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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훈기로 설레는 발견의 시들
정우영 鄭宇泳
시인.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살구꽃 그림자』 『활에 기대다』 『순한 먼지들의 책방』 등이 있음.
jwychoi@hanmail.net
이 시각에도 시인들은 분투 중일 것이다. 아무리 시가 중심에서 멀어지고 관심에서 비켜나 있다고는 해도,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 한편 쓰기 위해 시인들은 몸부림을 친다. 어찌 시인만이 그럴 것이랴. 창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독창적인 글을 적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스스로를 다그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치열하게 스스로를 다그친다고 해서 좋은 글이 써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성심을 다해 정련의 과정을 거쳤음에도 나만의 결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글은 말짱 헛짓에 다름 아니다. 나만의 사유 틀과 감성으로 물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어야 비로소 창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 없이는 신작이라고 하더라도 태작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본다. 창작자는 세상에 오로지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글감이 되는 물상에 전폭적으로 투신해야 한다. 이렇게 몰입하여 지루한 시간마저 사라졌을 때, ‘발견’이 온다. 섬광과도 같이.
좋은 시집에는 그 시인만의 독자적인 발견이 다채로운 무늬로 아로새겨져 있는데, 이 계절에는 세권의 시집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한 시인은 소멸해가는 동안에도 시의 새로운 태동에 힘쓰고 있었으며, 또 한 시인은 그동안 적립해놓은 성취마저 내려놓고 끊임없는 자기갱신에 몰두하고 있었고, 또다른 시인은 차별과 소외, 편견에 맞서는 실존적 쟁투로 뜨거웠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금 여기를 헤쳐가고 있었지만, 나는 이들 시집에서 건네지는 시의 훈기로 설레며 부풀었다. 당신도 그러하시지 않을까.
신경림 시집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창비 2025)
노년에 이르면 몸의 여러 기능이 망가지듯이 정신도 점점 헐거워진다. 시인의 경우에는 어휘가 슬슬 사라진다고들 호소한다.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언어의 조합이 주된 무기인 시인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몸과 언어가 이처럼 물러져서 그럴까. 노년의 시작(詩作)은 살짝 느슨해지기 십상이다.
신경림은 어떨까.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신경림은 다르다고. 그의 유고시집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는 전혀 헐겁지 않다고.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우리교육 초판 2002, 개정판 2010)에서 그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가치관이 어떻게 달라지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아름답고 순수하고 참된 것을 찾는 뜻이 없어지지 않는 한 시는 존재를 이어갈 것이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기도 계속할 것이다”(개정판 「책앞에」)라고 썼다. 그가 남긴 이 말은 그대로 그에게 적용된다. 시인은 가셨지만, 그가 남긴 참된 시들은 존재를 이어갈 것이며 때로는 세상의 중심에 서기도 할 것이다.
그의 시안(詩眼)은 시집 『농무』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등 전성기 시절에만 열린 게 아니다. 말년에도 초롱초롱 눈떴다. 느즈막에 오히려 더 맑고 깊은 눈을 뜬 것 아닐까 싶을 만큼.
시 「해 질 녘」을 보라. 그의 발견은 얼마나 황홀한가. 그는 쓴다. “어두워오는 해 질 녘”에서야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인다./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어디 꽃과 길뿐인가. “나무와 산과 마을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모양들”도 “새로 드러나”고, “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 게다가 이 저물녘에는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 어찌 “눈이 부시”지 않을 것인가. 시인은 늙고 낡아가는 몸의 변화 속에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의 존재감을 발견한다. 저물어서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새롭게 드러나는 모양들과 사람들을. 「소요유(逍遙遊)」에도 이러한 그의 발견은 이어지는데 “밝은 눈과 젊은 귀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흐린 눈과 늙은 귀에 비로소 들어온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그는 밝힌다.
그러니 나이 들어 어휘가 사라진다고, 기억이 달아난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그것들이 지워지자 나타나는 “새로 드러나는 모양들”(「해 질 녘」)을 기록하면 되고, “어두워진 귀와 둔하고 탁해진 손으로/듣고 만지고 다시 보는 즐거움에 빠”(「소요유」)지면 된다. 이로써 나는 탐구라는 게 개척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는다. 새 눈을 뜨면 탐구 영역은 어디든 널려 있다.
신경림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은 바로 이와 같은 인식 아닐까 싶다. 그가 새로이 해 질 녘 세상과 그 삶의 면모를 시편들에 담아놓았다는 것. 그저 저묾 속에 떠나가지 않고 그 현재적 깨달음을 시집 여기저기에 펼쳐놓으셨다는 것. 이러한 그의 깨달음은 앓아누운 병상에서의 시간마저도 행복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는 병상을 다루고 있으나 앓는 자의 좌절과 신음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창밖엔 눈발이 치”지만, “모래바람 부는 사하라와 고추잠자리떼 빨간 동구 앞 길을/번갈아 오가면서, 지금 나는/병상에서 행복하다”고 적는다. 그에게 더이상 시공간의 제약이나 육신의 고통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어찌 “살아 있는 것”들이 아름답지 않으랴. 병상에서도 이렇게 행복한데. 그리하여 그는 세상에 남기는 유언처럼 읊조린다. “아직 살아 있어, 오직 살아 있어 아름답다/머지않아 가마득히 사라질 것이어서 더 아름답다/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고.
물론 이 시집에서 저무는 자의 회오와 성찰, 허허로움 등의 정조가 아예 묻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소멸을 피해갈 수는 없으니 이는 당연한 술회라고 여긴다. 그에게도 마땅히, “눈부신 햇살 아래서는 보이지 않던/허공이 보”(「허공」)이기도 하고, “내가 이룬 일” “내가 얻은 것”이 “돌아보면 빈 허공뿐이고/뿌연 안개뿐”(「미세먼지 뿌연 날」)인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념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진 않는다. 그는 이제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 마을”이 “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고추잠자리」)고 하는, 분명한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오히려 그는 저물어가는 와중에도 삶과 생명에의 경외가 짙어졌다. 우리의 몸이 생명순환의 원동력임을 보여주는 시 「봄」에 이와 같은 사유가 잘 드러나 있다.
이번 시집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에서 가장 의미있는 작품으로 나는 시 「봄」을 꼽는다.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봄의 정체를, 신경림이 발견한 것이다. 봄은 자연의 순환이라고들 하는데, 아니다. 신경림에 따르면 봄은, “집요하게” 우리의 “살갗을 파고들어/동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소리들로부터 싹튼다. “구석구석 그 소리가 닿을 적마다/우리들의 몸은 전율하고 절규하다가” “통째로 밖으로 빠져나온다”. 그것이 “한순간 높이 하늘로 치솟았다가/폭죽처럼 터져 지상으로 쏟아져//새파란 풀밭에/조각조각 꽃이 되어 흩어”지는데, 이것이 봄이다. 봄은, 이렇게 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이 시집에서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고 외치는 이유를 여기서 찾는다. 그는 마침내 자연질서 속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 것이다. 세상과 교감하는 내 몸의 약동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폭죽처럼 터져 지상으로 쏟아진 게 봄이라는.
손택수 시집 『눈물이 움직인다』(창비 2025)
손택수의 눈은 투시력이 강하다. 어떤 물상에 시의 촉이 꽂히면 그는 아주 세심하고 입체적으로 그 물상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꾸준하고 집요한 관찰로 그가 물상의 정체를 파악하는 바로 이때, 그의 시적 감각에 물상이 자기의 입김을 건넨다. 이 교감으로 시인과 물상은 서로를 통째로 받아들이게 된다. 시집 『눈물이 움직인다』는 이같은 통감(通感)의 결과물이다.
이렇듯 익숙한 물상에서 시를 끌어오는 작업은 언뜻 편해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평범한 것 같은 문장에는 그만이 그려내는 특유의 매혹이 숨어 있다. 시의 제목들에서도 보이듯 그는 ‘등나무 꼬투리 속에서도 폭풍’을 읽어내고 ‘오래된 골목 끝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아’ 먼 전생을 흘려보내는 시인이다. 편편마다 만만찮은 공력이 실려 있는 것이다.
시집 『눈물이 움직인다』에서는 손택수의 이같은 공력과 특유의 매혹이 좀더 진화한 것처럼 비친다. 이전까지는 사물에 머물러 있던 물상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이 각인시키는 것이다. 「사물의 탄생」이 대표적이다.
“팔에 깁스를 하고 나니/컵이 난감하다”. 화자는 “컵과 나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할 듯싶다. “공기 중에 매설된 지뢰라도 짚듯/신중하게 뻗어가는 컵은” 그러나 “만만치 않다”. 왜 아니겠는가. 컵과 그의 관계가 자칫 역전될 수도 있는 순간이다. 미처 알지 못하던 “컵의 무엇이,/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저만의 간과된 무엇이/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는 찰나, “손잡이가 귀로 바뀌더니/컵 속의 침묵이 와글거린다”. 나는 이를 컵의 경계 이탈이자, 반란으로 읽는다. 컵은 그를 사통(私通) 대상으로 삼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는 모두 그가 “컵과 나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고자 할 때 빚어진 일이다. 새로운 사물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지금 이 컵은 이전의 그 컵이 아니다. 반려처럼 인격화된 컵인 것이다.
알고 보면 일상의 물상들도 거기 그 자리에 그저 박제화되어 있는 게 아니다. 그것들도 존재감이 있어 누군가 관심 보이기만 하면, 귀를 열어 듣고 입을 열어 대꾸한다. 일찍이 시인 김춘수는 이에서 의미를 찾아냈고 손택수는 그것들과 영(靈)과 육(肉)을 나눈다.
「입파도에서」라는 시를 보자. 그는 벌써 알고 있다. “섬에서는 시가 되질 않는다”는 것을. 왜냐하면 “바다가 이미 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저 천변만화의 바다를 사방에 두고 무슨 시를 덧입힐 것인가. “여기에 무엇을 더한다는 것이” 분명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긴 하다만” 그는 “섬을 어떻게 번역해볼까를 놓고” “끙끙거”려본다. 물론 “되질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 무엇도 도무지 되질 않는 것들의 목록”이라도 기록한다. 창작이 아니라면 번역이라도, 번역이 안 되면 목록이라도 끼적거리려 애쓴다. 그야말로 전심전력이다. 사물에게 최소한 이쯤은 몸과 맘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 사물이 내게로 와서 나만의 새로운 사물로 탄생할 수 있으리. 내가 그에게 통째로 가야 그도 나에게 통째로 다가와, 살아 있는 것 같은 나의 사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이 사물로만 존재할 때에는 그의 정체를 꿰뚫을 수가 없다. 다만 그를 짐작할 수 있을 뿐. 손택수처럼 사물과 내가 영과 육을 공유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다른 세계가 열린다. 시 「빵과 노동과 신」은 그렇게 펼쳐진, 다른 세계의 얘기를 다룬다. “빵이 나에게 오고 내가 빵에게 갈 때/들판에 내리는 비와 빛과 심지어는 메뚜기떼와도/우린 이어져 있”게 된다. 사차원 공간이라고 할까. 여기서는 삼라만상이 한통속이다. “빵하고 나하고”는 “비슷한” 존재이며 “누구나 뜯어 먹을 수 있”고 “먹다 버려도 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게 슬픔이고 아픔이지만” 그는 안다. “그게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어떤 가능성이냐고? “슬픔도 아픔도 들판의 황금 밀밭을 불어가는/숨결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누구에게나 뜯어 먹히는 빵과 내가 감히 신의 영역을 넘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택수는 시 「종이 유령」에 이르면, 비존재의 기척을 감지하는 데에까지 닿는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내던진 종이 뭉치들만/구겨져 있을 뿐”이나 “방구석에 희미한 기척이 있”음을 알아채게 되는 것이다. 이런 소통능력을 갖게 된 건 그가 오랫동안 일상 속 사물들에게 그의 영과 에너지를 나누어주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손택수 시에서 포착되는 물상의 다채로운 발견은 이에 대한 사물의 응답일 테다.
김선향 시집 『어쩌자고 너의 뺨에 손을 댔을까』(청색종이 2025)
시집의 제목이 된 구절이 담긴 「80cm」라는 시부터 소개한다. 이 작품 한편만으로도 김선향의 시집이 문제적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너의 반쯤 감은 눈동자/아니 반쯤 뜬 눈동자//너를 잊을 수 없게 하네/나를 견딜 수도 없게 하네//어린이집에 간 지 겨우 닷새째/이불을 씌우고 베개를 올린 거대한 그림자 아래/너의 발버둥과 파닥거림이 이어지던 14분//(…)//나는 어쩌자고 너의 뺨에 손을 댔을까/얼음장 같아 얼른 손을 뗐지만/손바닥엔 화인이 찍히고 말았구나”
시집 맨 앞에 이렇듯 강렬하고 충격적인 시를 배치하면 어쩌란 말인가. 80cm라니. 세상에, 얼마나 “작은 관”인가. 나는 오랫동안 이 시의 문턱에 걸려 다음 시로 나아가지 못했다. 철커덕, 족쇄를 찬 느낌이라고나 할까. 눈으로 읽고 맘으로 읽고 통증으로도 읽었다. 이 시를 만나는 누구라도 그러하지 않을까. 눈에 대는 순간 화끈, 화인이 찍힐 것이다.
세상에 어찌 이런 죽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쓰리고 아린 슬픔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인종차별과 배제의 냉혹한 손길이 첫돌도 안 된 아기를 짓눌러 죽였다. 명백한 타살이다. 아니, 학살이다. 아기 아버지 쩐안동(“한국 이름은 천안동”)은 “내년 봄 아들의 첫돌에는//한국 사람들처럼/허름한 빌라에 사는 이웃들에게/백설기를 돌리고 싶었”(「피에타」)다고 말한다. 참 가슴 아픈 독백이다. 이 아기와 아버지가 비록 우리의 동족은 아닐지언정 기실 우리 살붙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피부색이나 말투, 식습관이 다르다고 인격적으로 멸시하고 따돌려서는 안 되는, 우리나라 사람이다. 다시는 이처럼 억울한 살인이 저질러지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도 여기에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중 한 사람이므로.
누군가는 이런 죽음이 저 어린이집만의 특수한 사례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시인은 전혀 아니라 말한다. 「나는 얼마입니까?」를 펼쳐보시라. 베트남 노동자 “응웬 두안 썬”(“한국 이름은 원도산”)의 독백투 편지로 쓰인 이 작품도 차마 차분히 읽을 수가 없다. “청주시 오송역 파라곤 센트럴시티 2차 아파트 건설 현장 25층에서 추락”사한 그의 음성이 너무나 또렷하게 들려서 도리어 어지럽다. 겉으로는 안전시설 미비가 불러온 사고사 같지만, 차별의식이 밑에 깔린 참극이었던 것이다. 시 속에 시공사 동양건설사업의 광고 문구가 나오는데, 어이없게도 “Paragon is 당신을 위한 완벽한 주거 명작”이다. 내게는 이 문구가 ‘파라곤은 당신을 위한 완벽한 죽어 명작’으로 들린다. 주거 명작이 되기 위해서는 ‘죽어’ 명작이 아니라, ‘살아’ 명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주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며 민낯이다. 우리 사회는 명백하게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내몰고 있기까지 하다. 한국사회의 밑바닥 노동과 궂은일은 이들이 거의 도맡고 있는데 인권과 노동권, 안전생활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누군가의 도움과 연대가 참으로 절실하다. 바로 여기에, 타자의 고통과 신음에 민감한 김선향의 보살행이 가닿았다.
통상 사람들은 어떤 이가 심한 내상을 입거나 학대당하다가 스러졌을 때 가까이 가길 꺼린다. 불행의 전염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하, 그런데 김선향은 거꾸로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다가든다. 시 「80cm」에서처럼 ‘손바닥에 화인이 찍힐망정 죽은 자의 뺨에 손을 대어보는 것’이다. 대상과의 감응이 동일체 수준이다. 거의 무당 같다고나 할까. 그는 이처럼 행위로써 시의 발견을 이끌어낸다. 시적 정황이나 묘사, 각성 등에 앞서 행위가 먼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게 바로 공감이며 연대이다. 그래서 김선향의 시는 고발의 시라기보다는, 공감과 연대의 시라고 해야 맞다.
김선향은 차별하지 말라고 외치기보다는 왜 차별해서는 안 되는지, 너와 내가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느끼도록 하고자 애쓴다. 일종의 ‘그 사람(혹은 그것) 되기’라고 할까. 바로 그 존재가 되어 한몸의 인격체로서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감정이입과는 구별된다. 그는 연민을 구하는 게 아니다.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여보세요, 이것은 차별입니다’ 하고. 이렇듯 그의 메시지는 분명하나, 그의 시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선회한다. 그래야 차별이 차별로 나아가지 않고 죽음이 살림 쪽으로 몸을 틀게 되는 까닭이다.
‘빛의 혁명’이라 불린 12·3 내란 이후의 광장은 뜨거웠다. ‘내란세력 몰아내자’는 구호와 함께 그곳에서는 한국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폐해가 쏟아져나왔다. 누군가는 호소하고 외쳤으며 누군가는 듣고 응원했다. 쉽사리 드러낼 수 없었던 고통들이 교감과 소통을 통해 공유되었다. 다양하고 다층적인 문제가 일순 해소되는 것 같은 통쾌함마저 떠돌았다. 하지만, 그 많은 논의 속에서 이주노동자와 혼혈인 이야기는 거의 흘러나오지 않았다. 소외자들이 발언할 때조차 이들은 기회를 얻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김선향은 한국사회의 이같은 편견을 참지 못한 것일까. 시 「호구라는 말」을 써서 우리의 구차한 현실을 날렵하게 쥐어박는다.
“선생님, 호구가 뭐예요?/베트남 남학생이 불쑥 묻”자, 짝꿍 우즈베키스탄 여학생이 금세 받아친다. “바보라는 뜻이야!” 학생들은 “한꺼번에 까르르 웃는다”. 호구 잡힌 이들의 비감과 낙담은 여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여학생이 남학생을 바라보며 묻는다/우리 호구할래?” 하고. 학생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성을 내지른다. 김선향은 이제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호구가 밥이고 평화고 사랑이”라고. 한국사회는 이들을 호구로 보지만, 자라나는 학생들은 다르다. 유머와 낙관으로 호구를 벗고 평등사회를 구현한다.
“우리 호구할래?” 이 얼마나 멋진 선포인가. 아마도 김선향은 “세상 사람들이/손가락질을 하거나 말거나” 심지어는 “자기 시체를 밟고서라도”(「나혜석」) 기꺼이 호구를 자임하지 않을까. 혐오와 차별과 배제 없는 사회가 이 땅에 뿌리내릴 때까지. 그러니 김선향의 시여, 오래도록 당당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