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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기후붕괴 시대, 더 많고 더 깊은 서사적 접근을

 

 

김현우 金賢雨

탈성장과 대안연구소 소장. 저서 『정의로운 전환』 『안토니오 그람 시』, 역서 『블루 뉴딜』 『미래는 탈 성장』 『녹색 노동조합은 가능하다』 등이 있음.

nuovo90@hanmail.net

 

 

1. 전환 담론의 적응과 전환

 

우리는 여러모로 비상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전환’을 논의하고 있다. 이 전환은 누군가에겐 ‘정의로운 전환’ 또는 ‘체제전환’이라 명명되고, 12·3 계엄 이후 광장의 토론 속에서는 ‘사회대개혁’으로 모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무엇으로부터의 전환인지는 대체로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한국적인) 자본주의체제와 근대로부터의 전환이라는 합의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합의는 충분하거나 견고하거나 혹은 구체적이지 않다. 그리고 어디에서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단편적인 상황이다.

백낙청 선생과 『창작과비평』이 여러차례 제기하고 발전시켜온 ‘근대의 이중과제’1라는 진단과 방법으로서의 ‘변혁적 중도’는 이런 공백을 환기하고 전환의 이정표를 확인하려는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그 논의는 지금 광장의 목소리들을 사회변화의 큰 구상으로 묶어내는 데에도 좋은 얼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쉬운 것은, 이 얼개를 비상상황으로 연결하고, 다시 비상한 현실에 대한 인식 위에서 절박하면서도 효능감 있는 행동으로 연결하는 장치 또는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하지 않나 하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이중과제론과 변혁적 중도 논의가 그런 새로운 구체성을 갖는 담론이 될 수 있을지를 살피며 이야기를 풀어내보려 한다. 이를 위해 특별히 주제로 삼는 것은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붕괴’라는 상황 그리고 탈성장 미래라는 조망이다. 이 주제들은 우리가 처한 현재에 대한 진단과 미래를 위한 청사진 모두에서 너무도 중요하지만 대체로 회피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다루는 것은 이중과제론에 대한 토론만을 위함이 아니며, 여러 방식으로 쏟아져나오는 수많은 전환 담론에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근대에 대한 ‘적응’과 ‘극복’을 요청했던 이중과제론이 우리의 변화하는 시대에 대해서도 스스로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전환할 수 있다면 다른 전환 담론에도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 정상성의 종말 시대의 적응은?

 

그런데 한국에서 근대의 이중과제가 제기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체제의 도래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를 계기로 선포된 ‘역사의 종언’ 그리고 탈근대라는 일방적인 규정에 대한 반박과 균형 잡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대에 적응하면서 또한 극복해야 한다는 환기는 모종의 개량된 거대담론의 요청이었다. 또 하나는 당시 한국사회의 변혁론에 대한, 예를 들어 80년대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대체하면서 넘어설 담론의 요청이었다. 백낙청은 근대에는 성취뿐 아니라 식민지 수탈, 노동착취, 환경파괴 등 바람직하지 않은 특성들도 있음을 주목하며 간단한 ‘성취’가 아닌 고민에 찬 어려운 ‘적응’을 주문했다. 그리고 적응과 극복은 하나의 단일과제로서 병행되어야만 실효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중적 단일기획은 ‘분단체제’라는 한반도적 국면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한다는 구상으로 나아갔다. 한반도평화와 새로운 민주주의, 성장주의를 넘어서는 경제 등을 아우르는 체제를 만드는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중과제의 문제의식은 우리가 지난해부터 겪고 있는 정치적 격변기를 위기가 아닌 전환의 기회로 삼아 새로운 ‘2025년체제’ 모색으로 이어지고 있다.2 하지만 근대의 이중과제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벌써 대략 한 세대가 지났고, 이제는 과거와 같은 거대담론을 되풀이하는 이도, 포스트 담론을 무한반복하는 논자도 드물어졌다. 그리고 87년 민주화운동과 구소련의 기억이 압도적이었던 세대와는 다른 경험을 가진 새로운 세대가 응원봉의 광장에 나온 지금이라면, 이러한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는 어느 정도 유효한 것일까? 더불어 한반도(남북관계)의 변혁을 포함한 새로운 체제의 선언조차 자칫 진부한 일반론의 되풀이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까?

또 하나 던지게 되는 물음은 이러한 이중과제가 안일하고 정태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이중과제는 지금과 같은 근대적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해서 적응과 극복을 한다는 것인데, 이를 잘못 받아들일 경우 자칫 이중과제론이 비판했던 성취 중심으로만 접근할 수 있겠다는 우려이다. 무엇보다 세상은 더이상 성취와 극복으로 지양할 수 있는 대상인, 평탄한 ‘지금 이대로의’ 세상이기 어렵게 되었다는 중요한 변화 때문이다.

우리가 접하는 ‘인류세’ ‘기후 비상사태’ ‘정상성의 종말’ 등의 표현들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붕괴상황3이라면, 적응과 극복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실 이중과제론은 지금의 이런 붕괴와 비정상성에 대한 진단이 뚜렷하지 않다.

2024년 12월 3일 이후 다수의 시민들이 희구한 변화는 사회변혁의 레퍼토리로 회자되는 남태령의 여러 이야기들을 포함하는 것이었지만, 체제의 관성은 그런 요구들의 종착지를 모종의 ‘정상상태로의 복귀’로 제한한다. 반면 그런 정상으로의 복귀를 넘어서 더 큰 전환에 대한 지향을 포함하는 이중과제를 말하는 것이 2025년 변혁적 중도의 노선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마크 샤피로(Mark Schapiro)가 말한 정상성의 종말은 일반 민주주의체제와 정부로의 복귀를 말하는 ‘정상성(正常性, normality)’이 아니라, 어떤 상태가 안정되거나 예측 가능하게 한결같다는 뜻의 ‘정상성(定常性, stationarity)’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런 정상성의 종말 상태는 정상적 민주주의의 토대마저 흔들 가능성이 크다. 이는 『기후 리바이어던』의 저자들이 다소 비관적으로 전망한 것이기도 하거니와,4 실제로 트럼프는 더욱 고약한 현실의 ‘기후 베헤모스’(기후 악당)가 되어 돌아왔다.

사실 정상성의 종말에 대한 경고는 1972년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 보고서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고서의 전망은 대부분 들어맞고 있고, 이제는 지구위험한계선 9개 중 6개가 돌파되었다.5 포스트-근대가 아니라 포스트-정상성의 시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이 정상성의 종말 상태는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지속되며 상시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성의 종말 시대에 적응과 극복이라는 이중과제의 질문은 어떻게 다시 쓰여야 할까?

‘심층적응’(deep adaptation)은 그러한 적응의 곤란함 또는 거의 불가능함을 고려한 새로운 개념이다. 『심층적응』의 저자들은 유엔 기후체제에서 기후변화 대응의 두 축으로 삼아온 ‘감축’과 ‘적응’이라는 프레임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6 기후문제에 대한 주류적 대응은 지구온난화의 티핑포인트로 여겨지는 ‘산업혁명 이후 지구 평균온도의 1.5도 상승’이라는 제한선을 우리가 어떻게든 지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탄소배출을 ‘감축’하면서 동시에 이미 일어나거나 예상되는 기후변화의 피해를 예방하고 ‘적응’하는 갖가지 방책을 강구한다. 그러나 심층적응이라는 말은 그러한 적응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심층생태론’(deep ecology)에서 따온 ‘심층’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그것이 가리키는 바는 심각하다. 우리는 이미 지구온난화 티핑포인트를 넘어섰을 가능성이 높으며, 더 많은 기후재난이 발생할 뿐 아니라 추가적 노력으로도 과거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더욱 총체적인 사회 및 정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진단 아래 우리는 기후비극이라는 ‘지도 없는 세계’를 살아나가야 한다. 이렇게 답을 제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가능한 적응은 ‘심층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다만 저자들은 그래도 가능하고 필요한 변화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회복력, 포기, 복원, 타협이라는 네가지 의제로 답을 제시할 뿐이다. 간단한 성취도 극복도 가능하지 않은 실존적이고 집단적인 적응의 모색이다.

 

 

3. 기후붕괴와 전환의 방식

 

2015년 빠리협정과 후속 논의에서 국제사회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지구온난화의 티핑포인트는 그전에 다가올 공산이 크고 2030년 무렵이면 이미 늦었음을 확인하는 때가 될 것 같다. 물론 완전히 늦어버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티핑포인트는 지구시스템의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의미하고, 물리적으로는 감축보다 적응의 과제가 더욱 전면화될 수 있다. 이런 적응 역시 ‘지구 평균온도 1.5도 상승’이라는 억제목표에 대한 성공을 전제로 하는 적응이 아닌 가늠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심층적 적응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주류 담론 및 정책의 감축과 적응 전략이 얄팍하고 단편적이라는 점은 숱하게 지적되고 비판되어왔다. 이에 맞서 2019년을 전후로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로 상징되는 세계적인 대중 기후운동의 물결이 있었고 여섯번째 대멸종에 저항하는 운동에 대한 공감이 확산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연합의 그린뉴딜과 같은 상당한 정책적 변화도 있었다. 그사이 기후재난은 세계 도처에서 그리고 다수의 시민 가까이에서 경험되었다. 이런 위기는 분명히 전환의 기회를 가져온다. 다만 유효한 대응행동은 계속 지연되고 있고, 유엔과 각국 정부들은 무력한 기후 리바이어선과 베헤모스의 춘추전국 상태다.

이런 난맥상 앞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담론이라면 더 예각화되고 틀을 갖추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환경운동가 레스터 브라운(Lester R. Brown)은 오래전부터 사회변화의 세가지 모델을 설명했다. 하나의 모델은 외부적 사건에 따른 붕괴에 대응하는 ‘진주만 모델’이다. 미국이 진주만공습을 당하고 재빨리 전시 대응태세로 전환했던 것에서 착안한 명명이다. 두번째 모델은 점진적 변화를 통해 사회적 티핑포인트를 넘어서는 이른바 ‘베를린장벽 모델’이다. 세번째 모델은 풀뿌리운동의 압력과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결합하는 ‘샌드위치 모델’이다. 브라운은 중대한 사회변화에는 이 세가지 모델이 모두 필요하며, 기후문제의 경우 붕괴가 임박하면 국가와 시민들이 전면적인 전환에 나서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기대하면서 다만 진주만 모델에만 의지한다면 때를 놓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7 즉 진주만 모델은 전환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보았듯이, 기후재난이 더욱 심각해지더라도 전환의 희미한 희망을 밀어내고 재난을 규제완화와 민주주의 파괴의 기회로 삼는 ‘쇼크 독트린’이 확산될 가능성도 높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전환이 무엇인지 다시 정리해보자. 기후대응의 양대 축이라고 하는 ‘감축과 적응’ 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조효제의 주문8은 좋은 틀을 제공한다. 그는 감축에 있어서는 온실가스 감축과 사회불평등 감축을 함께 달성하고, 적응에 있어서는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과 녹색사회로의 전환을 함께 추진하는 ‘이중 감축과 이중 적응’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심층적응 개념은 여기에 물리적이고 사회정치적인 붕괴 상태라는 조망을 더한다. 나아가 ‘변형적 적응’(transformative adaptation)이라는 아이디어와 실천영역을 제안하는데, 이 접근방식은 탄소를 감축하는 동시에 기존 생태계의 안정성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생산과 교역, 생활방식의 체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또는 사회붕괴가 확실하다고 보고 그에 맞춰 대응해야 한다는 심층적응과 붕괴를 피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이라도 놓지 않고 분투해야 한다는 변형적 적응이라는 ‘두 마리 말에 올라타는 구도’가 필요하다고 설명되기도 한다.9

 

 

4. 불가능한 청사진을 만드는 서사적 접근

 

사회붕괴의 세상은 지도 그리기가 불가능한 세계라지만, 우리는 그래도 어떤 지도를 가져야 한다. 하다못해 방위를 알 수 있는 나침반이라도 있어야 한다.

개인적인 10여년 전의 기억 하나를 말하자면,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고운’(고등학생운동)을 다룬 후일담 소설을 계기로 열린 북토크에 가게 되었다. 고등학생운동의 경험이 없는 내게는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생소하기도 했거니와 고운에 참여했던 후배가 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어린 자신들이 무서움을 참아가면서 고운을 할 때, 사회운동 이론을 잘 알지도 못했고 이른바 지도선이 확실하지도 않았지만 자신들은 언제나 ‘전체 운동’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그 전체 운동은 아마도 비합법적 전위정당이 이끄는 혁명적 조직운동을 말하는 것이었겠지만, 몇몇 그룹이 존재하기는 했어도 전체 운동의 구체적인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시 사회운동에는 고운이 좌표로 삼을 별자리와 그들 자신도 일부를 채워나갈 지도가 있었다는 의미고, 운동 전체의 부피와 윤곽이 있었다는 뜻이겠다.

기후운동과 체제전환운동도 마찬가지다. 감축과 적응, 또는 이중의 감축과 이중의 적응을 성공하게 해줄 유일한 길이나 확실한 작전지도는 없다. 불확실하지만 유력한 경로들과 운동의 사례들이 무수한 청사진이 될 뿐이며, 그것이 겹쳐져서 만들어내는 부피감과 농도, 많은 시행착오와 성공들이 길을 만들고 넓힐 것이다.

에리카 체노웨스(Erica Chenoweth)의 ‘3.5% 법칙’은 운동의 최전성기에 사회구성원의 3.5% 이상이 참여한 사회운동은 비폭력 평화운동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경험법칙이다. 영국의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 XR)은 이 3.5% 법칙을 자신의 활동을 평가하고 전략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3.5%가 기존의 사회적 관성과 고착 상태를 바꾸는 임계점인 것이다. 이는 지구위험한계선 연구에서 고안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사회변화의 티핑포인트’로 연결된다. 전통적인 사회운동과 이론연구자들이 아니라 기후공학자와 환경경제학자들이 더욱 현실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제안에 근접하고 있는 모습이다.10 그리고 이런 제안들이 2050년 전후까지의 시나리오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도 참조할 만하다.11

이런 시나리오들은 한편이 아니라 여러편이며, 누가 어떻게 어떤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 즉 서사적 형태를 띠기 때문에 힘을 갖는다. 에릭 홀트하우스(Eric Holthaus)의 『미래의 지구』는 그런 점에서 무척 시사적이다.12 기후변화를 다루는 언론인인 그는 비극적 전망을 제출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음을 절감했다. 나아가 획기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종말을 막을 뿐 아니라 ‘우리가 지킬 가치가 있는’ 미래의 모습을 스스로 상상하는 데에도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판인식과 함께 획기적 상상력을 집단적으로 제고하는 일은 우리를 그 자체로 충분히 혁명적인 과학을 활용하는 현실적 급진주의자로 만든다. 홀트하우스는 인류가 2050년쯤 가까스로 기후붕괴를 막았다고 가정하며, 그 이전인 2020년부터 매 10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공상과학처럼 펼쳐 보인다. 그의 시나리오에서 2050년 우리는 새로운 기술과 영성의 시대를 맞이한다. 이게 개벽(開闢)이 아니면 무엇이 개벽이겠는가?

최근 여론조사는 한국 유권자의 3분의 1 정도가 기후위기 대응을 중요한 투표 기준으로 삼을 용의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응답 결과와 실제 선거에서 그러한 선택이 가능한지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무엇보다 이런 기후시민들을 어떻게 사회변화를 가져올 3.5%라는 임계치로 만들고, 2050년을 넘어서 미래로 나아갈 동력으로 만들지에 대한 우리의 서사가 부족한 것이다.

 

 

5. 적당한 성장인가, 도넛인가

 

이 서사적 접근을 채울 마지막 요소는 무엇이 주춧돌과 기둥인지, 그리고 퍼즐의 조각이 될 수 있는지 하는 것이다. 이는 백낙청이 제기한 바 있는 ‘적당한 성장’13과도 관련된다.

1972년 「성장의 한계」로부터 최근 지구위험한계선에 이르는 연구들의 데이터와 결론은 지구의 물리적 한계를 일관되게 가리킨다. 그리고 이는 지구적 불평등과 지역 및 집단 내 불평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한계와 결합된다. 또한 지구시스템 내에서 작동하는 경제활동이 물질적 처리량(throughput)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환경경제학의 주장은 경제적 한계까지 알려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면 되는 게 아니라, 지구적으로 티핑포인트를 넘지 않게 ‘감축’하고 모든 국가의 일인당 배출량이 동일한 값에 ‘수렴’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오브리 마이어(Aubrey Meyer)가 1990년대에 제안한 ‘감축과 수렴의 원칙’이다.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의 ‘도넛 경제학’ 역시 지구위험한계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사회적 기초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제안이며, 앞서 언급한 홀트하우스와 로마클럽 그리고 『지구의 절반을 넘어서』—이 책의 원제는 ‘지구의 절반 사회주의’(Half-Earth Socialism)이다—저자들 역시 그들의 결론이 가리키는 ‘탈성장’이라는 표지판을 감추지 않는다.

‘적당한 성장’은 탈성장에 반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탈성장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하는 전략”일 수 있다.14 실제로 제이슨 히켈(Jason Hickel) 등 최근 활발히 논의를 이끌고 있는 탈성장 이론가들은 모든 것의 마이너스 성장이나 제로 성장이 아니라, 지구의 경계들 내에서 물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성장할 것과 감축할 것을 분별하여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 또는 세계 권역 수준의 계획과 결합해야 한다는 제안이 ‘성장 없는 그린뉴딜’이다.15 때문에 백낙청이 고(故) 김종철과의 ‘미완의 토론’에서 적당한 성장 개념이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데 동의한다.16 그러나 적당한 성장 개념이 생태물리적이고 사회적인 ‘도넛’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한 해명은 다소 부족했던 것 같다.

다만 논의를 의미있게 전진시키려면 개념 자체를 엄밀하게 하는 것보다는 이를 붕괴에 대응하고 전환을 이끄는 총체적 프로그램의 묶음으로 제시하고 그것이 유용한 서사적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이 더 힘을 갖는다. 북미의 소장 탈성장 연구그룹이 경제 민주주의와 에너지 민주주의, 노동시간 단축과 충족성, 초과 부의 재분배 등을 체제변화를 위한 기후의제로 요약하는 것이나,17 독일의 신경제아이디어연구소(Konzeptwerk Neue Ökonomie)에서 몇년 사이에 실현할 수 있는 연대의 미래를 위한 여덟가지 조치로 공정한 에너지 가격, 주택의 공적 분배, 사회생태적 세금정책, 자동차 없는 도시, 사회보장, 기후 부채 및 배상, 노동시간 단축, 공정한 토지정책을 자리매김하는 것18은 좋은 참고가 된다. 전자의 연구는 이에 더하여, 과학과 기술 역시 빅테크 기업의 지구공학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맥락에서 이용될 수 있음에 주목한다. 이들은 과소비와 기존 사회의 재생산에 저항하고 주류의 정당성을 약화하고 권력에 도전하는 방법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 그람시주의 문화정치, 생태사회주의의 조류들을 재소환하여 엮어 낸다.

요컨대 서사를 짓는 데에 반드시 새로운 이론과 개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과거 한국에서 논의된 많은 이론적 자원들과 지금의 사회대개혁 과제가 변화를 위해 배열되고 사람들의 감각을 일깨우도록 맥락화되는 내러티브를 만들어내야 한다.

 

 

6. 사회대개혁이 허장성세가 되지 않으려면

 

2025년의 한국으로 돌아와보면 새 정부가 출범했으나 새로운 체제나 개벽이 아닌 ‘먹사니즘’이라는 성취와 적응의 구호가 압도적인 게 현실이다. 정부와 주류 담론 입장에서 적응은 GDP(국내총생산) 지표의 회복이고 극복 대상은 낡은 규제다. 인구절벽과 지방소멸을 맞닥뜨린 지역과 불안한 노년과 불안한 청년, 그러니까 어디서도 안심할 수 없는 거의 모든 계급과 성별의 시민들은 좋았던 과거로 기억되는 정상성의 회복을 바라며 경쟁과 생존에 매달려야 할지 모른다. 지난 겨울과 초봄 광장을 이끌었던 ‘사회대개혁’이라는 이름도 실은 이러한 현실과 이중 또는 삼중 과제 사이의 커다란 간극에 대한 고민에서 붙여진, 따라서 너무 거창한 명칭은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먹사니즘에 대한 호응과 수용 역시 어떤 기반과 상황의 반영이고, 우리는 먹사니즘과 변혁·전환·개벽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아마도 변혁적 중도는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그 곳곳의 다리이자 또 높고 낮은 곳을 연결하는 구조물이 되는 것, 즉 폭넓은 감각과 집단을 모으는 일일지 모른다. 이런 ‘중도’의 노력이 없다면 다리는 이어지지 못한다. 하지만 다리에도 콘크리트 교각이 있는가 하면 밧줄이나 와이어로 지지되는 현수교도 있듯이, 하나의 올바른 다리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도는 다리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지금 이대로의 세상이 아닌 변혁을 향해가야 한다.

붕괴하고 있는 기후 속에서 우리는 막막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도 없는 세계에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인식의 ‘지도 그리기’를 함께 해나가야 한다.19 이 지도는 관념과 감각의 지도이므로 지도 그리기는 서사 만들기와 함께 이루어진다. 대략 한 세대에 걸친 변화의 모습과 필요한 많은 것을 제안할 수 있는 전환의 서사가 에너지전환과 탄소중립, 그린뉴딜, 나아가서 개헌의 내용과 방법을 든든하게 받치는 교각과 와이어를 이룰 수 있다. 이런 내러티브가 없다면 사회대개혁도 물 위에서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관념이나 순치된 조치로 흩어지게 될 것이다. 변혁적 중도는 무엇보다 많은 이야기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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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에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이라는 ‘근대의 이중과제’론은 주로 다음 책을 참고했다.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2. 백낙청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백낙청·이남주 특별대담 「2025년체제, 어떻게 만들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3. 기후위기와 관련된 사회적 붕괴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들을 볼 수 있다. 마크 샤피로 『정상성의 종말』, 김부민 옮김, 알마 2019; 파블로 세르비뉴·라파엘 스테방스 『붕괴의 사회정치학』, 강현주 옮김, 에코리브르 2022; 손희정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메멘토 2024.
  4. 조엘 웨인라이트·제프 만 『기후 리바이어던』, 장용준 옮김, 앨피 2023.
  5. 「이제 지구는 인간에게 안전하지 않다, 인간 때문에」, 한겨레 2023.9.14. 지구위험한계선(planetary boundaries)는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땅 △담수 △비료 사용으로 인한 생물지구화학 흐름 △미세플라스틱·핵 등 신물질 △해양산성도 △대기질 △오존층에 대해 평가한다. 이 중 해양산성도, 대기질, 오존층을 제외한 나머지 6가지가 위험수준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6. 젬 벤델·루퍼트 리드 『심층적응』, 김미정·김현우·추선영·하승우 옮김, 착한책가게 2022.
  7. Lester R. Brown, Plan B 3.0, W. W. Norton & Company 2008.
  8. 조효제 『탄소 사회의 종말』, 21세기북스 2020.
  9. 젬 벤델 외, 앞의 책.
  10. 요한 록스트룀·오웬 가프니 『브레이킹 바운더리스』, 전병옥 옮김, 사이언스북스 2022.
  11. 이런 제안과 시나리오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상드린 딕손-드클레브 외 『모두를 위한 지구』, 추선영·김미정 옮김, 착한책가게 2023; 트로이 베티스·드류 펜더그라스 『지구의 절반을 넘어서』, 정소영 옮김, 이콘 2023.
  12. 에릭 홀트하우스 『미래의 지구』, 신봉아 옮김, 교유서가 2021.
  13. 백낙청 「기후위기와 근대의 이중과제」, 앞의 책.
  14. 같은 글 350면.
  15. Riccardo Mastini, Giorgos Kallis and Jason Hickel, “A Green New Deal without growth?,” Ecological Economics 179, 2021.
  16. 백낙청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 앞의 책.
  17. Diana Stuart, Brian Petersen and Ryan Gunderson, A Climate Agenda for System Change, MayFly Books 2023.
  18. 신경제아이디어연구소 홈페이지(konzeptwerk-neue-oekonomie.org/bausteine-fuer-klimagerechtigkeit) 참조.
  19. ‘지도 없는 세계를 탐험하기’는 『심층적응』에서 나온 표현이다. 그리고 기후위기 시대에서 ‘인식의 지도 그리기’는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표현을 빌려 다음 글에서 썼던 표현이다. 졸고 「2025년 인식의 각주구검과 우리의 러브레터」, 『사상계』 창간 72주년 기념특별호·재창간 1호(2025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