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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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미래 질문자로서의 시인

 

 

박승민 朴勝民

시인. 시집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 『끝은 끝으로 이어진』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 등이 있음.

84blueeee@naver.com

 

 

 

황규관 시인을 만나러 간 날은 7월 초인데도 35도를 달렸다. 유럽은 2,300여명이 온열질환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충남 지방엔 200년 만에 최악의 폭우로 집과 농경지가 잠겼다. 작은 하천 몇개가 마을을 쓸고 갔다. 그러고 보면 근대문명이 야기한 이 재앙과 이번 시집 『뒤로 걷는 길』(창비 2025)은 깊은 연관이 있다. 우선 표지가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푸른색 하늘이 미래의 마을처럼 바다 위에 펼쳐져 있다. 조금씩 조금씩 하늘이 바다 쪽으로 내려오면서 허공을 확 열어젖힌 느낌이다. 이 예사롭지 않은 표지와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2015년 어름인가, 경기민족미술인협회의 세월호참사 관련 도록작업을 할 때 어느 작품이 가슴을 쳤는데 누구 작품인지는 그땐 몰랐죠. 이후 경북 성주 사드기지 반대집회에 몇번 참석한 적이 있는데, 대구에서 우연히 차규선 작가를 만나게 됐고 그 그림의 작가라는 것도 알게 됐죠. 아마 그때부터 그는 저의 독자가 됐고 저는 그의 그림 앞에 자주 서게 된 것 같습니다. 표지에 사용하라고 작품을 흔쾌히 허락해준 차규선 작가와 애써 디자인해준 창비 디자이너와 편집부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번 시집에 대해선 할 말이 너무 많아 고민이다. 먼저 시집 곳곳에 이정표처럼 박혀 있는 전북 전주, 삼례가 궁금하다. 고향은 아무래도 시인의 감성을 원천징수하는 곳이자 “귀퉁이가 무너진 마음”(「폐허에 서서」)으로 찾아가는 피정처이기도 하니까. 고향을 떠나 도시를 떠도는 영혼들에게 고향 말고 믿을 구석이 어디 있을까. 「밭 한뙈기」 「불타는 밀밭」 「폐허에 서서」 「차비 얼마」에서는 고향과 어린 시절,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불타는 밀밭」에서 “우리에게서 사라진 것”이 “밀” “목화” “메밀”이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농촌은 “경제성장”의 “발명”으로 “새까만 슬픔”이 수십년째 켜켜이 쌓였고 이제는 폐허로 공동화(空洞化)된 채, 그 슬픈 마을조차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다만 이 시에서 “껍질로 팽이채를 만들던/닥나무도 닥나무 껍질을 삶던/마을 가마솥도 가마솥 주위의/봄볕도 사라져버렸다”고 했는데, 나는 “마을 가마솥”이란 단어에 갸우뚱했다. 우리가 거세해버린 어떤 공동체적 삶의 상징 같은데, 내가 자란 경북 북부지방에는 없는 것이다. 이 마을 가마솥과 함께 삼례에 살던 어릴 적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 가마솥은 삼례에 살 때 것이 아닙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삼례로 이사 오기 전에 잠깐 살았던, 완주군 상관면의 쑥재라는 산골마을에 있던 겁니다. 쑥재는 소달구지가 운송수단인 마을이었죠. 그때 저희가 살던 집은 마을에서 유일한 초가집이었고 전깃불도 안 들어와서 호롱불을 켜야 했습니다. 마을 공용으로 커다란 가마솥이 있었는데, 제가 본 것은 닥나무 껍질을 삶는 광경이었습니다. 삶은 닥나무 껍질을 크게 뭉쳐서 전주에 있는 종이공장에 보낸다고 들었습니다. 가마솥 주변으론 볕이 아주 잘 들었고요. 삼례로 이사 올 때 만경강을 건너는 차 안에서 저는 세상에서 그렇게 긴 다리를 처음 건넜고 그렇게 넓은 들판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강 위를 가득 날아다니는 백로떼를 보고는 어떤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맨날 참새나 꿩 같은 것만 보다가 그렇게 많은 흰 새를 본 게 처음이었으니까요. 그게 원체험이었나 봅니다. 이사한 삼례에서 본격적으로 강과 들판을 만난 셈이지만, 사실 삼례에서도 만경강의 지류 중 한갈래인 전주천 주변에서 내내 살았습니다. 전주에서는 태어나 아홉살까지 살았는데, 제 기억의 시작은 전주천 근처 ‘좁으목’이라 불리던 동네에 살던 네댓살 무렵부터입니다. 지금 국립문화유산원이 있는 곳이고 한옥마을 근처지요. 전주천에서 까맣게 타도록 멱도 감고 물고기랑 대수리도 잡고 꿀을 빨아 먹다 벌에 쏘인 기억도 납니다. 그러니까 유소년 시절을 같은 물길에서 산 격이죠.

 

 

쑥재라는 산골에 살던 소년이 ‘신세계’처럼 만난 큰 강, 강에 꽉 들어찬 흰 백로떼, 상상을 초월한 긴 다리, 무량무량 넓은 삼례들판. 이런 것들이 어린 소년의 눈에 어떻게 인화되었는지를 상상해본다. 도시와 공장으로 떠돌 때마다 시인의 몸을 따라갔을 그 ‘첫 장면’을 생각해본다. 시인 황규관 하면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하는 시인이다. 시라는 게 문사철(文史哲)이라는 탄탄한 나무의 뿌리에서부터 길어올린 어떤 ‘푸른 싹’ 같은 건데, 요즘은 이런 기반들이 조금씩 무너지는 느낌이다. 문학 안쪽만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시의 내용까지도 점점 옹색해지는 느낌이다. 그는 책을 통해 다른 책으로 이동한다. 이 책이 저 책을 소개하는 매파(媒婆)지만, 실질적 매파는 다름 아닌 시에 대한 그의 ‘갈증’이다. 시의 끝에 닿겠다는 그의 ‘열망’이다. 김수영, 니체, 하이데거를 거쳐 최근에는 동학까지 와버렸다. 김수영에 대해서는 저서 『리얼리스트 김수영』(한티재 2018)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책구름 2023)를 통해 독보적인 ‘읽기’를 보여준다. 이번 시집에도 「나의 혁명」 「거대한 적」 등에서 김수영의 영혼이 잠깐씩 스쳤다 지나간다. 김수영 시인은 ‘적’도 많아서 「적 1」 「적 2」를 썼지만 김수영의 적이 한국적 후진 정치와 근대문명 안에서 발생한 적과의 싸움이라면, 황시인은 근대문명 자체를 적으로 삼는다. 김수영이 황시인에게 남긴 유산이 적지 않은 걸로 아는데, 시인 김수영은 어떤 존재인가? 시인의 공부란 무엇인가?

 

이제는 김수영 시인과 시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마음이 크게 없습니다.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를 쓸 때 나름 다 쏟아낸 느낌입니다. 해서 지금은 김수영에 대한 다른 물이 고이지 않은 셈이지요. 그후로 김수영의 시를 읽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저는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것보다 더 바닥을 긁어 말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공부를 한 느낌을 주는 것도 이런 성정 때문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에 공부를 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 공부’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한 시적 욕망이 이런저런 책을 읽게 했고 그게 모두 시 공부여서인지 읽으면 가슴이 뛰는 바가 있고, 현실에 대한 고민에 작은 불빛을 불러주는 것 같아 짬짬이 읽었을 따름입니다.

 

김수영은 그가 30대 후반부터 ‘제대로’ 읽은 시인이다. 시에 대한 행로가 보이지 않을 때, 특히 현실에 대해 어떤 시적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허우적댈 때 읽었다고 한다. 읽을 때마다 느꼈던 건 김수영이 자기 시대를 맞는 정직한 태도였다. 타협은 않되 시대를 ‘같이’ 살면서 돌파하겠다는 어떤 의지 같은 게 느껴졌다. 여기서 ‘의지’는 심리적인 결단 혹은 태도와 무관한데, 그것은 김수영 자신이 가진 내재적인 힘이 아닐까 한다고. 김수영이 가진 그 힘이 세계와 역사를 외면하지 못하게 했던 것 같고 그 힘은 다름 아닌 정직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김수영에게는 성경신(誠敬信, 정성・공경・믿음)이 다 있지 않았나 싶다는 시인의 말이 자못 흥미로웠다. 그에 따르면 성경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일단 자기연민 같은 게 없다. 역사에 무엇을 했다는 유공자 의식도 없고, 또 자기가 산 시대에 대한 쓸데없는 자만심도 없다. 종종 김수영 시에서 보이는 날카로움은 이런저런 아상(我相) 때문이 아니라, 김수영의 성경신이 답답한 현실과 부딪쳐 발생한 불꽃일 뿐이라는 것이다. 김수영은 고은에게 보낸 엽서에서 “부디 공부 좀 해라” “철학을 통해서 현대 공부를 철저히 하고 대성하라. 부탁한다”(1965, 「고은에게 보낸 편지」,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18)고 한 적이 있는데, 황시인은 “현대 공부”라는 말에 마음이 기운다고 했다. 시인 자신이 사는 시대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공부다.

 

황규관은 현실에 대한 거대서사에만 능한 것이 아니다. 「동백나무 아래서」를 보면 오히려 섬세한 낭만주의에 가깝다. 한 시인이 이성과 감성의 양날을 모두 다 잘 다루기는 힘든데, 타고난 듯 이를 잘 조율한다는 점에서 그는 만경강의 영락없는 직계(直系) 같다. 가령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려서” 시인은 “동백나무 아래로” 간다. 거기서 “국수를 먹고 혼자 술 한잔”하고 나오니, “꽃이 붉더라”고 감탄과 탄식 사이를 오간다. 비는 계속 내리고 ‘나’는 동백나무 곁을 떠나지 못한다. “동백나무 아래 서서/나는 나의 사랑을 사랑하게 되었다/비 내리는 소리에 귀가 열려서/누추를 입고 밖으로 나오니/동백나무가 말없이 푸르더라/그 아래 서서, 떠나고 없는/사람 쪽으로 다시 기울어지면/내 안에 있는 씨앗이 까맣게 아프더라/동백나무 아래서/다시 허공을 바라보니/동백이 동백이 아니더라/여태껏 나는/모든 나무가 동백이었고/떠난 사람도 동백이었더라/동백이 없는데 모든 게 동백이었더라”라고 탄식하듯 뱉는다. 그렇게 “떠난 사람”도, 동백나무가 아닌 나무도, 심지어 “허공”과 동백나무 주위의 배경, 과거의 시간, 나의 아픔까지도 모두 “동백”으로 입체화하는 장관을 보여준다. “깊이 없는 높이 사이를”(「뒤로 걷는 길」) 서성거리는 것이 서정시처럼 쓰이기도 하는바 서정시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요즘엔 서정시라고 했을 때, 시인 자신의 현재 감정상태를 감상적으로 토해내는 걸 말하는 것 같습니다. 좀 독하게 말하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꾸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죠. 중요한 건 서정이라는 것이 추상적인 심리상태가 아니며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정은 삶의 우여곡절의 결과인 것이지, 미리 이러저러하다는 서정은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한 억측일 뿐입니다. 서정은 삶이 지나온 시간이나 장소에서 겪은 일들을 통해 형성되고 또 계속 형성 중인 것인데, 여기에는 바라는 게 무엇인지가 참여합니다. 서정은 서사가 만들고 꿈이 가꿉니다. 김수영이 「거미」(『김수영 전집 1: 시』, 민음사 2018)에서 그러잖습니까. 자신이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요. 서정시를 시인 자신의 심리적 배설이나 위안으로 삼는 것, 자신이 겪은 사건이나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 이런 것들은 결과적으로 서사가 없는 서정입니다.

 

시라는 것도 역사의 진행과 함께 가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역사의 압력에서 개별자로서의 시인이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시인이 쓰는 시는 역사 너머를 꿈꾸어야 한다고 본다. 역사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압력이란 것이 도대체 무어냐고 따져 물으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의 어느 시(「장시」)에서도 표했지만, ‘우리가 사는 역사는 인간만이 만들어가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입니다. 시는 시인의 서정 외에 지금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무엇까지도 담아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서정시는 오롯이 시인의 자아로 밀고 가는 것 같지만, 그 자아도 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거죠. 인간의 자아는 한계를 의식하면서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외부를 느낌과 동시에 자기 내부에서 그 한계를 대하는 어떤 것이 샘물처럼 솟아오르거든요. 그게 자아이며 그것의 심리적 번역이 서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외부에 대한 내부의 대응, 응전, 고뇌, 욕망, 바람 등등이 서정을 이룰 터인데, 문제는 이것들의 열도와 강도 아닐까요?

 

쇼팽의 「녹턴」 정도가 내가 아는 클래식의 전부인데, 이 ‘말 없는 말’을 듣고 있으면 수많은 서사가 문턱을 넘나든다. 옛날과 현재가 한 이야기로 얽혀서 어딘가로 흘러간다. 어떤 이야기의 길목을 지날 때면 난데없이 ‘울컥’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아마 서정에도 각자만의 서사가 일으키는 어떤 기억의 여울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저녁노을 2」나 「마지막 강」 같은 시도 소리 내어 읽어보고 싶다.

 

 

이런 ‘황규관류’의 서정시를 문맥 그대로 읽어도 좋겠지만, 그가 생략해버린 문자 밖의 언어와 서정을 복원해서 읽는 것도 깊은 재미라고 생각한다. 가령 시를 받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그 밑바탕, 예컨대 근대적 일상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나’가 거기 있고, 그 싸움에 번번이 지고 돌아오는 또다른 ‘나’가 거기 있으며, 그럼에도 다시 한번 “나의 강, 나의 힘”(「마지막 강」)이라고 항변하면서 생활의 전투력을 고양시키는 파토스의 힘이 황규관류 서정시의 참맛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지막 강」은 죽음의 냄새가 너무 강하다. 생과 사 사이에 놓인 강이 떠오른다. 누군가 그 ‘강’을 막 넘어간 것도 같다. “아, 선생님은 벌써/강을 훌쩍 건너셨구나”라는 대목은 돌아가신 김종철(金種哲, 1947~2020) 선생님을 말하는 듯하다.

 

김종철 선생님 발인 날, 새삼 헤아려보니 선생님을 딱 십년 뵀더군요. 대부분은 동무들과 함께하는 자리였지만 몇번은 개인적인 고충 때문에 따로 뵌 적도 있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이런 생각도 가끔 해봤습니다. 제가 김종철 선생님을 모르고 살았다면, 또는 『녹색평론』에 실린 글을 간간이 읽는 관계에 머물렀다면 지금의 내 시가 어땠을까? 언제나 선생님은 시인의 마음과 태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일년 뒤에 「시인 김종철」이란 산문을 쓰기도 했고요(『문학이 필요한 시절』, 교유서가 2021). ‘시인의 마음’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가까운 것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죠. 저는 김종철 선생님이 생태사상가며 환경운동가라기보다는 세상의 아픈 것들과 함께 아파하는 시인이었다고 봅니다. 그것 없이 당신의 생태사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글보다는 실제 모습과 목소리에서 시인의 길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약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런 가정을 해보는 것이죠. 선생님은 저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큰 흔적을 남기셨죠. 솔직히 시집이 나올 즈음, 갑자기 이번 시집은 선생님께 배운 눈과 마음으로 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어림도 없는 결과물이지만요.

 

우리는 김종철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한분을 잃은 상태다. 한편으로 선생께서 지금의 우리보다도 더 젊었을 때 활발하게 활동하셨던 걸 생각하면 이 지지부진한 세계에 대해 우리도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든다. 황규관도 같은 마음일 터, 이번 시집 『뒤로 걷는 길』은 근대문명이 손을 댄, 손을 댈수록 망가지고 부서지는 현장을 격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전 시집인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문학동네 2019)에도 주된 흐름으로 나타나지만 이번 시집을 통해 보다 더 구체화되고 확장된다. 예컨대 「흐르지 않는 강」 「제3의 세계」 「재앙이 되자 한다」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시에 그런 참상들이 화인처럼 박혀 있고 표제작 「뒤로 걷는 길」과 4부의 「장시」에 그것이 집약되어 있다.

「뒤로 걷는 길」을 잠깐 인용하면 “벌겋게 타는 숲이나/흙탕물에 휩쓸린 도시를 보면/자꾸 발길이 뒤로 향한다” “떨어져 죽고/불에 타 죽고/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죽는 세계로/산자락을 베고 무너뜨리며/더는 갈 수 없을 것 같다/이제는 앞을 보며 뒤로 걸어야지/어둠이 되어/어둠을 사랑해야지/뒤가 앞이 되게 해야지/뒤도 앞도 사라지게 해야지”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제 미국 캘리포니아나 호주의 산불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 전에는 안동과 의성 일대에 큰 산불이 났는데, 소나무가 불쏘시개 역할을 한데다 매서운 강풍이 불며 바닷가인 영덕까지 날아간 것은 산불조차도 기후위기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산업재해 역시 악순환처럼 반복된다. 고(故) 김용균씨의 참상이 잊히기도 전에 김충현씨가 또 동일 사업장에서 사망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무력한 듯하며, 이들 모두가 비정규직이라는 점에서 ‘죽음의 외주화’ 역시 당면한 일상이 되었다.

이번 시집에는 “전태일”(「풀빵 한봉지」 「오막살이집 한채」) 열사나 “이소선 어머니”(「어머니」)가 나오는데, 이제 전태일의 열사정신은 비정규직 문제에서 그 의미가 새롭게 구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AI가 산업현장에 본격 투입되면 현 직업의 60퍼센트 정도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미국은 트럼프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제경찰’ 흉내를 내던 할리우드식 액션마저 벗어던지고 이민국을 통해 수만명의 미등록체류자들을 추방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일년 사이에 팔레스타인 사람 4만 5천여명이 사망했으며 최근에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까지 있었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불꽃놀이하듯 수억씩 하는 미사일이 날아가는 장면을 시청했다. 우리의 경우 12・3 내란 후 이재명정부가 들어섰지만 역시 경제 살리기, AI산업 육성 등 화석연료에 기반한 성장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런 점에서 「뒤로 걷는 길」은 이 참혹한 근대문명을 버리고 뒤로 가자는 호소처럼 들린다. “이제는 앞을 보며 뒤로 걸어야지”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앞’이라고 생각했던 미래는 앞이 아니라 ‘뒤’이며, 우리가 ‘뒤’라고 생각했던 그 ‘뒤’가 우리의 미래일 수 있다, 그러므로 ‘뒤로 걷는 것이 앞으로 가는 것이다’라는 역설이되, 역설이 아닌 절묘한 촌철을 낳는다. 물론 그 ‘뒤’라는 것이 전근대적 농촌사회로 되돌아가자는 말은 아닐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거의 300년 이상을 이런 식으로 살아온 인류에게 살아온 삶의 관습과 감정을 하루아침에 버리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다만 “뒤가 앞이 되게 해야지/뒤도 앞도 사라지게 해야지”라는 말은 하나의 시적 이데아로서 충분히 값진 생각이며 “뒤도 앞도 사라”진 세계, 모든 차별과 모순이 사라진 ‘절대세계’를 꿈꾸는 것은 시인의 사명이자 긍지이다. 이번 시집을 통해 시인 황규관이 보는 근대문명의 근본적 급소와 대안적 발상이 궁금하다.

 

김종철 선생님의 철저한 근대 비판과 비근대적 삶에 대한 역설을 접한 뒤로 제 경험의 의미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근대병을 앓고 있다는 입장인데, 그 증상과 정도는 다르죠. 사실 공장에서 벌어지는 산업재해도 본질적으로는 근대적 현상이죠. 앞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이 강력해진다 해도 어이없는 죽음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은 근대병에 걸렸다고 인식하지 못하며 도리어 근대가 이루어낸 물질적 풍요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질병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어느정도 벗어난 점을 들어 근대를 재촉할 거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런 성취들이 허무한 것은 왜일까요? 만일 시가 ‘절대세계’를 꿈꾼다면 바로 이 허무 때문일 겁니다. 이것을 모른 척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최소한 이 허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든가, 아니면 허무를 삶의 기쁨과 활력으로 바꿔야죠. 그런데 시 자체에 무슨 특별한 권능이 있는 걸까요? 저는 현대시가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것, 혹은 부지불식간에 버린 의미와 가치에 대한 예민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최근에는 근대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대안에 대해서도 마음을 비우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시의 마음’의 회복, 그것도 계속적인 회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죠. 여기서 시의 마음은 우리는 서로 연결되었으며 서로 의지하면서 사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너’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음이죠. 하지만 아직은 이 마음이 모두에게 무차별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아니 꼭 근대가 아니더라도 ‘나’와 ‘너’는 삶을 꾸려나가면서 오염되기 마련입니다. 오염된 것을 정화한 다음에 같이 살자는 것이 아니라, 그 오염된 것을 서로 솔직하게 봐주고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민중은 수도자가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지렁이처럼 끊임없이 움직여서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존재에 가깝죠. 이를테면 저는 해월(海月, 제2대 동학 교조) 선생이 도망 중에도 쉬지 않고 일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고 봅니다. 민중에게 쉽사리 윤리나 수양을 들이밀 순 없지만 오염된 것을 아닌 척 가려주는 속임수 말고, 서로의 단점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함께 산다면, 그 과정을 통해 오염된 곳에서 새살이 나올지도 모르죠.

 

이 근대라는 오물 속에서 황규관이 말한 시의 마음이 사람과 사물 속으로 끊임없이 삼투해서 서로의 오물이 옥토로 바뀌는, 그 위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초록들’을 상상해본다. 이번 시집 4부는 동학 혹은 해월 최시형 선생에 대한 언급이 많다. 또 작심하고 쓴 시들이 집중되어 있다. 가령 1980~90년대 우리가 열광했던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는 탁월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 허리를 자르고 나온 사회주의 역시 채 백년을 넘기지 못하고 소멸하고 만다. 구소련이나 중국, 북한을 보더라도 소수의 자본가가 소수의 관료계급으로 대체되었을 뿐 생산양식은 여전히 근대적 양식 즉, 자본주의적 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놓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근대가 낳은 이란성 쌍생아 같다. 자연 수탈에 의존한 끊임없는 재생산과 기계화가 발전동력인 근대를 근대체제로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도 조금씩 접게 된다. 때문에 사회주의 몰락 이후로 지지부진한 문학담론장 역시 이 난제 속에 지체와 정체를 반복한다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 황규관의 관심이 동학으로 옮겨간 점은 아주 자연스러운 귀결이자 숨통 같다. 동학이 왜 이 시점에서 중요한가?

 

 

 

저는 사회주의에 대한 발상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사회주의는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의 급진적인 사상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민중공동체의 영원한 전통에 가깝습니다. 그것을 괴롭힌 것이 중앙집권적 국가였고, 유럽에서는 최종적으로 자본주의가 그것을 파괴해버렸죠. 공유지를 운영하던 농촌 꼬뮌을 인클로저(공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 확립 및 지주의 토지 소유 집중 과정)가 박살내버렸잖아요. 그래서 농민들이 공장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노동조합은 잃어버린 ‘꼬뮌의 복원’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예전처럼 땅이라는 공통된 지반을 갖지 못한 채 맺어진 계약관계로서의 꼬뮌이었죠. 또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국가들을 사회주의의 실례로 명명하는 게 맞는지도 의문입니다. 동시에 사회주의가 맑스의 말대로 경제적 생산양식의 문제인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고요. 제가 동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말씀하신 대로 근대의 쌍생아로서 서구식 사회주의 관념과 상상력으로는 우리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입니다. 그렇다고 동학만이 대안이라고 할 수는 없죠. 다만 저는 19세기 말 조선의 민중이 왜 동학에 자기 삶을 걸었을까, 어떻게 조선 민중 30퍼센트 이상이 동학이라는 사상으로 몰려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세계사적 사건이었잖아요.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만일 동학농민혁명이 성공했더라면 혹은 타협을 통한 부분적인 승리라도 쟁취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해보길 권하곤 합니다.

 

역사적 상상이 때로 현재의 혼돈을 넘어 미래의 활로를 열기도 한다는 그의 말에 부분적으로 수긍한다. 상상력은 또다른 길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동력이니까. 「우물물」은 경주 용담정에서 수운(水雲, 초대 동학 교조) 선생이 오만년 만에 한울님을 만나 마침내 깨우침을 얻는 희열을 노래한 시 같다. 주목할 시는 뒤에 이어지는 「말씀 하나 달랑 메고」인데 이는 해월 최시형 선생이 수운 선생의 말씀을 더 깊게 공부한 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아서 민중들에게 전하는 장면을 그린다. 최근에 김용휘의 『평민 철학자 해월 최시형』(모시는사람들 2025)을 감명 깊게 읽었던 터라 장면 장면이 새롭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우주적 감수성’이라는 말도 신박했고 어쩌면 지금 당장 필요한 ‘만국 공용어’처럼 들렸다. 그런데 해월 선생 말씀 중에 물물천 사사천(物物天 事事天)은 읽을수록 백미다. 물론 불경에도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이라는 말이 있지만, 물물천 사사천이란 물건과 물건마다 한울님이 있고 일과 일 사이에도 한울님이 있어 아주 하찮고 작은 물건이라도 늘 중하게 여기며, 일을 함에 있어서 늘 한울님을 모신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하라는 말이어서 이 여섯 글자만 실천해도 쓰레기가 산을 이루고 미세플라스틱이 산호초를 뒤덮은 살풍경이 절반쯤은 사라질 것 같다.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은 일로 인해 생기는 큰 오해나, 최근 내란사태로 진영간의 갈등이 폭발 직전인 상태를 풀 수 있는 묘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월사상’의 탁월함에 대한 시인의 해설본이 궁금했다.

 

해월 선생이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다)을 말할 때 동질기화(同質氣化)와 이질기화(異質氣化)를 말하는데, 상호부조는 동질기화를, 이천식천은 이질기화를 이루는 작용이죠. 비유하자면 사람이 사람들끼리는 상호부조로써 기화를 이루고 다른 생명과는 이천식천으로써 기화를 이룬다는 겁니다. 핵심은 바로 기화(氣化), 즉 기의 운동, 변화입니다. 그런데 해월 선생의 이천식천은 수운 선생의 모실 시(侍)에 대한 풀이인 ‘내유신령(內有神靈, 한울님 마음이 내 속에 있다) 외유기화(外有氣化, 한울님의 우주 기운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에 대한 창조적 해석이라는군요.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말을 하는 것은 동학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사물과—사람도 당연히 포함됩니다—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 자체를 기의 운동, 변화로 보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물의 물질성을 데이터로 환원하고 그것을 정보로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강제하는 인공지능 시대에, 온갖 생명체와 비생명체까지 기의 운동, 변화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은 데이터·정보 만능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구식 근대 관념은 주객이 별개라는 생각에 기초해 있는데 사물에서 정보와 데이터를 떼어낼 수 있다는 발상 역시 근대식 발상이죠. 그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라는 대지에서 선주민들을 떼어내 비인간으로 처리했습니다. 대지는 지배의 대상, 자원의 창고로 취급했죠. 그것의 말로가 오늘날 기후위기로 대표되는 생태계 붕괴, 생명의 쓰레기화, 온갖 인간활동과 정서의 데이터화라는 극단적 현상입니다. 이것들은 한뿌리에서 나온 지엽일 뿐이죠. 사물에서 정보와 데이터를 떼어낼 수도 없고, 정보와 데이터가 사물의 요소나 부분이 아니며 단지 공학적 처리의 결과물에 대한 명명일 뿐이라는 것은 바로 해월 선생의 동질기화와 이질기화로서 판명됩니다. 또 해월 선생이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을 말한 것도 천과 인과 물 모두가 기화작용의 순환 속에 있으며, 그것의 인격적 호명이 한울님인데, 그러니 하늘과 사람과 사물 모두에게 공경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본 거죠.

 

특히 해월 선생이 사물을 공경해야만 천지기화(天地氣化)의 덕에 합일한다고 한 것은 어느 근대적 생태사상보다도 심오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인공지능 시대의 데이터 환원주의를 극복할 묘수를 동학에서 찾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만물을 정보나 데이터로 환원하지 않고 신령이 담겨 있는 존재로 보며 기화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 말이다. 그가 일러주기를 1894년, 백산에서 봉기한 전라도 동학농민군들이 4대 명의(名意)를 선포하는데, 그 첫번째가 불살인불살물(不殺人不殺物)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물’은 ‘인’과 같이 썼으니 사람 아닌 다른 존재자, 즉 생명이 있는 목숨붙이든 도구로 쓰는 물건이든 죽이거나 함부로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동학은 알고 그랬건 모르고 그랬건 이미 근대문명의 폐단을 넘어서서 말했던 것이다.

근대문명의 안티테제로서 동학이 가진 물(物)에 대한 공경심, 이를 넘어서 물을 천지부모(天地父母)처럼 섬겨야 하는 존재로 격상해서 보는 관점은 인간중심의 근대문명, 그로 인한 파국을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관점의 일대전환을 촉구하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한편으로 「포고문」에서는 동학혁명 당시의 포고문 형식을 빌려오되, 시인이 현재의 시점에서 작금의 문제로 내용을 바꿔 쓴 대목이 재미있었다. 당시 포고문이 정치・사회 문제에 집중되었다면 이 「포고문」은 “흐르는 물을 막지 말며” “꽃잎에 앉은 나비를 쫓지 말며” “땅에다 포탄을 떨어뜨리지 말며” “울음과 웃음을,/바람과 풀을 갈라놓지 말며” “뛰는 가슴을 부끄러워 말며”같이 정서적 차원으로까지 확대해놓았다는 점에서 역시 황규관류의 개성이 빛난다. 여기서 황규관류라는 뜻은 상식을 뒤엎는 인식의 반전, 정확히 문제의 중심을 찌르는 문장, 이쪽에서 저쪽까지를 단숨에 날아가는 상상의 점프력 등 그의 시에 나타나는 특징을 내 나름대로 거칠게 정리한 것이다. 「삼례들판」은 시인의 고향이 주무대인데 동학 당시 삼례 지방의 형편이 궁금하다.

 

1892년 교조신원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의 2차 봉기가 일어난 삼례들판은 제가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 3년을 누비고 다닌 무대였죠. 하지만 그때는 교과서에서 배운 동학에 대한 짧은 지식이 전부였습니다. 저도 삼례의 지역사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은데요, 전봉준의 법정 진술을 기록한 『전봉준공초』(1895)에 보면 전봉준 장군이 삼례는 약 100호 정도의 마을이고 교통의 요지이며 주막이 많다고 진술한 장면이 나옵니다. 역사학자들이 추정하는 봉기 장소는 지금의 삼례동부교회 부근입니다. 현재는 높은 아파트에 가려져 있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곧바로 삼례들판이 펼쳐졌고 그 끝에 만경강이 있습니다. 아무튼 딱 보면 전주까지 직선거리가 바로 확인되는 장소입니다. 삼례는 만경강 중상류에 위치한 옥토여서 일제 때는 일본인 지주의 농장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때 만들어진 게 지금의 기차역인 삼례역이고, 그 근처의 삼례문화예술촌은 제가 어릴 때는 검게 콜타르 칠해진 미곡창고였습니다. 다만 삼례는 큰 고을이 아니어서 삼례 지역의 동학도가 주가 되어 봉기가 일어났다기보다 지리적 조건 때문에 역사적 장소가 된 것이죠.

 

 

 

그의 몸속에는 여전히 삼례들판과 전주천과 만경강이 쉴 새 없이 드나든다. 그게 그의 시이고 그의 전재산이다. 같은 시인으로서 이번 시집 『뒤로 걷는 길』 이후의 계획이 궁금했다. 어떤 공부를 더 하고 싶은지, 글의 경우 평론이나 산문, 시 중 어느 곳에 더 집중하고 싶은지부터 개인사까지.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은 없습니다. 시는 의식적인 계획을 언제나 배반하고 나온다는 것을 깨달아서요. 그리고 자꾸 공부라고 말씀하시지만, 계획을 잡고 무엇을 읽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계획도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문제가 누적되는 느낌이어서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실마리를 잡아야 하나 막막함이 들 뿐입니다. 이럴 때 해월 선생이 말씀하신 심화기화(心化氣化, 마음과 기운을 조화롭게 가꾸어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다)를 마음 안으로 들여다보고는 하는데 역시 수련이 덜 되어서 마음이 진정되지는 않습니다. 시 말고 다른 글에 대한 질문은 반갑습니다. 변명할 기회를 주셔서요. 사실 쓰고 싶어서 산문이나 평론을 쓴 것은 다 지난 일입니다. 지금은 그 업보 때문이겠지만 청탁을 받을 때 어쩔 수 없이 쓰는 수준입니다. 물론 쓰는 과정은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그것도 좋은 공부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종잡을 수 없는 생각과 어지러움을 그렇게라도 정리하고 나면 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일단락이 되는 것 같거든요. 한마디 더 보태자면, 저는 산문이라 할 현실인식 없는 시적 직관을 크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산문을 쓰는 저 자신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지만, 산문을 쓰는 일과 시를 쓰는 일은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라고 봐요. 물론 이것은 시를 쓰는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그래서 일반화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시 정신’은 현실(산문)과의 강한 마찰력에서 스파크가 일어난다, 불꽃이 셀수록 순도 높은 시 정신이 정련(精鍊)된다,라고 그의 말을 번역해서 여기에 적는다. 시의 영토가 점차 축소되는 시대에, 그럼에도 시가 가진 고유한 ‘영적 힘’을 여전히 믿는다. 비록 도착지는 못 찾더라도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조금씩 달라지고 이 달라진 힘들이 모여 세계의 중심을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진전시킨다는 역사의 작동 원리를 생각한다. 시인 황규관의 역작 『뒤로 걷는 길』 또한 그런 소중한 힘 중의 하나다. 모쪼록 이 시집이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분들과 더 많이 소통하기를 진심으로 빈다. 그게 근대문명의 항체로서 시가 사는 길이자 사람이 사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