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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멜라
1983년 서울 출생.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적어도 두 번』 『제 꿈 꾸세요』,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 『환희의 책』 등이 있음.
ocloud2@daum.net
아무래짜
한밤에
……들었어? 아무렇든 그렇다는 말이야. 아직 마음의 빗장을 다 풀진 못했어도 이 선까지 허락한 인간종은 네가 처음이야.
어느 오후, 미지근한 여름비가 부엌 창을 때리던 날, 식탁에 팔꿈치를 댄 신조가 애꿎은 귤껍질을 조각조각 찢으며 입을 열었다. 좁은 복도형 부엌에 여름밀감의 향기가 퍼졌고 냄비에선 고기와 채소를 넣은 밀푀유가 끓었다. 신조와 한집 사는 친구 배송이는 엄지발로 다른 쪽 종아리를 긁적이며 설거지를 했다. 누군가 그때 그들의 모습을 책 속의 삽화처럼 펼쳐봤다면 두 사람 사이에 기다란 우정의 시소가 있었을 것이다. 두 친구는 공들여 말의 무게를 고르며 번갈아 콩콩 엉덩방아를 찧었고, 때로 발을 세게 굴러 서로의 기분을 한소끔 떠밀어주었다. 그랬기에 신조가 실제로 ‘마음의 빗장’이라는 말을 내뱉진 않았다 해도 대강 비슷한 말의 뉘앙스가 기화된 냄비 속 육수처럼 피어올라 배송이의 살갗을 간지럽혔다. ‘인간종’이란 말은 틀림없이 했다고 두 사람 다 기억했는데, 뒤이어 배송이가 이렇게 말해서였다.
“넌 고양이고, 난 개 같으니 네가 날 할퀴어도 네 목을 물어뜯진 않을게.”
참으로 짐승 같은 우애의 맹세. 두 친구는 같은 과 동갑내기 선후배로 만났다. 얼굴은 알지만 속은 모르는, 때론 그 속이 빤히 보여 멀찌감치 흘겨보고, 때론 그 속이 예상보다 깊어 곰곰이 심술이 나기도 하면서 시소의 힘점과 작용점으로 관계의 기울기를 맞춘 지 사년, 뒤미처 졸업을 치르고 짧은 취업과 긴 구직을 거쳐 모교 대학원의 조교와 재학생으로 다시 어울려 한집 생활을 이어간 지 십개월째였다. 타고난 식성도, 행동 패턴이나 구애의 방식도 판이해 너랑 나는 같은 걸 두고 싸울 일은 없겠다는 화목한 차이가 두 사람을 동거인으로 이어줬다. 뭣보다 서로를 향해 결코 발정기 추파를 던지진 않을 거라는 강고한 성적 지향 아래 두 친구는 하나의 변기와 같은 욕실 슬리퍼를 공유했다. 그날, 궂은비 내리던 날에도 두 친구는 우정의 널빤지 양끝에 앉아 한가로이 물소리를 들었다. 신조는 빗소리를, 배송이는 개수대의 하수 소리를. 그때 소리에 화음을 넣듯 시소의 가운데 받침점에서 밀푀유 냄비가 끓었다. 의자에 앉은 신조가
“어, 어.”
했고, 양손에 고무장갑을 낀 배송이가 한쪽 발을 번쩍 들었다. 흡사 감춰둔 무공을 막 드러낸 주방장처럼 배송이가 가스레인지의 레버를 발가락으로 돌려 불을 껐다. 놀란 신조가 차고 향긋한 귤껍질을 움켜쥐었다. 배송이가 자랑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봤어? 나 엄청 빠르지!”
풍, 하고 마음의 빗장 하나가 걸쇠에서 떨어지는 소리. 신조는 배송이를 수상하게 바라봤다.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렇게……”
귀여워,라는 말이 나오려다 혀끝으로 가라앉고, 대단해,라는 단어가 맴돌다 목구멍으로 스몄다. 멀거니 보기만 하는 자신을 나무라지도 한심해하지도 않은 채 그저 보드랍게 웃다니. ‘배송아. 너 그냥 내 언니 할래? 내가 언니라고 부를까?’ 신조는 싫다고 함부로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의 끈으로 배송이를 친친 동여매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그 섣부른 소망이 배송이를 아프게 했다고 제멋대로 망상했다. 배송이의 쓸개 속 돌은 모두 나 때문이라고. 내가 욕실 청소당번을 미뤄서, 내가 막창과 마라 맛에 빠진 너를 내버려둬서 이 불행을 막지 못했다고. 끓는 냄비를 보며 어, 어 하듯 신조는 터무니없는 자책을 이어갔다. 한밤에 배송이가 허리를 뒤틀 때마다 자기가 만든 허깨비로 도망쳤다.
배송이가 담석으로 입원했다가 돌은 못 빼내고 퇴원한 셋째날 밤,
“왔다, 또 그런다.”
침대 쿠션에서 등을 떼며 배송이가 말했다. 신조는 빠끔히 방 안을 건너보며 문지방 너머에 주저앉았다. 배송이의 통증은 무른 가슴에 들불을 놓듯 삽시간에 번져갔다. 불이 떨어지면 배송이는 배송이가 되고 점점 더 배송이가 되어 끝내 배송이란 존재가 뜨거운 재처럼 흩어지는 듯했다. 이럴 줄 알고 신조는 저녁때부터 ‘찹찹이’를 곁에 뒀다. 검은색 포커카드 찹찹이를 손에 쥐고 모서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어제와 그제, 배송이가 아팠을 때도 신조는 찹찹이에 깨알같이 적힌 사자성어로 달아났다. 불안에 잡혀가지 않으려는 신조만의 방어책이었다. 그 밤에도 신조는 찹찹찹 카드를 섞어 한장을 뒤집었다.
세븐 클로버, 백구식장. 흰 망아지는 마당에서 풀을 뜯는다.
신조는 사자성어의 뜻풀이를 외며 한적한 뜨락으로 내뺐다. 침대 위 배송이는 주먹 쥔 손으로 자기의 어깨를 때렸다. 등부터 목까지 뼈가 비틀리는 느낌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왜 뼈가 아플까? 입원 전에는 복통으로 사람을 뒤집어놓더니 이번엔 고문의 부위가 더 험하고 교묘했다. 배송이가 체온계를 들어 귓속에 밀어넣었다.
“왜 그러지? 왜 체온이 낮지?”
신조는 마지못해 팔을 뻗어 배송이의 발등에 손등을 댔다. 차고 무서운데…… 그 와중에 공포가 좀 가시는 느낌. 배송이는 몸이 식어갈수록 실외기의 더운 바람을 삼킨 듯 얼굴이 구겨졌다. 믿음직한 친구 챗, 지피티가 필요했다. 배송이의 인공지능 앱은 지피티가 아니었고, 챗 기능을 쓰는 것도 아니었지만, 배송이는 몽친 인간사에 반도체 칩을 꽂듯 치읓 발음을 강조하며 그렇게 불렀다. 챗, 지피티는 저체온증의 원인과 함께 위험성을 경고했다. 탈수, 경직, 호흡저하, 심정지…… 심정지? 배송이가 서둘러 체온을 다시 쟀다. 간당간당했다. 머지않은 것 같았다. 신조가 찹찹찹 카드를 섞었다.
“어떡하지? 응급실 가?”
점점 더 구석으로 엉덩이를 후진시키며 신조가 말로만 조잘댔다. 배송이는 저체온의 일격에도 방문을 닫고 팬티와 브래지어가 한 세트인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지갑을 챙기고 신분증이 있나 확인하고 휴대전화 충전기를 가방에 넣었다. 오한에 어깨를 떨면서도 이용실적을 채워야 하는 신용카드가 어떤 건지 살폈다.
“나 간다. 문 잠가.”
담담히 문지방을 넘던 배송이가 짐짝처럼 앉은 신조의 발등에 걸려 허물어졌다. 그제야 자기의 위치를 깨달은 신조가 다급히 티셔츠에서 한 팔을 빼내며 말했다.
“나랑 가. 나도 갈게. 좀만 기다려, 나 지금 옷 갈아입는다!”
큰비 내린 뒤의 여름밤, 끈끈한 밤공기가 신조의 두 뺨을 스쳤다. 애착 카드 찹찹이를 손에 쥔 신조는 말달리듯 내달렸다. ‘택시, 어딨어, 택시!’ 언덕배기인 그곳은 차가 드물었고 큰길로 나가도 택시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웜마, 나 어떡해. 흰 망아지, 백구식장.’ 평소의 고양이다움은 애저녁에 소멸하고 초조와 두려움이 신조를 잡아 돌렸다. 후드를 입은 배송이가 모자를 뒤집어쓴 채 비틀거리며 따라왔다. 신조는 인도와 도로변을 뛰다가도 배송이를 돌아보며 허둥댔다. ‘지금이라도 콜택시 부를까. 아니면 더 가야 하나. 배송아, 나 어떡해?’ 어물어물 망설이는 사이 배송이가 길가에 털버덕 쓰러졌다. 호흡저하, 의식소실, 심…… 심……
“119 부르자. 119 부를게.”
겨를 없이 방향을 튼 신조가 이 빠진 보도에 걸려 엎어졌다. 카드가 흩어지고 괴이한 낙법 탓에 길바닥에 사지를 뻗었다.
“괜찮아?”
방금 실신 직전까지 갔던 배송이가 외려 신조를 챙겼다.
“119…… 부른다, 지금 부른다……”
“야, 너 피 나.”
전화는 빠르게 연결됐다. “제 친구가 아픈데요, 담낭에 돌이 있는데, 환자가 밀려서 수술은 못 받았거든요? 저체온에 숨을 잘 못 쉬는데, 구급차 좀 보내주세요!”
“현재 위치가 어디세요?”
“녜?”
‘그런 건 자동으로 뜨는 거 아닌가. 영화에선 화면 속 빨간 점이 두두두두 클로즈업되면서 발신자 위치가 저절로 파악되던데?’ 신조는 머리를 젖히고 두리번거렸다. 팔꿈치에선 피가 흘렀고 이마에는 동네 촉법소년들에게 딱밤이라도 맞은 듯 발간 혹이 돋아 있었다. 겨우 신호등 위 표지판을 찾았으나 밤눈이 어두워 글자들이 뿌옜다.
“안 보여요. 주소가 안 보여요.”
휴대전화를 꼭 붙든 채 신조가 말했다. 저 너머 접수원이 물었다.
“주변에 뭐가 보이세요?”
“여기 △△여대 후문인데요, 아니 쪽문인가, 우린 그냥 후문이라고 부르는데, 암튼 오시면 바로 보이거든요?”
“다른 건 없나요?”
“돈가스집이랑 ○○편의점 있어요.”
“편의점 지점명이 뭔가요? △△여대 앞인가요?”
“아뇨, 그건 아닐 것 같은데, 근데 제 주소 뜨지 않나요? 지금 제가 어디서 전화하는지 그런 거 안 나오나요?”
“○○편의점 앞으로 가겠습니다. □□소방서에서 출발할 겁니다.”
통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니 전화를 끊지 말고 통화 상태를 유지하라는 말을 기대했으나 그 또한 미디어와 현실을 분간치 못하는 신조의 멀리 간 소망일 뿐이었다.
“구급차 온대. 가까우니까 금방 올 거야.”
신조가 배송이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환자를 안심시키기보다 무섬증이 난 본인을 위한 몸짓이었다. 그래도 겁이 나는지 배송이의 어깨에 슬며시 이마를 기댔다. 배송이는 심한 조갈이 나는 듯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담벼락에 기대어 가쁜 숨을 헐떡였다. 맞은편 길가에 교복 입은 남자애들이 왁자하게 몰려갔다. ‘쟤들은 우리가 안 보이나. 너희 사람 쓰러진 거 안 보여?’ 안 보일 수 있었다. 신조 본인도 밤눈이 어두워 표지판 글자를 못 읽었으니까. 달빛은 이울었고 가로등은 흐릿했다. 신조는 잡된 감정을 밀어내려 바닥에서 카드를 추슬러 찹찹찹 섞었다. 투 다이아몬드, 아예서직. 나는 기장과 피를 심는다. 신조는 맥락도, 쓸모도 없는 사자성어를 끌어안고 목까지 차오른 불안의 냄비에서 헤엄쳤다. 까맣게 졸아든 마음을 뽑아 멀리 내던졌다. 바닥 탄 마음이 밤하늘에 기우뚱 맴을 돌다 다시 신조에게로 돌아와 박혔다. 신조는 서둘러 미래완료 시제를 끌어와 확언했다. ‘배송아, 너는 기필코 이 시련을 이겨낼 거야. 이 역경과 고비 또한 오롯이 이겨내 먼 훗날 너랑 내가 고부랑 할머니가 돼서……’
“무릎, 무릎.”
배송이가 신음하며 찌푸렸다.
“어, 어, 미안.”
신조가 자신의 한쪽 무릎으로 찍고 있던 배송이의 허벅지에서 물러섰다. 과호흡에 지친 배송이가 고개를 떨궜다. 신조는 어둑한 도로를 노려봤다. 공포와 초조가 어느덧 자책으로 변질돼 신조의 몸에 독처럼 퍼졌다. ‘업고 뛸 수 있다면, 나한테 차가 있다면, 내가 의사고 내가 괴력의 사나이라면!’ 그때 도로에 빈 택시가 지나갔다. 신조는 입술을 딱 벌리며 눈의 초점을 잃었다. 구급차냐 택시냐. 택시를 잡아타면 자칫 허위 신고자가 될지 몰랐다. 신조는 앉은 채로 슬금슬금 움직여 배송이가 택시를 못 보게 시야를 가렸다. 그 순간 숨을 껄떡이던 배송이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신조가 배송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안 돼, 정신 차려. 나 봐!”
“어지러워……”
“어, 어, 미안.”
신조가 손아귀의 힘을 풀며 또 물러섰다. 이윽고 모퉁이에서 구급차가 나타났다. 요란한 경보음도 없이, 느리고 차분하게. 신조가 껑청 뛰며 두 팔을 휘저었다. 구급차는 그들을 지나쳐 편의점 앞으로 갔다. “저기요! 어디 가요!” 신조가 목 놓아 외치며 따라갔다. 그때 손에 든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구급대원이었다. 신조가 쏘아붙였다.
“어디로 가세요? 우리 지금 여깄는데, 왜 거기로 가세요?”
구급대원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편의점 앞 아니세요?”
신조는 이를 악물었다.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늘 높이 치솟아 ‘골든타임, 구급차는 골든타임!’ 고함치고 싶었다. 뚱뚱하고 느린 구급차가 도로 위에서 멈칫거렸다. ‘밟아, 그냥 밟으라고!’ 신조는 부아가 치밀었다. 구급차가 오면 구급차를 부숴버릴 기세였다. 마침내 그들 앞에 멈춰선 구급차에서 건장한 구급대원이 내렸다. 신조가 식식댔다.
“왜 이렇게 늦게 오세요? 이십분이 넘었는데, 왜 이렇게 천천히 오세요?”
“소리치지 마시고요.”
예상치 못한 대꾸에 신조는 입술을 오므렸다. 오래 기다리셨죠, 환자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신조는 그런 대답을 바랐을까. 구급대원의 말이 옳았다. 분노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 ‘이 상황에서 성질을 부리다니. 챗, 지피티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신조는 한낱 감정에 사로잡히는 미욱한 휴먼이었다. 꾸지람에 풀이 죽은 신조가 우두커니 서 있을 때 배송이가 스스로 일어나 구급차로 걸어갔다. 또다른 구급대원이 배송이를 부축했다. 우람하고 엄한 구급대원이 물었다.
“지금 병원에 가더라도 응급실에 못 들어갈 수 있어요. 그래도 가실 거예요?”
끄덕끄덕, 신조가 끼어들어 고갯짓으로 답했다. 구급대원이 딱한 얼굴로 신조를 봤다. 이마의 혹이 자라 부화를 앞둔 알처럼 풍만해져 있었다.
“같이 타고 가실 거예요?”
“예!”
“환자분과 어떻게 되는 사이세요?”
“같이 사는 친구요, 제가 다 알아요.”
“저기, 찹찹이 챙겨.”
배송이가 어둑한 담 아래를 가리켰다. 신조는 단번에 길턱을 못 오르고 주춤댔다. 절박했기에 더 느려졌다. 눈가에 맵고 뜨거운 재가 떠다니는 것 같았다. 구급차 안은 무덤처럼 좁고 침침했다.
한눈에
천우는 해정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현관문을 연 잠깐 사이 천우의 내부로 쏟아져 그도 같이 술렁였다. 옷에 밴 바깥 공기처럼 해정이 지닌 마음의 동요가 순식간에 천우에게 쇄도했다. 마치 강철 롤러가 밀고 가듯 가슴이 받치는 느낌…… 천우는 숨을 들이마시고 연기를 시작했다. 해정의 가방을 받아들며 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줌마, 밤늦게 어딜 혼자 다녀요?”
천우가 드라마 속 남자 배우의 말투를 따라 했다. 그러자 해정이 천우의 어깨에 한 손을 얹은 채 신발을 벗다 쿡 하고 웃었다. 부부는 한창 주말연속극에 빠져 있었다. 둘이서 극 중의 배역을 맡아 상황극을 펼치기도 했다. 능청스럽게 대사를 주고받다보면 지나치게 들러붙은 현실적 조건들이 다소간 멀어지며 긴장이 누그러졌다. 해정의 역할은 사연이 많고 속내를 감추는 연상녀였다. 천우는 열살 많은 미혼모를 짝사랑하는 철부지 순정남. ‘아줌마’를 향한 들끓는 연정이 푸르른 가을바람처럼 눈동자에 박혀 세상의 소음이 죄다 멎어버린 열혈마초였다.
“왜 또 왔어. 너 안 보고 싶어. 어서 가.”
해정이 오래 울고 온 듯한 표정을 지으며 천우의 연기를 받아줬다. 그 가짜 감정을 마주하자 천우는 옅은 안도감이 일었다.
“아줌마 밥 먹이러 왔죠. 내가 오늘 아줌마 밥 먹이고 씻기고 푹 재울 거예요. 업혀요. 내가 식탁까지 업어줄게요.”
천우가 주저앉아 등을 보이자 해정이 웃음을 참느라 콧방울이 커졌다.
“저리 가. 어쩌려고 이래? 왜 자꾸 와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아줌마, 아줌마 내 눈엔 진짜 미치게 예쁜데, 딱 하나 아쉬운 게 있어요. 제발 밥 좀 많이 먹어요. 얼굴이 쑥 내렸잖아요.”
“웜마, 일절만 하쇼.”
간지럼이 터진 해정이 고향말을 쓰며 천우의 등을 다정하게 떠밀었다. 천우는 해정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가까이 끌어당겼다.
“정말이야, 우리 포동이 야위었어. 너무 고된 거 아냐?”
“뭘 해야 고되지. 고민만 하는데.”
“고민이 제일 고되지.”
“꽁치찌개 끓였어? 계란말이 했구나.”
해정이 천진한 눈을 크게 뜨며 부엌을 봤다. 소박한 세라믹 식탁 위에 흰 밥상보가 올려져 있었다. 매움한 고춧가루 향과 적당한 비린내가 실내에 은은히 떠돌았다. 천우는 야간근무조일 때면 출근 전 집안일을 끝마쳤다. 전날에 널어놓은 빨래를 개어 농짝과 서랍에 넣어놨고 바닥의 먼지도 밀대로 닦아냈다. 해정이 잘 먹는 반찬을 해놓은 뒤 혼자 티브이를 보며 먹을 수 있게 여름밀감도 씻어 가벼운 그릇에 담아놨다. 요 며칠 해정은 옷도 벗지 못한 채 소파에 쓰러져 잠들었다. 아침잠이 많은 잠꾸러기에 늘 다니는 계단에서도 발목을 접질리는 덜렁이가 젖은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집을 나섰다. 해정은 어린이 사진 전문 스튜디오에서 점장으로 일했다. 빽빽한 촬영 일정에 더해 스튜디오를 리모델링하기 위해 인테리어 업체들과 회의를 거듭했다. 천우도 올 초 대학병원으로 직장을 옮긴 뒤 3교대 로테이션으로 일했기에 두 사람의 동선은 더욱 멀어졌다. 타이밍이 엇갈리면 부부는 하숙생들처럼 집 안을 오가다 냉장고 앞이나 침대 발치에서 짧고 아쉬운 포옹을 나눴다. 때로 현관에서 서로의 턱을 붙든 채 물고기처럼 입술을 뻐금거리기도 했다. 하루는 천우가 집에 오니 해정이 식탁에 엎드려 잔잔히 코를 골았다. 천우는 해정의 귀밑머리를 넘겨주며 조용한 말로 인사를 건넸다. 깨어나지 못하는 해정을 물끄러미 보다 그녀의 옆구리를 그러안아 상체를 일으켰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해정의 두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머지고는 읏차 소리 내며 일어섰다. 해정이 잠결에 중얼거렸다.
“무겁지……”
“응, 좋아.”
천우는 침실로 들어가 이부자리에 해정을 눕혔다. 침대에 걸터앉아 사선으로 달린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주자 해정이 몸을 동그랗게 꼬부리며 천우의 넓적다리를 끌어안았다. 천우는 아이를 어르듯 등을 다독이다 팬티 안으로 파고들어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더러워……”
“그게 좋아.”
천우는 해정의 볼기를 아프지 않게 꼬집고서 머리에 베개를 받쳐주었다.
연애할 때도 천우는 해정의 살집과 병아리처럼 보얀 뺨이 좋았다. 정확히 짚자면 그 몸피를 만들어낸 해정의 먹성에 설렜고 꼼짝없이 반했다. 그다지 호사스러울 게 없는 메뉴인데도 해정은 아이처럼 감탄사를 내뱉거나 기름 묻은 손끝을 자연스레 입술로 가져갔다. 때때로 볼이 미어지게 음식을 입에 넣고서 신이 나 어깨춤을 출 때면 천우는 심장이 몇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듯했다. 그렇게 꾸밈없이 행동하는 게 마치 자신을 향한 믿음의 증거인 양 가슴이 환하게 아렸다. 이 사람과 있으면 나도 달라질 수 있을까. 한번은 둘이 메밀국수를 먹으러 갔다가 천우가 상사의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니 해정이 음식을 먹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국수는 냉육수에 면이 불어 젓가락으로 집어지지도 않았다. 천우는 해정과 함께 숟가락으로 면을 퍼먹으며 생각했다. 앞으로 메밀국수는 못 먹겠구나. 이제 나는 메밀이란 글자만 봐도 가슴이 울렁울렁하겠구나. 천우는 해정에게 청혼하며 대단치 않은 다짐을 꺼냈다. 네가 귀가할 땐 내가 문 앞에 서서 언제나 너의 가방을 받아주겠다고, 너와 헤어질 땐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갑작스레 비가 올 땐 우산을 들고 널 마중 나가겠다고. 해정은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길목에 서서 자기를 기다려달라고 했다. 천우는 어릴 적 자신이 부모에게 바라던 것을 해정에게 해주었다. 간혹 해정과 부딪히면 젓가락을 들고 개수대 앞에 서서 흐르는 물을 벴다. 흉내라도 빌어먹을 칼로 몰지각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천우는 여전히 한밤에 깨어나 칼날이 틀림없이 칼집에 꽂혀 있나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자라게 한 것은 보고 배운 바가 아니라 혼자 무수히 그려보던 꿈이었다. 천우는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고루한 말을 진심으로 새겼다. 해정과 한몸이 되어 그녀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그렇게 되비친 자화상은 조금 덜 미울지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손을 씻고 계란말이 하나를 입에 넣은 해정이 선 채로 양말을 벗었다.
“오는 길에 아픈 사람 봤어. 학교 후문에 누가 쓰러져 있었어.”
천우가 때 묻은 양말을 받아들며 물었다.
“학생이었어?”
“모르겠어. 숨을 잘 못 쉬더라. 구급차 불렀다고 해서 나는 그냥 왔어.”
천우는 집에 들어설 때 해정의 표정이 왜 어두웠는지 짐작했다. 해정은 매일 밤 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응급실 앞에서 기다린다는 걸 알았다. 응급실 보안요원인 천우가 입구를 서성이며 속을 태운다는 것도.
“웜마, 이거를 어케 찾았대!”
욕실로 들어간 해정이 쩌렁하고 개구진 음성으로 소리쳤다. 손에 든 옷걸이에 젖은 팬티가 걸려 있었다. 생리 얼룩이 묻어 해정이 감춰놓은 걸 천우가 발견해 손빨래한 것이었다.
“귀여워. 또 숨겨놔.”
천우가 보드랍게 웃으며 방방 뛰는 해정을 욕실로 들여보냈다. 문득 해정을 쫓아 들어가 치약을 짜줄까, 물 온도를 맞춰줄까, 아님 그냥 씻는 걸 보고만 있을까, 두서없이 생각하다 손목시계를 보고는 방으로 갔다. 크로스백을 들어 다시 소지품을 살폈다. 손수건, 안경닦이, 향균티슈, 핸드크림, 구강청결제, 입가심 캔디, 두통약, 여분의 양말…… 방을 나서기 전 뭐 성가신 게 없나 하고 해정의 시선으로 침대를 둘러봤다. 현관으로 가자 해정이 세안용 머리띠를 한 채 그를 배웅했다. 천우는 구둣주걱으로 신발의 뒤를 밀며 연달아 하품하는 해정을 올려봤다.
“아줌마, 설거지하지 마요. 아줌마 손에 물 묻히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눈가를 비비던 해정이 풋 하고 웃었다.
“까불지 마. 난 애 딸린 아줌마야. 너 아줌마랑 살 자신 있어?”
“살 자신도 있고 죽을 자신도 있어요. 아줌마를 위해 죽는 거? 나 하나도 겁 안 나요.”
천우가 눈망울을 사납게 부릅뜨자 해정의 낯빛이 금세 흐려졌다.
“무서워.”
“무서워?”
“응, 살살해.”
“아줌마가 예쁘니까 그렇지. 문 잘 잠그고 자.”
“아무래짜 안 열 거야. 오빠 올 때까지.”
“응, 아무래짜 열지 마. 가서 연락할게.”
천우는 해정의 말버릇을 따라 하며 힘을 주어 포옹했다. 부부는 닫히는 문을 잡고 서서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한 사람은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을까봐 운전도 못하게 하는 겁보, 또 한 사람은 아내가 떠날까봐 속을 감추는 더한 겁보. 해정의 모습이 사라지고 혼자가 되자 천우는 곧장 웃음기를 거뒀다. 계단을 내려갈 때 아래층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와 급히 벽에 붙어 섰다. 누구라도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먼지 낀 상아색 벽에 천우의 왜곡된 그림자가 비쳤다. 천우는 멀거니 그림자를 보다가 무심히 목을 조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한밤에
처음 타본 구급차 안에는 창문이 없었다. 신조는 푸른 선반 덮개와 회색 모니터에 둘러싸여 현실의 옆길로 샜다. 더 깊숙하고 흐릿한 장소로 갔다. 창문은 없고 벽화만 있던 유적지의 고분. ‘그림 대신 창을 내었다면 풍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죽은 사람도, 아픈 사람도 밖이 궁금할 텐데.’ 신조는 침대에 뻗어 누운 배송이를 볼 수 없었다. 손에 쥔 찹찹이가 보이지 않게 다른 손으로 손등을 덮었다. 마른 체구의 구급대원이 맥박을 재는 기계를 배송이의 검지에 물렸다.
“어떻게 아프신 건가요.”
구급대원이 자그맣게 물었다. 배송이는 이미 배송이가 되어 말을 할 수 없었다. 신조가 그간의 일을 떠듬떠듬 설명했다.
“병원에 입원하셨다고요?”
“예.”
“얼마나요?”
“녜?”
신조는 구급차 천장에 달력이라도 걸린 듯 이마를 들고 눈을 깜박였다. ‘배송이가 얼마나 집에 없었지?’ 그 무렵 도시엔 거센 빗발이 쏟아졌다. 먹구름과 이상기온이 손잡고 계절의 깡패처럼 몰려다녔다. 피어가던 꽃들이 졌고 사람들은 넣어놨던 긴팔을 다시 꺼내 입었다. 신조는 우산을 방패처럼 앞세운 채 하루도 빠짐없이 배송이를 찾아갔다. 환자복을 입은 배송이는 떡 진 머리와 살이 쑥 내린 얼굴로 신조를 맞았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신조는 서툴게 시선을 피했다. 링거줄에 고인 피만 봐도 가슴이 받치고 두 눈이 시큰해졌다. 신조는 들고 간 찹찹이를 만지작거리며 일층 로비의 빵집에서 시폰케이크를 사 먹었다. 마치 케이크를 먹으러 거기에 간 사람처럼, 매번 별말 없이 크림 묻은 포크만 빨다 왔다.
“일주일이요. 담석 땜에. 수술은 못 받았고요.”
보다 못한 배송이가 얘기했다. 배송이는 딸꾹질 같은 들숨을 마시고는 신조의 포갠 손을 봤다. 구급대원이 태블릿을 쥐고서 엄지 두개로 글자를 입력했다. 곧이어 119에 전화했던 신조의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유신조, 천우신조 할 때 그 신조요.”
신조는 아홉살 이후 고이 접어뒀던 실없는 자기소개가 튀어나왔다. 나이를 말할 땐 밀레니엄 베이비라 군말을 보탰고, 연락처를 읊을 땐 검지와 엄지를 붙여 ‘영, 영’이라 손짓했다. 왜 이런 주접을 떠는 걸까. 차라리 저 태블릿으로 필담만 나눴으면. 신조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창밖이 보이지 않으니 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차에서 내려 구급차를 떠밀고 싶었다. 신호를 위반하고 다른 차들의 운행에 차질을 주고 싶었다. 내색하지 않을 뿐 구급대원도 속이 곯아 보였다. 앞머리로 이마를 가리고 안경과 마스크를 썼음에도 창백한 안색이 느껴졌다. 배송이는 짧은 숨을 토했고 얼굴이 붉다 못해 불길하게 검어졌다. 세 여자가 각기 다른 방향에 시선을 둔 채 느직이 가는 구급차를 견뎠다. 차가 아니라 찜솥에 갇힌 기분이었다. 입술이 뜨겁고 아랫배가 싸했다. 신조는 찹찹이를 섞어 뽑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모지리 짓을 해버리면 배송이가 쓸개 속 돌보다 자신을 먼저 제거해버릴 것 같아 손톱 살을 누르며 참았다. 그때 배송이가 신조를 향해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뽑아. 괜찮아, 뽑아.’
일순 신조는 가슴이 미어져 고개를 떨궜다. ‘배송아, 내 마음이 보이니?’ 사실 신조는 보이다 못해 아예 배송이의 심정이 몸에 이입되는 듯했다. 배송이의 내장과 세세한 핏줄의 박동이 해일처럼 뱃속으로 쇄도했다. 내 것도, 온전히 남의 것도 아닌 몽친 감수성의 더미.
‘각도만 잘 맞추면 그렇게 미친 여자로 안 보일지 몰라.’ 신조가 구급대원을 곁눈질하며 소파에 댄 궁둥이를 움직였다. 어쩌면 구급대원은 알아도 모른 척, 이 도시 이 한밤에 그 정도 괴벽은 흔하다며 눈감아줄지 몰랐다. 신조는 무릎 사이에 양손을 감춘 채 차아압 차아압 카드를 섞었다.
텐 하트. 해함하담. 바닷물은 짜고 강물은 담박하며.
돌이켜보면 한때 신조의 우정도 강물처럼 담박했다. 찹찹이를 만나기 전 배송이를 대하는 신조의 태도는 무미하고 건조했다. 새벽마다 건넛방의 배송이가 휴대전화로 영국 축구의 소음을 뿜어댈 때 신조는 마음의 빗장을 겹겹이 걸며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홀로 이별가를 불렀다. 물론 배송이의 프리미어리그 시청이 몇년째 이어진 불면증 때문이란 것도 알았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오래 끼면 편두통이 생긴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딴에는 동거인의 눈치를 보느라 휴대전화 음량을 최소로 했다는 것도 참작될 수 있었으나 아무래짜 뻥 찼다 왁 내달리는 저 공차기가 그리 재밌다면 광장스포츠를 꺼리는 신조와는 오래 어울릴 수 없었다. 싫거나 미운 게 아니라 달라서 버거웠다. 신조는 두번 다시 남하고 한지붕 생활을 말자 뼛속에 다짐을 음각했다. 그러던 어느 저녁나절 배송이가 불쑥 말했다.
“신조야.”
“어?”
“너 그러다 더 못생겨진다?”
배송이가 한 손에 아이스크림 막대를 쥔 채 신조에게 다가왔다.
“이봐.”
배송이가 신조의 가슴팍에 떨궈진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들켰네. 숨긴다고 숨겼는데.’ 탈모의 현장을 적발당한 신조는 노상 그랬던 것처럼 꼼짝 않고 심문을 견뎠다. 끊임없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건 신조의 오래된 습벽이었다. 고양이가 축축한 혀로 안쪽 털을 핥듯 신조는 자기의 머리털을 강박적으로 쓰다듬으며 휴식과 안정을 취했다. 어릴 땐 엄마 옷에 달린 단추에 집착해 어린이집에 갈 때도 구깃구깃한 티셔츠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했다. 실은 본가에서 나오기 전까지 신조는 자다가도 엄마에게 다가가 잠든 모친의 입술을 매만졌다. 엄마가 숨을 쉬나 안 쉬나 불안해하면서.
“왜 그러는 거야?”
녹아가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배송이가 물었다. 신조는 속으로 이별가만 불렀다. 못난 습관을 들켜 창피하기도 했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암담했다. ‘내버려둬, 이렇게 살다 대머리 되면 겨드랑이털이라도 만질 테니까!’
“챗, 지피티한테 물어볼까?”
배송이가 앞니에 나무막대를 물고 인공지능 앱을 실행했다. 신조는 부동자세를 풀고서 슬쩍 배송이의 참견을 기다렸다. ‘보통 이런 경우엔 적정선에서 대화를 마무리 짓지 않나?’ 배송이는 한결같이 개의 습성을 보였다. 신조의 두 눈을 빤히 봤고 신조의 말문 앞을 서성이다가 혼자서라도 신조가 내던진 공을 찾으러 ‘검색 결과’의 숲을 뛰어다녔다. 머리카락 만지는 이유, 불안을 느끼는 이유, 불안을 잘 느끼는 사람의 심리적 특징…… ‘제발 그만둬. 이 번잡스러운 개야, 나한테 침 묻히고 털 묻히고 정 묻히지 말라고.’ 신조는 배송이가 펼쳐보는 자신의 내면이 견딜 수 없이 거북하면서도 한편으론 배송이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곰곰이 읽어주길 바랐다. 스스로는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접힌 페이지들을 너라도 펼쳐봐주길. ‘뭐래? 챗, 지피티가 내 심리적 특징이 뭐래?’ 배송이는 초콜릿이 묻은 입술을 혀끝으로 더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걸 만져볼까?”
배송이가 집 안을 뒤지더니 자신의 애장품들을 모아왔다. 검은 자수정 팔찌, 삑삑 소리 나는 작은 생쥐 인형, 도넛 모양의 실리콘 악력기와 고장 난 마우스까지. 신조는 왜 내가 허공에 대고 마우스를 클릭해야 하나 의문이 들다가도 도우려는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 한번씩 물건들을 건드려봤다. “너무 부드러워, 소리가 거슬려, 묵주 돌리는 할머니가 된 것 같아.” 신조는 두 눈을 가린 채 촉감만으로 고기의 부위를 감별하는 달인처럼 사물의 육질에 집중했다. ‘더 차갑고, 더 가볍고, 아주 세세했으면 좋겠는데……’
“이거 어때?”
배송이가 검은색 포커카드를 가져왔다. 어쩌다 그 안에 들어갔는지 모를 서랍 속 잡동사니 중 하나였다. 중간중간 이가 빠져 스물다섯장만 남은 카드가 스물다섯을 앞둔 신조의 손에 맞춤으로 잡혔다. 뒷면은 여름이불처럼 까슬하고 산뜻한데, 앞면은 비누칠한 손처럼 매끄럽고, 얇고 잘 휘는 재질에다 가지런한 네개의 선이 피부의 압점을 지그시 누르며 안정감을 줬다. 살이 베이지 않을 만큼 적당히 무던했고, 같은 촉감, 같은 리듬으로 섞어댈 수 있어 좋았다. 하나를 뽑으면 숫자와 모양이 배정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불안의 좌표를 보여주는 것 같달까. 밤하늘을 올려보며 가상의 가로축과 세로축을 그려놓고 ‘저 별은 최악의 결말, 저 별은 사서 하는 걱정’ 혼란한 내면의 질서를 가늠해보는 것처럼. 막막함이나 비관은 먼 거리의 폭발인 것처럼.
“뇌과학적으로 마음이란 건 없대. 정보처리 기술이래. 불안에서 초점을 돌리고 머리를 똑똑하게 하래.”
반평생 문과 책만 탐독해온 문화콘텐츠학과 조교답지 않게 배송이는 이과적인 어휘로 신조를 구슬렸다. 뒤이어 배피티가 설명했다. 뇌가 똑똑해진다는 건 눈앞의 위험을 과장하지 않고 더 모호하고 추상적인 사념들로 뜬구름을 잡는 거라고. 가령 한마리의 생쥐가 뱀 그림자를 보고 얼어붙는 대신 ‘아하, 생쥐의 일생이란 무엇인가, 여름은 갈수록 왜 이리 길어지나, 참 실례되는 말이지만 인간종이란 상당히 폐를 끼치는 무리 아닌가’ 그렇게 현실의 옆길로 새는 기술이랄까.
“그러다 진짜 뱀한테 잡아먹히면 어쩔 수 없지.”
배피티는 자연의 원소로 버무려진 비인공지능체답게 짐승 같은 결말로 끝을 냈다. 그러고는 수면유도용으로 끄적였던 자신의 ‘천자문 쓰기 책’을 펼쳤다. 투 다이아몬드, 아예서직. 나는 기장과 피를 심는다. 배송이가 네임펜으로 카드에 글자를 썼다. 사자성어의 물 댄 땅에 신조가 다른 습관을 심을 수 있도록.
“나 아이스크림 좀 갖다줄래?”
그날 이후 신조는 때마다 배송이가 좋아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사서 냉동실에 넣어놨다.
환하고 묽은 응급실 조명. 누군가 막 흘리고 간 피처럼 노골적인 붉은 빛을 따라 신조가 응급실 안으로 갔다. 짧은 복도를 지나자 유리벽 너머로 의사가 보였다. 의사는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몇개의 질문을 이어간 뒤 시들하게 말했다.
“안에 빈자리가 없어 기다려야 해요.”
“얼마나 기다릴까요?”
“장담할 순 없고, 많이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많이, 얼마나, 대략적으로다가.”
“다른 환자가 나가야 하는데, 알 수 없어요.”
의사는 끝내 신조 쪽을 보지 않고 컴퓨터의 마우스만 클릭했다. 그 역시 핏기 없는 안색에 속이 곯아 보였다. 신조는 구급차로 돌아가 소식을 전했다. 정해진 순서라는 듯 구급대원이 선택지를 말해줬다. 규모가 작은 다른 병원으로 갈 건지, 아니면 여기서 계속 기다릴 건지. 배송이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왜 아픈지도 모르는데 입원기록이 있는 이 병원에서 치료받는 게 낫다고 했다. 신조도 끄덕였다. 다른 병원에 가도 바로 치료받을 수 있을지 불분명했다.
“이제까지 얼마쯤 기다리셨어요? 대략이라도.”
신조가 묻자 구급대원이 검지를 세워 안경을 건드렸다.
“정확히는, 몰라요.”
“안 정확하게라도, 대강만요.”
“빠르면 한두시간 걸리는데, 안 그럴 때도……”
“안 그럴 때는, 대충 얼마나.”
“밤을 새우기도 하세요.”
“여기, 이 차 안에서요?”
신조의 목소리가 부러진 꽃대처럼 꺾였다. 구급대원은 무겁게 눈을 깜박이더니 반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없이 침착한 깜박임과 끄덕임. 마치 억만년의 밤을 그렇게 기다려왔다는 듯이.
“뭐라도 해주세요. 진통제라도, 안 되나요?”
신조가 혹이 난 이마를 들이밀며 구급대원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어렵나요?”
볼품없이 어깨를 움츠리며 회유하고 매달렸다. 구급대원은 거절의 용기를 끌어모아 겨우 소리 냈다.
“아무래도.”
배송이는 검붉은 얼굴로 입술만 일그러뜨릴 뿐 아무런 말도 보태지 않았다. 눈물 없이 표정으로 울먹이며 양손을 깍지 낀 채 팔을 바깥으로 죽 뻗었다. 아주 크고 무거운 문을 잡아밀듯이, 육체라는 고와 통에서 그만 나가고 싶다는 듯이. 신조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정수리의 가르마 선을 더듬었다. ‘백구식장, 구급차에 갇힌 흰 망아지, 어서 저 재갈을 빼내줘야 할 텐데.’ 신조는 차라리 자신이 대신 아팠으면 싶었다. 통째로는 아니고 절반 정도, 아니 삼분의 일 정도만. 깨문 입술 사이로 기도가 흘러나왔다. 부처님은 왠지 이런 데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다른 신들의 이름을 줄 세웠다. ‘하느님, 예수님, 성모마리아님, 저도 동정녀예요. 저한테 옮겨주세요, 제 친구의 아픔을 덜어 저한테 얹어주세요. 아무래짜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배송이가 혀를 길게 내빼며 헛구역질했다. 신조는 엉거주춤 서서 배송이가 와락 토를 해버리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 와중에 구급차의 침대를 염려하고 구급대원의 눈치를 살폈다. 그 산만한 마음결에서 신조는 아프게 깨달았다. 알량한 체면보다 못한 감수성의 한계를. 누구도 다른 몸을 대신해 육체의 짐을 덜어줄 수 없음을. 먹기나 싸기처럼 앓기 또한 여지없이 일인용이란 것을. 신조는 주머니에서 찹찹이를 한장 꺼내 찢듯이 비틀었다. 좁은 차 안에 배송이의 신음이 가득 찼다. 신조도 겁결에 숨이 뚝뚝 멎었다. 숨 쉴 자격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23:05. 시간은 고이고 썩다 못해 구급차의 배기가스로 휘발되는 듯했다. 영원은 이런 식으로 오는구나. 무한은 이렇게도 가능하구나. 일초 일초를 남김없이 헤아리며, 줄에 꿰인 자수정을 밀어올리듯, 초와 분을 떠밀면서, 밤새, 아침이 올 때까지.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구급차도 이대로 묶여 있는 건가. 다른 응급환자가 있으면 어쩌지. 23:05. 신조는 퍼뜩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이렇게 계속 시간을 보다간 자신이 먼저 혼절해버릴 것 같았다. 배송이의 손을 잡듯 침대 난간을 붙잡았다. 아플 때 손잡아줄 수 있는 사이, 배송아, 응급실에 있는 사람들 부럽다, 그치? 약이랑 알코올 냄새 무지 달콤하겠다, 그치? 한명이라도 나가줬으면 좋겠다, 그치? 살아서 나가든 죽어서 나가든 제발 한명만 떠나줘.
한눈에
천우는 마주 오는 사람의 동선을 가늠하며 빗속을 걸었다. 그날은 한달에 두번뿐인 휴무일이었다. 해정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천우는 아무 표정도 짓고 싶지 않았다. 어수선한 밤거리에 찬비가 푸슬푸슬 흩날렸다. 빗줄기에 무릎이 젖었고 행인들을 피해 걷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녹초가 됐다. 천우는 자신의 이런 상태가 오래되었다고 짐작했다. 한데 이런 상태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짚을 수 없었다. 내가 이렇지 않았을 때도 있었나. 한참 전부터, 어린 시절부터, 어쩌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아버지가 분출한 끈끈한 체액이었을 때부터 나란 인간은 본래 이렇게 생겨먹은 게 아닐까. 사내자식이, 너 그 쪼는 표정 어떻게 못해?
천우는 생각을 돌이키듯 길의 방향을 돌이켰다. 온 길을 되짚어가며 도로의 먼발치를 봤다. 추락했다 튀어오르는 빗방울, 이르게 져버린 푸른 은행잎. 가로수는 병들었고 술집 안 취객들은 잔이 깨질 것처럼 건배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천우는 그들의 흥취가 전해졌다. 어려서부터 그는 기쁨에 취약한 얼굴이었다. 상대가 짓는 표정을 따라 지었기에 마주한 사람이 더 편하게 웃음 짓도록 애썼다. 꾸며진 표정이 지나간 발자국에 허탈함과 슬픔이 고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빠, 나는 어릴 때 늘 오빠가 있었음, 했어.”
“신기하네, 나는 어릴 때 늘 여동생이 있었음, 했는데.”
천우는 홀로 컴컴한 마음을 걷어내려 해정의 음성을 떠올렸다. 그는 해정의 형제이자 너른 품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천우는 해정의 작은 우울감이나 칼에 베인 상처에도 그늘과 불안에 포위당했다. 연애 시절 같이 영화를 봤을 때 해정이 말했다.
“불쌍해. 오빠 피글렛 같아.”
천우는 피글렛이 누군지 금세 떠오르지 않았다. 뒤늦게 「곰돌이 푸」에 나오는 새끼돼지라는 걸 알고 한참을 볼이 부은 얼굴로 고민했다. 그는 십대 시절부터 바벨을 들어 상체 근육이 발달한 체형이었다. 군대 시절엔 선임이 그의 가슴팍을 주물럭대며 희롱할 정도였고, 회사의 체력 검증에서도 상위권 수준을 유지했다. 그런데 내가 그 울상을 짓는 분홍 돼지라니. 천우는 공포영화를 고른 것을 후회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해정이 비명을 지르며 자기의 팔에 매달릴 거라 상상했다. 실제로 잔뜩 겁에 질린 건 천우였다. 귀신이나 사탄이었더라면 ‘저건 다 가짜다’라며 감정의 거리를 뒀겠지만, 하필 연쇄살인범이 한집 살던 인간처럼 눈에 익었다. 천우는 영화 속 섬찟한 음향에 어깨를 움찔댔고, 초조하게 좁혀드는 카메라 앵글에 목이 뻣뻣해졌다. 끝도 없이 낭자하는 피바람에 나중에는 상영관의 바닥 카펫을 보며 속으로 착한 노래를 불렀다. 뜸북뜸북 뜸북새, 엄마가 섬 그늘에, 푸른 하늘 은하수…… 해정도 천우의 무른 속을 알아갔다. 뉴스에서 본 참혹한 사건을 말할 때나 한파에 나물을 부려놓고 파는 남루한 할머니를 얘기할 때, 심지어 지난밤 꾼 악몽을 얘기할 때도 천우는 “어, 어” 말끝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하루는 둘이 호프집에 가다 차에 치인 고양이 사체를 봤다. 천우는 그 자리에서 일 미터쯤 튀어올랐고, 해정이 천우를 다독여 끌고 갔다. 생맥주를 앞에 두고 천우는 줄곧 어깨와 손을 주물렀다. 살이 저리고 신경이 곤두서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거센 수압에 떠밀리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해정의 말이 맞았다. 그는 새끼 돼지였다. 몸집이 커지고 근육을 단련해도 그의 내면은 작은 눈으로 바들바들 떠는 연약한 짐승이었다. 그러니 내가 응급실 문을 지킬 자격이 있을까. 천우는 대단치 않은 출혈 환자를 봐도 옆구리의 핏줄이 출렁였다. 구급차에서 CPR 환자가 내리면 그의 머리에만 폭우가 쏟아지듯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거의 매일 밤 울리는 코드블루 방송에도 등이 무거워지고 가슴이 안개로 자욱해졌다. 겉으로는 근무수칙에 맞게 대처했기에 병원 사람들은 그의 이런 상태를 몰랐다. 해정에게도 불면증을 감추느라 마음껏 뒤척이지도 못했다. 병원의 다른 구역을 맡는 걸 고민했지만, 주간 근무만으로는 몇달 지나지 않아 본가에 보낼 돈이 바닥날 터였다. 천우는 혈변을 보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다른 쪽 피붙이보다 어머니가 몸을 옹송그린 채 무가지에서 일자리를 찾는 모습이 더 곤욕스러웠다. 디스크 환자가 무슨 계단 청소를 하겠다고. 천우가 의지하는 미래는 올해가 지나면 자신을 승급시킬 거란 팀장의 말이었다. 군대 선임이었던 팀장은 여전히 천우에게 너저분한 말을 했지만, 몸에 손을 대진 않았다. “내가 너보다 가슴 큰 여자 만나는 게 소원이었는데.” 천우가 뜬눈으로 상상하는 최악은 과로와 긴장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는 게 아니었다. 또렷한 정신으로 사람들 앞에 자신의 무능이 들통나는 순간이었다. 천우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병원의 인력 채용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웠다. 한때는 일과 보람을 한묶음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세수할 때마다 물속에 얼굴을 처박고 몇초나 견딜 수 있는지 숫자를 셌다.
끈질긴 보슬비가 분무기의 물처럼 뺨과 눈썹을 적셨다. 천우는 빗물이 고인 데만 골라 디디는 자신의 발과 어두운 밤눈에 화가 났다. 충동적으로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한 뒤 구석진 창가에 앉아 햄버거를 크게 베어 물었다. 문득 이 모든 되풀이에 넌더리가 나 상체를 수그린 채 숨을 가다듬었다. 이런 상태의, 이런 울걱거림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종이포장지 안에 손을 넣어 미지근한 감자튀김을 떡처럼 주물렀다.
“어서 오세요, □□□□입니다.”
등 뒤로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유리에 천우 자신의 실루엣과 금색 출입문이 비쳤다. 바깥쪽으로 당겨졌던 문이 손에서 놓여나자 기괴한 소리를 내며 예측할 수 없는 속도로 닫혔다. 매장에 들어설 때부터 천우는 그 문이 거슬렸다. 무거운 강화유리에 패널이 벽처럼 단단했고, 문틀의 이음새마저 뻑뻑해 성인 남자인 자신이 잡아당기기에도 수월치 않았다. 자칫 어린애가 문 사이에 끼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뭣보다 문이 닫히는 저 역겨운 속도란.
형편없는 것들.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천우는 음료를 버리고 얼음조각을 머금은 채 밖으로 나갔다. 행인들의 우산이 어지럽게 엇갈렸고, 타이를 푼 한무리의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들었다. 천우는 눈어림으로 그들을 살피며 한 사람씩 벽으로 떠미는 상상을 했다.
기쁜가?
기쁘다고 다 기뻐하나.
안 기쁜 사람도 있을 텐데, 어딘가에 슬픈 사람도 있을 텐데.
부끄러움도 없이, 다 보는 데서.
천우는 까닭 없는 경멸과 적개심을 스스로에게 되돌리며 시선을 떨궜다. 검은 판유리 같은 도로에 신호등 빛이 어른거렸고, 가슴과 허벅지에 젖은 옷이 들러붙었다. 천우는 습기로 탁한 지하차도 안으로 갔다. 반구형 지붕을 통과해 밖으로 나갔을 때 땅에 떨어진 연홍색 꽃잎이 보였다. 낙화한 꽃나무를 찾으려 축대를 올려본 순간 목울대가 훅 뻐근해졌다. 피다 만 접시꽃이 누추하게 시들어 있었다. 두드러기가 올라오듯 천우는 한 아이가 떠올랐다. 구급차 안에서 헤매다 간 무고한 아이. 그 아이가 잡아당긴 자신의 유년이 불타는 돌처럼 속을 그을렸다. 잠들면 엄마가 가버릴까 소스라치며 깨어나던 새끼 돼지. 천우는 축대 앞에 어중간한 각도로 서서 오가는 사람들의 행로를 막았다. 돌 틈에 핀 강아지풀이 물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천우는 그 연둣빛 이삭을 만지고 싶었으나 자신이 손대는 게 악을 끼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무슨 염치로. 그럴 만한 세상인가.
습관처럼 천우는 해정의 바람을 근심했다. 근래 들어 해정은 아이를 더 원했다. 사진 전공의 이력을 더 전문적으로 발휘할 기회를 마다할 만큼 해정은 어린이 손님을 좋아했다. 전부터 밀레니엄 베이비를 낳고 싶다고 했고, 천우가 좋은 아빠가 될 거라 기대했다.
“딸이 좋을 것 같아. 오빠한텐 딸이 어울려.”
가상의 아이를 그려보던 해정은 이미 머릿속으로 두 딸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자매를 낳아 평생 변치 않는 친구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어느새 이름까지 지어 불렀다.
“용감이랑 무쌍이, 어때? 안녕하세요, 우리는 용감무쌍이에요!”
해정은 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산모가 위험에 빠지는지 몰랐다. 태어난 아이들이 얼마나 덧없이 숨이 져버리는지도. 천우 역시 존재하지도 않는 딸을 생각했다. 해정의 상상이 밝은 장면이었다면 그의 것은 어두운 스토리였다. 혹시 모를 불행을 예측해 갖은 상처와 통증을 몸에 주입하는 건 그가 익힌 면역의 방식이었다. 가장 끔찍한 장면은 아이를 낳다 해정을 잃는 것이었다. 다른 경우도 가혹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해정의 애정과 관심은 온통 자식한테 쏠리겠지. 그런데 그 딸은 정말 내 딸일까. 혹여나 내 모자란 능력 탓에 아이가 자기의 한계를 단정 지으면 어쩌지. 부모가 다다른 높이가 아이의 시야를 결정해버리는 세상이니까. 앞당긴 슬픔과 시련은 그의 가슴을 시도 때도 없이 아프게 했다. 아이는 이마를 찧고 열이 나고 함부로 손을 뻗어 화상을 입었다. 글자를 익히자 일기장에 아버지를 원망했다. 어린 시절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하겠지. 너를 잃을까봐 자다가도 네 곁에 가서 입술을 매만질 거야. 천우는 벌써 그애를 깊이 사랑해 그애를 잃는 고통에 숨이 멎었다. 그런데 이 괴로움은 적어도 선택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부모는 택할 수 없지만, 자식은 고려할 수 있다. 그렇다는 건 돌이켜 숙고하라는 뜻 아닐까. 무슨 자격으로, 내가 감히 그 문을 열 수 있나? 인마, 너 동생 나오는 문 열고 나왔어, 닫고 나왔어. 천우는 자신을 수치스럽게 한 말들에 여전히 따귀를 맞듯 얼굴이 뜨거웠다.
자정이 넘어서야 천우는 병원이 있는 언덕길에 이르렀다. 그는 회사가 아니라 장미 울타리로 가는 거라 스스로를 속여 넘겼다. 본관 입구의 불은 꺼져 있었고 벽체를 덮은 걸개가 비에 젖어 음울했다. 천우는 거기에 적힌 결의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전공의들의 선택을 이해할 만큼 심정의 여력도 없었다. 의약분업이나 약사법에 뚜렷한 주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처방은 의사에게 받고, 약은 약국에서 조제하라는 법률이 어째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반추하게 하는지 현실에 얽힌 감정들을 속속들이 파고들 수 없었다. 자신이 깃대라면 모든 깃발을 내리고 싶었고, 밤길에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도 부러운 마음이 일었다. 너는 너답게, 건강히 분노하는구나. 그는 바깥의 소리가 커질수록 더욱 고립된 채 한없이 지워지고 싶었다. 꽁치나 양파 씻은 물을 개수대에 내어버리듯 누군가 오염된 나를 쏟아버렸으면. 천우는 감정을 느끼는 게 매 맞는 기분이었다. 성적 유희나 쾌락조차 참아야 하는 주삿바늘처럼 곤혹스러웠다. 차라리 더 혹독하고 무정한 힘이 자신을 휘둘러주길 바라기도 했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어둠을 휘저으면 불현듯 살갗이 터지고 비명을 토하도록 타인의 신체를 몰아붙이고 싶기도 했다.
너야말로, 그 본성이 흘러넘치는데.
응급실의 노골적인 붉은빛을 보자 천우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는 문 앞에 선 동료의 눈을 피해 뒷길로 돌아가 계단을 올랐다. 퇴근 후에도 휴일을 받아도, 천우는 응급실 앞을 떠나지 못했다. 긴장과 불안이 몸에 배어 잠시라도 그것에서 놓여나면 울걱거림이 더 크게 요동했다. 평소에도 그는 잠을 청하려 한참을 뒤척이다 그예 머릿속으로 응급실을 불러왔다. 누름돌처럼 가슴에 베개를 올려둔 채 자신을 에워싼 어둠을 떠올렸다. 실상은 베개 속 솜뭉치 정도가 자신이 지닌 마음의 짐이 아닐까 자문하며. 그렇게 가까스로 잠이 들어도 크나큰 손이 가슴을 들어올리는 느낌에 이내 몸서리쳤다. 그러니 해정이 천우의 이런 상태를 모르리라는 생각은 그가 애써 외면하는 또다른 불안이었다.
어느날엔 해정이 침대로 다가와 그의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오빠. 어제 드라마 있잖아.”
응, 하고 대답하며 천우는 해정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는 자꾸 나른하게 흔들리는 어린애 팔 하나가 떠올랐다. 정작 차에서 아이의 시신이 내려질 때 자신은 겨우 팬지꽃만 봤건만.
“어제 그 장면 있잖아. 둘이 춤출 때.”
“응.”
잠시 말의 여백을 둔 해정이 조금은 애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줌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한밤에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배송이가 응급실로 들어갔다. 신조와 구급대원이 배송이를 부축해 이동침대에 눕혔다. 의사가 다가와 구급대원에게 환자의 증세와 바이털 수치를 물었다. 곧이어 안쪽의 자동문이 열리고, 문 앞에 서 있던 보안요원이 배송이의 침대를 밀고 갔다. 신조는 배송이를 따라가다 멈칫하며 뒤를 봤다. 구급대원이 멀어지고 있었다. ‘말해야 하는데, 같이 있어줘 고맙다고. 그리고 아까 동료분께 소리쳐서 미안했다고.’ 머뭇거리는 사이 자동문이 닫혔고, 신조는 서둘러 구급대원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곁에 앉아 있을 때보다 곧고 단단해 보이는 뒷모습을.
응급실 안은 초나 램프를 밝힌 듯 어둑했다. 얕은 잠에 빠진 사람도 있었지만, 손이 닳게 침대 커버를 쓸어내리는 사람도 있었다. 들불 같은 통증이 잦아들길 소원하듯. 다행히 배송이는 연달아 링거액을 맞자 점차 상태가 진정됐다. 아무리 약의 종류와 효능을 꿰고 있어도 챗, 지피티는 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밤에 병실을 지키는 간호사들이 은색 반달 접시를 들고 침대들을 오갔다.
“할머니, 무슨 약 드세요!”
“어엉?”
“약! 약 드시는 거 있으세요!”
간호사가 입에 약을 털어넣는 시늉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소리에 접의자에서 자고 있던 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움칠하며 팔짱을 풀었다. 심전도기계에 흉부를 연결한 남자는 앉은 자세로 졸았고, 그 옆으로 호흡기를 단 여자 곁에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서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 여자는 빨간 법랑냄비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애착 냄비인가……’ 신조는 찹찹이를 손에 쥔 채 정수기로 가서 물을 마셨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어두커니 놓인 빈 침대들이 보였다. 부족한 것은 응급실의 빈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킬 사람이었다. 그때 긴장감이 돌며 간호사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얼핏 소변줄이라는 말이 들렸고, 곧이어 한 침대의 둘레로 커튼이 쳐졌다.
“왜 먹으라는 약은 안 먹고 술을 퍼마셔.”
커튼 밖으로 밀려난 젊은 남자가 말했다. 경황없이 집을 나섰는지 허름한 티셔츠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곁에 있는 반백의 여자가 성을 내듯 중얼거렸다.
“내가 발견 안 했으면 늬 아버지 갔어. 내가 골목에 나가봤길래 망정이지.”
신조는 찹찹이를 만질 곳을 찾아 더 고요한 방향으로 갔다. 문을 열고 나가자 일층 로비로 이어졌다. 사람이 붐비던 한낮과 달리 접수대와 통로가 적막했다. 널찍한 소파마다 누군가 쪽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도 응급실에 따라온 보호자들인 듯싶었다. 신조는 화장실에서 새어나오는 조명에 의지해 찹찹찹 카드를 섞었다. 그러다 문득 손짓을 멈추고는 휴대전화 속 ‘천우신조’로 저장된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요즘 혈압약 잘 먹지?
찹찹이는 그간 얼마나 매만졌는지 코팅비닐이 벗겨지고 금박과 은박 무늬들이 흐려져 있었다. 신조는 카드의 겉칠이 벗겨진 만큼 자신이 배송이를 걱정했다는 걸 알았다. 찹찹이는 그 시름의 증거가 아닐까. 그러니까 불안은 애정과 떼어낼 수 없는 짝이자 서로의 뒷면이라고. “야, 기죽지 마. 너처럼 오버해서 상상하는 것도 재능이야. 챗, 지피티 시대잖아.” 신조는 쫄보를 위한 ‘용감무쌍’의 주문을 외듯 배송이의 말을 되새겼다.
얼마 뒤 연푸른 당직복을 입은 의사가 왔다. 그는 말문을 열기 주저하며 배송이의 증상을 되짚었다. 저체온, 오한, 호흡곤란, 구역감과 경련…… 담석 때문이라기엔 배송이의 증상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했다. 확신할 순 없으나 한가지 짚이는 데가 있다고 했다.
“조심스러워요. 조심스럽지만, 환자분 증상을 보면 진통제 금단증상이 의심돼요.”
순간 바람에 떠밀리듯 배송이의 몸이 뒤로 흠칫했다. 의사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 배송이가 맞았던 아편류 진통제를 말했다. 보통 이 정도 횟수로는 중독되지 않지만, 환자분은 특이한 케이스 같다고 했다. 트라마돌 50mg. 하루에 두번씩 일주일간.
의사가 돌아가고 배송이는 휴대전화로 챗, 지피티를 실행했다. 신조는 병원에서 봤던 배송이가 떠올랐다. 신조가 시폰케이크를 먹을 때 배송이는 떡 진 머리와 쑥 내린 얼굴로 밝게 말했다. “이제 별로 안 아파. 집에 가기 겁나. 수술할 때까지 계속 병원에 있었으면 좋겠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배송이는 약물에 중독되어갔을까.
“무서워.”
배송이가 침대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말했다. 신조는 말없이 커튼을 둘러치고는 배송이 앞에 앉아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뭐 하는 거야.”
“정보처리, 정보처리 기술.”
신조가 쎄쎄쎄 하듯 배송이와 손뼉을 마주치며 작게 노래를 불렀다. 푸른 하늘 은하수를 부르고, 엄마가 섬 그늘에를 부른 다음 뜸북뜸북 뜸북새까지 부르려 하자 배송이가 이용실적을 채워야 하는 카드를 꺼내 신조에게 말했다.
“가서 병원비 좀 내줘.”
신조는 이마에 났던 혹이 부항 뜬 자국처럼 가라앉았지만, 극심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한쪽 코밑이 발갛게 헐어 있었다.
한눈에
천우는 울타리 앞 벤치에 누웠다.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워 넝쿨로 송이를 이은 붉은 장미를 봤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는 응급실 앞의 어둠이 그려졌다. 그 어둠은 칠흑의 깊이와 농도가 달랐다. 미동 없이 밤의 모퉁이를 보노라면 사물의 윤곽이 흐려지고 빛 번짐이 일듯 어렴풋한 형체가 들썩였다. 마치 한마리의 짐승처럼. 천우는 음산한 공기를 자신의 호흡으로 데우며 어둠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도, 그렇게 된다…… 오래토록 천우는 홀로 컴컴했기에 때론 그 말소리가 동무처럼 느껴졌다.
차고 단단한 나무판에 뺨을 대고 천우는 젖은 흙내음을 맡았다. 소란한 물소리를 따라 천우의 생각이 흘러갔다. 노루귀와 망초, 측백과 꽃대들, 포석 위에 투둑투둑. 토해지지 않는 슬픔, 감자튀김, 강아지풀의 다른 말은 버들강아지, 짧고 서운한 생애, 나는 아이를 낳지 않을 테다, 절대로 사는 고통을 주지 않을 테다, 어릴 적 결심, 살 자격과 죽을 권리, 밥 짓기, 헤매는 사람들, 사경을, 거리를, 알록달록한 기쁨을, 거짓말 마라, 속이지 마라, 모든 아이는 태어나고 싶어하는데, 저 비처럼, 내리고 적시고 흐르고 싶어할 텐데.
천우는 몸을 일으켜 발치의 응급실을 봤다. 설핏 여자애의 노랫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한밤에
응급실 입구로 다가가자 온화한 표정의 보안요원이 자동문의 버튼을 눌러주었다. 두 친구는 작은 뜰을 지나 폭이 좁은 계단으로 갔다. 낮에 풀들을 베었는지 어둠 속에서 진한 엽록소 향이 풍겨왔다. 울타리를 따라 자란 붉은 장미가 마치 꿈속 장면처럼 묘연하고 아리따웠다. 한밤을 지나 이제 곧 동이 터올 시간이었다.
“신조야.”
“어?”
“나 헤드폰 샀어. 어차피 또 입원해야 하니까 병실에서 쓰려고. 앞으로 그거 끼고 축구 볼게.”
배송이의 말에 신조는 이렇다 할 대꾸 없이 두 눈을 지릅뜨며 발밑의 어둠을 봤다.
“신조야.”
“어?”
“너 배고프지.”
“어떻게 알았어?”
“저기, 밥 짓나봐. 밥 냄새 나.”
배송이가 건물 벽에 뚫린 은색 바람구멍을 가리켰다. 아마도 병원의 조리실 환풍구 같았다. 두 친구는 새벽에 밥 짓는 사람들을 생각했고, 다시 층계를 내디디려 할 때 배송이가 걸음을 멈췄다.
“들었어? 방금 들었어?”
배송이가 천천히 고개를 틀며 불 꺼진 약국 간판 위를 봤다. 신조도 그 방향을 따라 허공을 봤다. 잠깐의 정적 사이로 선선한 여름 바람이 불었다.
“엄청 청아하게 울었어.”
배송이는 해같이 말똥하게 눈을 뜨고서 챗, 지피티를 실행했다. 신조는 곁에 서서 검색창에 입력한 글자를 봤다. 조그맣게 그 문장을 따라 읽자 문득 차고 향긋한 귤껍질을 움켜쥐고 싶었다.
도시에서 들을 수 있는 여름밤 새소리, 새소리.
들썩이는 어둠이 그들을 굽어봤고 새벽길 어딘가에서 구급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두 친구는 흐르는 빗물처럼 낮은 곳으로 향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