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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진짜’에서 벗어나기

성해나의 「스무드」와 「혼모노」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평론집 『갈라지는 욕망들』 등이 있음.

jwhyi@naver.com

 

 

 

1. ‘진짜’의 함정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진품」(The Real Thing, 1892)1은 초상화가인 화자의 작업실에 모나크 대령 부부가 방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군에서 퇴역한 후 불운한 일에 휘말려 전재산을 날려버린 대령 부부는 삽화모델을 고용하는 화가가 있으니 그를 찾아가 모델일이라도 얻어보라는 지인의 조언을 듣고 화자를 찾아왔던 것이다. 화자는 삽화모델 일이 기품있는 대령 부부에게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그들의 간청을 받아들인다.

사실 화자에게는 오랫동안 도움을 받아온 모델이 있었다. 미스 첨이라는 이름의 그 모델은 런던 빈민가 출신으로 볼품없는 외양을 지녔지만 고상한 귀부인에서 양치기 소녀까지 모든 역을 해낼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나크 대령 부부는 경쟁자인 미스 첨에 맞서 자신들은 그녀와 달리 ‘진짜’(the real thing)임을 내세운다. “진품 말입니다. 진짜 신사나 숙녀 말이죠.”(115면) 화자 역시 처음에는 그들의 ‘진짜’ 기품과 근사하고 멋진 몸매에 만족감을 느끼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모델로서 커다란 결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그녀에게 가능한 모든 자세를 취하게 했지만, 그녀는 용케 그 차이를 지워버렸다. 그녀는 한결같은 귀부인이 확실했고, 게다가 어김없이 똑같은 그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진품이긴 했지만 언제나 똑같은 것이었다.”(127면)

모나크 대령 부부 깊숙이 자리잡은 확고한 ‘진품성’은 화자가 구가하는 예술적 변용과 창조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질곡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자신이 진짜 상류계급의 모범적인 모델이라는 생각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기에 끝내 자기 계급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데조차 실패하고 만다. 결국 대령 부부를 모델로 쓴다면 “그들로부터 벗어나 내가 표현하려는 인물 속으로 몰입할 수가 없”(140면)다는 걸 절감한 화자는 그들을 해고한다. 이 과정에서 화자는 미스 첨과 이딸리아 출신 부랑자 오론테 같은 모델이 지닌 특별한 재능의 핵심을 깨닫게 된다. 이른바 ‘하층계급’ 출신인 그 모델들에게는 “어떤 명확한 유형이 없다는 사실”(129면)이 그것이다. 그들에게는 집착하며 내세울 진품성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자신의 품행과 존재를 본질화하여 구속하는 힘을 비웃듯 벗어나 “서로 공통점이 없는 다양한 인물의 모델이 될 수 있”(130면)었던 것이다.

헨리 제임스의 이 소설은 전형성과 재현을 둘러싼 사실주의적 통념을 비판하는 작품으로 이해될 여지가 많다. 세상 어디에도 ‘진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상대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독법에 이끌릴 위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어디에도 진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때론 ‘가짜’가 더 진짜 같을 수도 있다는 역설을 범속하게 전하는 작품은 아니다. 그보다는 진짜에 대한 핍진한 재현의 노력이 오히려 진실한 예술적 창조에서 멀어지는 역설을 제기함으로써 예술의 진리는 진짜를 찍어내듯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에 충실하되 그 진짜마저 넘어서려는 창조의 과정에 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작품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협소한 의미의 사실주의에 대한 비판은 될 수 있을지언정 시적 창조를 통해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형상화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으로 성립하기는 어렵다. 가령 백낙청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사실주의적 재현’과 시적 변용과 창조의 결과로 나타나는 ‘문학적 진리’가 유기적이고 변증법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오래전부터 강조해왔다.2 리얼리즘은 진짜의 중요성을 그 어떤 이념과 사조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지만 진짜 그 자체를 움켜쥐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진짜의 참됨’을 되묻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독려한다. 리얼리즘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뿐만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일, 일어날 수밖에 없거나 일어나야 마땅한 일”3까지 포괄하는 인식을 강조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짜와 가짜의 대립을 넘어 진짜의 참됨까지 근본적으로 묻는 리얼리즘의 사유는 이른바 ‘정동적 전환’ 이후 한층 복잡해진 전선을 마주한 형국이다. 인식론의 핵심 쟁점을 구성해온 진짜와 가짜 혹은 ‘진짜 같은 가짜’와 ‘가짜 같은 진짜’ 사이를 구분하는 까다로운 문제가 객관적 현실이나 사물의 존재 양태를 넘어 개인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내밀한 느낌과 감정으로까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생동하는 힘에 긍정적으로 주목하는 움직임이 강해진 오늘날에는 개인의 감정과 느낌이 사태의 진실을 보증하는 중요한 심급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부당하게 폄훼되어온 감정의 정치적 힘이 복권되었으나 때로 감정은 자신이 규탄했던 이성의 전횡을 유사하게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당신은 진짜를 보고 있는가?’라는 재래의 인식론적 물음이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어떻게 구성된 것인가?’라는 감정사회학적인 물음을 거쳐 ‘내가 그 감정을 ‘진짜’ 느꼈기 때문에 그것은 진짜다’라는 동어반복적이고 절대적인 주관성의 수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느낀 ‘진짜 감정’을 물신화하여 내세우는 태도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감정정치가 우리로 하여금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과 감정을 살피고 관리하는 기법에 힘을 쏟게 하는 반면 “역사적으로 깊어진 민주주의의 감정”4과 같은 정치적인 감정의 존재론에는 무감하기를 강제하는 측면에 의해 강화된다. 이에 맞서 이성과 감정의 낡은 이분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우리가 마주하는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정치화하는 방식을 계발하는 일이 관건이다. 감정이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주체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통해 비로소 현실이 ‘진짜’로 확정되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에게 육박하는 생생한 감정이 더 크고 넓은 진실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기꺼이 열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2. 역사 없는 순수 감정의 덫: 「스무드」

 

황정아는 “역사적으로 깊어진 민주주의의 감정”을 “과거와 현재의 동료 주권자를 향한 우애와 민주주의의 지난한 역사에 대한 경의”를 함축하는 감정으로 정의한 바 있다.5 여기에는 “과거와 현재”라는 역사적 시간의 문제가 개입하는 동시에, 그 역사적 시간이 펼쳐지는 구체적인 장소와 그 장소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끔 이끄는 실천적 인식에 대한 요청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감정은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자아의 사적 소유물로 축소하지 않음으로써 주관적인 감상성에 매몰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놓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소설은 이와 같은 역사적·정치적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을까. 성해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의 한 단편 「스무드」는 이런 물음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그건 이 작품이 “역사적으로 깊어진 민주주의의 감정”을 당대의 시각을 통해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정확히 반대다. 이 소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완벽하게 무지한 인물이 그 무지로 인해 상투적인 감상성에 빠지는 장면을 흥미롭게 극화함으로써 “역사적으로 깊어진 민주주의의 감정”의 실체를 그것의 공백 지대로부터 상상하게끔 이끈다.

소설의 주인공 듀이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하지만 한국인을 찾아보기 힘든 중서부 위스콘신에서 자란데다 한국계라는 출신 배경을 철저하게 억압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해 한국에 관해 완벽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에 쌓여 있는 인물이다. 이야기는 세계적인 조형예술가 제프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듀이가 한국에서 열리는 제프의 전시회를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게 되면서 시작한다. 듀이는 한국에 “뱀술이나 개고기를 파는 상점이 즐비한 우범지대, 낡고 부서진 건물들”(69면)이 늘어섰거나 “시클로나 오토바이로 도로가 혼잡할”(76면) 거라 짐작할 정도로 현대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듀이의 무지는 가족 내에서 ‘한국적인 것’ 일체를 몰아내려 한 아버지의 독단적인 양육방식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단지 ‘아버지 탓’을 하고 넘기기엔 그가 지닌 무지의 폭과 두께가 심상치 않다. 보다시피 듀이는 한국에 대해 그냥 모르는 게 아니라 매우 적극적으로 모르기 때문이다.

일본의 철학자 우찌다 타쯔루(內田樹)가 지적했듯 무지는 단지 앎의 부재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모르고자 하는 주체의 능동적인 의지가 발현된 상태로 보아야 한다.6 한국을 저개발된 제3세계 국가의 하나로 상상하는 듀이의 심상지리(imaginary geography) 또한 현대한국의 발전과 성취에 대한 몰이해 없이는 구성될 수 없는 것이다. 듀이는 이런 몰이해가 자신만의 결점이라기보다 평범한 미국인이 지닐 법한 자연스러운 편견의 산물이라고 변명한다. 언뜻 ‘스무드’해 보이는 이런 자기변명은 그러나 ‘미국인’이라는 집합적 표상이 제프의 작품 「스무드」처럼 매끈한 단일체가 아니라 피부색에 의해 찢기고 분열된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할 때만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듀이가 어디 캘리포니아도 아닌 “백인만 거주하는 동네에서 평생”(74면)을 살아왔다는 건 피부색이 정체성의 표지로 작동하는 미국에서 매일같이 백인과 다른 자신의 피부색을 마주하며 살아왔음을 의미할 터, 그럼에도 그에게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아버지의 교육을 뛰어넘는 (무)의식적인 노력이 개입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계 미국 작가 캐시 박 홍(Cathy Park Hong)은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에서 백인이 주류를 차지하는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계 소수인종의 일원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우울과 분노, 수치심과 두려움을 비롯한 온갖 부정적인 정동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7 ‘마이너 필링스’는 개인의 역사는 물론 자신이 속한 인종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감정에 속한다. 하지만 주류 백인 커뮤니티는 ‘마이너 필링스’를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이를 드러내는 존재를 별것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곤 한다. 주류 집단은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으며 그래서 “무엇을 비판하려고도 하지 않”(「스무드」 71면)는 모범 소수자를 환영하며 그 매끄러움을 안전하게 소비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은 앎의 차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 감정을 억압하는 일이 곧 앎을 도려내는 일이 된다. 듀이가 한국에 대해 내보이는 매끈한 무지는 이렇듯 역사적 감정과 함께 삭제된 앎의 차원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듀이는 최근 유행하는 ‘정동적 주체’와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가 세계로부터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불감의 주체인 건 아니다. 듀이는 한국에서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소박하고 인간적인 감정과 대면하게 됨으로써 ‘마이너 필링스’가 깎여나간 매끈한 공백을 새롭게 채우는 ‘감정 수업’에 돌입하게 된다.

듀이가 새롭게 마주하게 된 소박하고 인간적인 감정의 출처가 ‘태극기부대’의 시위 장소라는 점은 역설적 상황을 구성한다. 태극기부대로 대표되는 극우 시위대는 흔히 확성기로 악을 쓰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과격하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재현된다. 태극기부대에 대한 이런 재현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다.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사고실험처럼 기존의 재현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듀이를 그 집회의 한가운데로 밀어넣어본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듀이는 한국의 역사와 정치에 관해 무지의 베일을 둘러쓰고 태극기부대의 집회 이곳저곳을 배회한다. 그곳에서 듀이는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핸드폰 충전을 도와주며 무료 도시락으로 끼니를 챙겨주는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시위대의 정체를 알 리 없는 듀이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뭉클한 감동을 느낀다. 듀이는 당신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이고 무척 고맙다는 시위대의 말에 “감정의 가느다란 실금이 점차 벌어지더니 뜨거운 무언가가 그 바깥에서 울컥 밀려들어오듯 온몸이 달아”(101면)오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시위대가 듀이에게 베푼 환대와 친절은 보편적인 인류애의 발현이 전혀 아니다. 그건 ‘과연 듀이가 중국인이었어도 그와 같은 환대와 친절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만 던져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시위대의 환대가 이념적인 적대와 정치적 부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 듀이가 느낀 주관적 감정의 ‘순수함’을 퇴색시키는가? 우리는 그 집회의 정치성을 이유로 듀이가 느낀 감정이 진짜가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이런 반문은 우리가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진짜의 함정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와야 할 필요를 오히려 일깨우는 것 같다. 그 협소한 이분법에 갇혀 있는 한 우리는 듀이의 감정이 진짜라는 이유로 긍정하거나 아니면 타인의 감정을 함부로 가짜라고 부정하는 폭력 사이를 왕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듀이의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부에 집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느낀 진짜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와 그 감정을 둘러싼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을 살펴보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건 말처럼 쉽지 않다. 감정은 주체가 마음대로 취사선택해서 탈부착할 수 있는 사물이 아니라 주체를 바로 지금의 그 주체로 만들어내는 요인인 동시에 강력한 관성을 지닌 운동체이기 때문이다. 그 관성을 생각한다면 듀이의 진짜 감정이 이후 더욱 격정적인 것으로 상승해나가는 건 자연스럽다. “알 수 없는 고양감에 젖어들었다. 생애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시끄럽고 이상하지만 뜨거운 이곳에서 나는 분명 그들과 섞이고 있었다.”(108~109면) 이 강력한 정서적 고양감에 힘입어 듀이는 태극기부대가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고 수고를 마다않고 마음까지 내어주는, 온정이 넘치는” “좋은 사람들”(107면)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이때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 주체의 내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난 순수한 것이라는 통념은 그 판단의 강력한 근거가 되어준다. “관리되지 않은 ‘진짜’ 느낌 같은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8 간주하는 통념은 역사·사회, 정치·문화와 독립적으로 솟아나는 감정의 자율성을 신화적으로 추종하게 만든다.

듀이가 미국인으로 안전하게 승인되는 한, 시위대는 듀이에게 얼마든지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사람들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듀이가 느낀 순수하고 인간적인 ‘진짜 감정’이 그것을 생산하고 보증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토대를 몰각하는 한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소설 후반부에 듀이는 시위대원 중 한 사람인 ‘미스터 김’에게 아버지는 자신에게 한번도 한국 얘기를 해준 적이 없으며 그래서 자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 고백을 건넨다. 그렇게 서로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무런 갈등이 없다는 말도 쓸쓸하게 덧붙인다. 듀이가 느닷없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장면은 한국에 대한 듀이의 무관심이 강요된 무지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때 듀이의 무지를 주조하는 요인이 아버지만은 아니다. ‘마이너 필링스’를 도려내고 모범 소수자가 될 것을 은연중에 압박하는 미국 백인사회 역시 듀이에게 그와 같은 무지를 강요한 강력한 요인임은 분명하다. 이렇듯 강요된 무지로 인해 듀이는 “매끈한 세계”에서 순수하고 인간적인 감정을 만끽할 수 있지만 그 순수 감정은 “감정이 무작위로 생기거나 저절로 생기지 않고 다양한 역사적 과정과 관련된다는 점”9을 외면하는 동안에만 유의미하게 기능할 수 있다.

 

 

3. ‘진짜’에게 버림받을 때: 「혼모노」

 

진짜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어째서 어려운가? 앞서 살펴보았듯 감정의 경우 개인의 감정을 자연발생한 순수하고 참된 것으로 간주하는 ‘순수 이데올로기’가 강력한 방해물로 작동한다. 감정을 포괄하는 삶 전반으로 넓혀보면 진짜가 우리를 향해 건네는 밝고 빛나는 ‘행복의 약속’이 우리를 진짜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묶어두는 강력한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혼모노」(『혼모노』)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던 진짜의 달콤한 언약이 파괴된 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문수는 장수할멈을 모시던 무당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장수할멈은 문수를 떠나버린 상태다. 이 사태는 문수의 실존을 두 차원에서 위협한다. 무당은 문수가 생계를 의탁하는 직업인 동시에 타인과 구별되는 고유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수할멈이 떠났다는 건 문수가 단지 실업자가 되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졸지에 ‘혼모노’(ほんもの, 진짜)에서 ‘니세모노’(にせもの, 가짜)로 전락해버린 문수는 자신의 진짜 실존마저 부정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정체성은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거기에는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부여된 생득적 요소와 자신이 적극적으로 선택해 받아들인 능동적인 요소가 어지럽게 얽혀 있다. 신분제가 철폐된 근대사회에서 직업은 대표적인 자기 선택의 요소로 간주된다. 그런데 무당의 경우는 다르다. 개인이 무당이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림에 의해 무당으로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속이 전근대적인 미신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이처럼 근대적 주체의 능동성을 근본에서부터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실존을 구성하는 정체성의 핵심요소가 타자의 일방적인 의지에 달려 있기에 문수의 존재는 언제나 아슬아슬하다. 그건 문수가 니세모노가 되기 전부터, 그러니까 그가 의기양양한 혼모노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은 특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장수할멈을 모시던 혼모노 시절에도 문수는 “할멈 비위를 맞추”(116면)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던 것이다.

장수할멈과 문수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비대칭적이지만 겉보기에는 호혜적인 계약의 양상을 띠고 있다. 장수할멈은 문수로부터 극진한 대접과 모심을 받고 문수는 그 댓가로 장수할멈으로부터 영험한 신적 능력을 부여받는다. 그렇지만 이 계약이 비대칭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터, 장수할멈은 문수에게 단지 타인의 미래를 점치고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넘어 더 크고 영예로운 미래를 제시함으로써 문수를 자신의 영향 아래 묶어두려 한다. 할멈은 입버릇처럼 문수에게 “모든 무당의 꿈”이자 “숭고하고 높은 자리”인 “무형문화재”를 시켜주겠다고 유혹한다. “내가 문화재 시켜줄게. 너는 내 말만 잘 따르면 된다. 그러면 분명 노난다.”(136면)

이 장면은 우리를 ‘진짜’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도록 단단하게 묶어두는 보이지 않는 힘이 밝은 미래와 성공의 이미지로 채색된 ‘행복의 약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적어도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한다면 행복은 우리 앞에 놓여 있을 거라고 암시”10하는 현대사회의 상징 규범을 비판적으로 탐구한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행복의 약속’이 그 빛나는 외양과 달리 언제나 억압과 소외를 품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장수할멈이 건네는 유혹에 가슴이 뛰는 문수는 할멈이 좋아하는 “올바른 일”을 열심히 수행하며 머잖아 찾아올 빛나는 미래를 상상한다. 그런데 이런 문수의 모습은 마치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로 정확하게 되비춘 것 같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 가슴속에 저마다의 ‘장수할멈’ 하나씩 극진하게 모셔가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수험생에게는 좋은 대학이, 대학생에게는 고연봉 직장이, 직장인에게는 이상적인 배우자가, 단란한 가족에게는 ‘똘똘한 한채’가……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욕망의 신은 우리에게 자신이 짜놓은 각본대로만 살아간다면 진짜 원하는 꿈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그러면 우리는 문수가 장수할멈에게 열심히 생화를 갖다바치듯, 우리의 소중한 삶을 그 욕망의 언약에 기꺼이 헌납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문수를 아무렇지 않게 배반하는 장수할멈처럼 세계도 우리를 제멋대로 속인다는 데 있다.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진짜’ 세계가 그 거짓된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 역시 문수처럼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된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하라는 건 다 했는데, 드릴 수 있는 건 다 드렸는데……”(144~45면) 장수할멈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는 문수의 모습은 빛나는 미래를 달콤하게 속삭이던 세계의 돌연한 배신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가련한 모습과 포개진다. 하지만 문수는 단지 분노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스스로를 무고한 피해자로 연민하며 비탄의 늪에 갇혀 있지도 않는다.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온몸으로 통과한 그는, 한때 자신의 단골이었지만 니세모노가 되어버린 자신을 가차없이 버리고 새로운 혼모노인 신애기로 갈아탄 정치인 황보의 굿판에 난입해 마치 한편의 복수극처럼 자해적인 굿판을 벌인다. 문수가 보여주는 서슬 퍼런 몸짓은 그가 진짜로부터 버림받은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기만적인 ‘진짜 세계’를 스스로 파괴하려는 주체적 행동에 돌입했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혼모노와 니세모노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혼모노의 참됨까지 되묻게 만든다는 점에서 탁월하다.11 이때 기억해야 할 것은 문수가 니세모노가 된 이후 맞닥뜨린 배신감과 절망감이 전에 없이 솟아난 새로운 감정이 아니라 그가 혼모노였을 때부터 시달렸던 (무)의식적인 불안의 짝패라는 사실이다. 혼모노와 니세모노의 대립에 갇혀 있을 경우 이 점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진다. 거기서는 새로 장수할멈을 모신 신애기가 혼모노로 여겨지고 문수는 한낱 니세모노로 간주될 뿐이다. 하지만 진짜와 가짜의 대립을 넘어 ‘진짜의 참됨’을 묻기 시작하면 우리는 새로 혼모노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신애기의 ‘참됨’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어려워진다. 신애기 역시 장수할멈이 건네는 ‘행복의 약속’에 속수무책으로 포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할멈이 너한테 준다고 했던 거, 그거 너 대신 내게 준단다. (…) 네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던 문화재, 그거 나 하게 해준다고.”(145면)

벌써 식구들에게 ‘캐시 카우’(cash cow) 취급을 받는 신애기를 보며 문수는 신애기의 부모와 똑같이 탐욕적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이 대목은 신애기의 미래가 문수의 미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장수할멈이 문수를 삼십년 동안 잘 써먹고 단물이 빠지자 젊은 신애기에게 옮아갔듯 신애기 역시 나중에 제 효용이 다하면 장수할멈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장수할멈은 단순한 귀신이라기보다 고도의 합리성에 입각한 자본의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리적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을 위해 몸 바쳐 일해줄 노동자를 새롭게 생산해내고,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길들이기 위해 미래의 번영을 약속함으로써 자신이 저지르는 착취를 매끈하게 포장하는 자본 말이다. 무속의 세계를 핍진하게 재현한 이 소설을 읽으며 독자는 생생한 재미에 빠져들지만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세계가 건네는 일방적인 행복의 약속을 홀린 듯 믿고 따라가는 현대인의 불안한 삶이 애처롭게 놓여 있다.

 

 

4. 나가며

 

이제까지 살펴본 작품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짜의 참됨’을 되묻게 만든다. 헨리 제임스의 「진품」은 자신이 진짜라는 생각에 포박된 인물을 통해 예술의 진리는 진짜의 창조가 아니라 진짜마저 넘어서려는 노력에 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성해나의 「스무드」는 역사와 정치로부터 무관한 자리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나는 순수 감정을 진짜 감정으로 여기는 순간 더 넓고 깊은 역사적 감정으로부터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일깨운다. 「혼모노」에 이르러 이 문제는 우리에게 번영의 미래를 약속함으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현대인이 처한 가련한 삶의 조건으로까지 확장된다. 진짜는 드물고 귀하며 우리에게 약속된 만족을 거짓 없이 선사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진짜를 손에 넣기 위해 악착같은 쟁탈전을 벌이거나 자신의 분야에서 진짜가 되기를 열망하며 살아간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탈진실 시대의 병증이 깊어질수록 진짜를 향한 열망과 숭배는 그에 비례해 강해지는 면도 있다. 하지만 ‘가짜뉴스’라는 용어야말로 오늘날 물신화되어 쪼그라들어버린 진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입증하는 게 아닐까? 거기에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그 구분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진짜는 포괄적인 진실의 차원이 아니라 협소하고 파편화된 사실의 차원에 머물 위험이 커진다. 이런 세계에서 진짜는 자신의 참됨을 끝까지 궁구하기보다 단지 자신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에 만족하며 즐길 뿐이다. 진짜가 나아가 자신의 참됨을 반성하지 않을 때, 그것은 가짜보다 더 효율적이고 매끈하게 우리를 속인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진짜를 추구하되 동시에 그것의 함정을 극복하려는 이중과제의 수행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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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헨리 제임스 「진품」, 버지니아 울프 외 『시티 픽션: 런던』, 김영희·한기욱 옮김, 창비 2023.
  2. 백낙청은 일찍이 리얼리즘의 특징으로 “인간의 세계는 ‘현실’로서 인간이 체험하는 그것 외에 따로 없지만 이 현실의 정확한 인식은 ‘시적’ 창조의 과정에서만 가능하며, 따라서 진정한 ‘사실성’에는 이상주의가 가세할 필요도 없이 자동적으로 비이상주의적이며 철저히 현실적인 전투성이 주어진다는 세계인식”을 꼽은 바 있다. 백낙청 「리얼리즘에 관하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 민족문학의 현단계』, 창비 2022, 402면.
  3. 같은 글 400~401면.
  4. 황정아 「역사적 감정의 존재양식과 『대온실 수리 보고서』」,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19면.
  5. 같은 글 18~19면.
  6. 우치다 타츠루 『하류지향』, 김경옥 옮김, 민들레 2013.
  7.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노시내 옮김, 마티 2021.
  8. 알바 갓비 『친밀한 착취: 돌봄노동』, 전경훈 옮김, 니케북스 2024, 45면.
  9. 같은 책 45~46면.
  10.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성정혜·이경란 옮김, 후마니타스 2021, 60면.
  11. 김나영은 성해나의 소설을 면밀하게 분석한 글에서 「혼모노」가 “이편과 저편을 단순히 가르는 이분법 자체를 무화하는 전략”을 구가하고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김나영 「진짜인 가짜」,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