재료들을 파는 시내의 시장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날 나는 송아에게 이곳이 얼마나 내게 낯선 곳인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풍경들이 얼마나 1980, 90년대의 미국을 떠올리게 하는지를 적어 메일로 보냈다. 그곳에서 내가 적응하려 애쓰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지를. 메일을 보내고 몇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송아가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야, 너 거기에서 지내지 마. 거기에서 혼자 지내는 거 너한테 안 좋아.
나는 송아가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송아는 늘 내 걱정을 해주었으니까.
언젠가는 털어놓아야겠지만, 그런 송아에게도 말을 하기가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송아가 아르바이트 삼아 내게 검토하라고 전해준 도서 PDF 중 하나는 폴 하우드라는 영국 작가가 쓴 언어실험 소설이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검색을 해보니 문법을 무시하거나 문자를 재조합하는 식으로 전통적인 언어규칙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글쓰기를 추구하는 작가라는 소개가 눈에 띄었다. 번역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은 원서를 몇장 읽고 있는데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외딴집에 온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 깜짝 놀라 나는 숨을 죽이고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이윽고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몇분을 더 기다렸다가 다시 파일로 시선을 옮겼다.
*
산책하기 좋은 날씨가 이어졌고, 동네가 조금씩 활기를 띠었다. 이십분쯤 걸어나가면 공터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나 할머니들이 집 앞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대화를 나누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집 안의 정적과 대비되기 시작했다. 볕이 길어지고부터는 저녁식사를 간단히 때운 뒤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인도가 따로 없는 찻길을 따라 걸었다. 조금씩 더 멀리. 지칠 때까지. 그렇게 오래오래 걸은 후엔 집에 와서 기진맥진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따금 산책길에 누군가와 마주치면 가볍게 묵례를 했지만 말을 섞는 일은 없었다.
그날도 즉석밥을 물에 말아 먹는 것으로 허기를 채운 이후 도로변을 따라 걸었다. 못물이 찰랑이는 논과 농기구 수리센터, 이따금씩 나오는 단층집을 지나면 초등학교와 농인들을 위한 교회가 나왔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던 길에 본 둑길을 걸어보고 싶어 나온 참이었다. 차창 밖으로 봤던 풍경을 떠올리며 길을 걷는데 가도가도 하천이 나오지 않자 맞게 가고 있는 것인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어차피 거길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닌데 불안해지다니, 이런 마음은 정말 이상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도 앱을 켜는 대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언제 적 것인지 모르는 구겨진 영수증의 모서리를 만지며 계속 앞으로 걸어나갔다.
둑길에 다다른 것은 사십분 정도를 걸었을 때였다. 폭이 50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하천 양옆엔 나무들이 연초록빛으로 울창했고, 주위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낚시를 하러 오기라도 하는지 둑길 위에는 하천 쪽을 향해 크기도 모양도 각기 다른 의자가 네댓개 놓여 있었다.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왔다가 다시 날아갔고, 반짝이는 수면 위를 물오리들이 둥둥 떠다녔다. 멀리서 자동차들이 지나는 소리가 아주 가끔 희미하게 들렸다. 사십분이나 걷고 난 후라 잠깐 쉴 겸 그중 한 의자에 걸터앉기로 했다.
나무들의 물그림자 탓에 연녹색 무늬를 그리며 일렁이는 하천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데, 바람이 불어왔다. 5월이라 그런지 바람이 제법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바람을 조금 더 느끼고 싶어 고개를 살짝 들어올린 채 눈을 감았다.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볕 속에 앉아 있으려니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왔다.
스물세살의 초여름이었다. 볕이 좋았던 날, 문과대 강의실에서 앉아서 전공 수업인 ‘영시의 이해’를 듣고 있었다. 그날, 시인이 되고 싶었다던 백발의 노교수는 느닷없이 우리에게 영어로 시를 쓰라고 시켰다. 한국어로도 시를 써본 적 없는 학생들이 당황하든 말든 교수는 할 말은 끝났다는 듯 창가 앞에 의자를 가져다 앉은 채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내다보았다.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지나고, 시를 쓰지 않고는 강의실을 빠져나갈 수 없으리란 것을 깨달은 학생들이 투덜거리기를 포기한 채 노트를 꺼내 들고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나도 노트에 무엇인가를 끄적였다.
When the bird grazes the edge of foreign light,
the sky splits into shards of broken mirrors.
As the hushed wind brushes across a land no voice has claimed,
I remain—
a shadow, unmoored.
새가 낯선 빛의 가장자리를 스치면,
하늘은 조각난 거울이 되어 갈라진다.
숨죽인 바람이 아직 아무도 명명하지 않은 땅을 지나갈 때,
나는 여전히
닻 잃은 그림자
노교수가 나를 연구실로 부른 것은 며칠 후였다.
“자네는 졸업하고 무엇을 할 생각인가?”
처음 가본 노교수의 연구실은 서가로 둘러싸여 있었고, 나는 책이 그렇게 많이 꽂혀 있는 개인 공간을 그때껏 본 적이 없었다. 책 읽는 걸 은밀히 좋아했지만 우리 가족 중엔 그런 사람이 나 말고 없었으므로 한 사람이 책을 그렇게까지 많이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서가를 보며 황홀해하고 있을 때, 향기로운 녹차를 따라주며 노교수가 물었다.
“대학원에 진학해보면 어때?”
교수의 말에 반짝 켜진 작은 불빛을 가슴속에 품고, 문과대 건물을 빠져나오던 날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푸르렀던 활엽수. 흥건했던 빛. 청신했던 바람.
결국 대학원에 진학하진 못했다. 엄마에게 생활비를 가져다줘야 했으니까.
엄마의 성화에 S와 처음 식사를 하기로 했던 날의 기억도 떠올랐다. 그때 나는 스물아홉살이었다. 약속 장소인 이딸리안 레스토랑에 오분 정도 일찍 도착해 미리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중키에 어깨가 왜소한 한 남자가 브랜드를 알 수 없는 배낭을 메고 나타났다. 그게 S였다. S는 오는 길에 보여 샀다며 까만 비닐봉지에 든 캠벨포도 세송이를 그 허름한 배낭에서 꺼내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당시의 내 눈엔 신선해 보였지. 허례허식이 전혀 없는 단단한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고, 누구 앞에서든 평가받는 사람처럼 늘 전전긍긍하는 나는 가닿을 수 없는 온전하고 완벽한 세계 속 존재 같아 보였으니까. 그러면 그때 나는 그가 나와 달라서 좋았던 걸까. 이제는 그 다르다는 것이 결혼생활 내내 나와 S 모두에게 나를 틀린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는 것을 안다.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직장에 다니고 싶어하던 나의 마음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내 몸도 모두 정답을 비켜난 일인 것 같았으니까.
그와는 십년을 살았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몇해 전, 그와 이혼을 예감했을 무렵 나는 살기 위해 안간힘을 짜내어 영어학원에 취직했다. 영어학원은 내가 가고자 했던 목적지가 아니라 인생이란 급류에 실려 떠내려가다 도착한 기착지였다. 결혼 전 영자신문사에서 몇년간 일했던 이력만으로는 새로운 직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분기마다 있는 리딩테스트, 라이팅테스트, 리스닝테스트. 매주 있는 리텔링테스트나 단어테스트. 여덟살짜리 아이에게 “오늘 왜 리텔링 점수가 낮았을까요?”를 물어야 하는 마음이 괴로웠지만 언제든 남편과 헤어져도 내가 내 힘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다는 사실은 힘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기착지에서도 떠내려가는 중이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숨이 가빠왔다.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나를 수렁으로 끌어당기려는 것처럼, 난폭하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산책 나오셨나봐요.”
2.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돌아봤을 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까까머리 남자아이였다. 송아지처럼 깊고 까만 눈을 지닌 아이는 많아 봐야 여덟아홉살쯤 되어 보였다. 누가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데다, 아이의 물음도 뜻밖이라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애쓰고 있는데, 아이가 답을 기다리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네…… 산책…… 왔어요?”
“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에요. 운이 좋은 날만 산책을 할 수 있거든요.”
어린아이답지 않은 말투와 표정이 퍽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나와 마주치기 전부터 둑길은 아이의 놀이터였다. 아이는 ‘운이 좋은 날이면’ 저녁식사를 마치고 둑길에 와서 한참 동안 혼자 놀다 가곤 했다. 함께 놀 학교 친구들은 다들 멀리 살았고, 그와 놀아줄 형제나 자매는 없었으므로 아이는 홀로 둑길을 찾았다. 하천을 따라 둑길을 찬찬히 걸었고, 의자에 앉아 풀벌레 소리를 듣거나 하천 위에 저마다의 움직임으로 그림을 그려놓는 물오리를 보며 누군가를 만나게 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아이가 귀여워 뭔가 대화를 더 이어나가보고 싶은데 말이 얼른 나오지 않았다. 말을 고르는 사이, 아이가 내 옆으로 와 빈 의자에 앉으며 “이름이 뭐예요?” 하고 물었다.
“세……원.”
나는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지었던 영어 이름이 아닌 진짜 내 이름을 말했다.
“내 이름은 아르뚜르예요.”
아르뚜르?
이름을 듣고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비슷한 질문을 이미 자주 받았는지 소년은 내가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덧붙였다.
“저는 고려인이에요. 알아요, 고려인? 그래서 이름이 러시아식이에요.”
고려인이라는 단어를 듣자 아주 오래전 역사수업 시간이 떠올랐다. 살풍경했던 교실. 시험기간이 다가와 허겁지겁 진도를 나갔던 현대사 시간. 젊은 국사 선생은 가르치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이들은 시험에 나올 내용이 아니면 관심이 없었다. 20세기 초 옛 소련 지역에 거주하던 동포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나는 그 국사 선생에게서 배워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고려인이라고 칭하는 아이를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계속 신경 쓰였던, 아이의 한국어 발음에 옅게 묻어나는 외국어의 흔적이 러시아어라는 것을 알았다.
“러시아……에서 왔어요?”
“아뇨.” 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왔어요.”
아르뚜르. 그애 이름은 아르뚜르였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와 나이가 같았지.
아르뚜르는 동네에서 사귄 나의 첫번째 친구였다.
아르뚜르는 둑길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대략 이십년 전 한국남자와 결혼한 큰딸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왔고, 이곳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우즈베키스탄에 두고 온 자식들을 공부시켰다고 했다. 할머니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아르뚜르의 엄마는 아직 열세살이었다. 삼년 전 한국에 온 아르뚜르의 엄마와 아빠는 남쪽 지방에 있는 섬의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고 있었다. 아르뚜르와 두번째로 둑길에서 만났을 때, 아르뚜르가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배를 그리고 있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커다란 배와 상어 그리고 고래.
아르뚜르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린 것이 무엇이냐고 내가 물었을 때, 아르뚜르는 그렇게 답했다.
“그림…… 좋아해요?”
아르뚜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책 읽는 걸 더 좋아해요.”
“나……도 그런데.”
내 말에 아르뚜르가 웃었다.
아르뚜르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그림을 가지고 이야기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아르뚜르가 허구의 이야기를 즐겨 만드는 게 단순히 상상력이 풍부해서인지, 외로움을 많이 타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르뚜르가 지어내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점차 C읍에서 사는 일상 속에서 나의 소소한 낙이 되었다.
*
날이 조금씩 더워졌다. 정기 상담을 받아야 해서 서울의 병원 가는 김에 여름 옷가지 몇벌을 챙기기 위해 오피스텔에 들렀다. 고작 삼개월을 비워두었을 뿐인데 버리지 못하고 책상 위에 둔 영어교재도, 학원 수강생 아이들이 색종이로 접어준 튤립이나 클로버 같은 것이 붙어 있는 냉장고도 생경하게 느껴져 조금 놀랐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자 삼년 전, 이혼을 전제로 별거를 시작하며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던 때가 떠올랐다. 남편과 살던 복도식 구축 아파트와 달리 환기가 잘되지 않아 공기 질이 늘 나빴지만 학원에 걸어서 출퇴근을 할 수 있었던데다 빌트인 구조라 몸만 이사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의사는 내가 아르뚜르와 거의 날마다 아주 조금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증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그럼 삼개월 뒤에 다시 볼까요?”
나는 진료실을 나와 수납을 한 뒤 병원을 빠져나왔다. 서울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삼개월 뒤에 내가 어디에 있을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C읍으로 돌아와서는 송아가 검토하라고 보내준 책들을 틈틈이 읽거나 번역했고, 저녁에는 둑길에서 아르뚜르를 만났다. 이민 시절의 나와 아르뚜르를 겹쳐 보는 건지 아니면 살갑게 구는 아이가 그저 귀여워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르뚜르가 자꾸 마음에 쓰였다. 만나면 이야기를 주로 하는 건 아르뚜르였고 나는 듣는 쪽이었는데, 가끔은 말없이 각자 흙바닥에 낙서를 하거나 좋아하는 책을 가져와 읽을 때도 있었다. 낡은 집에선 소소하게 고장 나는 것들이 많아졌다. 세면대 수전에서 물이 조금씩 샌다거나 방 문고리가 헐거워지는 식이었는데, 문고리는 그냥 두었고, 물이 새는 지점은 테이프로 대충 감아 막았다.
아르뚜르와 가까워지고부터 번역을 하다가 쉬고 싶을 때면 이따금씩 고려인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고려인이라는 용어는 러시아인이 한국인을 부르는 명칭을 그대로 음역한 데서 유래되었다거나 스딸린이 소수민족 말살 정책으로 한국어 교육을 금지했기 때문에 고려인들이 재중동포들에 비해 한국어를 더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들을 나는 그런 식으로 알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Echoes and Threads Between Worlds세계 사이의 메아리와 실타래」라는 전시의 한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건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베를린에 사는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 예술가의 설치예술 작품이었는데, 어둡고 넓은 공간에 조명을 받아 번쩍이는 금속실이 얼기설기 매달려 있었다. 관객들이 설치물 사이를 걸어다니는 동안 어딘가에 감춰진 스피커에서 한국어와 러시아어, 카자흐스탄어와 독일어로 된 목소리들이 중첩되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빛 위에 검은 선처럼 그어진 실타래의 그림자와 그 사이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영상에 매혹되어 나는 옐레나 권이라는 그 예술가의 기사를 검색했고, 그녀가 참여한 고려인 예술가들의 인터뷰집을 한권 주문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그 책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동영상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 동영상 속에서 고려인 5세인 옐레나 권은 1937년에 강제이주를 당했던 자신의 고조할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는 고조할아버지를 직접 뵌 적은 없어요. 그분은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고조할아버지에 대해서 들은 일도 거의 없었죠. 하지만 제 삶에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늘 따라다녔고 그래서 작품활동을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의 역사를 조사해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결과 제가 알아낸 건 이런 것들이에요.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어난 고조할아버지는 가난한 소작농 집안의 장남이었는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열다섯살 때 혼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이주했대요. 그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고, 마을에서는 일본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의 농사지을 땅이며 먹고살아야 할 곡식들을 다 빼앗았다고 해요. 러시아에서는 이주하는 조선인들에게 땅을 준다고 했고요. 그러다보니 굶어죽지 않으려고 러시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자연히 많았대요. 그래서 고조할아버지도 가족을 살리기 위해 농사지을 땅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돈을 벌러 연해주로 간 거예요.”
검은 화면 속에는 흑백사진 속 남성이 잠시 비춰졌다. 흰 저고리와 바지 위로 검은 띠를 질끈 동여맨 남성은 얇은 챙이 있는 흰색 중절모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카메라 앞이라서 그런지 약간 긴장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남자의 사진이 사라지고, 곧이어 옐레나 권이 다시 화면에 등장했다. 검은 스웨터를 입고 잔머리 한올 없이 뒤로 빗어 넘긴 맨얼굴을 한 한국계 여성. 여성은 한국어의 흔적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독일어로 말을 이어나갔고, 나는 영어로 된 자막을 가만가만 따라 읽었다.
“연해주에 도착해 처음엔 농장과 벌목장에서 막일을 하셨대요. 그러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사범학교를 나와 학교 선생님이 되셨어요. 마을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가르쳤고, 돈을 많이 벌어 가족을 연해주로 데려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셨대요. 하지만 1937년 가을에 소련 정부가 18만여명의 조선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일이 벌어지면서 저희 고조할아버지는 원가족을 영영 볼 수 없게 된 거죠.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이주당하면서도 왜 이주됐는지를 아무도 몰랐다고 해요. 저희 고조할아버지도 모르셨어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궁금해서 제가 나중에 알아봤는데, 1937년 7월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잖아요. 그 때문에 독일과 일본이 동시에 침략할 것을 경계하던 소련이 조선인 중에 일본과 내통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런 일을 자행했다고 하더라고요. 타고난 농사꾼인 조선인들이 척박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개간하는 데 쓰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고요. 어차피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니, 함부로 다뤄도 된다고 생각한 거겠죠. 얼마나 그 과정이 폭력적이었는지 강제이주 중에 2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요.”
6,50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강제 열차의 이동경로를 따라 하바롭스끄, 이르꾸쯔끄, 끄라스노야르스끄 같은 지도 속 대륙 위의 지명들을 붉은 선으로 이어 보여주던 화면은 이제 카자흐스탄 우슈또베의 드넓은 벌판을 비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메말라 보이는 갈대들. 그 한복판에는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원동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살았던 초기 정착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카자흐스탄의 겨울은 혹독했다고 했어요. 바람을 가려줄 바위 하나 없는 갈대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은 진흙과 짚으로 움막을 짓고 그 안에서 서로의 체온으로 버텼다고 해요. 이주하는 조선인에게 가축과 재산을 보상해준다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어요. 이주 후 배상조로 밀가루 100킬로그램과 100루블 정도가 주어졌을 뿐이지요. 많은 고려인들이 그 첫해를 넘기지 못했지만, 고조할아버지는 맨손으로 땅을 일구고 물을 길어오며 가족도 없이 혼자 살아남았어요. 고조할아버지에 대해 물었을 때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말이 기억에 남아요.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어요. 고조할아버지가 자신에게 가르쳐준 건 뿌리가 뽑혀도 다시 자라야 한다는 거였다고요. 그래서일까요. 우리 가족은 여기저기 이주하며 한국어를 거의 잃었지만, 스스로를 고려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옐레나 권이 들려준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아르뚜르의 할머니인 빅또리아를 통해서도 들었다. 빅또리아 할머니의 어머니가 1937년에 그 강제이주 열차를 탔기 때문이다. 빅또리아 할머니가 그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어느 겨울 12월의 마지막 밤이었고, 우리는 식사를 마친 후 보드까를 꺼내 마시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눈만 보면 끔찍하댔는데.”
싸락눈이 내리는 밤이었는데, 할머니가 창밖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그때 엄마는 겨우 열살이었어”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엄마는 나한테 옛날이야기를 많이 안 해줬어. 무서워서 그래. 연해주 살다가 강제로 들어갔잖아. 근데 눈 보니까 이 얘기 들은 건 생각이 나.”
거기까지 말한 할머니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뒷말을 재촉하지 않고 할머니가 이야기를 이어나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어느날 밤이었대. 소비에트 경찰덜이 마을로 그냥 들이닥쳤잖아. 문 두드린 것도 아니고 발로 차고 들어왔어. 사람덜 보고 몇시간 안에 닷새 동안 먹을 짐 싸서 나가라 그랬어. 우리 할머니가 허둥지둥 보따리 챙겼잖아. 뭐를 싸갔나. 말린 고기, 소금에 절인 청어, 알감자, 누룽지 그런 거 조금씩. 그런 거라도 싸놔서 우리 엄마가 그 기차 안에서 그거 먹고 겨우겨우 버텼어.”
그날 밤 빅또리아 할머니는 할머니의 어머니와 가족들이 나중에는 가축 싣던 화물열차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화물열차에 사람들이 숨도 못 쉴 만큼 빽빽했다고.
“창문도 없고 안은 깜깜했잖아. 나무판자 틈새로 겨우 빛이 들어왔어. 먹을 것도 이불도 아니 줬잖아. 얼마나 추웠는지 이가 딱딱 부딪쳤어. 기차가 잠깐씩 섰어도 마음대로 내릴 수도 없었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잖아. 사람덜 처음에는 무서워 벌벌 떨었다가 난중에는 무서워할 기운도 없었어. 사람덜이 계속 죽어나가니 곡소리만 들렸대.”
기차가 멈추면 군인들이 죽은 사람을 끌어내서 눈 위에 던졌다. 그사이 산 사람들은 밖으로 우르르 뛰쳐나가 새하얀 눈 위에 오줌을 눴고. 그러고는 장례를 치르지도 못한 사랑하는 이들을 눈 덮인 나무조차 한그루 없는 허허벌판에 그대로 버려둔 채,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그 끔찍한 열차에 다시 올라탔다.
“사십날을 그렇게 달렸잖아. 소독도 못하고 씻지도 아이 했지. 열차 안에서는 오줌똥 냄새가 지독했대. 머리며 옷에는 이가 왁실왁실했어. 그래서 그거를 눈 위에 털었잖아. 그럼 눈인지 이인지 모르는 게 펄펄 날고……”
빅또리아 할머니에 따르면 그 열차 안에서는 ‘누구 살아 있소?’가 매일 주고받는 아침 인사였다.
누구 살아 있소?
살아남았다면 빅또리아 할머니의 이모가 되었을 여자아이, 얼굴이 깐 달걀처럼 고왔고 솜털이 강아지풀보다 보드라웠다던 여자아이는 기차 안에서 앓다가 끝내 죽었다.
빅또리아 할머니의 식당은 둑길에서 멀지 않은 곳의 이면도로에 인접해 있다. 단층 건물로 간판이 따로 없어서 유리창에 붙어 있는 봄밭식당이라는 글씨를 보지 못한다면 누구도 그곳이 식당이라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식당 안에는 여섯개의 이인용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테이블이 있는 홀은 주방이 있는 공간과 가벽으로 나뉘어 있다. 카운터 근처에는 작은 열대어 어항과 커다란 전기밥솥이 있고 벽면에 고정된 선반에는 재래식 된장과 홀토마토 캔, 직접 담근 피클이 들어 있는 유리병들이 늘어서 있다. 인테리어 측면에서 보았을 때,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멀리 여행을 떠나온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그 작고 아늑한 식당에서 할머니는 혼자 일주일 중 엿새 점심 장사를 하고 화, 목, 토, 일요일엔 저녁 장사까지 했다.
내가 처음 빅또리아 할머니의 식당을 찾아간 것은 아르뚜르와 알게 된 지 한달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둑길에서 늘 마주치던 아르뚜르가 며칠이나 보이지 않아 언젠가 아르뚜르가 놀러오라며 알려준 상호를 기억해내어 지도 앱을 보고 찾아간 것이다. 두시가 지나 그런지 처음 도착했을 때 식당은 한산했다.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외국어로 말을 걸어온 것은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던 발길을 돌려 한번 더 식당의 유리문 안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돌아보니 그곳에는 키가 작고 둥근 체구를 지닌 노인이 서 있었다. 밀가루처럼 보이는 하얀 가루가 묻은 남색 바지와 하늘색 티셔츠 차림에 더운 날씨에도 털실로 짠 보라색 조끼를 입고 있었고, 머리엔 꽃무늬 스카프를 두건처럼 써 흰머리를 감추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으니 작은 외꺼풀 눈을 지녀 누가 봐도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 할머니처럼 보이는 그녀의 입에서 또다시 외국어가 흘러나왔다.
“아, 한국어는……?”
가까스로 입을 뗀 나의 질문에 할머니는 한국어로 바꿔 “아, 한국 사람이에요?” 하고 물었다. “밥 먹으러 온 거예요?”
그게 바로 빅또리아 할머니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나는 가게 문을 열어주는 할머니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뭐 해줄까. 지금 장사는 끝났어도 금방 만들 수 있어요. 저짝에 잠깐 앉아요. 내가 금방 차려줄게.”
괜히 민폐가 된 건 아닌지 걱정하면서 식욕은 없었지만 창가 구석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아르뚜르는……?”
메뉴판을 건네던 할머니가 내 입에서 나온 아르뚜르라는 이름에 나를 쳐다봤다.
“우리 애를 알아요?”
“산책길에서 만나는…… 친구예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다시 열었다.
“요 며칠……안 보여서.”
“아, 걱정 안 해도 돼요. 수두 걸려가지고 집에서 좀 쉬었잖아요. 이제는 아주 쌩쌩해.” 할머니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할머니가 건네준 메뉴판에는 내가 읽을 수 없는 키릴문자가 가득했다.
“고려인…… 음식…… 파나요?”
“고려인 음식도 있고, 러시아 음식도 있고, 우즈베키스탄 음식도 있지.”
БОРЩ 보르시, ШУРПА 슈르빠, ЛАГМАН 라그만, ПЛОВ 쁠롭, СОЛЯНКА 쏠랸까 같은 키릴문자와 한글이 병기된 낯선 이름의 음식들 사이에서 된장찌개란 단어가 눈에 띄었다.
“된장찌개로……”
말이 느리고 어눌한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걱정했는데 할머니는 그저 앞치마에 손을 몇번 문지르더니 메뉴판을 받아들고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 안에서 들려오는 칼질 소리, 된장 끓는 냄새, 그릇 부딪히는 소리.
잠시 후, 빅또리아 할머니가 음식을 조용히 테이블 위에 놓았다. 김이 오르고, 뚝배기 안의 국물이 바글바글 끓었다. 달큰할 정도로 뭉근히 익은 애호박, 진하고 부드러운 색깔의 된장국물. 그건 분명 된장찌개였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된장찌개에 계란이 풀어져 있고 고수가 수북이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랐지요?” 할머니가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이게 고려인식 된장찌개야.”
*
빅또리아 할머니에게 된장찌개 끓이는 법을 전수해준 사람은 할머니의 어머니였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매일 아침 논에 나가 허리를 꺾은 채 물속을 걸었고 해가 지면 가는 종아리에 진흙을 묻히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쌀을 씻고 감자와 가지를 썰었다. 이슬람교도들이 많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 몰래 돼지를 잡은 이웃으로부터 고기를 한덩이 얻어온 날에는 기름 두른 솥에 마늘과 돼지고기를 볶은 후 그 위에 썰어둔 채소와 된장을 푼 물을 넣었다. 어머니가 찌개를 끓이는 동안 할머니는 어머니의 손놀림에 따라 몇개의 재료가 한그릇의 음식으로 마법처럼 변하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엄마가 끓이는 찌개는 왜 이렇게 맛이 있어요?”
고수가 듬뿍 든 찌개를 한입 먹으며 할머니가 러시아말로 말하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고려말로 대답했다.
“그거야 마음이 들어 있으니 그렇지라.”
할머니의 어머니는 눈을 감기 전 딸에게 고려식으로 음식을 만드는 법을 모두 가르쳐주었다. 가을 내내 시래기를 말려 시락장물을 만들고 고추와 마늘, 소금을 빻아 양념을 만들어두었다가 양배추에 버무려 김치를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될 때 다른 것은 다 두고 와도 볍씨와 배추씨만은 챙겨야 한다며 봇짐 속에 숨겨 온 빅또리아 할머니의 할머니가 그랬듯 어머니는 딸에게 어디로 쫓겨나 살아도 고려인은 볍씨와 배추씨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종종 귓가에 속삭였다. 딸이 언제 어디든 또다시 갑작스레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빅또리아 할머니는 고려말을 거의 다 잊었다. 그래서 먼 훗날 한국에 일하러 왔을 때 할머니는 모든 말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하지만 고려식 음식의 맛은 단 한순간도 할머니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 맛의 비법은 할머니의 손끝에 지문처럼 새겨져 영원히 남았다.
*
된장찌개를 먹은 날 이후로 나는 봄밭식당을 자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번 정도였지만, 그다음엔 이틀에 한번, 그러다가 어느새부터인가, 거의 매일.
빅또리아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나는 식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음식을 생각하면 군침이 도는 감각과 맛이나 풍미에 대한 취향이 되살아났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혀끝을 대본 다디단 초콜릿이나 레몬셔벗처럼 빅또리아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들이 지닌,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맛의 조합들은 잠들어 있던 내 혀와 위장을 깨웠고 맛이 지닌 음영들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오후 한시 반쯤이면 식당은 조용했다. 나는 일부러 그즈음 찾아가 점심 손님이 대부분 빠져나간 식당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으면서 음식을 먹었다.
처음 한국에 와서는 모텔을 청소하고 냉동식품 공장에서 일을 했다던 할머니가 언제부터 C읍에서 식당을 운영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요식업이 천성인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든 할머니 손을 거치면 음식 맛이 풍부해졌고, 무엇보다 할머니는 사람들을 먹이는 걸 좋아했으니까. 두명이 와서 일인분만 시켜도 전기밥솥에 지어놓은 밥을 얼마든지 알아서 퍼먹도록 내버려두는 것. 그것이 할머니가 식당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식당에 오는 사람들은 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말을 하기 전엔 한국사람처럼 보이는 고려인들. 덩치가 큰 우즈베키스탄 남자들이나 태국이나 네팔에서 온 여자들. 그들은 종종 내 옆 테이블에 앉았고, 어느 나라 말인지 잘 분간할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눴는데,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란한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할머니의 손이 모자랄 때면 내가 손님들의 빈 그릇을 치우거나 식탁을 행주로 닦는 일도 자연스럽게 생겼다. 그러면 할머니는 고맙다는 말 대신 내게 음식을 싸줬다. 쁠롭이나 샤실리끄, 라그만이나 쌈싸 같은 음식들을 나는 그런 식으로 맛보았다. 할머니가 음식을 싸주면 나는 봉지를 든 채 찻길을 따라가 집으로 돌아왔고 음식을 소분한 후 한덩이씩 냉동했다. 익숙하지 않은 향신료와 식재료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그 음식을 나는 다음 날이나 그다음 날쯤 꺼내 먹었다.
호준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와 시내에 생필품을 사러 간 김에 잠깐 만나 커피를 같이 마셨을 때, 내가 고려인 식당을 드나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호준은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 식당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의 친척들 소유의 논밭에서 일하는 것 같은 노동자들. 불법체류를 일삼고, 그가 한명에게 집을 세놓으면 다른 노동자들 아홉명을 더 불러와 몰래 거주하게 하는 사람들. 호준은 내가 그곳에서 그와 함께 있을 때보다 마음이 편할 수 있다는 걸 짐작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호준이 그렇게 묻는다면 대답할 말도 생각해두었는데. 그러니까 그곳에서 나는 뿌리가 없어도 되는 사람이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호준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내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말하면 아주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S와 결혼한 가장 큰 이유는 엄마 때문이었다. 그는 엄마가 생각하기에 나의 남편이 가져야 할 만한 덕목을 모두 가진 남자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그와 이혼하게 된 것은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가장 순리에 맞는 일이기도 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것을 알아챈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란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는 비가 자주 내렸다. 퍼붓듯 쏟아지다가 잠깐씩 개는 날이 이어졌는데, 집에서 꿉꿉한 냄새가 나기 시작해 시내에 나가 제습제를 여섯개 사서 집 안 곳곳에 놓아두었다. 보일러를 틀면 좀 나아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번씩 보일러를 켰다. 낡은 보일러를 켜면 온 집 안 가득 덜덜 소리가 났다. 곳곳의 벽지가 울었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날부터인가 화장실 문이 갑자기 닫히지 않았다. 어떻게 손대야 할지는 몰라서 그냥 그대로 두었다.
장마가 지나고 난 이후엔 불볕더위가 시작됐다. 에어컨이 없는 외딴집에 있으면 금세 온몸이 땀에 젖었고, 찬물로 샤워를 해도 몸의 열기가 잘 식지 않았다. 날이 더워지면서 빅또리아 할머니의 식당에서는 국시를 팔기 시작했다. 빅또리아 할머니는 매일 아침 엄청난 양의 오이와 양배추를 채 썰어 소금에 절이고 계란지단을 부친 다음 돼지고기와 양배추를 고추기름에 볶았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각종 고명을 따로따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가는 그 음식의 주문이 늘었기 때문이다. 봄밭식당에서는 국시라는 말이 ‘국수’를 일컫는 경상도 방언이 아니었다. 나는 국시라는 말이 고려인들에게는 그들이 즐겨 먹는 특별한 차가운 국수를 가리킨다는 것을 그렇게 빅또리아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빅또리아 할머니가 살던 따슈껜뜨 근처의 꼴호쯔에서 고려인 이웃들은 ‘국시를 만들어 먹읍시다’ 하면서 밀가루가 담긴 커다란 양푼을 들고 빅또리아 할머니네 집으로 왔다. 마당에서 다 같이 반죽을 만든 다음에는 육수 낼 고기나 멸치가 없어 간장과 식초를 물에 섞어 면을 말았고, 구하기 쉬운 양배추나 토마토를 얻어다가 썰어 넣었다.
“가난해서 먹던 음식이라 내가 국시를 진짜 싫어했잖아. 그때는 국시만 보면 지겨워가지고 아니 먹고 싶었어. 근데 한국 오니까 국시가 그렇게 먹고 싶은 거야. 그래가지고 한번은 식당 가서 국시를 달랬어. 근데 멸치육수에 담긴 뜨거운 국수가 나오잖아. 그것도 맛은 있었는데 먹을수록 눈물이 나. 왜 그런가 하면 나한테 국시는 그게 아니었잖아.”
여름 내내 봄밭식당에서 국시를 시켜 먹는 건 고려인 손님들만이 아니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아지즈네 부부도, 네팔 출신 수니따도 국시를 먹고 비닐을 씌우거나 잡초를 뽑기 위해 고추밭이나 참깨밭으로 돌아갔다. 빅또리아 할머니는 아지즈네 부부와 수니따의 국시 위에는 계란지단을 산처럼 쌓아올렸다. 셋 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새콤달콤하고 국물이 시원한 국시를 처음 내주던 날, 빅또리아 할머니는 내게 고수와 딜 중 무엇을 넣을 테냐고 물었다. 할머니의 식당에 온 손님들은 기호에 따라 국시에 딜과 고수를 듬뿍 넣었다. 출신지역에 따라 국시에 고수를 넣어야 하는지 딜을 넣어야 하는지가 나뉘는 모양이었는데, 어느 쪽이 되었든, 고수와 딜은 빅또리아 할머니에게 고향의 맛을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식재료였고, 그래서 할머니는 마당에 텃밭을 일구고 고수와 딜을 키웠다.
엄마에게 고수와 딜은 깻잎과 열무였다. 우리가 처음 미국에서 아파트를 렌트했을 때 엄마는 커다란 도기 화분을 두개 사와서 들깨와 열무씨를 뿌렸다. 우리 가족이 우리만의 아파트를 갖게 된 건 미국에 도착하고 석달이 지났을 때였다. 아빠가 이민 가기 전에 우리가 살게 되리라 말한 것 같은 수영장 딸린 주택은 아니었지만 아파트에 처음 이사를 했을 땐 내 방이 다시 생긴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엄마 아빠가 라브레아 애비뉴 근처에 투 베드룸 아파트를 렌트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미국에 올 수 있도록 초청해준 큰아빠의 집에 얹혀살았다. 큰아빠의 집은 마당이 딸린 노란 2층 목조 건물이었는데, 한인타운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고, 방이 여덟개나 있었다. 커다란 그 집에서는 큰아빠네 부부와 부수입을 얻기 위해 들인 한인 하숙생들이 같이 지냈다. 우리 세 식구는 그중 방 한칸에서 석달을 살았다.
우리가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공항을 마중 나온 것은 큰아빠와 큰엄마였다. 미군기지에서 전기기술자로 일하다가 70년대에 미국에 정착한 큰아빠는 그 당시 한인 교회나 상점들을 상대로 하는 전기공사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큰아빠와 함께 미국에 온 뒤 봉제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큰엄마는 큰아빠가 사업체를 차린 이후엔 그 일을 도우며 하숙집을 운영했고, 자식 셋을 모두 미국의 명문대에 진학시킨 일을 가장 큰 자랑으로 삼았다.
친척이라지만 공항에서야 처음 본 그들의 커다란 차 뒷좌석에 실린 채, 널찍한 8차선 도로와 도로변의 야자수들, 한국의 건물들을 눕혀 놓기라도 한 것처럼 낮고 긴 건물들을 차창 너머로 보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큰아빠 부부가 우리를 위해 비워두었던 서향의 방. 화장실이 딸려 있던 그 방에는 커다란 이인용 침대 하나와 내가 쓸 매트리스, 작은 유리 테이블과 합판으로 만든 옷장, 그리고 구형 골드스타 티브이 한대가 있었다.
장사라고 해본 적 없던 엄마 아빠가 리커스토어를 인수하려고 한 것은 술은 마진율이 높고 계절 영향도 적다는 주변인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리커스토어는 가격표만 정확히 붙여두면 영어로 복잡한 대화를 할 일도 거의 없고, 세탁소처럼 기계를 관리할 필요도, 큰아빠가 운영하는 전기업체처럼 자격증이나 기술을 보유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리커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는 큰아빠의 지인으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다는 말이 엄마 아빠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처음엔 고생스럽겠지만 누구나 이민 초엔 다 그래.” 공항에서 우리를 픽업했던 큰아빠는 운전을 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No Pain, no gain.” 그것은 큰아빠가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이었다.
사우스센트럴 지역에 마땅한 가게를 인수할 자금을 모을 때까지 이년 반 동안 아빠는 큰아빠가 다니는 교회 사람의 리커스토어에서 열두시간씩 근무를 했고 엄마는 코리아타운의 한인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아파트로 아직 이사를 하지 못했고, 방학이라 바로 학교에 편입하지도 못했던 처음 두달간은 어른들이 일하러 가면 나는 큰아빠네에서 혼자 지내야 했다. 아침에 깨면 식빵에 피넛버터와 딸기잼을 발라 먹었고 티브이를 켜서 거의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어린이용 프로그램을 봤다. 점심때가 되면 방을 빠져나가 공용 식당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큰엄마가 고용한 식당 아주머니가 하숙생들을 위해 준비한 밥이 차려져 있었다. 어린아이는 그 하숙집에 나 하나였고, 나와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은 대체로 피로한 간호사거나 유학생들, 아니면 어딘가 불법체류자 같은 느낌을 풍기는 아저씨뿐이었으므로 나를 상대해줄 사람은 없었다. 공용 식당에서는 뷔페처럼 늘어놓은 반찬들을 접시에 적당량 퍼 담아 먹어야 했다. 그곳의 음식을 먹으며 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만드는 건 사랑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물엿으로 범벅된 진미채와 멸치볶음, 어묵볶음과 콩자반. 무엇을 먹어도 물엿 맛밖에 나지 않았던 그곳의 반찬들을 떠올릴 때면 나는 지금도 내게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곤 한명도 없는, 미국이라고도 한국이라고도 볼 수 없는 낯선 곳에 불시착한 듯했던 그때로 내 영혼의 일부가 되돌아가버리는 느낌이 든다.
우리끼리만 살게 된 이후 엄마는 정성껏 깻잎을 절였고, 열무김치를 담갔다. 시금치와 건새우를 넣어 된장국을 끓였고 소고기를 사다가 장조림을 만들었다. 어느날 냄새 나는 음식을 계속 만들면 신고하겠다는 이웃의 항의를 받을 때까지.
요즈음 나는 이따금씩 유튜브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한국음식을 즐겨 먹는다거나 심지어 만들어 먹기까지 한다는 외국인들의 영상을 우연히 볼 때가 있다. 한국음식이 해외에서 이렇게나 사랑을 받는 날이 왔다니. 한국음식을 먹는 일이 놀림거리가 되지 않는 날이 왔다는 사실이 내게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영어가 조금 늘어 친구들이 생기고 난 다음에도 미국에 살던 시절 나는 한번도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지 못했다. 친구들끼리 서로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오는 것이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지만 나는 아이들을 부를 수가 없었다. 집 안에서 풍기는 마늘 냄새와 김치 냄새, 주말마다 개라지세일을 돌아다니며 하나씩 중고로 산 터라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가구들. 현관문 밖에 일렬로 벗어놓아둔 신발들. 체리목으로 된 육인용 식탁이 있고 오렌지나무와 패티오가 있는 뒤뜰이 딸린 단독주택에 사는 친구들을 그런 집에 데려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나는 사람들을 나의 집에 들이지 못했다. 남편과 결혼했을 때, 나는 전셋집인데도 무리를 해서 신혼집 인테리어에 큰돈을 들였다. 인테리어를 잘해놓고 나면 손님을 집에 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서. 하지만 그러고도 나는 그 누구도 집에 초대하지 못했다. 그렇게 큰 비용을 지불하고도 내 취향과 문화 수준이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 나의 집 문턱을 가뿐히 넘어버린 것은 아르뚜르였다. 어느 수요일 오후 허리에 침을 맞으러 시내에 가야 하니 따라오든지 집에 혼자 있든지 양자택일하라는 빅또리아 할머니의 말에 아르뚜르가 우리 집에 놀러오겠다는 선택지를 창의적으로 생각해낸 것이다. 유달리 과묵한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 아르뚜르는, 놀러와도 좋다고 허락해놓고도 막상 누군가를 집에 들이려 하니 긴장되는 내 마음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새처럼 가볍게 문지방을 넘었다.
소파가 없어서 아르뚜르를 식탁 의자에 앉혔다. 우유를 한잔 따라주자 아르뚜르는 발을 까닥까닥하며 우유를 마셨다. 아르뚜르는 호기심이 많았고 대화를 나누는 내내 식탁 위에 있는 티백 상자, 집 열쇠, 코스터 같은 것들을 만지작거렸다. 거실장 위에 쌓아둔 책의 제목들을 소리 내서 읽어보거나 엄마가 진열해둔 액자 속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아, 이 애기는 누구예요? 너무 귀엽다”라거나 “완전 똑같이 생겼네요?” 따위의 평을 남겼다.
헤어지기 전, 화장실에 다녀온 아르뚜르가 내게 물었다.
“왜 문이 안 닫혀요?”
나는 나도 모른다고 아르뚜르에게 답했다. 고쳐도 고쳐도 집의 곳곳이 자꾸 고장이 난다고. 그러자 아르뚜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 고쳐줄 수 있는 사람 알아요.”
“고쳐 줄 수…… 있는 사람?”
“네, 그 사람은 뭐든지 다 고쳐요.”
*
내가 그를 집에 들인 것은 오직 아르뚜르 때문이었다. 화장실 문을 고쳐줄 사람을 데려오겠다는 아르뚜르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던 탓이다. 며칠 후 아르뚜르가 정말 한 남자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키가 큰 한국계 남자였는데 그는 나를 보더니 묵례를 하고는 그저 “어디가 화장실이에요?”라고 물었다. 처음에 나는 그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모르는 성인 남자를 혼자 사는 집에 들이는 게 신경이 쓰였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아르뚜르가 옆에 없었다면 나는 그를 돌려보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나보다 열살은 어린 것 같았던 그는 길고 큰 외꺼풀 눈을 지니고 있었다. 말수가 적은데다 그가 하는 한국어에 아르뚜르의 것보다 더 진한 러시아어 발음이 남아 있어 처음에 나는 그가 한국어에 능숙하다는 것을 몰랐다. 아르뚜르에 따르면 그는 아르뚜르와 마찬가지로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으로 십수년 전에 한국에 왔다. 아르뚜르와 친척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친척이나 마찬가지라고 아르뚜르가 힘주어 말했다.
아르뚜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신경은 온통 그를 향해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문을 열었다 닫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습기 탓에 합판으로 된 문이 휘었고 그래서 닫히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장을 가져올게요.”
잠시 후 커다란 연장통을 가져온 그는 놀랍게도 불과 몇분 만에, 좀처럼 닫히지 않던 문을 고쳐놓는 마술을 부렸다. 내가 만류하는데도 그는 아무 말 없이 화장실 문을 고치며 나온 톱밥을 깨끗이 치웠고, 연장을 정리하더니 아르뚜르에게 가자고 말했다.
“사례는……” 나는 신발을 신는 그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가 답했다. 아주 낮고 고요한 목소리로.
“우리 댜댜는 정말 못 고치는 게 없죠?”
아르뚜르가 나가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댜댜.
나는 러시아어로 ‘댜댜’가 아저씨나 삼촌을 가리키고, ‘뚀땨’가 이모나 고모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몰랐다. 고려인들 중에는 한국어 그대로 할머니나 할아버지, 엄마 아빠 삼촌 고모 따위의 호칭으로 가족 구성원을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국어를 거의 다 잊어버린 고려인 4, 5세들은 친척들을 러시아식으로 부르는 일이 잦다는 것도.
그가 세면대 수전을 고치러 다시 찾아왔을 때 내가 그를 댜댜씨라고 부른 것은 그런 이유였다.
화장실 문을 고친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전날 미뤄둔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처음 초인종 소리가 들렸을 때는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렸고, 마지못해 나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가스검침원처럼 정말 내게 용무가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문밖에는 그가 서 있었다. 회색 반팔 티셔츠 차림의 그는 긴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두고 간 것이라도 있는 걸까? 그의 방문이 너무 뜻밖이라 깜짝 놀란 나는 현관문을 반쯤만 연 채 가까스로 “댜댜씨……?” 하고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아직 한낮이 되기도 전이었는데 바깥 공기가 뜨거웠고, 나는 그를 향해 말을 하려 했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보기 위해서. 그런데 갑자기 당황한 탓인지 목이 꽉 조여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저번에 보니까 세면대 수전이 새서 테이프를 붙여뒀더라고요.”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그가 말했다.
“고쳐주려고요.”
아빠는 아무것도 고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많은 것을 직접 고치고 만들며 살아야 했지만 아빠는 욕실 환풍기에 먼지가 너무 많이 쌓여 시끄러워도 커버를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중고 자동차의 와이퍼가 닳아도 어떻게 갈아 끼우는지 알지 못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지만 미국에 사는 내내 그건 아빠의 결함처럼 여겨졌고, 엄마와 아빠 사이 갈등의 원인이 되곤 했다. 대부분의 미국 가정에서 그런 일들은 아빠의 몫이었으니까.
작은 섬 동네의 가난한 집안에서 수재 소리를 듣고 자란 아빠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민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한 섬유회사의 총무부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아빠는 누구보다 유능하다는 평을 듣는 직원이었는데, 부서별 작업용품과 소모품 입출고 사항을 매일 기록했고, 공장 설비점검과 유지보수 일정을 누구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했으며, 각종 서류들을 분류표별로 견출지를 붙여 철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매우 꼼꼼했고, 고독과 질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아빠를 생각하면, 미국에 가기 전 일요일마다 혼자 거실에서 1946년 해방 기념우표, 1984년 미국올림픽 기념우표 따위들을 정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던 오후의 고요한 햇빛, 핀셋으로 우표를 집던 아빠의 부드럽게 주름 잡힌 미간. 우표들은 앨범 속에 정확하게 연도순으로 배열되고,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정리할 때 아빠의 얼굴은 얼마나 진지하고 평화로워 보였나.
서류 정리와 자료 관리 세계의 왕이었던 아빠에게 미국에서의 생활은 불행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리커스토어에서는 즉흥적인 대처를 요구하는 돌발적인 상황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일쑤였고—맥주 냉장고는 수시로 꺼졌고, 가게에는 시비를 걸거나 물건을 슬쩍 집어들고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집에서는 싱크대 배수관이 막히거나 오래된 변기에서 밤새 물이 흐르는 일이 잦았지만 아빠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될 때마다 아빠의 마음속에 쌓였을 무력감. 겨우 독립해 차린 리커스토어가 폭동으로 습격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서든 미국에서 재기해보려던 엄마와 달리 더 늦기 전에 한국으로 되돌아오기를 아빠가 간절히 소망했던 것은 그런 것들이 조금씩 아빠의 자존감을 갉아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험과 변화보다 안정과 체계를 좋아하던 아빠는 엄마가 원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미국으로의 이민 같은 것은 꿈꿨을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군사정권이 끝나가던 시기에 처음 만났다. 사내 체육대회에서였는데, 아빠는 달리기를 하는 아름다운 엄마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엄마는 어디서나 눈에 띄는 미인이었고, 아빠는 연애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숙맥이었다. 몇번의 데이트 끝에 엄마와 아빠가 단둘이 처음으로 시내의 DJ가 있는 호프집에 간 것은 어느 봄이었다. 생맥주를 마시며 둘이서 엄마가 신청한 Queen의 「Love of My Life」를 듣던 그날, 아빠는 엄마에게 자신을 언제든 초청해줄 수 있는 형이 미국에 살고 있고, 그래서 자신은 언젠가 미국으로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빠가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거짓말을 섞어 그렇게 말하고 만 것은 그날 맥주를 마신 엄마의 복숭아빛으로 달아오른 두 뺨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빠의 숫기 없는 고백에 엄마가 자기는 외국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줄 남자하고만 결혼할 것이라고 말한 직후이기도 했다.
남동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고등학교만 졸업한 후 곧바로 섬유회사의 경리로 취직해야 했던 엄마는 서울로 대학을 간 남동생들보다 더 멀리, 더 넓은 곳으로 가고 말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빠가 첫눈에 반해버린 엄마의 아름다움은, 엄마가 아빠와 달리 꿈을 꿀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일을 후회했고 자신의 지극히 평화로웠을 인생을 망쳐버린 엄마를 원망했다.
남자는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우리 집이 익숙하다는 듯이 화장실로 곧장 들어갔고, 장비들을 타일 바닥에 내려놓은 후 세면대 앞에 몸을 숙였다. 나는 화장실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서 남자의 모습을 지켜봤다. 타인을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어수선한 집 안과 차림새가 마음에 걸리는 나와 상관없이 남자는 배관의 밸브를 능숙하게 잠그더니 배관 안에 남아 있는 물을 빼냈고, 공구를 꺼내 매끄럽고 빠르게 나사를 풀었다. 밸브가 노후한 탓인지 갑자기 물줄기가 튀어올라 그의 손목과 팔뚝을 적셨다. 그는 잠시도 당황하지 않고 한 손으로 호스 끝을 움켜쥐었고, 다른 손으로는 세면대 아래 밸브 손잡이를 더 세게 돌렸다.
미국에 살던 시절, 설계도를 보면서도 조립식 가구조차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던 아빠가 딱 한번 용기를 내어 샤워헤드를 교체하려고 나선 날이 있었다. 아빠는 왜 그날따라 샤워헤드를 교체해보려고 미음을 먹었던 걸까? 나나 엄마가 수압이 너무 약하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던 걸까? 아니면 샤워헤드를 바꾸는 일은 아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고 큰아빠가 말하기라도 한 걸까? 사실 샤워헤드 교체 자체는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아빠는 물론 엄마나 나도 아빠가 그 일을 ‘실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빠가 샤워헤드를 빼자마자 갑자기 물줄기가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빠가 샤워헤드를 빼려다가 샤워암까지 비틀어버렸고 그 바람에 녹슨 배관에 미세하게 금이 간 것이지만 그 순간 우리가 그것을 알 방법은 없었다. 금이 간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는 벽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금세 화장실 바닥을 적셨다. 순식간에 물막이 생길 정도로 흐르던 물줄기가 겨우 멈춘 것은 온 식구가 허둥대며 메인밸브를 찾아 잠그고 난 뒤였다. 미국 아파트의 화장실은 건식이라 하수구가 따로 없었고, 그래서 그날 엄마는 걸레를 쥔 채 무릎을 꿇고 바닥을 오래오래 닦아야 했다. 아빠는 셔츠가 다 젖은 채로 화장실 앞에 망연히 서 있었고. 그런 엄마 아빠를 보는 내 마음은 얼마나 조마조마했었나. 언제 또 싸움이 터질지 몰라서, 지칠 대로 지친 엄마 아빠가 언제 갑자기 또 서로를 원망하다가 나에게 소리를 지를지 몰라서.
남자가 아무 말 없이 낡은 수전을 분리하고, 기다란 상자에서 새 수전을 꺼내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세면대에 연결하는 것을 보는데, 숨을 죽이고 화장실 근처에 벌서듯 서 있어야 했던 열세살의 마음이 왜 이토록 선명하게 내 안에서 되살아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폭동이 일어나 엄마 아빠가 매일같이 쓸고 닦던 리커스토어가 불타 사라진 그해 어느 주말에 있었던 그 소동은 마치 어제 일인 듯 생생히 떠올랐고, 내 마음속엔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물을 틀어 더이상 새는 부분이 없다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 공구 가방을 정리하고 일어선 그가 내게 “이제 괜찮아요”라고 조용히 말했을 때, 내가 곧바로 그에게 반응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방치해둔 수전을 고쳐준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허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옛 기억을 헤집어놓는 그를 탓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잠시 후, 겨우 입을 열어 “댜댜씨”라고 했지만 감정의 동요 탓인지 더이상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을 무엇인가가 꽉 조이는 듯한 기분이 다시 들면서 오랜만에 숨이 가빠왔다.
“댜댜씨……”
엄마는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순간에 뒤로 물러서고 마는 나를 늘 못마땅해했다. 미국에 살던 시절, 영어 실력이 형편없었을 때도 엄마는 내가 반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으면 맞받아치길 원했고, 수업시간에는 미국 아이들 틈에서도 1등을 하겠다는 욕심을 갖길 바랐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내 욕망을 억누르는 여자가 되지 않기를, 엄마보다 더 많은 것을 쟁취하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엄마는 몰랐지. 엄마가 내게 그래야 한다고 다그치면 다그칠수록 내가 더욱 움츠러든다는 것을.
내 말을 기다리고 있던 그의 몸이 내 쪽으로 조금 기운 것은 다시 말을 할 수 없게 된 걸까 하는 두려움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을 때였다.
“괜찮아요?” 그가 물었다. 걱정스럽다는 듯이.
그와 나의 눈이 그 순간 처음으로 마주쳤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