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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인간다움을 다시 묻는 시

 

 

박동억 朴東檍

문학평론가. 저서 『오규원 시의 아이러니 수사학』 『침묵과 쟁론』, 공저서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1950년대생 비평가 연구 2』 등이 있음.

 

 

 

1. 헤매는 밤

 

2024년 12월 3일 자정 무렵 여의도로 모여들던 시민의 행렬을 기억한다. 어둑한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설령 걸음을 주저하거나 침묵하고 있을 때조차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주에도 사람들은 같은 자리에 섰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자신을 광장에 드러내는 실천이 한 국가 지도자의 독선으로 사회가 전복되는 파국을 막아냈다. 그러나 내란 시도가 남긴 상흔 또한 크다. 누구도 한국사회에 다시금 그림자를 드리우리라고는 믿지 않았던 독재의 망령이 되살아났던 것처럼, 우리 가슴속에서 해소되지 않은 채 쌓이는 증오와 분노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현현할 수 있다. 이러한 예감 속에서 양극화되어가는 작금의 사회문제들을 떠올릴 때 가슴은 서늘해진다. 여성과 남성, 한국인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 청년과 노인 사이의 잠재된 갈등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화해를 예비한 적이 있을까.

해결책은 자명해 보인다. 혐오를 멈추고 사랑해야 한다. 예컨대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정치적 감정』(Political Emotions, 2013, 한국어판 글항아리 2019)에서 보다 성숙한 자유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지극한 동정심과 국가에 대한 사랑을 함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이 합당하게 들리면서도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황정아가 지적했듯 ‘누스바움식의 감정론’이 의심스러운 이유는 첫째로 그것이 과연 현재의 극단적인 혐오정치에 효과적인 대응책이 될 수 있느냐는 반문을 떨쳐내기 어렵다는 점이고, 둘째로 그가 기존의 자유주의 질서를 지속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더 나은 사회체제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1 따라서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상적인 감정론’은 모범적인 동시에 보수적이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공감하고 사랑하라는 감정의 정언은 참으로 선한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마음의 밝은 면만 비추며 현 체제에 대한 암묵적 동의로 기능하는 테제에 그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문학은 정치를 초과하는 것, 적어도 감정의 차원에 있어서는 마땅히 그러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정치적 논리와는 다른 맥락에서 사람이 사람을 멀리하기도 때로는 혐오하기도 하는 이유를 드러내고, 또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새로운 마음의 길을 찾는다. 그렇게 문학은 정치로 귀속되지 않는 잠재적인 감정을 보존하기에 진정 정치적일 수 있다.

 

 

2. 2020년대 도시시

 

현대는 사물의 시대이다. 남현지는 첫 시집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창비 2024)에서 우리 시대의 징후를 그려내 보이는데, 그 주제를 바로 휴머니즘의 몰락이라고 축약할 수 있겠다. 시집은 인간은 뒤로 물러나고 상품이 전경화된 우리의 일상을 묘사한다. “파업을 해도/택배는 멈추지 않고 도착했다/이웃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도/아침이면 연어가 도착했다”(「전자랜드」)라는 시구처럼 누군가는 고통받을지라도 세상은 안녕하게 작동한다. 이러한 내용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엿볼 수 있겠으나 그것이 미약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비판이 특정 제도나 대상에 대한 구체적 인식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남현지의 시는 시적 화자의 정체감과 무력감을 통해 사회적 징후를 드러낸다. ‘나’는 막연히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도 그 막연한 느낌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그는 병든 현실을 극복하는 인간이 나타나리라고 믿지도 않는다. “미풍 같은 시를 읽고 싶다/고뇌, 열망, 후회……/알 게 뭡니까”(「피서」)라는 시구처럼 사람의 마음에 대한 기대는 덧없게 느껴진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거추장스럽게 다루어지며, 간혹 자기성찰이 나타났다가도 무력감으로 전이된다. 「워크숍」에서 ‘나’는 “자신을 인정하는 데서/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보지만 금세 “수명이 다해버린 새를/저절로 떨어지는 새를 떠올”리고 만다. 또한 “어리석지 않으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실업자가 보는 야구 이야기」)라고 반문하다가도 주어진 상황의 탈출구를 찾는 데 진력이 나버리기도 한다.

 

마음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것은 이미

언어의 것이 아닌가?

 

조용해진 방 안에서

이명이 시작되었다

창문을 열면

 

건물이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길 반복하면서

몇년째 공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 무한한 빌라

 

골목에 아침부터 음악이 큰 소리로 울리고

저녁에 민원을 넣었다

오늘은 일요일이고 여름인데

더이상 음악을 견딜 수 없다고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이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았던 거라고

이제 그러지 않을 거라고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골목의 증식」 부분

 

이웃의 사정을 심려할 여유도 없고, 멈추지 않는 공사 소리에 대한 분노도 없다. 사람에 대해 항의하기는 쉬워졌지만 시스템에 저항하는 가능성은 언급되지 않는 장면들을 통해 이 시는 우리에게 하나의 성찰을 유도한다.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버거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시에 암시된 것은 사회적 불만을 타인에 대한 분노로 치환하는 현실 아닐까.

간명한 주제와 별개로 이 작품을 눈여겨보게 되는 이유는 마치 모토처럼 제시된 첫 연의 문장 때문이다. “마음에게는 미안하지만/그것은 이미/언어의 것이 아닌가?”라고 시인은 묻는다. 어떤 의미로는 이 모토가 이후의 내용 전체보다도 통렬하고 깊다. 현대인이 지극하게 대하는 것은 마음인가 언어인가. 마음과 마음이 접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 없이 민원제도가 있기에 민원을 하고, 이웃의 소음에 항의하는 타성 때문에 항의하는 이러한 일을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마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관습에 따라 언어를 행할 뿐인 것이 아닐까.

남현지의 시에서 사람은 물류처럼 이동한다. 삶은 시간의 적재에 지나지 않는다. 관계맺음은 불쾌한 것이다. 그렇게 시인이 그려낸 도시는 저녁을 배경으로 하는데, “건물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순순히 저녁의 사물처럼 어두워지며/신호를 기다린다”(「종각」)라는 시구처럼 저녁 풍경 속에서 사람은 사물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의도 없이” “곳곳에서 축적되어” “아주 작은 조각의 형태로”(「축적과 이동」) 쌓여갈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하철 한칸 안에서 점점 늘어나/서로 싫어한 지 오래되었다/살갗에 닿는 저 사람이/추상이 아니라면/아, 그럼 적인가? 밀치면서”(「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나아간다. 이 모든 몸짓은 현대인이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전형처럼 느껴진다.

 

보여주지 않으려고

집을 구했다 공을 들여서 꾸몄다,

 

맞은편 옥상에서

체조하는 이웃이 밝게 인사를 해도

소파에 앉아서 그 인사를 받아줄 수 없는 것처럼

완고하게

 

사람들이 빗속으로 하나둘 사라질 때까지

당신은 집을 가졌고

그 집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양합니다」 부분

 

집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무엇일까. 시인이 재현하는 현대사회의 ‘집’은 자신의 안녕에는 관심을 두지만 타인과 거리를 두려는 완고함을 상징한다. 이 완고한 태도 속으로 걸어들어갈 때 ‘나’는 “당신”에 대한 생각을 중단하고, “이웃”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사양하며, 저 빗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시선을 뗄 수 있다. ‘사양합니다’라는 이 시의 제목은 곧 타인과 관계맺는 것을 꺼리는 태도를 상징한다. 집은 굳게 닫힌 문이자 타인을 향하지 않는 ‘나’의 손이다. 남현지의 시에는 현대인의 마음이 경도되는 ‘완고한’ 자기중심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한편 자신을 소중히 하는 한채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간절한 것이다. 떠올려볼 것은 자유주의 공동체 안에서는 의사소통이 충분히 실패하는 것 또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주장이다. 소통의 실패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할 권리를 지닌다는 증거이며, 모든 이의 발언권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대화를 지속하도록 만드는 제도야말로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면서도 각자의 ‘재해석’이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주지 않도록 배려하는 과정이야말로 민주주의가 보장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한다.2

그런데 남현지가 표현하듯, 우리 시대의 곤경은 대화의 실패가 아니라 대화 자체의 죽음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소음과 음악으로 가득하지만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제 타인은 내가 해결해야 할 불쾌한 환경의 일부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멀티버스의 시간” 혹은 “이 무수한 우주”(「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속에서 동떨어져 있다. 저 평행한 우주처럼 사람 사이에도 아득한 거리가 있다. 이처럼 시인이 비판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마음을 체념해버린 평범한 현대인의 모습이다.

한편으로 인간의 냉담한 일면을 비춘다는 점 때문에 이 시집은 교훈적인 인상을 남긴다. 그 교훈은 일차적으로는 산업화시대 이래 반복되었던 내용, 즉 우리가 생활을 이루는 상품에 압도되어 사람에 대한 마음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적 메시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시집의 특수성은 그 주제를 표현하는 담담한 어조다. 실상 사람에게 기대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시 쓰기란 그러지 못하는 지금에 대한 냉소나 분노를 강하게 드러내야 할 것이지만, 시인은 담담히 쓴다. 남현지의 시는 마치 흘러가는 도시적 일상 속에서 문득 인간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의 기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 시집의 언어는 “그 얼굴의/안을 확인할 수 없”(「사양합니다」)는 도시적 삶 속에서 그러나 “들어가자/더 해볼 수 있을 것이다”(「하나의 문만 열린다면」)라고 작게 읊조리며 천천히 나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3. 생태학적 키치

 

화분 속 식물이 우리의 기억을 먹고 자란다면, 당신이 전생이나 다음 생에 동물로 태어날 수 있다면, 사람의 영혼에 구멍이 있다면. 유선혜의 첫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문학과지성사 2024)에는 엉뚱해 보이면서도 발랄한 가정이 가득하다. 이를 통해 독자는 비현실적인 하나의 정황으로 들어가 그에 이어지는 이미지나 사고실험을 감상하게 되는데, 이러한 형식에서 공통된 점은 인간의 또다른 존재방식을 상상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시집의 배후에 놓인 또다른 주조는 키치적 태도, 즉 인간사회의 기본을 이루는 진지한 관념을 부정하려는 의식이다. “괄호 쳐야 하는 것은, 가령 세계의 의미나 인생의 허무에 대한 과도한 망상 같은 것.”(「괄호가 사랑하는 구멍」)이라는 단언이나 “취미는 살아 있기, 특기는 고요하기라고요.”(「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라는 서술처럼 삶을 가볍게 다루려는 태도가 반복된다. 어쩌면 타인의 진지함이나 세상의 엄숙성을 부정하는 듯한 이러한 냉소가 곧 인간의 존재양태를 갱신하려는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것일 수 있겠다.

이 때문에 상상의 탄력이 충만한 작품 속에서도 현실과 삶의 덧없음을 서술하는 진술이 빈번히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유희적 태도가 ‘생명의 멸종’이라는 생태적 주제를 다룰 때 극대화된다는 점이다.

 

운석의 일방적인 사랑은 지구에 새로운 멸종을 가져온다

 

사랑하니까 다가가고 폭발하니까 사랑하고 멸종하니까 사랑하고 멸종에 빠져버리고 사랑 때문에 천천히 숨이 끊어지는 거야

 

어젯밤 우리는 슬픈 동물이었고 울었고 껴안았고 두드렸고

우리가 인간이었으면 했고 인간이 아니었으면 했고

짐승의 멸종에는 사랑이 필요했고

다가오는 운석에 무슨 이름을 붙일지 고민하면서

그게 아픈 감정의 이름과는 똑같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나누면서

 

사랑이 없어서 멸종하는 거야 멸종이 없어서 사랑하는 거야 멸종하기에 번식하고 진화하고 사랑하기에 언어를 얻고 잃어버리고

 

별 하나의 폭발이 밤하늘에 박제된다

멸종해, 너를 멸종해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운석은 다가오고 우리들은 어떤 방식으로 완벽하게 침묵할 것인지 어젯밤 우리가 나누던 말들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우리의 언어는 멸종에 관한 것이었는지 사랑에 관한 것이었는지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부분

 

시집의 2부는 지구생태계의 파괴와 그로 인한 생명의 멸종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특히 표제시는 지구에 소행성이 충돌하여 공룡을 비롯한 동식물이 대멸종하는 지질학적 연대기를 소재로 한다. 그런데 시인이 생태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지질학자의 실증적 태도도, 생태주의자의 윤리적 자세도 아니다. 초점화되는 것은 도리어 일종의 언어유희다. ‘사랑’과 ‘멸종’이라는 두 단어가 자리바꿈하는 것이다.

소행성 충돌을 사랑으로 번역하는 언어유희는 대규모의 멸종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참혹성을 감춘다는 점에서 키치적이다. 그런데 이 가벼운 태도는 모종의 ‘윤리적인’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본래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규모의 시간을 마치 우리 손으로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경험으로 치환한다는 점이다. 이 시를 읽어나가는 것은 우리에게 혼란을 야기하는데, 우선은 단어 바꿈으로 인한 의미의 혼란 때문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지질학적으로 탐구된 지구의 장엄한 시간과 언어로 기록된 인류의 짧은 역사를 뒤섞어놓기 때문이다. 이어서 시인은 독자에게 “우리의 언어는 멸종에 관한 것이었는지 사랑에 관한 것이었는지” 되묻는다.

종의 생멸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사랑은 우리의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행성 충돌을 사랑이라고, 까마득히 먼 과거에 일어난 멸종조차 사랑이라고 바꾸어 읽는 언어유희 이면에는 인간종과 인간역사를 넘어서 지구에서 번성했던 모든 ‘생명’을 공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꾸어보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죄를 지은 공룡이/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를/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어떤 마음을 가진 공룡이」)고 쓰거나 “그는 어쩌면 굴로 태어날 수도 있었다.”(「영생의 굴」)고 쓰며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다른 생명의 입장에서 세계를 상상해보도록 유도한다.

 

과거로 가자, 지구의 끝으로 가자, 사라진 동물들과 함께, 덜덜 떨며 문명 이전의 춤을 추자, 시간도 추위 안에 갇혀서 영영 흐르지 않는 곳에서, 멈춰버린 박자를 깨뜨리고

 

움직이자

발을 구르며

손을 마구 뻗으며

 

움직이면 춥지 않으니까

약속하자

끝까지 가기로

 

너의 말이 공기 중에서 부서지고, 얼어붙고, 농담에도 주파수가 있어서, 우리는 실없이 웃으며, 온몸을 흔들며, 산소와 언어를 잃고 지구에서 퇴장한 생물들과 눈을 맞추고

 

뒤뚱거리는 생물이 우리를 본다

마주 본다

—「멸종의 댄스」 부분

 

“문명 이전의 춤을 추자”는 제안과 지구에서 퇴장한 동물과 “눈을 맞추”는 상상 역시 시인의 지향을 잘 보여준다. 인간과 멸종한 동물은 나란히 선다. 하나의 생명이 멸종하고 다른 생명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어달리기하듯 생명은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지나치게 교훈적이지는 않게, 감각적이고 즐거운 상상을 하듯 유선혜의 시는 우리에게 가없는 생명의식을 전해온다. 그러면서도 “움직이면 춥지 않으니까/약속하자/끝까지 가기로”에서 알 수 있듯, ‘끝까지’라는 부사에 담긴 의지만은 뚜렷하다.

존 롤스(John Rawls)는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1971)에서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이라는 흥미로운 사고실험을 제안한다. 마치 연극을 중단하듯 여태까지 진행되어온 우리의 삶을 잠시 멈추고 사회구성원 모두가 배역을 바꾸게 된다고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장막을 내렸다 올렸을 때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이 되고, 동양인 의사가 백인 부랑자로 살게 된다고 떠올려보자. 그의 주장은 삶의 입장이 바뀔 수 있다는 가정 속에서만 공정한 사회원칙과 법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유선혜는 인간의 전생이 멸종한 동물이었다고 가정해보며, 인간 그리고 사라진 생명이 모두 함께 ‘무지의 베일’ 앞에 설 때 비로소 진정한 생태주의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4. 고통에 처한 자

 

남현지가 타인과 더불어 심지어 자신마저 사물 취급하게 되는 왜소한 인간을 표현한다면, 유선혜는 종의 경계를 넘어서 어우러지는 생태학적 존재를 예시한다. 한쪽은 인간의 단절을 그리고, 다른 한쪽은 인간 너머로의 연결을 그린다. 중요한 것은 이 두가지 모두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때 상상력은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능력만은 아니다. 도리어 상상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의 공백을 채움으로써 불안을 감소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이는 사회를 상상할 여력조차 없다는 것. 윤초롬의 첫 시집 『햇빛의 아가리』(아침달 2025)가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는 아버지로 인한 가정폭력의 가정사가 암시되며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이 회상된다. 불안정한 가정환경 속에서 상처 입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줄곧 벌레, 쥐, 풀, 유령과 같은 보잘것없는 대상에 빗대어진다. ‘정신병동’ 연작은 그 내적 고통을 내밀하게 드러낸다. 회피하려 하지만 계속해서 현재로 틈입해 매일 밤 떠올리게 되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순간을 간직하라, 이것이 삶이다”(「다만 눈이 내리는 풍경」)라고 읊조린다. 그리고 만성적인 괴로움에 둔감해지기 위해 차라리 웅크린 바위이기를 바란다. 그렇게 “감정을 모르므로 아픔을 모르므로 나는 바위의 딸이었다.”(「바위의 딸」)고 쓴다.

 

깨보겠다고 달려들다가 깨져 죽고 달려들다가 떨어져 죽고 달려들다가 부러져 죽고 가만히 웃다가 노래 부르다가

 

죽고 죽고 죽고

 

이런 결말은 너무 뻔하다며 지겹다며 새로운 이야기 좀 해보라며

케케묵은 새와 빛과 미래와 여름

애도와 윤리와 희망

 

잘도 지껄이는 인간 놀음에

 

(…)

 

스스로 죽는 새를 보았다 전속력으로 날던 새가 간판에 머리를 박고 고꾸라졌다 탄성이 있었고 시선들이 있었고 애도는 없었다 허공을 향하여 뒤집어지던 눈동자, 뒤집힌 새의 눈동자가 새의 내면 안에 처박혔다 영원히 새 안에 새로 갇혔다 죽음은 어디에서도 찾아오지 않았다 죽음은 새 안의 새였다 새로부터 흘러내린

—「타이레놀」 부분

 

자신의 참혹에 갇혀버린 이에게 우리가 ‘사회’로 나와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조언은 당위적인 것 이상일 수 있을까. 거리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한다. 그들의 혀끝에 맴도는 것은 “애도와 윤리와 희망”의 이야기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잘도 지껄이는 인간 놀음”처럼 느껴진다. 이 세상에는 애도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전속력으로 날아가 간판에 머리를 박고 죽어간 새 한마리도 그렇다. ‘나’는 새의 죽음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또한 새이기 때문이다. 이 거리에 그의 삶에 희망이 되는 이야기는 없다. 이어지는 “단순해지고 싶었다”는 독백에는 강렬한 충동, 차라리 자기 존재를 파괴함으로써 만성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열망이 드러난다.

화자는 세상이 환한 빛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빛이 자기 소유일 수 없음을 확신하는 마음이 있다. 그렇기에 윤초롬의 시에서 햇빛은 ‘몰려오는’ 것이고 “햇빛의 아가리”(「바깥 산책」)를 벌린 채 그가 걸을 수 있는 ‘길’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감각된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이 투쟁인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처럼 저 환한 빛을 쬐라고 말하는 것은 지독한 추궁일지 모른다.

절망 이후에 뒤따르는 자책은 곧 그에게 어떤 손길도 내밀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가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예컨대 “나에겐 역사도 깊이도 없지.”(「외국인의 편지)라거나 “나는 절망마저 어중간한 사람입니다.”(「지우지 않겠습니다」)와 같은 시구를 우리는 한 예외적인 개인의 발화로만 읽어낼 것은 아니다. 이 사회에서 방치된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표현이자 동시에 이 냉담한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야 할 문장들이다.

 

봄과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받아쓰기하듯 내면에 새겨넣으며

의미도 모르는 노래를 중얼거리는 것 같다

 

(…)

 

나무는 씨앗을 들쥐는 새끼를 품기 위하여 부지런히 겨울을 산다 배운 적도 없는데

본능으로 깨닫고

 

사람은 재미 삼아 무언가를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생경한 나뭇가지가 꽂히고

척추를 가르는 톱날 같은 빛

 

집요하게 묻는 것 같다 그 집요함이 분노인지 원망인지 아니면 사랑의 열병인지

뜨겁게 뜨겁게 세계는 눈발로 흩어지고

 

이런 게 기쁨인가요

 

이상하게 몸이 가벼워질 때

—「눈사람」 부분

 

저편에 “봄과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인이 그 목소리에 매달리는 이유는 그 목소리의 온기가 마음에 와닿기 때문이 아니라, 나무와 들쥐가 살아남기 위해 겨울에도 분주하게 움직이듯 사람 또한 살아가기 위해 희망을 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생존의 방편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은 재미 삼아 무언가를 만들기도” 하며, 이 사회의 아름다운 믿음이 모두 헛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느낀다.

주목할 것은 희망을 헛된 것으로 의심하면서도 그것에 기댈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다. 이 절박함을 ‘집요함’의 정동으로 볼 수도 있겠다. 집요함은 자신의 참혹과 마주한 자의 정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스스로 자신을 채울 수 없는 사람, 내가 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참혹으로 느끼는 사람, 그래서 나 자신을 한걸음 내딛는 것조차 지독한 불안 속에서 행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일 테다. 그러한 처지에 놓인 이에게는 방향 없이 분노를 표출하는 것 또한 세상을 사랑하기 위한 혹은 자신을 비워내기 위한 유일한 방편일 수 있다.

시집을 끝까지 읽어나가며 “세계의 총량은 바뀌지 않는다 한 사람의 내면이 끝장나면/또 한 사람의 내면이 시작되는 것이다”(「스테인드글라스」)라는 시구를 유독 곱씹어보게 된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내면의 총량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것, 당신이 살아낸 만큼 누군가 삶을 살아내리라는 이 담담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시인은 무엇을 견뎌야 했을까. 다행히도 이 시집의 끝은 위안이 되는 누군가를 발견하며 마무리된다. 마지막 작품인 「다른 방식」은 시집 내에서 유일하게 희망을 노래하는 작품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버릴게. 나를 파괴하지 않을게.”라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소중하다. 여기서 ‘너’는 비밀로 감춰진 가까운 이를 암시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시대적 표상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누군가 찾아 헤매는 몸짓을 지극하게 표현할 때, 우리는 그 목소리에 응답해야 하는 의무에 대해서도 떠올려보아야 하는 것이다.

 

 

5. 사람의 쓸모에 대하여

 

오늘날의 시는 분노나 증오의 정치가 초래하는 사회적 문제를 넘어서 더욱 비관적인 전망을 우리에게 예시한다. 우리는 더이상 타인에게 분노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중히 다뤄야 할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인간에 대한 냉담함인데, 이때 냉담함이란 인간에 대해 분노하지도 비판하지도 않는 태도, 즉 인간관계에 대한 열의나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내면상태를 뜻한다.

내란이 있었고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 순간에 우리는 적어도 사람에 대해 분노했고 사람에게 항의했으며 사람과 다투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동시대의 시에서 맴도는 것은 인간에 대한 냉담함이다. 그렇기에 동시대에 공유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무엇보다 인간 자체야말로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는 감각이다.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인간성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갱신해야 하는 수행적 과정으로서 다루어진다. 이로써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과제이다.

무엇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이때 답을 구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이지 말자.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은 『하이퍼객체』(Hyperobject, 2013, 한국어판 현실문화 2024)에서 자동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는 것은 깊이 숙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즉시 행동하는 사람이듯 글로벌한 생태적 재난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확실한 해결책이 아니라 행동의 시점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랫동안 자명했던 물음에 답해야 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인간은 왜 소중한가. 이 간명한 질문에 쉽게 응답하는 시대는 멀어져간다. 지금의 인간에 대한 냉담함으로 오히려 이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을 쓸 수 있다면, 그 감정 역시 정치적 감정으로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범람하는 사물과 희박해지는 동식물 속에서 왜 인간 존재가 소중한 것인지, 왜 자신과 다른 감정과 의식을 지닌 타자와 살아가야 하는지, 왜 오랜 인간적 가치를 파수해야 하는지 되묻는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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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정아 「역사적 감정의 존재양식과 『대온실 수리 보고서』」,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 22면 참조.
  2.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김동식·이유선 옮김, 사월의책 2020, 4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