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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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정환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 창비 2025

한국 민주주의의 ‘상상계’,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김내훈 金來薰

연세대미디어문화연구박사과정수료

vacuumfx@gmail.com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 1번 명제에는 어느 자동기계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이것은 튀르키예풍 옷차림을 하고 물담배를 문 남자의 상반신 인형이 놓여 있고 그 앞에는 체스판이 설치된 체스 기계인데, 누구를 상대하든 체스게임에서 무조건 승리하도록 설계되었다. 다만 이것은 실제로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가 아니라, 기계 속 빈 공간에 체스 명수 난쟁이가 숨어서 인형을 끈으로 조종하여 체스를 둔 것이었다.

벤야민은 이 자동기계 인형을 “사람들이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유했다. 즉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세속적 이해를 겨냥한 것으로, 어떤 사회적 조건만 갖춰지면 역사는 자동적으로 사회주의의 필연적 승리로 나아가리라 믿는 기계적 역사관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동기계는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벤야민이 말하기를,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자동기계 안에 숨은 난쟁이는 신학이다. 신학이 자동기계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인민의 최종적이고 필연적인 승리를 주어진 것처럼 전제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국가의 반민주적인 통치와 폭정으로 인해 불만과 분노가 누적되면 자연스럽게 인민들이 폭발하여 들고일어나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리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주어지면 자연스럽게 모두 연대하여 봉기하는 메시아적인 순간이 오리라 믿는 세속적 역사 유물론과 다르지 않다. 인민(혹은 이 책의 표현으로 ‘민’)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 새로운 광장을 위한 사회학』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신학에 대응하는 것으로 어떤 상상계를 제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계란 ‘이미지의 저장고’(40면)로서, 한국인이 민주주의에 대해 가지는 표상의 원천이자 독특한 자의식을 형성하는 상상력의 틀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틀에 구속되곤 하지만, 상상계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생산하고 축적해온 표상으로 인해 변형이 가해지기도 하며, 어떤 계기를 통해 새롭게 구성되기도 한다.

저자 김정환에 따르면 한국인이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전거의 실질적 기원은 광주항쟁이다. 광주항쟁은 국가가 민을 상대로, 폭력을 전쟁의 방식으로 행사하여 민의 모습을 인간이 아니라 한낱 짐승, 볼품없고 처참한 고깃덩어리와 같은 존재로 전락시킨 사건이다. 이러한 무기력하고 벌거벗겨지고 처참한 몰골은 선정적으로 전시된다.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받아들여졌던 국가가 살아 있는 몸을 가진 괴물로 나타나고 그에 의해 피 흘리는 민의 추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스펙터클로서의 참상은 앞으로 한국인이 민주주의를 생각할 때 무의식적으로나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원초경과 같은 것이 된다.

그뒤로 한국의 민주주의와 죽음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로 얽힌다.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것이 전시됨으로써 죽음의 이미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억누르는 데 이용되지만, 한국 민주주의 상상계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123면)이다. 저자에 따르면 민은 죽음의 이미지를 매개로 다시 새롭게 구성되고 결집한다. 그 죽음의 이미지는 바로 민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파괴하고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모습이다. 특히 전태일 열사 이래 분신(焚身)은 어떤 결의와 간절한 호소로부터 상상 불가능한 고통의 절규, 신체가 숯덩이로 변하는 과정을 전부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이 전달하는 충격은 여타의 죽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충격은 뭇사람의 마음에 무언가를 강하게 각인하며, 유령처럼 불현듯 산 자들을 방문해 민주주의 정신을 환기시킨다. 산 자들은 유령들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러내서 그들의 힘을 전유하고자”(237면) 하며 산 자의 죄책감을 열정으로 전환시킨다. 이렇듯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 끊임없이 부르고 응답하면서 전개되고 형성된 것이 한국 민주주의와 그것의 상상계다.

이 책에서 묘사된, 한국 민주주의의 독특한 상상계의 형성과 그에 따라 민이 정치 주체로 성장하고 거듭나는 과정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이 정리한 영웅의 여정을 연상케 한다. 일상을 살던 민은 별안간 국가의 폭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을 당하고 주검이 되어 인간성이 말살된 추한 고깃덩어리로서 전시된다. 즉 역경을 맞이하고 모험에의 소명을 받는다. 이 참상을 목격한 또다른 민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심각한 우울과 무력감에 빠진 채 소명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스스로 몸을 파괴하는 결의와 이후 유족들의 투쟁을 통해 죽은 자들은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민의 조력자가 되며, 그에 힘입은 산 자들은 활력을 되찾고 소명에 임한다. 최종적으로 민은 직접 나서서 “집합적 신체를 이루며 결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323면).

저자에 따르면,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는 이같은 서사의 일말의 차이있는 반복이다. 저자가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를, 이 서사가 상상계의 틀로서 자리잡은 만큼 그 틀에 부합하지 않는 사건이나 투쟁은 비가시성의 영역에 머무르기 쉽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건이나 투쟁이 아무리 그 의의가 크다고 하더라도 상징성을 부여할 죽음이 부재하면 ‘누가 죽은 것도 아닌데’라는 반응이 앞서서 저평가되고 금세 망각될 수 있다. 결국 한국인의 상상계에서 민주주의는 일상의 실천, 원칙이 아니라 영화와 같은 사건이자 ‘성스러운’ 경험으로, 선악의 구도가 선명하며 기승전결이 뚜렷한 서사가 된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는 결론부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획득할 수 있는 모험의 보상이 된다.

결국 저자의 성찰은, 이 상상계에서 민은 박근혜와 윤석열을 끌어내릴 수 있는 역량은 충만하되 박근혜와 윤석열을 뽑지 않을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길러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강화나 확장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상상과 감수성이 이제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만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저자는 2008년 촛불집회를 가리켜 “새로운 저항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음에도”(327면) 앞서 말한 서사에 부합하지 않은 탓에 저평가될 수밖에 없었다고 곧장 결론을 내리는데 이 결론이 다소 섣부른 것은 아니냐 하는 약간의 이의제기다. 어찌 됐건 ‘새로운 저항문화의 가능성’에 더 큰 방점이 찍혀야 함이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저자가 말한바 새로운 상상과 감수성의 중요한 한 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발전에 힘입어, 비단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의제나 결의 없이도 개개인이 일상에서 갖고 있던 각자의 요구와 유희가 광장(온·오프라인을 불문하고)에서 마주쳐 어느 순간 거대한 집합적 신체를 이룬 최초의 사건이 2008년 촛불집회일 테다. 따라서 한편의 피의 서사나 극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민주주의라는 상상계의 씨앗은 일찌감치 심어졌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최근의 응원봉 광장으로까지 이어져온 것은 아닐까.

내란사태를 거치면서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는 말이 자주 회자되었다. 저자가 말하듯 “한국의 민주주의는 정치학이나 법학만으로는 온전히 다룰 수 없는, 종교와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것”(240면)이 있는바,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는 바로 이 측면에서 앞의 명제를 해석학적으로 입증한다. 벤야민이 말한, 난쟁이가 기계에 부여하는 활력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윤석열이라는 ‘빌런’을 해치운 이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 새로운 활로를 여는 책이다.

김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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