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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최나현 외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평등세상을 꿈꾼, 끝나지 않은 광장의 기록

 

 

석민주 金峻亨

활동명하길,20대청년,한의사

dollsuks1@gmail.com

 

 

 

광장식 자기소개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20대 비정규직 노동자 아무개입니다’(이름은 꼭 자신의 실명이 아니어도 좋다. 아니, 아예 익명이어도 좋다)와 같은 식으로. 직업이나 거주지 등 기존의 사회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사람들 앞에서 소개하는 방식이다. 일년 중 가장 춥다는 2024년 12월 21일 동지의 밤부터 다음 날까지, 추위가 매서운 남태령에서 서로에게 의지하여 버텨낸 현장에서 피어난 독특한 문화인 것으로 기억한다. 이 소개대로라면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지방 출신 오타쿠 20대 여성’인 나는 매주 토요일 비상행동 집회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담긴 깃발을 들고 나갔다.

최나현·양소영·김세희 세명의 필자가 광장에 참여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책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에는 광장식 자기소개로 하자면 고졸 노동자, 트랜스젠더, ‘술집 여자’, 청소년, 오타쿠 교사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2030 여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고, 페미니스트이고, 윤석열 탄핵광장에 자주 참여한 이들이라는 것.

제각기 다른 인터뷰이들의 ‘정보’가 아닌 ‘동기’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아주 똑똑한 인터뷰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령 어떤 마음으로 광장에 나섰고 무엇을 느꼈는지, 보수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대구에서 피켓을 들고 나간 마음은 무엇이었는지, 윤석열 탄핵광장 말고도 한화빌딩 앞의 무지개 조선소에 함께한 이유는 무엇인지, 투표권 없는 청소년으로 시국선언을 한 결심이 무엇인지 등등 각자가 이 광장에서 했던 일과 이들의 마음에 주목한다.

2024년 12월 3일의 계엄령을 계기로 전개된 현장이다보니 윤석열 탄핵광장의 이야기가 가장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건 당연한 이야기. 그중에서도 이 책은 사람들이 많이 주목한 서울의 집회가 아니라 지역의 여성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집회는 전국에서 있었다. 그런데 이미 서울의 집회는 많은 주목을 받았으니,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터뷰이를 전원 지역 출신으로 선정한 것이 매우 현명했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이들을 인터뷰한 이 책의 저자들도 부산에 살고 있다!). 또 이 책은 학자나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아니라 다양하고 ‘평범’한 이들을 주목한다.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거통고)의 투쟁이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동덕여대의 투쟁 이야기도 녹아 있다. 이 모든 투쟁이 우리의 광장이었다고 느꼈기에 반가웠고, 또 하나의 기록으로 남겠다 싶어 안도했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지점이 아마도 트랜스젠더 관련 의제와 성노동 의제일 것이다. 이 책은 ‘예민한’ 두 주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한다. 특히 엑스(구 트위터)에서 어느 ‘술집 여성’ 김유진씨의 부산집회 자유발언이 크게 화제가 되었기에, 이분의 인터뷰를 읽으며 무척 반가웠다. 유진씨 말마따나 가장 욕먹기 쉬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용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화답받았을 때 나 역시 어떠한 희망을 보았던 것 같다. 그가 트랜스젠더를 배척하는 여자애와 ‘키보드 배틀’을 뜨다가 우연히 공통점을 발견하고 친해져서 어려울 때 서로를 돕는 사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마음을 울렸다(200면). 혐오는 무지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일 수는 없다”(183면)는 말처럼, 성노동자라고 손가락질하고 낙인찍기 전에, 트랜스젠더가 여성혐오를 공고히 한다고 사실과 다른 비난을 하기 전에, 그들도 같은 사람이라는 근본적인 지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혹자는 탄핵광장을 두고 오가던 말처럼 윤석열 탄핵, 국민의힘 해체, 검찰개혁 등등의 의제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광장에는 평등수칙이라는 것이 존재했으며, 서두에 언급한 광장식 자기소개를 통해 소수자인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며 탄핵 이후의 평등세상을 말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이런 이야기를 지워버린다면 모두가 함께 만든 광장을 취사선택해 이해하는 것 아닐까.

학술서가 아니라 생생한 입말로 쓰인 이 책에는 연단에 서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말투가 주는 어떤 권위와 설득력은 없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듯 편하게 말하는 진솔함이 주는 설득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 담긴 의지는 ‘콘크리트를 부수듯’ 강하고 단단하다. 담고 있는 주제들도 절대 가볍지 않아서 그 이질감에 불편함이 느껴질 수 있다. 이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광장에 나온 여성들이 원하던 변화이니까. 한번 각성한 시민이라면 그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다(186면). 광장에 나와 함께 각성한 사람들에게는 회고록으로, 함께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겐 그 광장의 증언록으로 다가올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값진 경험이다. 이 책에 등장한 열세명 모두가 처음부터 대단한 사명감이 있어서 광장으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남태령에 가는 친구가 걱정되어서, 숙소에서 가까워서, 국회에 가려는 동생을 혼자 둘 수 없어서, 그렇게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고 간 광장에서 이들은 혼자가 아님을 몸소 경험했고, 누구보다도 용감한 현장의 사람들이 되었다.

여전히 장애인들은 지하철 한번 타기 어렵고, 성소수자들은 정체성을 드러내면 욕을 듣고, 고공에는 아직도 두명의 노동자가 있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그 겨울, 광장에 있었다. 노동자도 농민도 여성도 성소수자도 장애인도 청년도 빈민도 더이상 빼앗기지 않고 억압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은 현재진행형이다.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광장에 다시 사람들이 모일 때, 이 책의 열세명이 내민 손을 잡고 광장으로 향하길 바란다. 우리도 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식되고, 정치에 우리의 목소리가 담길 때까지 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