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1.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가 직면한 대전환 국면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과업에 충실하려 할 때, 이에 동력을 제공할 사유와 삶의 경험을 재활성화하는 데 게으를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우선적으로 한국사에서 쌓아온 사상자원을 중시한다. 이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어왔는데, 그 가운데 한국사상이 실천성을 중시하면서 차원을 높인 보편적 비전을 강력하게 지향해왔다는 인식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1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사의 모순이 응집된 장소인 ‘핵심현장’의 하나가 한반도이기에 가능한 일인데, 이 점을 일찍이 예증한 사례가 조소앙(趙素昻, 본명 용은鏞殷, 1887~1958)의 사상이지 싶다.

독립운동가요 삼균주의(三均主義) 창시자로 알려진 소앙은 대한제국의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4년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明治)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재학 중 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되는 치욕을 겪고, 번민과 방황을 거듭하다가 종교구국의 길을 모색했다. 통합적 보편종교로서 일신교(一神敎)와 대동종교 사상을 개창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는 1913년부터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한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위해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독립과 건국 과정에서 좌우파를 통합하는 이념 지향을 제시했다.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으로 만주 거주 한인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중국의 지원을 얻으면서 한국의 국제지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한국이 카이로선언(1943)과 포츠담선언(1945)을 통해 독립을 보장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해방 직후 귀국해 좌우합작을 동력으로 분단을 막고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힘썼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바로 납북되어 한동안 평가받지 못했던 소앙이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조명된 것은 1980년대 초이다. 남북통일을 위한 사상자원으로 그의 사유와 실천이 주목되었고, 지금은 한국 민족운동의 이념을 체계화한 이론가이자 정책입안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2

이처럼 시대의 변화 속에서 꾸준히 현재의 참조점으로 소환되는 그의 사상을 당대와 현재의 맥락에 나란히 세워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성을 탐구하는 작업이 이 글의 목적이다. 필자는 소앙의 사상이 20세기 이래 한국사에서 이어져온 ‘변혁적 중도주의’3 계열의 협업의 성취이자 그의 독창적 사유의 결실이기도 함을 특히 부각하려고 한다. 소앙의 사상은 근대 한국 민족종교 교리의 융합에 바탕을 두면서도 동서 사상조류의 경계를 넘나든 특성에 힘입은 것이다. 필자는 이전의 글에서 “그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적 사고는 지리적 경계를 횡단한 그의 이채로운 행적—일본·중국 및 유럽을 두루 다니면서 신조류와 접속하는가 하면, 해방 이후 분단된 조국에서는 남·북한을 모두 살아야만 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산인 동시에 한국사상사를 관통하는 유불선 융합의 사유구조를 내면화한 결과”라고 정리한 바 있다.4

좀더 보충한다면, 그는 “세상 만들기와 나라만들기, 마음 만들기”의 순환에5 일찍이 관심 가진 독특한 사례에 속한다. 무엇보다 그 자신 종교세계에 바탕해 개인·국가·세계 차원에서 두루 ‘완전한 평등사회의 실현’을 이루고자 한 삼균주의의 덕이다. 소앙의 종교관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필자는 그것이 단순히 개인 구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과 결합한 면모임에 주목한다. 그의 삶의 궤적이나 사상적 전모에 대한 연구는 긴 글을 요하는바 여기서는 삼균주의의 이론구조와 현재성에 집중하고자 한다.

 

 

2. 삼균주의의 진화과정과 나라만들기 구상

 

삼균주의는 정치·경제(생활)·교육의 균등을 목표로 하며 개인·국가·세계의 균등을 지향하는 사상이다. 1910~20년대 자신이 구상한 종교구국론을 부정하는 형식이 아니라 그 이상을 사회주의와 융합하면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는 민족운동의 자장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에서 구체화하고 체계화한 것으로 이해해야 옳지 싶다. 소앙의 종교세계는 그의 ‘나라만들기’6 구상과 실행의 점진적 진화과정에서 동력으로 작동하였고, 마침내 삼균주의를 숙성시키는 효모가 되었다 하겠다. 그 궤적은 그가 집필에 깊이 간여한 일련의 ‘나라만들기’ 구상 문건에서 한층 명료해진다.

그 첫 단계는 1917년 7월 신규식(申圭植)을 비롯한 14인 서명으로 공포된 「대동단결선언」이다. 소앙이 기초한 이 문건은 고종의 ‘주권 포기’가 “곧 우리 국민 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禪位)”이니 “삼보(三寶, 국민·주권·영토)를 상속”받은 것이라고 명시함으로써, 가히 국민주권론이라 할 만한 주장을 「기미독립선언」(1919)보다도 시기적으로 앞서 담고 있다. 또한 독립건국을 달성하는 최고 전략으로 임시정부 수립론도 제기되었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가의 대동단결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전망한 것이다. 둘 다 나라만들기의 핵심요건이다.

두번째 단계는 「대한독립선언서」이다. 이 문건은 1919년 3월 초순경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동단결선언」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선포하면서 평등복리, 대동 평등사상을 제창하였다. 삼균주의의 주요 개념과 용어들이 싹튼 것이라 하겠다. 거의 같은 시기에 역시 소앙이 기초한 세번째 문건인 「대한민국임시헌장」(1919.4)도 평등에 바탕하여 인민을 나라의 주체로 내세운 민주정체의 신국가를 지향하였다.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의 기틀을 닦은 이 세 문건의 구상이 1930년대의 삼균주의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이뤄진다. 세가지 외부적 요인이 여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소앙 사상의 변화와 지속의 변증관계를 엮여낸다.

먼저 유럽과 소비에트의 순방이다. 소앙은 베르싸유 강화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1919년 5월 중국에서 출발했으나, 뒤늦게 6월 말에야 빠리에 도착하는 바람에 본래의 목적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유럽 사회주의정당 요인들과 교류하고, 소비에트체제가 정비되는 혼란스러운 현장을 6개월 남짓 참관하며 공산주의의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체감한 경험은 소련식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갖고 사회민주주의를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7

이와 더불어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해 추진한 반제·반봉건 국민혁명(1923~27)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국 안팎에서도 통일전선 움직임이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그 일환으로 국내에서는 신간회 설립, 중국 한인사회에서는 민족유일당 창당운동이 추진되었다. 일본 유학 무렵부터 중국 국민당 요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소앙인 만큼 그 영향권에 있었을 터이고,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의 당치주의(黨治主義, 당정黨政 일치) 방침을 수용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지 싶다.

그밖에 유럽 순방에서 돌아와 목도한, 임시정부가 지속적인 내부 분파에 시달리는 사정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임시정부 수립에 깊이 간여한 소앙으로서는 그 출구를 모색하느라 고투한다. 임정이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소앙은 ‘임정 수립론자’로서 자세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임정을 지탱할 중심체로 정당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여러 정파가 각축하는 동향에 대응해 거듭 당을 개조하면서 ‘공동한 주의·정강’을 가진 민족주의세력의 결합을 뜻하는 ‘대당(大黨, 통합정당)’ 조직을 모색하는 과제에 몰두했다.

사실 통합정당 운동, 곧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구하며 이론적 체계와 기반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독립운동자 내부에서 일정하게 공유한 것이었다. 안창호가 통일전선적 의미를 지닌 대공주의(大公主義)를 구상한 것은 그 하나의 증거라 하겠다. 이같은 일정한 공동영역의 자장 속에서 삼균주의가 생성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제 1930년대 중반에 체계화된 삼균주의의 골자를 깊이 들여다보자.

소앙은 한민족의 역사를 깊이 분석하면서 예부터 겪어온 3대 불균등, 곧 인민의 기본권리·생활권리·교육권리의 불평등을 적출하고 그를 해소하는 동시에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이 ‘한국혁명’ 곧 삼균주의혁명이라고 본다. 이로써 전체 민족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서 구체적으로 정치권리의 균등, 생활권리의 균등 및 배울 권리의 균등을 제창한다.8 이 세 요소를 나란히 중시한 것은 대종교의 삼일신론(三一神論) 또는 삼일철학으로 불리는 특유의 세계관에서 영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9

정치균등이란 국민의 균등한 기본권을 기초로 하여 보통선거제와 국민개병(皆兵)제를 채택한 민주공화국을 추구하는 것이다. 경제균등은 토지국유와 대생산기관에 대한 국유정책을 기본원칙으로 하여 국민복지를 높이는 것이다. 그 강조가 자못 이채로운 교육균등은 국비부담에 의한 의무교육 실시와 교육기관의 양적 확충 등과 같은 정책안들을 포함한다.

정치·경제·교육 등 세 방면의 균등이 협의의 삼균론이다. 그런데 그의 삼균사상은 이에 한정되지 않고, 개인·민족·세계의 세 차원에서도 균등이 실천되는 좀더 넓은 의미로 확장된다. 이것이 광의의 삼균론이다. 협의의 삼균론은 특히 (광의의 삼균론 중) ‘개인과 개인의 균등’을 실현하기 위한 지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광의의 삼균론에서는 민족간의 균등을 위해서는 민족자결권에 기초하여 각 민족이 국토와 주권을 광복하고 보위하며, 고유의 역사와 문화 및 민족의식을 발양하고, 평등호혜적 민족의 연합을 이룩해야 한다는 원칙이 천명된다. 그리고 국가간 균등을 위해서는 국가간에 침략을 반대하고 국제도덕을 존중하며, 연합국기구를 옹호해야 한다는 등의 실현방안이 제시된다. 민족과 세계를 동시에 사유한 예로서 돋보인다. 이같은 삼권의 균등을 기초로 세우려는 국가가 신민주국 곧 ‘뉴 데모크라시의 국가’이다.

이는 그 개인의 구상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집권당인 한국독립당의 공식적인 강령으로 역할을 했다. 잠재적 주권국가를 상징하는 임시정부로서 시간상으로 복국(독립국가의 회복)→건국(신민주적 국가의 각종 사업 건설)→치국(자유사회 최고급 형태의 국가 유지·발전)의 세 단계를 분별하여 일종의 순차를 정하는 현실적 실행 가능성도 고려한 구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각 단계를 기계적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 안팎의 정세에 유연하게 대응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를 미리 예비하는 식으로 상호연관을 의식하면서 각 단계가 점차 “인접하게 질서정연한 계획적 활동”을 추진하도록 배분하였다.10 이렇게 함으로써 한민족의 사업이되 동시에 인류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를 추진하는 핵심주체는 한국독립당이다. 그렇지만 1930년대에 삼균주의는 “적어도 민족주의계열에서는 공통된 이념으로 자리잡았고, 민족주의계열을 통합하는 이론으로 작동”하였다.11 그 결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1941)에도 계승될 수 있었다. 이 또한 소앙이 기초하면서 삼균주의가 그 바탕이 되었다. 단지 그 이상이 실현되는 과정을 복국→건국→치국→구세(救世, 세계 한가족)로 이어지는 4단계로 제시한 그의 구상이 「건국강령」에서는 복국-건국의 두 단계로 한정되는 변화를 보였다. 복국의 전과정과 건국의 제1기에 해당하는 ‘과도기’에는 임시정부가, 건국의 제2, 제3기에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은 정식정부가 집정하는 구상으로 삼균주의를 실현할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나아가 1944년 4월 임시정부 최종헌법으로 공포되는 「대한민국임시헌장」에도 반영됨으로써 「건국강령」은 임시정부 임시헌법의 기본이념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이제 시공간적 차원을 임정보다 더 넓혀 삼균주의의 의의를 짚어보자. 먼저 「건국강령」으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이 중국 내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공동영역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와 유사성을 갖는다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동아시아 지역 차원에서 이뤄진 사상적 연동의 자장 속에서 생성되었다는 의미도 각별하다. 물론 소앙의 사상은 그가 한국인으로서의 경험세계, 특히 동학 이래의 민족종교의 융합성에 바탕해 사유체계의 독자성을 가지고 숙성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계사적 차원에서 삼균주의의 의의는 그 다른 명칭이 ‘신민주주의’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신민주주의는 1차대전 이후 정당 중심의 지역대표제와 의회정치의 한계를 지켜보면서 이를 혁신할 대안으로 세계 여러곳에서 모색한 여러 유형의 시도를 가리키는 총칭이다. 마오 쩌둥(毛澤東)의 신민주주의 또한 그 하나이다. 따라서 소앙의 삼균주의에 기반한 ‘신민주’는 당시의 세계 사조와 호응하는 보편성이 식민지 상태의 ‘잠재적 주권국가’라는 단계의 독자성과 만나 발현된 구상이라 하겠다. 더 나아가 삼균주의가 오늘의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론, 그리고 그 하부 단위인 변혁적 중도의 관점에서 다시 따져볼 때 한층 더 보편적 차원에 자리잡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절을 달리하여 다루겠다.

 

 

3. 소앙 사상의 현재성: 정세론과 문명론

 

소앙이 당대 현실과의 고투 속에서 이룩한 성과가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떤 빛을 비출 수 있을까. 그 현재성을 따져볼 때 먼저 한국의 고유 사상·문화에 대한 그의 남다른 자부심과 조예를 음미해볼 만하다.

그는 조선 최초의 국가 발생의 출발점인 고조선의 국가이념을 새로운 국가를 인식하는 근거로 삼았고, 건국 기원절을 기념했다. 그렇다고 해서 “옛 국가를 찬미하고 노래하는 복고적 의미”를 강조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고대 최초의 국가로부터 중세 국가를 거쳐 현대 국가에 이르기까지의 발생·발전·멸망의 인과관계와 국가의 앞으로의 혁명에 대한 임무를 역사적 인식에서 구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새 국가 건립 기원의 창조를 촉진하는 향상적(向上的) 의미”를 중시한 것이다.12

소앙의 우리 문화에 대한 천착은 『한국문원(韓國文苑)』을 편찬한 동기에서 잘 드러난다. 그가 우리 선조들이 남긴 명문장을 정리한 것은, 일차적으로 “나라가 망하니 문헌도 사라지는구나”라는 절박한 심정에서 문화가 망한 나라는 진짜 망한 것이지만 정신이 존재하면 나라는 계속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소산이다.13 더 나아가 우리 문화를 탐구·선양하기 위해 한국어 교학법, 활자사, 단군, 원효대사, 광개토왕릉비문, 조선 유학자, 이순신 거북선까지 시야에 담았다.

그의 한국문화 선양은—종교세계가 종교민족주의에 그치지 않았듯이—우리의 문화가 동아시아 문화의 풍요로움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노력과 겹쳐 있다. 이는 물론 일차적으로 한국문화가 중국과 같은 뿌리임을 강조해 중국의 지원을 얻어 항일연합전선을 구성하려는 전략적 고려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소앙이 자신의 사상 바탕이 최치원의 사유라고 밝힌 바 있듯이 한국문화의 주체성과 보편성을 아울러 보여주고자 한 면도 끽긴하다. 최치원이 문화적 주체 역량을 보편적 차원으로 끌어올릴 것을 주문하며 제시한 동인(東人)과 동문(同文) 의식을 융합하는 길을 계승한 것이다.

소앙의 한국문화에 대한 자부와 그것이 동아시아인이 공유할 문명자산이란 확신은 새로운 국제질서와 대안문명에 대한 절박한 바람이 추동한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그가 품은 사상 속의 변혁적 잠재성은 정세론 및 문명론 차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정세론 차원에서 보자. 그는 “한국은 지리적으로 보아 태평양의 평화 등대가 되는 동시에 원동(遠東, 동아시아) 내지 세계평화의 평화 사령대”라고 간파한다. 이러한 지정학적 인식, 곧 한반도-동아시아-세계를 중첩된 3층 공간으로 파악하는 안목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1910)이나 「기미독립선언」에 여실히 볼 수 있듯이 독립운동자들 사이에 꽤 넓게 공유된 것이었다. 나아가 임시정부 외교부장을 역임한 소앙은 태평양전쟁 종결을 앞둔 시점에 기존 질서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역할이 핵심임을 매우 박진하게 제시한다. 예컨대 “3·1절이 제1차 세계대전의 폐막성(閉幕聲)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개막사”임을 누구보다 명료하게 꿰뚫어본다.14 두차례 세계대전의 근원이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의 식민지화에 있고, 그를 세계가 방관해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달아 태평양전쟁을 도발케 해 끝내 “전세계 인류가 모두 불구덩이”에 빠져들었다는 통찰이 뒷받침된 발언이다.15

이어서 문명론 혹은 세계사적 차원의 비전을 보자. 여기서 근대의 적응과 극복을 단일과제로 삼는 ‘이중과제론’에 부합하는 그의 사유가 도드라진다.

일본 유학 초기 그는 학교교육과 수학여행 체험 등을 통해 일본을 한국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문명국가’로 인식했다. 그런데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강제퇴위당한 1907년을 기점으로 소앙의 인식은 크게 달라졌다. 강제와 불법 등으로 얼룩진 ‘극복’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식민성의 자각을 거쳐 근대의 한계를 날카롭게 인식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머물지 않고 한 차원 높은 보편적 비전을 품게 된 것은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 ‘신민주주의’론이 그래서 주목된다.

소앙이 말한 ‘신민주’는 “민중을 우롱하는 ‘자본주의 데모크라시’도 아니며 무산자 독재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데모크라시도 아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범한민족(汎韓民族)을 지반으로 하고 범한국 국민을 단위로 한 전민적(全民的) 데모크라시다.”16 그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화를 제창”하는 이유도 “국가를 광복함과 동시에 (…) 이중혁명의 위험을 방지·보장하려” 함이다.17 즉 독립건국과 계급혁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이중혁명을 넘어서 “일차방정식의 신건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한국의 신사회주의’라고도 말한 이 지향은 자본주의를 애당초 배격하지도 않으면서도 그 너머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론적 문제의식에 가깝다.18 비맑스주의적 근대극복의 사유라고도 함직하다. 이 안목은 세계자본주의의 발달사를 돌아보면서 한반도에서 구민주주의를 극복하려는 인식에 바탕했기에 한결 탄탄해 보인다.

 

현재 우리의 이상 중에 있는 민주국가가 17, 8세기에 구미에서 건립된 그 데모크라시 국가인가. 그것도 아니다. 당시 그들의 성공으로 인하여 건립되었던 데모크라시는 상승기 자본주의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재 노사 간의 극도의 갈등과 모순을 내포한 제도를 산출하여 놓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제도를 건설할까. 본당 당 이념에 명명백백히 규정한바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 즉 ‘뉴 데모크라시’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한국독립당 당 이념 해설」(218면, 강조는 인용자)

 

‘상승기 자본주의’가 아닌 식민통치 아래 왜곡된 기형적 자본주의 유산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한반도에서 그가 “일차방정식의 신건설”로 성취하려는 ‘신민주주의’ 국가는 물론 아직 세계 어디에서도 세워진 적이 없다. 그럼에도 소앙은 포부도 당당히 이렇게 제안한다.

 

전례에 없는 새로운 표본, 새로운 전형, 새로운 범주를 우리 당의 골자로 하여 우리의 재건설은 전에 없던 창작적 국가를 잉태하고, 인류에게 새로운 제도를 제출하는 정중한 동의(動議)이다. 이와 같은 신선한 동맥이 활약하여 비로소 세계인의 일부인 우리의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며, 동아시아의 유구한 문화적 결정(結晶)의 광선으로 전인류의 병태적(病態的) 제도에 대한 통쾌한 살균제가 되어 5천년간 한민족 독자의 발전상에서 새로운 문명의 피의 꽃을 피게 하는 것이다. 창작의 자부심이 없으면 정치결사의 유원(悠遠)한 생명이 될 수 없으며, 조국 광복의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고 과감하게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원동지들에게」(764면, 강조는 인용자)

 

일제강점기에 구상된 소앙의 신민주주의 비전은 해방공간에서 다수 민중의 일상적 욕구에 호응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요 정당들의 공통된 지향이기도 했다. ‘진보적 민주주의’나 ‘신민주주의’ 용어 자체는 국가 정체를 표현하는 ‘시대정신’이었다 하겠다.19

이 점은 소앙의 신민주주의를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의 신민족주의와 비교해보면 한층 더 또렷해진다. 얼핏 보면, 중국에 망명해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해외 투쟁을 벌여온 소앙은 구체적인 국가건설 청사진을 제시하고 실제 조직을 활용해 정책가로서 활약한 데 비해, 민세는 국내에서 고조선문화를 발굴·재해석하면서 정치철학을 체계화하는 데 몰두하며 문화운동(조선학운동)을 전개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식민성을 자각하고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이해했기에 양자는 근대의 이중과제론에 부합하며, 변혁적 중도에 합당한 신민주주의를 제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러차례 옥고를 치른 민세에게 정치운동과 문화운동은 상호교차된 실천활동이었기에 해방 직후 곧바로 준비된 국가건설론을 발표할 수 있었다. 자본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근대적 쌍생아를 지양하고 각 장점을 회통 종합한 ‘제3의 신생이념’ 곧 신민주주의(일명 ‘다사리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국가를 추구하되 일제 독점자본에 예속되지 않는 소자본가와 농민·노동자 중심의 계급연합적·사회민주주의적 경제체계를 확충하는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론으로서 신민족주의, 신민주주의 사상이었다고 요약될 수 있다.20 두 사람을 비교하면 바로 알 수 있듯이 신민주주의는 개량과 혁명의 병진론, 곧 변혁적 중도와 맥을 같이한다.

이와 더불어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점은 양자 모두 한국의 전통사상, 특히 고조선을 중시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숫자의 어원해석을 통해 정치철학 체계화에 집중한 민세와 달리, 소앙의 경우 그 사상적 기반을 조선 유학〔國學〕의 정수, 곧 “심즉물(心卽物)의 진제(眞諦)이자 즉리즉기(卽理卽氣)의 묘술(妙術)”에 둠으로써 유물론과 유심론을 넘어선 경지를 추구했다.21 민족종교를 창안한 데서 드러나듯 우주의 본체인 진선미를 체득하는 마음수련을 거친 개인들을 묶어 집단적 정치실천과 결합하는 차원까지 염두에 둔 점도 종요롭다.

물론 그가 임시정부라는 국가기구에 참여해 요직을 맡고, 한국독립당이라는 구국 정당을 주도하는 1920년대 후반 이후의 행적에서 종교적 관심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개인수양과 사회변혁을 동시 수행하는 과제에 대한 관심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균주의를 해설하면서 그 철학적 기반인 진선미의 융합을 우주 본체의 합일을 이룬 경지로 파악하고, 그것이 정치적 실천과 연결되면 진(동기), 선(진행), 미(결과)로 표현된다는 식으로 파악하는 대목에서 (비록 미완의 구상이지만) 그 자취가 역력하다.22

 

4. 나오는 말: 변혁적 중도의 잠재력

 

이론가이자 정책가인 그의 역량은 역설적으로 해방공간에서 큰 시련을 겪는다. 1945년 12월 귀국한 소앙이 직면한 현실은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분할통치하는 현실에서 신탁과 반탁의 논란으로 위기가 고조된 상황이었다. 그는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아 삼균주의에 기초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미군정과 좌우세력이 길항하는 해방공간에서 분투하였다. 처음에는 임시정부의 합작 상대를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는 좌익세력으로 제한했지만, 좌우합작이라는 절박한 과제를 구현하기 위해 점차 그 대상을 넓혀갔다. 그리고 유엔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하자 남북협상에 나섰다. 다만 그 성과는 미미했다.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나서 소앙의 정치노선은 남한만의 총선거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커다란 전환을 보여준다. 나라만들기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제헌헌법에 삼균주의 이념인 균등주의 이상이 반영되었으니, ‘복국’이 완성되었고 이제는 ‘건국’ 단계로 들어간다고 판단한 셈이다. 그리하여 오래 몸담아온 한국독립당 및 김구와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사회당을 결성하면서, 1949년 7월 25일 민족진영강화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남북협상파 및 중간좌파 인사들도 참여하게끔 개방했다. 이윽고 1950년 5월 30일 시행된 총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해, 전국 최고득표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정부수립 후 여당이 된 이승만 세력을 견제하는 야당세력으로서 현실정치에 등장할 동력을 만든 것이다.

선거과정에서 그는 삼균주의 이론가로서 당면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준비된 정책가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23 삼균주의의 중장기 전망을 단기과제에 녹여낸 정책 대안이었다 하겠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소앙은 미처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납치되어, 삼균주의의 건국기를 실행하겠다는 포부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이러한 역정을 돌아보면, 소앙이 직면한 이념과 현실의 거리가 안타깝다. 그는 분단현실에서 한반도 남쪽의 대한민국을 기반으로 한반도 체제의 변혁을 위해 중도세력을 널리 확장하려는 방략으로 삼균주의를 지키면서 선거에 참여해 의회주의를 채택했다. 이는 정치적 실천에서 원칙과 현실의 조화를 감당해야 하는 정치가의 고심에 찬 선택으로서 역사적 맥락에 따라 양 극단을 배제하는 ‘정도의 중간길’을 추구한, 변혁적 중도에 부합한 노선이라 하겠다.24

비록 분단의 희생물이 되었지만 오히려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사상 자산으로서 소앙 사상의 잠재력은 살아 있다. 특히 대한민국 기반 위에서의 변혁적 중도의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자산으로 소중하다. 나라만들기의 단계적·점진적 과정에 대한 투철한 인식에 따라 “새로운 표본”으로서 “창작적 국가”를 인류사에 제시하고자 한 삼균주의는 한국사회의 전통적 자산을 활용해 한층 더 높은 차원의 민주주의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변혁적 중도의 계보에서 중요한 고리이다.25 그의 사상이 갖는 매력과 의미를 세계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유하여 저마다 개인과 사회를 돌아보고 스스로 변혁하는 계기를 촉진하는 것은 또 하나의 일감이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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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작과비평』 ‘K담론을 모색한다’ 연속기획 네번째 편인 대화 「한국사상이란 무엇인가」는 한국사상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 ‘경세적 문제의식’에 드러나는 실천성에 주목하고 ‘나라다운 나라만들기’를 위한 인식틀로서의 ‘경세’와 ‘민본’에 보편 추구가 함축되어 있다는 주장이 특히 관심을 끈다. 백민정·임형택·허석·황정아 대화 「한국사상이란 무엇인가」, 『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
  2. 김인식 『조소앙 평전』, 민음사 2022, 8면.
  3. 백낙청은 근대세계체제의 변혁을 위한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 이를 한반도 차원에서 실현하는 분단체제극복 작업, 그리고 한국사회에서의 실천노선인 변혁적 중도주의 간의 순환구조를 강조한다. 그 세 고리의 하나인 변혁적 중도는 변혁적(탈식민체제, 분단체제극복) 나라만들기를 위해 역사적 맥락에 따라 양극단을 배제하는 ‘정도(正道)의 중간길’을 추구하는 이념이자 세력연대의 방법론인 운동노선이다. 이를 위해서는 집단적 실천과 더불어 각 개인의 마음공부가 필수적이다.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259면.
  4. 백영서 「경계를 횡단하는 조소앙과 변혁적 중도주의」, 강경석 외 『개벽의 사상사: 최제우에서 김수영까지, 문명전환기의 한국사상』, 백영서 엮음, 창비 2022, 224면.
  5. 앞의 대화, 황정아 295면.
  6. 그의 구상을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로 불러봄직하다.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는 “한반도 근대 특유의 역사로 인해 유난히 긴 세월에 걸쳐, 유난히 복잡한 경로”를 거쳐,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왔고 아직도 미완의 과제”임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다. 긴 역사의 흐름에서 국민국가 형성의 복잡성을 파악하면서 각 단계의 과제도 충실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이 관점에서 보면 소앙의 사상이 한반도 현실에 직핍한 창의적 성취임이 잘 드러난다. 백낙청, 앞의 책 55면, 강조는 원문.
  7. 1920년 말부터 6~7개월간 체류한 기간은 내전으로 인한 혼란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꾸쯔끄파 고려공산당이 곧 충돌하는 자유시참변(1921.6.28) 직전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목격한 것이 그가 공산주의에 기울지 않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인식, 앞의 책 232면.
  8. 조소앙 「한국의 현황과 혁명의 추세(韓國之現狀及其革命趨勢)」, 『소앙선생문집(素昻先生文集) (상)』, 삼균학회 엮음, 횃불사 1979, 59~67면. (이하 『문집(상·하)』로 표기, 글의 제목은 한글식으로 풀어 쓰고 원제의 한자어를 병기함.)
  9. 대종교를 자신의 정치사상의 바탕에 둔 안호상이나 안재홍 같은 인물이 제기한 일민주의 및 신민족주의 정치이론이 정치·교육·경제 3영역에서 처방을 내놓고 있는 데서도 그 맥락이 확인된다.
  10. 「한국독립당 제1차 전당대표대회 선언(韓國獨立黨 第1次 全黨代表大會 宣言)」, 『문집(상)』 276면.
  11. 김인식, 앞의 책 369면.
  12. 「건국기원절 기념회의 의의(建國紀元節 紀念會의 意義)」, 『문집(상)』 260면.
  13. 「한국문원서(韓國文苑序)」, 『문집(상)』 349면.
  14. 「극동 민족해방의 첫 목소리로서의 ‘삼일’절(‘三一’節爲遠東民族解放之第一聲)」(1943), 『문집(상)』 185면. 이 문집의 해당 글에는 ‘開幕(개막)’으로 되어 있는데 『대공보(大公報)』 충칭판 1943년 3월 1일자에 실린 초출본에 근거해 ‘閉幕(폐막)’으로 바로잡았다.
  15. 「태평양전쟁과 한국문제(太平洋戰爭與韓國問題)」(1945), 『문집(상)』 147면. 소앙의 역사인식은 오늘날 미국 역사학자 커밍스(B. Cummings)의 다음과 같은 발언과도 통한다. “20세기는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치고 전세계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는 가운데 시작되었으며, 그 세기가 진행될수록 일본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재앙으로 이끌려갔다.” 브루스 커밍스 「독특한 식민지, 한국: 식민화는 가장 늦게, 봉기는 가장 먼저」, 백낙청 외 『백년의 변혁: 3·1에서 촛불까지』, 백영서 엮음, 창비 2019, 86면.
  16. 「한국독립당 당 이념 해설(韓國獨立黨黨義解釋)」, 『문집(상)』 218면.
  17. 「당원동지들에게(告黨員同志)」(1935.10.5), 『조선통치사료(朝鮮統治史料) 10』, 김정주 엮음, 토오꾜오(東京): 한국사료연구소 1970, 760면.
  18. 백낙청, 앞의 책 67면. 소앙이 「건국강령」 초고 말미에 ‘자본주의 소멸’ 등을 메모한 것의 의미를 둘러싼 논의와 관련해, 백낙청은 “소앙 자신의 입장은 이중과제론에 부합한다”고 본다. 소앙이 국민국가 너머를 전망한 것도 이중과제론적 문제의식으로 간주된다. 즉 “소수가 다수를 통치하는 착취기계로서의 국가 또는 정부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다수가 다수 자신을 옹호하는 자치 기능의 임무를 충실하게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독립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다.”(「당원동지들에게」)라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파괴성을 직시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삼균주의를 통해 추구하였다.
  19. 해방 일년 후에 미군정청 여론국이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를 찬성한다는 답변이 70퍼센트에 달했다. 그리고 해방공간의 여러 정파 지도자의 국가건설론을 비교한 연구성과에 따르면, 계급대립의 조건 자체를 없애려 하고, 비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선택했으며, 합법 평화의 방법으로 사회혁명을 추진하려 한 공통점이 있다. 김인식 『광복 전후 국가건설론』, 독립기념관 2008, 13, 15~17면. 또한 천도교의 청우당 지도부는 ‘조선적 신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주창하였고, 원불교 2대 종사 송규(宋奎)가 발표한 「건국론」(1945)에 나타난 중도주의도 이와 유사하다.
  20. 이상의 서술은 이지원 「1930년대 안재홍의 조선학연구에서 근대정체성 서사와 다산 정약용」, 『역사교육』 140호, 2016, 270, 291면.
  21. 「당원동지들에게」 766면.
  22. 「한국독립당 당이념의 연구방법(韓國獨立黨黨義硏究方法)」 205면. 「대한독립선언서」에서도 독립이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소앙의 진선미 융합에 대한 인식은 그가 만든 글자인 身眞(진, 身+眞)과 (선)에 압축되어 있다. 身眞이란 생명의 근원이요 신과 영이 깃드는 곳인 몸에 진실함을 의미한다. 은 보는 것과 아는 것에 착함이 있다는 뜻이다. 身眞과 이 합쳐진 것이 우주의 본체이다. 이는 서양의 진선미의 합일과는 다른 차원의 인식이다. 또한 해방공간의 격동의 현장에서 그가 설립한 삼균주의학생동맹의 「선언」(1948.3.7)에서 진선미의 융합 및 개인의 단련을 요구한 사실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문집(하)』 101~103면.
  23. 「차기 총선거와 나의 정치전망(次期 總選擧와 余의 政局觀)」(1950.4.1), 『문집(하)』, 131~41면.
  24. 김대중은 정치가라면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함께 가져야 한다는 입장에서 단독정부 수립 시 대통령선거 후보로 참여할 선택을 하지 않은 김구를 “위대한 애국자였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기획 『김대중 육성 회고록』, 한길사 2024, 67~68면.
  25. 이 계보의 연장선에 김대중도 있다. 그는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더 넓고 높은 차원의 민주주의, 곧 지구적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자원과 가능성으로 아시아사회의 전통적 장점을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남주 「김대중사상과 K민주주의」,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86~87면.
  26. 필자가 소앙 사상을 통해 쑨원의 아시아 인식을 비평해본 것은 그러한 시도에 속한다. 백영서 「孫文의 아시아주의의 궤적과 현재성: 동아시아론 계보상의 위치」, 『동방학지(東方學志)』 제211집, 2025 참조.

백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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