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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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동아시아의 눈으로 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박재우 朴宰雨

중국 산시사범대학(陝西師範大學) 특임연구원, 한국외대 명예교수, 중국교육부 장강학자 석좌교수. 저서 『20세기 중국한인(韓人)제재소설의 통시적 고찰』 『사기 한서 비교 연구』(중문), 공역서 『중국은 루쉰이 필요하다』 『중국 현대 실크로드 문학』 등이 있음.

pjw9006@hanmail.net

 

 

 

1. 들어가며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1993년에 1권 ‘남도답사 일번지’로 시작된 이래 2024년 말까지 국내편 12권(북한편 2권 포함), 일본편 5권, 중국편 3권, 『국토박물관 순례』 2권 등 총 22권이 출간되었다. 지난해 말에 발간된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나 특정 주제에 맞춘 여행안내서 등 특별서까지 치면 근 30권에 가까운 시리즈이다.

각권의 목차와 본문에 밝히고 있고 서문에서도 분명히 드러내는 저자의 답사 대상, 답사 철학 및 주제의식, 서술문체 등의 변화를 고려해보건대 지금까지의 출간을 다음의 다섯 시기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제1시기 국내편 전기 3권 출간(1993~97), 제2시기 북한편 2권 출간(1998~2001), 제3시기 국내편 중기 2권 출간(2011~12), 제4시기 일본편 5권과 중국편 3권, 국내편 후기 5권 출간(2013~22), 제5시기 국토박물관편 2권 출간(2023)이다.

총괄적 이해를 위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연장선상에서 쓰인 근작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창비 2024)부터 살피는데 표제에 ‘유홍준 잡문집’이라 쓰여 있다. 한국에서는 표제에 ‘잡문’이라고는 잘 안 쓰는데 좀 이상하다 싶다. 수십년간 중국문학을 전공해온 나로서는 중국 현대문학에서 잡문이 산문 영역의 중요한 한 장르로 자리매김되어 있는 걸 알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좀처럼 폄하의 의미로 쓰일 뿐 문학사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문을 읽다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나의 글쓰기는 일반적인 산문 형식을 벗어난 ‘잡문(雜文)’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내가 젊은 시절에 루쉰(魯迅)의 잡문에서 받은 영향 때문이다. 내 또래와 내 선배들 세대에게 루쉰은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루쉰은 자신의 글을 잡문이라 했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등 루쉰 잡문집이 여러 형태로 나와 있다. 그러나 루쉰의 잡문이란 그냥 잡문이 아니라 일상사에서 시작해 사상의 담론에까지 이르는 글이다.(6면)

 

반가웠다. 저자도 일찍이 루쉰의 영향을 많이 받았구나. 사실 잡문이라는 장르가 중국 현대문학사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루쉰의 영향력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세월 중국과 연을 맺으며 중국 루쉰학계와 교류하고 중국 대학에서 많은 특강을 해온 필자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결혼식 주례로 리영희 선생을 모시게 된 전후 사정을 감칠맛 나게 쓴 수필(「리영희: 나의 주례 선생님」)을 한편 싣고 있는데, 필자 역시 젊은 시절 리영희 선생의 「魯迅과 나」 「나의 스승 노신(魯迅)」 등 루쉰에 대한 글을 읽고 뜨거운 감동을 받은 바 있다. 그것을 잊지 못한 필자는 2005년 7월 한중 공동개최로 중국에서 열린 ‘한중 루쉰연구대화회’ 때 한국학자 10인과 함께 리영희 선생 부부를 모시고 참석한 바 있고, 그후 필자가 주선한 『남방주말(南方周末)』 신문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서 리영희 선생은 ‘한국의 루쉰’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한마디 더 언급하자면 기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중국에서라면 산문 영역 가운데서는 ‘기행산문’〔遊記〕이라 호칭되며, 내용이 문화기행에 해당하므로 ‘문화기행산문’〔文化遊記〕으로 재분류되는 것이 문학사적으로도 이미 정론화되어 있다.

필자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하 『답사기』) 첫 권을 접한 것은 1993년 출간 직후였다. 지역 문화유산을 다룬 답사기가 이렇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할 수 있구나 생각하면서 단숨에 읽은 기억이 난다. 그뒤 이 책이 일년 만에 100만부나 나가며 한국 지식인과 대중 속에 문화답사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문화인식 지도를 바꾸는 상황을 목도했다. 후속 출간된 제2권, 제3권도 마찬가지였다. 그뒤엔 또 최초로 북한편이 나왔다. 금단의 영역에 도전하여 한반도 북쪽의 문화유산 인식에 대한 공백을 메우는 답사기를 써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데 필자의 전공은 중국문학인지라 그에 대해 학술적 관심으로 승화시킬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중국의 대표적 문화기행산문 작가인 위 추위(余秋雨)의 『고뇌에 찬 문화기행(文化苦旅)』이 유홍준의 책보다 일년 먼저인 1992년 출간되어 중국에서 지식인사회와 대중사회에 역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2011년 기회가 닿아 홍콩의 ‘세계 화문(華文) 기행문학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을 때 두 작가 작품의 부상을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열(文化熱) 현상으로 보고 이를 비교 고찰하는 글 「동아시아의 문화기행문 열풍: 유홍준과 위 추위 비교」를 발표했다.1 그때는 간단한 비교 수준의 글이었다면, 이 글에서는 방대한 유홍준의 『답사기』의 의의에 대해 좀더 살펴보고자 한다.

 

 

2. 한중일의 문화기행에 대한 회고와 『답사기』

 

오랫동안 농경문화, 한자문화, 유교와 불교 등 사상적·종교적·문화적 영향을 공유해온 전통적인 동아시아는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후 서양문화의 동점 속에서 큰 충격을 받는 가운데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근대성을 향한 각개약진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청일전쟁 이후 130여년간 동아시아 각국은 상호 동질성과 이질성 혹은 교차성을 동반해온바, 20세기 전반기에 한국과 중국은 ‘계몽과 저항, 구국’이라는 유사한 방향의 동질성을 가졌고, 일본과 한중 간에는 ‘식민과 피식민’ 혹은 ‘침탈과 피침탈’이라는 이질성이 형성되었다. 20세기 후반기로 오면 한국과 일본은 ‘자본주의적 근대화’라는 동질성을 공유하였으며, 반면 한일과 중국 사이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질적인 혹은 교차적인 이념 차이가 존재했다. 하지만 1972년 중일수교가 이루어지고 중국이 1980년대 개혁·개방을 시작한 후 1992년 한중수교도 이루어지면서 한중일 3국간 문화교류의 폭과 깊이는 확대되었으니, 일정 기간 열기가 넘치기도 하고 또 냉기와 온기가 교차되기도 하는 정치외교적 상황과는 달리 민간과 문화 영역에서는 ‘합류성’도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서는 1992년에, 한국에서는 1993년에 문화기행문 내지는 문화답사기가 출간되면서 중국에서는 위 추위 열풍과 문화열이, 한국에서는 유홍준 신드롬과 문화답사열이 크게 일어난 것이다. 두 나라의 체제 차이 속에도 동질성과 합류성이 존재하기에 이런 유사한 문화현상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실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에 있어 문화기행문 열풍이 제일 먼저 분 곳은 일본이라고 할 것이다. 일본은 대만(1895~1945), 한반도(1910~45), 만주(1931~45)를 침탈하여 식민통치를 하면서 중일전쟁, 나아가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다가 결국 패전했고, 전후 일본에서는 정치적으로 미국의 지배적 영향 속에 있는 가운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탈중심적’ 시각에 초점을 맞춘 문화기행 저술들이 많이 탄생했다. 시바 료오따로오(司馬遼太郎)의 『길을 가다(街道をゆく)』 시리즈가 대표작이라고 하겠는데, 그는 일본 열도를 직접 다니며 만난 각 도로에 담긴 역사적 이야기와 인물 및 풍광을 통해 지역 정체성과 근대사 반성, 전통문화 재조명을 주조로 문화기행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인들의 ‘길’과 근원, 역사와 일상의 접점을 소설적 언어로 풀어내어 일본 현대인들에게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다. 1971년부터 출간하기 시작하여 1996년 그가 타계할 때까지 40여권 이상 출간했고, 역시 많은 인기를 누리며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적 시각에서 보면 장기간 서구 중심의 담론 속에 묻혀 있던 자국 전통문화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문화적 주체성을 재구축한다는 의미에서 일면 후일의 한중의 문화기행문 열풍과 궤를 같이하는 면이 없지 않다고 하겠으나,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보면 한국이나 중국을 침략하고 식민통치를 한 일본 군국주의 역사에 대한 통렬한 문화사적 반성은 보이지 않아 한중의 새로운 열풍과 같은 차원에서 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전통적으로 문화대국으로 자부해온 중국은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의 승리로 새로운 국가를 건립했지만 이후 반우파투쟁(1957~58), 문화대혁명(1966~76) 등의 혼란스러운 정치운동 속에서 정치가 온 사회를 지배하고 문화는 부재한 시대를 겪었다. 1980년대 들어 그와 같은 정치적 경험에 대한 반성과 함께 문화에 대한 재성찰의 흐름이 출현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활동과 표현의 자유, 학술활동의 자유는 일정 부분 확대되었지만 정치적 발언은 여전히 제한되었기에, 지식인들은 문화적 논의를 매개로 사회와 정치에 대한 우회적 표현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현실에 기반을 둔 문화감수성과 전통문화에 대한 재고와 반성을 핵심으로 하는 문화기행문이 자연스럽게 대두되었으니 『고뇌에 찬 문화기행』과 그 후속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한국은 중국과 체제는 달라도 역시 유사한 전개과정을 겪었다. 일본 식민지체제와 전쟁을 겪은 후 1960년대부터 군부독재하의 경제성장 일변도가 사회를 지배하였고 이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통문화에 대한 재인식과 민족·민중 문화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 격렬한 민주화운동은 정치적 저항과 동시에 문화적·사상적 비판의 물결을 동반했으며,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민중적 시각의 재해석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자국의 주체성 회복과 이를 토대로 한 문화기행문 쓰기가 한국에서도 자연스럽게 태동하게 되었으니, 유홍준의 『답사기』 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답사기』 열풍 자체는 일본보다 늦은 1990년대에 시작된 것이나 너르게 보면 우리 문학 안에서 문화기행문 쓰기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져왔음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예술에 대한 미학을 개척한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은 경주 대왕암 답사 관련 글만도 여러차례 발표했으며, 1960년대 이래로 펼쳐져온 소설가 박태순(朴泰洵)의 국토기행,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의 역사풍속 기행, 시인 신경림(申庚林)의 민요기행과 ‘시인을 찾아서’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위 추위에 대해서 좀더 소개하자면, 1946년 중국 남부 저장성(浙江省)의 한 농촌에서 태어난 그는 상하이에서 교육을 받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희극문화사 전공서를 연이어 출간하면서 학계에 이름을 알렸다. 1985년에는 중국대륙 최연소 인문계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상하이희극학원 부원장 및 원장, 상하이작가협회 주석 등 요직을 맡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중국 전역을 유랑하며 고대 유적과 역사적 공간을 통해 문혁을 겪은 중국인의 무너진 정신, 역사와 문화의 아픔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성찰을 하는 문화기행문을 써서 1988년부터 바진(巴金)이 편집인으로 있는 잡지 『수확(收獲)』에 ‘고뇌에 찬 문화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것이다. 연재를 묶어 1992년 3월 출간된 단행본은 출간 직후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위 추위 열풍을 불러왔다. 이는 중국 독자들에게 잠재된 문화의식을 자극하고 문화적 자긍심을 환기시킨 작품으로서, 중국 문화기행문의 전범으로 간주된다. 몇년 뒤 1995년 대만에서 출간된 『산중 거처의 수필(山居筆記)』 역시 대만과 해외 화인사회에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에도 『서리 내린 장강(霜冷長河)』 『마음 속의 여행(心中之旅)』 『천년의 탄식(千年一嘆)』 『길 떠나는 자, 경계가 없다(行者無疆)』 등 다수의 문화기행문이 잇달아 출간되어, 위 추위의 대표 저작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고뇌에 찬 문화기행』은 그의 문화기행문 중에서도 향후 집필의 방향성과 형식적 원형을 제시한 시작점이자, 동시에 그의 ‘문화영웅’적 위상을 확립시킨 기념비적 저작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유홍준 『답사기』의 의의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깊이 고찰해보겠지만 이들 두 작가는 근대 이후 서구문명의 일방적 우세 속에서 열패감을 느끼며 자국 문화를 외면해왔던 한중의 시대 분위기에서, ‘문화영웅’의 형상으로 등장하여 독자들에게 자국 문화유산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우선, 양자의 문화기행문은 자국 문화유산의 대중적 재발견, 심도있는 재조명이라는 공통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두 작가 모두 탁월한 필치와 설득력으로 대중성과 가독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도 존재했다.

그것은 첫째로 문화기행문 집필의 서술 방식과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위 추위는 개인적 감수성과 역사적 비애를 내면화한 감성적 문화비평의 경향을 보이며, 문화의 상처와 무게를 감정적으로 서술한다. 반면 유홍준은 문화민주주의적인 태도로 설득 가능한 대중적 설명을 추구하며, 문화유산을 생활 속에 다시 연결시키는 실천적 태도를 드러낸다. 그러기에 중국 전통 문사의 문학기행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위 추위가 좀더 작가 개인적 특장을 잘 발휘하고 있다고 하겠지만, 문화유적과 인물 관련 지식의 체계적 서술 면에서는 유홍준이 훤씬 더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으며 아울러 뛰어난 미학적 감수성으로 한중 고금 시가의 수록과 활용 등에 있어 문학적 능력도 잘 발휘하고 있다. 둘째로 문화유산의 재발견의 대중 파급적·정책적 효과 측면에서, 위 추위의 글은 철학적 사색과 역사적·문화적 성찰의 파급효과는 14억명 중국 전역에서 엄청났으나 직접적인 지역적 문화답사 열기나 문화정책으로의 연계는 다소 약하였다. 반면 유홍준의 기행문은 5천만명 인구 속에서이지만 실로 엄청난 문화답사 열풍을 유발하였고 지역에 대한 관심과 문화재 보호운동으로도 확산되며 많은 구체적 성과로 연결되었다.

유홍준의 『답사기』를 통해 매권마다 발상을 달리하며 전개되는 그의 답사 역정과 의식, 서술문체를 추적하고 있노라면 상황에 따라 대응해가는 그의 고충과 고뇌가 강하게 느껴진다. 오랜 과정 속에서 본래 저자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던 변화가 많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30여년간 저술된 22권을 훑어보자면 초기에는 주로 주류 담론에서 소외되었던 수많은 지역 문화유산의 현장 답사를 통해 직접 보고 느끼는 감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개인적 경험에 중점을 두었고, 문화유산을 아름답거나 독특한 대상으로 보는 데 치중한 느낌도 든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답사를 문화유산 ‘이해의 진전’ 과정으로 보고, 그것이 개인과 공동체의 긍정적 성장이자 변화의 동력임을 강조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 북한편은 잃어버린 절반의 문화유산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문화를 통한 민족의 재통합을 강하게 지향하고 있다. 또한 갈수록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더 깊이 인식하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정체성 회복에 기여하고자 하는 점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일본편과 중국편에 이르면 단순한 한반도지역 문화유산 답사를 넘어서 동아시아 전체 역사와 문화 속에서 일본과 중국의 문화유산을 깊이 추적하고 아울러 우리 문화유산의 위치와 의미를 조망하는데, 그의 관점이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라는 넓은 시야로 발전·변화함을 보게 된다.

 

 

3. 한국 로컬문화의 재발견과 대중적 열풍

 

『답사기』 22권은 각권마다 주제와 의미가 뚜렷하지만 그중 중심을 이루는 부분이 있다면 역시 국내편(남한) 10권과 국토박물관편 2권 등 총 12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12권을 통해 우리는 한국 로컬문화의 재발견과 문화유산에 대한 민주적·민중적 의식의 확대, 한국 전통미학의 재해석과 현대적 맥락화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로컬 문화유산의 가치 재발견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시리즈의 핵심 메시지라 할 ‘우리나라는 전국토가 박물관이다’라는 선언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저자가 무엇보다 중앙 중심의 유명 문화유산만이 아닌 주변부 지방 곳곳에 숨겨진 수많은 무명의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묘사하며 그 가치를 재평가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지역의 정체성과 일상적 삶 속에 녹아든 미적 가치, 역사적 의미를 재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했거니와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역적 주체성과 활력을 살리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주지하다시피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과 정약용에 대한 서술이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강진은 본래 유배지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인식되던 곳이었고,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면 이국풍 전원주택이나 별장이 지어지는 땅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현재의 크고 번듯한 다산초당은 원래의 유배처인 초가를 헐고 다시 지은 것이라고 밝히면서 다산 정약용이 머물렀던 오두막집과 그 주변 경관에 대한 서술을 통해 이 지역이 조선 후기 실학과 개혁사상의 중심지였음을 조명한다(『답사기 1: 남도답사 일번지』). 다산초당을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한 시대의 지성사와 유배문화, 실학적 전통이 응축된 장소로 새롭게 복권시킨 것이다. 이로써 강진·해남 일대 지역주민들의 역사의식과 자존심이 크게 높아졌고, 또 이 지역은 로컬 헤리티지 투어의 메카로 부상하게 되었다.

영주 부석사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는 부석사를 화엄철학을 공간구성으로 시각화한 대표 사례로 든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바라보면 멀리 소백산맥의 줄기가 부석사의 장대한 정원인 양 아스라이 펼쳐진다”(『답사기 2: 석굴암 외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100면)라고 해 고려 건축의 백미로 꼽은 것이다. 이는 부석사가 교과서에 등장하는 유명 사찰이지만 실지로 그 감동을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은 제한적이었던 상황에 대해, 문화적 중심성은 현재의 지리적인 주변성과 또다른 차원임을 강조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국 전통미학의 재해석과 현대적 적용이라는 각도에서 살펴보면 우선 저자는 한국 전통미학의 핵심을 소박함, 절제, 자연과의 조화, 여백의 미, 몰개성(沒個性)의 아름다움 등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미감이 건축·공예·회화·정원·일상생활 전반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담양 소쇄원은 조선 선비 양산보가 자연 속에 은거하며 마음을 닦기 위해 만든 그윽한 정원이다. 저자는 답사 후 이를 단순히 아름다운 정원이 아닌 한국적 자연관과 미의식의 결정체로 해석한다. “소쇄원 원림은 결국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곳곳에 인공을 가하여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공간을 창출한 점에 그 미덕이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조선시대 원림의 미학이라는 하나의 미적 규범을 거기서 배우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답사기 1』 286면) 저자의 이런 미학적 해석은 소쇄원을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며 한국 정원문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저자는 나아가 한국 진경산수화의 특징을 설명하며, 겸재의 「인왕제색도」 등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인위적인 기교보다는 공간의 여유, 은은한 색조, 전체적인 분위기와 정서의 표현을 중시하는 한국 산수화의 경향을 전통미학의 중요한 축으로 보고 있다(『답사기 11: 서울편 3 사대문 안동네 ‘내 고향 서울 이야기’』). 국토박물관편은 또한 지역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통해 이러한 전통미학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구현되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저자가 글로벌화 속에서 한국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한 것은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고, 독창적인 문화콘텐츠 개발의 기반을 닦는 중요한 작업으로 한국의 현대적 문화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생각된다.

 

 

4. 분단시대, 새로운 인식을 연 북한 답사기

 

북한편 2권(초판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하, 중앙M&B 1998·2001, 개정증보판 『답사기 4: 북한편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답사기 5: 금강산편 ‘다시 금강을 예찬하다’』, 창비 2011)은 분단의 장벽 너머에 잠든 북한 문화유산을 한민족 공동의 유산으로 재발견하고, 그 속에 담긴 한반도 고유의 미학적 정수를 재조명하며, 나아가 통일시대를 대비한 문화적 맥락화를 시도한 획기적인 답사기라고 할 것이다. 이 저작은 단순히 당시 50년간 절연되었던 북한 유적지를 답사해본다는 차원을 넘어 ‘서사를 잃어버린 절반의 문화유산 복원’과 ‘분단시대 문화가 수행해야 할 역할’을 진중하게 사유한 문화기행문인 것이다. 그렇지만 분단시대에 양측 정부의 허가를 얻어 북한 답사기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서문 「분단시대 글쓰기의 어려움」에서 드러나고 있다. “현재와 같은 분단시대의 상황에서 남한 독자들을 상대로 북한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글로 되고 마는 것이다.”(『답사기 4』 11면) 그는 그렇게 “세월이 많이 많이 흘러 통일이 되었을 때, 그때 가서 남북이 만나는 길고 긴 과정에 이런 답사기가 있었다는 것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줄까”(같은 책 13면) 생각해보며, 역사적인 북한 답사행을 결행했다.

북한편 중 첫번째 책은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는 평양과 묘향산, 강서고분, 대동강, 고구려 벽화무덤, 용악산, 진파리 벽화 등 북한의 현장을 직접 다니며 남쪽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세밀하게 해석한다. 대개 기록과 보존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던 북한 유산을 살아 있는 미학적 유산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저자는 결국 ‘잊혀진 반쪽의 유산’을 실제로 발로 딛고 마주함으로써, 한민족 문화정체성의 총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보여주었다.

가령 저자는 고려 중기 건립된 묘향산 보현사의 8각 13층 석탑을 분석하며 “보현사 8각 13층 석탑 하나가 이곳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석탑문화의 지도를 부여와 경주를 넘어 여기까지 그리게 한다”(같은 책 218면)고 쓴다. 이 석탑이 고려의 불교문화가 남북을 아우르던 시대의 정신적 유물이라는 것인데, 이는 고려시대 문화권의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분단현실 속에서도 남북이 공유하는 역사적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금강을 예찬하다’라는 부제의 두번째 책에서는 초반에 “꿈에나 가본다는 것조차 꿈같이 생각되던 금강산에 우리가 정말로 가고 있다. 이런 것을 일러 꿈같은 현실이라고 하는 것인가”(『답사기 5』 19면)라고 감회를 서술하며 서부진 화부득(書不盡 畵不得), 즉 ‘글로 다할 수 없고 그림으로 못 그린다’는 명구를 반복 인용하며 한국 산수의 정수로서 금강산을 해석한다. 금강산의 여러 암봉, 계곡, 폭포 등을 자연의 극치로 찬탄한다.

구룡폭포에 대해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구룡폭포는 높은 벼랑 위에서 사정없이 쏟아지며 구룡연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다시 힘차게 솟구쳐 서슬 푸른 포말을 일으키며, 바람이 막힌 골 안에서 회오리쳐 싸락눈 같은 물방울을 사방으로 흩뿌린다. (…) 이제까지 금강을 예찬하며 사용한 그 모든 장엄하다는 표현이 여기서 무안하게 느껴진다.”(같은 책 143면) 절, 암자에 얽힌 인문 이야기와 미적 가치에 대해서도 왕왕 입체적인 복원을 시도한다. 나아가 그는 금강산은 “조선심(朝鮮心)의 물적 표상(表象), 조선정신의 구체적 표상”이라 말하는 최남선의 문장을 인용하며(같은 책 22면), 문화유산이 한민족의 정신적 동질성을 입증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답사기』 북한편은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을 감성적이면서도 치밀한 필체로 전달하며, 독자로 하여금 접근 불가능한 유산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많은 디테일이 있지만 총체적으로 보아 북한 문화유산에 대한 답사를 통해 민족적 서사 복원을 도모하고, 분단의 현실과 단절로 생긴 아픔을 문화적 기록으로 치유하며, 문화유산이 남북의 동질성을 되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책 전반에 흐르는 감동은 북한 땅에 숨겨진 유산이 우리 민족의 이야기임을 확인하고, 모두가 공유할 미래를 위해 복원되어야 한다는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문화유산을 ‘분단의 희생물이 아닌 통일의 매개체’로 재탄생시키고자 한 것이다.

 

 

5. 동아시아 연대와 문화공존의 가능성

 

다음으로 일본편과 중국편은 중국 실크로드 문화와 일본 명찰·정원·다도문화 속 ‘한국문화 정체성’을 살피며 ‘한반도를 중심축으로 연계되는 동아시아 문화’의 각도에서 서술된다.

일본편은 단순한 비교보다 일본 속의 한국문화와 일본문화의 정수를 찾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할 것이다. 저자는 한국과 일본 사이 감정적으로 경직된 시선을 넘어, 상호작용의 역사와 문화교류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한쪽의 일방적 해석이 아닌 쌍방적 시각을 강조하며, ‘동아시아 역사 속 양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고 누차 밝히고 있다. 한편 중국편에서는 중화주의나 민족주의를 넘어, 중국은 동아시아 문명의 동반자이자 우리의 정체성과 좌표를 재확인할 장이라는 문제의식이 확연히 드러난다. 중국의 역사·문화와 우리나라의 연관을 통해 우리 정체성의 기원을 탐색하며,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좌표까지도 반추하게 한다.

일본편에서 저자는 큐우슈우(九州), 아스까(明日香)·나라(奈良), 쿄오또(京都) 등 일본문화의 중심지를 꼽아 상세히 답사한다. 큐우슈우에서는 ‘빛은 한반도로부터’라는 표현처럼, 일본문화의 출발점에 한반도(특히 백제) 도래인을 연결시키고, 도자의 신이라 불린 조선 도공 이삼평의 발자취를 좇는다. 그리하여 아스까·나라에서는 백제계 사원, 불상 등 일본 고대문화의 한반도 영향을 구체적으로 짚고 쿄오또에서는 역사 진행 속의 사찰, 일본의 독자적인 정원미학과 다도, 조형미의 심층을 탐험하면서, 서로에게서 배운 것, 영향받은 것, 완전히 다른 것을 유연하게 비교한다. 반복적으로 한국과의 직접적·간접적 연계성을 추적하는바 일본 사찰, 도자, 가마터 등에서 백제계 승려·장인 출신의 흔적을 발견하고, 한반도 유민의 집단이 일본 내에 심어놓은 영향력과 문명의 흐름도 명확히 설명한다.

중국편은 3권으로 구성되어 시안(西安, 서안)과 허시저우랑(河西走廊, 하서주랑), 둔황(燉煌, 돈황)과 모가오쿠(莫高窟, 막고굴), 실크로드 등 중국과 서역 문화의 교류를 탐구한다, 한무제와 실크로드의 출발점 시안,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불교문화, 실크로드 위에서 명멸했던 여러 도시국가 등을 주의 깊게 답사하며 나아가 ‘한국문화의 모태’와 이어지는 지점들을 의식적으로 짚어낸다. 답사지의 지리·역사가 단순히 중국의 것이 아닌, 한반도 문화와 동아시아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꿰는 통로임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고구려·신라·백제의 사신 외교, 불교문화 전파, 문자·학문·예술의 확산 경로 등 상호교류의 역사적 실체 및 우리 역사와 세계사의 연결고리를 적극적으로 탐구하기도 한다.

종합적으로 보건대 저자는 편협한 자민족중심주의나 국수적 감정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적 상호작용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통하여, 한일·한중 간의 공감·소통·연대로 평화로운 문화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일본과 중국 모두에서 한국적인 것과 동아시아적인 것, 양자의 토양을 명확히 분석하여 한국문화의 도전과 응전, 자부심과 동시에 열린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스카 들판에 백제꽃이 피었습니다’라는 표현(『답사기 일본편 2: 아스카·나라』의 부제』)도 그렇거니와 쿄오또 다완(茶碗)의 미학과 다양한 종류에서 한일 교류의 증거부터 일본 차문화의 독자적 발전을 제시하는 것(『답사기 일본편 5: 교토의 정원과 다도 ‘일본미의 해답을 찾아서’』)도 그러하다. 저자는 이같은 문화적 영향과 변용의 구체적 실상을 우월성이 아닌 공존과 창조적 수용의 맥락에서 해석한다. 중국편에서 신라 유학생과 승려의 중국 시

안(실크로드 도시 장안長安) 진출과 동아시아 지식장에서의 네트워크로서 한국의 위상을 제시하면서 단일 민족국가의 틀을 넘어선 동아시아 교류와 연대의 실체를 조명하는 점도 미덕이다.

 

 

6. 동아시아 인문학적 자산의 지속 심화를 기대한다

 

유홍준의 『답사기』는 후속권을 예고하는 시리즈이기에 앞으로 답사지역이 더 폭넓어지고, 고전의 전승뿐 아니라 근대 문화유산과 생활유산에 대한 균형적 조명도 있으리라 기대하게 된다. 다양한 해석 주체의 목소리를 담은 다중시점 서술의 도입, 전통문화의 아름다움 이면에 존재하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비판적 성찰, 해외편에서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상호 교섭성·경쟁성·역사적 갈등을 보다 직시한 서술 등이 심화된다면 더욱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저자는 22권에 걸쳐 문화유산을 고정된 과거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재탄생시켰다. 최종적으로 동아시아 문화의 반성적 인식을 통한 공감과 상생, 문화공동체의 지향이라는 각도에서 그 의의를 생각해볼 때, 그의 작업은 동아시아가 상호 증오의 역사만이 아닌 공유문명의 역사를 가졌음을 유물로 입증함으로써 문화공동체 의식의 정서적 기반을 구축하고, 그 나름 역사적 화해의 물증을 제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일본과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답사기가 한국 민족주의에 경사되어 있어 자신들의 입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문제제기할 수 있고, 동아시아 근현대의 트라우마, 정치적 갈등, 각국 내부적 다양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낭만화된 동아시아상을 노출했다는 지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도는 한중일이 공동의 문화 DNA를 가진 형제임을 상기시키며 민족주의의 경계를 허물고 유산 보전을 동아시아 공동의 책임으로 새롭게 인식하게끔 하는 중요한 제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답사기는 동아시아 각국이 불행한 역사를 직시하면서도 그 너머 공동 문화유산으로 연대할 당위성을 제시한 점에서, 공감과 상생을 통한 동아시아 평화 구축을 위한 필수 인문학적 자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유홍준 『답사기』적 인식의 동아시아적 소통과 토론, 공유를 위해 기왕에 발간된 일본어판 외에 중국어판의 출판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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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初探1990年代韓中文化遊記熱的興起」, 제3회 세계 화문(華文) 기행문학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行走的愉悅』, 明報月刊出版社 2013.

박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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