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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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조해진 趙海珍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목요일에 만나요』 『빛의 호위』 『환한 숨』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여름을 지나가다』 『단순한 진심』 『완벽한 생애』 『겨울을 지나가다』 『빛과 멜로디』 등이 있음.

simpleheart63@daum.net

 

 

 

조립되는 밤

 

 

내가 조립장난감에 매혹되어 있던 시기는 어머니의 짧은 외출이 이어지던 때와 맞물린다. 그전까지 내게 조립장난감은 네모난 종이상자 안에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였을 뿐이다. 싸구려 본드가 머리를 나쁘게 한다는, 혹은 나쁘게 할 거라는 이유로 어머니는 내가 아무리 졸라도 조립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토록 완고했던 어머니가 집 근처 문방구에서 조립장난감 하나를 사와 안겨준 뒤 다시 외출한 날이 있었다. 바로 그 여름날부터 내 삶에 조립이라는 미지의 세계가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날 어머니는 화장지를 사 오겠다며 외출했는데 두세시간 뒤 빈손으로 귀가했다.

어머니의 그런 외출 패턴은 두 계절이 흐를 때까지 지속됐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조립장난감, 생필품이나 야채가 필요하다는 레퍼토리, 드라이어 소리와 화장품 냄새, 그리고 어머니의 빈손…… 어머니의 외출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거나 조립장난감에 몰두한 마음을 헝클였던 건 아니다. 조악하게 인쇄된 엉성한 매뉴얼을 보며 로봇이나 전투기, 소방차 같은 것을 완성해가는 과정에 내 작은 가슴은 희열로 충분히 가득 찼으니까. 조립이 완성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올까봐, 본드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며 조각들을 거칠게 치워버릴까봐, 오히려 나는 늘 그런 것을 걱정했다.

감각의 뼈는 한순간 자란다.

눈으로는 매뉴얼을 훑어보면서도 온 신경은 외출을 준비하는 어머니에게 향하게 된 어느날은 그야말로 느닷없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날의 어머니는 전날까지의 어머니와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고 그 감각이야말로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날 내게 각인된 어머니의 모습—옷을 갈아입고 화장대에 앉아 화장을 하던 모습, 스타킹을 발목에서부터 돌돌 풀어 끌어올리고 금박 장식이 있는 핸드백을 챙기고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두 발을 차례로 집어넣던 그 모든 모습은 지금도 붓 번짐이 많은 유화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고전적인 그림 속 모델, 그러니까 나와는 완전히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곧 현관문이 닫혔고 쾅, 하는 소리—수없이 되감아본 기억의 필름 안에서 그 소리는 실제보다 날카롭게 세공되었을 것이다—가 내가 앉은 아파트 거실 안에 밀봉됐다. 문은 단 한번 닫혔을 테지만 그 소리는 여러겹으로 울려퍼지는 듯했다. 앞으로 내게 찾아올 나쁜 날들, 가령 악몽을 꾸었다든지 혼자 아픈 날이면 시간의 터널을 거슬러와 내 귓가를 빙빙 돌다 소멸하게 될 소리였다.

한참을 닫힌 현관문만 건너다보던 나는 돌연 상자 속 조각들을 마구 섞기 시작했다. 매뉴얼을 보지 않은 채 그저 손 가는 대로 조각들을 이어붙일 때 나를 지배하던 감정은 배신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피와 내장 사이로 서서히 배어드는 것 같던, 예리한 미움에 가까운, 내가 처음 배운 어른의 감정……

이듬해 봄, 나는 학교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짧은 외출은 중단됐고 나는 조립장난감에 대해서라면 더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건 그로부터 십여년 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

 

*

 

어머니의 그 짧은 외출이 이어지던 시기에 대해서라면 오직 한 사람에게만 고백한 적이 있었다. 지금 나는 그 고백의 순간을 떠올리는 중이다. 이케아의 쇼룸 침대에 앉아, 새치가 성성한 마흔일곱살의 중년이 되어……

그때 내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 한 사람—자영이었다—은 매뉴얼을 무시하고 만든 그 무언가—그 무언가의 형태는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가 내 첫 작품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영감과 파토스로 만든 거잖아. 그런 걸 작품이라고 해야지, 그럼 뭐라고 불러?”

한뼘 정도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는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내 머릿결을 쓸어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방충망에 매달려 꿈쩍도 하지 않는 날벌레를 나른히 올려다봤다. 빛에 취해 지상에서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탕진하는 티끌 하나 크기의 무모함을……

그때 우리가 누워 있던 침대는 슈퍼싱글 사이즈였고 디자인은 평범하다 못해 투박했다. 그해 초여름부터 그녀가 내 자취집으로 들어와 살다시피 하면서 그 침대가 우리 공동의 가구이자 사랑의 처소—그녀는 그 침대를 종종 ‘둥지’라고 불렀는데 그녀가 둥지,라고 하면 우리가 잠든 사이 우아한 날개를 가진 새가 긴 실을 물고 와 침대의 해지거나 찢어진 부분을 고요히 깁는 장면이 연상됐다—가 된 것이었다. 스물여섯살의 나와 서른한살의 그녀는 당장 침대를 바꿀 여력이 없었다. 어쩌면 바꿔야 하는 이유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몸이 닿는 순간 정념으로 폭발할 수 있는 사랑의 짧은 거리를 그 침대에서는 마음껏 누릴 수 있었으니까. 미래 없이, 부끄러움 없이, 아무것도 없이.

그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답게 서사의 빈틈을 자신의 방식으로 채워가는 것에 재능이 있었고 그것을 즐기기도 했다. 그 밤도 그랬다. 그녀는 내 어머니가 아들의 조숙한 감각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며 그로 인해 그 외출이 비교적 짧게 끝난 거라고 자신의 추측을 펼쳐갔다. 어머니가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났을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했는데 식당이나 극장에서 어머니와 스치듯 만났을 뿐인 사람이 밀애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같은 아파트의 위층이나 아래층에 사는 미지의 청년—반드시 청년이어야 해,라고 그녀는 덧붙였다—이 그녀의 상상으로 빚어진 그물에 걸려들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했을 뿐이다. 이상한 건 나였다. 그녀가 나만이 알고 있던 어머니의 비밀을 이야기하며 심지어 즐거워하는데도 아픈 마음 없이 듣고만 있었던 것, 그건 그녀를 알기 전에는—그 이후 역시—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아니, 진정 불가해한 건 우리가 여름밤의 빗소리를 들으며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 그 자체인지도 몰랐다.

서울의 신생 갤러리가 마련한 설치미술가와 문인들—소설가와 시인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의 공동전시 프로젝트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설치미술가가 작품을 구상하면 그 미술가와 짝을 이룬 소설가나 시인이 그에 어울리는 짧은 글을 창작하여 함께 전시한 뒤, 그 결과물을 책자 형태로 여러 예술기관에 비치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골자였다. 나와 자영 외에도 여섯명이 더 참여했는데, 하나같이 전시나 작품 발표를 시작한 지 일이년도 안 된 초짜들이었다. 자영은 그 이전 해에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고—그 작품이 그해 최고의 등단작으로 평가된다는 건 미팅이 끝나고 알게 됐다—나는 유학 준비를 핑계로 다니던 대학원을 그만둔 채 빈둥대다 선배들의 단체전시에서 겨우 한자리를 얻으며 얼결에 데뷔한 경우였다.

첫 미팅 때 그녀에게 닿곤 하던 내 시선에 이성적인 관심이 녹아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이성이라는 생각조차 희미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재빨리 시선을 돌리곤 했던 것도 그저 주눅이 들어서였을 뿐, 설렘이나 긴장감과는 무관했다. 미팅 시작 전 스스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통해 나는 그녀가 나와 달리 정도의 절차를 밟아 작가로 인정된 경우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더욱이 그녀는 삼십대였고 당시의 내게 삼십대는 실언이나 실수로부터 초월한 완연한 어른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내 또래거나 나보다 어린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그녀를 어려워한다는 건 금세 감지됐다. 그녀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전시의 방향이나 협업 방식에 대해 활발히 이야기가 오갈 때도 그녀는 저 혼자 심판자의 의자에 앉아 있는 듯 조금은 내리깐 시선으로 회의를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다. 내 눈에 그녀는 어떤 종족의 유일한 개체 같았고, 그래서인지 필요 이상 예민해 보이기도 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아니, 내가 그녀를 어려워한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붓 번짐이 많은 유화 속 이미지로 남아 있는 어머니가 삼십대 초반이었으니까.

물론 그때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 프로젝트가 끝난 뒤로, 그러니까 우리가 뜻밖에 연인이 된 이후부터, 그녀가 예민함에 더해 겁도 많은 사람이란 걸 알아가게 될 앞으로의 시간을…… 그 마음속 허공에는 그녀와 한번쯤 만난 사람들이 수시로 모여 그녀의 작품과 인성을 평가하는 작은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다는 결론에도 나는 곧 다다르게 되리라. 그녀가 친구를 오래 사귀지 못하는 건 그들의 마음이 돌아서는 순간을 예감해서였고,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기다렸으면서도 막상 그 기회가 찾아왔을 때 회피를 선택한 건 혹평이 두려워서였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그녀는 세번 정도 작품 청탁을 받았지만 그중 단 한번만 발표를 했는데, 그 작품은 혹평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채 잊히고 말았다.

세상의 관심이 어땠든, 나는 그녀의 소설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좋아한 건 소설을 쓸 때 고민하고 몰두하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까마득히 높은 문학의 영토 끝자락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려 있는 그녀가 자랑스럽지 않은 적은 없었다. 당시의 내 진심이 그녀에게 얼마나 가깝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절로 돌아간대도 내가 그만큼의 감정을 품지 못하리란 건 분명했다.

젊은 커플이 침실 쇼룸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들은 마치 내가 앉은 침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침대를 제외한 서랍장과 조명, 화장대, 이인용 소파를 차례로 구경했고 소파에는 번갈아 앉아보기도 했다. 그녀와 나는 누리지 못한 풍경 속에 그들이 있었다. 이케아가 한국에 상륙한 건 우리가 헤어지고 십여년이 흐른 뒤였던 것이다. 하긴, 우리가 만나던 시절에 이케아가 존재했다 해도 이곳의 가구와 소품이 당시의 우리에겐 함부로 욕심내어서는 안 되는 고가로 여겨졌을 터였다. 이케아라는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그들의 젊음이 나는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투사되는 젊은 시절의 나 자신을 질투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투박한 슈퍼싱글 사이즈 침대에 기대어 누운 채, 창밖 가로등을 통과한 빗줄기가 맞은편 벽에서 일렁이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던 밤이 떠올랐다. 빗줄기 위에 얼비치는 그림자는 우리가 원형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실제의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보였고 나는 그 불일치의 너울거림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녀와 헤어진 뒤로 다시는 소유해보지 못한 차고 부드럽던 밤…… 고양이를 키우자고 합의한 뒤 이름까지 지어놓았지만—끝내 존재하지 못한 그 고양이는 체코 출신의 시인 이름을 가질 뻔했다—내게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져 무산된 날에는 맥주를 들이켜며 거리를 걸었고 걷는 내내 바보스러울 정도로 과장되게 한탄했다. 그러다 문득 눈이 마주치면 아무 맥락 없이 입을 맞추기도 했는데, 우리의 그런 행동은 그 거리에서 모두 허용됐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젊었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에 이케아를 찾아오는 습관이 생긴 지는 두달이 되어갔다.

내가 사는 도시의 시립미술관 학예사에게 겨울 개인전시를 통해 공개할 신작의 제목—‘저녁의 이케아를 혼자 배회하는 중년의 남자’라는 제목이었다—을 호기롭게 말해두었으니 지난 두달은 구상의 시간이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신작이 구상 단계에서 좀처럼 진전되지 않고 있다는 것, 최악의 경우 작품을 내놓지 못해 이미 홍보를 시작한 미술관에 피해를 줄 수 있으며 나 역시 나쁜 평판에 갇힐지 모른다는 것, 그런 가능성을 학예사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전시까지는 석달도 남지 않았으니 파주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작품 제작에만 몰두해야 맞지만, 나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오늘처럼 작업실이 아닌 이케아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푸드코트에 들러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어두워질 때까지 침실과 거실, 서재와 작업실, 욕실과 드레스룸, 아이들 방으로 나뉜 쇼룸들 사이를 오가다 귀가하는 식이었다. 작품을 구체화하기 위해 일종의 모임에 참여하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멤버가 단 한 사람, 바로 나 하나뿐인 이 모임은 당분간 중단되거나 해체되지 않고 유지될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내 결정이었다.

 

*

 

두달 전, 나는 이곳에서 자영을 보았으니까.

아니, 이케아 앞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그녀를 보았다고 표현해야 맞는 표현이리라. 십팔년 만이었다. 한 시절 서로에게 가장 스스럼없었고 서로를 가장 필요로 했지만 십팔년 동안 우리는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오년여 전 정착한 경기도의 신도시에는 극장과 팝업스토어, 소규모 갤러리까지 겸비한 쇼핑몰이 있었고 아내와 나는 가끔 그 쇼핑몰에서 주말을 보내곤 했다. 다양한 종류의 리미티드 커피원두로 드립커피를 제조하는 커피숍이 쇼핑몰 안에 오픈한 날, 나는 부러 그곳을 찾아가 커피숍 주인이 추천한 드립커피 한잔을 마셨다. 커피숍은 쇼핑몰의 5층에 자리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창밖으로 이케아의 옥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연청색이었고 넓게 퍼진 구름은 허공의 유빙처럼 보였다. 나는 한동안 미동 없이 그 간판을 건너다보았다. 조립의 방식으로 설치 작업을 해온 나 같은 사람이 한 도시 안에 있는 이케아에 무려 오년 동안이나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것이 문득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바로 그 조립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작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조립에 몰두하고 싶지는 않았고 매뉴얼에 따라야 하는 가구 조립은 생각만으로도 지루했다. 더욱이 아내는 생활과 무관한 소품, 가령 우아한 곡선의 화병이나 독특한 무늬의 카펫 같은 것으로 집 안을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다국적 기업이 생산하는 조립가구의 내구성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쇼핑몰에서 나와 이케아로 발걸음을 돌린 건 그저 이케아의 푸드코트에서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쇼핑몰의 식당들이라면 이미 한번씩은 다 가보아서 그 표준적인 맛에는 흥미조차 생기지 않았다. 대학에서 미술평론 과목을 가르치는 아내가 신입생들과의 면담이 잡혀 있다며 먼저 저녁을 먹으라고 문자를 보내온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 푸드코트에서 스웨디시 미트볼과 연어샐러드로 끼니를 해결한 뒤에도 나는 이케아에 남았고 쇼룸이 모여 있는 구간을 둘러보게 됐다.

그날, 나는 계획했던 것보다 더 오래 쇼룸에 머물렀다. 가혹한 경쟁이나 연이은 불운으로부터 거주자를 완벽하게 보호해줄 것 같은 아늑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지만 아무도 살지 않으며 살아서도 안 되는 쇼룸의 고유한 이율배반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서재 쇼룸에서였던가. 장엄해 보이기까지 한 커다란 원목 책상에 앉아 있는 동안 그곳 어딘가를 배회하는 한 사람이 머릿속에서 조립됐다가 분해되기를 반복했는데, 나는 그런 과정이 대개 작품으로 이어진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뜻밖에 찾아온 신작의 이미지로 머릿속은 분주해졌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같은 자리를 빙빙 돌다가 어느 순간 장식장 유리에 비친 남자를 보게 됐다. 다른 때보다 유독 낯설어 보이던 나이 든 내 얼굴을…… 내 뒤편에서 쇼핑카트를 끌고 가는 가족 단위의 손님과 연인들도 장식장 유리에 얼비쳤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이곳에서 겉도는 존재란 걸 깨달았다. 동행 없이, 쇼핑할 목적도 지니지 않은 채 평일 저녁에 서재 쇼룸 한가운데 서 있는 사십대 후반의 남자는 이케아의 보편적인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새 작품의 주인공은 그때 확정됐다.

그녀가 떠올랐다, 새 작품이 구상 단계에 들어가면 늘 그랬듯이.

그녀는 말한 적이 있었다. 인간은 죽음으로 향해가는 정교한 기계장치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고, 글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고도, 바로 내가 완성한 작품으로…… 내 자취집이던 구축 빌라 공동출입문 앞에 의자를 갖다놓고는 오가는 사람들을 의미없이 건너다보던 노파를 지나쳐갈 때였다. 그 노파는 혼자 사는 듯했고 빌라에 사는 젊은 사람들, 특히 자영을 눈여겨보곤 했다. 노파에게는 그녀가 나비 같은지, 그녀의 동선을 따라가는 노파의 눈동자는 꿈길을 헤매듯 아득하고 몽롱해 보일 때가 많았다. 어쩌면 그녀에게서 빚어지는 생기 넘치는 과거의 자신이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나비처럼 기억되어서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곧 노파에게서 멀어졌고 집 근처 마트에서 수박을 샀다. 여름 수박을 먹기로 한 저녁이었으니까. 수박을 먹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마음속에선 그녀의 말이 부표처럼 계속해서 떠다니고 있었다.

나무와 금속, 플라스틱 조각, 삼으로 만든 밧줄, 아크릴판과 알전구 같은 재료를 톱니처럼 움직이도록 조립하여 작품을 제작한 건 그날로부터 한 계절 정도가 지난 후였다. ‘빈집에 혼자 남았던 어린 시절을 조립하는 젊은 예술가’라는 제목으로 완성된 그 작품은 그해 겨울 단체전시에서 처음 공개됐고 내가 단 한번도 기대한 적 없는 호평을 받았다. 미술잡지에 작품에 대한 비평이 실렸고—독특한 재료로 구체적인 한 사람을 구현하며 그의 쓸쓸한 일상까지 환기시킨다,라고 쓰여 있었다—처음으로 개인전시에도 초대되었다. 놀랍게도 시립미술관이었다. 그 개인전시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나는 계속해서 작품을 제작했고 완성된 작품은 곧바로 전시로 이어졌다. 아침마다 수족관의 금붕어와 이야기하는 사무직 신입사원, 새벽 도로를 청소하는 난청의 환경미화원, 밤의 롯데리아에서 신문을 읽는 독신 남자, 그런 제목을 달고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 작품들…… 그녀와 헤어진 건 설치미술가로서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걸 그렇듯 온몸으로 느끼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녀가 내 작품을 찾아보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나는 수없이 찾아봤다. 특정 시기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봤고 블로그도 자주 들여다봤다. 그녀가 나를 만나기 이전부터 운영하던 그 블로그는 예고 없이 비공개로 전환될 때도 있었지만 대개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 상태를 유지했다. 블로그에는 책이나 영화, 전시와 관련된 내용이 많았지만 가끔은 개인적인 근황을 담은 글을 업로드할 때도 있어서—그런 글은 주로 새벽에 올라왔는데 하루나 이틀 뒤면 지워져 있었다—그녀가 나와 헤어지고 일년 후에 결혼을 했고 결혼생활 이년 만에 이혼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임신이나 육아에 대한 글은 없었으니 아이 없이 이혼했을 거라고 추측해보긴 했지만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녀가 소설을 쓰지 않는 시간에 무슨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지도 블로그로는 알 수 없었다. 사서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또 어느 때는 수목진료전문가라는 생소한 이름의 직업을 갖기 위해 평생교육원이며 사이버대학에 다니는 일상을 공개한 적은 있지만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그 직업을 갖게 되었다는 글은 보지 못했다. 그 대신 지역의 도서관이나 지인이 운영하는 북까페에서 소설 창작 수업을 하는 일상은 가끔씩 업로드됐다.

그녀의 첫 소설집—내가 아는 한 마지막 책이기도 했다—이 독립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는 소식도 나는 블로그에서 접했다. 그녀가 이혼하고 삼년 정도가 지난 뒤였으니 등단 후 십여년 만이었다.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그녀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소설집이 인터넷서점에는 등록되지 않아 작업을 쉬는 날이면 시내로 나가 대형서점들에 들르곤 했지만 그 책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인터넷에서 경기도 북부의 작은 서점이 만든 그 책의 홍보 웹페이지를 발견한 날, 나는 한시간 반 동안 지하철을 타고 서점을 찾아갔다. 서점에는 그녀의 소설집이 세권 있었다. 전부 구매해 그중 한권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완독한 뒤 그대로 두고 내렸고, 지하철역 근처 버스정류장 벤치와 길가에 설치된 현금인출기 옆에도 한권씩 두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소설을 좋아했지만 소유하고 싶지는 않았다. 블로그로 그녀의 삶을 엿보던 시절도 사실 오래전에 끝났다. 마흔다섯번째 생일을 자축하는 글을 마지막으로 그 블로그는 삭제된 페이지가 되었으니까. 미술대학 후배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이후부터는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는 습관 역시 내 일상에서 사라져갔다.

그날 이케아를 떠돌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 대기는 이미 묽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이케아에 오는 손님 대부분이 크고 무거운 짐을 싣기 위해 승용차를 이용해서인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나는 건너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그녀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봤다. 십팔년 동안 타인으로 살아왔는데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나조차 놀라웠다. 가슴속에서 가상의 밧줄 같은 것이 툭, 끊어지는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갔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멈춰 선다 한들 내가 과연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횡단보도를 다 건넌 뒤에야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신호등의 파란색 등이 제로를 향해 카운트다운에 돌입했지만 그녀는 횡단보도 중간쯤에서 느린 보폭으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인도에 다다르기 전에 결국 신호등 색이 바뀌었고, 바로 그때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가 들리더니 새된 고성이 허공을 갈랐다. 야, 씨발년아,라고 누군가, 아마도 클랙슨을 누른 운전자가 그녀에게 소리를 내지른 것이었다. 젊은 남자의 모욕적인 고성에 그제야 그녀는 잰걸음을 디뎠고 인도에 도착한 뒤에는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욕설이 질량과 부피가 있는 한덩어리의 실체로 자신의 머리를 세게 치고 갔다는 듯이.

그녀가 아닐 수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날은 이미 어둑했고 횡단보도의 그 여자는 내 쪽을 보지 않은 채 걷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자영의 얼굴은 소설집 앞표지의 사진이었는데 그마저 십여년 전이었고, 돌이켜보면 나는 오십대에 접어든 그녀를 상상해보려는 시도조차 한 적이 없었다. 더욱이 그 여자는 내가 기억하는 자영보다 체중이 더 나가는 듯했고 옷이나 신발은 자영의 취향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하지만 그 얼굴과 눈빛에 남은 그 시절의 그녀를 끝까지 모른다 할 수 없었다.

집 현관에 들어서자, 모르는 사람에게 욕설을 듣고는 움찔했던 그녀의 모습이 거실의 모든 벽에 영사되는 듯했다. 오래전 우리가 침대에 누운 채 건너다본 일렁이던 빗줄기처럼…… 나는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내는 아직 귀가하지 않아서 나는 좀더 그렇게 있어도 될 듯했다. 평일 저녁에 혼자 이케아로 향한다는 건 그녀가 재혼하지 않았고 여전히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있으며,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뚜렷한 직업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암시하는 것일까. 그녀야말로 이케아의 풍경에서 겉도는 존재이고, 그녀도 그것을 알기에 사람이 붐비지 않는 시간을 택해 이케아를 방문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 끝에서 문득 나는 깨달았다. 내 안에 움튼, 그녀를 형편없이 외롭고 가진 것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싶은 교만을…… 침을 뱉고 싶었다. 신발장 위 거울에 비치는 나 자신에게. 그 와중에도 센서등은 끊임없이 꺼졌다가 켜졌고, 다시 꺼졌다. 빛과 어둠이 정직한 간격을 두고 번갈아 방문하는 환승역 같은 현관에 서서 나는 조금 울었다.

이케아 앞 횡단보도에서 그녀와 마주쳤다는 것이 다시 만날 확률을 담보하는 건 아닐 터였다.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하는 이유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랬듯 그녀가 한눈에 나를 알아본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짧은 인사조차 건넬 수 없으리란 건 분명했고, 사실 내게는 그럴 자격도 없었다. 나는 그저 이케아에서만큼은 그녀를 생각하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 그녀에게서 확장되는 감각을 느끼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애틋함과 죄책감 같은 감각을, 혹은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지평선 끝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내 운명에 대한 쓸쓸한 감각을……

 

*

 

주방 쇼룸으로 들어서자 사인용 식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식탁 위로는 새장이 연상되는 모양의 조명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은 식탁의 상판으로 그대로 스며들었다. 빛이 고인 식탁 뒤편으로는 은색의 레인지후드와 테두리가 나무로 처리된 싱크대가 보였고 국자와 주방 칼, 양념통, 각종 식기 들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다. 저런 식탁에 앉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차려진 음식을 나눠 먹는 하루하루는 회한이나 고통의 반추 없이 매끄럽게 과거로 밀려들어갈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그녀가 방문했던 여동생의 신혼집 식탁도 그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녀의 여동생은 대학 졸업 후 공기업에서 일하다가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남편을 만났다고 했다. 그녀는 동생과 그리 친밀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똑똑하고 야무지던 동생이 그런 방식으로 결혼 상대를 선택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녀에게는 제부가 되는 남자—당시의 내게 그는 완전한 타인으로 여겨졌다—에 대해서라면 그녀 입장에선 야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주식을 사고팔면서 돈 많은 사람들의 자산을 불려주는 그의 일을 얕잡아봤고 인정 없어 보이는 인상이라든지 지루한 말투에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동생 부부에 대해 그녀가 그런 식의 평가를 할 때면 그녀의 말투에서 묘한 우월감이 배어난다고 나는 느꼈다. 혹평이 무서워 소설을 발표하지는 못해도 자신의 소설과 소설을 쓰는 삶을 높은 가치에 두었던 그녀의 고유한 위엄, 그것은 유리처럼 반짝였고 동시에 유리만큼 연약했다.

여동생의 신혼집을 처음으로 방문하고 온 그날, 그녀는 평소보다 거칠게 내 품에 파고들었다. 나보다 다섯살 플러스된 삶에 내던져진 그녀에게 가진 것 없고 미래는 불투명한 설치미술가는 불안을 증폭하게 하는 연인일 뿐이라는 생각에 잠긴 건, 사랑을 나눈 뒤 먼저 잠든 그녀의 등을 바라볼 때였다.

보지는 못했지만 보이는 듯했다. 맑은 국과 윤기 나는 밑반찬, 고기나 생선으로 요리한 음식이 고급스러운 식기에 담겨 차려진 식탁에서 그녀가 어떤 얼굴로 앉아 있었을지…… 여동생과 여동생의 남편이 그녀를 곁에 두고 나눈 대화라면 뻔했다. 주식과 부동산, 그들 각자가 소유한 차량의 교체 시기, 미래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에게 합당한 교육 방식, 그 정도이지 않았을까. 그녀가 소설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한 죽음과 영원, 죄의식과 속죄, 고통과 구원 같은 주제는 그들이 사는 세계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아니 추방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녀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대화가 중단되면 그들은 그녀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을 것이고 비혼주의자가 아닌 이상 소개를 받아보라고 제안하기도 했으리라. 작가라고 치켜세우다가도 요즘 시대에도 소설을 읽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며 그녀의 작업에 아무 관심이 없고 앞으로도 관심을 갖지 않으리라는 것을 은근슬쩍 드러내기도 하면서. 그런 말이 그녀에게는 무심한 폭력이 된다는 걸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그녀는 그 식탁에 앉아 있는 내내 고요히 경멸하지 않았을까. 그런 취급에 열등감을 느끼는 바로 그녀 자신에게. 내 상상과 짐작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는지, 지나온 길과 가려 하는 길을 계속해서 비교하게 하고 선택을 요구하는 자신의 나이가 버겁다고, 그날로부터 두 계절 뒤, 우리가 만난 시점으로부터는 삼년여가 흐른 날, 그녀는 내게 고백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사랑의 처소이자 남루한 둥지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침대 아래엔 그녀의 짐가방이 놓여 있었다. 떠나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일깨우듯 그녀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멈추는 순간까지 내가 있는 곳보다 오년 앞선 시간을 가리키게 될 손목시계였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짐가방을 들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적어도 누군가 먼저 연락을 하여 만남을 기획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나처럼 그것을 안다는 것도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자명한 이별이었다.

주방 쇼룸에는 오래 앉아 있지 못했다. 침실 쇼룸에서 마주쳤던 젊은 커플이 다가오는 게 보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내 인상이 각인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그곳에서 나왔고 입구이자 출구가 기차 칸처럼 연결된 또다른 쇼룸으로 이동했다. 내가 도착한 곳은 거실 쇼룸이었다.

점잖아 보이는 노부부가 내가 있는 거실 쇼룸으로 들어온 건 학교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 귀가하는 중이니 저녁을 같이 먹자는 아내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알겠다고 짧게 답장을 보낸 뒤 다시 노부부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들은 거실 소품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무겁지 않은 말투로 연명치료 거부라든지 스위스로의 여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새 가구나 소품처럼 선택 가능한 대상인 듯했다. 투병의 고통으로부터 한발 비껴선 사람들, 그런 고통을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진짜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자유로운 사람들, 그러니까 죽음으로 향해가는 인간의 운명을 매순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확률게임의 승자들……

그들은 곧 거실 쇼룸을 나섰고, 나는 초록색 카펫 위 연한 잿빛 소파에 앉았다. 모르는 노부부에게 순간적으로 왜 화가 났는지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며……

어머니에 관한 한, 자영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 그 수상한 외출이 있고 바로 이듬해 겨울부터, 어머니의 투병은 시작됐고 십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까스로, 그야말로 가까스로 죽음을 맞게 됐다. 투병기간 동안 어머니는 일종의 식물인간 상태였으므로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내려오지 못했다. 욕창을 막기 위해 두시간에 한번씩 방문요양사나 아버지가 자세를 바꿔주어야 했고 하루에도 몇번씩 아주 시끄러운 기계로 목 안의 침과 가래를 뽑아내기도 했다. 기계는 치아에 부딪혀가며 어머니의 목 안까지 들어갔기 때문에 어머니는 앞니를 포함한 대부분의 치아를 상실했는데, 텅 비어버린 그 까만 입안을 마주보는 건 서글프게 무서웠다. 나비의 환영조차 잠시 쉬어갈 수 없을 것 같은 초점 없는 눈동자를 내려다볼 때보다 훨씬 더.

어머니가 이미 몇해 전부터 병의 전조를 감지했고 혼자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기도 했다는 건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된 뒤에야 알게 됐다. 머릿속 혈관이 뚜렷한 원인 없이 안쪽에서부터 두터워지다가 결국 막히게 되는 병으로, 발병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서른살 무렵이 가장 많다고 나는 들었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화를 낸 날이 떠올랐다. 식당에서 저녁식사 메뉴를 고르던 중에 그녀는 돌연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 어머니의 밀애 대상을 또다시 추측하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고백한 일화였고 우리에게 그 이야기는 금기가 아니었는데, 심지어 꾸준히 회자되어왔음에도 그날은 내 어머니가 한순간 흥밋거리가 된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벌거숭이가 된 것 같았으니까. 아니, 내가 벌거숭이란 걸 인지하고 말았으니까.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날 안다고 장담하지 말라고—아마 그외에도 훨씬 더 공격적인 말을 많이 쏟아냈을 텐데 기억나는 건 없었다—언성을 높이자 그녀는 한순간 표정이 지워진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고 그대로 식당을 나갔다. 그날 그녀는 내 자취집으로 오지 않았다. 그 밤, 나는 이미 우리의 끝을 예감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내 첫 개인전시가 무사히 마무리되었던 때부터……

 

*

 

화장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세면대 거울 앞에 서서 손을 씻고 고개를 들자 너무도 환한 형광등 때문인지 이마와 입가, 그리고 눈 주변의 주름과 반백의 머리칼이 선명하게 보였다. 살아오면서, 지금까지도, 나는 저 얼굴에 익숙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듯하다.

이별은 내가 말했다. 그녀가 아니라 내가 헤어지고 싶다고 먼저 밝힌 것이다. 그녀는 이유를 물었지만 나는 해줄 말이 없었다. 내게는 이별이 필요하다고, 이별한 사람의 불행이라는 특권이 내 작품을 더 빛나게 해줄 테니까, 그런 말은, 그따위 말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 스물아홉살의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예의는 고작 그런 것이었다. 그 또한 이유가 아닐 수도 있었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의 뒤편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자영에게 밝힌 적이 있던가.

어머니가 한창 짧은 외출을 하던 그때, 조립장난감을 만지작거리다가 내팽개치고는 현관문을 나서는 어머니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는 걸…… 아니, 나는 그 일화 역시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혼자 현관문을 열고 나가 큰길가의 커피숍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목격한 그날은 오직 나만이 독차지한 기억이었다.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어머니의 투병이나 죽음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어머니가 아플 때 진행된 아버지와 방문요양사이던 새어머니의 애정에 호기심을 보이던 아내에게는 어머니 이야기를 함구하기로 나는 이미 오래전에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날, 길 건너 가로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나는 어머니를 데리러 올 미지의 남자를 확인하려 했지만 어머니는 하염없이 커피잔만 들여다봤고 아주 가끔씩만 고개를 들어 커피숍 창밖의 나무를 건너다볼 뿐이었다. 어머니가 커피숍 의자에서 일어나는 걸 본 순간 나는 재빨리 집으로 돌아갔고, 잠시 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피숍에서 나온 어머니는 다른 곳을 들르지 않고 그대로 귀가한 것이었다. 비슷한 날은 또 있었다. 두번째 추적의 날에는 지하철역 승강장 벤치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아주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품에 안고 있었다. 집에서 갖고 나간 가방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역 안의 사물함에 그 가방을 보관해두었으리란 건 좀더 나이를 먹은 뒤에야 짐작하게 됐다. 나는 맞은편 승강장에서 어머니를 지켜봤다. 지하철은 오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승강장 안으로 들어왔고 지하철이 떠난 자리에는 어김없이 같은 의자에 앉아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나는 가로수의 나무껍질을 계속 손으로 쓸었다. 나무껍질 어딘가에 나를 상하게 할 수 있는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게 있기를 바랐는데, 그 바람은 훗날 내가 편집한 기억일 터였다. 기억은 모조품일 뿐이라고, 자영도 소설에 쓰지 않았던가.

어머니의 뒤를 쫓던 시도는 어머니의 외출이 중단되면서 싱겁게도 함께 막을 내렸다. 어머니는 예전처럼 청소기를 밀고 다니며 나와 아버지에게 발을 좀 들라고 잔소리를 했고 다 끓은 찌개를 국자에 담아 맛을 봐달라고 내게 부탁을 해왔다. 식당에서 내 숟가락 위에 고기를 얹어주고는 하염없이 나를 건너다보던 날도 있었다. 불과 일년 뒤부터 어머니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아버지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그때 이미 여러 병원에서 확진 결과를 받았다는 것조차 우리는 몰랐다.

이케아에서 나와 횡단보도 앞으로 걸어가자 여름의 끝을 알리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침 횡단보도의 신호등 색이 바뀌었고 나는 건너편을 유심히 살피며 발을 내딛었다. 지금쯤 아내는 집에 도착해 있을 테니, 횡단보도를 다 건너면 걸음을 서둘러야 할 터였다. 알면서도, 횡단보도 중간에서 나는 돌연 멈춰 섰다. 발아래 떨어져 있는 어떤 곤충의 껍데기가 눈에 들어와서였다.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웠다. 날개를 펴기 위해 버리고 간 어떤 생명체의 껍데기, 한때는 우주의 숨결로 세포가 자라났던 곳,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과거의 시간이자 세계에서 떨어져나간 조각……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악몽을 꾸었다든지 혼자 아픈 날처럼 그 소리는 시간의 터널을 지나 현재로 건너온 것이다. 소화하고 배설하는 몸뚱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허무감이 밑도 끝도 없이 가슴을 베고 지나가는 날에, 세상 사람들이 내 실패를 기다리고 있다는 절망적인 확신이 삶을 지배하는 날에, 혹은 어머니의 병이 내게도 유전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은 날에도 그러했듯이.

클랙슨 소리가 쾅, 쾅, 울리는 가상의 소리를 밀어내며 도로를 채워갔다.

껍데기이자 조각을 손안에 느슨히 쥔 채, 나는 뛰기 시작했다. 그 조각을 어디에 두어야 이 밤이 완전하게 조립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 소설에 묘사된 설치미술 작품은 양정욱의 작품에서 영향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