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평론│제32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

 

‘우리’라는 실재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리얼리즘에 대하여

 

 

이미진 李美眞

1884년 전북 익산 출생. 고려대 비교문학 박사.

bluerocke@naver.com

 

 

1. 바라봄

 

우리는 주로 리얼리즘을 특정한 표현양식으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잊곤 하는 중요한 쟁점은 그것이 ‘역사를 어떻게 써나갈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리얼리즘의 가치는 결코 시공(時空)을 초월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구조적으로 너무나 복잡해서, 어떠한 개인도 혼자서 역사적 진실을 재현할 수 없다. 더이상 한편의 소설을 통해 완결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없다. 정치인들은 TV에 나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픽션을 비하하지만, 현실이야말로 픽션을 넘어선다. 그렇게 분열 자체가 리얼리티 안으로 기입된 세계에 살고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픽션적 합리성을 갈망한다.

김기태의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2024)은 제법 단순한 문제로 돌아간다. 그것은 리얼리즘이 결국 ‘바라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바라봄은 정치적인 행위 그 자체이다. 어떻게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가. 근대적 의미에서의 소설(fiction)은 이야기(tale)와 달리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의 봄(seeing)을 넘어 멈춘 시간 안에서의 들여다보는 행위(gazing)를 필요로 했다. 들여다보는 행위는 곧 소설적 리얼리즘 자체이기도 하다. 표면을 넘어선 무엇이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무엇이 타인의 시선과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리얼리즘을 조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얼리즘은 단순히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뒷받침하는 믿음을 재현해야만 한다.

 

 

2. 인터내셔널

 

소련의 영화감독 예이젠시떼인(S. Eizenshtein)은 맑스의 『자본』을 읽은 적이 없음에도 그 책의 핵심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인터내셔널’을 이해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111면)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이러한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인터내셔널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이다. 특별할 것은 없다.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것들도 쫓다보면 언젠가는 연결된다.

 

이백 년 전 프로이센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풍성한 수염을 길렀고 오래도록 남을 선언문을 런던에서 발표했다. 추종자들은 이십여 년 후 파리의 일부를 점거하고 혁명을 선포했다. 바리케이드 안쪽 술집에서 한 철도공이 기분에 취해 몇 줄의 가사를 썼다. 혁명정부는 백일이 되기 전 진압당했지만 가사는 남았고 한 가구공이 멜로디를 붙였다. 그때 상당수의 조선인들은 먹고살 길을 찾아 연해주로 떠났다. 러일전쟁과 한일병합을 거치며 더 많은 조선인이 두만강을 건넜다. 일부는 일차세계대전에 러시아군으로 참전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수립되었다. 일제의 확장 정책이 가시화됐을 때 연방의 지도자는 연해주의 (…) (111~12면)

 

이 단어들이 거쳐 당도하는 곳은 오늘날 한국의 한 교실이다. 소설의 첫 문단이 보여주는 거대함은 지극히 미시적인 무엇을 말하기 위한 전제이다. 서울 동북부의 한 중학교에서 같은 시절을 보낸 두 사람 진주와 니콜라이는 자라나 어른이 되고, 살아가기 위해 애를 쓰다 서로를 찾아낸다. 그것은 어쩌면 “기립하시오 당신도!”를 외치는, “금발을 양갈래로 땋은” 엉성한 손그림의 소녀 이모티콘의 유래를 찾아내기 위한 일이다. 그들은 웹 검색을 통해 이모티콘 속의 소녀가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엠마가 “체르노비츠의 예심판사 앞에 섰을 때” “왜 혁명을 선동하는 삐라를 뿌렸”느냐고 추궁당했을 때, 판사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섭게 “기립하시오!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이 인터내셔널이오!”(135면)라고 외쳤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아가 그것이 브레히트의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시 구절이며, 한국 ‘운동권’들이 무엇 때문인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기 전에 ‘기립하시오!’를 외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은 이때 진주의 기분을 조금도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알고리즘은 진주와 니콜라이의 검색어를 기억했다”(137면)는 사실만을 말할 뿐이다. 이 소설은 ‘묘사’라는 기법, 그러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객관화의 방식을 중점적으로 활용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리얼리즘의 미학은 정치적인 행위 그 자체가 될 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니콜라이와 진주의 이야기의 리얼리티가 다름 아닌 ‘인터내셔널’이라는 상징을 통해 구축된다는 사실은 그래서 흥미롭다. 인터내셔널은 어떤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들의 일상 속에 존재해온 무엇이고, 이들은 서로를 통해 그것을 발견해낸다. 소설은 그러한 발견의 과정을 그리는데, 그 장치 중 하나가 ‘시점’이다.

 

니콜라이는 취업률이 높다고 알려진 한 공업계열 특성화고에 지원해 합격했다. 진주는 대입 준비를 엄격하게 시킨다는 인근의 여고를 1지망으로 써서 배정받았다. 중학교 졸업식. 웃음과 박수와 꽃다발 속에서 니콜라이는 “너네 부모님 완전 한국 사람처럼 생겼다”라는 말을, 진주는 “부모님은 안 오셨어?”라는 말을 들을까봐 서둘러 돌아갔다. 두 사람이 한끝과 다른 한끝에 서 있는 단체 사진만이 졸업 앨범의 한 페이지에 남았다.(116면)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포함한 이 소설집의 다수의 소설은 주로 3인칭 관찰자 시점을 활용한다. 그러나 관찰자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조심스러운 사실들의 나열이 결국 이 3인칭을 조직한다. 어쩌면 그렇게, 2인칭이 만들어진다. 인물은 이웃하는 다른 소설 속의 인물들, 그리고 그것을 읽는 독자들과의 연결을 통해 입체화된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그러한 인칭의 사용이 특히 선명하게 구축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일부는 니콜라이의 시점으로 쓴 것 같고, 또다른 부분은 진주의 시점에서 쓴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3인칭 시점의 ‘전지적’ 권력이 느껴지거나, 등장인물의 시점이 번갈아 제시됨으로써 발생하는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소설 속에서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휴일을 앞둔 밤이었고 맥주가 시원했다. 「강남스타일」은 진짜 에바 아니었냐. 담임이 잘못, 아니 싸이가 잘못했다. 맞다 맞아. 사과해라 싸이. 슬픈 개구리 짤은 대체 몇 장이나 갖고 있는 거야. 웃기셔. 네가 닮았겠지. 주민센터에 그 하얀 안경테 씨는 너무 불친절해. 나는 친절한 사람 돼야지. 공장에서 일하더니 팔뚝 보게. 오 오오오 오빤 공장스타일. 따라와라 외노자. 웰컴 투 코리아니까 2차는 누나가 쏜다. 이 날씨엔 야장 갬성이지. 사실 영주권 쉽게 받는 방법이 있어. 한국인이랑 결혼하면 돼. 푸하하. 야야 만약 서른다섯…… 아니 마흔까지……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눈을 뜨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각자의 좁은 방이었다.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다행이라고, 어젯밤은 위험했다고 생각했다. 잠시 따져보니 위험할 건 또 뭐지 싶었다. 두어시간 뒤 일어나 살아 있느냐는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대충 이런 말로 정리했다.

“……여름이었다.”(126면)

 

어떤 발화나 행동이 둘 중 누구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은 같은 상황 아래 있고, 그것을 공유하며 심정적으로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겹쳐짐이 자연스러운 까닭은 다른 기술적 장치가 아닌 그들이 살아가는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그 삶은 소설 속 허구일지 몰라도, 그 ‘연결’은 사실이다. 이 사실은 「인터내셔널가」를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의 머릿속에도 두 사람이 이사를 하면서 유튜브로 「인터내셔널가」를 노동요로 틀어놓는 모습을 그리도록 만든다. 분명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사실 “친한 사이”(142면)가 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과 만난다면, 어쩌면 세상은 조금 나아질지도 모른다.

김기태의 소설들은 표면적으로는 익숙한 도덕적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적 올바름에 복무하는 최근 세태소설의 조류에 편입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소설들은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정치적인 쟁점들을 피력한다. 두 사람의 연결이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 그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리얼리즘이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과 총체적인 역사의 시간 속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이율배반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1 그에 따르면 리얼리즘은 태생부터 모순적이다. 인간은 편견에 사로잡힌 동물이고 어떤 국가건 집단에건 소속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어떤 인간도 객관적일 수 없고,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없다. 그렇지만 소설은 영구한 현재의 시간 속에 있다.

리얼리즘 소설의 미덕은 종교적·인륜적 차원의 도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여다보는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도덕적 판단을 지연(遲延)시킴으로써 나타났다. 아우어바흐(E. Auerbach)에게도 소설적 미메시스는 언어라는 매개가 남긴 현실의 문양(文樣)이었다. 대단한 것으로 느껴지던 개인적 사건들도 그렇게 초라한 언어적 형상(figuration)으로 남는다. 리얼리즘은 개인의 영역일 수밖에 없는 그 형상이 공동의 것이 될 때 성립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모순적이다. 그 모순의 출발점은 언어의 속성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 공시(共時)와 통시(通時) 사이의 이율배반, 들여다봄과 말함 사이의 괴리이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연대기적 시간과 비인격화된 의식의 현재적 시간 사이에서 리얼리즘은 다만 불완전한 수신체계이다. 궁극적으로 이 모순은 인간의 유한(有限) 앞에서 어떤 무한(無限)을 관조하는 행위 자체의 슬픔이다. 그리고 이 슬픔은 김기태식 리얼리즘의 거의 전부이다.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우리는 그 슬픔과 좀더 구체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인물들이 현실에 가닿을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이상(理想)의 불가해함 또한 선명해진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워진 이후로 관조는 좀더 구체적으로 슬픈 어떤 것이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망한다면 그 속도는 아주 느릴 것이고, 우리는 아주 천천히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만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유토피아를 필요로 한다. 그 유토피아가 가상에 머문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것이기에, 리얼리즘은 여전히 유효하다. 좇다보면 언젠가는 별자리처럼 연결될 삶들이 있고,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어쩌면 유행가 가사처럼 “하늘로 올라가 초승달 돼버”린 “손톱”2 같은 유토피아다. 작품 속 인터내셔널은 이데올로기적 상징이기 이전에 불가능한 유토피아의 흔적 같은 것이다. 레닌과 로제, 푸르동과 바꾸닌, 뜨로쯔끼와 마오는 역사적 인물로 남았지만, 그 유령들은 튀르키예 반정부시위에 나타난 피카츄 탈과 광장의 무지개 깃발, 대만과 한국 시민들의 손에 들린 응원봉 안에 살아 있다. 그렇게 유토피아는 실재한다. 그렇게 이 소설의 인터내셔널은 리얼리즘이 된다.

 

 

3. 환유

 

거대한 무엇은 언제나 작은 것들의 집합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소설들은 주로 하나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가 세계와 연결되는 과정을 그린다. 정전(正傳)을 두고 교육 현실과 씨름하는 「보편 교양」의 교사나 정돈된 중산층의 삶 속에서 행복을 구하는 일의 어려움을 배워나가는 「전조등」의 주인공처럼 인물의 미시적 삶은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때로 카지노가 들어선 지방 소도시의 체육 특기생이기도 하고(「무겁고 높은」), 서울에 딸을 보내놓고 불안에 시달리는 숙박업소 사장님이기도 하다(「태엽은 12와 1/2바퀴」). 소설집의 전체적인 구도에서 인물이 겪는 다양한 삶의 고민들은, 다른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고민들과의 관계를 통해 ‘보편’의 범주로 연결된다. 이 보편은 사회구조적 문제와 얽혀 있고, 인물들은 대체로 그로 인한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고민의 배경을 채우는 것은 대도시에서의 삶이기도 하고(「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전조등」), 중산층의 삶이기도 하며(「전조등」 「보편 교양」 「팍스 아토미카」), 또 소멸해가는 지방에서의 삶(「태엽은 12와 1/2바퀴」)이기도 하다. 때로는 보호막 없이 내던져진 청년들의 삶(「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무겁고 높은」)이기도 하다.

특이한 점은 이 소설들의 결말이 대체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안하게 마무리된다는 점에 있다. 이는 특별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감사하면서 나아가는, 우리 삶의 일반적인 모습들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인물들이 겪는 상황들을 우리 주변의 비극적 뉴스들과 자꾸만 겹쳐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종류의 불안한 결말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반 양옥 단독주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 있는 중상위권의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업해 살아가던 주인공이 처음으로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오히려 더 큰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사실(「전조등」), 지방 소도시에서 혼자 딸을 키워온 숙박업소 사장이 정체불명의 남자가 떠나고 나서 오랜만에 오기로 한 딸이 도착하기를 바라는 모습(「태엽은 12와 1/2바퀴」), 학생들에게 정전을 읽히고 싶은 고등학교 교사의 소박한 야망이 ‘맑스’라는 기표와 만나며 복잡해질 때(「보편 교양」). 이런 상황들이 발생시키는 불안은 소설의 인물이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 불안은 클리셰에 가까운 뉴스 사회면의 반복되는 사건사고와 그로 인해 양산되는 어떤 인식들로부터 야기되었으며, 소설 속 인물의 잘못이나 노력과는 무관하다. 다시 말해 소설적 상황 속에 오늘의 불안한 현실을 투영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카페에 혼자 앉아 생각했다. 사람들이 웃는구나.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구나. 음악을 듣고 공부를 하고 편지를 쓰는구나. 문을 닫고 잠그는 일이, 알람을 맞추는 일이, 드라이어를 끄는 일이 왜 힘든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심호흡이나 숫자 세기, 손뼉 치기, 눈 깜빡이기 따위를 시도해봤다는 걸 모를 것이다. 그들이 몰라서 외로웠지만 그들이 몰라서 다행이었다. (…)

하지만 나를 깊은 밤의 문 앞에 벌서듯 세워두었을 때 나도 배운 게 있다. 음료를 마시고 자리를 떠나기 전, 정신을 집중하여 하나의 문장을 떠올린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분명히 입을 움직여서 나 자신에게만 속삭인다.

“나는 모든 소지품을 챙겼고 아무 쓰레기도 남겨두지 않았다.”(277~78면)

 

현대적인 불안을 다룬 수많은 소설들처럼 「팍스 아토미카」의 주인공이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를 독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희미하게,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다.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비행기의 이륙중단 사고가 일어났을 때 처음으로 타인과 연결된다. 그가 평소의 습관대로 불안을 지우기 위해 “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읊조렸을 때, 그 옆의 외국인 청년은 “확실히 그렇네요”(299면)라고 답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과정은, 그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충격적인 뉴스들을 상기하면서 동시에 피해 간다.

「롤링 선더 러브」의 조맹희는 “시원하게 굴러보고 싶”(52면)어서 「솔로농장」에 출연을 결심한다. “일반인들이 출연하는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53면). 「솔로농장」에서는 채소 이름으로 된 가명을 사용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현실에서 입에 올리기 좋아하는 몇몇 TV 예능 프로그램을 곧바로 떠올리게 만든다. 처음의 취지와는 상관없이 이들 프로그램은 출연자들의 스펙이나 외모, 과거에 대한 수많은 기사를 양산하게 되었고, ‘극사실주의’를 지향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은 출연진의 가장 비루한 부분을 들춰내는 것에 일종의 면죄부를 주었다.

 

방송을 보며 맹희는 생각했다. 저게 나인가. 아니지. 저것도 나인가. 그건 맞지. 완두는 맹희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일부이긴 했다. 나 생각보다 관종이었을지도. 맹희는 갖가지 조합의 검색어를 입력하여 시청자들의 반응을 찾아 읽었다. 각오는 했지만 어떤 말들은 너무 부당했다.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물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어떻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596명이나 거기에 추천을 누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의아했다. 맹희 자신도, 감자도 토마토도 양파도 그들이 비난하는 만큼 잘못한 건 아니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남자가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무엇을 속이거나 팔아넘기겠다는 말로 번역해서 들을까. 맹희는 집요하고도 악랄한 댓글 228개 아래에 익명으로 슬쩍 썼다.

‘너네는 어쩌다 이렇게 좆같아졌어?’(70면)

 

그러나 이런 현실과는 상관없이 「롤링 선더 러브」의 조맹희는 명랑하다. 그녀는 프로그램의 카메라 감독과 ‘썸’을 타고 「솔로농장」 동기들과 신나게 방송 이후의 삶을 즐긴다. 이러한 맹희의 모습은 날것 그대로의 현실보다는 유토피아에 가깝다. 단순히 누군가를 찾기 위해 출연을 결심했든 유명세를 올리기 위해 출연했든 혹은 어떤 다른 목적이 있든지 간에 이들은 우선 평범한 사람이다. 「솔로농장」에 출연하게 된 후 맹희의 모습은 붕 떠 있고 지나치게 낭만적이라 누군가에겐 어쩌면 악플을 달게 하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할지도 모르지만, 소설은 지속적으로 그런 맹희의 행동이 그녀가 “저녁 일곱시의 급행 전철에 실려가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41면)는 사실을 통해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김기태의 소설들이 리얼리즘에 다다르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혐오와 위험으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부터 지극히 현실적이되 그 너머를 바라보는 유토피아를 지켜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소설집의 소설들은 끊임없이 현실과 꿈의 경계를 시험한다. 시험의 대상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오늘날의 도덕이다. 조맹희가 「솔로농장」에 출연해 잠깐의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 그녀가 악플을 받아야 할 이유는 아니라고 말하기는 오히려 쉽다. 그보다 김기태 소설의 도덕은 차라리 ‘~때문에’라는 부사를 지운 채 픽션의 환유로 진입하는 일의 어려움에 관한 것이다. 정명교는 이 소설의 환유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한 세미나에서 ‘환유’를 ‘리얼리즘’의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이렇게 풀이한 바가 있다. “소설은 현실에 대한 감각적 질료들을 무더기로 사용하는데,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말하려 하지 않고, 어떤 가치도 갖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들이 자신들 너머의 어떤 의미의 선율을 떨며 연주하게 할 때, 소설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전쟁과 평화』의 초입에서 어깨를 드러낸 숙녀들의 테마는 무언가 다른 것을 부각시키는 데 봉사한다. 위대한 소설가들의 위대함의 정도는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집중하는 모든 것들이 상징적으로도 아니고, 우의적으로도 아니라, 서로 거리를 두고 반향하면서 무언가를 조형하는 정도라 할 것이다.3

 

김기태의 소설이 보여주는 어떤 과잉들은 그 ‘단순한 목적’으로 인해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다. 그 단순한 목적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일의 어려움, 그리고 그것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지속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말하는 데 있다. 뉴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혐오의 사건들이 우리의 대화 소재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일상에 스며들고, 더 가까운 무엇이 되어가는 것만 같은 이유는 오직 스마트폰에 있는 것일까?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가상적 자극들은 불안한 현실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여유를 막고, 타인을 납작하게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삶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첫번째 소설집 특유의 서툶과 고뇌가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단순한 목표에 솔직하다. 그 솔직함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미덕이며, 환유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

 

 

4. 유토피아

 

프레드릭 제임슨은 유토피아의 실현을 다만 ‘충동’으로 남겨둔다. 유토피아적 충동(the utopian impulse)은 리얼리즘 문학의 서사적 본령이다. 이때의 ‘서사’는 총체적이면서도 파편적인, 유동하는 정치적 무의식의 장소이다. 그것은 또한 유토피아라는 미래적이며 잠재된 시간을 현재적으로 불러오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게 유토피아적 충동은 리얼리즘 서사 안에서 반유령적으로 존재함으로써만 실현 가능성, 역사화의 가능성을 찾는다. 소설적 유토피아는 언어가 유발시키는 정동을 통해서만 구현되며, 그렇게 개개인의 신체로 스미어 보편화되고 실재화되며 역사화된다. 잠재된 시간을 불러오는 것으로 ‘서사’를 해석하는 것은, 물적(物的)으로 잠재되어 있는 유토피아적 충동을 깨우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성은 닫혀 있는 형식이 아닌, 일종의 소망 충족적 판타지에 가깝다.4 그래서 제임슨에게 있어 유토피아적 충동은 곧 유토피아적 기획(the utopian project)과도 같다.5 기획은 완결이기보다 지향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 관해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미시적인 것들을 연결하는 힘으로서의 유토피아적 충동에 관해서이다. 그것은 소설 속 미시적 삶들을 그보다 큰 정치적 울림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든다. 제임슨에게 그것은 ‘유토피아적 충동’이지만 랑씨에르(J. Rancière)에게는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을 ‘정치’(la politique)와 구분하는 것은 언어적으로는 프랑스어 ‘le’와 ‘la’ 사이 ‘정관사’의 영역에 있다. 정치적인 것은 당파나 정쟁에 앞서 ‘공동의 삶’을 심급으로 삼는다. 그래서 정치적인 것은 기술(技術) 이전에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맺어지는 형태들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솔직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것에 가까우며 미시적인 동시에 거시적인 무엇이다. 김기태의 소설이 이뤄내고 있는 성취라고 한다면 분명 그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보여주는 나름의 방식을 발굴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 소설들이 소위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덫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이유 또한 미시적인 것들이 향해 모이는 거시의 지점에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환유의 미세한 지점들이 발생시키는 유토피아적 충동의 강렬함은 독특하게도 흔히 SF소설에서 발견되는 것과 닮아 있다. 현실에 접근하는 방식, 그러니까 문법이 아닌 보법이 닮았다고나 할까. 우리가 리얼리즘 소설을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때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조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SF소설은 개인보다 인류 보편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는 점에서 고대 서사시나 중세 로망스로의 퇴행적 성격을 지닌다고 간주된다. 이러한 퇴행은 주로 “SF가 ‘개인’보다는 ‘인류’ 보편을 대변한다든가, 혹은 지금-여기의 구체적인 경험 현실을 모방하기보다는 우주, 미래와 ‘가상현실’이라는 유사 허구들을 적극적으로 파생”시킨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그러나 정은경이 언급했듯, “SF는 그 세계관과 인식론적 선회에 있어”서는 리얼리즘과 무관하지 않은데, SF는 “개인의 감각으로 포착해 낼 수 없는 실제적·잠재적 현실 탐사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인의 감각으로 포착해낼 수 없는 지점들 중 많은 부분은 “비가시적이지만 이미 우리 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6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면서도 SF소설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소재적 특이성을 통해 리얼리티에 대한 인지적 범주가 확장되는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신뢰는 SF소설이 구축하는 양식적 기반을 통해 마련된다. 그것은 과학적 인과(因果)의 문학적 변형에 관한 미학이다. 그리고 이를 작동시키는 본질적인 힘은 세계를 보는 관점, 즉 세계관에 있다. SF소설의 리얼리즘적 특성 역시 결국에는 이 세계관을 통해서 생성된다. 김기태의 소설은 소재적 측면이나 장르적 특성에서가 아니라, 유토피아적 충동을 내재하는 서사적 특성의 차원에서 SF소설과 공유되는 지점을 갖는다.

 

오래전부터 축적된 케이팝의 팬덤 조직 문화는 세모바에 이르러 결실을 맺은 것처럼 보였다. 빛나는 순간들.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행진하던 성소수자들 속에도, 홍콩 코즈웨이베이의 시위대 속에도 팬들은 있었다. 그들이 세모바의 노래를 제창하는 영상은 천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해수면 상승 문제를 겪고 있는 투발루에서의 팬 플래시 몹은 미국과 유럽의 주요 매체에 크게 보도되었다. 내 기억에 가장 깊게 남은 것은 예루살렘에서 두 소녀가 찍은 쇼츠다. 삼십 초가 채 안 되는 영상 속에서 한 아이는 유대식 스카프를, 다른 아이는 히잡을 두르고 있었다. 정작 둘은 킥킥거리느라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지만…… 나는 코끝이 찡했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세상 모든 바다는 지지할 수 있는 그룹이다. 거리낌없이 좋아해도 되는 그룹이다.(「세상 모든 바다」 23면)

 

SF소설처럼 김기태의 소설 역시 유토피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것을 추구한다. 이는 앞서 말한 환유적 특성과도 연결되는데, 즉 현실과 픽션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어서 SF소설과 흡사한 방식으로 유토피아적 충동을 발현시킨다. 그래서 김기태 소설의 리얼리즘은, 평행우주의 차원에서 SF소설이라는 주머니를 정반대로 뒤집어놓은 형상 같다.

그 유토피아적 충동은 소설집에 실린 아홉편의 소설들이 서로 간에 연결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그중 「세상 모든 바다」와 「로나, 우리의 별」은 이러한 특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 두편의 소설들은 공통적으로 ‘아이돌’을 소재로 한다. “거리낌없이 좋아해도 되는 그룹”인 ‘세모바’와 마찬가지로, 「모두의 스타」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자인 ‘오로나’의 이상적인 형상은 AI가 구현한 것과 같은 완벽한 외모나 성적 매력이 아닌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있다. 이 정치적인 것이 팬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로나는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최초이자 최고의 ‘선출직 스타’”(「로나, 우리의 별」 183면)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이상적인 아이돌이 구축하는 ‘인터내셔널’의 형상이다. 세모바나 로나는 한국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아이돌로 묘사되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전세계에 미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들이 가진 정치적인 것의 힘이다.

 

로나는 돈을 훔치지 않았다. 그녀는 유력 기업들의 동의를 얻어, 아니 기업들로 하여금 줄을 서서 돈을 바치도록 했다. 추정치에 따르면 그녀는 수입의 구십 퍼센트 이상을 메리멘에 기부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주님에게 바쳤지만, 로나는 십분의 구를 세계에 나누어주었다. AI가 정량적으로 도출한 효율성에 따라 르완다에서는 토지 개간이, 과테말라에서는 문맹률 개선 사업이, 케냐에서는 무조건적 현금 지원이 이루어졌다.(192~93면)

 

로나의 이러한 행보는 평화 퍼포먼스를 벌인 비틀즈나 유엔 연설을 한 BTS의 행보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보다는 좀더 구체적으로 정치적이다. 로나는 창당을 하는 아이돌이다. 그의 예술적 지향점은 온전히 정치적인 영역에서 추구된다. 중요한 것은 이 이상적 아이돌들의 행보가 ‘보편적 지향’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로나와 세모바는 세계의 지향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미래의 이상적 정치인의 상으로서 그려진다. 세모바가 하쿠와 해진의 연결점이 되었듯, 로나는 외다리비둘기아로미, 제플린88똑딱이단추, 배부른소크라테스목련러너, 까망쥐잉맨, 사축A빵또아, 붕어싸이코당근도기립하시오를 연결한다. 이 익명의 연합체는 실재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권력을 이양해온 역사적 방식과 흡사하지만, 그보다는 좀더 ‘무정부주의적’이다.

이 무정부주의는 쉽사리 기표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동적이다. 물론 소설에는 과거 인터내셔널이 꿈꾸던 무정부주의, 그러니까 아나키즘적 연대의 방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세상 모든 바다」와 「로나, 우리의 별」과 다른 일곱편의 소설들이 만들어내는 아나키즘은 궁극적으로는 픽션을 통해 가능한 ‘상호 증언의 연대’7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위계를 통해 구축되지 않는, 도래할 정치체에 대한 가능성으로서의 아나키즘이다.

 

이때의 아나키즘의 의미는 바로 “아르케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아나키즘(anarchism)의 어원 자체가 an + arche, 곧 “아르케 없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나키즘의 핵심을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이 경우 “아르케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과두제적인 지배와 복종, 위계적 질서 없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아나키즘은, 생태주의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권운동에 가장 부합하는 사상적 이념이다. 공생, 돌봄, 자율, 연대 등이 바로 아나키즘을 지탱하는 기본 이념들이며, 이는 곧 ‘남태령 대첩’을 비롯한 을들의 연대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다.8

 

그러나 진태원의 말처럼 “역사적으로 아나키즘 운동은 깊은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오늘날 장애인, 성소수자, 재난참사 피해자·유가족과 이주노동자, 농민의 투쟁은 이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아나키즘의 연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러한 트라우마 때문에 픽션을 필요로 한다.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픽션이 아나키즘적 연대에 윤활유처럼 스며들기를 원한다. 픽션의 유토피아는 “그들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그들의 투쟁을 인정하지 않고, 투쟁의 가치와 중요성을 공감하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그들만이 외롭게 자신들만의 투쟁을 전개해왔다는 데서 생겨”9난 이 트라우마와 연결될 때, 비로소 실재하는 무엇이 된다. 오늘날 소설적 리얼리즘은 이 트라우마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이면을 가시화하는 업을 안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꿈이다. 그러나 거기에 만약 아직 실낱같은 인과(因果)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내가 들여다보는 세계가 어떻게 네가 들여다보는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가에 관한 인과일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외다리비둘기이며 아로미이다. 제플린88똑딱이단추, 배부른소크라테스목련러너, 까망쥐, 잉맨, 사축A, 빵또아, 붕어싸이코, 당근도기립하시오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친구와 연인, 추종자이자 소비자, 감시자와 연구자 또는 변호사였으며, 이제 로나의 동지가 되려 하는 사람들이다. 로나는 모두의 스타가 아닐지언정 우리의 별이다. 우리는 ‘모두’가 아니므로 당신의 하루를 모른다. 하지만 알고 싶다. 로나가 질문했듯, 만약 당신이 단지 생존하기 위해 그렇게나 일하는 데에 지쳤다면, 더 많은 삶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데에 쓰고 싶다면, 자신이 자유로운 인간인지 의심해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우리다. 머지않은 창당 대회,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붉은 도브의 연주에 맞춰 같은 노래를 부를 것이다. 우리의 별, 로나가 예고한 대로 그 노래의 제목은 ‘우리는 가능하다’이다.(「로나, 우리의 별」 204~205면)

 

2014년 홍콩 도심을 마비시켰던 79일간의 우산혁명의 주역인 조슈아 웡(黃之鋒)이 당시 19살이었고, 그를 비롯한 시위의 주역 47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서울의 퀴어문화축제는 3년 동안 시청 광장을 허락받지 못했으며, 2023년 10월 전쟁이 발발한 이후 가자지구에서 아이들을 포함해 최소 5만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름들이 그렇게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생겨먹은 세상을 살고 있으며, 의지와 상관없이 쉽게 그 일부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어떤 트라우마는 반복된다. 픽션은, 그 슬픔이 휘발될 때 드러나는, 보이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들 안에서 그 증언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실재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영원히 도달 불가능한 다가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정치적인 힘은 그렇게 발현되어 왔다. 언제나 아직 도달되지 못한 미래이자 도래할 무엇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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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edric Jameson, The Antinomies of Realism, Verso 2013.
  2. 인디밴드 ‘중식이’의 「나는 반딧불」(2020) 가사.
  3. 정명교,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심사평, 「[동인문학상] 7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조선일보 2024.7.25.
  4. 렘 콜하스·프레드릭 제임슨 『정크 스페이스/미래도시』,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0.
  5. 오길영 「서사와 유토피아적 충동」, 『비평과이론』 제21권 2호, 2016, 139면.
  6. 정은경 「SF, 인류세의 리얼리즘」, 『영원의 기획』, 민음사 2023, 62면.
  7. 진태원 「세 번의 놀람 세 개의 질문 세 개의 과제」, 『황해문화』 2025 봄호 권두언 9면 참조.
  8. 같은 글 12면.
  9. 같은 면.

이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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