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변화하는 중국 어떻게 볼 것인가
변지원 卞志源
한국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저서로 『두 개의 혀』 『만다린, 어디서 왔는가』, 공저서로 『텔레비전이 시작한다』 『인간과 언어』 『중국언어산책』『중국인문기행』, 역서로 『언어로 본 중국사회』 등이 있음.
이욱연 李旭淵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 저서로 『계몽과 실존의 변주: 루쉰 소설 세계의 재해석』 『홀로 중국을 걷다』 『시대를 견디는 힘, 루쉰 인문학』, 역서로 『아Q정전』 『루쉰 독본』 등이 있음.
차태근 車泰根
인하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저서로 『제국주의 담론과 동아시아 근대성』, 공저서로 『근대 동아시아 평화사상』, 역서로 『세계질서와 문명등급』 『충돌하는 제국』, 공역서로 『근대중국사상의 흥기 2』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 등이 있음.
최필수 崔弼洙
세종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공저서로 『트럼프 2.0시대 동아시아와 한반도』 『중국식 현대화와 시진핑 리더십』 『역세계화 vs. 다른 세계화』 『중국 토지공급체계의 변화와 개혁과제』 『중국 도시화의 시장 창출 효과와 리스크 분석』 등이 있음.
이욱연(사회) 안녕하세요, 『창작과비평』 가을호 대화에 자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이욱연입니다. 인류가 큰 전환기에 놓여 있음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금융계에서 예기치 못한 이변을 ‘블랙 스완’(black swan)이라고 한다는데, 오늘날 우리는 블랙 스완의 출현이 ‘뉴노멀’이 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미중대립이라는 세계질서도 포함됩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세계질서 변화의 한 축으로 부상한 중국에 대해 중국연구의 각 전문분야에 계신 세분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한국의 시각에서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지, 중국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핵심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논하게 되겠습니다.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변지원 저는 한국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에 있는 변지원입니다. 언어 속의 사회적 계층이나 아이덴티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다문화나 언어접촉 관련 문제도 함께 연구하고 있습니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늘 변화하고 있었던 중국이지만, 오늘 선생님들과 다른 각도에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됩니다.
차태근 인하대 중국학과에서 중국 근현대사상을 연구하는 차태근입니다. 최근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세계질서가 재편될 당시에 중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떻게 인민들의 지지를 받아 사회주의 질서로 전환할 수 있었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글로벌 시각을 놓치면 중국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제적인 맥락에서 중국현대사와 사상의 전개과정을 보고자 합니다.
최필수 저는 세종대에서 중국경제를 가르치는 최필수입니다. 중국의 거시경제 흐름과 개혁과제, 사회구조와 얽힌 경제주체들의 역할과 관계를 연구하고 있고요. 미시적으로는 중국의 개혁과제 중 하나인 부동산세 도입시기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바 있습니다. 한중 경제관계에 대해서도 계속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욱연 사회를 맡은 저는 루쉰(魯迅)을 전공한 중국 현대문학 연구자이고, 최근에는 중국의 문학과 문화 등을 통해서 오늘날 중국인들의 문화적 흐름과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현실에 동시에 개입하면서 어떻게 한국에서 비판적 중국연구를 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혐중현상,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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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이욱연 우리 사회의 어두운 현안 중 하나가 지난겨울 탄핵국면부터 쟁점으로 부상한 중국혐오 문제입니다. 이를 ‘혐중’으로 규정하는 게 맞을지 아니면 중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라고 볼지는 생각해볼 거리인데, 이번 대화에서는 맥락에 따라 두 단어를 오가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1992년 한중수교를 맺은 직후에는 전반적으로 중국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추세였지만, 부정적 인식도 이슈에 따라 높아지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2000년대 고구려사 역사파동 때도 그랬고, 코로나19 팬데믹에서도 혐중정서가 상당히 높았죠. 그러다가 작년 12월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고 탄핵국면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혐중이 전개되며 정치적 이슈로도 부각되었습니다. 한국사회 내부의 문제에서 촉발해 정치적 이슈가 된 점이 중요해 보입니다. 최근의 혐중현상이 과거와 다른 점과 그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차태근 근래 한국 내에 일부 혐중정서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다수의 비판적 시각과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한국인들 상당수가 중국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이는데,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 부정적 인식이 지금까지 단절 없이 이어지는 것 같아요. 최근 여론조사에서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100점 만점에 29점 정도입니다(「한반도 주변 5개국 호감도: 2025년 7월」, 한국리서치 2025.7.16). 일본이 43점, 미국이 52점 정도인 데 비해 매우 낮죠. 중국보다 낮은 국가는 북한과 러시아 정도입니다. 그런데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사실 글로벌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대중(對中)인식을 얘기할 때도 국제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데 유럽과 동아시아, 북미 지역 대부분이 중국에 대해 부정적이고, 그것을 모두 혐중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단,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윤석열 계엄사태 이후 극우에서 내건 구호들은 미국 내의 반중운동이나 혐중정서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점입니다. 담론이 만들어지고 전파되고 작동되는 시스템에 있어 한국 내 일부 혐중과 미국 극우 사이에 긴밀한 연결관계가 있다고 보입니다.
변지원
변지원 프랑스의 경우, 혐중의 양상은 시기적으로 상당히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0년대 제가 프랑스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당시에도 종종 중국사람으로 오인받아 인종차별을 겪었습니다. 2015년 빠리의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테러사건에서 드러났듯 유럽 내 무슬림 이민자 문제는 전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그런데 이보다 앞선 2010년대 초반 벨빌(Belleville)에서의 중국계 이민자에 대한 공격도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무슬림계가 중국계 이민자들을 공격했을 거라고 의심되었지만, 우익 쪽에서 이민자 간 거주지 갈등을 이용했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한국은 중국과의 수교가 늦었기 때문에 오히려 비교적 최근에 혐중·반중 문제에 직면한 것일 텐데요. 다만 이때도 우리 정서는 혐중·반중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어디로 갈지 모른다’고 해야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리서치의 ‘2025 대중인식조사’를 보면 중국이 적이라고 답한 비율이 29퍼센트, 친구라고 답한 비율이 8퍼센트인데, 더 주목할 부분은 ‘친구도 적도 아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63퍼센트라는 점이에요(「중국 이미지와 한중 역량 비교」, 한국리서치 2025.2.19). 혐중이라고 일반화하기에는 이르다고 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 중국에 대한 인식과 대응을 점검하는 게 중요합니다. 미중관계가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변수인데, 미국과 중국을 양 끝에 두고 있는 한국이 지렛대의 받침점을 아주 미세하게만 움직여도 균형관계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곧 미국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와 무관하지 않아요. 한국이 미중관계의 무게중심을 표시하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최필수
최필수 1990년대부터 부각된 일본의 혐한이나 지금 한국의 혐중, 서방의 이민자 혐오가 모두 같은 맥락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동등해지려고 하는 순간 나타나는 일종의 퇴행적 반응이죠.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해온 중국의 존재감이 커지자 큰 불안을 느끼게 된 거예요. 그런데 지난 5월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5퍼센트가 ‘미중 균형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답했어요(「차기 정부 ‘미중 균형 외교’ 추구해야 65%… ‘미국 우선’은 23%」, 한국일보 2025.5.23). 호감도는 중국보다 미국이 훨씬 높지만, 외교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우리 국민들도 다 답을 알고 있는 거죠. 사회에 불만을 가져온 일부 세력의 퇴행적 반응은 혐오라 부를 만하지만, 현상만 보고 과하게 실체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들어진 혐오, 정치적 영향력을 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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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말씀처럼 혐중이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오히려 고정적인 실체가 될 거라고 우려하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아도르노(T. W. Adorno)는 사회에 내포된 불안이 혐오로 이어지면서 유대인 학살이 발생했다고 설명했죠. 사회적 불안, 특히 오늘날 청년세대가 겪는 출구 없는 현실 속에서의 불안감이 혐오로 투사되고 손쉬운 대상으로 중국이 택해진 면도 있어 보입니다. 그것이 애국주의로 활용되는 측면도 있고요. 글로벌 차원도 언급해주셨는데, 전세계 20~40개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세계 인식 조사’에서도 중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해마다 매우 높고 광범위합니다. 다만 서구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인권이나 소수민족 문제를 강하게 부각하는데 한국의 혐중현상은 그것과 좀 다른 것 같아요. 물론 우리 인식의 배경에도 천안문사태, 홍콩시위, 대만문제 등 민주주의나 인권 이슈가 놓여 있지만, 우리만의 맥락도 있습니다. 문화갈등도 그렇고, 미중대립의 격화 속에서 한국은 결국 미국 편에 서야 한다는 인식,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인이 지닌 특유의 중국 비하의식, 중국의 빠른 성장에 따른 위기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죠.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 비판적인 정서는 꾸준히 수면 아래 흐르고 있었는데, 이번 탄핵국면에서는 혐중정서가 정치세력과 결탁해 공적인 영역까지 올라와버렸어요. 이전과 다른 양상이고 경계해야 할 지점인데, 혐중이 글로벌 현상이라는 시각과 한국 고유 현상이라고 보는 시각을 같이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차태근
차태근 혐오세력과 정치세력의 결합도 사실은 글로벌한 현상입니다. 최근 세계 공통의 문제가 포퓰리즘의 대두 등 민주주의 위기인데, 민주주의 사회의 건전성을 유지하던 질서와 규제가 부정되고,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표출되면서 그것이 정치권으로 흡수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부정적 중국인식은 정치적 변화를 포함해 다양한 계기들이 결합돼 있고 매우 복합적인 문제여서 한가지 원인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세대별로도 차이를 보이는데, 50대는 중국의 권위주의체제나 민족주의를 우리의 민주주의, 공공성과 대비해서 인식하는 데 비해 20~30대는 개인의 자유에 초점을 두고 중국을 바라봅니다. 권위주의 정부라 해도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면 용납할 수 있지만 중국은 정부가 권력을 독점하고 개인을 억압하며 불공정하기 때문에 나쁘다고 인식하는 거죠. 동시에 중국에 위협감을 느끼는 것은 세대와 상관없이 공통된 현상입니다. 이는 한국이기 때문에 더 크게 다가오는 위기의식으로 보여요. 한국은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현재도 다른 국가들보다 중국에게서 받는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영향이 훨씬 크니까요.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가 느끼는 위협이라는 게 당장의 군사적 공격이나 경제적 제재와 같이 명확한 게 아니라 모호한 것이기도 합니다. 가령 여론조사를 보면 한국의 30대 이상은 아직도 중국의 국제적 경쟁력이 한국보다 앞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중국 이미지와 한중 역량 비교」). 그동안 가져온 우월감을 포기하기 어려운 거죠. 결국 거대한 위협 같으면서도 실체가 모호한 데서 오는 막연한 불안심리, 내려놓기 어려운 우월감 등이 맞물리면서 중국에 대한 일부 부정적 위협감과 공포감이 출현하는 겁니다. 이런 위협에 대한 공포나 중국 정치체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한국 내 혐중이 기생하고 확산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고요.
변지원 방금 말씀하신 공포감은 (위협의 실체는 모호하다 해도) 중국의 기술력과 위상에 대해 어느정도 인식한 뒤에 드는 감정이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한 두려움 같습니다. 중국이 싫고 위기의식을 느끼지만 적어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라면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닌 거죠. 그보다 중국에 대해 일단 부인하면서 이해할 의지도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입니다. 얼마 전 한국에 체류 중인 중국인 기자가 자신이 경험한 한국에 대한 글(탕신 「‘중국혐오’로 재한중국인 여리박빙」, 『한중저널』 2025년 봄호)을 썼는데, 충격적인 혐중현상을 직접 겪어보고 한국 여야 정당정치의 현주소도 경험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한국사람들이 제발 중국에 대한 가짜뉴스에 속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적더라고요. 지금은 무엇보다 정치적 대립이나 뉴미디어에 얹혀서 중국에 대한 선입견이 맹목적으로 확산되는 현상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사IN』 보도에서 혐중의 진원지는 미국일 가능성이 높고 언론매체와 유튜브 채널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확산했음을 지적했는데,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혐중”이라는 거죠(「‘만들어진 혐중’ 그 진원지를 찾아서」, 『시사IN』 2025.3.10). 차태근 선생님이 한국과 미국 극우세력의 결탁을 말씀해주셨는데, 미중관계에서 한국이 지렛대의 중요한 받침점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만큼 이 부분은 앞으로 더 분석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욱연 최필수 변지원 차태근
최필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는 말씀이시죠. 분명히 문제적인데 그들이 완전히 없어지기를 바라기는 어렵고, 그 영향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환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욱연 올해 대선 당시 부정선거 이슈를 제기하며 쓰인 ‘스탑 더 스틸’(Stop the Steal)이라는 구호도 미국에서 수입된 것이죠. 중국공산당이 한국 선거에 개입했다는 억지주장이 펼쳐졌고요. 미국의 군산복합체 및 ‘딥스테이트’(deep state, 그림자 정부·비선 권력)와 한국 극우세력 사이에 일종의 ‘극우연대’가 강고해지고 있는 것 같고, 이것은 글로벌한 현상이기보다는 한미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입니다. 중국 네티즌들은 도리어 ‘중국이 한국 선거에 개입해서 친중국 정부를 탄생시킬 만큼 영향력이 있으면 좋겠네’ 하고 농담을 하더군요. 혐중이 중국 요인과 상관없이 우리 안에서, 우리 사회 내부 문제로 생산·유통되는 점을 깊이있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제는 혐중이 한중관계 연구자나 중국학자만이 감당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시민운동가, 다른 학문 연구자들도 개입해야 하는 혐오 일반의 문제가 되었어요. 말씀처럼 우리의 과제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 혐오의 정서가 공적·정치적 영역으로 올라오지 않도록 차단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경제의 도약, 경쟁만이 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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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위기감이 가장 큰 영역은 역시 경제에 있어 첨단산업 부문이 아닐까 합니다. 2024년 딥시크(DeepSeek)의 충격뿐 아니라 휴머노이드 로봇과 전기차 개발도 중국이 빠르게 앞서가고 있어요. 한국인들의 위기의식 속에는 사회주의국가에서도 저런 혁신이 일어난다니 하는 상투적인 프레임도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최필수 선생님께 여쭤봅니다. 한국과 중국의 격차가 정말 우리가 못 따라갈 만한 수준으로 벌어져 있습니까?
최필수 네. 2024년에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에서 20여년간의 글로벌 과학기술 성과를 살펴 분야별 경쟁력 순위를 발표했는데 중국이 64개 분야 중 57개에서 선두를 차지했습니다. 미국은 나머지 7개에서 선두였죠. 정보통신·소재·인공지능·방위·에너지 등 우리가 중요시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은 압도적입니다. 얼마 전 뉴욕타임즈는 ‘차이나 쇼크 2.0’이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이번 쇼크가 가격 경쟁력 위주였던 차이나 쇼크 1.0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We Warned About the First China Shock. The Next One Will Be Worse,” The New York Times 2025.7.14).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가 알리익스프레스나 테무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초저가 엉터리 제품도 여전히 생산되고 있습니다. 중국 내에서 매우 상반된 두가지 현상이 공존하고 있는 거죠.
사실 중국은 동아시아 발전국가모델의 전형입니다. 오늘날 국가의 범주를 거칠게 분류하자면 복지국가와 발전국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가 국민의 삶의 질이나 행복을 중요시한다면 발전국가는 국가경쟁력이나 GDP 순위 같은 것을 중요시합니다. 전문관료들이 산업정책을 구사하는 것, 저금리·고환율로 제조업에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 대국민 지원금 등은 아끼면서 기업에 보조금을 많이 주는 것 등이 발전국가모델의 특징이죠. 동아시아의 일본·한국·대만은 모두 발전국가모델을 취했고,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은 이런 면에서 한국과 가장 많이 닮은 나라인데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추월해버리니 충격이 더 큰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과 달리 대외의존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의존도에 있어 대미가 더 크냐, 대중이 더 크냐를 떠나서 그냥 대외의존도 자체가 높아요. 너무 많은 수출과 수입을 하면서 살다보니 우리 국민들이 불필요하게 국제적인 경쟁에 많이 노출되어 있고, 경쟁상대인 중국이 성장하는 게 더 큰 충격으로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탈중국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근본적인 답은 탈중국이 아니라 대외의존도의 축소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무도한 압박에도 매우 취약한데, 대외의존도 축소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의미도 됩니다. 한국은 지금 제조업만 봐도 자동차·조선·전자·석유화학·철강 등 빠지는 분야가 없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잘할 필요는 없는 것이거든요. 내수시장의 수요를 늘리고 내수 규모에 맞게 적당하게 살면 되는데 우리는 너무 높은 수준의 삶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 국민들을 계속해서 쥐어짜고 있습니다. 같은 동아시아 발전국가모델인 일본을 보면 우리보다 훨씬 앞서갔지만 우리한테 추격당했고, 지금은 일본·한국·대만이 모두 1인당 국민총소득(GNI) 3만 5천 달러 남짓으로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향후 중국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 정도가 발전국가모델의 한계일 수 있습니다.
이욱연 방금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한국이 중국과 같은 발전국가모델로 갈 경우에 늘 중국과 경쟁하는 데서 오는 위기감과 공포감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새로운 발전모델을 만들거나 한국이 발전모델을 전환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최필수 그런데 다른 모델로의 전환, 이를테면 내수 위주로의 전환은 우리나라 정치구조에서 정말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5년 임기의 정권이 대기업을 지원해 인공지능을 육성하자는 말을 하기는 쉬워도 대외의존도를 줄여야 하니 고통을 감내하자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어떻게든 국가경쟁력을 따라잡자는 잘못된 문제풀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사실 장기적·거시적으로 올바른 답은 인구감소를 받아들이고 발전과 성장이라는 담론 자체를 바꿔나가는 것인데, 이건 당장 실천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과제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국제적인 연대가 필요하기도 하고요.
이욱연 우리 모두가 실감하는 기후위기만 보더라도 이른바 ‘묻지마’ 식의 성장지상주의가 초래한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모든 경제적 성장을 내려놓을 수도 없고, 만약 정말 그럴 수 있다 해도 저소득층의 삶은 더 피폐해질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적당한 성장’론(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을 참조할 만한데 한국의 격과 덩치와 또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는 적당한 성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 아닌가 합니다.
차태근 사실 중국이 체제의 큰 변화 없이 강대국으로 부상한 데 충격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간 중국을 오해해왔다는 점을 방증하기도 합니다. 중국의 잠재력을 너무 무시한 것이죠. 중국은 이미 엄청난 자원과 광대한 소비시장, 뛰어난 인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오랫동안 중앙통치체제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면서 효율적인 행정국가를 경영한 능력이 있고 교육의 잠재력도 컸습니다. 부족한 것은 딱 두가지, 자본과 기술이었어요. 1978년 개혁·개방정책을 펼치며 그 둘을 확보하고 이후 20년 만에 대국으로 부상했죠.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서구에서는 이를 부정했습니다. 서구적인 방식이 아니면 기술혁신도 불가능하고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도 없다는 프레임이 작동했던 것인데, 최근 들어서는 서구에서도 중국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큽니다.
변지원 중국이 곧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줄곧 있어오긴 했습니다. 2017년 미국의 국가안보 전문가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T. Allison)이 저서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 세종서적 2018)에서 ‘투키디데스의 함정’ 개념을 통해 신흥강국 중국과 기존 강대국 미국의 전쟁위험 가능성을 설명했는데, 여기서 2024년이 되면 중국의 경제규모가 미국을 넘어서리라고 전망한 바도 있습니다. 그 무렵 한국에서도 TV 다큐멘터리(KBS 특별기획 「슈퍼차이나」, 2015)까지 나올 만큼 중국굴기를 주목했고요. 물론 당시에 이런 예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한국사회에서 일부였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반신반의했다고 봐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이런 예측이 맞아떨어지고 중국이 실제로 세계경제에서 중요한 축이 된 지금은, 중국을 이해해야 할 사람의 층이 훨씬 확대되었다고 봅니다.
차태근 사회·문화·가치체계 등에 있어 서구의 근대적 규범과는 다른 세계에 대해 서구는 물론 우리도 인식의 맹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체제를 당위적인 규범으로 보면 중국의 성취는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실패할 것이며, 언젠가는 서구식 발전경로를 따르게 되리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죠. 그러나 중국이 정치체제나 통치방식의 큰 변화 없이 G2로 부상하고 계속 성장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인식체계에 충돌이 일어나고, 결국 그처럼 비정상적인 발전궤도와 저급한 방식에 기반한 성취는 인류의 정상적이고 고급한 문명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맹점이 되고 있어요.
최필수 대화를 시작하며 언급하신 블랙 스완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예상 가능하면서도 간과되는 위기를 ‘회색 코뿔소’(gray rhino)라고 하는데, 중국의 성장에 따른 위기감도 회색 코뿔소에 가깝지 않은가 합니다. 다만 알고 있었다고 해도 우리에게 마땅한 대응방법이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는 2023년 윤석열정권 시기에 정부예산 삭감 등으로 다소 떨어진 적은 있지만 대체로 GDP의 5퍼센트 이상이고,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에요. 이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 문제를 고민하고 앞서간 나라가 독일입니다. 우리처럼 제조형 수출 국가로서 중국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했고 중국과 협력하는 방식을 택했어요. 중국이 ‘중국제조 2025’(제조업 육성을 바탕으로 고기술·고부가가치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중국의 10개년 경제계획)를 발표한 게 2015년인데 이미 그 이전부터 메르켈(A. Merkel) 총리 주도로 중국 정부·기업·대학·연구소와 밀접하게 협력해왔습니다. 한국도 우리가 중국보다 앞서는 것이 무엇인지 물을 게 아니라 중국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물었어야 했고, 지금도 그 물음은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과의 공동 연구·개발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경제가 나아갈 수 있는 해법입니다. 독일처럼 우리도 체계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욱연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중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면서 경쟁하되 협력하는 모델이 가능하다는 말씀인데요. 언론을 보면 지금 중국이 앞서가는데 우리는 뭘 하고 있냐, 중국처럼 우리도 더 많은 지원과 투자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나옵니다. 그런데 한국적 정서에서 량 원펑(梁文锋, 딥시크 창업자) 같은 과학기술 인재를 육성하자면서 소수의 천재를 선발해서 제도적·경제적으로 엄청난 특혜를 주는 수월성(秀越性) 교육을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중국과의 단순 비교를 넘어 우리에게 적합한 경제적 경로를 찾는 것이 관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국식’이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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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중국은 서구의 발전경로가 아닌 자기 나름의 발전경로를 가겠다고 선언했고 실제 성취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2012년 시 진핑(習近平) 주석이 취임한 뒤로는 ‘사회주의 현대화’라는 개념도 거의 쓰지 않고 ‘중국식 현대화’라는 개념을 내세우고 있지요. 중국식 현대화는 경제만 아니라 정치와 학술·문화 등 국가정책은 물론이고 대중문화 현상으로까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이 시 진핑 시대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어요.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중국식 현대화’도 핵심 주제어 중 하나입니다. 중국은 왜 ‘중국식’을 내세우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중국이 말하는 중국식 현대화의 길이 서구근대와 다른 대안적인 문명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차태근 중국은 이미 현대적 발전 수준에 와 있는데도 계속해서 ‘현대화’를 이야기합니다. 동시에 정치체제와 사회적 성격을 얘기할 때 언제나 ‘중국식’이라는 표현을 쓰죠. 이것은 중국이 20세기 초부터 가져온 고민 같습니다. 당시 중국은 한국·일본과 마찬가지로 서구에 의해 근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는데, 서구의 모델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정치적 민주화의 문제는 물론이고 교육·언론 등 사회 제반의 여건도 갖춰져 있지 않았죠. 그럼에도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중화민국이라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건설했고, 이건 사실 기적적인 일입니다.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서구 모델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처음부터 ‘중국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식 현대화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측면과 이념적인 측면에서 모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객관적인 측면에서 중국은 산업혁명 이후 장기간에 걸쳐 근대화를 이룬 서구와 달리 반(半)식민지 조건하에서 단기간에 국가 주도의 근대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그런 강박관념이 무리와 비효율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을 거쳐 최근 20~30년 동안 광대한 영토에 무선통신망·도로망·교통망 등 산업화를 위한 기본 인프라를 급속히 구축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광대하고 복잡한 인구구성과 영토를 가진 국가가 대외적인 억압과 전쟁, 장기적인 내전과 혼란을 극복하고 거의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룬 경우가 흔치 않기에 중국이 중국식 현대화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념적 측면에서 보면 중국에게 현대화란 몇가지 근대적 지표를 기준으로 삼기보다 모종의 목표를 향한 발전과정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 목표란 민족 위기극복이라는 구망(求亡)의 차원을 넘어 서구의 초강국을 따라잡고 추월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중국의 근대화론자들은 서구적 근대화의 병폐들을 걷어내면서 더 발전하고 중국에 맞는 근대화 모델을 수립하려 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1920년대부터 반자본주의·반개인주의를 주창했고, 이것이 공산당만 아니라 중국 지식계와 이념계의 주류를 이루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 진핑 정부와 공산당이 써내려가는 서사를 단순히 수사와 선전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지만, 중국식 현대화 개념이 역사적인 경험에 기반해 있으며 일관되게 축적되어왔다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중국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가령 쑨원(孫文)의 삼민주의도 서구의 자본주의 모델을 넘어서는 모색을 제기했고, 량 수밍(梁漱溟)의 『동서 문화와 철학』(1921)이나 민국 시기 장 제스(蔣介石)의 현대화 전략, 그리고 마오 쩌둥(毛澤東)과 덩 샤오핑(鄧小平)도 서구 근대문명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얘기하지만 중국 근대화 초기 지식계의 공통된 목표야말로 ‘차이나 컴백 어게인’이었던 셈이죠. 중국에 있어 근대화란 서구에 의해 장악된 민족주권을 회복하고 국제적으로 중국의 원래 위치를 찾는 문제였던 겁니다. 그것이 지금도 중국식 현대화라는 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 진핑 정부와 공산당의 정책도 이런 1세기 정도의 과정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최필수 그런데 중국식 현대화를 중국의 국시(國是)로 본다면, 결국 서구식 다당제 민주주의를 하지 않고 자신들의 경로대로 가겠다는 선언은 아닐까요? 좀더 단순하게 해석하면 자국민들한테 우리는 서구식이 아니라 중국식으로 갈 것임을 호소하려는 뜻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차태근 단기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2021년 중국 국무원에서 『중국의 민주주의』라는 백서를 발표하는데, 중국식 민주주의가 서구 대의제 민주주의보다 훨씬 낫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당시 연임에 성공하고 3연임까지 바라보고 있던 시 진핑이 미국 주도의 민주주의 정상회의(Summit for Democracy) 등 대내외적 정치적 비판에 대응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응이 중국인들에게 통했던 것은, 중국인들의 역사적 경험과 이데올로기 학습이 맞물려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인의 70~80퍼센트가 중국식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는데, 시 진핑이 단지 개인의 권력적 지위향상이나 우상통치를 노린 것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안정성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오늘날 중국정부와 언론의 논조를 보면 조화·평화·상호협력·공동체와 같은 유가(儒家)적 수사와 주권 평등과 같은 국가통치 및 단일정당체제 정당화를 위한 이념적 수사가 지배적입니다. 우리는 이걸 추상적인 정치적 선전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크지만 중국인들은 실체가 있는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중국식 현대화 개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현실과 긴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만 앞으로 중국의 변화도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미중갈등 국면에서 회피할 수 없는 인식 대상인 중국을 두고 그 언어적 수사를 거부하거나 비판하기에 앞서 중국의 문화적·내부적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고요.
‘중국식 현대화’의 문명적 가능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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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두분 모두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시 진핑 주석이 3연임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식이라는 표현이 더욱 강조되었기 때문에 중국 밖에서는 흔히 중국식 현대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동의가 정치적 강압에 의한 거라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국에서는 시 진핑 시대와 중국식 현대화를 박정희식 모델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해졌어요.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중국식’을 내세운다고 보는 견해인데, 이것은 중국의 겉만 보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반대자도 있지만 대부분 중국인이 현재 체제에 동의하고 ‘중국식’에 공감하는 데에는 서구 민주주의의 실패도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최근 일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국적 경로로 가면 안 된다면서 한국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는 시각도 생겨났고요. 시 진핑 시대에 많이 쓰이는 또다른 말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인데, 과거 진흥중화(振興中華)와 같이 발전(invigoration)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중화문명의 부활(rejuvenation)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서구 중심의 담론과 문명 수준을 넘어서 중화문명의 부흥을 통해 과거의 지위를 복원하겠다는 큰 흐름을 말하는 것이죠. 이러한 중국식 발전모델이랄지 혹은 문명모델이 근대의 성취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근대의 폐해를 ‘극복’하는 문명적 대안으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중국식’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차태근 ‘중국식’이라는 개념은 덩 샤오핑 때에도 거론되었지만 그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덩 샤오핑의 중국식에는 시장개방에 따른 위기로부터 중국의 지배체제를 지키기 위한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면이 있었죠. 그런데 시 진핑 집권기의 중국식은 매우 적극적인 동시에 세계에 대한 도발적 측면도 있습니다. 대외적 성장에서 오는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고, 이념적인 측면에서 실제 모델이 되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겠는데요. 이러한 의도가 통하는 맥락이 국제적으로도 형성되고 있어요. 민주주의의 위기가 제기되는 가운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대안을 모색할 때 중국이 하나의 모델로, 적어도 지식·사상계 차원에서의 대안으로 생각해볼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사회주의가 자리잡기까지 중요한 두 시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이고 그전의 한 시기는 유럽 나치 정권기 때입니다. 1차대전 이후 중국 내에서 서구적인 모델로는 안 되니 대안의 사회주의 또는 제3의 길로 가야 한다는 맥락이 형성된 바 있고, 1930년대 서구에서 심각한 경제불황과 정치적인 혼란으로 민주주의가 위협받자 파시즘과 나치즘이 대두했습니다. 히틀러는 포퓰리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 민주주의의 어두운 면으로부터 등장했다고 볼 수 있죠. 그 무렵 중국에서도 파시즘, 공산주의, 독재 등 여러 모델이 제기되었고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맥락이 형성됐어요. 그러한 흐름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설로 이어지는 사상적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당시 공산당의 집권은 전세계 민주주의 위기의 대안 모색 속에서 이루어진 중대한 사건이었는데, 시 진핑은 지금이 바로 그같은 중요한 시기라고 보는 것 같아요.
이욱연 세계사에서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인 간전기가 위험하고 중요한 시기였고, 지금 세계도 간전기 같은 국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와 같은 세계 국면에서는 중국식 모델이 호응을 받을 수도 있고 중국의 수출품목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국제 여건이 그렇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게 중국식 발전모델이 호응을 얻는 현상도 분명 있고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시나요?
최필수 저는 중국이 중국식 현대화라는 말을 할 때는 경제적으로 ‘개발도상국 모델’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그렇게 말하고요. 중국처럼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거죠. 그것이 어느정도 호응은 얻고 있지만, 경제규모 자체가 다르니까 중국의 처방은 다른 나라로서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동시에 중국공산당은 중국식 현대화가 성취된 다음에도 여전히 중국식 모델을 고수할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공산당이 계속 집정하기 위해서는 산업에 대한 일정 수준의 통제, 국가 주도의 거시경제 운용, 금융시장은 개방하되 자본계정은 개방하지 않는 등의 몇가지 조건을 유지해야 하는데 중국이 현대화된 후에 과연 이런 조건이 바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변지원 저는 중국식 현대화나 중국식 민주주의라는 표현에서 오히려 그것이 현대화도 민주주의도 아니라는 것을 중국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다고 봐요. 현실적으로 타국이 중국의 모델을 수용하기 불가능하고, 세계적인 대안으로 채택되기도 제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중국 스스로 내부에서 자급자족만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지만, 그러다가는 고립의 자충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중국 청년세대가 해외유학을 많이 가고 있는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좋아서 그곳에 남으면 인재 유출이 되겠죠. 그리고 중국의 젊은 세대는 최고의 대학을 졸업해도 이전 세대와 달리 앞길이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러눕는다는 탕핑(躺平) 현상까지 나타납니다. MIT 교수 야성 황(Yasheong Huang)의 『중국필패』(The Rise and Fall of EAST, 2023, 한국어판 생각의힘 2024)를 한번 보세요. 미국에 있는 중국인이 던지는 중국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중국은 표면적으로 변했을지 몰라도 극기복례를 강조하거나 전통사회의 과거제처럼 엘리트를 뽑는 일들이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다는 거죠. 중국식 현대화와 민주주의를 해석할 때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욱연 우리가 ‘중국식’을 너무 횡적인 기준으로, 그러니까 서구 정치와 역사 경험 속에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방금 변지원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중국은 오히려 종적인 차원에서, 즉 중국 전통과 내적 문명 차원에서 ‘중국식’이 지닌 특징을 내부적으로 발굴하고, 자신들이 ‘중국식’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생각은, 중국 같은 영향력 있는 국가가 특정 모델을 대외적으로도 제시할 때는 그것이 지속가능하고 벤치마킹할 수 있는 모델이어야 하지 않나 하는 점입니다. 이 특수한 모델이 보편성을 지닐 수 있을지 하는 것이지요.
최필수 한국은 순수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요소를 흡수한 수정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도 순수한 자본주의도 아니고 순수한 사회주의도 아닌, 그 나름대로 굉장히 독특한 모습을 가지고 있거든요. 저는 경제발전 모델보다도 여기에 혹시 세계가 참고해야 할 보편성이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회주의는 독일의 것도 영국의 것도 그렇다고 러시아의 것도 아닙니다. 그 이념을 가장 오랫동안 실천하고 변용해온 중국의 것이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베이징에 처음 갔을 때 천안문에 걸린 ‘세계인민대단결만세’라는 구호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이 나라는 포부가 대단하구나 싶었습니다. 중국이 사회주의를 어떻게 소화해서 구현하고 있는가는 우리를 포함한 전세계가 지켜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국의 현재 체제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1940년대 소련이 자본주의와 체제경쟁을 벌이면서 전세계의 분배와 복지를 개선시켰듯이, 오늘날 중국도 건전한 체제경쟁자가 되어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중국에 대한 저의 기대입니다.
한국에게 중국은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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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우리가 중국이 추구하는 ‘중국식’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조금 넓혀서, ‘중국식’만이 아니라 오늘의 중국이 한국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반대로 한국은 중국에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중국식’의 의미를 거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위기감, 공포감, 자존감 결여 등에 대응할 방법이 나올 수 있고 혐중현상도 달라질 수 있겠지요. 한국과 중국이 계속해서 서로 교류하며 이해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한중 두 나라가 미래를 기획할 때 어떤 면에서 서로 의미있는 존재일 수 있는지 말씀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최필수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국은 우리에게 시장, 공장, 공급망이라는 세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시장으로서의 중국은 대체할 수 없죠. 무역이론 중에 중력모델(gravity model)이 있는데 두 나라의 교역량은 두 나라의 사이즈와 거리에 비례한다는 이론입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바로 옆에 있으니 그 나라에 우리 물건을 많이 팔아야 하는 것은 당위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2016년 사드 배치를 하면서 이 시장을 포기했죠. 당시 대중 수출 중 소비재의 비중이 5퍼센트밖에 되지 않으니 그 정도는 감수하자는 식으로 이야기됐지만, 이 5퍼센트는 향후 10퍼센트, 20퍼센트가 됐어야 하는 5퍼센트였습니다. 즉 가장 중요한 소비재 시장을 포기했던 겁니다. 또,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자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 전체 수출 중 중국과 홍콩을 합친 비중이 30퍼센트 가까이였고 중국이 세계 경제성장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30퍼센트 정도입니다. 즉 우리의 대중 수출의존도는 과도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중국과의 정상적인 무역수준을 회복하고 중국의 소비재 시장에 의미있게 진출하는 일은 국가 차원에서 총력을 다해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 공장으로서의 중국입니다. 폭스바겐 CEO인 올리버 블룸(Oliver Blume)이 2024년 베이징 모터쇼에서 중국시장을 ‘피트니스센터’로 비유했는데,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시장에서 진검승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살아남으면 전세계 시장에서 통한다는 뜻인데 우리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최고의 제조 경쟁력이라는 중국의 위상은 자국 제품만 아니라 글로벌 공장도 포함합니다.
마지막으로 공급망으로서의 중국입니다. 한국은 중국에서 상당히 많은 원자재와 자원을 수입합니다.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수입원을 다원화할 필요가 있지만, 그 이전에 중국의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요. 예를 들어 흑연은 중국에 90퍼센트 넘게 의존하기 때문에 포스코가 탄자니아 흑연 광산 개발사업을 진행했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불확실성과 문제에 봉착합니다. 중국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벗어나려 하니 새로운 비즈니스 리스크가 발생하더라는 것이죠. 결국 시장, 공장, 공급망이라는 세가지 측면에서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잘 풀어가야 합니다.
이욱연 중국과의 교역에서 적자가 나거나 경제적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중국을 탓하는 일이 반복되곤 합니다. 중국에서 원인을 찾는 것인데, 한국 요인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중수교 이후 한국 기업들이 중국을 너무 쉽고 만만하게 보며 중국에 진출했다가 실패하고 나온 측면도 있고, 공장으로서의 중국 시대에는 중국을 철저히 연구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측면도 있어요. 이제 중국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공장으로서의 중국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공부가 필요하겠지요. 최근 우리 기업들 사이에서 중국시장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중국 공부를 새롭게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건 긍정적인 흐름이라고 봅니다. 또다른 중국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무엇일까요?
차태근 한국과 중국은 단절이 불가능한 운명 같은 존재이고, 중국이 어떻게 가는가가 우리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중국 내부의 정치적 상황과 문제는 어디까지나 중국 인민의 문제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 나름의 의사를 표현할 수는 있지만 너무 과하게 몰입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럴 경우 우리 스스로도 정신적인 소모를 하게 되고, 그 피로감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면서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악순환이 생깁니다. 중국의 체제나 양국의 문화공정·역사공정 문제가 민족적인 대결로 표출되는 양상 역시 우리 사회를 오히려 위태하게 합니다. 한국이 향후 중국을 거부하거나 부정해도 문제없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비판은 하되 중국을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중국을 관찰할 필요가 있고, 중국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중국에게서 무엇을 얻을 것인지 봐야 합니다. 가령 중국이 이미 강대국이라는 점을 잘 이해한다면 중국의 빠른 기술혁신에 동참해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도 있겠죠. 미중대립만을 신경 쓰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과 체계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 지혜롭게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변지원 제 생각에는 우리 사회에서 중국을 이야기할 때 재중동포 부분이 자주 간과되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조선족으로 불려온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중수교 초반에 중국에 들어갔던 한국사람들은 재중동포의 도움 없이 중국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이후 한국에 들어와 일하는 재중동포가 늘어났을 때 이들은 한국 내에서는 경제적 격차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고, 중국 내에 남겨진 이들의 가정은 돌봄의 부재나 해체 등의 어려움을 겪었어요. 이중의 어려움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런 문제에 늘 무관심했습니다. 20세기만 하더라도 재중동포가 특히 많이 거주하는 중국의 동북3성(요녕, 연길, 흑룡강)에 조선어로 수업하는 학교가 많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조선족 비율이 30퍼센트 정도로까지 줄어들어 자치주로서의 지위도 위태로울 만큼 큰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중국에 대한 이해 차원만 아니라 우리 다문화정책과도 맞물린 중요한 문제인데, 막연히 중국의 소수민족이고 중국의 일부라고만 생각해온 것 같습니다. 이 부분도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합니다.
이욱연 저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가 문명적인 고민이 거의 사라져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환경·생태 분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대안문명을 생각하지 않고 근대주의 패러다임에 갇히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반면 중국은 문명론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회주의 패러다임보다는 중국 전통을 다시 불러오는 가운데 대안문명을 고민하는 게 최근의 흐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국이 갈수록 전통 친화적인 체제로 가고 있는 것 같고요. 전통적 엘리트 통치 시스템, 결과적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는 능력주의 가치관, 권리보다 의무를 강조하고 가족과 공동체 가치를 복원하며 이성 중심의 인간관에서 벗어난 감정적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복원하려는 등 전통적 가치관과 문화자원을 대안문명을 사고하는 데 대폭 끌어오는 실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만이 아니라 중국 지식인들도 여기에 나서고 있고요. 이런 중국의 실험 자체를 의미없는 시대착오적 시도라고 보는 근대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중국의 실험에서 어떤 문제들이 노출되는지를 확인하고 중국의 논의를 참조 삼아 우리 나름의 대안문명의 가능성을 찾아갔으면 합니다. 오늘 중국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이 점이 아닐까 합니다.
중국의 참조 대상으로서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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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이번에는 역으로 중국한테는 한국이 어떠한 의미일지, 말씀을 나누어봤으면 합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규모의 비대칭성이 있다보니 한국 입장에서 중국이 지닌 중요성은 자주 말하지만, 중국에게 한국은 무슨 의미인지, 무슨 의미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한중관계 형성을 위해서, 그리고 한국의 미래 기획을 위해서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중국은 어떤 측면에서 한국을 의미있는 참조 대상이나 학습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한중관계의 전망을 포함해서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최필수 소위 K컬처가 전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한국은 서양문화를 굉장히 열심히 학습했습니다. 서양이 동양을 학습한 것보다 훨씬 절박하게 수용했죠. 그 결과로 동서양의 융합이 한국에서 가장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민중성이 있어요. 근본적인 지향으로서 민주주의와 자주통일이라는 민초들의 뿌리깊은 바람이 깔려 있습니다. 동서양의 융합은 주로 케이팝으로 나타나고 민중성이라는 지향은 주로 영화·드라마·문학 콘텐츠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중국도 문화를 발전시켜가려면 한국을 참고할 여지가 굉장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변지원 그런데 지금은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에도 중국 자본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와서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이 자본의 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가 앞으로 우리에게 과제가 될 거예요. 중국 입장에서 한국은 동쪽에 위치한 작은 지역인지 모릅니다. 중국 지도를 놓고 봤을 때 중국을 동부와 서부로 양분하는 ‘후환융(胡焕庸)선’(중국의 인구지리학자 후 환융이 발표한 중국 인구밀도 경계선)이 있어요. 서부를 무시할 것은 아니지만 이 선의 동부에 인구의 95퍼센트 이상이 살고 자본·전력·대학과 각종 인프라가 집중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역시 후환융선 동부가 연장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중국 학자들 중 일부는 한국어를 ‘역외방언’이라 부른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중국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국가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같이 한자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꾸 공통점을 찾으려는 분들이 주변에도 꽤 계시지만, 이 점을 애매하게 하면 안 되고 명확하게 해야 해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이에 기반해서 중국과의 협업이나 공동기획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욱연 그런데 상호관계에서의 가치와 의미는 규모에만 좌우되지는 않습니다. 전통시대에 중국은 서쪽을 통해 세계와 교류하고, 문물을 수입하고, 세계로 진출했습니다. 그런데 개혁·개방 이후에 중국은 ‘태평양으로 가자, 동쪽으로 가자’는 구호를 내세웠어요. 중국이 동쪽을 통해 세계와 교류하고 세계로 진출할 때, 한국은 반드시 경유해야 할 지점이자 매개창구라고 봅니다. 한국은 중국보다 서구화의 긍정적·부정적 경험이 풍부하고, 그래서 중국이 서구화를 진행할 때 참조할 수 있는 많은 경험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발전·사회발전 과정에서 국가와 민간의 역할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등의 측면에서도 참조가 되고,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 감각을 단련할 수 있는 훈련기지이기도 한 것이지요. 미중대립 속에서 우리가 지닌 전략적 가치 역시 중국에게는 매우 큽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 스스로가 지나치게 한중 규모의 비대칭성에서 오는 염려를 느끼며 자존감을 잃지는 않았으면 해요.
차태근 말씀대로 한중관계는 비대칭적이지만, 한국과 중국의 밀접한 관계성 속에서 지금까지 서로에게 타산지석의 역할을 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경제성장을 할 시점에 한국은 이미 경제적·정치적·문화적인 측면에서 글로벌 스탠다드에 준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고 있는 상황이었죠. 전세계적으로 보아도 내부적인 노력을 통해 이처럼 안정된 시스템을 구축한 사례는 몇 없습니다. 앞으로 중국이 경제만 아니라 정치적·문화적으로도 강대국이 되려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될 겁니다. 미국식 모델도 유럽식 모델도 중국에는 적합하지 않죠. 한국도 온전히 맞지는 않겠지만, 전통문화적인 공통점이나 정서적·심리적인 측면의 유사성을 고려하면 중국이 한국의 경험을 중요하게 참고할 것이고 이미 참고하고 있다고 봅니다. 중국이 2차산업에서 자신감을 보였던 것도 한국의 성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처럼 조그마한, 가진 것은 인재밖에 없는 나라에서 교육을 통해 첨단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중국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의미니까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인 바탕이 있고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국제적 정세변화에 따라 한중관계가 요동치기는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상호인식과 협력이 심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비판적 공감의 열린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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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한중 미래세대의 전망을 이야기하면서 오늘 대화를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한중 상호인식을 보면 양국 모두 기성세대일수록 상대 국가에 우호적이고 젊은 층으로 내려올수록 부정적인 비율이 높아집니다. 청소년이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공간이 혐중 생산지로 여겨질 정도이고요. 중국의 젊은이들은 자국이 이른바 G2라고 불릴 정도로 강대국이 되었다는 자부심 속에서 더 자국중심적이 되고, 한국의 젊은 세대는 중국 이해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이유가 별로 없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변지원 저는 언어문제가 큰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우한’이라는 특정 도시가 계속 언론에 거론되며 중국과 관련된 부정적 보도가 쏟아져나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이 배우는 혹은 배워야 하는 제2외국어 우선순위는 중국어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는데, 지금은 일본어가 1위입니다. 중국어를 배우는 게 어려워서 싫다는 의견도 많은데, 한자에 대한 이해 수준도 변수입니다. 한국이 교육열이 대단한 나라지 않습니까. 장년층은 상대적으로 한자가 익숙하다보니 한자문화권 전통에 대한 접근이 쉽지만, 젊은 세대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런데 중국이 국제적으로 부상할수록 우리 젊은 세대가 한자를 알아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그게 압박감이나 초라함, 위축으로 작용할 수 있어요. 중국은 한자의 어려움을 고려해 한어병음(漢語拼音, 중국어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기호, 1958년 제정)을 만들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한자만 쓰는 경우가 많고 이런 추세는 오히려 강해지고 있습니다. 올해 한중일 세미나에 참석해보니 코로나 이전과 달리 중국에서 참석한 사람들이 그전만큼 영어로 소통하지 않으려 하더군요. 중국의 젊은 세대는 자국어 중심으로 가고, 한국의 젊은 세대는 한자와 멀어지고 있는 것은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차태근 한국인들에게 심리적으로 중국이 매력적이지 않은 문제도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는 싫어할지 몰라도 일본 콘텐츠는 좋아하잖아요. 최근 20~30대는 중국 콘텐츠·문화와 중국인 모두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을 접할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거죠.
최필수 관점을 달리해보면 2000년대 초기의 ‘차이나 붐’이 너무 과했던 것은 아닐까요? 전국민적으로 중국어 열풍이 분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관심을 가지는 수준으로 안정화됐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에 대해 알 사람만 알되 혐오발언을 하지 말자는 인식이 퍼지는 것이 중국에 대한 관심이 정상화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중국어학과, 중국통상학과 등의 인기도 수요에 맞게 재편이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이욱연 확실히 지금 한국 청년과 청소년 세대는 한자 포비아에 가까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중국영화 등을 매개로 한 문화적 공감대나 접점도 기성세대보다 훨씬 약합니다. 그리고 이들 세대는 한중수교로 인해 우리 경제가 누린 특수의 혜택을 받은 경험도 없습니다. 오히려 문화갈등과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은 세대이지요. 다행스러운 것은 중국이 지난해 말부터 비자 면제 조치를 취하면서 중국에 가서 직접 자기 눈으로 중국을 보는 경험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는 계기가 늘고 있어요. 사실 한중 젊은 세대는 상호인식에서 상대국을 가장 부정적으로 보는 세대이지만, 두 나라 젊은 세대가 직면한 현실문제를 보면 유사한 게 많습니다. 취업난, 주택난, 그리고 시험능력주의 속에서의 과잉경쟁 등이 그렇지요. 한중 젊은 세대 사이에서 동세대로서 공감의 폭이 늘어나고 문화적으로도 활발한 교류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변지원 저도 중국과 한국의 젊은 세대가 서로를 거울삼아 자신을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의대 편중현상에서도 드러나지만 한국사회는 ‘도 아니면 모’라는 경쟁적 환경에 내몰리고 있어요. 내부에서 극심한 경쟁에 내몰리다보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무엇이 되면 성공한 인생, 안 되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식의 환경이 조성되고 다른 선택지가 없죠.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 서구만 쫓아가서 생겨난 문제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당장 중국을 보면 탕핑 시대임에도 훨씬 다양한 진로에 대해 열려 있어, 우리와는 다른 길을 모색 중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주산업이나 AI 방면의 성과 등도 이를 말해주고 있고요. 중국이라는 또다른 거울이 옆에 있다는 것을 우리로서도 활용해야 하고, 젊은 세대한테 위축감을 주는 대상이기보다 새로운 기회나 사유 확장의 계기로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이욱연 요즘 우리나라 중국학계에서는 중국을 비판적으로 보자는 비판적 중국연구란 말이 유행합니다. 저는 이것도 필요하지만, 한중 사이에서 비판적 공감(critical empathy)이 더 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당연한 일이지만, 비판만 있는 중국연구는 자칫하면 한국이 중국보다 얼마나 우월한지를 확인하거나 중국을 비하하는 차원에 머물 수도 있고, 중국에 관한 오해와 편견을 확대·재생산할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공감도 문제이지만 무조건적인 비판도 문제겠지요. 중국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비판적 공감을 저는 이중의 눈으로 중국을 보는 감수성을 키우는 일이라고 봅니다. 단순한 감정적 동일시나 찬동이 아니라, 상대의 역사적 맥락과 구조적 조건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내재된 문제점과 권력작용을 성찰하여 비판하는 이중적 태도입니다. ‘공감하되 비판하고, 비판하되 공감하는’ 이중적 태도라고 할까요? 중국에 대한 우월감이나 무비판적 수용을 넘어서려는 태도이겠지요. 우리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습니다. 비판적 공감으로 상대국을 보려는 노력이 한중 사이에 많아졌으면 합니다. 오늘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2025.7.19.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