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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백민정 『정약용의 정치사상』, 이학사 2025
정약용에게 공공성을 묻다
홍해뜸
연세대국학연구원학술연구교수
haeddemtoy@naver.com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 관한 연구는 오랜 시간에 걸쳐 풍부하게 축적되어왔다. 정치·경제·사상·법률·행정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진 지금, 정약용을 다시 읽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금 필요한 것은 정약용을 다시 읽는 문제의식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백민정의 『정약용의 정치사상: 유교 문명론과 조선 정치의 구상』은 정약용의 사유를 오랜 시간에 걸쳐 치밀하게 추적해온 저자가 ‘문명’과 ‘정치’라는 두 축으로 그의 정치사상을 풀어낸 시도다. 『정약용의 철학』(이학사 2007)에 이은 저자의 두번째 정약용 연구서로, 긴 시간 연마해온 저자의 철학적·역사적 통찰을 온전히 따라가기란 쉽지 않지만, 그만큼 정약용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정약용의 방대한 사유를 따라가며 그가 구상한 문명과 이를 실현할 정치구조를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정치가 정치다우려면 무엇이 뒷받침되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이 질문은 정약용이 살았던 조선 후기에만 통용되지 않는다. 2025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오늘의 정치는 선거와 정치인이 행사하는 권한으로 대체되었고 정치의 공공성은 효율성과 권력 유지의 논리에 밀려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정약용이 생각한 바람직한 정치상과 이루고자 한 문명론은 우리에게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정약용을 세 층위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1부 ‘유교 문명론과 다산의 정치의식’에서는 정약용의 정치사상을 철학적 관점에서 조망한다. 1부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인 ‘문명’과 ‘정치의 공공성’은 이 책 전체에 걸친 사유의 뿌리이자 핵심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중국 삼대(三代,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시기)의 이상정치를 보편문명으로 이해하고, 이를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저자는 당시 민족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그가 동인(東人)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했으며 그러한 자의식 속에서 유교적 이상사회를 추구했음을 밝힌다. 이어서 저자는 정약용이 구상한 정치가 어떤 근거 위에서 정당화되는지를 탐색하면서 정치권력이 지녀야 할 공공성에 주목한다. 저자는 정약용이 ‘공(公)’의 근거를 상제·천신·인귀로 구성된 초월적 세계의 주재자인 상제의 명령에서 찾고, 위정자를 상제의 선택과 민심의 추대를 통해 공적 질서를 구현하는 존재로 파악했다고 본다. 특히 정약용이 백성의 원욕을 천명의 표현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자가 위정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정약용은 상제의 주재가 인위적 간섭이나 명령이 아니라, 도심(道心)을 통해 그 뜻을 이해하고 일상적 교제 속에서 사친(事親)·사인(事人)하며 사천(事天)하는, 즉 부모를 섬기고 사람을 섬기며 하늘을 섬기는 세속의 인륜적 노력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실천은 효제(孝悌)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의 구현으로 이어지며, 제사 또한 공덕을 확충하는 자발적 정치행위로 자리매김한다. 저자는 이처럼 정약용이 재구성한 상제-귀신론이 형이상학에 머무르지 않고 세속정치의 윤리적 성장과 공공성을 뒷받침하는 정치사상으로 작동한다고 평가한다.
2부 ‘조선의 국가 운영론’에서는 정약용의 정치철학이 실제 국가제도와 지방통치의 구상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유교문명을 조선식으로 구현하기 위한 국가제도의 설계와 행위 주체의 실천적 역할을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2부 1장에서는 정약용의 『주례(周禮)』 해석과 그 복원을 통한 새로운 국가 구상의 내용을, 중앙정부 조직부터 신분제 구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정약용이 말한 군주의 강력한 유위(有爲) 정치나 군주와 사족의 책임 등을 행위주체의 실천성으로 새롭게 조명한다. 또한 『목민심서』를 중심으로 정약용의 지방운영 구상과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향촌질서를 추적한다. 특히 저자는 『목민심서』에 담긴 ‘예치’와 ‘인륜’의 핵심인 효제의 확장을 강조하고 정치주체로서의 민의 자발적 참여와 능동성을 함께 조명하고 있다.
3부 ‘예와 법, 인륜의 변주’에서는 앞선 1·2부에서 제시된 정약용의 핵심 정치논리 중 하나인 예치질서가, 형법서인 『흠흠신서(欽欽新書)』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추적한다. 저자는 정약용 정치사상의 핵심을 ‘효제자(孝悌慈)의 확장’으로 보고, 법 또한 이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한다. 『흠흠신서』의 판례 분석을 통해, 자칫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정약용의 판결원칙을 효제자에 기반한 인륜질서의 수립,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예제(禮制)질서로 해석한다. 또한 3부 3장에서는 여성 관련 판례를 중심으로 정약용의 여성관을 살펴보는데, 정약용이 여성의 생존과 삶의 가치를 일정 부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가부장적 가족질서를 유지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평가도 눈에 띈다.
이 책은 정약용의 사유를 새롭게 구조화하는 한편, 현대적 의미에 대한 열린 질문과 성찰을 던지고 있다. 다만 몇가지 논의가 더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두 저작 사이의 논리적 연결이 드러났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 책은 『경세유표』의 국가제도 개혁안과 『목민심서』의 지방운영 구상을 함께 분석하면서도, 두 저작이 서로 어떤 구체적인 논리와 맥락에서 연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두 저작이 정약용 사상의 다른 층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운영이라는 하나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연속적 기획이라는 점을 더 부각했더라면, 정약용 정치사상의 구성원리를 더욱 선명하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공성’을 정약용 사유의 핵심 가치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저자는 정약용의 철학과 제도 구상, 법리 논리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원리로서 효제자의 실천을 통한 공공성의 구성에 주목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서구 근대적 ‘정치 이론’에 대한 보완이 아니라, 정약용을 매개로 한 ‘21세기의 정치 사유’에 대한 성찰로 읽힌다. 그래서 저자가 강조하는 ‘정치의 공공성’ 개념이 현대사회의 정치 담론에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더 이루어졌으면 어땠을까 싶다. 예컨대 저자는 정약용의 예치·예교 등 차등적 예제질서를 논평하는데, 정약용이 강조한 효제자의 실천과 예치는 단순한 위계적 질서가 아니라 실천과 책임에 근거한 질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이 있다. 오늘날 평등의 감각 속에서 이러한 차등의 원리가 어떻게 재해석될 수 있을지 앞으로 우리가 열어두고 논의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평화공동체에 대한 정약용의 사유는 책의 「맺음말」에서 중요한 메시지로 다시 제시된다. 특히 1부 1장에서 제시된 유교 문명론과 함께 평화공동체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다. 다산이 꿈꾼 유교 문명론에 입각한 평화공동체는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동아시아 이민족이 공존하는 질서를 상상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 현실을 반영하는 어떠한 방식의 문명 담론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이 조선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정약용을 읽는 철학자의 시선에서 출발하는 만큼, 21세기 현실정치에 온전히 적용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강조하는 공공성과 정치주체의 실천성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하며, 독자로 하여금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의 정약용 연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의미있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