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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반둥의 유산
반둥회의 70주년에 부쳐
백지운 白池雲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저서 『항미원조』, 공저서 『중국과 비중국 그리고 인터 차이나』 『아시아의 20세기 지역변동과 지역상상』 등이 있음.
jiwoon-b@hanmail.net
1. 제3세계의 기억
1946년 3월 24일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도시 반둥에 화염이 솟구쳤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그곳에 들어온 영국군은 도리어 일본군을 앞세워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세력을 제압했다. 영국군의 최후통첩을 받은 인도네시아 인민보위군(TKR)과 청년단(Pemuda)은 항복하느니 차라리 도시를 초토화하는 길을 택했다. 25만여명의 거주민이 집과 일터를 버렸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 다이너마이트 폭음이 연발했다. 도시의 절반이 사라졌다. 이날 불길에 휩싸인 반둥의 모습이 어느 인도네시아인 기자에 의해 「반둥, 불의 바다」(Bandung, Sea of Fire)라는 글로 기록되었고, 그 일부가 다시 「할로 할로 반둥」(Halo Halo Bandung)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되었다. 「할로 할로 반둥」은 영국-네덜란드 제국주의에 대한 인도네시아 민족해방운동의 상징으로 섬 전역에 퍼졌다.1
그로부터 9년 후인 1955년 4월 제국주의로부터 갓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29개국의 대표단들이 ‘불의 도시’ 반둥으로 모여들었다. 역사적인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가 열린 것이다. 일본 패망 후 영국군의 도움으로 돌아온 네덜란드는 유엔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옛 식민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인도네시아는 1945년 8월 17일 독립선언 후 4년 남짓 수까르노(Sukarno)를 포함한 많은 정치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망명하는 등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했다. 1949년 12월 마침내 수까르노를 대통령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한 인도네시아는 인도, 버마(미얀마), 실론(스리랑카), 파키스탄과 더불어 반둥회의의 주최국이었다. 회의 장소로 반둥이 선택된 의미를 비자이 프라샤드(Vijay Prashad)는 이렇게 말했다. “불타버린 도시를 되찾은 세계 3분의 2의 인민들에게 반둥은 그들이 그리는 형상대로 자신의 땅을 보듬고 재건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2 반둥회의의 개막연설에서 수까르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인민, 특히 인도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해 보여준 연대에 감격을 표했다. 네덜란드의 재식민화 기도에 맞서 인도의 수상 네루(J. Nehru)가 1949년 1월 뉴델리에서 독립국대표회의를 열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지지하는 제3세계의 단결된 목소리를 조직했던 바다. 수까르노는 “위험에 빠진 동료 아시아 민족을 구출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인민이 보여준 이같은 연대는 이제껏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 찬탄했다.3
신생국 인도가 인도네시아 독립에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은 제국주의의 굴레 아래 기구하게 얽혔던 두 나라의 운명과 무관치 않다. 인도네시아 문제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영국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는데 그 희생자의 상당수는 대영제국의 ‘인도군’이었다. 인도인 부대 23사단이 2차 세계대전 후 14개월간 인도네시아에서 입은 타격은 세계대전 중 버마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4년보다 컸다.4 명분없는 전투에 투입된 인도 병사들 사이에 불만이 끓어올랐고 그중 일부는 인도네시아 편에 가담하기도 했다.5 산지브 산얄(Sanjeev Sanyal)은 ‘문명화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영국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했다’는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식 서술에 감춰진 인도 독립의 심층적 요인은 사실 대영제국의 보루였던 인도군의 충성심 와해였다고 말했다.6 이처럼 인도네시아 반제투쟁은 결과적으로 대영제국의 해체를 앞당겼으며, 인도와 버마의 독립에도 내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건대 반둥에서 제창된 반제·반식민 연대는 결코 추상적인 슬로건이 아니었다.
비록 1회로 그치고 말았지만 반둥회의가 던진 ‘아시아·아프리카 연대’의 화두는 세상에 긴 파장을 남겼다. 냉전의 파고를 타고 아프로·아시안 인민연대기구 창설(AAPSO, 아프로·아시안 인민연대회의에서 결의, 이집트 카이로, 1957),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인민연대기구 창설(OSPAAAL, 트리컨티넨탈 회의에서 결의, 꾸바 아바나, 1966) 등과 같이 급진적 대륙간 반제투쟁으로 고조되었는가 하면, 여성(아시아·아프리카 여성회의)과 경제(아프리카·아시아 경제협력기구), 문학(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등 다양한 영역에서 기층 연대의 지반을 놓기도 했다. ‘포스트-반둥’의 분열의 산물이면서 가장 상징적 유산인 비동맹회의(NAM, non-aligned movement)는 1961년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첫 회의가 열린 이래 현재 121개의 회원국을 거느리고 있으며 2024년 우간다 캄팔라에서 제19차 정상회의를 가졌다. 1964년 유엔 내 개발도상국 교섭단체로 결성되어 회원국을 134개국으로 확대한 Group-77 역시 반둥회의의 산물이다.
이러한 즐비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 반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 쉽지 않다. 지난 20세기 후반 ‘제3세계’는 지리나 국제정치의 범위를 초월하는 시대적 의제였다. 정치적 입장이자 기획이며 기억이자 열망으로서, 제3세계는 지구 곳곳 저항운동의 현장에서 부단히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저항운동으로서의 제3세계의 입지는 급격히 축소되었고 이제는 좀처럼 그 단어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파샤(M. K. Pasha)는 베스트팔렌체제(1948년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 확립된, 영토주권과 내정간섭 금지 등을 원칙으로 하는 근대국가 질서)의 바깥이었던 제3세계가 ‘국제사회’안으로 포섭됨으로써—실은 자발적으로 그에 투항해 들어감으로써—진정한 탈식민의 계기를 잠식당했다고 말했다.7 저항하던 세계의 일원이 되어버림으로써 제3세계는 스스로를 명명할 이름을 상실한 것이다. ‘제3세계’는 거기 스며 있던 분한과 연대의 정동이 소거된 ‘개발도상국’이라는 말에 그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이며, 최근에는 ‘글로벌 사우스’라는 새로운 개념이 그 잔해 위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제3세계는 그 이름은 사라졌을지언정 다른 얼굴에 깃들어 부단히 우리 앞에 되돌아온다. 그 이유는 제3세계가 저항했던 대상이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고하게 건재하기 때문 아닐까. 트럼피즘으로 요약되는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와 팽창주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항하는 반미연대의 필요성이 고개를 드는 지금, 반둥회의 70주년을 기념하는 언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둥정신’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제3세계’가 아직 역사적 사명을 다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역사의 여백에 떠도는 기억으로서, 미완의 역사를 향한 충동으로서,8 풀어야 할 과제로서, 그것은 여전히 현재한다.
2. 반둥은 실패한 기획인가
반둥회의로부터 70년이 흐르는 동안 반둥의 의미는 대체로 과소평가되어 왔다. 특히 서구 헤게모니에 대한 확신을 전제하는 주류 학문체계에서 반둥은 기껏해야 변방에서 일어난 해프닝 정도로 인식된 것이 사실이다. 반둥을 실패한 기획으로 전제하는 일반적인 설명 중 하나는 제3세계 및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분열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다.
반둥회의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단연 중국의 참석이었다. 아시아의 두 대국을 대표하는 인도의 네루와 중국의 저우 언라이(周恩來)가 손을 잡음으로써, 콜롬보 그룹9과 중국이 협력하는 역사적 장면을 만들어냈던 바다. 특히 인도와 버마, 인도네시아는 준비단계부터 중국의 참석을 회의 성패의 관건으로 삼았다. 반둥회의에 참관하면서 관련 인사들을 인터뷰했던 조지 카힌(George M. Kahin) 당시 코넬대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반둥회의에 중국을 불러들임으로써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거치며 적대감이 고조되었던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중재하고, 중국이 소련으로 기울지 않도록 넓은 외교적 선택지를 제공하며, 궁극적으로 중국의 공산주의 세력이 아시아로 확산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는 것이다.10 카힌은 특히 세번째 이유를 중요하게 보았다. 중국과 국경을 접하는 인도와 버마, 그리고 다수의 화교 인구를 보유한 인도네시아에 중국의 지원을 받는 자국 공산주의 세력은 큰 골칫거리였다. 또, 인도와 중국은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그어놓은 티베트 지역의 국경선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그런 연유로 네루와 우누(U Nu, 당시 버마 총리), 수까르노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1949.10) 직후부터 중국과의 관계 수립에 적극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기초된 ‘평화공존 5원칙’이 반둥회의 공동성명 「반둥 꼬뮤니케」의 10원칙으로 연결되는 쾌거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2년의 국경전쟁으로 반둥회의의 양대 축이었던 중국과 인도의 관계가 틀어지고 여기에 중소갈등까지 가세하면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얀센(G. H. Jansen)은 제2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가 끝내 열리지 못한 주원인을 여기서 찾았다. 중국과의 반목을 기화로 네루가 소련과 유고를 불러들여 비동맹회의라는 새 틀을 짜기 시작했고, 이즈음 제3세계를 둘러싼 중국과 소련의 주도권 다툼이 격화되면서 1960년대 아시아·아프리카는 중국과 인도네시아가 주도하는 반둥회의파와 인도·이집트·유고가 이끄는 비동맹회의파로 분열되었다는 것이다.11
그런데 이와 같은 시각은 자칫 1960년대 중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불어닥친 반동의 물결과 이를 뒤에서 지원했던 서구(미국)의 역할을 홀시하기 쉽다. 1964년 브라질의 주앙 굴라르(João Goulart), 1965년 알제리의 벤 벨라(Ben Bella), 1966년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 정권이 차례로 CIA의 지원을 받는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고, 1965년 10월엔 그해 알제리의 알제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트리컨티넨탈 회의의 설계자이자 조직책인 모로코의 벤 바르카(M. Ben Barka)가 빠리에서 납치되어 살해되었다. 반둥회의의 가장 열성적인 계승자였던 수까르노 역시 1965년 쿠데타의 여파로 이듬해 실각했다.
인도네시아의 학자이자 활동가인 힐마르 파리드(Hilmar Farid)는 수까르노의 실각이야말로 제2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가 좌초된 숨은 계기라고 본다. 반둥회의 직후 수까르노는 국내에선 나사꼼(Nasakom, 민족주의·이슬람·공산주의의 연합전선)을 결성하여 제국주의 잔존세력과 싸우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동유럽, 소련, 심지어 미국과 서유럽의 진보 인사까지 포함하는 반제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 동분서주했다. 1963년 자까르따에서 26개국이 참여하는 신흥국 경기대회(GANEFO)를 개최하고, 외교무대에서 ‘뜨리삭띠’(Trisakti, 정치주권·경제자주·문화정체성의 3원칙)를 설파했던 것도 제2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를 준비하는 일환이었다. 파리드는 반둥을 계승하려는 수까르노의 노력을 좌절시킨 것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부의 저강도 쿠데타(creeping coup)였으며, 나아가 그 시기 신흥국 전반에 도미노처럼 확산된 군사 쿠데타가 아시아·아프리카 운동의 보수화를 야기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파리드는 아시아·아프리카 운동 퇴조의 원인을 내부 분열에서 찾지 않았다. 확고한 국내 장악력을 갖지 못한 신흥국의 신생정부들은 대체로 여러 종교, 종족, 이념 집단과 연합한 ‘민족·민중(national popular) 권력’체제였는데, 그것이 안팎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차례로 무너지면서 아시아·아프리카 운동의 주도권을 권위주의 체제에 빼앗긴 것이야말로 반둥이 퇴조하게 된 근본 원인인 것이다.12 파리드의 이같은 주장은 서구 학계와 대비되는 로컬의 목소리의 존재를 새삼 일깨우며, 미완의 유산으로서의 반둥을 바라보는 관점의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을 준다.
반둥회의를 실패한 기획으로 바라보는 또다른 접근은 반둥에 내재하는 근대주의를 파고드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맑시즘과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는데, 전자를 대표하는 이가 사미르 아민(Samir Amin)이다. 아민은 반둥을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참여하고자 하는 주변부의 근대주의 기획으로 본다. 그가 볼 때 제3세계는 그 자체로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부산물이다. 2차대전 후 정치적 독립을 획득한 주변부가 공업화에 입성하면서 민족국가 단위의 생산체제가 세계 단위로 재편되는데, 제3세계는 이처럼 주변부까지 아우르는 자본주의의 팽창 과정에서 부상한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아민은 반둥은 결국 발전주의 신화에 들린 제3세계 부르주아 민족주의 기획이라 단언한다.13 그가 볼 때 반둥에 내재한 근대주의의 연원은 주변부 민족해방운동의 한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르주아가 존재하지 않는 체제에선 그 역할을 국가가 대신할 뿐 모든 민족해방운동에는 자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근대주의의 요소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민족해방 이데올로기는 그런 자기모순을 인지하지 못한 채 국제분업체제에 뛰어듦으로써 중심부를 따라잡겠다는 환상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14
이른바 주변부 자본주의론에 입각한 아민의 반둥 비판은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포스트모더니즘적 반둥 서사와 묘하게 맞닿는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탈식민이 가능한가라는 회의적인 물음은 영어권 서술에서 반둥을 원죄처럼 쫓아다닌다. 이를테면, 파샤는 반둥에 각인된 근대주의를 ‘서발턴(Subaltern, 하위주체)은 오직 헤게모니의 어법으로만 말할 수 있다’는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의 난제로 해석했다.
애초 반둥은 서구의 오만함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은 오직 국민국가, 주권, 인권, 발전 같은 근대의 언어 안에서만 물질화될 수 있었다. 서구에 대한 저항은 근대성의 유산과 무관치 않은바 궁극적으로는 국제적(the international)이라는 것의 내용과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반둥의 상징성과 그 물질성 간의 불연속은 포스트콜로니얼의 조건에 내재된 모순을 확인해준다.15
중요한 사실은 반둥을 피식민자의 딜레마로 가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이 현재의 비서구 세계를 판단하는 규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아시아·아프리카 운동에 참여했던 국가들이 배타적 민족주의와 근본주의에 기반한 국가주의체제를 영위하는 지금의 현실을 은근히 겨눈다. 가령 아랍은 식민주의와의 싸움에는 성공했지만 식민주의를 가능케 하는 원천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못했다며 ‘식민성’의 근원을 피식민자의 내적 문제로 귀결시킨 알라위(K. E. Alaoui)의 논리를 뒷받침한 것도 오늘날 비동맹회의 회원국 다수가 독재체제를 취하고 있다는 판단이었다.16 또한 개발도상국 기구나 단체의 모순을 지적하는 논리에도 유사한 시선이 투영되어 있다. 비동맹회의, 신국제경제질서(NIEO),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경제협력기구)처럼 서구 헤게모니에 대한 대안을 표방하는 단체들이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구조를 건드리기는커녕 발전과 진보라는 서구적 관념을 지역블록을 통해 재현하고자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에는17 반둥에 선천적으로 각인된 근대주의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3. 다극화를 위한 창조적 균열
이처럼 모순의 무한루프를 반복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서사는 반둥을 현재로 불러들이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첫번째로 짚어야 할 문제는, 그러한 접근이 반둥이 거둔 성과와 남긴 한계를 제국주의에서 냉전체제로 재편되는 20세기의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탈각시켜 추상화한다는 것이다. 시야를 1955년의 반둥회의에 고정해서 보더라도, 그 결과물인 「반둥 꼬뮤니케」는 언뜻 보면 근대주의에 포획된 것으로 읽히기 쉽다. 여러 의제 중에서도 경제협력을 맨 앞에 배치하고 있는데다가 선진국의 외자 투자나 국제기구의 도움을 거리낌 없이 구하고 있으며, 정치 의제에서도 유엔 헌장의 인권과 자결 원칙을 고수하는 수준을 좀처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밋밋한 꼬뮤니케가 중립, 친서구, 공산주의 성향의 29개국 대표들이 만장일치로 채택한 문서라는 사실은 종종 간과된다. 「반둥 꼬뮤니케」는 투표 없이 오직 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른다는 원칙에 의해 만들어졌다. 누구 하나라도 반대하는 문구는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18 그런데 참가국 중 필리핀, 태국, 파키스탄, 터키는 사실상 미국과 영국이 이 회의를 방해하기 위해 보낸 대리인(proxy)이었고,19 또 회의 전반에 중국과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경계심이 지배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자리에는 휴전협상 중이던 남북 베트남 대표도 있었다. 이처럼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29개의 신흥국 대표들이 닷새간의 격렬한 토론을 거쳐 「반둥 꼬뮤니케」라는 공동성명과 10원칙을 만들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둥회의는 현대사의 기념비적 순간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하다. 물론 이후 운동의 동력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 역시 1960년대 후반 제3세계가 미국과 소련, 중국의 각축장으로 부상하면서 냉전의 핫스팟이 되어버린 역사적 맥락 안에서 살펴야 한다. 반둥을 근대의 아포리아로 가두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접근은 이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사상해버린다.
더 중요한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반둥 서사가 사실상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출구 없는 완결된 구조로 전제함으로써,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흔들리고 중국과 글로벌 사우스의 결합이 의미심장한 변수로 부상하는 지금의 문제적 현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참조로 반둥을 불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들이 아민의 ‘연결 끊기’(de-linking) 개념을 역으로 전유하여 오히려 식민주의로부터 단절하지 못하는 반둥 후예들의 운명을 재확인한 것과 달리, 한때 제3세계 국가들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분업체제의 고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던 아민은 탈냉전 이후 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경제발전이 가져온 주변부의 분화와 중국의 부상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미친 영향 등을 주시하면서 부단히 자신의 관점을 움직여왔다. 반둥회의 60주년을 기념하는 어느 글에서 그는 반둥에 대해 매우 전향적인 시각을 내보였다.20 그는 우리가 냉전이라 부르는 1950년대는 실은 미국과 서유럽의 사회민주 양식과 소련·중국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양식, 그리고 아시아·아프리카의 민족·민중 양식이 공존하는 다극시대였으며, 그 다양성으로 인해 모두가 ‘기동의 여유’(margin of manoeuver) 공간을 누릴 수 있었다고 했다.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자본주의의 지구화에 모종의 협상 공간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신자유주의적 일극주의가 지배하면서 그 공간은 사라졌다. 아민은 그것을 ‘반둥 없는 세계’라고 불렀다. 어떻게 재앙과도 같은 신자유주의의 전일적 지배를 극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더이상 ‘연결 끊기’라는 예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았다. 그가 제기한 방안은 민중·계급·민족·국가 등 복수의 층위에서의 연대를 통해 다극성을 회복함으로써 자본주의 지구화에 협상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반둥정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내는 작업이었다.
4. 반둥의 귀환
돌이켜보면 반둥회의는 미국과 서구에 결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 아니었다. 반둥회의를 중립주의와 민족주의, 반식민주의 결집의 잠재적 상징으로 간주했던 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회의가 열리는 그해 초부터 비밀작전본부(OCB)를 통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반둥에 초대받은 친미 국가들을 사전에 조종하여 ‘소비에트 식민주의’라는 문제를 던지게 함으로써 회의의 중심의제인 반식민주의 토론을 교란시킨 것이 대표적이다.21 전후 아시아 지역질서 재편이라는 관점에서, 반둥회의는 유럽 구제국주의와 결탁한 미국과 아시아 신생국 사이의 치열한 투쟁의 장이었다. 독립 직후부터 네루가 아시아관계회의(1947.3), 독립국대표회의를 열어 ‘아시아의 문제를 아시아가 공동으로 대응하는’ 지역체제를 다져갔다면,22 제네바에서 진행된 인도차이나 협상에서 공산권에 밀렸다고 여긴 미국은 아시아 집단방위체제인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결성하여 이를 만회하고자 했다. 네루와 우누는 SEATO의 가입을 종용하는 미국과 영국의 요구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즉각 콜롬보회의를 개최하여 아시아·아프리카회의 준비에 돌입했다. 말하자면, 반둥회의는 SEATO에 대한 아시아의 공동 대응을 조직하려는 네루와 우누, 수까르노의 노력의 일환이었다.23 비록 「반둥 꼬뮤니케」에 포함되진 못했지만, 동맹이라는 허위의식을 일갈하고 아시아의 이상이자 동력으로서 비동맹(non-alignment)의 사유를 역설했던 네루의 회의석상에서의 발언은24 그가 SEATO에 얼마나 격분했었는지 생생하게 전달한다.
주목할 것은 강자에 줄서기를 거절하고 지역의 주체성을 지키려 했던 반둥의 유산이 아시아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미국과 중국 어느 한편에 전적으로 장악되지 않는 지역연합으로 남은 것이 그런 예이다. 아차리야(A. Acharya)는 유럽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달리 아시아에서 SEATO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1977년에 해체되고 만 데에는 지역 성원들의 직·간접적 사보타지를 이끌어낸 반둥회의의 공헌이 컸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반둥의 효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 스며든 집단방위체제에 대한 반감과 중립주의에 대한 선호는 1967년 결성된 ASEAN은 물론 1994년에 설립된 ARF(아세안지역포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25 바이든 정부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FOIP)’을 제창했을 때 ASEAN의 반응이 미온적이었던 것도 중국 견제를 목적으로 하는 미국의 전략에 말려들어 자신들의 역내 주도성이 흔들리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26 그렇게 보면, 반둥의 유산은 적어도 그 본고장인 동남아시아에서는 미약하게나마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960년대 이후 아시아가 동북아와 동남아, 남아시아의 세 하위지역으로 분절되고,27 반둥회의의 세 축이자 각 하위지역의 대국인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가 오랫동안 서로 경원시했던 상황은 반둥의 유산이 형해화된 또다른 중요한 배경이었다. 1940~50년대 지역의 리더로서 활발하게 아시아 사무를 주도했던 인도가 급격히 남아시아로 고립되고 중국이 냉전의 봉쇄에 갇히면서 고착화된 아시아의 분절은 ‘아시아·아프리카’라는 지리적 상상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했다. 한국인에게 아시아·아프리카라는 개념이 늘 어딘가 낯선 이유는 반둥회의나 비동맹회의에서 배제된 데서 오는 거리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북아의 지리 감각에 제약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동북아에서 보면 아프리카는 아시아에서 아득히 먼 대륙이지만, 인도양에서는 말라카해협부터 벵골만, 아라비아해,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연결되는 아시아·아프리카의 지도가 온전히 시야에 들어온다. 반둥의 사유는 불가피하게 아시아가 분절되기 이전의 제국주의 시대의 지도를 소환한다.
미중 세력경쟁의 파고 위로 ‘인도·태평양’과 ‘일대일로’의 거대 전략이 각축하고 미국 우선주의에 대해 ‘남남(南南)협력’을 내건 글로벌 사우스가 부상하는 오늘의 상황은 역설적으로 반둥시대의 지도를 복원시킨다. 70년 전 사실상 대영제국의 아제국이였던 인도가 영연방국가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유럽의 신구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대륙간 연대를 조직했다면, 이제는 지난 20년 눈부신 속도로 국력을 강화하여 과거 제국의 위용을 되찾은 중국이 흩어졌던 반둥의 후예들을 다시 규합하고 있다. 중국과는 여전히 껄끄러운 관계이지만, 인도가 2017년 중국이 주도하는 SCO(상하이협력기구)에 정회원으로 가입한 것도 70년의 반둥의 역사에서 보면 상징적인 사건이다.
막강한 하드파워를 자랑하면서도 이념적 빈곤이 고민이었던 SCO와 일대일로 같은 중국의 전략적 플랫폼에 글로벌 사우스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기존의 보편이념에 대항하는 대안 담론의 자양이 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평등한 다극화’를 통한 글로벌 거버넌스의 개혁을 강조하는 중국의 글로벌 사우스 담론에28 어른거리는 제3세계와 반둥의 그림자이다. 2024년 6월 UNCTAD(유엔무역개발협의회) 60주년 회의 개막연설에서 시 진핑(習近平)은 “중국은 언제나 글로벌 사우스의 일원이었으며 영원히 개발도상국에 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1974년 유엔총회에서 “사회주의 국가로서 중국은 영원히 제3세계에 속할 것이며 (…) 장래에 우리가 발전한 후에도 (…) 여전히 제3세계에 속할 것”이라는 덩 샤오핑(鄧小平)의 발언을 환기시킨다. 덩 샤오핑의 이 연설이 중국이 1960년대 제3세계에 펼쳤던 혁명수출 노선을 접고 반둥의 ‘평화공존’ 원칙으로 회귀할 것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신호였다는 점, 그러나 이때의 반둥정신이란 개발도상국의 ‘경제협력’을 주축으로 재구성된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제3세계를 소거하고 글로벌 사우스로 귀환하는 반둥의 의미는 그야말로 양가적이고 문제적이다.
1955년 현장에서 「반둥 꼬뮤니케」의 선언을 직접 들었던 미국의 작가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는 반둥의 귀환을 이렇게 예감했다.
또한 나는 서구가 그들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무시한다면, 그래서 이 사람들이 다시 모이게 된다면(다시 모이게 될 터이지만), 그들의 호소는 지금과 다를 것이다. (…) 요약하면 반둥은 서양화된 아시아인들이 서구의 도덕적 양심에 보내는 마지막 외침이다.”29
라이트는 반둥에서 보여준 아시아·아프리카의 결집을 과학과 이성의 훈련을 통해 인류의 의식이 조직되는 보편적 문명화의 과정으로 인식했다. 그런 전제에서, 머잖아 세계 인구의 나머지 65퍼센트가 서구가 이룩했던 근대화의 문턱에 이를 것이며, 그때가 되면 서구인들이 지금껏 누려온 우월성을 더는 유지할 수 없으리라 경고했던 것이다. 반둥의 의미를 근대화와 문명화를 통해 비서구가 서구를 추격하는 과정으로 인식한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다시 모이게 될 미래의 ‘그들’이 서구인에게 ‘말하는’ 방식은 70년 전과 다를 것이라는 라이트의 예감만큼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중국과 글로벌 사우스의 결합이 그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일화와 가속화에 기여할 뿐일까, 아니면 아민이 기대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기동의 여유’ 공간을 창조하여, 한때 인간해방의 열망으로 세 대륙의 인민들을 연결시켰던 ‘제3세계’의 기억을 여전히 전쟁과 학살이 지구 곳곳에서 자행되는 오늘의 현실로 불러낼 수 있을까. 비록 불운한 시대적 조건으로 1955년의 반둥회의에 초대받지는 못했지만 그 유산인 제3세계 연대의 정신과 끊임없이 교통하며 저항운동의 사상체력을 길러온 우리로서, 부단히 현재로 돌아오는 반둥의 의미를 읽는 주체적 시야의 연마는 결코 소홀할 수 없는 지적 과제이다. 그것은 또한 오늘의 중대한 세계사적 전환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창조적인 틈을 열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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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hn Newsinger, “A Forgotten War: British Intervention in Indonesia 1945-46,”
Race & Class , Vol. 30 (4), 1989, 62면; Vijay Prashad,The Dark Nations , The New Press 2008, 31~32면; Richard D. McMillan,The British Occupation of Indonesia 1945-1946 , Routledge 2006, 165~66면.↩ - Prashad, 앞의 책 33면.↩
- George Mcturnan Kahin,
The Asian-African Conference, Bandung, Indonesia, April 1955 , Cornell University Press 1956, 47면.↩ - Woodburn Kirby,
The War Against Japan, Vol 5: The Surrender of Japan , Her Majesty’s Stationery Office 1969, 322~25면.↩ - Newsinger, 앞의 책 64면.↩
- 산지브 산얄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 류형식 옮김, 소와당 2019, 366~67면.↩
- Mustapha Kamal Pasha, “The ‘Bandung impulse’ and international relations,” ed., Sanjay Seth,
Postcolonial Theory and International Relations , Routledge 2013, 146면.↩ - 같은 글 151면.↩
- 1954년 4월 인도·인도네시아·버마·스리랑카·파키스탄의 대표가 콜롬보에 모여 아시아·아프리카회의를 개최할 것을 논의했다. 이들을 ‘콜롬보 그룹’(Colombo Power)이라 부른다.↩
- Kahin, 앞의 책 5면.↩
- Godfrey H. Jansen,
Nonalignment and the Afro-Asian States , Praeger 1966, 363~83면.↩ - Hilmar Farid, “Rethinking the legacies of Bandung,”
Inter-Asia Cultural Studies , Vol. 17 (1), 2016, 15~17면.↩ - Samir Amin,
Re-reading the Postwar Period , Monthly Review Press 1994, 15~17, 106면.↩ - Rémy Herrera, “Fifty years after the Bandung conference: Interview with Samir Amin,”
Inter-Asia Cultural Studies , Vol. 6 (4), 2005, 547~49면.↩ - Pasha, 앞의 책 154면.↩
- Khadija El Alaoui, “A Meaning of Bandung,” ed., Quỳnh N. Phạm & Robbie Shilliam,
Meanings of Bandung , Rowman & Littlefield 2016, 63~7면.↩ - Giorgio Shani, “Spectres of the Third World,” ed., Phạm & Shilliam, 같은 책 148면.↩
- Kahin, 앞의 책 10면.↩
- Jason C. Parker, “Small Victory, Missed Chance,” ed., Kathryn C. Statler & Andrew L. Johns,
The Eisenhower Administration, the Third World, and the Globalization of the Cold War , Rowman & Littlefield 2006, 153~74면.↩ - Samir Amin, “The world without Bandung, or for a polycentric system with no hegemony,”
Inter-Asia Cultural Studies , Vol. 17 (1), 2016, 7~11면.↩ - Parker, 앞의 글 157~62면.↩
- 백원담 「전후 아시아에서 ‘중립’의 이몽과 비동맹운동」, 『역사비평』 2022년 봄호 191면.↩
- Amitav Acharya, “Norm Subsidiarity and Regional Orders,”
International Studies Quartely , Vol. 55 (1), 2011, 103~108면.↩ - Kahin, 앞의 책 68, 74면.↩
- Acharya, 앞의 책 109~12면.↩
- John Lee, The
“Free and Open Indo-Pacific” and Implications for ASEAN , ISEAS-Yusof Ishak Institute 2018, 30면.↩ - Manjeet S. Pardesi, “The Indo-Pacific: a ‘new’ region or the return of history?”
Australian Journal of International Affairs , Vol 74, (2), 2020, 125면.↩ - 중국이 공식석상에서 글로벌 사우스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2023년부터이다. 김선재 「중국의 글로벌 사우스 전략: 국제사회이론의 관점에서」, 『중소연구』 제48권 제2호, 2024, 8면.↩
- Richard Wright, “The Color Curtain”(1956),
Black Power: Three Books from Exile: Black Power; The Color Curtain; And White Man, Listen! , HarperCollins Publishers 2008, 59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